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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40711b 요한일서 2장 28절(주 안의 세계)-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40711b 요한일서 2장 28절(주 안의 세계)-이 근호 목사

다윗이 대결했던 그 골리앗. 다윗이 대결했던 골리앗 이전에 골리앗이 대결했던 것은 인간들. 인간들 가운데서도 아주 연소한, 어른이 되지 못하고 모든 완력이 성숙하지 못한 소년 다윗의 등장. 하나님께서는 골리앗과 인간을 한통속으로 묶어버리죠.

골리앗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한 그 사울이 사실은 이미 골리앗한테 정복된 상태라고 보는 거예요. 못 이겼으니까. 아무도 골리앗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 아무도 골리앗을 못 이긴다는 말은, 인간의 한도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 속에 인간을 개입시키느냐? 이길 수 없는 사람, 다시 말해서 내가 원인이 되어봤자 아무런 결과가 없는 일을 주께서는 발생시켜버리죠. 내가 개입해봤자 아무런 성과가 없는 일을 발생시키고 그 앞에서 개인적인 인간의 ‘나의 안’은 더 큰 ‘안’ 속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골리앗 안에 이미 사울 왕과 이스라엘이 갇혀 있는 거예요. 내 안인데 내 안으로 그냥 내가 나한테 명령하고 싶은데, 골리앗은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시합을 걸어왔잖아요. 이걸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모자라니까 지시와 명령을 수용할 수밖에 없죠. 꼼짝 못하고 있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인간이 소박하게 내 안에서만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그걸 그냥 용납하지 않고 더 큰 권력 안에 놓이게 만들어서 흡수 통합당하게 만드는 거예요. 잠식당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 세상 권력에. 나는 나로 인하여 소박하게 못 살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오십니까, 요한복음에서? 난 아버지와 함께 있죠. 예수님과 아버지가 서로 사귐이 있다 했어요. 요한일서 1장에 나옵니다. 사귐이 있죠.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1:3)

사귐이 있으니까 아버지에 의해서 보내진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권세에서 나온 지시와 명령을 차단시켜버려요. 절단시켜버립니다. 그들이 어떤 해석을 해도 안 듣습니다. 그들이 어떤 지시를 해도 안 듣습니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쳐버려요. 요한복음 5장에서. 유대인들의 속이 확 뒤집어지죠.

유대인들 속이 왜 뒤집어집니까? 예수님이 병자보고 네가 담요 들고 나가라고 한 그것이 그들 속이 뒤집어질 일입니까? 그들 속이 왜 뒤집어질 일입니까? 그들은 이미 기존에 있는 율법 해석이라는 권세 안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 권세에 예수님이 합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성질난 거예요. “너 뭐야? 다들 동의하는 율법해석을 너는 왜 거부하는 거야? 안식일에는 노동하지 말라고 했잖아.” 라고 이야기할 때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어.” 이렇게 이야기해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성도가 오늘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 있다고 먼저 성급하게 그런 상황을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께 아버지 안이라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가 먼저 성사되어야 돼요. 성립되어야 돼요. 그게 굳어져 있어야 돼요. 예수님은 아버지 말과 지시 외에 모든 것을 다 차단시켰다. 거부했다. 그럼 거부한 결과는 뭐냐? 참혹한 죽음이죠. 참혹한 죽음이었어요. 십자가 죽음이었어요. 거부한 결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쪽에서 본디오 빌라도 쪽에서 여러 가지로 기회를 줬습니다. 심지어 본디오 빌라도는 어쨌든 간에 예수님 한번 살려보겠다고 의도적으로 예수님께 채찍을 때려서, “거 봐. 채찍 맞는 모습 봐. 아무것도 아니잖아. 때려도 군소리 않고 맞잖아. 이거 아무것도 아닌데 유대인의 왕이라는 헛소리에 그렇게 예민한 반응을 보일 필요 없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그런데 이상하게 유대인들은 그래도 죽이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본디오 빌라도가 그 당시 가장 흉악한 살인자를 내세워가지고 “둘 중에 하나 골라. 너희들 사회에 어느 것이 해를 끼치는지 너희가 한번 판단해봐. 강도 맞지? 이 살인강도 또 살인할 거야. 맞지?” 이렇게 힌트를 줘도 유대인들은 “차라리 예수를 죽여라.”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 입장에서는 이거 미치는 거예요. “왜? 예수를 왜 죽여야 되는데? 왜?” 이유를 대라 하니까 사람들 소리가 더 많아져가지고, “그냥 죽여.” 그냥 죽여. 그것은 유대인들이 본디오 빌라도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딴딴한 믿음이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체가 자기 안, 율법해석에 대한 자기 안이 따로 딱 굳어져 있었어요. 씨도 안 먹히죠. 무조건 죽여. 무조건. 이유 없어. 무조건 죽여.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인간이 뭔가 개인적으로 결정을 하고 싶어도 그 인간에게 작동하는 더 센 권력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입장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죠. 특히 베드로 같은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잡힐 때 눈치 보고 슬금슬금 뒤로 뺐잖아요. 예수님 권력은 그들의 권력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들, 제자들 앞에서. 권력이 중요하지, 예수님은 그냥 한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고 끝나버리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고 이게 우리 모습이에요. 뭐 구원요? 천국? 바랄 걸 바라야죠.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국을 가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 바로 마태복음 1장을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1장에 족보가 나오는데 마태복음 1장 6절까지가 14대거든요. 1절부터 6절까지 14대를 구축하는, 14대의 형태를 갖추게 하는 그 동력이 뭐냐? 그것은 바로 율법을 모르는 네 여인의 개입입니다. 율법을 몰라요. 율법을 모르는 네 명이 나오는데 그 네 명의 이름 뒤에 ‘~에게서’가 붙습니다. 에게서.

첫 번째 나온 ‘~에게서’가 뭐냐? 3절, “유다는 다말에게서”죠. 그다음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또요. 그다음 “보아스는 룻에게서” 나오죠. 마지막 6절에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이라는 그것을 형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은 율법이 없는 자를 집어넣어서 노선변경을 시도하는 거예요. 노선변경. 이렇게 해가지고는 무슨 뜻인지 여러분 전혀 모를 거예요. 창세기 6장 한번 봅시다. 창세기 6장 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했죠.

창세기 6장 1절, 2절 읽어보세요. 1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사람에게서 딸들이 나니.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아내를 삼았죠.

그냥 아내만 삼았습니까? 자식이 나왔습니까? 자식이 나왔죠. 4절에,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그다음 뭡니까? “용사라” 변종이 나온 거예요. 변종. 변종인데 부정적 변종. 질이 나쁜 변종이 나왔죠. 이종(異種) 간에 번식한 거예요. 이종 간에. 질적으로 전혀 다른 노선 간에 별종이 나온 겁니다.

똑같은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율법을 아는 민족에다가 전혀 율법을 모르는 민족을 의도적으로 개입시켜서 자식을 낳게 만들었어요. 자식을 낳게 만들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인간 족보가 생겨나는 거예요. 율법 없이 태어나는 족보. 율법 없이.

지금 이걸 하나하나 생각해봅시다. 일단은 율법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죠. 여기 마태복음 1장 족보 1장 2절에,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아니죠. 그냥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리브가를 통해서 야곱을 낳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그들은 이방민족이 아니에요. 전부 다 같은 혈육에 속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하나님의 율법 안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쭉 나갔단 말이죠. 사람들은 이걸 율법에 대한 정상적인 족보라 생각했겠죠.

그런데 이렇게 이것이 정상적이라면, 정말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3절 “유다는 다말에게서” 다말은 여자거든요,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다말에게서’라는 말을 굳이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말은 며느리에요. 자기 아내 아닙니다. 이상하게 틀어지죠. 족보가 정상적인 남녀관계가 아니고 틀어지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아 인간세계로부터 튕겨져 나와서 인간은 인간세계, 하나님은 하나님 세계로 완전히 결별된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그걸 복음의 내용으로 삼는 거예요.

중요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은 인간이 끼어들지 않는 족보 만들기에 나선 겁니다. 인간의 혈통이 끼어들지 않는. 인간이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물 말고, 인간이 빠진 상태에서 인간을 개입시켜 나온 결과물로 그들만 구원받기를 원하고 천국 백성 만들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끼어들 수가 없죠.

다말? 다말 생각하면 자꾸 다말은 착하다. 다말이 착합니까? 아까 첫째 강의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뭐를 죄라고 합니까? 인간은 뭐가 죄냐? 내가 나쁜 짓한 게 죄고. 뭐가 의냐? 내가 착한 짓한 게 의라 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게 죄고 예수 믿으면 의가 돼요. 제가 이 말을 쉽게 못하는 이유가 이 말을 해봤자 예수 믿는 그 착한 일을 했으니까 의다, 예수 믿음에다가 착한 일을 같이 결합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정말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은 인간으로부터 추방된 자기 때문에 예수 믿을 수가 없어요. 왜? 자기들이 착하니까. 아니, 착한 사람 되고 싶으니까. 착한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 하니까. 그게 자기 세계니까요. 그래서 자꾸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기 구원받는 일에 자기가 끼어들기를 쉬지 않아요. 자꾸만 끼어들어요.

죄가 뭐냐?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나쁜 게 죄다.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하는지 관계없이 내가 느낌으로, 느낌 아니까, 평소에 내 느낌으로 죄는 나쁜 짓한 거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뭔가 실수했다 싶으면 그다음부터 불안감이 찾아와요. 내가 벌 받아야 속이 시원하지, 벌 안 받고 그냥 찝찝하니 못 지나가겠다. 내가 나쁜 짓했으니까 숨어서 목사 욕했으니까 내가 다음 주일에 헌금 만원 더 보탠다.

아까 안양 강의에서도 했잖아요. 수련회에서 다윗을 본받고 싶어요, 이런 사람은 있는데 아나니아, 삽비라 본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했잖아요. 아나니아, 삽비라는 뭐했습니까? 헌금 반만 내다가 하루에 다 죽은 사람들이잖아요. 같은 말씀인데 왜 그거는 본 안 받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아가씨보고, “너 시집가서 누구 본받고 싶어?” “한나!” 한나 같은 소리하고 있네. “마리아!” 마리아 말고. 누구? 다말. 시아버지하고 관계 맺은 다말. 그거 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내가 나의 안을 유지하는 차원에서는 나는 내가 깨어지는, 내 안이 아무 무가치하게 쓸모짝 없는 존재로서 그렇게 터무니없는 존재로 주의 일에 끼어들기를 우리는 싫어합니다. 나의 안이, 나는 내 것이니까 내가 용납 안 해요. 우리는 멋있게 살고 싶어요. 성경대로 훌륭한 인물이 되고 싶어요. 시아버지하고 놀아나는 그런 며느리는 싫어요. 잠시나마 창녀 짓하는 그런 여자는 싫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말을 족보에 집어넣습니다. 그건 뭐냐? 예수님 빼놓고 모조리 다 다말 같은 사람이 아니면 예수님 족보에 어느 한 순간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을 대표하니까요. 저주받은 자의 대표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는 기존의 잘났다 하는 유대 족보를 틀어지게 만들었어요. 그 잘남의 결과가 뭐였습니까?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그렇다면 천국의 족보라 하는 것은 잘난 체하고 자기가 의롭다 여기는 그들과 정반대되는 자들을 예수님이 자기 사람으로 끌어당겨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다음에 5절 봅시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기생 라합이죠. 기생 라합은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 자기 자신을 고발한 사람이에요. 고소한 사람이에요. 저쪽에서는 배신한 거지만. 부탁했어요. 내가 당신들 정탐꾼들 숨겨준 것을 당신 나라에서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우리의 혈육을 저는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자기 안이라는 것을 포기한 거죠. 왜 포기했는가? 기생 라합은 들은 풍월이 있어요. 모압이나 어떤 민족도 현재 이스라엘을 태풍처럼 끌고 오시는, 허리케인처럼 몰고 오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을 당할 민족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채고 그 앞에 자기 안을 그냥 자폭해버린 거예요.

자기를 공격하는 쪽에 미리 항복해버린 거예요, 기생 라합이. 자기를 침범하고 공격하고 여리고에 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그들에게 미리 알아서 자기가 없어지는 거예요. 다만 정탐꾼과의 관계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리죠. ‘내가 나를 지키는 것 그만두겠습니다. 내가 원인을 제공해서 근사한 결과를 끄집어내는 것, 내 쪽에서 나는 중지하겠습니다. 이제 그런 짓 그만 할랍니다.’ 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한 거예요.

예수님이 나오는 족보, 14대-14대-14대니까 끝에 예수님 나오는 족보에 이들 중 라합이 끼어듭니다. 이거는 거꾸로 생각해서 오실 예수님의 능력이 기생 라합에게 미리 작용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미리 작용했다.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을 자가 누굽니까? 이방인이죠. 율법에 의하면 율법이 없는 자는 저주받을 자에요. 그런데 율법이 없는 저주받을 자를 예수님 족보에 하나님이 왜 끼어들게 하십니까? 왜 끼어들죠? 율법에 의하면 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자기 자신의 행함과 율법을 지켰다는 원인자로서 거기에 자기 자신이 끼어들게 되어 있죠. 그러나 이방인 같은 경우에는 개코도 뭐 내세울 게 없어요. 율법을 알아야 내세우죠. 그냥 접수당하고 그냥 점령당하고 침범당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이. 여지없이.

아까 나왔던 유다의 며느리 다말. 시아버지가 다말을 그렇게 천대해가지고 ‘너 때문에 우리 집안 거덜 났다. 나가라.’ 하면 그냥 곱게 나가면 되잖아요. 왜 안 나가죠? 어디 복수하려고? 시아버지한테 복수하려고 일부러 출장일자 계산해서 대기하고 있었습니까? 그런 겁니까? 다말은 이미 이 언약 안에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자기 안의 세계를 만들지 않아요.

시아버지가 이 언약을 이용해서 자기 안이라는 걸 따로 만들었던 거예요. 따로. 다말 보기에는 이게 언약에 위배된 걸로 보입니다. 어떻게 아느냐? 자기 남편 죽었거든요. 그리고 그 시동생 오난도 죽었잖아요. 다말 보기에 이건 뭔 뜻입니까? 의도적으로 이 유다 집안의 대를 저주로 끊어버리는 거예요.

다말은 이 사실을 알고 언약 해석에 대해서 (유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다는 거예요. 언약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 세계가 만들어지는 건데 유다는 언약을 이용해서 자기 집안을 존속하려 하고 자기 집안을 건사하려는 데에 언약을 이용한 거예요.

그럴 때 다말은, 나 하나 욕 얻어먹지. 하고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었잖아요. 결국 유다 입에서 뭐를 끄집어냅니까? 당신이 옳았다.(창 38:26) 당신이 옳았다. 다말아, 네가 옳았다. 너 아니었으면 새로운 언약의 베레스와 세라가 안 생길 뻔 했죠.

인간이 원인으로 집어 들어간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물이 없을 뻔 했죠. 누구 아니었으면? 다말 아니었으면. 정작 다말은 자기를 언약의 사람으로 생각했지, 자기 안에서 따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에 5절, “보아스는 룻에게서” 아, 참. 룻은 이방여인이에요. 그래서 나오미가 룻보고 “네가 우리 집안에 있어봤자 넌 낙이 없어.” 라고 시어머니가 룻에게 너 나이도 젊은데 그냥 새로 팔자 고치고 시집가라고 떠밀 때, 그 모습 속에서 나오미가 율법이라는 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왜냐하면 율법이 자기 남편과 자기 시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거예요. 자기 남편과 시아버지를 죽임으로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진짜 본모습이 노골적으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 거예요. 세상에 이런 발상이! 이런 발상이 다 있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내가 구성해놓은 나만의 것, 내 소유로 만드는 나의 영원한 그것을 박살내고 그것이 바로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하실 일인 거예요. 하실 일. 정작 율법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나오미는 그걸 몰랐어요. 그저 이스라엘 백성이니까 내 집안 하나, 율법으로 하나님의 복 받아 건사하려고 했지 그 율법이 살아서 나를 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 덕분에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가 다윗 왕을 낳았잖아요. 왕이 등장했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 안에서 못 벗어나요. 안 벗어납니다. 안 벗어나는 그 인간에게 자기를 깨뜨리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너 저주받기 싫어, 좋아?” “싫어요!” 그럼 내가 저주받으면 되잖아. 저주받은 분이 와서 저주 안에서 주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쳐버리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나의 세계가 와장창 산산조각 나 깨져버립니다. 침범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의 침범, 말씀의 침범. 십자가의 침범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전에 나의 안이 실패를 한 자에게만 예수 안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질문을 이렇게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건 흔히 불신자들이 하는 이야기인데 여러분이 한번 답변해보세요.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지금까지 강의한 것 가지고 이 응용문제 한번 풀어보세요.

친구들이 맨날 교회 간다 하니까 물어보는 질문인데,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어디 있노? 어디 있는 줄 알면 나도 하나님 믿을게.”라고 했을 때 여러분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있다. 그거는 무당들도 하는 얘기죠. 그거는 무당들, 절에 가도 하는 이야기에요. 부처님은 우리 마음속에 어디가도 다 있다. 무소부재하시고. 그런 이야기.

주님은 나를 깨뜨리는 그곳에 계시죠. 내 안을 깨뜨리는 그곳. 나의 존재가치, 나의 모든 의미를 깨뜨리죠. 깨뜨리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항상 원인자로 끼어들기 때문에. 내가 원인을 제공해서 그 결과를 내 쪽으로 가져오는 그것을 우리는 못 벗어나기 때문에 그걸 깨뜨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십자가 안에 있다고 했어요. 십자가 안에. 사건 안에 있다고 한 거예요. 십자가 안에 있다고 하면 또 십자가가 어디 있나? 예루살렘까지… 지금 전쟁 중인데 거기 가지 마세요. 십자가는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이 터져버리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럼 십자가 사건은 뭐냐? 예수님이 저주받은 사건이죠. 인간에게 내침을 당하는 사건. 그래서 인간들이 제자들한테는 배신당하고 사람들에게는 권력으로 내침을 당해서 살해당하는 그 사건. 그 사건 속에 비로소 예수님은 얼굴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핍박사건이 벌어진 그곳에 예수님이 계셔요. 핍박사건.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얼마나 핍박했겠어요? ‘이 율법도 모르는 것, 율법도 없는 것들. 개와 같아서 너희는 저주나 받아라.’고 한 그 이방여인을 남성 위주의 유대인 족보에다 네 명이나 끼워 넣으면서 예수님 족보의 원판은 14대로 이미 마련되어 있어요. 완료가 되었어요. 14대, 14대, 14대. 14대에서 완료된 것이 다윗 이후에 무너지고 다시 14대가 원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실 때 그 예수님이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율법을 모르는 자, 저주받은 자라는 그러한 평판을 받죠. 예수님이 저주받은 자라고 평판을 받는 이유는, 나중에 예수님에게 구원받을 자는 네가 뭘 알아서 그것이 너의 구원의 바탕이 되는 게 아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의 저주받음으로 인하여 너는 그냥 구원을 받은 거예요. 영생을 얻은 거예요.

그렇다면 내 안이라는 것의 의미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내 안이란 나의 가진 것 가지고 지금 자랑질 하려고 내 안을 만들어놨는데 주님은 어처구니없이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버리면 그동안 구축한 내 안은 아무 쓸모없는 것을 그동안 애써서 평생 동안 모아놓은 거예요. 자기 잘난 척하려고. 나 이렇게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았다는 그 자랑질 하기 위해서.

예수 안 믿는 게 죄에요. 예수 안 믿는 게 죄인데, 예수님 믿고 싶어도 예수님은 나를 공격하는 예수라서 내 안을 유지하는 한 믿을 수 없는 분이에요. 왜냐하면 내 믿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신뢰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실망해야 돼요. 실망하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한테 실망하는 즐거움. 나는 뭘 해도 어설프기 짝이 없어. 되는 일이 없어. 박수 짝짝짝.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절단되고 단절되는 것, 예수 안에 있다는 증거가 되겠죠.

그다음에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에게서’가 네 명이죠.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모든 ~에게서에 끝이 어디 나오느냐? 16절에 나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럼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낳습니까, 요셉에게서 낳습니까? 이건 너무 쉬운데. 마리아에게서 낳죠. 요셉에게서 난 게 아니에요. 요셉에게서 나온 게 아닙니다. 마리아에게서 나온 거예요. 여자의 후손이죠.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에요. 남자 없으면 일이 안 된다는 게 유대인의 의식이잖아요. 율법도 그렇게 되어 있고. 그런데 그걸 주께서는 피합니다.

‘마리아에게서’니까 마리아가 평소에 결혼도 안하면서 임신하고 싶어 환장한 여자에요? 이쯤 임신해야 될 건데. 조사해볼까, 줄 2개 나오는가? 이런 거 안 했죠. 그냥 성령이 와서 그냥 임신했어요. 그냥. 마리아가 그냥 구원받은 거예요. 오늘날 성도는 뭡니까? 그냥 구원받은 거예요. 성령이 임신해서 그냥 구원받은 거예요, 그냥.

그때부터 내 안은 없어졌고 어디 안? 예수 안이 된 거예요.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고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고 예수 안에 영생이 있고 예수 안에 천국이 있고 예수 안에 모든 소망, 사랑이 다 있고 은사가 다 있고. 그래서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에요.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에요. 성도라고 해줘요, 라고 자꾸 떼쓰지 말고 너부터 예수 안에 있으면 되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으면 된다 하니까 자꾸 묻기를, “하나님은 어디 계신데요?” “왜? 따라잡을라고?” “예. 따라잡을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예수 잡아서 내 소유 만드는 거예요. 철야해서. 철야기도하면서. 하다하다 이제는 주님마저 소유하려고 달려드는 것. 덤벼드는 이 본성. 악마의 본성. 어쩔 거예요, 이 본성을.

‘예수 안’이란… 예수 안의 반대말이 있어요. 예수 바깥도 될 수 있지만 실(實)내용을 보면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나의 것이 없는 거예요. 나의 것이 없는 것. 나도 내 것이 아니니까요.

요한복음 15장 봅시다. 예수 안을 주님께서 설명하는데 분명히 인간은 못 알아들어요. 너무나 못 알아듣기 때문에 정말 알기 쉽게 알기 쉽게 알아듣기 쉽게 하시려고 예를 든 게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해볼게요.

“너희들 포도나무 알지?” “예.” “나무에 둥치만 있어, 가지도 있어?” “가지도 있어요.” “그래? 만약인데 가지가 그 나무 몸체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지?” “열매 없어요. 죽어요.” “죽겠지. 그러면 그 가지가 포도나무 몸체하고 붙어있다면 끝에 뭐가 나오지?” “열매에요.” “열매가 어떻게 나오지? 가지를 막 흔들어서 나와?” “아니에요. 절로 맺히죠. 절로.”

절로 과실이 맺힙니다. 4절에 나와요.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절로 네가 나의 열매를 맺을 거다.(“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 이야기에요. 주님께서는 최대한도로 쉽게 이야기했어요.

문제는 본인 자체가 둥치가 되어서 누구의 가지가 되길 싫어해요, 인간은. ‘내가 어디 쪼다야? 내가 네 시다바리인줄 아나?’ 이러고 있다고요. ‘멀쩡한 내 인생 놔두고 왜 누구 가지밖에 안 돼? 나는 내 인생 따로 해서 앞으로 자영업할 거야. 나 회사 취직 안 할 거야. 나는 내 사업할 거고 내 인생 내가 살 거고. 나는 내가 한 노력만큼 나의 영광을 위해서 성과를 얻을 거야.’

이게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친절하게 해줘도 이 이야기 들은 제자들 다 도망갔습니다. 도망갔어요. 아, 말을 친절하게 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소용없어요. 그러면 주께서 또 어떻게 하시는가? 요한복음 16장. 왜 지금 요한복음을 하느냐 하면 요한일서를 사도 요한이 썼기 때문에, 그 안이라는 개념을 먼저 요한복음에서 친절하게 다 해줬기 때문에 그래요.

16장 7절, 예수님이 떠나갈 때 어디로 가는지 묻지는 않고 그들이 근심이 딱 드는 거예요. 이 대목을 한번 설명해봅시다. 주님 떠나시는데 왜 제자들이 근심을 합니까? 그 이유가 뭐냐? 그동안 주님을 자기 소유화시킨 거예요. 나는 괜찮은 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괜찮은 분.

안의 반대말은 어차피 만남이에요. 같이 들어오는 게 아니고 그냥 만났다가 헤어지는 거예요.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 헤어지지 않을 때는 만남을 같이 안에 함께 있다고 생각해요. 만남을 만남으로 보지 않고 ‘함께’로 이어졌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헤어지고 나니까 그냥 한때 만남이었던 것을 알게 돼요. 모든 대중가요 노래 가사가 전부 이겁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사람은 함께 있을 때는 마치 하나처럼 여깁니다. 왜냐하면 헤어지기 직전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게 주님의 안과 달라요. 주님 안은 헤어짐이 없기 때문에 그냥 둘이 되는 경우가 없어요. 처음부터 하나였으면 계속 하나로 가는 겁니다. 우리를 가만두지 않아요. 자기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자기가 관리해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했어요. 아버지와 예수님의 한 뜻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잃어버리지 않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요, 예수님의 뜻이고 그것은 한결같이 실현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5년 전에 교회 가서 한때 알았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해요. 그 사람은 예수님 만난 적도 없고 하나 된 적도 없고 그냥 지식 차원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호기심을 냈을 뿐이고 그거 끝나고 난 뒤에는 시큰둥하니까 다시 도로 자기 쪽으로 1이 된 거예요. 자기를 떠나지 않았어요. 자기를 못 떠난 상태에서 예수님한테 관심 있으니까 후딱 언제든지 자기 쪽으로 돌아올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 좋아하다가 고난이 닥치니까 원망하잖아요.

16절 한번 봅시다. 그래서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한 거예요. 예수님과 자기가 만났는데 예수님이 떠나니까 이제 누가 남았어요? 본인들만 남았으니까 나 우째 사나, 이렇게 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살아. 잊지 말고.’ 이게 아니고 7절 봅시다. “내가 가게 되면 실은 너희에게 유익이다. 왜?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가면 내가 성령을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낼 테니 성령을 보내게 되면 나는 주님을 떠나도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킬 것이라는 거예요. 그걸 알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성령 받은 사람은 비로소 상대를 내가 고른 게 아니고 상대가 나를 골랐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

잘못 걸린 거예요. 소년 다윗처럼. 골리앗 전쟁은 자기가 한 게 아니고 우연히 주께서 그 전쟁에 소년 다윗이 끼어들게 한 거예요. 비겁하게 어른들은 뒤에서 다 빠지고 보잘 것 없는 자기 하나 딱 앞장세워서 어떤 흥밋거리로 삼은 거예요. 판돈 걸어, 판돈. 난 골리앗한테 건다. 이런 식으로. 그중에 어느 누구도 심지어 다윗과 한 가정에 있는 형들도 동생의 그 철딱서니 없는 것에 대해서 나무랐습니다. 떽! 집에 가서 숙제나 해라. 어디 어른 하는데.

다윗은 어린아이 목소리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이 할례 받지 못한 것. 하나님의 돌을 받아라.” 할례 받지 못한 것.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면서도 어떻게 인간이라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데. 무슨 뜻입니까? ‘우리한테는 약속 있어.’라는 뜻이에요. 우리나라는 약속을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인데 너희들은 약속이 없으니까 너를 위해서 존재하잖아.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할 때 복음만 설교해야죠. 골리앗 같은 사람 좀 나가도록. 자기를 위해서 복음 이용하는 사람 좀 나가시도록. 어차피 하나 된 적 없어요. 자기에게 이익 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한 건데요.

그럼 8절을 봅시다. 그렇게 와서 성령이 하는 일은 뭐냐? 야, 무서운 일하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그다음에 뭡니까? “책망” 책망하는 일을 누가 하십니까? 보혜사가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킨 그걸 담보로 그걸 근거로 나는 너희를 구원하겠다는 뜻이에요.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은 적 없다는 걸 근거로 너를 구원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지 않음으로 구원 받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나는 예수 믿은 적이 없는 걸로 구원받게 해주겠다. 나는 예수를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저주받아 마땅함을 장착한 자로 구원해주겠다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성경해석의 한계를 넘어선 거예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한도초과에요, 한도초과. 한도초과라는 이 단어는 아까 식사하다가 얻어걸렸어요.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 카드 긁는데 한도초과라고. 바로 저거다. 한도초과. 우리는 자꾸 한도 내에서 함으로써 내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했습니다. 그 아저씨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우리가 내 구원을 생각 못하는데 구원된 거예요. 그때 성령이 함께 있는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 예수 안, 주 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다시 한번 봅시다. 2장 27절,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있으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다.” 이제 이해되시죠? 내 안이 아니란 말이에요. 배우고 지키고 이게 아니라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모든 지시와 명령은 다 끊어지는 거죠.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당연하죠. 약속이니까. 내가 생각해서 내가 믿는 약속이 아니고 주님이 준비한 약속이기 때문에 당연히 오게 되어 있고 그다음에 주 안에서 우리는 의가 나오는데 그 의를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인정하는 의. 그것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나오죠.

포도나무에 박힌 가지에서 말릴 새도 없이 계속해서 열매가 맺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열매로 주님 자신의 결과물로 삼습니다. 그 관계가 바로 예수 안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에 대해서 예수 안에 대해서 주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함께 있음에 대해서 다시금 성경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저주받아 마땅함을 통해서 예수님 증인의 자리에 있게 한 그것이 구원의 자리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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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