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0a 부산강의 : [시편]68(52:7)-언약으로 본 사회
20240610a 부산강의 : [시편]68(52:7)-언약으로 본 사회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52편이요.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그렇게 돼 있지요. 이게 누구의 시냐 하면, 다윗이라 돼 있어요. 그러면 악인이 뭐냐? 악인은 간단한 거예요. 다윗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알고 있는 것이 빠져 있는 사람, 악인. 굉장히 쉽지요. 악인이라 하는 것은 다윗이 알고 있는 것이 없는 사람, 다윗이 알고 있는 바가 없는 사람, 이게 악인입니다.
이 세상에 스스로 악인 되고자 한다든지 악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지요. 인간들은 자기 내부를 계속 파고, 파고 가면 나중에 달그락하는 소리가 나요. 바닥인데요. 애들에게 배고플 때 떡볶이 해주면 애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잖아요. 나중에 떡볶이 먹다보면 뭐라 합니까? “냄비 빵구나겠다” 하겠지요. 달그락 소리, 바닥이 나오잖아요.
떡볶이 냄비의 바닥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바닥이 뭐가 있을까요? 인간의 바닥은 선악 지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 다 아는 이야기인데 아는 이야기만 우리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인간의 바닥은 철판이 깔려있는데 그 철판은 선악지식이에요. 그런데 선악지식은 여러분 알다시피 선악지식은 뭐가 있느냐 하면, ‘하지 말라’에요. 또는 ‘따먹지 말라’에요. ‘알지 말라. 네가 소유해서는 안 된다’하는 하나님의 엄명이 선악지식입니다. 그게 바닥에 깔려있는 거예요, 바닥에. 그게 인간의 기초가 되는 거죠.
그러면 선악지식은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 했는데 이게 오늘날 현실 속에서는 이 선악지식이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고 이것이 모습을 띠고 있느냐는 거예요. 첫째는 내가 신이다. 이거는 성경에 나오는 거죠. 내가 신이라는 이유는, ‘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잘났다’에요. 그러니까 이게 어느 정도로 잘났느냐 하면, “신이시여 내게 손대지 마소서” 이 정도까지 나가야 돼요. 그래야 자기 자신을 제대로 하는 거예요. 신이라 할지라도 내게 손 타지 마세요.
그래서 우상의 특징이 뭐겠어요? 우상의 특징은 교환입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내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신에게 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사람 나오지요.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아들 이름이 뭡니까? 가인이죠. 그 가인이 제사를 드리지요. 줄 것 주고, 받을 받겠다는 겁니다.
그 제사의 시작은 가인부터 시작했지요. 가인이 그만큼 신은 내가 다룰 테니까 신이 먼저 나를 선빵 날리지 말라는 겁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을 테니까 좋은 관계 유지할 테니까 신이시여 궁극적으로는 나한테 너무 잔소리하거나 공격하지 말라는 거예요. 손대지 말라. 그걸 신약에선 자기 의라 하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내부를 파고 들어가면 달그락 소리가 나오는데 그 달그락 소리가 뭐라 했습니까? 선악지식이에요. 나도 알만큼 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선악과의 특징이 뭐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지요. 이걸 제가 다른 말로 하겠습니다. 아름답다. 선악과는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아마 생명나무 과실이 선악과보다 아름답지 못한 것 같아요. 다른 어떤 과실보다 선악과가 가장 아름다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아담과 하와의 탐심을 자극했으니까요. 그리고 뱀이 다른 과실을 소개한 게 아니에요. 선악과가 탐낼만한 과실이기 때문에 마귀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고 선악과를 따먹도록…. 아름답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으로 자기 자신을 구성을 해요. 설정을 한다고요. 아름답게.
선악과 따먹으면 그다음에 두 번째 나오는 경우는 어떤 거냐 하면 자아의 세계를 아름답게 포장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자기에게 함몰됩니다. 아름다운 나의 모습으로 함몰돼요. 연세 많은 사람에게 트롯 노래를 들려주는 거예요. 예를 들면 들려줬을 때에 그 노래 듣는 순간 연세 많은 사람들이 뭐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느냐 하면, 과거에 열아홉 살에 시집온 것부터 시작하죠. 왜 열아홉에 시집오는지 몰라.
열아홉에 시집와서 층층지하 시아버지부터 제사 다 드리고 다 섬기면서 아이 낳고 시누이, 시동생 다 챙기고 내 새끼 챙기면서 살아왔던 맵디매운 시집살이 다 견뎌왔던 것이 목포의 눈물 딱 듣는 순간 그게 확 오는 거예요. 왜? 그때 위로 됐던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에요. 진짜 마음 같으면 목포의 눈물, 틀어주고 싶다. 목포의 눈물 한 번 들어보시랍니까? 말로 하는 것보다 목포의 눈물 알지만, 실제로 실감이 안 나지요. 못 찾으면 할 수 없다. 하여튼 그런 노래 있어요.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 들었을 경우에 자기의 고생 많았던 것이 고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름답게 뭐가 되지요? 포장되지요. 아름답게 포장되는 거예요. 내 고생한 것을 하나도 잃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세월을 살아왔는지를 자기에게 매몰될 수 있는 그 재료를 본인이 놓칠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선악과 따먹으면 자기 인생을 아름답게 자기 안에 침잠, 거기에 함몰되는 겁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스스로 위로받는 거예요. 마지막 연세 많을 때 더러운 세상, 나를 열아홉에 시집와도 이렇게 누가 알아준 사람도 없고, 자식은 지 힘대로 사는 줄 착각하고 하지만 나는 그런 고생 하나하나가 버리는 게 아니고 다 주어모아요. 주어모아서 내 인생은 이렇게 나름 아름다웠다는 것을 포장하는 게 선악과 지식을 따먹은 증거에요.
이것이 연세 많은 사람의 자아 내부를 이렇게 계속 파고 들어가면 나중에 달그락 소리 나는 것, 마지막 바닥이 나와요. 바닥은 뭐냐? 선악지식이에요. 그렇다면 열아홉에 시집와서 새삼 고생한 것 이야기하는데 만약에 스무 살 때 교회 와서 교회에서 온갖 성경 공부한 것, 봉사한 것, 그 사람이 만약에 나중에 권사도 퇴임하고 팔십 넘었다 합시다.
그 사람 속에 뭐가 형성돼 있겠어요? 교회에서 행세했던 모든 힘든 봉사, 고생이 자기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마지막 위로할 수 있는 뭐냐? 내 인생은 아름다웠다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교회 다니나, 안 다니가 그냥 시집살이하나 나 자신을 아름다움에 함몰시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바닥은 뭐냐? 선악지식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 선악지식, 아름답게 보는 예를 들어서 목포의 눈물 같은 노래, 내가 이십 대 고생할 때 들은 노래를 다시 듣게 되면 그게 회상이 되는데 그게 노래도 그렇고 내가 또 힘들 때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절정적인 것은 뭐냐? 냄새입니다. 내가 이것 육십 년대 들었던 냄새, 칠십 년대 들었던 냄새가 드는 순간,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올 때, 그 냄새가 나로 하여금 그때 시절을 끌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이 아름다움 속에 내가 신이라는 속에 인간의 시간은 정지됩니다. 나이 많이 먹었다, 세월이 흘렀다 없어져요. 나는 그때 그 사람 돼요.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때 그 사람(그게 심수봉이 나훈아를…).
인간은 그때 그 나로 멈춰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몸이 닳아지면 뭐도 날아가요? 상대적으로 나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내가 신이라는 자신의 역량, 에너지가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가 알거든요. 몸은 망가지지만 나의 시간이 멈추는 시절의 아름다운 나는 망가질 몸을 대체하지 아니 하면 내가 아직도 살 여력이 없어요. 보람이 없다고요. 사는 기쁨이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신이다, 아름답다, 이게 선악과 보기에 먹음직하고 탐스럽기 짝이 없는 것, 그래서 선악과가 내 안에 들어와서 뭘 만들었다? 나를 만든 거예요. 내가 선악과의 열매 그 자체입니다. 이게 인간들이 이런 모습으로 돼요. 제가 지금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나에 대해서, 나, 다른 말로 자아지요. 나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 정리는 성경적 정리는 이렇게 됩니다. ‘기계+악마의 마음=나’ 기계에다 악마의 마음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하면, 지금 시편 52편하고 있는데 시편 52편 1절에,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딱 나오지요. 여기 계속해서 악인들이 나오거든요. 여러분 먼저 들은 사람들은 아시지요. 누굴 악인이라고 하던가요? 다윗이 알고 있는 바가 빠져있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시편 52편이 다윗이 지었기 때문에. 간단하지요.
그러면 다윗이 알고 있는 것이 빠져있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누가 규정해요? 다윗이 규정하죠. 다윗, 네가 뭔데 함부로 나를 규정하느냐? 다윗의 배후에 누가 있어요?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 있는 거예요. 언약의 하나님이 다윗에게 뭘 집어넣었다? 언약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럼 악인은 뭐냐? 언약이 없는 자가 악인입니다. 논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간단해요.
더 나가서 언약이 없으면 그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내가 신이고, 나는 나 자체로서 아름답기 그지없고, ‘나는 지난날 추억을 생각하면서 나 이대로 죽어도 좋아’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 모습이 뭐가 빠진 상태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상태, 이거는 비언약이에요. 비언약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의 자아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코카콜라 공장에 보면 코카콜라도 있지만 거기에 공장장도 있겠지요. 선반에 움직이는 코카콜라가 공장장의 마음을 압니까? 코카콜라는 유리병이에요, 유리병. 그거는 물체고 사물이에요. 일종의 사물, 기계라니까요. 코카콜라가 공장장의 마음을 모르잖아요.
공장장이 다윗이고 공장장이 언약이라면 악인들은 뭡니까? 코카콜라를 왜 만드는지를 몰라요. 공장장은 알아요. 목마를 때 시원하게 마시면 돈으로 환산된다. 그건 아는데 코카콜라는 그냥 선반 위에 움직일 뿐입니다. 그 선반이 뭐냐? 시간이에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뭘 쳐다보느냐? 같은 코카콜라만 보는 거예요. 둘 다 동일하게 ‘저 사람 좀 늙었네.’
옛날 코미디에 이런 것 있어요. 볼빨간사춘기란 코너가 있는데 경로당에 나이 80세 이상끼리 모인 조폭이야기에요. 신참이 70대가 경로당에 처음 오니까 텃세하는 팔십 넘은 경로당 조폭이, “야 신입이!” 듣잖아요. “어 들리네?” “이리와 봐.” “왜요?” “재 걷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의 80 넘으니까 걷는 것도 불안하고 들리지도 않는 거예요.
인간들은 시간이란 컨베이어벨트에서 똑같이 보면서 똑같이 가는 거예요. 살면서 똑같이 코카콜라만 주고받기 때문에 공장장의 마음을 알아요,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어, 들리네?’ 자기가 안 들리니까 젊은 사람이 들리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죠. 그래서 이거는 기계인데 언약이 없으니까 언약이 없잖아요. 다윗은 언약이 있단 말이죠. 기계에서 악마의 마음이, 여기 선악지식이 악마의 마음입니다. 악마의 마음이 들어온 게 뭐라고요? 나, 또는 인간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다윗은 악마의 마음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지요. 그러면 인간에게 언약이 온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지금 있는 악마의 마음, 네 속의 ‘기계+악마의 마음’이에요. 제가 기계란 말을 쓰느냐 하면, ‘물체+악마의 마음’을 왜 안 쓰고 기계라 하느냐 하면 기계가 기계를 만들어내요. 인간이 칼, 도구, 모든 자동차 전부 다 만들어내지요. 기계가 기계를 만들어내요. 기계가 인공지능까지 만들어낸다고요. 도구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인간이잖아요. 백날 만들어도 인간의 마음은 그대로 유지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통 인간인데 여기에 무엇과 비교하느냐 하면 다윗과 비교해보자. 다윗을 태어날 때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다윗의 고백에 나와요. 시편 51편, 다윗은 어디서 태어났지요? 악에서 태어났지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잖아요. 그러니까 겉모습은 기계에요. 움직이니까. 연구를 하고 기계도 만들고 국가를 통치하니까 분명히 움직이는 기계처럼 보이는데 그 안에 뭐가 있습니까? 악이 있었잖아요.
제가 어제 낮 설교제목의 뭐냐? [사단의 자식]이죠. 이게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생소하게 들리는 이유가 뭐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큰 대궐 같은 집에 세 식구가 산다. 우리는 같은 코카콜라끼리 주고받으면, ‘야 좋겠다. 저 큰 집에 달랑 세 식구 사네. 수영장도 있고 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 우린 같은 코카콜라끼리 비교하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뭐냐? 대궐 같은 깁에 시체 세 구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는 그 시체 세 구가 대궐 같은 집에 산다고 다시 시체가 아닌 걸로 부활할 수 있습니까, 다시 소생할 수 있습니까? 안 되죠. 안 되는 거예요.
다윗은 자기가 악에 있기 때문에 선악과 지식의 달그락 거리는 바닥, 아까 예를 들기를 무슨 냄비라 했습니까? 떡볶이 냄비에 숟가락 댈 때 결국 바닥은 선악지식으로 깔려있지요. 이렇게 깔려있던 그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 다시 말해서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지요. 하나님의 언약을 이야기할 때 이제 중요합니다.
질문입니다. 악마의 마음이 없어졌습니까, 있습니까? 야 이게 중요합니다. 악마의 마음이 내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을 비로소 다윗은 발견한 거예요. 죄인이 의인 된 게 아니고 이걸 발견하게 된 겁니다. 발견하기 때문에 다윗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를 나중에 하나님이 알려줘요.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제사장이 형식적으로 하던 제사를 대표적으로 왕의 입장에서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리니까 그 효과가 나타나서 이스라엘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멈췄잖아요. 그 장소가 바로 모리아 산이에요. 모리아 산하면 생각나는 것이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데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오늘 강의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 목적이 뭐냐? 악인이 뭐냐는 거예요. 다윗에게는 언약이 있다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렸고, 이제는 언약의 뿌리를 추적해보는 거예요. 추적해보니까 방금 누가 이름이 나왔어요? 아브라함 나왔지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거예요. 바칠 때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삭도 죽었어요. 마땅히 죽어야죠. 죄인이니까 죽어야 되죠. 대궐 같은 집에 시체 세 구 있잖아요. 그건 이미 죽어야 돼요.
죽었는데 수풀 속에 어떤 인물, 존재가 등장해요. 수풀 속에 주께서 숨겨놓은 존재, 양이 그다음에 뭐냐? 아브라함과 이삭을 대신해서 제물로 바치는 행위가 언약행위에요. 그걸 바침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삭은 누구를 대신하는 삶을 살게 된 것, 그게 언약맨, 언약의 사람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을 살아가는 인생이 시작된 거예요. 그게 언약이 안에 들어온 겁니다.
‘기계+악마=나’였던 것을 이 악마의 마음은 없어지지 않아요. 이 전체를 묶어서 또 하나의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미지의 인물, 신약적으로 하면 다 이루었다는 인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온 거예요. 나는 존재잖아요. 이분은 뭐냐? 지금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뭐로 다가와요? 사건으로 다가온다고요. 사건과 존재의 만남입니다.
쉬운 예를 들게 되면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제시했느냐 하면 내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사건을 제시했지요. 그 사건을 제시할 때 베드로가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현재 예수님 존재 있고, 나라는 존재 있고, 열한 제자 존재가 있으니까 존재끼리 뭉쳐서 일을 이뤄봅시다. 하늘나라 이 땅에 이뤄봅시다. 나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제시한 것은 죽고 사흘 만에 사는 사건이죠. 존재는 그 사건을 통과 못하고 튕겨져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다음에 나온 말이 뭡니까? 사탄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랬습니까? 그게 아니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은 사탄의 자식이에요. 그게 통하고 있다고요. 사탄은 인간을 놔주지 않습니다. 안 놔줘도 괜찮아요. 왜? 비법이 마귀를 이겼으니까요.
날마다 사탄의 자극받는 우리 자신에게 날마다 주께서 승리하고 또 승리하는 사건만 연발되면 된다고요.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 해줄 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전도, 기도, 봉사, 헌금 백날해도 나는 그것으로 내가 아닌 내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의 영역, 장, 사건이 사건으로 구석구석 파급하는 영역이죠.
그러면 이 사건에 반발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존재겠지요. 그 사건에 반발하는 존재 중에 우리가 포함돼요, 안 돼요? 제일 야무지게 반발하고 있지요.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자, 아브라함에 대해서 자신을 반발한 사람은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1장에 어떤 여인 하나 등장합니다. 창세기 21장 15절, 16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방금 읽었던 그 대목과 창세기 2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는 대목,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에 의해서 죽을 지경이라는 사실, 이게 공통점이죠.
언약이라는 사건이 오게 되면 우리가 존재의 우리의 생리, 내 존재를 유지하고 시켜내야 마땅하다는 그것이 위기를 느끼게 돼 있어요. 언약이 다가오게 되면. 한쪽은 아브라함은 뭡니까? 그냥 자식 데리고 하나님 제단에 가는 거예요. 제단이 뭐하는 곳이에요? 하나님 만나는 모리아 산 제단이 하는 기능이 뭡니까? 도대체 제단이라는 게 하는 일이 뭐예요? 누굴 죽이겠다는 거예요. 죽이겠다는 거거든요.
가인의 제단은 죽이기 전에 ‘신이여 거래합시다’가 가인의 제단이잖아요. 하나님 덕분으로 이렇게 곡식이 잘 됐으니까 곡식을 받아주시고 다음 해에 또 풍성한 수확을 기대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가인의 제사잖아요. 그런데 아벨은 뭐였습니까? 아벨의 제사는 어디서 끝납니까? 그냥 양 죽은 걸로 끝납니까, 아니면 본인이 죽는 걸로 끝납니까? 본인이 죽는 것이 끝나는 거예요.
왜? 가인은 제사 드리는, 제사는 일종에 판문점이에요. 판문점에 북한대표와 한국대표가 만났을 때 그들이 도로 어디로 와야 돼요? 자기 집으로 돌아와야죠. 판문점에서 만난 뒤에 자기 집도 없는데 평양 가겠다고 고집하면 그건 월북이죠. 안 되잖아요. 가인은 신의 영역에 가기 싫어요. 왜냐? 내 인생이 아름다우니까. 나는 내가 신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나름대로 인생을 꾸려왔으니까 아깝지 않아요, 고생한 인간. 열아홉에 시집와서 목포의 눈물 들어가면서 고생한 그게 너무 아깝잖아요. 다시 내 세계가 파괴되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아벨의 제사를 받는 게 아니고 아벨을 받아버린 거예요. 양의 피가 아벨의 피가 나와야 그게 아벨의 피의 완성이에요. 아벨의 기능입니다. 아벨의 피와 뭐와 연관됩니까? 예수님의 피와 관련됩니다. 사가랴 선지자의 피와 아벨의 피 그 노선으로 내가 왔다고 예수님 이야기하셨지요. 그렇게 아벨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 세상이란 환경이 언약에 속한 사람을 피 흘리게 만드는 환경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이미 완전히 자리 잡았다는 것을 폭로하는 기능이 바로 언약적 기능입니다.
다윗은 두 가지 기능을 다 보여줘요. 다윗이 왕으로 자기의 존재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때문에 밧세바란 여인과 그 남편 있잖아요. 기혼녀니까 유부녀니까 남편이 있어요. 남편 죽이고 다윗이 밧세바를 빼앗아왔습니다. 그때 그 다윗에 나왔던 죄의 결과로 희생자가 생겼지요. 우리야 장군. 그 기능을 바로 누가 하느냐? 언약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언약의 기능을 하긴 한 거예요. 그러면 다윗의 희생 가운데서 다윗은 악인의 역할도 하고 그다음에 언약적 기능을 하고 복합적으로 둘 다 있지요. 그게 오늘날 성도,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육신이 그대로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육신이 있어야 되고, ‘기계+악마의 마음’은 그대로 유지가 돼줘야 돼요. 그래야 내 존재가 구원되는 그건 날아가 버리고 뭡니까? 내 안에서 주님이 계속 사건을 일으키면서 주께서 실제로 움직이고 활동하는 운반체가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성도에요. 그게 없으면 성도 아니지요.
내 존재보다 사건이 우선돼야 돼요. 나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 중에 괴수되게 하는 그 사건. 그 사건할 때 뭐냐? 나를 주님의 안목으로 사건적 안목으로 십자가 안에서 나의 정체를 이제는 제대로 파악이 된 거예요. ‘아, 나는 마귀 자식이다.’ 마귀 자식은 뭐해야 돼요? 심판받아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하죠. 이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아주 유쾌한 일이죠. 이걸 뭐라고 하느냐? 유쾌한 파멸.
이게 바로 이삭과 아브라함이죠. 창세기 22장에서.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려고 하는 건 창세기 21장이에요. 창세기 21장 14절에서 16절 봤지요. 하갈이 쫓겨나서 갈 데 없지요. 물 다 떨어졌어요. 질문 들어갑니다. 왜 하나님은 하갈에게 물을 주십니까? 그냥 물 떨어져서 갈증 일으켜 굶어죽게 하지 왜 물을 주시느냐? 더 나아가서 하갈이 울지요. 왜 울지요?
아브라함과 이삭이 제사 드리면서 아들 죽는다고 울었습니까? “아이고, 아이고 내 새끼야. 하나님이 바치라 하니 바친다마는 참 네 인생도 가련하다. 여기서 네가 가네.” 여기서 막 울었어요, 마지막으로? 그런데 하갈은 왜 울지요? 내 인생은 그동안 누가 관리하고 누가 챙기며 살아왔습니까? 자기 관리지요. 자기 한계 때문에 이른 거예요.
하갈은 뭐냐? 그동안 광야에 쫓겨나기 전에 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나름대로 물이 있었잖아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려냐 하면 왜 우리가 물 먹고 살아야 되지요? 그걸 질문을 하갈이 해본 적이 없어요. 왜 나한테는 마실 물이 근처에 있고, 나한테는 자식이 생기고, 뭔데 나는 계속 살아야 돼? 누구야, 누군데 나를 살려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하갈이 하나님을 밟은 거예요. 왜? 자아가 너무 세기 때문에. 내가 사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밟아온 거예요. 남편이 아브라함이잖아요. 거부 아닙니까. 양도 많고 소도 많고. 아쉬운 것 없이 살았어요. 물론 나중에 아기 낳고 그 하갈이 첩이 됐지요. 근데 아브라함은 그 하갈한테 신사기 때문에 못 해줄 생각이 없다 이 말이죠. ‘뭘 원해? 한남동 집이야?’ 사나이답게.
그런데 본처가 나가라는 거예요. 처음으로 하갈은 본처의 종이니까 아기 낳고 난 뒤에 이스마엘 낳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 추방대상이 된 거예요. 쫓겨난 거예요. 참 언약이 어떤 의미에서 신기하게 작용하고 있어요.
아브라함 보겠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와요. 하란에서 그리심 산, 에발 산(같이 불어있어요) 이리로 왔다가 그다음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에서 헤브론으로 갔다가 브엘세바로 갔다가 마지막에 자기가 죽는 곳은 헤브론에서 죽어요. 갈대아 우리 자기 집이죠. 이것 누가 불러냈습니까? 하나님이 불러냈지요. 그러면 갈대아 우르에서 뭐예요? 쫓겨난 거죠.
애굽은 여러분 아시고, 이스라엘에 사해가 있어요. 제일 꼭대기에 예루살렘이 있고, 중간에 헤브론, 제일 밑에 브엘세바가 있어요. 벧엘은 나중에 야곱, 예루살렘 위에 있는데 하여튼 하란은 지금의 터키, 그리고 갈대아 우리는 지금의 이라크. 이렇게 이 동네에 사는 거예요. 여기서 이삭 낳고, 야곱도 여기서 태어나고. 야곱도 삼촌 집 하란에 갔다가 헤브론이나 이런 데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아브라함도 인간세계에서 쫓겨난 거죠. 쫓겨나서 이렇게 다녔다는 건 뭐냐? 갈 바를 알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 하갈은 어디서 쫓겨났어요?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났지요. 그런데 갈 바를 역시 알지 못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면서 막 울었습니까?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잖아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게 지금 내 인생이 아니고 나의 스토리가 아니에요. 언약 자체의 스토리에요. 언약의 이야기에요.
결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왔다 갔다 하지만 결국 그 세 사람이 알게 된 것은 언약의 출처가 이 지상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여러분 머리 좋으니까 상상할 수 있을 거예요. 투명한 막을 가지고 위에 하늘 있고, 땅의 세계라면 하늘세계에서 어떤 분들이 좌우로 움직이고 이동하는 이것을 빛을 비추면 실루엣, 그림자가 비추겠지요.
이 그림자가 약속의 땅이라는 이름으로, 하늘나라는 약속이죠. 지상은 뭐가 있다? ‘약속+땅’ 약속의 땅에 그 실루엣,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겠지요. 이 그림자에 해당되는 자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고 다윗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날 성도다 이 말이죠. 이쪽은 실체고 이쪽은 모형과 그림자요, 히브리서에 나오잖아요. 이 실체가 하늘이 막을 뚫고 실제로 사람으로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에요. 이게 언약의 구조거든요. 다윗도 이 안에 포함돼 있어요.
그러면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다윗이 밧세바를 건드린 것은 누구의 설계다? 주님의 설계인 거예요. 주님에게 다 계획이 있었던 겁니다. 우리야 장군 죽이는 것은 누구의 뜻입니까? 주님의 뜻이지요. 이 이야기 듣고 갑자기 우리가 얼굴에 화색이 돌지요. 내가 서서히 이제부터 내가 사기를 쳐봐? 문제는 사기는 우리가 예상하는데 다윗과 아브라함과 이삭은 본인이 예상 못하고 후달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도 마찬가지로 ‘기계+악마의 마음’이죠. 다윗도 이걸 몰랐어요. 모르고 주님의 사건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 자기 존재성을 붙들고 있는 이게 더 우선되는 겁니다. 목포의 눈물 찾아봐야 되는데, 갑자기 미리 준비 안 돼서…. 나중에 합시다. 연세 많은 사람은 목포의 눈물이지만 제 나이 때는 양희은 노래에요. 이런 것. 그 당시에 나오는 기타 치며 부르는 포크송, 김민기의 그 노래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나도 참 고생 많이 했다는 걸 느낀다는.
갑자기 복음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다 뭐로 돌아왔어요? 나의 존재가 아름다울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지금은 망가졌지만. 망가진 그 나름대로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20대, 30대 젊은 사람들 지금 교회 안 가는 이유가, 우리가 지금 아름답다하는 그 아름다움의 재구성, 재설정 작업을 20대부터 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보다 지금 유럽여행 가는 내 모습이 아름답다고 그걸 사탕 포장하듯이 계속 포장하는데 하루하루를 다 보내는 거예요. 어느 맛 집 찾고 맛있는, 그걸 하나하나 내 아름다움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거예요.
하늘나라를 그렇게 땅에 비췄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이야기는 뭐냐? 다윗이 알고 있던 언약, 오늘날 성도가 알고 있던 언약적 관점이에요. 자, 언약적 관점 치워버리겠습니다. 언약적 관점 치워버리고, 그건 성경에서 주장하는 일방적 이야기다. 그럴 때 물이 없어 운다, 이것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기계+악마의 마음’이죠.
성도는 여기서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언약이 다 이루었다, 십자가 사건 할 때 ‘다 이루었다’의 반복성, 이것 놓치면 안 돼요. 반복성, 반복성. 존재는, ‘나는 오년 전에 은혜 받았어’로 끝이지만 그거는 존재고, 사건은 매일같이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관여합니다. 지금 물이 없어 운다는 것은 뭐가 빠진 거예요? 십자가 언약 빠지고 악마의 마음이 왔잖아요. 그렇거든요. 언약이 없으니까.
언약이 없으면 뭐라고요? 하갈, 악인이에요. 그러면 언약이 없으니까 이 사람한테는 이런 관점, ‘인간=기계+악마의 마음’ 안 믿어요. 믿지도 않지요. 언약이 없으니까. 이거는 언약이 있을 때 총괄적으로 나를 파악할 때 파악되는 사실이고요. 그럼 이걸 지워버려요. 없습니다. 그러면 물이 없다, 운다. 얼마나 자연스러워요. 양식이 없다, 운다.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우리는 매일같이 이렇게 살아요.
성경에서는 이게 악마의 마음이라고 해도 그거는 난 모르겠고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게 힘들다, 끝이에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광야 생활이에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 생활 보내서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다 귀찮고 중요한 것은 우리 집에 돈이 떨어졌다는 사실이에요. 내 몸이 아프다는 거예요. 왜 울지요? 아름다운 나에게 바치는 하소연이죠.
나는 나를 믿는 신앙인인데 내가 신이니까 내가 신인 동시에 나는 그 신에 절대 복종하는 유일한 신자가 나거든요. 내가 나에게 복종하는 종교를 만든 거예요. 나는 오직 어떤 경우라도 배신하지 않는 오히려 마지막 남은 신자가 나에요. 물이 없어, 운다. 아이는 아프지 나도 아프지, 돈을 떨어졌지 할 게 뭡니까?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운다는 건 뭐냐 하면 죽는 것이 무섭다. 죽는 것이 왜 무서운가?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그걸 아셔야 되고, 우는 것은 아직 살아 있을 때나 우는 거예요. 죽으면 안 울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속고 있는 거예요. 죽음이 무섭다는 것은 아직 덜 죽었다는 뜻이에요. 죽을까봐 우는 거예요. 죽을까봐 무서운 거예요. 죽으면 무섭지도 않아요.
죽는 것이 무섭다는 것은 무엇을 거부하느냐 하면 그동안 나는 나만 바라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티내는 겁니다. 이제 내가 사라질 판이에요. 그럼 사라지면 되잖아요. 안 돼요. 나는 내가 영원해야 돼요. 이 고집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몸을 죽을 몸을 만들고, 우리는 그걸 강제로 악마의 마음으로 거부하면서 ‘안 돼. 나는 불멸해야 돼.’
그래서 나온 게 뭐냐? 종교라는 게 나왔어요. 내 몸은 죽어도 내 영혼은 산다는 모든 종교의 공통점, 불멸사상. 불멸사상이 어디서 나왔어요? 누구의 마음에서 나와요? 악마의 마음에서 종교,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힌두교가 나온 겁니다. 전부 다 나의 불멸성, ‘나는 꼭 구원받아 돼’ 이유도 없어. ‘무조건 남은 지옥 가도 나는 천국 가야 돼’와 관련되어서 종교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