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0b 부산강의 : [시편]68(52:7)-언약으로 본 사회
20240610b 부산강의 : [시편]68(52:7)-언약으로 본 사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갈대아 우리에서 하란, 하란에서 에발 산, 그리심 산 그 밑에 애굽에 갔다가 그다음에 벧엘 갔다고 그다음에 헤브론, 브엘세바 다시 헤브론으로 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께서 자꾸 자기를 그림자로 자기 인생스토리가 장차오실 어떤 분의 스토리로 미리 당겨서 연극무대에 있는 마치 배우처럼 그렇게 자기를 사용하고 있거든요. 그게 다윗의 원천이에요.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왔으면 무슨 언약? 아브라함언약. 언약이 다윗에게 왔으면 무슨 언약? 다윗언약. 그 다윗언약에 연계해서 장차 예수님이 오시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그 언약, 언약, 노아언약까지 포함해서 파악하면 거기 공통점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공통점이 있겠지요. 그게 있어줄 때 그것으로 우리 인생을 이렇게 관리할 때 비로소 우리는 뭐냐 하면 언약의 사람,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게 의인되는 겁니다.
그 과정 속에서 아까도 했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할 것은, 언약이 왜 오느냐? 언약이 와야 이 세상에는 물이 없으면 우는 세계에요. 요즘 말로 하면 돈이 없으면 방성대곡, 통곡하는 그 세계, 통곡하는 시대입니다. 여기 언약이 투입되면 이 전체가 뭐냐 하면 비-언약이에요. 언약이 없을 때.
똑같이 땅에서 쫓겨나고 한쪽은 아브라함은 자기의 본향이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어디서 발견합니까? 자기 고향은 하늘나라에 있는 거예요. 내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늘나라에서 나를 이 땅에서 주님의 인생을 내 속에 삽입시켜서 나를 데리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종교라는 게 뭐냐? 종교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계속 강력하게 강하게 유지되게 만들어요, 나라는 것을. 아까 마태복음 16장 이야기했지만 존재는 뭘 통과 못합니까? 사건을 통과 못해요. 왜? 사탄의 마음이니까. 존재 자체가 사탄의 마음이에요. 곧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에 대해서 사건을 통과할 수가 없는 겁니다.
통과 못하면 결국 몸이 닳아지겠지요. 몸이 닳아지면 인간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요소에 의해서 이게 죽습니다. 내 몸이 사라져요. 내 몸이 사라지는 것을 인간이 미리 알아요, 몰라요? 알지요. 아니까 몸은 포기하더라도 그동안 고생하며 살았던 그 목포의 눈물과 더불어서 고생했던 그 사실을 포기 못하는 거예요. 분명히 나한테 있었는데 기어이…. 이것 누가 불렀느냐 하면 아즈마 아키라는 일본 가수가 부른 거예요.
하나 같이 옛날에 알았던 그 기억, 추억을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그게 지금 나이가 칠십이든 팔십이든 지금 나를 구성하기 때문에.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기독교를 이슬람을 믿는 게 아니에요. 힌두교를 믿고 불교를 믿는 게 아니에요. 나를 믿는 방식을 그 종교에서 채택하는 거죠. 종교라는 것은 그냥 메이크업이에요. 실제로 믿는 것은 나에 대한 신봉입니다. 나를 포기를 못해요. 그래서 물이 없으면 우는 겁니다.
누구를 향하여 우는 겁니까? 내가 나한테 하소연하고 있는 거예요. ‘야 너 무엇 좀 해봐라. 네가 이렇게 죽을 거야? 뭔가 해봐야지.’ 그런데 하갈은 해볼게 없습니다. 여기에 누구 물을 줍니까? 참 이게 신기하지요. 여기 보면 창세기 21장, 하갈아 무슨 일이 있느냐, 19절에,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하나님이 하갈을 살립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들어가죠. 하나님이 하갈을 살렸으니까 하갈을 다시 아브라함 집에 보냅니까, 아니면 안 갑니까? 하갈은 아브라함과 합세합니까, 합세하지 않습니까? 합세하지 않지요. 왜? 하갈은 비-언약적으로 하나님께서 키워줘야 되니까. 비-언약이 계속 유지가 돼야 십자가 사건이 필히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악마의 세계가 더욱더 악마의 세계로 확실해져야 돼요. 구체화돼줘야 십자가 사건 터집니다. 예수님 이 땅에 왔을 때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 편에 들면 안 돼요. 그러면 이 세상은 전적으로 망해야 될 세상이 아닌 거예요. 이 세상이 전적으로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에 가야 돼, 인간은. 내가 여기에 태어났고 살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지옥 가는데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줘야 천국은 오직 예수님만의 세계며 어떤 인간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수제자라고 들어가려도 거부당했지요.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네 자리가 없다.” 너의 자리가 없어요. 처소가 없는 거예요. 처소가 없다는 말은 미리 마련했다는 뜻이 아니거든요. 처소가 없는 거예요, 아예. 천국에 우리가 있을 자리가 없는 겁니다.
그럼 창세전에 택한 백성, 그거는 베드로의 존재가 살아 있는 한 해당이 안 돼요. 인간은 사건 속에서 존재가 진짜 존재, 저주받을 존재로 전환돼야 돼요. 히브리서 9장 27절 적어볼게요.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대궐 같은 가정에 세 식구 산다면 시체 세 구 있지요. 문제는 그 시체가 자기를 미화한다. 시체가 자기를 살아 있는 것처럼 꾸미는데 평생을 다 소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평생을.
그러니까 이래 보면 제일 재미있어요. 해골이 있는데 해골이 주섬주섬 옷 껴입고 지팡이 짚고 해서 마치 해골 아닌 것처럼 사람 흉내하고 길에 나서는데 거기서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비-언약이 이에요. 같은 코카콜라에요. 저쪽 인간도 코카콜라, 둘 다 할 수 있는 대로 위장은 다 했어요. 이제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시체가 어떻게 미화하는지를 그것도 아름답게 꾸미는지를.
그래서 잠시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잊으세요. 왜냐하면 시편 52편에 나오는 악인이라 하는 것은 다윗의 언약이 없는 겁니다. 시편 52편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이거는 시편 1편 무엇의 연속이냐 하면 3절에서 4절과 통합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52편 8절에 보면 누가 읽어볼까요? 제가 읽을게요.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이게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환경 속에서 이야기하느냐 하면 악인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악인들 이야기하면서 악인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7절에 나옵니다. 이거는 다 같이 읽어봐야 돼요.
52편 7절 누구 크게 읽어보세요.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여기 나오는 단어들을 그냥 조립하게 되면 오늘날 비-언약 세계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요. ‘사람’이란 단어 나왔지요. 그다음에 재물의 풍성함을 의지하지요. 재물의 풍성함을 의지하면서 여기서 누가 빠져버렸습니까? 하나님이 빠져버렸지요. 하나님은 다윗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에요. 이 시편을 다윗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언약의 하나님을 말하는 거예요.
다윗언약의 특징은 뭐냐? 다윗 자손의 후손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산다는 겁니다. 땅을 제시하는데 그 땅은 다윗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땅, 그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아브라함언약 같은 경우에는 아브라함언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브라함언약이 말하는 약속의 땅. 그럼 모세 같으면? 머리 좋은 사람 다 응용할 수 있겠어요. 모세는? 모세 율법대로 완전히 다 지킨 사람이 갈 수 있는 땅이 바로 모세 율법에 의한 언약의 약속의 땅의 백성.
그런데 언약이 아브라함언약에서 멈추지 않고 모세언약에서 멈추지 않네요. 그리고 다윗언약에서도 멈추지 않아요. 마지막 언약은 뭡니까? 그 다윗언약의 완료성,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니까. 그 마지막 언약이 무슨 언약이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온 사람만이 살 수 있는 백성이 여기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유일한 최후의 마지막 이스라엘 백성이 됩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언약 안이냐 비-언약이냐 그 문제입니다.
다윗언약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람’은 언약적으로 하나님께 탈락해버리고 그 대신 뭘 했습니까? 재물의 풍성함을 든든히 의지하지요. 우리가 하갈이라고 생각해보세요. 뭐 이상할 게 없지요. 당연한 거잖아요. 그걸 가지고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한다” ‘악’이 나와요. 악한 것. 그런데 나는 이런 식이 아니고, 재물의 풍성함이 아니고 오직 여호와의 집에 나는 기거한다고 돼 있어요.
지금 두 번째 시간에 본격적으로 할 시체가 자기를 미워하느냐, 그것 보기 전에 성경 한 구절 보고 가겠습니다. 시편 9편 5절, 15절, 19절, 20절. 제가 쫙쫙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9편 5절부터 보겠습니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분이.
15절,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누가? 자기 백성들이. 누가? 비-언약, 다윗언약을 모르는 사람. 끝으로 19절, 20절.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이게 불신자한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인생은 인생이에요. 내 인생이 나에게 전부고 그게 삶의 이유고 목적이고 의미입니다. 가치에요. 그런데 성경은 지금 이상한 소리하고 있어요. ‘인생아, 너는 인생이잖아.’ 불신자는, “그래서 뭐? 내 인생 내가 사는데 네가 보태준 거 있어?” 그게 악인이라는 거예요. 말 되는 소릴 해야지. 내 인생 그만큼 힘들게 살았는데. ‘너는 인생뿐이다.’ 그것 당연한 것 아니에요? 너는 네 인생뿐이지? 그래서 너는 나빠서 저주받고 멸망당한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들이 이해가 안 된다면 그동안 여러분들이 교회 도대체 뭐하고 살아온 거예요. 언약은 나를 파괴하는 겁니다. 행복한 파괴지요. 왜냐하면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처럼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해진 거죠. 그러면 그 정해진 것을 우리 속에 주께서 삽입해버렸어요.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어떻게 돼요? 살겠다는 것은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그거는 이미 주님이 정하신 것을 내가 애써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밖에 안 되니까. 죽어요.
내가 죽는다면 그럼 이 코카콜라가 죽는다면 죽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어디에 쓰시려고 죽이시는가? 나의 죽음을 주님이 어디다 쓰시렵니까? 앞에다가 ‘오늘’을 집어넣으세요. 이게 오늘의 기도입니다. 오늘 사는 게 기적이기 때문에 오늘 사는 게 기적인데 나의 죽음을 어디다 쓰시렵니까? 이 기도할 때 방성대곡합니까, 막 울어요? 아브라함이 제단 쌓았지, 아까 뭐라 그랬습니까? 제단의 기능은 나를 죽이는 거예요. 오늘은 여기서 죽고, 내일은 내일 죽고 또 살려주거든 그 자리에서 죽어라. 대전서 죽었다가 부산서 죽고 하셔야 됩니다.
문제는 목회자들이나 목사 사모들이 이걸 못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종교를 통해서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한테는 이런 설교를 못해요. 설교를 못할뿐더러 이런 설교를 못 받아들여요. 이게 뭐냐? 시체의 미화. 자기 시체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시체가 언약이 없는 비-언약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네 가지로 점점 더 발전시켜요. 도구, 상품, 상징, 기호.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누구와 상대하느냐? 가인처럼 신하고 상대해요. 신과 인간이 더불어 화합해서 만드는 나도 죽지 않고 당신도 죽지 않는 그저 좋은 말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봐주는 신과 인간의 공동체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비-언약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자신의 악마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그것 말씀드리는 거예요.
인간이죠. 여기 인간을 다른 말로 하면 ‘나’가 되겠지요. 나를 첫째로 뭐냐 하면 이렇게 인간과 신으로 시작해서 확대시키면 사회가 돼요. 제가 지금 인간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 사회는 뭐냐? 자기 자신을 도구로 사용해요. 도구는 사용가치. 열아홉에 시집왔을 때 무서운 시어머니가 갓 시집온 새댁한테 이렇게 함부로 길들이기 합니다. ‘도대체 친정에서 뭘 배웠기에 이런 것도 하나 못하나?’ 무슨 가치입니까? 사용가치에요.
방금 시집온 열아홉 살이 뭐 알겠습니까? 할 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고 환경이 새로운 집안 뭘 요구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일이 서툰 거예요. 신입이 와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다 뭔가 그릇이라도 깨면, “아이고 하는 짓 봐라. 너 시집와서 우리 살림살이 다 깰라 하나?” 열아홉 먹은 며느리는 부엌에 꿇어앉아서 엉엉 방성대곡하며, “어머니여 나 시집 포기하고 다시 집에 갈래”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친정과 화장실은 멀리 있어야 된다고.
자신의 사용가치가 새로운 환경에서 실망스럽게 느껴질 때 인간은 사용가치에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가, 불인정 받는가? 이게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 넘어옵니다. ‘나는 잘할 수 있어. 나는 줄넘기 잘해.’ 혼자 있을 때 줄넘기에 대해선 잘해요. 그런데 줄넘기 잘하는 그 청년이 삼성그룹에 원서를 냈어요. “너 뭐 잘하노?” “줄넘기 잘해요.” 남 어지럽게 할 일 있습니까. 본인은 줄넘기 잘하는 사용가치가 삼성그룹에서는 인정을 못 받지요. 인정을 못 받으면 뭡니까? 교환가치가 없어져요. “너는 집구석에서 줄넘기나 많이 해라” 보내버립니다.
사회에서는 사용가치가 사회가 요구하는 그런 가치여야 할 때 사용가치가 뭐로 바뀝니까? 인정받는 교환가치로 돼요. 만약에 사회에서 인정하지만 뚝 떨어진 전혀 쓸모짝이 없는 교환가치가 없는 거예요. 그걸 뭐라 하느냐? 인간은 도구에서 시장의 상품가치에요. 춤 잘 춰요. 춤 잘 추는데 취직은 못해. 새로운 가치를 장착을, 컴퓨터를 배우든지 해서 교환가치가 돼야 돼요.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몸이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 자기 시한폭탄. 그러니까 이미 죽는 것은 뭐한다 했습니까? 이미 죽는 것은 정해진 거예요. 세포 전체가 죽음을 향하여 촉수를 내밀고. 오징어 발 정도가 아니고 수많은 촉수가 나와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불멸의 존재이고 싶어요. 몸은 죽음인데 나는 신이고 싶어요. 안 죽고 싶어요. 그러니까 버티는 거예요. 자꾸 사용가치, 교황가치로 버티는 거예요.
그다음에 교환가치 되어 인정받지요. 영 성이 안 차요. 회사에서 날 인정해주고 월급 주고 남들이 출세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나만의 상징이 있습니다. 나만의 자존감이에요. 나만의 자존심이 있지요. 회사에서 잘해주긴 하지만 내가 이 회사에서 기술 배워서, 다시 말해서 사회에서 인정하는 교환가치 배워서 자영업, 따로 독립해서 나도 회사 차리고 싶어. 그게 누구한테 맞다? 그게 내 성격에 맞는 것 같아, 하고 독립을 부르짖는 거예요.
독립 부르짖는다고 주위의 가족들 노후자금 작살나는 거죠. “아버지, 한 번만 좀 도와주세요. 3억만 대출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뭐하려고?” “카페하려고요. 바리스타….” 바리스타 배우는데 얼마나 쉽다고요. 그것 해서 퇴직금 집어넣어 홀라당 다 날려버렸어. 왜 그렇습니까? 남 인정해주잖아요. 육십 되어 퇴직 당해버렸어요. 퇴직 당하니까 내가 퇴직 당할 때까지 노는 수준이 있잖아요. 내가 남한테 인정받는 그 레벨을 유지하면서도 나에게 발전된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존감을 현실화시킬 수밖에 없어요. 이게 상징 되는 거예요.
상징이라는 것은 명함에 새겨져 있지요. “너 뭐하노?” “나 이거 한다. 사장님이다.” 상징체계, 자존감이에요. 상징체계는 특징이 자존감이기 때문에 교환가치에서 훨씬 발달했어요. 여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거저 줌, 남에 대한 배려, 그리고 증여, 남에게 기꺼이 선물을 줌. 그러니까 이건 뭐냐? 성공한 아버지가 자식한테 보이는 아버지의 대범함, 아버지의 위신 같은 거죠.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교환가치가 아버지가 남들한테 인정받아야 가정에서도 무슨 존재가 돼요? 나 아버지 본받을래. 아버지처럼 되면 좋겠어, 라는 하나의 우상화, 상징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내 인생의 목표야, 라고 내세울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 자신이 그걸 내가 더욱더 가치가 향상됐다고 간주하는 겁니다.
네 번째, 이것만 해도 대단한데 또 뭐 남았습니까? 남아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 하나가 절대적 기호가 되는 거예요. 기호가 뭐냐? 차이 가치. 이거는 이 세상에 나만한 존재는 둘도 없는 거예요. 절대 안식. 절대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신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펼쳐놓은 확정지은 이 사회라는 것은 결국 각자의 노림수가 있지요. 지향점이 있어요. 뭡니까?
내가 내 속의 악마가 시키는 대로, 그거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니까 제쳐두고, 나는 삶의 목적이 결국 내 속의 잠재성, 나는 신이 되어야 비로소 만족하는 그런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존재에요. 신은 돈이 많다, 부자 됐다, 남한테 존경받는다, 그걸로 성이 안 차요. 신이라 하는 것은 나와 똑같은 존재가 절대로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독보적인 존재여야 돼요.
홈쇼핑의 물건이 그게 문제에요. 자기 딴에 한정판이라 샀는데 한정판이 왜 그리 많은지. 내가 입고 나가니 시내에 다 입고 있어. 무슨 이런 한정판이 있어. 한정판은 기호적 가치가 부여됩니다. 페라리 한정판, 운동화 한정판. 한정판은 둘도 없다는 것, 오직 나만이 신었고, 나만 입었다는 거예요. 독보적인 거죠.
이 상징적 존재에서 주로 동원되는 게 선물이죠. 거저 줌이죠. 이게 바로 결혼하기 전에 약혼한 사이나 서로 사귀는 사이일 때 커플 티, 커플반지를 하는 이유가 이게 상징입니다. 커플 반지를 해주잖아요. 그다음 날 보니까 반지가 없어. “내가 어제 준 반지 어디 갔느냐?” “고가라서 팔아먹었어.” 이러면 이거 뭡니까? 나라는 존재를 반지를 낀다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내가 귀히 여기고 간직한다는 뜻인데 그걸 시장에다 교환가치로 거꾸로 가버렸어, 팔아먹었어요. 안 돼, 그러면 안 돼.
어떤 사람은 나이 많은 여자인데 늘 어떤 모임에 호두를 갖고 온답니다. 강의 중에 호두를 갖고 와서 교수가 궁금해서 물었어요. 그 나이 많은 여자 학생이 하는 말이, “이게 죽은 내 약혼자가 나한테 준 겁니다.” 이게 무슨 가치에요? 사용가치입니까? 아니지요. 시장에서 돈 되는 교환가치? 아니지요. 무슨 가치입니까? 이 호두가 있다는 말은 그때 그 남자와 사랑했던 그 시절과 추억을 내 자아의 가치의 재료로서 나는 포기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 남자는 죽어도 호두가 있다는 말은 그 남자는 내 안에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오늘날의 부부는 호두나 안 줘도 뭐가 있습니까? 뭐가 있기에 아직 헤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왜 시큰둥해서 지금 헤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데 왜 부부로 삽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됐느냐? 뭔가 상징적 가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식이죠. 제3의 요소가 우리를 묶어주는 거예요. 어지간하면 참고 사는 거예요. 왜? 자식 봐서. 자식을 봐서라도 참는 거예요. 돈, 돈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문제가 이거에요. 교환가치로 퇴직했잖아요. 특히 대기업 임원하다 퇴직했으면 남자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나 퇴직했다. 자유다’ 이러거든요. 그동안 일에 매이고 직장에 매여서 하고 싶은 걸 못했는데 유럽여행, 동유럽 갔다 오고 빈에다 헝가리에다 체코 갔다 오고 이제 마음껏 내 시간 돈 들여 살고 있다.
그러니까 남자가 해방을 하면서 퇴직하고 그다음에 “돈 줘. 내가 준 돈 내놔라. 내가 준 것 있잖아.” “살림에 다 보탰는데. 애들 공부시켰는데. 딸 시집갈 때 니가 준 돈으로 다 했는데.”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그 남자는? “그래. 자식 결혼할 때 보탰구나. 내가 이렇게 상징적 존재가 되다니.”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회사에서 잘 나가던 남들이 친구들이 나를 대단한 존재로 보는 그걸 자기가 누그러트릴 수가 없어요. 왜? 잘 나갔는데 하루아침에 그걸 어떻게 유쾌한 파멸, 파괴 안 돼요.
아내에게 돈 내놔라 하니까 아내가, 돈 없다. 그럼 어떻게? 돈 벌어. 그 월급 안 주는데? 이백만 원이 뭡니까, 백오십 만원이라도 벌어와. 그러면 남편이 하는 말이, 그럼 나는 언제 퇴직하니? 퇴직 못하지 뭐. 퇴직 못해. 왜냐하면 남편이 돈 벌어왔고 그동안 아내는 가정에서 자기 나름대로 상징적 존재로 이미 선점했어. 가정은 하나인데 접수를 한 거예요.
가정에서 일어나는 스물네 시간, 특히 낮 시간은 누구 나와바리입니까? 여자 나와바리에요. 아침에 너는 가라, 이 말이죠. 네가 없던 시간을 내가 점령했잖아. 네가 왜 끼어들어? 끼어들어서 점심 내놔라, 밥 내놔라. 삼식이도 아니고, 참. 나가 사 먹어. 저녁 때 기어들어와. 나가 그냥. 꼴 보기 싫어. 있는 자체가 싫어, 그냥. 나가. 너 때문에 암 걸리겠어. 너 때문에 골치 아파서 안 되겠어, 나가. 이게 바로 상징적 기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어디로 나갑니까? 기호적 가치, 절대적 가치로 나가요. 이제는 누구와 다투기도 싫어요. 내가 신이니까. 이것을 사용가치 흐르게 하는 이 요소를 아까 성경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의 마음이라 했지요. 성경을 제쳐버리고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이걸 욕망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이 욕망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욕망이 인간을 가졌는데 그 욕망이 아담의 욕망이에요. 인간은 어디서 태어나든 언제 태어나든 욕망에서 못 벗어나게 돼 있어요.
인간의 욕망은 인간의 의식적으로 제거 돼요, 제거 안 돼요? 제거되지 않아요. 그 욕망 중에 하나가 뭐냐? 자기가 이미 신이에요. 불멸의 존재. 나는 불멸의 존재가 욕망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이 내 마음속에 있는 한 내가 아무리 돈이 많고 4조 2천억 가져도 아무리 뭘 해도 이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채우려 해도 욕망이 내뺍니다. 더더더더 따라와. 안 돼. 그 정도로 안 돼. 그 정도로 내가 성에 차겠어? 더더 하고 계속해서 따라오지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진즉에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나는 십자가 복음 싫어. 두 번째, 나는 교회도 싫어. 귀찮아. 안 다닐 거야. 세 번째,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여러분 주로 누가 이런 이야기하지요? 여러분이 제일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게 누굽니까? 자식이 이야기해요. 자식들이 이 이야기한다고요.
그런데 제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어디로 가느냐 하는 거예요. 그들이. 그렇게 비-언약이 어디로 가느냐, 어디에 사느냐는 거예요. 어디에 살겠습니까? 하갈의 세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갈을 살릴 이유가 있지요. 악인들이 번성할 이유가 있지요. 악인들만의 세계를 항상 언약 주변에 상황 주변에 늘 있어야 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언약은 대조 아니면 차이남이 없으면 언약이 언약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나는 십자가 복음 싫어. 나는 교회 안 갈 거야.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라는 것이 집결하는 곳, 그게 바로 비-언약의 세계, 하갈의 세계입니다. 지옥이죠. 언약이 없으니까 지옥이잖아요. 이들이 가는 곳을 사회죠. 오늘 제목을 제가 미리 정해봤어요. [천국의 사회성]이에요. 천국이란 사회는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그걸 하려고 제가 미리 정해봤어요.
천국의 사회성을 알기 위해선 뭐냐? 소위 사회란 것이 뭐로 구성돼 있는가를 알아야 돼요. 이제 아셨지요. 이런 나들이 이러한 식의 나들이 악마의 마음들로 가득 차있는 나들이 악마의 마음에 그게 거슬린다면 자기 욕망, 그것도 확정된 욕망이에요. ‘신이시여 예수란 이름으로 나를 건들지 마세요.’ 나는 뭐라고? 나는 신이기 때문에. 신들이 집결한 곳이 뭐다? 사회입니다. 이게 사회고 이게 바로 KBS, MBC 뉴스로 계속 나와요. 밀양이 어떻고, 성폭행이 어떻고 계속 나오고. 유튜브에서 계속 나오고, 애들 유튜브 세계에서 살고 있어요.
거기서 뭐하는데? 미흡한 욕망을 채워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무슨 가치? 사용가치. 두 번째 무슨 가치요? 교환가치, 상품이죠. 하나는 수단이고.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나는 나 나름대로 뭘 이루었다는 상징성. 네 번째는 그걸 극단화시키면 나는 뭐다? 신이다. 나는 신이다. 나는 너하고 달라.
그래서 어떤 학자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생을 살면서 두 명 내지 세 명의 친구만 있어도 그거는 대단한 거라 했어요. 이 말은 사실은 친구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인간의 욕망의 끝은 친구가 없어요. 유일한 친구는 내가 내 안의 친구에요. 나는 내 자체만으로 아름답도록 조성해왔기 때문에. 부부가 나이 들면 친구로 살면 되지 않느냐? 무슨 친구가 날마다 싸우는 친구가.
제가 주일 오후 때 이야기했는가? 오전에 이야기했구나. 왜 결혼을 했는가? 말이 통하는 것 같아서. 그 말 언제 끊길까요? 그다음부터는 전부 다 묵언수행하고. “아는?” “잔다.” “밥도.” “자.” 그리곤 자기의 사회, 인터넷 세계, 휴대폰 세계에 빠지는 거예요, 각자. 각자 거기서 나의 차이는 어디고, 나의 위치는 어디고, 나의 수준은 어딘지, 나의 상징성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자기 욕망은 같이 있는 옆의 식구가 채워주는 게 아니고 휴대폰의 유튜브가 채워주는 거예요.
늙은 사람은 안 돼. 유튜브 못해. 할 수 있으면 그 세계에 빠지겠는데 아직 할 줄을 몰라요. 젊은 사람들은 유튜브 있는데 교회를 왜 나갑니까? 유튜브 있는데 예수를 왜 믿어요? 나의 가치가 보존돼 있는 곳이 사회인데 내가 천국 사회에 왜 기어들어갑니까?
그러면 이제 남은 시간, 천국 사회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언약의 상호침투와 언약의 상호공격으로 이루어진다. 이게 아까 시팬 9편, 오늘 시편 52편이죠. 따라서 이걸 알기 위해서 시편 1편을 봅시다.
여기 복 있는 사람은, 복이 먼저 나오지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돼 있지요. 여기서 복이 뭔지 알기 위해서 반드시 무엇이 드러나야 돼요? 악인이 드러나야 돼요. 악인은 항상 언약 곁에 있습니다. 언약을 형성하는 그 주변의 상황이 악이에요. 그러면 오늘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악인에게 없는 게 있다 했지요. 복습입니다. 악인에게 언약이 없지요. 율법이 없는 거예요. 왜? 그딴 게 필요치 않기 때문에. 율법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한테 간섭받겠다는 거예요. 간섭받는 즐거움으로 살겠다는 거예요. 그걸 제가 강의시간에 예를 든 게 뭐냐? 마동석이 치는 사람 두 종류가 있다 했지요. 한 방 때리면 나가떨어지는 사람 있지만 붙들고 늘 때리는 사람.
마동석 영화, 보면 친근하면서 악인으로 등장하는 사람 있지요. 조선족으로 나오는. 마동석이, “너 이리 와” 해서 괴롭히죠. “날 왜 자꾸 괴롭혀” 이러거든요. 1편, 2편에서 괴롭히고, 3편에도 괴롭히고, 4편도 괴롭히잖아요. 5편 나오면 또 괴롭힐 거예요. FDA 자기는 특수경찰인줄 알고, F가 폴리스(police) 같으면 P여야 하는데 F에요.
주님께서 패는데 안 놓고 패는 거예요. 이게 뭐냐? 언약적인 침투가 언약적인 공격이 되는 거예요. 율법이 그런 거예요. 날마다 율법이 마동석이 되어서 매일같이 줘 패는 거예요. 팰 때마다 뭐가 나와요? 존재는 무너지고 사건이 나오죠. 율법이 말씀이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사건이 늘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회 자체지요. 사회는 뭐라 했습니까? 악이죠. 악인데 우리도 포함돼 있지요. 다 포함돼 있어요. 색깔로 하면 전부 다 똑같은 색깔이에요. 갑자기 여기에 뭐가 오느냐? 율법이 침투해요. 언약이 침투해요. 모세언약이 침투해버리면 색깔이 갑자기 특이성을 보여줍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호적 가치에요.
그러니까 천국도 기존 사회와 똑같아요. 마지막에 뭡니까? 기호적 독특한 가치, 언약적 가치. 이걸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에요.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기호적 가치를 바로 줘버려요. 사용가치, 교환가치 필요 없이 바로 기호적 가치에요. 죄인으로 하여금 사용하고 개 같은 우리를 사용함으로써 동시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삽입돼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가라 하는 대로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기호는 무슨 기호냐 하면 이거는 사건인데 어떤 사건이냐? 사건은 사건인데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다 이루었다는 분이 따로 있음을 드러내는 기호적 가치에요. 그러면 이 기호적 가치에서 누가 불멸의 존재고 누가 영생입니까? 예수님의 영생이죠. 영생의 가치가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뭐냐? 영생 받은 분 안에서 함께 영생을 공유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건 불멸 존재 정도가 아니고 우린 복 되게 영원히 사는 거예요. 참 쉽지요.
말씀으로 매일같이 말씀을 누가 어떤 목사가 전하는 게 아니고 사건이, 말씀 사건이 우리 앞에서 계속 우리로 하여금 네가 악인인 것을 들춰내는 이 고마운 작업이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시 시편 1편 봅시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죄인과 오만. 오만이란 것은 독자적으로 자기가 잘난 체하는 거죠. 나는 나뿐이다.
여기서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예수님께서 이를 온전한 자, 또는 완전한 자로 이야기했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이사야 66장의 말씀으로 하면 온전히 거룩한 자를 두 자로 줄이면, 성도. 성도는 완전하고 온전해요. 말씀과 율법에 하자가 없어요. 다 이룬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마동석한테 늘 얻어맞고 있기 때문에. 그 관계성, 주님과 우리 죄인과의 관계성이 온전하기 때문에 성도는 온전해요. 아무도 우리를 고소할 자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단독으로 있는 게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기에 아무도 우리 죄를 시비 걸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로소 알아요. 우리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온전한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 어떤 온전한 개념? 죄의 온전한 개념을 우리가 지니고 있는 즐거움이 있어요.
죄는 우리가 지어서 죄를 아는 게 아니라 완전한 죄인이에요. 완전한 죄인이 그 완전 때문에 주님의 사회에서 완전한 자로 인정받는 겁니다. 완전한 죄인, 이게 시편 51편에 나는 어머니의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온전한 죄인이 돼요, 다윗은.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율법 세계, 율법의 사회성, 천국 사회성, 완전히 이루신 율법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이웃사랑의 혜택을 입는 자가 되겠죠.
이웃사랑의 혜택을 입은 자로 온전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쓰시려는 그 현장에서 온전한 사람이 주님에 의해서 나옵니다.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뭡니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와서 걸으라고 사도행전 3장에 나오지요. 그것 누가 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사회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 자기 존재를 생각하기 때문에 당신이 했잖아, 라고 나오잖아요.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현장에서 온전함을 사건으로 설명해버려요. 내가 한 게 아니고 나와 함께 있고 당신에게 그 죄인에게 있는 주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라는 이 온전함, 이게 바로 의의 관계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늘 의가 나오도록 우리 속에 말씀이 사건화 돼 있는 상태, 이게 바로 언약의 사람입니다.
그것을 미리 그림자로 아까 막 있지요. 실루엣, 그림자로서 다윗에게 이야기했고 그래서 다윗이 쓴 오늘 시편 52편이죠. 시편 52편 8절, 9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9절,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스톱, 그것만 하면 돼.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뭐다? 완전한 거룩한 사람으로 성도로서 천국에 이미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된다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 십자가로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헛말이 아니고 그게 팩트요, 그게 제대로 된 현실인 것을 이제 받아들이는 늘 그런 기쁨 속에 사건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