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3장 18절 (영문 없는 구원) 240618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3장 18절 (영문 없는 구원) 240618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결과로 세상이 만들어진 게 아니고 일찌감치 이 세상은 십자가 안에서 일어났던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창조된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이 말은 이렇게 하면 제일 쉬워요.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가능치 않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죄 지어서 구원, 아니죠. 강퍅해서 구원, 아닙니다. 영문도 모르게 구원, 맞습니다. 영문도 모르게 구원받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냐? 이걸 가지고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선과 악 그 위에서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생명나무. 생명나무 보니까 선과 악하고 그 자체에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선과 악, 내가 착하게 산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선과 악 그 이상의 범위를 생명나무 범위로 보는 걸 가지고 회개라고 이야기해요. ‘회개’. 그러면 날마다 회개한다는 말은 뭡니까? 날마다 위에서 보는 생활을 날마다 회개라고 하지요. 그 회개의 경우가 누가복음 15장 16장에 잘 나와 있는데 15장에 보면 제일 먼저 나와 있는 것이 양, 잃어버린 양 특징이 뭐냐 하면은 영문도 몰라요. 본인이 “아이고 우리 목자!” 하고 찾아 다녔어요? 자기 혼자 좋다고 다니다가 “그런데 친구들 다 어디 갔지? 99마리 다 어디 갔지? 나만 남았네?” 이러고 있을 때 누가 찾아 왔어요? 친구들이 왔습니까? 야! 호철아 하고 찾아왔어요? 아니죠. 누가 찾아왔어요? 목자가 찾아왔어요. 목자가 뭘 놔두고 찾아왔습니까? 99마리 양을 두고 친히 나 하나 찾기 위해서 온 거예요. 찾으니까 비로소 자기는 뭘 알아요? ‘아하! 내가 잃어버렸구나’ 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발견하는 겁니다. 그제사. 양은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린 양 조차도 주님의 권력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 양은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것은 주님만 가능하게 되어있어요. 주님만.
또 동전. 동전이 무슨 이성이 있어요. 주인이 갖고 나가다가 또르륵 해가지고 책상 밑에 떨어졌는지 의자 밑에 빠졌는지 모르죠. 찾는 데는 누가 찾습니까? 낑낑 동전이 주인을 찾습니까? 누가 찾아요? 밤새도록 찾는 것은 주인이 찾죠. 답답해도 주인이 답답해요. 우리가 답답하면 안돼요. 이게 무슨 베짱인지 모르겠지만 찾아도 주님이 찾아내지 우리가 주님을 못 찾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악해지는 게 아니고 인간 안에서 악을 뽑아졌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어디 가도 인간은 악해요. 인간은 선한 것이 없으니 하나도 없어요. 인간에게는. 인간 본성에는 뭐가 있습니까? 제발 예수만 없었으면 좋겠다는 그 본성. 다시 말해서 인간은 왜 구원받지 못하느냐 하면은 인간 전제가 뭐냐? 있음에서 나오거든요 있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아가 있고 자아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자기 뜻이 있고. 인간은 있음에서 나와요. 없음을 못 느껴요. 내가 여기 있는데 없다 이게 말이 돼? 거울 비춰 봐 내가 있잖아. 거울 볼 때 내가 한번 안 비춰봐야 아이고 이게 귀곡산장인지 귀신인지 이거 느껴봐야 정신 바짝 차리지요. 정말 신기한 것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신기한 게 아니고 예수님 모습이 비췄다면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성도라고 착각해가지고 또 영화 찍을라. 제2의 파묘 나올 수도 있어요. 양과 동전 이야기를 합한 것이 세 번째 탕자 이야기에요. 아버지는 탕자를 기다렸지만 탕자는 아들로서 귀가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이라도 되었으면’ 아들에게는 아들 의식이 없어졌어요. 벌써 자기는 아들 자격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도 나를 찾을 필요가 없어요. 이거는 내가 구원받겠다는 그거는 나한테 너무 시건방진 생각이에요. 그걸 가지고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 내가 아버지 앞에 아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왜 아들이야 내가 뭐했다고 아들인데. 나는 아버지를 버린 자야. 아버지, 하나님을 버렸어. 나는 나 스스로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작심을 한 그것이 나한테 친근해. 그 마음이 익숙해졌어요. 그게 자연스러워요.
있음의 세계에 통하는 것은 있음의 세계 뭡니까? 인간이 있잖아요. 있음과 있음의 세계에서 엮어주는 것은 뭐냐? 윤리와 도덕과 법입니다. 법에는 관행법, 관습법, 풍습 과거 내려왔던 그러한 상식 다 포함 돼요. 윤리, 도덕, 법 이것이 서로 묶어주죠. 우리는 있다. 그래서 윤리 있고 도덕 있고 법 있다. 바르게 살기 있다. 이게 있음의 세계에요. 없음의 세계는 오직 있는 것은 뭐 밖에 없는가? 십자가 밖에 없어요. 십자가 더하기 십자가 더하기 십자가 더하기 십자가 더하기. 그게 어떤 식이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한 시간은 누가 가져갔습니까?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림으로서 있음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세계가 떨어져나갔죠. 떨어져나가면서 인간이 있음의 세계에 있던 시간들 속에 그 다음부터 뭐가 오느냐? 시간이라면 시간이 만약에 두꺼운 책이라면 내가 만약에 여고생 2학년이다. 그럼 가을에 낙엽 막 떨어지잖아요. 그럼 괜히 좀 슬퍼져 눈물 흘리면서 낙엽을 주워요. 이쁜 낙엽 또는 가끔 있는 네잎클로버. 해가지고 그걸 바짝 말려가지고 비닐에 해가지고 책갈피 해가지고 책갈피마다 다 집어넣어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공부는 하나도 안하고 은행잎 이것만 집어넣은 거예요. 모든 시간 그 틈 사이에 전부 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 들어가는 것, 그게 회개의 삶이고 그게 바로 없음의 세계에요. 있음이 그대로 있고 있음을 쪼개는 거예요. 십자가로 쪼개는 거예요. 그게 바로 회개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인간은 윤리 도덕 법이 있는 이유가 이것이 우리 개인을 힘들게는 하지만 개인의 존엄성을 높여주는 계기도 되지요. 너 법 안 지키지? 나 법 지켰다! 이러거든요. 법이 고맙고 도덕이 고맙고 윤리가 고마운 거예요. 왜? 나의 있음을 계속 있어도 당연해. 있을 가치가 있다고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래요. 단군신화 몰라도 배달의 기수 할 수 있습니다. 배달하는 사람이 꼭 단군신화 그거 꼭 알아야 됩니까? 예수님이 누구건 관계없어요. 예수님을 뭐로 바꾸면 돼요? 법으로 만들고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 도덕으로 바꾸고 예수님의 모든 일을 착한 윤리로 바꾸면 나의 가치는 어떻게 되느냐? 더 높아지지요. 이게 바로 기존 교회가 하는 짓거리 아닙니까.
그들이 모여서 무슨 사건을 만들었습니까? 백성들과 장로들과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거기 본디오 빌라도까지. 본디로 빌라도가 수집하는데 그들이 왜 따라올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은 이것 때문에 그래요. 마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논쟁하고 그들이 지니까 가이샤를 동원시켰어요. 그 시대에 대빵이 누구냐 하면은 로마황제 가이샤였어요. 예수님을 기어이 흔들기 위해서 누가복음 23장에도 나오네요. 23장 2절에 “무리가 예수를 끌고 가서” 고소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볼 때 우리 백성을 미혹하여 가이샤에게 세금 바칠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여기 가이샤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했다고 그러한 죄목을 일부러 부각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그 당시에 대빵은 누구냐? 가이샤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들이 하나님을 모독해도 가이샤에게 빌빌빌 아부를 다하고 있는 겁니다. 아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뭐라고 뒤집어씌우느냐 유대인의 왕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왕은요 로마시대에 복속기관이기 때문에 왕은 로마 원로원에서 지명해야 돼요. 인가를 받아서. 인가를 받아서 유대의 왕이 되지요. 왕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안 그러면 민란이 일어나요. 국가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왕이라는 것은 이미 로마 권세가 왕을 정하는데 예수라는 작자를 자기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이런 고소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 너는 이제 죽었어’ 이런 뜻이거든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 자꾸 로마 쪽에 심기를 건드려줘야 예수님을 사형시키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들이. 아부쟁이죠 결국은.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빌라도가 세 번씩이나 심문을 하는데 자기가 두 번하고 헤롯 왕한테 심문을 했는데 22절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짓을 했느냐 그를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 지금 예수님 빼놓고 예수님은 죄인으로 몰아놓고 자기들끼리 지금 논쟁이 벌어졌어요. 과연 예수님을 죽일 가치가 있느냐? 없다고 하는 것이 빌라도입니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마저 자기 밑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위협적인 요인이 아니에요. 절대 위협적인 요인이 아닙니다. 있으나 마나예요. 있어도 예수님은 없는 존재예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뭡니까? 예수님이 만약 있어버리면 자기들은 하나님과 관련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와버리면 자기가 없는 존재가 돼요. 근원적으로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가 뭐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는데, 누군가 내가 여기 있어도 없다고 할 때 인간은 근원적인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내가 있는데 없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은 사람이 믿을 수 있는 한계는 뭐냐? 없는 걸 못 믿어요. 있는 것만 믿어요. 그나마도 유대 백성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그나마도 바리새인이 있고 그나마도 헤롯이 있고 성전이 있으니까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백성 맞는 겁니다. 비록 로마의 압제에 있지만.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뭘 헐어버려라? 성전을 헐어버려라. 또 예수님은 뭐다? 유대인의 왕이 오신다. 내가 왕인데. 내가 메시아인데. 메시아는 구름 타고 오신다. 내가 메시아라니까 내가. 세상 권세? 내가 세상보다 더 센데. 그 세 가지를 사람들이 못 받아들이지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두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첫 번째가 유대인의 왕으로 왔다고 했지요. 유대인의 왕으로. 메시아로 왔다는 거예요. 두 번째가 구름타고 오고 세 번째가 권세. 이 땅의 어떤 권세도 이겨낼 수 있다 했잖아요. 그래서 빌라도한테 이해가 안되는 게 저 광신도,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 그게 뭐 그리 굳이 그걸 없어야 될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없애려고 했어요? 왜 없애려고 했습니까? 그냥 살려둬도 되잖아요. 첫 번째가 성전이었다 성전. 빌라도한테 대들고 세 번째가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 성전을 없애야 된다. 헤롯이 점검을 했어요. 헤롯이 예수님을 심판할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진짜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만 무성한데 진짜 소문대로 기적을 본인 눈으로 보고 싶었던 거예요. 사람은 있음을 믿습니다. 없음은 안 믿어요. 내 눈으로 기적 행하는걸 한번 볼까 했는데 예수님은 헤롯한테 어떤 기적을 안 했거든요. 기적을 안 했으니까 사이비니까 헤롯 입장에서도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는 거예요. 본디로 빌라도도 마찬가지고. 여기서 오늘 강의의 제일 핵심인 부분이 나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뭐를 제안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 살아있어도 없는 거고 죽어도 없는 거고 굳이 죽이고 살리고 할 필요 없을 정도로 제발 내가 예수를 무가치하게 보는데 당신들도 나처럼 예수님을 아무것도 없는 당신 기억에 남겨둘 필요 없는 존재로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어떤 제안을 했느냐 하면은 빌라도가 나름대로 머리 쓴 게 그 당시에 가장 악한 살인강도가 있었어요. 바라바. 바라바가 있었어요. 바라바는 감당 못할 정도로 악하죠. 명절에 한 사람 풀어주는데 바라바하고 예수님해서 너희들에게 해를 줄 수 있는 바라바, 진짜 또 사람 죽일 바라바. 흉악한 죄인 바라바하고 예수님을 아무리 봐도 죄가 없어요. 그냥 종교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죄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될 이유가 자기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직격탄을 날렸지만 본디오 빌라도 자기는 로마인이기 때문에 이거는 남의 종교에 관한 거예요. 자기와 별 관계없으니까 별 가치 없지요. 누굴 풀어줄까? 이렇게 하니까 바라바 아니고 예수님을 풀어주라 이렇게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 밖으로 바라바를 풀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 차 물어요. 그럼 이 예수는 어떻게 할까? 이거는 완전히 격동이 되가지고 죽이소서! 죽이소서! 죽이소서! 라고 했어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야 되지요? 도대체 예수님이 그들 내부에 뭐를 건드린 겁니까? 바라바는 이미 사형이 결정되었지요. 없이 될 사람이에요. 없는 사람이에요. 바라바는 없는 사람 될 사람과 지금 안 없애고 살고 싶은 예수님 제시했을 때에 바라바가 하는 이런 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 정치의 한계를 보여줘요. 정치의 한계. 인간 생각의 한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한계인데 있음 세계 안에서 있음 세계가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대신 죽으심과 똑같은 결과가 뭡니까? 대신 살아났음. 살아났음인데 바라바는 뭐냐? 영문도 모르게 대신 살아남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결과가 오늘날 성도입니다. 이게 오늘날 성도에요. 십자가에 일어났던 십자가를 반복하니까 십자가 사건의 반복을 통해서 바라바 같은 인물들이 계속 생산되면 그 생산이 유일하게 성도가 되는 방식, 그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다른 방식은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한 작업은 뭐냐? 유대인도 있음이고 빌라도도 있음인데 있음과 있음 사이에서 누가 우세하다? 예수는 아무것도 아니야 보다 뭐가 우세하다? 예수를 죽이소서가 절대적으로 우세하게 되어있어요. 다말이 얼마나 이쁘냐. 지금 이쁜 게 문제가 아니에요. 키가 크고 몸매가 좋고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냥 미치겠어 좋아서. 이거는 있음의 세계에서 감당을 암논이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겁탈하고 난 뒤에 있음이 또 감당을 못해요. 자기 누이동생 때문에 내 인생에 오점이 났다는 그것이 그 생각하면 미워서 미칠 것 같아요. 이것도 감당이 안돼요.
그래서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이방 나라 빌라도가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있음의 절정은 십자가 사건의 있음의 절정은 바로 권력은 빌라도가 쥐고 있지만 바로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알아먹는 사람들. 율법이 우리에게 이미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법을 아는 사람들. 여호와가 존재한다고 철썩 같이 믿는 그들이 누굴 죽이는 거예요? 여호와를 죽이고 있어요. 왜? 왜 죽입니까? 자기 자신이 없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계속 가치 있음의 가치를 유효하게 가져가기 위해서 필히 조건이 뭐냐? 예수가 없어야 내 가치는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어야 나의 의는 존속되는 겁니다. 그동안 율법 지킨다고 퍼부은 투자, 투자금, 율법 지킨다고 내가 희생하고 양보했던 것, 나의 희생, 나의 순교, 주님께 대한 기도, 헌금, 전도 이거 어쩔 건데?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이걸 그냥 내일 아침에 쓰레기통에 집어넣을까요 이걸? 사람이 소유가 없으면 뭐라고요? 내가 없어지는데요. 소유를 인정하는 신이 무슨 신입니까? 바알 신이에요. 블레셋을 작살냈던 그 언약궤는 예수님이 되고 그 예수님이 들어왔던 예수님은 뭐가 돼요? 블레셋이 되는 거예요. 바알 숭배자, 여호와의 이름에 바알 숭배자가 되는 거예요. 지금도 한국교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 나오게 되면 그들은 ‘죽여버리소서’에요. 하나님이여 저 십자가 증거하는 거 죽여버리옵소서. 왜? 이유는 단 한 가지. 무엇의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에? 내 가치가 없어지죠. 내 속에 궁극적으로 마지막 소유된 것이 내 가치에요. 내 존재의 의미라고요. 존재의 의미. 아시죠? 존재의 의미. 끝까지 애인의 사진 붙들고 조금만 기다려줘 하는 것. 기다린들 뭐합니까. 여기 또 하나의 본문에 보면 가관이 또 나옵니다. 여기 23장 27절부터 2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아멘. 왜 웁니까? 왜 울지요? 사실은 네 자신의 있음을 가지고 울어라. 있음 자체가 이게 모든 것이 지금은 슬퍼서 울지만 그것은 네 있음의 기억에서 나온 것. 기억이란 사랑보다. 뭐 하나 준비했습니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노래하나 듣고 가실게요.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내가 갑자기 가슴이 아픈 건
그대 내 생각하고 계신 거죠
흐리던 하늘이 비라도 내리는 날
지나간 시간 거슬러 차라리 오세요
내가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 거죠
함박눈 하얗게 온 세상 덮이는 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이렇게 그대가 들리지 않을
말들을 그대가 들었으면
사랑이란 맘이 이렇게 남는 건지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어떻게 기억이 사랑보다 더 슬픕니까?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인간은 인간이 있음이죠. 내가 있음이죠. 내가 있음이 창조를 만들었기 때문에. 창조를. 두 가지 환경이 있는데 뭐냐? 첫 번째 그냥 주어진 환경이 있고 두 번째 내가 만든 나의 삶의 환경이 있어요. 나의 삶의 환경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눈물이 터지는 거예요. 눈물이. 나의 삶의 환경은 시간이 내 시간으로 전부 다 바뀌어져요. 내 시간으로 바뀌어지면 그 시간에 투자한 나의 고통, 희생, 아픔, 슬픔 그리고 기뻤던 것 좋았던 것이 기억에 누적이 되고 그 기억은 바로 내 삶의 환경에 오점이 생긴다든지 흠집이 생겨버리면 그 흠집이 생긴 것의 안타까움, 내 가치의 손상, 내 가치의 손상은 뭐냐? 내 창조의 나의 창조세계의 파괴와 무너짐과 죽음을 의미하고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내 자식이 어떤 자식인데 이태원 특별법을 만들어라!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세월호 사업, 우리는 사업까지는 안 바라지만 특별법 해서 2억 달라 이런 식으로 나올 수 있거든요. 내 자식이 죽었으니까. 너도 네 자식 죽어봐라 안 슬프겠나?! 내 자식 죽었다고 데모한다고 시에서 없애버리고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에요? 환경은 따로 있는데 환경은 누구 환경입니까? 이 환경은 무엇이 중심이다? 십자가 속에 주 없음의 세계에요. 없음의 세계로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인간들을 창조한 거라고요 주님께서. 하나는 저주, 하나는 천국 만드는데 이 주어진 환경의 내막은 모르고 인간은 그 안에서 마귀와 단짝이 되어서 나의 삶의 환경을 따로 만든 거예요. 따로. 참 예수님 훌륭한 분, 예수님 좋으신 분인데 쯧쯧 안됐다. 좀 참지 왜 할 소리 안 할 소리까지 다 해가지고 로마 당국자 왜 건드리고 바리새인들 왜 건드리나.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믿는데.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왜 그런 욕까지 하시느냐. 성전에 들어가가지고 이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야 하고 엎어버리고 왜 그런걸 해. 좀 참지. 그냥 병이나 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얼마나. 하고 그 아주머니들이 자식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랑하면서 막 슬퍼서 우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들의 자기 삶의 환경 가운데 좋은 의미로 가치로 함께 했지요. 예수님은 우리 편, 나는 예수님 편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어때요? 오늘날 교인들하고 비교해보세요. 교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난 주일날 설교인가? 기생 라합 이야기. 기생 라합이 누구를 보호했지요? 자기 동족을 파괴한 자를 기꺼이 보호했잖아요. 나를 파괴한 분을 보호하는 거예요. 그 껍질 역할이 성도의 역할이에요. 주님이 없어진 세계의 주인공이 주님이에요. 나로 하여금 나의 끈질기고 지독하고 깨어지지 않는 나의 삶의 환경을 유일하게 부술 수 있는 분이 주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로 책갈피 해가지고 집어넣어버리면 이 시간이 나를 위한 시간은 일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먹든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시간인데 우리는 먹든지 마시던지 나만의 세계, 행복한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삼위일체 다 동원시켰잖아요. 나만 잘되기 위해서 그랬잖아요. 아까 신명기 28장에 저주받은 모습 봤지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실질적으로 어떻게 해요?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랍 나라와 바벨론 군대를 보내가지고 완전히 포위하게 해가지고 어떻게 해요? 먹을 게 없어서 자기 애를 먹는데 그것도 사이좋게 인간적으로 나눠주는 게 아니고 자기 혼자 먹어요. 자기만 살기 위해서. 그게 여유 있을 때는 내가 그럴 줄 몰랐지요. 내가 그렇게 나만 지독한 사랑쟁이인 줄 몰랐지요. 남을 사랑하는 줄 알았지요. 남을 사랑하니까 제발 예수님이 우리한테 좋은 소리하고 축복하고 위로해주면 이 좋은 성품을 어디다 써먹겠어요? 아낌없이 주님께 써먹을 용의가 되어있다는 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한결같은 주장입니다. 자기를 파괴하러 온 분이라는 것을 왜 생각을 못해요.
아까 신명기 28장에 저주에 보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온유가 없다했어요. 심지어 있다 해도 그게 다 들통 나요. 없는 것으로. 그런데 민수기를 한번 볼께요.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했어요. 모세가 결혼을 또 했는지 아내가 죽고 난 뒤에 했는지 그건 모르지만 구스 여인을 취했어요. 십보라 이후에.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는 그건 모르겠지만 또 결혼했는데 3절에 보세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되어있지요. 유일하다 온유함이. 자, 온유함이 뭐냐?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 중에도 온유함이 있는데 온유함이 뭐냐? 온유함이라는 것은 나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게 온유함이에요. 나의 가치를.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에 대해 쭉 나와있잖아요. 그걸 한마디로 말해서 뭡니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어요. 그걸 가지고 ‘선물’이라고 했거든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선물이에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를 아예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방법은 뭐냐? 주님 나라가 이 땅에 없는 세계에요. 없는 세계에요. 있음이 없는 세계를 저주로 폭파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너는 죽었어 이거거든요. 요한계시록 6장에 보게 되면 16절에 보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하나님의 진노를 커버하는데 우리로서 커버할 길이 없고 좀 든든해 보이는 게 뭡니까? 그 두꺼운 산과 바위라도 덮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약간은 덮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확실하고 투명하고 노골적이고 이거는 막아낼 재간이 없어요. 모세는 그걸 시내 산 위에서 직접 경험했어요. 모세가 자기 가치를 내세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모세는 뭐라고 하느냐? 모든 있는 자들은 없는 세계에서 자기 가치를 내세울 수 없음을 모세는 알기 때문에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에요. 다른 말로 해서 온유하지 않으면 구원 못 받은 사람입니다. 온유하지 아니하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알아서 온유했다는 말은 모세는 그 시내 산에 봤던 그 없음의 세계가 율법 안에 응축이 되어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 안에 이미 들어와버린 거예요. 들어와버리니까 모세는 기겁을 하지요. 백성들이 함부로 대들고 자기 누나가 여자 없어서 흑인여자하고 하느냐 이렇게 욕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한 것에 대해서 기겁을 했지요.
미리암이 어떤 여자입니까? 모세 누나지만 출애굽 할 때 찬양 지휘한 사람이에요. 선창해서 찬양해가지고 백성들 따라 해서 모세 하는 과업에 협조가 대단한 거죠. 원래 목사 가정에 목사 사모들이 협조가 많잖아요. 협조 많으면 뭐합니까? 지옥 가는데. 협조는 하는데 본인은 지옥가요. 협조한 이유가 뭐에요? 자기도 밥 먹고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여느 아내들처럼. 당신이 잘 되야 내가 호강하잖아. 그러기 위해서는 교인들 앞에서는 뭘 보여야 돼요? 신앙 개뿔도 하나도 없으면서 신앙 있는 척을 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견디다 견디다 못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김건희 되는 거지. 명품 갖고 와.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해. 아닌 척 할라고 하니까 도저히 감당이 안 되가지고 노골적으로. 다른 큰 교회 연봉 2억 받는데 나는 1억 받으니까 괜찮잖아. 약간 위로가 되지요? 아까 있음과 있음 사이에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윤리와 도덕과 법. 관습, 상식 이런 게 통해요. 그걸로 자기 의와 자기 가치를 그나마 커버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들어가면 안돼요. 십자가 들어가면 온유하던지 아니면 자기 새끼 잡아먹던지. 인간도 아니던지 둘 중에 하나 해야 되거든요.
아까 노래 가사를 보면서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슬픈 이유가 남이 나를 슬프게 해서가 아니라 내 있음 안에 슬픔이 이미 내장되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랑 좋은데 기억이 사랑보다 더 슬프냐? 사랑은 타인이 사랑할 때 내 기억이 착각을 한 거예요. 사랑은 오래가지 않아요. 한 순간의 착각이었어요. 사랑으로 왔다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왔다가 사랑이 처음에 왔던 그 태도가 유지가 안 되고 어느 정도 나를 갖고 놀았다 싶으니까 슬슬 본전 뽑는 거예요. 서로가 마찬가지에요. 서로가. 인간은 자기 사랑에 미쳐있기 때문에 남에게 줄 사랑이 인색한 법입니다. 언제까지 사랑이 오래가지 않아요.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그거는 밧데리고 백만 번까지 가지도 않아요. 사랑은 남을 차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법 수완에 불구합니다. 자기 사랑은 인간은 빠지지 않아요. 왜? 있음의 가치, 나 있다는 가치는 내가 늘 확보해야 되니까. 그래서 나의 가치에서 가장 최후의 적이다, 나를 힘들게 한다. 그게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죠. 그 십자가 사건 안에 뭐가 있느냐? 여인들이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시는 모습을 보고 측은해서 우는 것이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요소 중에 하나가 됐지요. 그 요소가 오늘날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면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오겠습니까? 안 터져 나오겠습니까? 터져 나오지요. 나 예수님 불쌍해서 못 보겠어. 이런 거. 네가 더 불쌍해 네가! 누가 누굴 걱정해. 네 걱정해 네 걱정. 예수님 위해서 울어주면 뭐 아이고 마음이 착하고 온유하고 칭찬할 줄 알았어? 완악해 너는! 주일날 설교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번 써봅시다. 똑같은 말이에요. ‘온유함이 없으면 성도 아니다.’ 똑같은 말이 뭐냐? 강퍅함이 없으면 성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냐가 아니라 온유, 강퍅을 누가 두 양면을 다 까발려주느냐. 우리 안에서 다 끄집어내주느냐. 율법의 완성인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 덩어리, 사건은 십자가 죽음 뿐만 아니고 거기서 벌어졌던 거기 관여했던 모든 요소들이 십자가 사건 일어날 때 함께 동반해서 같이 반복해서 일어나죠.
그러면 거기서 처방전, 사람마다 처방전이 다르잖아요. 너는 예루살렘 여인 역할, 너는 바리새인 역할, 너는 본디오 빌라도 역할. 본디오 빌라도 역할 누가 하느냐 하면은 재벌들. 교회 와서 우리 교회 고아원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데 크리스마스 때 좀 도와주세요. 야 어느 교회에서 왔단다 조금 줘서 보내라. 얼마요? 20억 보내. 껌 값이다. 해 놓고 빨리 처리해. 세금공제 들어가요. 사회 복지 이름 내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 있음이 중요하니까. 그건 누구 역할? 본디오 빌라도 역할. 내가 예수님 일 하는데 교회 일 하는데 얼마나 도와줬다고. 이게 본디오 빌라도 역할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머리 좋으니까 아시겠지요. 바리새인 역할은 누가 하는 거죠? 바리새인 역할 누가 하는 겁니까? 당회장 목사가 하는 거죠. 당회장 목사. 왜? 교회가 있잖아요. 내 교회. 내 교회가 있잖아요. 여기 뭐 교회 전도사도 계시고. 내 교회가 있다고요. 내 교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내 교회가 있다는 거예요. 누가 누구한테 맡겼어요? 맡긴 적 없어요. 내가 맡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 되겠어요? 내 교회 없어지면 누가 없어져요? 내 가치가 없어지잖아요. 내가 목자가 아닌가? 내가 신자 아닌가? 내가 신자 아니면 안 되고 목자 아니면 안 되는 거야. 그럼 내가 목자고 신자인 걸 뭐로 증명해야 돼요? 내 교회 교인 수가 불어나야 내가 진짜 목자다운 목자인 것이 증명이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방해되는 것은 짤라내야 되는데 아직 안 짤리고. 같은 한통속인가. 이게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리면 제일 먼저 반응이 뭐에요? 온유의 반응입니까? 강퍅의 반응입니까? 제일 먼저 강퍅이 와요. 강퍅이. 제가 주인하겠다잖아요 저 사명감 있어요. 이런 식으로 앙탈을 부리지요. 그런데 그게 뭘 죽이는 거예요? 바로 이게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들통날 때 그게 바로 선과 악이라는 수준을 뛰어넘는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생명나무의 안목이에요 그게. 아 주께서 나를 이런식으로 주의 일을 양쪽다 하게 하시는구나. 겸하여서 복이라는게 없어요. 그런데 어딜 거쳐서 복되게 해요? 저주를 경유해서 저 저주의 값을 치루면서 함으로서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제2, 제3의 바라바가 되는 겁니다. 오늘 제목 정했어요. ‘영문없는 구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성경을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보고 해석해왔었습니까.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나 잘난 것만 끄집어내고 나 신자라는 것만 끄집어내는 목표로 봤는데 이런 목표와 목적을 주여 죽여주시고 파괴시켜 주셔서 영문도 모르는 체 이미 구원받았기에 십자가 사건의 반복성만 증거하는 그 감사와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