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40613b잠8장35절(생명나무로 본 창조)-이 근호 목사
안양20240613b잠8장35절(생명나무로 본 창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KTX타는데 만약에 앉아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그거 내 자리인데요.” 할 때, 내가 먼저 앉았으니까 내 자리다, 할 수 없지요. 뭘 끄집어냅니까. 그럼 표를 끄집어내지요. 기록된 거죠. “아, 미안합니다. 3호하고 4호하고 착각했습니다.” 하고 비켜주잖아요. 그러니까 기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나무과 선악과를 따먹을 때, 에덴동산이 인간 중심이 아니고 자리 중심이에요.
니가 여기에 에덴동산에 니 자리가 있으려면 조건이 있는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죽는다. 그러면 죽어도 에덴동산에서 살면 되잖아요. 그런데 죽은 자는 생명나무는 죽음이 없어요. 영생이기 때문에. 영생이 있는 영생의 동네에 죽은 자를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죽은 자를 넣어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추방해버리지요. 그런데 이게 악마가 노렸던 거예요. 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그냥 만든 게 아닙니다. 뭐 개, 돼지 만드는 식으로 만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에 특별한 투자를 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이 하나님 계신 곳에 같이 못산다는 그것을 못산다는 그 모순을 악마가 노렸던 겁니다. 하나님 자체의 허술함, 부실함, 모자람, 불합리함, 온전치 못함, 인간을 매개로 해서 인간을 갖고 놀면서 그걸 공격해 온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약속대로 추방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추방했다고 해서 아담이 지옥가는 겁니까? 아니지요. 왜 아닐까요? 아담의 부인의 이름이 있어요. 아담 부인의 이름이. 그게 생명입니다. 아담은 여자 하나 잘 만났어요. 자기는 흙이지만, 부인은 생명이라고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내부적인 어떤 이동이 움직임이 생기게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만들어버리면 어떤 형상이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기록되었다 하는 이 자체를 이 기록된 것에 대해서 확정시켜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움직임을 기록된 데다가 여기다가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하늘에 앉아있으면 그건 예수님이 아니에요. 어디로 와야 됩니까. 땅에 왔다가 가야 돼요. 땅에 왔다가 가야 되면 거기에 하나의 절차가, 과정이 생기겠지요.
그 과정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 발생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이 돼요. 그걸 로마서 8장에서는 맏아들의 형상을 입은 자, 이리되는 겁니다.
맏아들의 형상을 입은 자의 특징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가 관여한 것이 아니고 누가 했어요? 예수님이 하신 결과를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협력하여 선이 된다는 원리에요.(롬8:28) 협력하여 선이 된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이게 선이다. 합한 것이다. 협력하여 선이 되니까 그 사람에게는 선악 체제에서 뭐가 빠져버리고 말았어요? 선과 악이 같이 묶여져 있던 것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선이 되어버리면 뭐가 날아가 버려요? 악이 날아가지요.
그러면 선악에서 악이 없으니까 그 사람은 어디를 못 가느냐 하면 지옥을 못 가요. 지옥을. 아~, 지옥은 조건을 맞춰서 가야 돼요. 나무가 두 그루잖아요. 미래가 완전히 선별된 완전히 확정되고 구획으로 마감되어 버린 세계는 딱 두 세계밖에 없어요. 하나는 선악과로 가는 나라, 왜? 그래야 정녕 죽으리라,가 유효하니까. 또 한쪽은 뭐냐, 정녕 살리라, 그러면 그 가운데서 거기에 가려면 선악체계를 분질러 버려야 돼요. 완전히 박살되어 버려야 되지요. 인간세계에 이렇게 아까도 첫 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마는, 하늘이 어디에 왔느냐, 천국이 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상이에요. 지상에.
그래서 이렇게 정리해 봅시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범죄한 인간에게 있어 생명이란, 아~ 어렵습니다. 이 범죄한 인간. 선악과를 알고 있는 인간에게서의 생명이란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여, 우리가 죄인인 건 맞는데 생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한다면, 안 가르쳐주지~이리 되지요.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의 책에서는 그걸 비밀이라고 했어요. 비밀.
비밀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삼손 생각해야 돼요. 수수께끼 생각해야 돼요. 삼손 혼자만의 체험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체험을 몰라요. 사자를 힘센 날뛰는 사자를 때려서 힘으로 까불고 있어! 하고 마동석이 치듯이 한 번 쳤는데 쫙 뻗었거든요. 다시 길에 가보니까 그 죽었던 사자에서 힘센 사자에서 뭔가 달~콤한 게 나오더라. 그게 뭐냐 하면 벌들이 벌집을 만들어가지고 꿀이 나오는 거예요. 이건 누구만의 경험입니까? 삼손만의 경험이지요.
그걸 수수께끼로 냈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이 수수께끼를 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사흘이 아니고 넉달 줘도 못 풀어요. 이 수수께끼는 기록된 거예요. 기록된 것. 인간세계에서 현재 인터넷 세계에서의 자본주의는요, 소비를 하고 소비를 한 흔적이 기록에 다 남아요. 고객님! 하면서 전화오잖아요. 흔적이 남는 거예요. 요번 신상 나왔는데 사실렵니까. 소비한 게 기록되고 기억된 게 빅데이터, 그 전체 클라우드 모든 자료가 모이고 거기서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고. 소비, 기록, 소비에 순환. 이게 현대 미디어세계에 미디어 자본주의. 기차표 안 끊었는데 내 자리가 있잖아요. 이게 뭡니까? 이게 빅데이터에요. 자진해서 내 의사를 거기다가 포함시킨 겁니다.
거기에 모조리 다 인간의 것이에요. 인간의 것에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세계입니다. 이게 점점 더 구체화되고 현실로 굳어졌지요. 거기에 생명나무가 끼어들었으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는 그 생명나무를 사람들이 이해 못할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완전히 굳어졌으니까.
이 자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지혜를 짜모으면 되느냐에 있어서 그것으로 확정된 세계에 하나님의 비밀이 복음이라는 비밀이 들어와버렸으니까 인간들은 그걸 이해 못하고 납득을 못해가지고 이해 못하고 납득 못하면 취하는 태도는 뭡니까? 강제로 이 인간세계에서 강제로 필요없다고 추방시켜 버리지요. 그게 뭐냐, 과잉 에너지. 남아도는 에너지 또는 여분의 에너지.
굳이 쓸데가 없는 거예요. 이 선악체제에서의 복음은 아무짝도 쓸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선교나 전도라 하는 것은 하지 않도록 애를 써야 돼요. 하지 않도록. 상당히 중요한 건데요. 왜냐, 선교, 전도하게 되면 반드시 내가 거기다가 끼어들어요. 내가 끼어들어요. 그러면 우리라는 존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협력하여 선을 이룬 완성된 입장에서 이미 모든 것이 완료가 되고 완성된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의심’이에요. 의심.
내가 할 수 있는 건 의심입니다. ‘선교, 전도, 꼭 해야 돼?’ 라고 이게 의심이에요. ‘내가 그 사람을 굳이 꼭 구제해야 돼?’ 의심을 뭐든지 의심을 해야 돼요. 의심 속에서 내가 예상 못한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모든 예수님의 활동이 다 그래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잖아요. 그럼 도와줘요. 도와줬는데 그들이 예상 밖의 잉여에너지가 발생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거 이상으로 왜 주지? 우리가 이런 걸 원한 건 아닌데. 우리 오빠 낫게 해달라고 초청했는데 우리 오빠를 죽이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리지요. 우리가 이런 걸 원한 건 아닌데 이걸 왜 주시지? 그 여분의 주시는 것은 뭐냐, 우리의 행함인 손탈 수 없는 걸 주시지요.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걸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가 이만큼을 예상했는데 내가 빨간색을 원했는데 파란색을 줬을 때에 이 파란색이 뭐를 추방하는 기능이냐 하면 “니 빨간 거 원했잖아?” “네, 원했습니다.” “그게 바로 죄야.” 라고 날마다 매일같이 니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책망하고 지적할 수 있는 근거 거리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거예요. 얼마나 고마운 줄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니 그만 살으라 했어, 안했어?” 그럼 우리의 답변은 뭐냐, “그래도 살아야겠습니다.” 이렇게 답변하면 틀렸고요, “주님이 살려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니가 나를 사랑하라 했어, 안했어?”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했잖아요.” 이런 대화. 이게 여분의 것이고, 잉여의 에너지에요. 이거는.
“회사 부장이 또 니 일 잘했다고 백만원 줬지?” “예, 줬어요.” “그거 꼭 받아야겠어?” “안 받으려 했는데 주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다음에 일 잘해서 이백만원 받아야지.’ 이걸 주께서는 용납을 안해요. 내 행위가 끼어드는 것을 용납을 하지를 않아요. “니 애가 또 일등했지?” “내가 10등하라고 그렇게 했건만,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고 그렇게 신신당부해도 꼬1등하네요.” 이런 식으로.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이 가장 악한 욕망, 악한 욕망을 주께서는 지적해요. 악한 욕망이란 무슨 욕망이냐, 순교하라는 욕망. 스데반집사는 죽기까지 복음 전파하겠다는 것이 가장 악마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러니까 순교하겠다고 해외로 기어나가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기어나가는지 모르겠어요. 왜 나갑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사용가치를 높이겠다. 한국에서는 묻지도 않는 거, 아프리카에 가면 물어줄거다. 그러면 아프리카에 가던지 아프리카는 안가고 왜 영국에는 갔는가, 솔직하게 이야기해봐라. 나도 내 아는 공부 좀 시켜야겠다. 영어 좀 시켜야되겠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하늘이 땅에 들어왔어요. 땅은 이해 못합니다.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런데 생명나무의 특징은 뭐냐, 선별한다 했지요. 선별. 이것은 선별하는 기능을 뭐라고 하느냐, 율법적 기능이라 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말씀대로 하면 복을 주되 신명기28장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뭘 받습니까? 저주 받지요. 말로만 그렇습니까? 말로만 엄포놓는 정도에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 왔을 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어떤 엄포나 협박 공갈을 하지 않았어요. “나는 선지자인데 내한테 잘해줘!” 이랬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까 뭐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까 제가 뭐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선교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요. 전도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아브라함은 전도 선교한 게 아닙니다. 그냥 움직였어요. 그냥 움직인 거. 여러분의 실력을 믿고 한 번 물리적으로 나가봅니다.
옛날 물리학은 있음에 관한 것이에요. 있음. 있음에 관한 것이에요. 있는 것에 던져봤다가 굴려봤다가 태워봤다가 물에 녹여봤다가 다른 용액으로 섞어봤다가 전부 다 있음가지고 설명하고 측량하는 거예요. 진화론도 마찬가지고. 오리, 너구리 했다가 진짜 너구리하고 어떻게 변화가 있느냐, 공간이 어떤 영향을 주느냐, 시간이 어떤 영향을 주느냐, 이런 거예요. 있음을 가지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물리학을 있음을 가지고 죽 설명하면서 있음에 대해서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관찰하거든요. 그런데 양자물리학이 나와가지고 인간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관찰을 할 때, 인간은 주도권을 갖고 있고 대상은 하나의 객체에요. 인간의 종이에요. 인간이 다루는 도구에 불구한데. 이 대상이 인간을 잡아먹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인간이 오히려 이 대상이 인간에 대해서 만약에 이쪽(대상)에서 시선을 보내고 이쪽에서 관찰을 해버리면 인간이 종이 되어버리고 이 대상이 뭡니까? 이 대상이 주가 되어버리지요. 이 대상이 뭐냐, 빛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속도를 계산하는데 빛의 속도는 인간이 빛의 속도를 관찰하는 인간의 관찰을 종으로 만들었어요. 니가 백날 관찰해봐라. 나는 일초에 3000만Km 변화지 않는다. 이게 변해야 돼요. 뭐든지 대상은 이 세상의 물질이라 하는 것은 변해야 되는데, 빛은 물질이 아닌 거 같아.
왜 이렇게 속도가 일정하지? 속도가 일정하니까 관찰하는 내가 자(줄자)가 아니고 뭐로 자(줄자)가 되느냐 하면 빛의 속도가 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빛의 속도가. 빛은 뭐로 되어있느냐 하면 광자라는 입자로 되어있어요. 입자.
그런데 광자라는 입자가 인간의 관찰을 오히려 극복해가지고 덮어씌었어요. 여기서 인간들은 갑자기 겸손해집니다. 우리는 모르는게 있다. 이리 시작했다가 우리는 태반이나 모른다,가 되어버렸어요. 주도권을 아무 이성도 없고 감정도 없고 의지도 없는 빛한테 이걸 넘겨줬어요.
인간은 빛을 보고 입자다. 하나의 광자로 입자로 되어있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빛이 인간세계를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결국 나온 결론은 뭐냐, 빛은 입자가 아니고 빛은 파장이다. 파장은 뭐냐, 에너지다. 고로 이 세상은 뭐다? 에너지다. 이게 인간의 지혜의 끝입니다. 인간의 지혜의 끝이에요.
그래서 요 원칙에 의해서 인간은 외계인이 있다면, 외계인을 인간이 그려낼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려내느냐 하면, 인간이라는 요렇게 생긴 것을 에너지의 법칙에 의해서 하게 되면 인간은 요 크기(얼굴 대비) 요 분량을 넘어서면 안돼요. 여기서 인간이 몸무게 200Kg되면 못 살아요. 이 지구라는 환경에서.
그렇다면 어느 행성에 거기의 밀도, 중력에 대한 모든 자연조건을 계산해 볼 때 기껏 해봐야 거기서 어떤 외계인이 산다면 요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인간이 미리 측정이 가능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입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요, 먼저 뭐부터 한다? 에너지에서 나와서 에너지에서 뭐가 나온다? 파동이 나오고 파동이 뭉쳐진 것을 가지고 입자고, 입자가 바로 사물이에요.(파장 →입자 →사물)
그럼 어떤 사람이 말기 암에 걸렸다. 어떻게 치료해야 된다. 치료하려면 뭘로 치료하면 됩니까. 요 과정을 거꾸로 밟아가면 돼요.(파장←입자 ←사물) 인간이라는 암세포에다가 암세포는 입자 아닙니까. 어떤 대상이지요. 그 대상을 더 파고 들어가면 뭐냐, 원자핵과 양자전자로 되어있잖아요. 양자전자니까 거기서 나노미터 수준의 더 작은 파동이라든지 에너지를 주입하게 되면 자체적으로 단백질이나 아미노산 구조의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 말이지요. 전자의 변화.
그 전자의 변화를 임의로 어떻게 조정하거나 아니면 촉매나 좋은 효소를 집어넣어서 단백질을 조정해 보면 그게 자체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손을 떠나서 자체적으로 이리 맞춰봤다가 저리 맞춰봤다가 지 스스로 자연 스스로 자연은 스스로 라는 뜻이에요. 내츠럴. 자연 스스로 어떻게 하다보면 한 천번 하다보면 아다리 하나 걸릴 거다 말이죠. 그걸 포착해서 비법을 빼내면 앞으로 백발백중 치료하는 것마다 다 치료가 된다는 그런 계산이 딱 나오지요. 그거 하는데 기업체에서 많이 후원해 줘야 되고, 월급 줘야 되고, 많이 해야 돼요.
자, 문제가 된 것은 뭐냐 하면, 빛이지요. 빛인데 이렇게 되게 되면 인간은 알 거 다 알아버렸잖아요. 알 거 다 알았지요. 세세한 건 모르지만. 전체적인 구조 윤곽은 알았잖아요.
자, 그렇다면 아까 인간의 왕은 뭐가 왕이라고 했어요? 죽음. 죄. 그리고 마귀,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해결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겠다고 출발했다가 결국은 항복을 했어요. 온난화에 항복하고, 태풍에 항복하고, 인도의 최고기온이 54도에 항복하고, 중국이나 독일의 홍수에 항복했어요. 일어난 결과는 보지만 저 무안의 지진에 대해서는 단층이 중간에 쪼개진 것에 대해서는 인간이 결과는 4.5하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요. 그냥 결과만 봤지 해볼 도리가 없어요.
인간은 믿습니다. 뭘? 자연은 인간의 힘에 미치지 않고 자동적으로 안에 뭘 응축해 있다? 에너지를 응축해 있고, 에너지는 우리 말로 한 자로 뭡니까. 힘. 힘 속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태어났다가 그냥 의미도 모르고 그냥 힘 속으로 분해된다. 이건 완전히 불교사상이지요.
모든 것이 스스로 있다가 스스로 속에 우리가 함몰되는 거예요. 다시 태어난다고요? 그런 건 없어요. 그런 근거는 없어요. 위로한답시고 한 건데. 우리의 영혼 문제. 영혼 문제없다니까요. 빛이라니까요. 영혼이 아니고 에너지에요. 종교의 한계를 드러낸 거예요. 빛이 어디 있고,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고. 전부 에너지밖에 없는데. 그런 천국, 지옥을 증명하려면 뭘 동원해서 증명해야 돼요? 에너지화시켜줘야 돼요. 귀신을 사진을 찍던지, 사진을 찍는다는 말은 뭡니까? 그 인화지 위에 에너지 흔적을 남기는 걸 말하잖아요. 에너지가 스스로 뭉쳤다가 스스로 해체되는 이러한 것이 이미 다 나와있는데. 무슨 천국이 어디 있고, 예수님 도대체 어디 있어요? 하나님 어디 있어요? 삼위일체고 뭐고 없어요.
자, 이런 입자에서, 입자가 나오게 된 물리학에 나오는 것은 처음에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종교로부터 종교가 시답지 않게 되었어요. 그러면 우리의 지혜가 우리의 지혜로 해서 자연에 대해서 분석에 들어가보자 할 때에 제일 먼저 분석하는 것이 뭐냐, 물질인가, 운동인가, 제가 왜 갑자기 이 물리학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방금 제가 이 이야기한 것을 예수님이 알까요? 모를까요? 훤하게 아시지요. 왜? 죄안에 있으니까.
그게 선악지식으로 나왔으니까. 선악과는요, 선+악+( ), 그다음에 중요한 게 뭡니까? 지식이에요. 지식. 인간의 지혜에요. 지혜. 선악으로 구성된 지혜. 쉽게 말해서 3+5=지식, 지식이잖아요. 지혜는 뭐냐, 3+5가 어디에 유효하게 쓰일까가 그게 유효하게 쓰이면 선, 이게 악으로 쓰면 악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칼을 만들었다. 이 칼가지고 어디 쓸것이냐에 대해서 선과 악이 되는 거예요. 그럼 만드는 것은 어디에 속합니까? 지식에 속하고, 이 지식은 바로 가인의 후손들이 시작을 했던 거예요. 왜 가인의 후손들이 했는가, 인간이 모이면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사회적 혼란이지요. 사회적 혼란을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힘을 한곳에 모아야 되겠지요. 힘을 모으는 방법은 왕을 구하는 거예요. 왕은 영웅이에요. 사회적 혼란은 싫으니까 독재자를 만드는 겁니다.
왕건이 있지요. 왕건. 완건이가 29번 결혼했어요. 왜 29번 결혼했는가, 나라가 왕건을 왕이라고 인정을 안 해줘요. 깡패 두목이라고. 인정을 안해줘요. 각자 또 다른 깡패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뭐냐, 자기 영토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지점들을 낸 겁니다. 각 호족의 딸들과 결혼해가지고 자식을 놓으면서 거기에 이는 청주 지점장, 개성 지점장, 경주 지점장, 그런 식으로 나라를 다스린 겁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잖아요. 전쟁하는 비용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 비용 줄이는 방법은 뭐냐, 다른 나라와 혼인 외교정책을 벌이는 겁니다. 그랬다가 그 여자들이 전부 다 수입해서 온 세상의 온 종교는 다 수입해가지고. 나라가 엉망 됐지만.
그러니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어쨌든간에 지금 본인의 존재, 물질, 물질을 살려야 되니까 힘을 합쳐야 된다 말이지요. 그걸 누가 알아요? 우리 주님이 아시잖아요. 주님은 무슨 몸으로 오셨습니까? 죄의 몸으로 왔지요. 죄의 일부로서 오신 거예요. 들어오신 거예요. 죄의 일부의 모습으로서 들어왔다 말이에요.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힘에 얼마나 나약하게 노출되는지를 알아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믿음 좋고 찬송부르다가 등산하면서 찬송만 부르면서 뭐 이렇게 실로암 노래 막 부르면서 가다가 갑자기 미끄러졌다. 절벽에. 쫙 미끄러지면 순간적으로 뭐든 나무뿌리라도 쥐어야지 안 그러면 절벽에 떨어지잖아요. 그 때 온몸에서 교감신경, 부교감신경부터 해가지고 모든 신경 동원해가지고 온몸에 땀이 쫙 나는 거예요. 아이고, 땀 좀 나라. 이게 없어요. 쫙~ 나면서, ‘나는 몸이구나! 과연 몸이 나였구나!’ 그 다음에는 “주님 감사합니다.” 그건 나중에 동원된 지식 문제고.
‘몸은 몸에서 내가 나왔구나! 몸이 먼저고 나는 나중이구나! 내가 믿는 예수님도 혹시 내 몸에서 나온 게 아닌가’ 말릴 수가 없지요. 이게 바로 죄의 몸입니다. 죄의 몸에서 왔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 그게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생명은 죽음의 모습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죽음이 왕이잖아요. 죽음이 왕이다 말이죠. 그러면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호랑이굴속에 죽음굴속에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죽어도 자기 죽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내 죽음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어느 것도 설명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러한 어려운 점을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인생이란, 낡은 천조각 위에 그리는 그림이다. 인생이란. 아무리 그림을 예쁘게 잘 그려도 천조각이 세월 따라서 이게 찢어지고 낡아지게 되면 그 위의 그림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헤어져버리는데. 헤어져서 낱낱이 다 찢어지는데요.
이건 진짜 죽을 때 되면 한낱 꿈같아요. 실컷 현실, 현실, 현실+현실, 우리 손자한테 기도를 시켰어요. 니 오늘 기도를 해봐라 해가지고 요새 손자보고 하는데. 기도를 하는데 가만히 있어서 기도를 하는 게 아니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초코파이 먹게 해주시고, 그리고 초코파이 먹되 아토피 안 걸리게 해주시고, 그리고 계속..., 나머지 식구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다 기도하고 있는데 혼자서 온 집안 돌아다니면서 앤드, 앤드, 그리고, 그리고. 제가 전에 그랬지요. 앤드를 붙이는 이유는 인간의 기표의 순환구조라고. 순환사슬구조에요. 사슬구조. 수직적이 아니고 그냥 수평적이에요. 수평적. 도약이 안돼요. 독수리 날개도 없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그냥 맨 땅을 애굽에서 홍해건너서 약속의 땅뿐이에요. 초월적인 것은 모세나 경험했지 나머지는 없어요. 지금 율법이 산속에서 없는데서 율법이 그들과 함께 합세했잖아요. 율법이 합세했다는 말은 그리고 모든 결정권이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결정할 때 율법에 뭐가 있다? 힘이 있는 거예요. 기록한 것을 기록한 대로 지켜내는 힘!
그리고 저주받을 자는 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다는 것을 유지시키는 힘. 그 힘과 함께하면서 무슨 작업? 선별작업을 해나갔다 말이에요. 선별작업을.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낡은 천 조각에 어떤 인간도 이 낡은 천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없어요. 주님은 물질로 왔는데 인간들은 뭘로 보이게 합니까? 물질 맞아요. 주님 육신 맞아요. 부활한 것도 부활할 육신 있어요. 그러나 이걸 뭐로 보게 합니까? 운동으로 보이는 거예요. 운동.
그걸 요즘 사회 말로 사건으로 보이는 거예요. 사건. 사람들은 열심히 돋보기 들고 또 제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예수님 관찰하면서 우리가 지금 제대로 지금 믿을 만한 분을 믿는지, 안 믿는지 제대로 다져보고 다져보는 거예요.
주식 투자하는 걸 뭐라고 합니까? 나 사기 하세요. 하고 내미는 것. 주식해서 맡기고 인터넷 넣어주고 하는 것 있잖아요. 주식리딩방(메신저를 통하여 주식 종목을 추천하거나 투자에 도움을 주는 행위들) 그 하나 하나가 그 사람을 만났습니까? 아니요. 봤습니까? 아니에요. 휴대폰에 돈 거래만 있지요. 돈거래만 있다고요. 사기를 왜 당합니까? 직접 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뭐냐, 주식리딩방이에요.
예수님은 눈으로 봤어요. 손으로 만졌어요. 그랬던 요한이 어땠습니까? 도망갔잖아요. 그랬던 요한이 그래놓고는 요한일서에 가서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요. 이리 이야기한다고요. 왜 그 때는 눈으로 보고도 손으로 만지고도, 식사를 같이 하고도, 왜 도대체 그 분이 생명나무인가를 왜 몰랐는가 말이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건으로 보지 않고 내 몸이 여기 있는 걸 존재로 봤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물질로 봤기 때문에 그래요. 이 물질을 지키기 위해서 나한테 충성을 하고 나한테 봉사를 다했기 때문에 그래요.
몸 하나 살리기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주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하나의 갑자기 있다가 뽀르르 날아가는 사건 같은 거예요. 마술사들이 하는 것처럼. 모래하는 마술사. 모래하는 마술사가 모래를 모아놨는데 모래를 마구 뿌린다고요. 아이구 모래네. 하는데 손에 보니까 모래 막대기가 나오고 꽃이 나오고. 훅 뿌리니까 꽃잎이 나오고 이리 하잖아요. 속임수지만, 애굽의 마법사들이 그걸 했지요. 지팡이가 뱀이 되고, 강물이 피로 변하는 거. 마법사는 그걸 했다고요. 속임수를 했다 이 말이지요.
나중에 누가 고백합니까. 이건 마법이 아니고 우리가 지칭할 수 없는 어떤 주체자의 등장이에요. 우리 말고 따로 있다는 거예요. 우리 말고. 누가 개입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세계에 들어온 거예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을 이루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아까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 집안 이야기해봅시다. 예수님이 오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예상했지요. 예수님을 예상했다는 것은 평소에 본인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를 예수님을 앞에 두고 들통나고 노출된 대상이 됐다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사랑하고, 이렇게 믿습니다. 라고 했던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조치에 의해서 그게 와르르 다 헛된 것으로 다 망상인 것으로 무너지는 거예요.
고린도전서13장3절을 보겠습니다. 이런 13장3절 같은 것은 액자해서 집에 걸어놔도 괜찮아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것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찾아온 성령의 은사가 우리의 자아 내부를 노출시키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린 평소에 뭐하고 살았는가, 내가 구제하면 그게 구제가 되고, 내가 불사르게 내어주면 그게 순교가 될 거라고 예상하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그게 가짜라는 주님앞에 통할 수 없는 가짜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걸 바로 주께서는 선별해 내는 거예요.
왜? 우리 나름대로 이미 기록된 게 있어요. 아까 KTX 좌석표 있잖아요. 돈 쓸 때 한국은행에 보증이 되어있지요. 우리가 쓰는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왕이 마귀라는 왕이 보증한 힘에 계약서 그 구조 안에서 우리는 안심 놓고 우리는 출세와 성공을 내다보면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까 그 악마가 총동원해서 예수님을 분석하고 측량해보니까 예수님의 어떤 대목도 그들의 힘의 구조에 매치되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전혀 없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생명나무는 선악과 구조로부터 떼어놓는 의미로서 생명나무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걸 비록 합치더라도 그 구분, 그 분절, 그 단절은 계속 지속하고 유지되고 있었던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성령이 우리한테 왔다. 주님이 우리한테 왔다. 우리 내부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내 몸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우리 안에서 주님의 몸이 더 중요한 거예요. 이게 단절이 되어있었던 겁니다.
자, 이제 남은 문제는 낡은 천조각 위에 시간을 흐르면서 쓰여졌던 우리의 긴긴 인생 그게 천 조각이 찢어지는 순간 다시 말해서 우리 몸이 죽는 순간 몸이 운동이, 물리학적으로 몸의 운동이 정지되고, 세포에 산소의 공급이 중지되는 그 순간 우리의 기억속이 산소의 도움으로 기억했던 그 기억이 피속에 있는 산소가 끊어지게 되면 기억이 마술사의 모래처럼 뽀르르하고 우리 몸에서는 다 사라지지요.
그게 전조 증세가 치매에요. 치매. 치매현상이 일어나면서 산소 호흡이 공급되지 않으면서 점점 뭔가 잊어지는 거예요. 오래있던 장기기억보다 단기기억이 없어지다가 나중에 장기기억까지 자기 아들보고 “아저씨는 누구세요?” 이렇게 하지요. 나중에 아저씨라는 말도 단어가 아저씨인지 아줌마인지 구분도 안되고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가지고 뭡니까? 협력하여 뭘 이룬다? 선이에요. 그게 바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필요하겠어요? 주님 쪽에서.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데 교체, 같은 말로 대신하심이 꼭 필요하겠지요. 그러면 교체와 대신하려면 이 선악과 세계 속에 생명나무가 알아서 여기에 침투해 들어와야 됩니다. 침투할 때는 힘이 없어 침투하는 것이 아니고 강력한 힘으로 침투하지요. 강력한 힘입니다.
뭘 이기느냐, 죽음을 이겨야 되고, 죄를 이겨야 되고, 사탄을 이겨야 되고, 율법의 정죄를 이기는 힘이어야 돼요. 선악과를 분질러 버려야 되지요. 이걸 이기려면 죽은 선악과 인간에게 잔소리해서 될 문제입니까? 될 문제 아닙니까? 잔소리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뭐하느냐 방법은 딱 하나에요. 죄 안에 기록지를 남기는 거예요. 기록지를. 죄 안에 기록지를. 우리 죄인 속에 예수님의 자기 KTX 자기 좌석을 거기다가 만들어버리는 거죠. 좌석을. 그리고 이거는 내 자리라고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우리가 무명이 돼요. 무명이. 이름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돼요. 이름 있음이 이름 없음이 되어야 되고, 무명에서 누구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전환되는 절차가 필수적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전환되지요. 여기서 기록과 기록의 등장인데 요한계시록 보기 전에 잠언8장부터 먼저 봅시다.
잠언8장22절,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이리 되어있거든요. 잠언서 잠시 설명해 보면, 잠언서에서는 생명이 어디있느냐, 인간세계에서는 생명이 없어야 돼요. 생명이 없는데. 잠언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솔로몬의 계시지요. 솔로몬의 계시에서 드디어 생명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언급이 돼요. 아마 잠언서에 제일 많이 언급이 될 거예요. 잠언서에서. 생명이라는 거.
시편은 하나의 절차, 역사적 절차를 말해준다면 잠언서는 완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다 다윗의 세계 언약대로 되었다 치고 생명은 여기 저기 생명이 있다. 이리 되는 거예요. 또 완성이 된 것이 그걸 지혜의 문서라고 하는데, 또 완성이 된 것이 전도서, 또 하나는 뭐냐, 아가서. 아가서는 완전히 사랑의 낙원이지요. 들판. 날 잡아봐라~~~~ 날 잡아봐라~ 잡히면 니 진짜 사랑한데이!!! 둘이 뒹굴고 좋다고 껴안고 뒹굴고. 그게 아가의 낙원동산이지요. 낙원 동산.
이 잠언은 이미 모든 게 완료가 된 상태에서 선별작업을 이미 끝난 거예요. 생명은 어디에 있느냐, 지혜에 있다. 지혜가 뭐냐, 잠언 지혜가 뭐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게 지혜라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면 되겠네. 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 잠언서에 보면 8장에 보면 그게 아니고 여호와께서 하기 전에 나를 가졌다. 나. 여호와가 일하기 전에 나를 가졌다, 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여호와 안에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나라고 지칭하는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그 분의 사이는 언약관계, 계약관계에요. 계약은 힘이 없으면 계약관계 성립이 되지 않지요. 반드시 이 힘은 어떤 난관을 극복하고 그 힘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나를 가지고 그 분이 뭐냐, 태초부터 이 모든 창조에 관여했다는 겁니다. 26절~27절,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이렇게 죽 하면서 그 때 할 때마다 누가 나오는가, 나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35절,36절에,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태초부터 천국과 지옥은 이미 기록된 대로 결정났다고 이렇게 규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오면 안되고요, 주님이 주님의 자신의 스케줄에 따라서 우리를 활용하고 우리를 채용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게 찾아오심이에요. 선택된 자를 찾아오는 거예요. 뭘 보고? 기록된 명단 보고 우리한테 찾아와서 예수님이 직접 우리안에 스며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이걸 요한계시록20장12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보좌에 섰는데,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지금 사도요한은 거의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라 할 수 있지요. 죽었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미 죽었다가 사신 분이 사도요한을 덮치니까 사도요한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죽었다가 사신 분의 지혜와 모든 정보가 사도요한을 덮쳐서 그게 계시화된 거예요. 봤는데, 책이 두 권의 책이 있어요. 하나는 생명책이고, 또 하나는 자기 행위대로 기록된 책이 또 있어요. 행위책이라 할 수 있어요.
바다가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 내어주었지요. 왜 바다와 죽은 자들이 산과 들과 모든 죽은 자들을 내어줍니까? 아까 잠언서에 보면 모든 창조에 누가 관여돼 있어요? 예수님 자신이 관여돼 있지요. 그럼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이 모든 창조를 만들었잖아요. 그럼 창조대로 만들 때는 모든 것이 다 가시화되고 구체화로 다 드러나야 되지요.
인간의 출생과 죽음조차도 애초부터 누가 관여했어요? 지혜라고 일칭하는 예수님이 관여한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난 것이 없고 다 말씀의 개입된 채로 살아났다면 주님의 약속된 채로 기록된 채로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 받지 않고서는 주님의 고유 활동이에요.
일방적으로 쳐들어오심, “니는 내 사람이고, 니는 저사람, 내 사람 아니야!”라고 선별할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 권한을 찬양하는 거예요. 그걸 인정하는 겁니다. 왜? 내가 개입되지 않는 일이니까.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 분의 하신 일을 결과적으로 인정하고 구원받는 것. 이미 구원받았음을 그런 식으로 확인되는 거지요. 말을 어렵게 해야 돼요. 하여튼.
미움도 행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후차적으로 확인되는 거예요. 그래서 15절에,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는 그 결과를 우리가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말 잘 들어야 돼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 할 때, 반응을 이렇게 나타내면 안 됩니다. “나는 천국 갔구나!” 하면 안돼요. 나는 천국간다! 이게 아니고.
이런 일을 방금 기록되지 못한 불못에 던지우리라, 이런 일이 나로 하여금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믿어지도록 주께서 내 안에 말씀으로 작용하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씀이. 그래서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말씀의 작용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나의 구원은 말씀의 작용 일방적인 주님의 작용의 결과물이에요.
이게 기록의 능력이에요. 기록의 능력. 끝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아까 누가복음10장20절, 귀신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할 때에 딸가락! 딸가락!해서 정말 선악과가 딸가락되느냐, 아니면 그 선악과 조차도 허락한 것조차도 주님의 생명나무의 활동으로 딸가락거리는지 우리의 내부에 생명나무가 있는지 아니면 선악과가 있는지 그건 여러분 자신들이 아마 아시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명나무 빼놓고 세상을 알고자 한 그것이 바로 두려움과 공포의 소산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미 주께서 다 이룬 판에알아서 자기 백성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오직 주님에게만 있고,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리는 능력도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있음을 이 쉬운 것이 어떻게 믿어지는지 그저 감사와 감사케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