강남-누가복음 23장 34절 (위반의 선) 240702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3장 34절 (위반의 선) 240702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3장 30절부터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는데 앞에 보면 29절에 보면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차라리 낳지 않는 것이 복이 될 정도로 이 세상의 그 진상이 다 드러날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면서 이 말씀은 언제 하느냐 하면은 지금 체포되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거죠. 예수님이 체포된 이유를 예수님이 먼저 그걸 제시를 해요. 내가 체포된 이유, 예수님의 제시된 그 이유가 뭐냐. 나는 세상을 파괴하겠다. 세상을 파괴하러 오신 분이에요. 다 부수러 오신 거예요. 세상이 파괴되면 거기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어떻게 돼요? 죽지요. 그러니까 차라리 죽는 게 복이 있다.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을 때까지 나의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일은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인간 세계를 없애러 왔다.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다 죽을 때까지 주님의 일은 중지되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게 이 세상을 다 파괴하는 방식은 뭐냐? 파괴하는 방식은 바로 선이예요. 선. 경계선. 경계선을 쉬운 말로 댐이라고 해요. dam. 여기 저수지 댐이 있는데 물이 가득 있어요. 밑에 아랫마을이 있습니다. 물의 댐을 터트리면 어떻게 돼요? 몰살하겠지요. 몰살. 댐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이 댐 안에 있는 것이 이게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한 거룩을 예수님이 죽으시고 깨뜨리면 이 거룩이 쏟아져서 이들은 저주받습니다. 산들이 무너지고 그 저주가 너무나 처참해서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복이 될 정도로 크게 다행이 될 정도로 쏟아지게 되어있다. 방금 이야기한 내용이 다 모아져서 뭐를 이루느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을 이룹니다. 십자가 사건을 형성한다. 사건 형성. 그럼 예를 들면 제사장 복장이 굉장히 거룩한 것으로 복장이 되어있지요. 그 복장에 보면 하나님께 성결, 거룩으로 덕지덕지 붙어 있잖아요. 그게 제사장의 연약함 때문에 이스라엘에 쏟아진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겠어요? 몰살하겠지요. 그 거룩에 의해서.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겁니다. 거룩이 화근이에요. 거룩한 율법을 받은 게 화근이고 거룩한 제사장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화근입니다. 훈장처럼 걸쳐있는 거룩이 밑으로 뚝 떨어지면 그것이 심판하는 전쟁이 되버리고 마는 겁니다.
예수님 자체가 거룩한 제사장인데 여기 23장 45절에 보면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댐이 중간에 터지는 거예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게 되면 우리가 들어간다 가 아니라 거룩이 이쪽에 쳐들어온다 이렇게 돼요. 거룩이 쳐들어오지요. 그러면 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44절에 “때가 제 육시쯤 되어” 12시쯤 된 거죠. 해가 항상 빛이 빛나야 될 그 시점에 해가 빛을 잃어버렸죠. 무엇이 해로 하여금 빛이 나는 것을 무색하게 만듭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서 제일 빛나는 물건 사물이 태양이죠. 태양도 그 심판과 저주 앞에서 빛을 잃어버려요. 그 정도로 무서운 저주요 무서운 심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람이 사람 구실만 하면 되잖아 이게 성사가 성립이 안돼요. 지금 우리의 초점은 이 댐에 있어요. 댐. 제사장이 7월 10일 날 거룩한 복장을 하고 희생의 피를 가지고 그들이 1년에 한 번씩 제사장이 지성소에 가서 하나님 만나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근이 죄 용서함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거예요. 유지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러한 시간이 되풀이 된다는 말은 제사장이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기 때문에. 그 제사장이 죽으면 누가 합니까? 늙어 죽으면 아들이 제사장하고 그랬어요. 그 되풀이 되는 그 이어짐을 끊어버리고 단번으로 오신분이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한 거예요. 단번이라고 하는 것은 연약하지 않고 온전한 댐이라는 뜻이거든요. 온전하게 댐을 막았는데 댐을 누가 붕괴시킵니까? 인간들이 댐을 붕괴시키니까 쏟아진 거룩이 어떻게 돼요? 그대로 인간세계에 다 쏟아지지요.
그래서 36절에서 43절까지 그 내용은 뭐냐 하면은 딱 차이가 나요. 어떤 차이냐 하면은 여기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당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를 구원하라. 나를 구원하라는 말은 내가 현재 있는 세계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구원,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복 받는 복된 세계죠. 복된 세계로 만들어 달라 라는 쪽으로 요구를 해요. 여기 35절에 보면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도 구원하라. 여기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장소가 구원되고 난 뒤의 장소가 우리 인간들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그 세계로 네가 오게 해봐라 이런 뜻이에요. 인간들의 생각은 이겁니다. 현재 내가 건재하고 있는 이 세계, 이 세계 너머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낙원이 있고 천국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 세계 너머에. 이 세상과 이 너머의 세상에는 뭐가 있다? 연속성을 갖고 있다. 이 세상도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유대 민족을 지켜준 것처럼 오는 세상, 죽고 난 뒤의 세계도 하나님께서 우리 세계를 지켜준 것처럼 지켜주기를 바란다. 이게 그들이 말하는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구원. 구원은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세계를 유지해주는 거예요. 인간의 희망과 기대와 포부를 만족시켜주는 그 상태를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37절에 보면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우리가 아는 그 구원을 목격하게 해 달라.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을 목격하게 해 달라. 그런데 42절에 보면 강도가 뭐라고 합니까? 강도가 말하는 구원은 뭡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댐을 터뜨려 거룩으로 인간들을 전부 다 몰살해버리는 거예요.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죽이시는 그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 우리 인간을 죽이신 그 예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강도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강도로서 사형당하는 이것이 세상의 판결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일이 되게 하옵소서 이런 뜻이에요. 주님의 일에 의해서 내가 십자가에 달리게 하옵소서 이런 뜻이란 말이죠. 믿음 얼마나 좋아요. 더 쉽게 말해서 죽음의 뜻에 의해서 브레이크를 안 밟아서 9명 죽게 하옵소서. 시청 앞에 있는 9명 죽게 하옵소서. 과장급들 9명 죽게 하옵소서. 은행직원들. 지금 죽고 난 뒤에 밑에 부하들 좋아서 난리에요. 자리 비니까 승진하겠다. 과장급들 9명 죽었으니까. 그게 무슨 큰 사건이라고 하는데 큰 사건이 아니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벌써 진즉에 인간들은 벌써 죽었어요. 모든 인간이. 왜? 주님의 나라를 생각을 못하고 자기 살 궁리를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몰살의 대상이라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내가 심판의 대상, 비거룩이고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형벌과 저주를 받아야 될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어요. 생각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천국을 생각하면 천국이 천국이겠습니까? 아니지요. 구원을 생각하면 구원이 아니지요. 자기는 멀쩡한 채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강도는 내가 멀쩡하지 않게 된 것이 주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강도 하나가 말하기를 39절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메시아라면 우리를 구원하라” 계속 지금 구원, 구원 말이 계속 나오는 이유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굳건하게 유지하고 그 세계가 견고하게 해 달라 이 말이에요. 죽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 메시아의 나라의 계속 일원이 되게 해 달라 지금 그 이야기입니다. 자기 세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없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목사가 무슨 설교하든 간에 교인들도 문제에요. 교인들이 내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고 목사 설교를 안 들어요. 괜찮아진 나를 더욱 더 괜찮게 변화시키는데 거기에다가 구원이라는 말을 집어넣고 우리를 당신의 그 복음적 설교로 우리를 구원해 달라. 거기에 대한 돌아오는 답변은 뭐에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구원을 해줘 네가 뭔데. 너는 왜 차이를 몰라. 예수님과 너와의 차이를 왜 모르는 거야. 이렇게 핀잔을 실컷 들을 겁니다. 근원적으로 인간의 문제점이 뭐냐? 그 문제점이 3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34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더라.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이걸 더 깊이 내려가면 이런 뜻이에요. 그들은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근원적으로 인간 속에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이 행한 것,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그들은 빨리 훅 지나가기를 원하고 잊혀지기를 원합니다. 왜냐 하면은 나는 나를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는 나를 안다. 나는 나를 대충 안다. 완전치는 않지만 대충 안다. 대충 안다는 것은 현재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은 오케이. 약간 미지로 남아있는 것은 예수님으로 채우겠다. 이게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이게 결합이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지금 이것까지는 내가 아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이걸 채우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냐. 너희들이 나를 알려고 하지를 않는다. 왜냐 하면은 예수님의 말 딱 들어보고 그들은 예수님을 기피했습니다. 거부했습니다. 왜냐 하면은 예수님은 이 세상을 유지하고 건설적으로 세우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합니까? 말살해요. 말살. 파괴 또는 말살.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아까 29절 30절 다 보셨지요. 산들이 와서 다 엎어버린다는 말은 눌려터져버리는 거예요.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약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처음부터 살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 사실을 인간은 알고 싶지를 않아요. 나는 처음부터 살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꽉 쥐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주께서 너는 애초부터 살면 안돼 라는 예수님에 대해서 기피하게 되는 겁니다. 거부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죽임으로서 인간이 없는 인간을 생산하고자 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댐을 무너뜨릴 때 거룩이 쏟아져서 다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의 그 거룩한 세계로 주님께서는 귀환해버려요. 귀환해버리면 다 죽은 상태에서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성도가 생산됩니다. 만들어집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몸을 근거로 해서.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겨 그런 사람을 생산해내요.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 무엇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고? 나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아요. 왜냐? 예수님이 이미 언지를 줬거든요. 너는 아나마나 상관없이 너는 진멸의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는 알고 안 알고가 우리한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것을 충분히 이용하시죠. 그렇게 이용하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이지 아니하면 안 되게 만들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못 견디게 만들어요. 뭘 이용해서? 예수님과 화합할 수 있는 어떤 요소를 끄집어내려고 끝까지 기다리고 있고 들어보려고 했고 분석하고 파악하려고 하고 연구하고 탐구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만은 오히려 그런 행동이 주님 보기에 네가 나를 알고자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나를 알지 않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어떤 정신적으로 혼란한 사람, 자신의 무의식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 의식은 알겠는데 무의식이 있다는데 그 무의식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정신 분석가한테 찾아왔다고 봅시다. 이 무의식은 누구 것이죠? 남의 무의식입니까? 자기 무의식이죠. 자기 무의식을 알고 싶어 온 사람한테 정신분석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겁니다. 당신은 진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답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은 이 사람이 진리를 알려면 뭐를 떼어버려야 하면은 자기를 떼어버려야 해요. 자기를. 자기를 떼어버리면 자기 무의식도 이것도 자기가 알고자 하는 것도 포기를 해줘야 해요.
그러면 이걸 포기했을 때 그들이 아는 진리, 무의식이라는 진리는 뭐냐 하면은 본인이 알았던 의미 있다, 나에게 의미 있다가 날아가 버리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는 무의미의 말이 진리 쪽에서 계속 쏟아져 나온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이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나와 상관있는 말을 좀 해줘. 나 당신이 하는 말이 나는 하나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어. 왜? 나랑 상관이 없으니까. 그럼 상담가는 뭐라고 합니까? 당신과 관련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당신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당신의 본심을 지금 폭로하고 있는 거예요. 나의 무의식을 알고 싶은 목적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하나의 주체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상담가가 공격하는 것은 주체자 포기하라는 거예요. 포기하라니까 포기를 못해요. 뭐를 포기 못하는가? 이 자아, ‘나’가 상실되는 것을 용납이 안돼요. 당신 아니면 다른 목사 없나 이렇게 되는 거죠. 하여튼 목사만 찾아다녀. 자아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아를 포기한 상태에서 주체라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나는 진리에 대해서 못 넘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식이 되어버려요. 당신 솔직하게 말해봐. 당신 진리에 관심 없지. 당신 자신에게 관심 있지. 그렇지? 그러니까 여기 진리가 하는 말이 당신한테는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보탬도 안 되는 무의미한 말로 받아진다는 것은 이미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기 위주의 의미가 체계를 자아라는 이름으로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얼추 나에 대해서는 알지만 조금 2% 부족한 것 한번 채우기 위해서 목사님 한번 찾아가볼까? 이런 식이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잘 오셨습니다. 이거 보충해드릴께요. 영양제 보충하는 겁니까? 하루 세 끼 잘 드시고 여기 영양제까지 보충하시면 책임집니다. 영양제 보충 소용없어요. 인간은 자기 문제 자기에게 의미 있는 것 외에는 다 무의미한 거예요. 하나 예를 들게요. 너구리 라면 있지요. 너구리 라면에 다시마 있잖아요. 그 다시마 먹어야 돼요? 버려야 돼요? 먹으라고 있는 겁니까? 버리라고 있는 겁니까? 맛만 내라고 있는 거예요? 국물 내라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이런 식이에요. 먹든 버리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 바로 그 점이에요. 인간은 자기 구원에 환장해있어요. 주님의 안목은 전혀 모릅니다. 자기 안목 고집하면서 주님 찾아간 거예요. 뭔가 도움 될까 싶어서. 예수님이 계속 폭로한 것은 너희들은 실상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 자아의 방어체제가 그렇게 견고해요. 그래서 인간의 자아는 뭐냐? 의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어느 설교에서는 사적 의미라고 했지요.
자, 여기서 문제는 이 의미가 어디서 주어진 것이냐? 의미가. 이것은 사회 체제, 사회 서열과 계층, 계급에서 의미가 주어진 겁니다. 주변 사회에서 의미가 주어진 거예요. 11살 먹은 소녀가 해수욕장에서 자기 동생하고 놀다가 자기 동생이 신발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니까 11살 먹은 누나가 동생 신발 찾는 다고 해변에서 저 멀리 떨어져서 저 멀리 바다 깊숙한 데까지 갔습니다. 자, 그러면 동생에게 그 신발은 어떤 의미입니까? 동생 입장에서. 한 8살 먹은 아이에게 신발은 무슨 의미죠? 자기와 한 몸이죠. 한 몸. 사물이 아니고 사물과 자기 몸이 일체화된 거죠. 동질화된 거죠.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의미에요. 의미. 신발 없으면 못 살아요 동생은. 몇 년 동안 좋다고 신던 신발이 없으면 이거는 부모가 야 신발 또 사줄게 해도 신발 신은 나의 의미에 흠집이 생기기 때문에 신발 없는 나는 내가 아니므니다. 내가 아니올시다. 그 동생의 마음을 아는 11살 누나가 그냥 신발만 보고 가는데 일본까지 가요. 바다에 헤엄쳐서 도저히 건널 수가 없는 거예요. 낚시 배가 그 애를 건졌어요. 왜 먼 바다까지 나왔느냐. 동생 신발 찾으러 여기까지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인간입니다. 인간의 일상의 삶이에요. 일상의 삶. 너구리에 다시마 그거는 관계없어도 신발은 중요해요. 나에게 중요한 게 있어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그거 없이는 못 살아요. 그거 없이 못 살아.
주님의 뜻은 뭐냐? 살지 마라. 이게 주의 뜻이에요. 그 의미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나 신발 없이는 못 살아. 주님께서는 같이 죽어. 신발하고 너하고 죽여줄게. 거룩의 이름으로 죽여줄게. 이게 예수님의 말씀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해요? 예수님을 죽여야 뭐가 있어요? 사회체제가 유지가 되겠지요. 사회체제가 유지가 될 때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내가 그 사회에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뭐가 지켜지죠? 나의 의미가 지켜지죠. 나의 의미가. 나의 의미는요 나를 둘러싼 신발이죠. 나중에 더 크게 되면 신발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돈. 내 직장, 가족.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이게 전부 다 나한테 신발 같은 거예요. 그 의미, 그 층층의 의미들이 모여서 사회가 되는 겁니다. 이 사회가 하나님의 은총과 복으로 그저 잘 되가지고 그 속에 사는 나의 의미가 나의 소원대로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이게 인간 사는 거예요 이게. 그런데 오늘 본문 30절에서 산들이 와서 무너진다는 거예요. 이 사회를 완전히 싸그리 전부 다 무너지게 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체포되어 잡혀가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너희 딸들을 위해서 울어라. 누굴 위해서 울어야 할지 분간도 못하고 있어요. 제자들은 그만큼 똑똑하느냐?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예수님의 말귀를 알아먹었느냐? 못 알아먹었어요.
55절에 봅시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향품과 향유.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추모기능이에요. 죽은 자를 추모한다는 말은 기존의 의미에 연속, 연장에서 나온 겁니다. 추모기능은 이것은 거짓입니다. 추모기능 해놓고 시체 보러 가니까 어?! 추모대상 자체가 없어져버렸어요. 예수님이 없어진 거예요. 예수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너희들 이 땅에서 없어져야 돼. 내가 없어지게 해줄께. 너희들도 나처럼 되게 해줄게. 이 세상 자체에서 무덤 속에서 시신이 없어지는 것처럼 내가 너희 시신을 없애줄게. 그러니까 너는 너 자신의 의미를 고집부리지마. 신발은 바다에 던져버리고 신발만 던지면 안 되겠지요. 너도 바다에 던져버려. 예수님에 대해서 운다? 주께서 하는 말은 뭐겠어요? 울어?! 너 뭘 알고 울어? 나하고 헤어지는 게 그게 섭섭해서 우는 거야? 우는 너희들을 내가 죽여줄게. 됐냐? 울음 그치게. 운다는 말은 죽은 자는 안타깝다는 의미잖아요. 아직도 추모의 의미를 아직도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말씀을 보면 근원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몰라요. 모르고 그 모르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합니다. 그게 뭐냐? 차이에요. 차이.
주님께서는 차이를 계속 유지시켜 줍니다. 그 차이를. 차이에 대해서 좋은 예가 뭐냐 하면은 지평선이에요. 지평선. 이상하게 같은 지표면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따라잡을 수가 없네요. 지평선이 그렇지요? 한 발자국 나아가면 한 발자국 멀어지고. 백지영 노래에 나오지요. 한 발짝 다가가면 한 발짝 멀어지는 거예요. 또 거리를 그 차이를 좁힐 수가 없어요. 실제로 자연세계에서 빛의 속도가 그래요. 빛의 속도가. 세상의 사람들은 빛의 속도가 무한하다고 여겼어요. 무한하고 절대적이라고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갈리레오 갈릴레이가 제자하고 둘이 높은 산에 가가지고 밤중에 둘 다 등불 들고 비췄어요. 너 비추고 나 비추고 서로 빛이 왔다갔다 할 때 시간이 너 비췄을 때 나 비췄을 때 얼마나 차이나나 보자. 아무리해도 차이가 안 나네요. 차이가 안나요. 빛의 속도가 무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이가 안나요. 그런데 지금은 달하고 지구에다가 거울을 세 개 해가지고 지구에서 빛을 비추고 되돌아옵니다. 하는데 2.6초 차이가 나요. 그래서 현재 천문학에서는 지구과 달 사이를 mm단위로 매일같이 측정해요. mm단위로. 왕복 2.6이이요. 그러니까 1.3초. 지구와 달 거리가 30만km 좀 더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빛의 속도가 무한하게 아니고 1초에 30만km의 유한한 거죠. 유한한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유한하면 따라 잡을 수 있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주선 세대를 날립니다. 여기 우주선, 여기도 우주선, 우주선 있을 때 빛이니까 광자 앞에 달리면 광자는 30만km에요. 이 우주선은 1초에 15만km, 1초에 10만, 1초에 5만 이렇게 간다면 30만km를 따라갈 때에 여기서 보게 되면 15만km이게 얼마나 보이겠어요. 30만인데 15만 따라 붙이니까 얼마나 보이겠어요. 15km속도로 가는 것처럼 보여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쪽에서 봐도 30만이고 이쪽에서 봐도 30만이고 이쪽에서 봐도 30만이고 그냥 정지해도 30만이에요. 빛의 속도가. 왠 일이야 도대체 이게 무슨 이런 조화가 있냐. 과학자는 이렇게 하고 끝나면 안돼요. 이 이유를 밝혀줘야 돼요. 왜 이런지.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잡아도 25만km같아도 그 앞에서는 30만km에요. 꼭 유령 같애 빛이. 꼭 귀신같아요. 사실은 예수님 같아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 세계하고 인간의 세계가 달라서 그래요. 인간의 세계. 인간의 세계라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안 받아요. 안 받는 분이 인간 세계에 와버리니까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생각 안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고 예수님에 대해서 평가할 생각만 하는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평가할 생각만 해요. 본인들이 인간 세계에서 아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인간 세계 너머 하늘나라를 인간 세계, 이 시공간 세계를 염두에 두고 하늘나라를 그들이 구상을 한 겁니다. 그러나 실제 하늘나라에서 오신 예수님은 이러한 개념 자체를 저주해버리고 더럽다고 거룩으로 심판해버리는 안목으로 주님께서는 말씀을 해버린 거예요. 이게 의미가 없다고요. 과학적으로 차이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여기 좌표라는 게 있거든요. 평면에 좌표. x축 y축. x가 15 y가 7. 하나의 좌표가 정해진다. 이걸 가지고 좌표계라고 하고 숫자 7, 15에 해당되는 것 15, 7에 딱 만나진다 이게 인간 세계의 좌표계입니다. 좌표계인데 이것을 y축을 이걸 시간으로 바꿔요. x를 공간으로 바꿔버려요. 그러면 광자가 30만km로 움직여나갈 때 평지 있는 사람은 30만km 가고 이쪽에 비행선이 15만km로 따라간다 합시다. 우리 보기에는 30만이고 15만이니까 차이가 15밖에 안 나는데 이 이유를 설명해야 돼요. 왜 이게 30만으로 보이는가. 인간이 볼 때는 좌표축이 이렇게 됐잖아요. 그러나 이쪽에서 보면 공간으로 보면 이렇게 돼요. 나란히 볼 수 있지만 우주선의 입장에서는 뭐냐? 빛의 속도에서 시간이 정해져버리면 시간도 휘어진 동시에 공간도 휘어져서 공간 휘어진 이 선과 평행해서 광자를 보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밑에서 보게 되면 광자라는 것이 현재에 속했다고 보지만 이쪽에서 보면 미래에 속한 거죠. 현재로선 미래에 보이지만 15만에서는 이게 현재의 평행선 이것과 평행된 이 안에서의 광자에요. 광자니까 미래에 아직 도달하지 않는 광자로서 계속 지평선에 남아있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이 축 자체가 이게 인간의 움직임 자체가 좌표계가 바뀌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성령 받았잖아요. 성령 받은 예수님이 세상을 볼 때에 성령 없는 인간들이 보는 것과 이 시공간 전체가 같지를 않아요. 같지를 않으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아무리 따라잡아도 이게 거룩이라는 차이가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다가가면 멀어지는 거예요. 다가가면. 지구가 둥그니까 쫓아가면 그 지점에 도달할 수 있어요. 지구에 지평선 생긴 이유가 뭡니까? 이거는 무한한 게 아니고 둥글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에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예수님의 경우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 미래가 예수님한테는 현재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 축에서는. 예수님의 좌표계에서는. 예수님 분명히 유한한데 그 내용은 무한해요. 그리고 예수님한테는 착하든 악하든 상관없이 예수님한테는 다 죄인입니다.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착하게 살아도 그 때 그 죄인이고 더 죄 지어도 그때 죄인이고 달라질 건 없어요. 아무것도 안 달라집니다 주님한테는. 왜? 인간은 죽어야 될 대상이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이걸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위반의 선이에요.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좌표를 위반해버려요. 왜 위반했느냐 하면은 인간은 의미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의미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까 한 것처럼 인간들은 무엇이 돈독하다? 그 사회가 돈독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이유가 네가 뭔데 이 세상 질서와 제도 조직체를 한방에 무너뜨리려고 하느냐 그게 기분 나빠서 예수님을 살해하려고 한 거예요. 유대민족은 그냥 유구한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율법과 말씀으로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잖아요. 하나님이 함께 있는 거룩한 역사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유대민족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 네가 뭔데 이걸 한 방에 부숴버릴 때 그동안 유대민족이 살았던 그 의미 그리고 소망 기대 앞으로 잘 될 것이란 희망 메시아의 고대 하나님 사랑 이게 어떻게 됩니까? 그게 의미였잖아요. 그 의미 때문에 유대민족은 그나마 결속되어 살아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이 나라를 어떻게 한다? 묵사발 만들어버리면 당하느니 어떻게 해요? 죽여야지요. 당하느니. 만약에 예수님을 안 죽이면 어떻게 돼요? 우리는 그동안 수립했던 사회가 전부 다 무의미한 저주받은 사회가 돼요. 이거는 그 안에 우리 자신도 포함되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위반의 선을 넘어서 유대민족이 갖고 있던 성경 해석을 공격, 일부러 의도적으로 그들의 판단기준에 위반해서 넘어가는 것은 너희들이 언약을 깨었다는 것을 내가 너희들의 기준의 언약 위반자로 나서서 알려주겠다는 거예요. 계약은 누가 깨고? 인간이 깨고. 계약의 성사는 누가 시키고? 메시아가 하고. 그 정도로 누가 알아요? 그 정도로 유대인도 알고 있잖아요. 옛날 자기 민족이 언약을 위반해서 우상 섬겨서 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는 역사의 교훈을 삼아서 하지말자 하는 거예요. 하지말자의 주님은 의도적으로 위반해버리는 겁니다. 기준 자체가 오히려 언약을 파괴하는 짓이 된다는 거예요. 언약대로 살겠다고 애쓰는 그 모든 것이 언약을 파괴하는 모습이 되는 거예요.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이 말씀을 파괴하는 게 돼요. 왜냐 하면은 그들은 말씀, 율법 하지만 그들은 율법보다 뭐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자아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자기가 더 소중하고 그리고 자기가 속해있는 이 유대 사회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이 강한 권력을 예수 네가 뭔데 함부로 건드려. 이게 한 방에 무너질 거야? 안되지. 안되지. 너를 죽임으로서 우리 질서를 지키겠다는 것이 그게 유대지도자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었고 아주 단결도 단합도 아주 참 잘됐어요. 아주 일사천리로 잘 되었습니다. 심지어 율법을 모르고 언약도 모르는 빌라도라는 외부 통치자가 왔을 때 그 앞에서 그들은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달려들었어요. 죽여야 된다. 누굴 죽여야 된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 된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하는 자를 죽여야 된다고. 그렇게 했습니다.
자, 첫째 시간 끝내면서 여러분에게 질문 던집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사회 속에 여러분들이 일원으로 살았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쪽을 하겠습니까? 첫째 예수님을 죽이고자 찬성한다. 두 번째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자 반대한다. 세 번째 기권한다. 몇 번입니까? 3번이죠. 3번이 여기 나옵니다. 누가 50절 51절 한번 읽어보세요.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가타부타 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기권표 던진 사람이에요. 나서지도 않았어요. 다 끝나고 난 뒤에 추모기능을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슨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럼 다른 유대인들은 하늘나라 안 기다렸어요? 맨날 메시아 하면서 하늘나라 기다렸는데. 그러니까 둘째 시간은 뭐냐? 인간의 추모기능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게 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가. 그냥 예수님의 장래를 치루면서 예수님의 장래 치르는 그 모습을 기존의 다른 인간 장래 치르는 것과 결을 같이 해요. 우리라도 마지막 챙겨드리는 것이 주님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것이다. 그게 예수님의 심정을 아는 게 아니에요. 그건 뭐냐? 사회 위계질서를 따라가는 거예요. 사회 위계질서. 다시 말해서 유대민족 지도자들이여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하는 것까지 반대하지 않겠지요 라고 그들의 권력에 구걸하는 거예요.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기의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 감정은 감정대로 풀 수 있는 그런 행동을 보여주면서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