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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40711a 요한일서 2장 28절(주 안의 세계)-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40711a 요한일서 2장 28절(주 안의 세계)-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2장 28절부터 하겠습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여기서 이러한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 뭐냐 하면, 예수 안. 27절 끝에 “주 안에 거하라”, 28절에 “그 안에 거하라”. ‘예수 안에 거하라’라는 조건 하에 주께서 강림하실 때에 우리가 건짐을 받고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의인되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예수님의 의가 나타나는 그러한 대상자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대상체로서 우리가 사용되어진다는 거예요. 조건이 뭐냐 하면 예수 안에 거한다는 거예요.

‘예수 안’ 이것이 사실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라면 여러 가지로 구분되지만 특히 무엇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느냐 하면, ‘의가 뭐냐?’ 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같은 말로 ‘죄가 뭐냐?’ 하는 거예요. ‘의가 뭐냐’는 같은 말이니까 지우고요. ‘무엇이 죄냐?’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무엇이 죄냐. 어떤 것이 죄지? 이게 나 혼자 있을 때에 나타나는 죄, 나 혼자 있을 때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예수 안에 있을 때 죄의 개념이 달라요. 나 혼자 있을 때 죄의 개념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을 죄라고 간주합니다. 인간이 홀로 있을 때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이 죄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가 판단의 대상이 돼요. 이게 죄냐, 의냐. 자기가 판단할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자책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기도 하고. ‘나는 장래에 죽었어, 죽었어. 나 이제 끝났어, 끝났어.’ 뭐 이런 식으로 좌절하기도 하고. ‘나는 이제 천국 다 갔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천국은 말이 안돼.’ 이런 이야기할 때 주위 사람들이 ‘왜 그러는데? 왜? 왜?’ ‘나는 이런 잘못을 저질렀어. 난 끝났어. 나 20년 동안 교회 다녔는데 이제 다 소용없어. 나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나 홀로 있을 때 내가 한 행위로 그 결과가 나에게로 온다.’ 나 홀로 있을 때, 행위의 주체가 나 혼자였을 때는 내 행동에 대한 그 결과가 나에게로 돌아오죠.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그 어떤 결과든지 원인은 나에게로 오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 결과는 예수님께로 가죠. 예수님께로 가는 거예요.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이 말은 어떤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내게 주어진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나 자격이 우리 자신에게 없어요.

사다리 타기 있잖아요. 사다리 5개 중에 만약 맨 끝이 50만원 짜리고, 나머지는 꽝, 꽝 꽝 꽝, 이렇게 있다면, 사다리 타기에서 항상 첫 번째가 수학적으로 제일 유리하다는 말이 있어요. 확률상. 제일 왼쪽이. 이때 혼자 사다리 타기하게 되면 꽝 나와도 내 책임이고 50만원 타도 내가 잘 나와서 한 거고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주와 함께 있을 경우에 뭘 못하느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꽝이 될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50만원 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결과는 내 행위와 연결되지 않고 끊어졌거든요.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믿음이라고 하거든요.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할 때, 아브라함이 평소에 자기가 잘한 걸 했습니까? 잘한 걸 믿었습니까? 내 아내가 임신 못해. 나 임신시킬 거야, 뭐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아브라함이 제시한 것, 나타나는 것은 뭐냐? 얼토당토 안한, 내가 상상도 못한 그 결과에 대해서 자기가 추후에 고백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인 거예요. 자기가 개입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것은 약간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십자가 지신 분은 처음에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리에 계시다가 십자가 지시면서 십자가 증거하는 자리를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내어줍니다.

예수님께서 응애응애 태어날 때부터 ‘아빠, 십자가 줘. 십자가 갖고 놀래.’ 이랬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까지 모든 공생애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삶이에요. 십자가를 소개하고 증거하고. 나 십자가 지러 간다. 아직까지 십자가 지진 않았어요. 그 가운데서 베드로하고 반대 의견 있었고 뭐 여러 가지 있었잖아요. 제자들하고도.

예수님은 십자가 지신 분입니다. 지신 분이지만 그 전에는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스스로 증거하는 분으로 접근해 들어갔어요. 바로 이 상태를 예수님은 ‘아버지 안’이라 했어요. 아버지 안. 그러니까 ‘안’은 뭐냐? 영어로 하면 in이죠. in. '안‘의 내용은 뭐냐? 내용은 딱 두 가지에요. 십자가 지신 분과 그것을 증거하는 자, 이 두 가지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예수님 안’이 뭐에요?” 물으면, 가만있어. 안쪽 평 수가 몇 평이더라. 보통 안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바깥과 관련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안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은 하나마나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으니까 함께 있겠죠. 그거는 동어반복, 말 하나마나에요. 아무 추가적인 의미가 없어요.

이래야죠. “안에서는 무슨 특이사항이 벌어지는가?” 이렇게 물어야죠. 안에서는 무슨 특이사항이 벌어집니까? 정답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거기서 배제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배제되는 공간, 그게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님과 아버지만 주인공이 되어야 되고 그 두 분 사이에 언약만 실(實)내용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서 빠집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예수 안’이 많이 나오죠.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8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와, 이거 진짜 미칩니다. 미쳐. 물론 교회 50년 다녀도 이 정도 안 미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정죄함이 없는 결과는 내가 관여해서 된 게 아니에요. 믿음으로 정죄함이 없는 게 아니라니까요. 이게. 믿음이란 내가 빠진 상태에 대한 고백이 믿음이거든요. 그 현장에서 빠져있단 말이죠. 내가 원인제공자가 아니다 이 말이죠.

아까 이야기 계속해봅시다. 인간이 혼자 있을 때 ‘죄가 뭐냐?’ 하면, 인간은 내가 똑바로 행동하지 않은 것. 내가 탐심을 낸 것. 또는 어디서 뭐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신학교 물 좀 먹었는지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과녁에서 어긋났다. 빗나갔다. 슈슈슉~ 화살 쏘는데 어긋나서 죄 지었다. 어디 뭐 양궁 합니까.

문제는 ‘죄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 죄에 대해서 증인으로 살고 있다는 거예요. 나의 행동이 올바르냐 그르냐 하는 감시체제 속에 인간은 살고 있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는데. 분명히 나는 나밖에 없다는데 웬 공포심? 웬 두려움? 웬 불안? 네 안에 너밖에 없다며? 없는데 네가 왜 걱정하고 염려하느냐 이 말이죠. 누구 있지? 너 누구 있지?

그런데 내 안에는 나만 있다는 것, 그걸 분명히 알면서도 내가 미쳐 찾아낼 수 없는 다른 게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강한, 물증은 없는데 심증이 가는 거예요. 뭔가 후달리고 있어요. 매 삶이 후달리는 삶, 쫓기는 삶이에요. 매일 삶이. 그게 잘 나타나는 게 수사 드라마. 수사 드라마의 주제가 돈가스 집에 가서 돈가스 잘 구웠는지 보는 그게 주제입니까? 아니죠. 돈가스 먹어가면서도 겁이 나요. 돈가스 먹어가면서도.

돈가스 먹어가면서도 겁이 난다는 게 무슨 말이냐? 드라마나 영화가 옛날에는 내러티브(narrative, 서사) 위주였죠. 이야기 전개 위주였어요. 그걸 가지고 ‘운동-이미지’라 합니다. 운동-이미지라 하는 것은 옛날 영화에요. 옛날식의 초창기 영화는 이게 정지화면이거든요. 정지화면을 계속 돌리면 막 움직이잖아요. 정지되어 있는데 이미지상은 운동으로 되어있다.

영화 초창기에 나왔을 때에 ‘움직이지도 않는데 사진 찰칵찰칵 찍어서 연결하니까 마치,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니까 영화는 가짜다. 진짜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영화가 등장하고 난 뒤에 이 영화 필름이 진짜를 보여줘서 진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운동으로 보면 그것도 의미 있는 진짜라고 보는 거예요. 영화라는 게.

중요한 것은 운동-이미지, 정지화면이 연결되면서 거기서 이야기가 전개되죠. 이야기가 전개돼요. 초창기 영화에서는. 그냥 관객들이 이야기 전개대로 보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운동-이미지에서 나중에 시간-이미지로 이게 바뀌면서 이야기 전개가 그냥 앉아있으면 순서대로 차분하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 장면 보여줬다가 과거 장면 보여줬다가 왔다갔다 한다 이 말이죠. 현재 장면 보여줬다가 과거에 임순이가 누구냐. 낮에는 뭐 아줌마 됐다가 밤에는 아가씨 됐다 하는.

이게 뭐냐 하면 관객들의 영향력이 이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에 관여하도록 드라마를 짜는 거예요. 관여하도록. 안 그러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그냥 구경하고 지나가고 이런 게 아니란 말이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좋더냐?’ 하면 나중에 찔찔 울면서 박수치고 이게 아니고, ‘도대체 범인이 몇 명이야?’ 이런 식으로. 누가 범인이야? 장재경이가 범인이야, 누가 범인이야? 자꾸 관객들이 거기에 관심 끌게 만드는 거예요. 관심 끌게 만든다고요.

그렇게 되면 등장인물+관객의 의견까지 고려해서 드라마가 진행되는 겁니다. 제가 단순히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지금 성경의 내러티브, 성경의 줄거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의 줄거리 전개과정을 운동-이미지로 보지 말고, 시간-이미지로. 시간-이미지란 말이 너무 어렵죠? 그럼 이걸 ‘관객이 참여한 전개과정’이라 하고 운동-이미지는 기계. ‘기계적 스토리’.

율법 줬다. 지켜라. 못 지켰나? 못 지켰으니까 너는 죄인이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율법을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못 지켰다. 그래서 벌 받았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을 해석해버리면 안 되죠. 뭘 해야 되느냐? 참여. 인물 참여를 해야 돼요. ‘왜 그들은 율법을 못 지켰지?’ 성경은 그걸 묻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경은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적으니까. 일부러 율법을 위반하도록 율법을 줘버리고 상황이 그렇게 몰아가요.

이 세상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일하실 때 우리는 팔짱 끼고 하나님 혼자 하시면 우리는 박수나 치지, 이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일한다는 자체가 일방적으로 하나님 자기 일에 끌어당긴 민족이 있어요. 그 민족이 무슨 민족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자, ‘이스라엘 민족은 왜 율법을 못 지켰습니까?’ 라는 질문의 답변을 단편적으로 보면 뭡니까? 그들은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못 지켰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들은 왜 우상을 섬깁니까? ‘그것은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죄를 지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이렇게 돼버리면 이건 기계적인 스토리가 돼서 성경해석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럼 등장인물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 언약의 역사 속에, 말씀의 역사 속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느냐?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그들 이스라엘은 율법을 왜 어기느냐?’에 대한 답변은, ‘왜 율법을 굳이 지켜야 되지?’하고 되묻는 거예요. 왜 율법을 지키지? 거기서 뭐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그걸 왜 지켜?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그냥 관객 입장이 되지 말고 거기에 하나의 역할을 맡은 걸로 하게 되어버리면, ‘아, 그래. 율법을 저렇게 어기면 봐. 벌 받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지키자.’가 아니라 그 역할에 들어가 버리면, 율법을 우리가…아니, 율법이라는 걸 왜 지켜야 되냐 이 말이죠.

이 문제부터 되는 거예요. 왜?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셨잖아요. 그럼 하나님은 나입니까? 아니죠. 하나님은 남이잖아요. 하나님은 내가 아니잖아요. 왜 내가 남 말을 들어야 돼요, 그래? 왜 내가 남의 말 들어야 돼요? 오늘 참석 안하잖아요. 보세요. 왜 들어야 돼?

‘돈은 없어도 하나님은 있다’ 그거하고 ‘돈은 있는데 하나님 모른다’ 둘 중에 어느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아니, 어느 인생을 살고 싶냐고 묻는 게 잘못이에요. 그냥 살아요, 돈만. 하나님은 뒷전이고. 그런 게 우리 인간인데 누굴 욕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율법을 어길까?’ 너라면 지키겠나, 너라면? 너라면 지키겠냐 이 말이죠.

백날 뭐 수십 년 복음 듣고 교회 다녀도 소용없어요. 그동안 계속해서 교회, 말씀 구경하러 온 거예요. 본인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거예요. 본인의 이야기로. ‘이스라엘 백성들 참. 이런 복을 받아놓고도 율법을 안 지키다니.’ 너 해봐라. 너는 지키겠나? 너 본인도 안 지키면서!

아니, 율법을 왜 지켜야 돼요? 하나님을 믿어야지. 아니, 하나님을 왜 믿어야 되는데?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는데 왜 믿어야 돼요. 하나님은 필수 과목이 아니고 선택 과목이잖아요. 나중에 여유 있을 때 믿으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왜 믿어야 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 믿어서 저주 받았다. 아니, 저주를 받는다고 해서 믿습니까? 저주 받으면 그냥 저주 받는 것이지, 저주 받았다고 믿어지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어요.

이 질문을 해볼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오늘, 어차피 모르는 거 모르는 것만 계속 할 거예요. ‘인간은 왜 울지요? 왜 웃지요? 혼자서?’ 고양인가? 고양이는 혼자서 웃대요. 왜 웃는지 모르겠어. 고양이들. 눈 동그라니 해가지고. 인간은 왜 웃습니까? 인간은 혼자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혼자 있지 않으니까 때로는 빙그레 웃기도 하고 또는 울기도 하는 겁니다. 도대체 인간과 함께 있는 괴물은 누구냐, 너? 누가 너를 웃게 하고 누가 너를 울게 했더냐.

분명히 하나님은 아니에요. 분명히 예수님도 아니에요. 왜? 인간은 내가 하는 것으로서 모든 일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이 혼자서 웃고 혼자서 운다는 그것은 분명히 인간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있다는 거예요. 평생 살아도 그 괴물이 누군지도 모르고 웃고 울고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인간이 웃고 우는 이유는 역시나 나는 혼자임을 우는 것으로 웃는 것으로 증명해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기 증명이에요. 인간의 자기 증명. 인간의 자기 확인이에요. 내가 여기 혼자 있다는 것을 늘 증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증명하죠?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이런 자기 증명을 하느냐?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식으로 자기 증명합니다. 나 중심으로 내 중심으로 나의 안과 밖을 구획하는 나누는 그게 인간 평생의 모든 생각과 태도와 행위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여기까지는 네 거고 여기부터는 내 거다. (저건) 너의 것이고 (이건) 나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했던 전체 물음을 한꺼번에 답변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누구와 함께 사는가? 인간은 자기 소유물과 더불어 살아요. 소유물, 내 것과 살아요. 인간은 내 것과 산다고요. 내 것이 있음으로써 웃고 내 것이 있음으로써 울고. 내 것이 불안하면 울고 내 것이 예상 밖에 좋게 되면 웃고 그런 거예요. 나는 내 것으로 사는 거예요, 내 것으로.

내 것으로 살기 때문에 나의 믿음은 내 것에 대한 믿음이 나의 믿음의 전부에요. 다른 것은 씨도 안 먹힙니다. 내 것을 내가 갖는 그 믿음 외에 다른 믿음은 씨도 안 먹혀요. 들어올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내 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모든 신경을 내 것에, 내 가진 것에 신경 쓰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예수를 따라잡아서 누구 것 만드는 겁니까? 내 것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예수 믿는 자로 자기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거예요. 그것이 알고 싶다. 뭐 알고 싶지도 않죠.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굳이 뭐 알고 싶지도 않죠.

그러면 인간은 내 안과 내 바깥이 있는데 내 안은 내 것과 살죠. 그 내 것 가지고 뭐 하느냐? 나를 증거하는 자리죠. 내가 이렇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리에요. 그 밑천이 있어야 되는데 밑천이 나의 것이에요.

치매 걸린 노인네들 보면, 혼자 사는 치매 걸린 사람들 이웃집에서 냄새 난다 하죠. 그럼 구청에서 와보면 어떻습니까? 그 동네 온갖 쓰레기는 다 모아놨죠. 여러분도 치매 한번 걸려볼래요? 온 쓰레기를 다 모아놔요. 어떤 젊은 여자 분은 택배 신청해서 뜯어보지도 않고 택배 박스만 가득 쌓아놓고 있어요. 정신병자죠. 뜯어보지도 않을 걸 왜 그렇게 쌓아놓느냐? 흐뭇하잖아요. 포만감에.

나는 내 것과 대화하는 거예요. 내 것은 나의 세계 부하들이에요. 나의 신하들이고 나를 추종하는 신도들이에요. 그게 택배 물건이든 고양이든. 개도 마찬가지고요. 자기 것 가지고… 왈왈, 그러면 ‘그래, 엄마다, 엄마.’ 흐뭇하죠. ‘엄마가 밥 줄까?’ 그런데 바깥에서 또는 이웃집에서 ‘자꾸 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 그러면 그 아줌마는 ‘물어. 물어! 슉슉, 물어!’ 왜? 나의 적이니까. 내 것에 대한 범위를 침범했으니까. 만약에 내 것이 손상되면 그동안 나를 지탱해왔던 나의 존재의 재료들이 존재의 토대가 무너지죠. 내 존재를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내 존재의 재료들.

제가 자꾸 미쳤다, 미쳤다 하는데요. 이게 모든 사람들의 일상이에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식 세 명 낳고 자기 부인하고 저녁상할 때마다 “야, 큰 아들 오늘 학교 가서 뭐 배웠지?” 이렇게 묻잖아요. 물을 때 그 태도 자체가 자기 휘하에 부하들이에요. 자기는 해병대 사단장이고. 자기 부인은 중령이고. 막내한테 “야, 너 물 범람하는데 들어가면 안 된다. 이 해병대야.” 이런 식으로. 자기 사단을 구성하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에 가스 라이팅 당하는 것. 아버지의 이름으로, 모든 행동에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행동에 나서는 것. 이게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준 건 뭐냐? 완전히 약을 올리는 거예요. 율법 줘도 소용없어요. 처음에는 율법을 왜 지키려 했는가? 자기한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해서 지키려 했겠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주변에 율법 없는데 잘 사는 민족들을 강성케 해버렸어요. 율법 없는데 잘 살고 율법은 모르는데 언약도 모르는데 군사력이 강해. 무기가 세요. 할례 받지 않았는데 키가 3미터 넘어. 골리앗이. 사울 왕 및 그 신하들은 음메, 기죽어. 다 기죽어 있습니다. 골리앗은 쿵 쿵, 창으로 땅을 치면서 방패 큰 거 해가지고. 덩치가 크니 구강 구조도 울림통도 클 게 아니겠습니까. ‘이리 오너라~! 비겁하게… 우리 일대 일로 붙자. 나한테 지면 너희들 다 나의 노예 되고. 됐냐? 뭐 하냐? 남자끼리 비겁하게 숨지 말고 사울 왕 이리 나와! 붙자. 너 왕이잖아. 나도 왕이야. 한 판 붙자.’

도대체 골리앗은 뭘 믿고 그렇게 큰 소리 쳤습니까? 자기 자신의 가진 것이죠. 가진 것. 자기 소유입니다. 소유가 있는데 자기 바깥으로 안 나가죠. 소유를 지킬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났는데. 그 소유 중에서 아버지의 이름도 포함되죠. 우리 집안의 가오와 가문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는데 내 것 있는데 내 것 있는데 율법을 왜 지키나? 우리 가정의 가문부터 중요하죠.

아들이 교회 가니까 아버지가 “야, 이리 와. 너 고3이잖아. 고3이 이렇게… 네가 배가 불렀구나. 네가 교회 갈 시간이 어디 있어? 오답카드 끄집어내가지고… 지금 며칠 남았는데? 백 일 약간 더 남았는데 바짝 해가지고 네가 의대를 가야 우리 가문에 영광을 돌릴 거 아니야? 너 누구 식구야? 너는 내 식구야. 너희 엄마 봐. 돈 벌어가지고 나하고 네 엄마하고 너한테 밑천 들여 맨날 학원 보내고 밤늦게까지 기다리고…이게 무슨 짓이고. 너 하나 잘 키울라고 그 모진 비바람 다 맞아가면서…” 이럴 때 엄마는 또 그냥 있으면 안돼요. 찔찔 또 울어요. 아버지는 고함지르고 엄마는 울고. 네가 이렇게 날 배신할 줄 몰랐다. 너 때문에 손 다 텄다. 봐라. 동정심에 호소하든지 강압하든지.

우리는 내 것 속에 네가 다 구성요소잖아요. 내 것 속에. 이미 우리는 예수 안 이전에 안이 있었어요. 나갈 생각이 없어요. 왜 나가요? 그 안 세계 만든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바깥에 왜 튀어나옵니까. 그냥 교회 가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냥 간 보죠. 간을 보는 거지, 내 것에서 가출할 일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것을 믿고 자기와 동행하기 때문에 자기 것 외에 일체 믿지 않습니다. 율법? 안 지킵니다. 그 본색을 드러낸 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내 안에 갇혀있는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시는 하나님’이에요. 내 안에 갇혀있는 나를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그걸 주목해야 그게 하나님의 기능을 아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 믿으라 하니까 믿죠. 좋다는데 왜 안 믿어요? 끌어 모으죠. 마치 온 동네 쓰레기 끌어 모으듯이 다 끌어 모아요. 그 동네 교회 전도지 다 끌어 모으듯이. 교회 행사하면서 주는 거 다 끌어 모아가지고 실컷 하니 뭐합니까. 그 자리가 예수 안이 아니고, 나의 안인데!

나의 존재의 안이고 나의 존재의 안은 내가 끌어 모은 것으로 내 존재 증명하고 그걸 확인해주고. 그걸 의롭다고 정당하다고 간주하는 그 영역 속에 하나님마저 강제로 끄잡아 당겼단 말이죠. 애완견도 아니고. 강아지처럼 끌어당긴 거예요. 자기가 주체고 주인공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이미지. 인간을 관여해요. 인간을 관여시킨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이를 뭐로 바꾸느냐? 운동-이미지, 기계 이미지로 바꿉니다. 운동-이미지, 기계 이미지는 사실은 정지되어 있는 단편적인 것인데 이걸 빨리 돌리다 보니까 마치 우리가 운동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내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간세계에서 그렇게 조장을 한 거예요. 모든 게 환상인데. 진짜 세계는 인간의 활동력에 있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실은 인간은 모두 다 자기 바깥으로 못 빠져나오는 가운데 있는데. 그렇잖아요. 못 빠져나와요.

이것을 캡슐로 해봅시다. 사람이 세 사람 만났다. 이것은 인간들이 조작한 거죠. 실은 각자 캡슐을 뒤집어쓴 거예요. 나는 내 안을 가지고 나의 것을 가지고 타인을 만나고 A도 그렇고 B도 그렇고 C도 그렇고 전부 다 이렇게 만나는 거예요. 가족이란? 가족도 마찬가지죠.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또는 전통적으로 시간적으로 식사를 같이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니까 우리는 한 가족, 한 패밀리인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각자 따로 자기 방을 갖고 있고 자기 생각과 기대가 다 따로 있어요. 전부 다 따로따로에요.

이게 들통나는 시기가 언제냐? ‘안은 일체 외부에 명령과 지시를 일단 차단시키고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것을 선별, 채택한다.’ 이게 이 안에서 하는 활동입니다. 아빠, 엄마의 모든 명령을 일단 안 들어요. 안 듣되 내게 어느 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가지고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그 환경 속에서 여전히 내가 원인을 제공했고 결과는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순환구조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사가 환자한테 말하기를, ‘이거 하루 세 번 식후 30분에 먹으세요.’ 남들 보기에는 정지화면이 아니고 연결된 운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환자 본인이 바보가 아닌 이상은 ‘내가 이 약을 먹지 말고 그냥 판콜 에이나 먹고 때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가만있어보자. 판콜 에이가 싸거든. 10개에 3천원 하니까 싼데 약 지어주는 건 의료보험이 되니까 의료보험 되면 약국 가면 노인은 65세 이상 1500원밖에 안 내.’ 뭐 온갖 생각하면서 ‘예. 따르겠습니다.’ 따르기는 뭘 따라요?

그런데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 할 사람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안이 죄가 되려면 자기 존재 증명 자체가 원천적으로 이건 실패로 끝났다는 걸, 끝났다는 판정을 내려줘야 그게 죄인 되니까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나는 의인될 가능성 전무하고 나는 죄만 짓는다는 판정을 내릴 때나 내가 죄인 되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아무도 없죠, 결국. 결국 아무도 없는 거예요. 주님께 부응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열두 제자 중에 아무도 없어요. 자기 주장들을 내세우면서 그냥 해버리죠. 그러니까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따라잡아서 내 것 만드는 목표로 간 거예요. 따라잡아서.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해요. ‘목사님의 복음은 언제 따라잡습니까?’ 따라잡아서 뭐해요? 따라잡는 게 문제가 아니고, 따라잡았던 그 결과를 어느 아지트로 가져가느냔 말이죠. 나의 아지트라 하잖아요. 나의 아지트. 얼추 따라잡았다고. 그게 바로 예수님이 생각하는 ‘안’과 인간들이 생각하는 ‘안’의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에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원인으로 들어가서는 결코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어요. 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은 십자가 이후에 마태복음 9장을 다시 보면서 성령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할 때 그때 성령오고 난 뒤에 이게 무슨 뜻인지를 그때 아는 거예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그거 썼던 제자도 마찬가지에요. 마태도 마찬가지고.

‘예수 안’ 이전에 ‘나의 안’이 우선이에요. 나의 안이 우선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실 때 필히 나의 안은 예수님에 대해서 요모조모 따져보고 내린 결론이 ‘없애자. 죽이자’에요. 죽이자. 이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만의 결정이겠어요? 아니겠죠. 제자들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죽이자’까지 노골적으로는 아니지만 ‘피하자’까지는 되겠죠. 근처 가지 말자.

이처럼 인간은 캡슐 안의 존재에요. 아직까지 본론을 제가 이야기 안 했어요. 서론만 이야기했어요. 본론은 뭐냐? 아까 언급은 했죠. 본론은 ‘안 되는데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방식은 뭐냐?’ 자폐적으로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을 주님께서는 구원해내십니다.

구원해내고 난 뒤에 요한복음이나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마구마구 쏘아대는 구원, 의, 영생, 천국 이 모든 것에 조건이 다 붙어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의, ‘예수 안’에서의 영생, ‘예수 안’에서의 믿음, ‘예수 안’에서의 소망. 모조리 다 앞에 뭐가 붙어있어요? 예수 안이 붙어있다고요. 예수 안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고린도전서 1장. 아까 로마서 8장 이야기했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뭐가 없다? 정죄함이 없느니. 정죄함이 없다는 거기에 눈독 들이지 말고,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정죄함이 없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말씀 자체가 나를 증거하는 내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건 뭐 그림 속의 떡이에요. 우리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말씀 자체가. 우리 자체가 내 안에 갇혀 있는데 예수 안으로 나아갈 수 없고, 예수 안으로 못 나갔다면 그건 끝난 거죠 뭐.

힌트는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아까 시간-이미지.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담의 죄로 태어났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 뭔가 사건 안에 끌어당겨요. 사건 안으로 자꾸 잡아당긴다고요. 당겨봐야 그들은 뭐 안 믿고 돌아서면 또 헤헤거리면서 자기 잘난 맛에 사는데 그러든지 말든지 어쨌든 간에 자꾸 끌어당기는 것은 언약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게 아니고 율법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나 언약이 그 불신자 같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경유하도록 조치를 해버려요. 경유하도록.

골리앗 이야기 나왔으니까, 아까 골리앗 앞에 누가 등장해야 되죠? 다윗이 아니라 소년 다윗이 등장하죠. 소년 다윗. 소년 다윗과 골리앗의 결투 장면은 관객들이 많았어요. 이것은 하나의 하나님이 만든 드라마에요. 관객들이 많은 거예요. 거기서 도박자들이 도박을 건다고 해봅시다. 다윗에게 판돈 걸래요, 안 그러면 골리앗에게 걸래요? 일대 일로 붙었는데. 어디에 걸겠습니까?

첫째 시간 마치면서 찝찝하게 마치면 제가 예의가 또 아니잖아요. 정답을 암시하고 첫째 시간 끝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한도초과’. 다윗은 자기 한도를 초과했습니다. 골리앗은 자기가 아는 한도 안에 있습니다.

다윗은 흔히 말하는 자기 안에서 벗어나니까 자기 안에서 벗어난 그 곳에 ‘내 안에서 벗어났다’가 아니라 다른 안이 대기하고 있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나 안이라는 작은 원 밖으로 나가니까 여기 뭐가 기다리느냐 하면 큰 원이 있어요, 큰 원. 큰 안이 있어요. 큰 안.

이것은 바로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엘리사의 사환이 “이제 우리는 죽었습니다. 저기 보세요. 얼마나 군사들이 많습니까?” 하니까 게하시의 눈을 뜨게 해줬죠. 그러니까 어땠습니까? 이쪽 엘리사 편의 천군천사가 저쪽보다 더 많아요.

그럼 게하시는 왜 우리는 둘밖에 없고 저들은 많다고 했습니까? 자기 안에서 못 나와서 그래요. 그럼 게하시는 왜 자기 안에서 못 나옵니까? 내 것의 효용, 내 것의 효력을 끝까지, 보잘 것도 없지만 끝까지 그것만을 믿습니다, 하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끝까지.

구약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스토리에 인간들을 집어넣어서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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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1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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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