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40531a 누가복음 15장 4절(죄란)-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40531a 누가복음 15장 4절(죄란)-이 근호 목사
오늘은 p.80【죄란】, 거기서부터 하겠습니다. 자, 죄에 대해서 정립을 할 필요가 있어요. 죄에 대해 정의 또는 정립. 누가 ‘죄가 무엇이냐’ 할 때 죄는 이렇다고 대충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죠.
죄라는 것은 ‘너와 나의 관계’를 의미하는 겁니다. 너와 나의 관계. 여기서 ‘나’는 하나님, ‘너’는 바로 예수님. 여기서 인간은 죄에 대해서 빠져 있습니다. 빠져 있어요. 창세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모든 의미는 이 두 분 사이에서 정립이 된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끝났어요. 죄란, 방금 위 이야기를 통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여기 있고 살아간다고 느끼잖아요. 그러면 사는 게 뭐가 되겠어요? 죄가 되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관계에서, 죄를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은 아버지와 아들밖에 없어요. 그런데 천사라든지 또는 악마, 또는 인간 이것들이 모든 의미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새로 수용 받아야 되는데…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무슨 관계라 합니까? 언약 관계죠. 창세 전의 언약, 창세 전 언약 관계에서 받아야 되는데 독자적으로 의미를 부여해버리는 거예요. 마귀도 마찬가지고요. 마귀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럼 이거는 나와 나의 관계에서 의미를 주는 거예요. 저기 꽃이 있다. 내가 꽃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꽃은 나한테 하나의 꽃이 되었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것이 이름을 부를 때 꽃이 되고 그것이 이제 의미가 되는 거죠. 이름을 내가 불러주는 거예요. 꽃.
아담을 만들어놓고 주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부여하게 하시죠. (아담이) 짐승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이름을 부여하는데 그렇다면 아담 당사자는 어떻게 돼요? 아담이란 이름은 아담이 지었습니까? 아니죠. 아담이란 의미를 아담 본인이 만들었습니까? 아니죠. 그러면 아담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종속적인 관계에 속하는 겁니다. 예속되는 관계에요.
그 예속 관계에 있음을 더 분명히 하시는 것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지시와 명령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것을 수만 번까지 했을 거예요. 이 내용을. 이 내용에 대한 해석을. 오늘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적어볼게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선악과 누가 만들었어요? 인간이 만들지 않았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를 인간 쪽에서 만든 게 아니거든요. ‘선악과 네가 만들어놓고 따먹으면 네가 죽으리라’ 이게 아니거든요. 선악과 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었단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선악과에도 예속되어 있지만 결국 어디에도 예속됩니까?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에 예속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죽음은 인간과 무관하다’. ‘무관하다’를 다른 말로 하면 ‘상관없다’. 더 나아가서 ‘나의 죽음은 나랑 상관없다’. 내 죽음은 나랑 상관이 없어요. 다들 그렇게 살고 계시죠? 내가 지금 암 말기다. “아이고, 빨리 약 잡숫고 회복하셔야 되죠.”하면 성도인 환자는 “나 죽는 것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그런 사람 봤습니까? “선생님, 살려주세요.” 이러고 “하나님, 뭐 때문에 저한테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대전강의에서 나오죠. 합스부르크 마지막 황제 유언이 뭐였다고 했죠? “하필 이때입니까.” 사람이 죽을 때 약이 오르는 것은, 나를 지켜보는 인간들은 멀쩡히 살아있다는 거예요. 이게 약이 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임금들 죽을 때도 그 임금의 위상을 빛내기 위해서 옆에 있는 부인부터 해서 같이 순장해버리잖아요. 같이 땅속에 묻어버리죠. 100일 동안 먹을 양식 주고. 그 100일의 양식은 뭡니까? 일종의 시한폭탄이죠. 시한폭탄. 시한폭탄이야 빨간 선을 끊을까, 파란 선을 끊을까 그런 기회라도 있지만 이건 그런 기회도 없어요. 그냥 째깍째깍째깍 그 안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놓은 이상 인간의 운명은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죽으리라’는 설상 네가 죽는다 할지라도 네가 저주받는다 할지라도 너의 죽음은, 다른 말로 하면 너의 저주받음은 누구와 상관없다? 너 자신과 상관없다는 거예요.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러면 이 말을 달리 바꾸어봅시다. 내가 천국 간다. 내가 천국 가는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없죠? 그러니까 천국은 나의 소원이 되어야 돼요, 말아야 돼요? 천국은 나의 소원이 되지 말아야 돼요. 나의 소원은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그게 소원이어야 돼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그걸로 끝입니다. 오늘 강의 끝났다. 집에 가야겠다. 너무나 간단한 문제에요. 너무나 간단한 문제.
그러면 죄가 뭐냐? 이미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 앞에 이미 예속되게 했잖아요. 예속된 관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바로 죄의 등장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 속에 이미 죄가 무엇인가 의가 무엇인가 창세 전에 규정되었잖아요. 규정된 것을 하나님께서 움키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시간 따라 퍼트려버리는 거예요. 퍼트려버리면 죄는 확산되면서 거기에 모든 피조물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결정된 죄의 개념, 의의 개념에 말려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심지어 마귀까지. 말려들어요.
포목집에 가면 옷 만들기 위한 원단이 있잖아요. 무늬가 없는 원단 말고 무늬가 다 새겨진, 염색 다 된 원단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있죠. 그런데 손님이 왔습니다. “아이고, 이번에 딸 시집가는데 내가 한복 한 벌 해준다 해서. 사돈 쪽 한복을 어떤 걸로 할까?”하면 “아이고, 어머님 참 나이보다 젊어 보이십니다. 이걸 한번 해보세요.”하고 두루마리 하나를 끄집어내서 그다음에 어떻게 해요? 대구 서문시장에 포목집이 유명해요. 어릴 때부터 많이 봤어요. 그 좁은 상에 확 전개시키죠. 뚤뚤 감겨있던 건 풀어보죠. 풀어낸단 말이죠.
그게 언약의 전개죠. 언약의 전개. 그럼 언약의 전개와 더불어 무엇이 전개된다? 죄의 전개가 되죠. 오늘 공부할 게 그겁니다. 죄가 어떻게 전개되는가? 그러면 죄의 전개는 이미 결론 나 있어요. 한 인물을 향하여 수렴된다. 집약되는 쪽으로 죄가 전개되겠죠. 펼치신 분으로 도로 죄의 의미를 담고 회수가 되는 겁니다. 거기에 모든 천사와 악마와 인간은 말려들었어요. 그 죄의 개념 속에 빨려 들어가죠. 죄라는 개념을 누가 지정했는가, 그 지정자에게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결론삼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죄는 결과적이다’. 죄는 결과적이에요. 죄 짓는다 해서 짓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결과를 놓고 소급해보면 모조리 다 죄가 되는 거예요. 모조리 다 죄가 돼요.
지난 목요일에 우리교회 집사님이 점심 사준다 해서 그분과 또 다른 집사님과 같이 갔는데 질문 가운데 이게 있었어요. 어떤 질문을 하느냐 하면 ‘음행하고 음란하고 차이점이 뭡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그 질문을 제가 굉장히 좋게 받아들였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무엇을 음행이라 하느냐 하면, 우상숭배를 음행이라 합니다. 신약 요한계시록 17장, 18장에 보면 음녀가 나타나서 예수님에 대해서 모독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것, 그걸 음녀, 음행이라 한단 말이죠.
그러면 음녀, 음행이란 개념이 ‘어? 이건 바람피우는 게 아니냐? 어떻게 음행이 그런 개념이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지금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죄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알고 있어야 되죠. 어떻게 죄가 흔히 아는 상식적인 도덕적인 음행에서 우상숭배가 죄가 되는지를, 불신이 음행이 되는지를, 전개과정에서 어떻게 확산되는지 봐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쭉 설명을 해드렸어요. 중간에 호세아를 거쳐서.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간음한 여인과 혼인하게 만들어서 의도적으로 어떤 자식을 낳게 하느냐 하면 음행의 ‘결과’성을 자꾸 뽑아내는 거예요. 결과성을.
그러면 인간이 죄 짓는다는 것은 어디에 참여한다는 말입니까? 인간이 나서서 죄를 지을 수는 없고 이미 상주한 죄에 참여해서 표현하는 식으로서 표현하는 하나의 타일, 모자이크 타일 있잖아요, 타일, 부엌이나 화장실에 있는 타일 조각 조각으로 사용되어지기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 이스라엘의 기능이고 또 율법을 주신 이유가 되겠죠. 결과적으로.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이미 상주하고 확정되고 확장된 죄라는 공간에서 어떤 죄들이 어떤 사태에서 묻어나지는지, 그걸 증상 또는 징후라 하죠, 징후로서의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하라 참회하라’는 의미가 어떻게 돼요? 완전히 다르겠죠. 이건 윤리 도덕적으로 반성하라는 뜻이 아니고 회개하라 참회하라는 뜻은 비(非)-본래적 세계를 쳐다보고 살다가 다른 세계, 본래적 세계를 발견하는 게 회개가 되겠죠.
이 본래적 세계, 비-본래적 세계는 최근에 나왔어요. 어제 나왔어요. 어제. 수련회 교재에. 읽어보시면 나오죠. 인간이 어떻게 비-본래적 존재가 어떻게 본래적인 걸 알 수 있느냐? 제가 질문했잖아요.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몰라요.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알지 못해요. 자기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에 대해서 알지 못한 결과가 뭐냐? 자기 행위를 결과적이 아니고, 결과적 반대말, 원인적인 거죠. 누가 원인으로 등장하죠? 나. 나에게 원인을 두기 때문에 아무리 행동하고 말해도 그 의미가 어디로 돌아가요? 나로부터 나에게 의미가 돌아오는 것, 이것이 성경에서 언약적으로 뭡니까? 한 자로 말해서?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결과적입니다. 그래서 죄는 결과적이라 할 때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악이에요. 그냥 악이에요.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을 보고? 그게 악이죠. 다윗이 악이라는 하나의 타일로 등장했을 때 비로소 다윗은 비-본래적 위치에서 본래적 위치를 발견한 거예요. 그걸 회개라고 하는 겁니다. 회개. ‘나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구나.’ 이게 회개에요.
자, 그렇다면 성경적 언약적으로 이게 죄라면 그동안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짓눌려 살았습니까? 도대체 누가 나를 짓눌렀어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누가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교재에 이미 나왔기 때문에 교재 설명이 약간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른 기회가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결론 부분에 나와 있어요. 교재 결론 부분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미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영구 퇴출 대상이 되었습니다. 죽여서 추방시켰잖아요. 영구 퇴출이에요. 김호중인가? 가요계에서 영구 퇴출하는 것처럼 하여튼 영구 퇴출시켰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 갖고 소환할 이유가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인간들이 모이면 주고받잖아요. 너와 나의 관계니까 인간들은. 그러면 너와 나의 관계, 커뮤니케이션, 말을 한다는 것은 의미 던지고 의미 받고, 저쪽에서 의미 던지고 의미 받고 의미를 주고받는 거예요. 의미를.
예를 들면, 엄마가 딸보고 “야, 너 공부해.” 하니까 딸이 하는 말이 “나한테 공부하란 말 하지 마세요.” “왜?” “내 허락도 없이 엄마는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이러면 뭐의 교환이 안되죠? 어떤 교환이 안되죠? 딸의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고 무슨 교환이 안돼요? 의미 교환이 안되는 거예요.
‘공부하기 싫다’를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괜히 태어나게 해가지고 이 땅에서 숙제나 하고. 힘들어죽겠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할까?’ 엄마는 거기에 의미를 두는데, 딸은 지가 공부하기 싫으니까 후딱 자기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얼굴만 빼꼼이 내고 대꾸나 한단 말이죠. ‘이렇게 닦달 낼 것 같으면 엄마는 나를 왜 만들었어?’ 이런 식으로. 의미 안되죠.
어쨌든 간에 인간의 만남에서 의미를 주고받고 의미를 주고받잖아요. 나와 너의 관계니까. 의미를 주고받는데 왜 인간은 그 의미세계에, 윤리 도덕에 주눅이 들었냐 이 말이죠. 뭐가 인간을 그렇게 죄책감 느끼게 만들고 억압했을까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아무리 의미를 구해도 의미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니까, 그걸 아까 얘기한대로 하면 비-본래적 존재죠.
그런데 교재 결론부분에 나와 있어요. 이미 인간들이 주고받고 주고받아 내린 최종 결론이 뭐냐? ‘예수님한테는 신경 꺼라.’ 이게 결론이에요. 아이고, 그건 그 당시 유대인들이 내린 결론이고…. 아닙니다. 이미 유대인은 인간의 대표자들이에요. 그들이 내린 결론이 그 앞세대, 후세대 모든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 겁니다.
여러분, 본성을 드러냈다는 이 말도 수천 번 했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요한복음 15장 22절,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되어 있죠.
의미를 제공하는 하나님이 접촉했던 유일한 민족이 유대민족이고, 그것도 과거 유대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 만났던 그 유대민족이잖아요. 그 유대민족에게 예수님께서는 아까 요한복음 15장 22절을 이야기했다고요. “내가 오지 아니하였으면 너희에겐 죄가 없다.”
이 말 해석부터 우리는 그냥 넘어가면 안돼요. 내가 오지 아니하면 죄가 없다는 말은… 그야말로 그들이 죄가 없다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인정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은 죄짓지 않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죠. 죄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은 그들은 이미 죄가 뭔지, 죄가 아닌 게 뭔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거예요. 죄가 없는 게 아니고, 죄가 여기 있음을 그들은 감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너희에게는 뭐가 없다? 죄가 없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죄 같지도 않은 것가지고 그게 죄라고….” 이런 투란 말이죠. 그것도 죄라고. 아이고, 웃기네. 그거는 너희 세계의 의미잖아. 너희 세계의 의미. 너희들 인간들 만남에서 인간의 공통점에서 구성해낸 가짜 죄, 가짜 의미가 되는 거예요.
너희 아비는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죠. 악마가 인간에게 제공한 가짜 죄의 의미. 그 의미는 뭐로 구성되어 있어요? 뭘 따먹었어요? 선악과죠. 선악 체제로 짜여진 의미. 내가 요 근래 강의, 설교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또 하려 하니까 여러분들이 살짝 짜증낼까봐 말을 못하겠는데… 수요일에 한 이야기, 다시 한번 하고 싶네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기가 잘한 것으로 남한테 인정받는 보람으로 살아요. 자기가 잘하는 거요.
그러면 자기가 못하는 것은 어디 갔지요? 못하는 것은 어디 갔죠? 자기 내부에 숨기죠. 그게 밤에 잘 때 뭐로 나타나죠? 꿈으로 나타나죠. 이게 교재 2번입니다. 낮에는 밤에 감추고 있던 것을 싹뚝 잘라낸 가짜 현실을 현실이라고 우기다가, 인간이 잠을 잔다는 것은 의식이 멈추는 거잖아요. 심장은 안 멈춰도 의식이 멈추죠. 멈추면 숨겨놓은 진짜배기 현실이 완전히 드라마를 찍죠. 영화를 상영한다고요.
그러다 낮에 어떤 계기가 있으면 어젯밤 꿈이 막 생각나는 거예요. 지금 내가 동유럽 갔다 왔는데 꿈에 계속 짐 싸는 꿈만 꿔요. 빨리 가야 돼. 빨리 이쪽 가고 저쪽 가야 돼. 그런 꿈 이야기를 할 때, 난 꿈이 이랬다고 이야기했어요. 진짜 꿈이 그럴까요, 아니면 꿈의 해석입니까? 꿈 꿀 때는 꿈이 지배권을 갖기 때문에 해석을 용납 안 해요. 꿈은 보이는 대로 나타나지, 해석하라고 나타난 게 아니기 때문에. 해석하는 자는 지금 의식이 없어 죽어있기 때문에.
그런데 낮이 되면 그 꿈 꾼 게 남아 있잖아요. 주도권이 어디로 왔습니까? 주도권이 꿈에 있다가 나에게 왔죠. 이게 뭐냐? 현실과 나 사이에 밀고 당기기. 밀당이죠. 낮에는 현실에 적응하려고 해요. 왜? 내가 중요하니까. 내가 엄연히 살아있으니까, 현실에. 눈만 뜨면 나는 살아있어요. 눈만 뜨면 살아있어요. 눈만 뜨면 확인되는 것이 나는 지금 살아있다는 의식입니다.
의식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는 나와 결부된 의식이 살아있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입니다. 이 닦고 밥 먹고 하죠. 운동가고. 약도 챙겨먹고. 오메가 3도 꼭 챙기고. 현실이라 했는데 이 의미를 누가 주느냐 하면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현실에다 의미를 주고 내가 도로 당겨와야죠. 오늘 독서실에 애 몇 명 왔드나, 이런 거. 의미를 주고 도로 당겨오는 거예요. 독서실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고 내가 현실을 꾸려가고 있으니까.
특히 엄마나 아빠 같은 경우에 자식 있으면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오늘 수련회 교재 다 하겠다, 지금 여기서. 애가, 엄마가 장에 가면 엄마가 부재(不在)한다, 없다고 여기잖아요. 그게 엄마에 대한 철딱서니 없는 짓이에요. ‘엄마가 지 버리고 가겠어요?’ 이건 엄마 생각이라고요.
그러나 애 생각은 생사에 관한 문제에요. 자기는 어른이 아니니까. 엄마 없으면 곧 자기는 죽음을 직감하게 되는 거예요. 엄마 없으면 죽어요. 그러니까 애는 5만 원짜리 지폐 필요 없어요. 신사임당도 필요 없어요. 은행 주식할까? 주식도 필요 없어요. SK 주식도 필요 없어요. 중요한 것은 엄마 존재입니다.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왜냐하면 내가 의미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엄마가 있으매 거기에 종속된 존재가 아이란 말이죠.
그런데 엄마는 그 애를 보고, “내가 잠시 시장 갔는데 그것도 못 참고 찔찔 울고 있냐? 찡찡거리고 울었냐?” 막 나무라는 거예요.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도대체 언제 철 날꼬?” 이런다고요. 뭐 철분을 좀 먹든지… 엄마는 왜 그런 소리합니까? 엄마는 어른이잖아요. 혼자서도 잘해요. 혼자 시장보고 잘한다고요. 자기로부터 의미가 나와서 의미를 회수하는 그것으로 자기만의 현실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현실이 실은 뭡니까? 어젯밤에 꾼 꿈이 지금 현실에서 생각날 때 그게 아침 10시에 해석한 꿈, 12시에 해석한 꿈이 그 현실에 일어나는 사태 속에서 계속해서 다양하게 그때그때 달라요. 계속 바뀌는 겁니다. 이 말은 현실의 무수한 변화와 동시에 나도 종잡을 수 없이 변하는 거예요.
내가 마치 나에게 꿈같아요. 꿈속 같아요. 김광석 노래 나오는 것처럼. 라는 노래에 나와요. 꿈결 같아요.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꿈결 같아요.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뭐라 말하려 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와요’ -거리에서 가사 中) 내가 생각하지 않은 다른 나 같아요. 이 현실에서.
그래서 남자가 멀쩡하게 집에 있을 때 남자와 예비군 군복 입혀놓고 예비군 훈련받을 때 그 남자가 다른지 본인도 느끼죠. 내가 왜 환경 따라서 이렇게 다른 인간으로 사느냐. 집에 있을 때는 아주 깍듯하게 부인한테 잘하다가 예비군 군복 입으면 지나가는 아가씨보고 휙 소리 내면서… 옆에서 하는 거 따라하니까. 따라쟁이.
왜 따라하는데? 그 무리와 같이 하지 않으면 그 시간만큼은 의미에 참여가 안돼요. 참여가 안 되면 내가 따돌림 당합니다. 새로운 이슈에 합류하지 않으면 내가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없어요. 그 뭉태기, 그 집단의 움직임에 합류가 안 됩니다. 합류될 수 없어요. 그래서 군대는 인간을 개조한다 하잖아요. 개조한다고 얼차려해서….
어쨌든 간에 내가 있음으로 인하여 현실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현실이기 때문에 이 현실 속에서 나는 있다, 없다? 나는 부재한다, 있다? 있는 거예요. 자, 한번 보세요.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꼭 장난 같이 보이지만 한번 보세요.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잠시 시장 간 엄마의 존재는 어린 아이인 내가 있더라도 본인은 있어요, 없어요? 엄마가 없는 상태에서 본인이 있어요, 없어요? 엄마 없어도 나는 있네, 그러면 다 큰 거예요. 울지 않아요. 그게 아니고, 나는 내가 있어도 있는 게 아니에요. 실타래라도 던져서 엄마 대용이 있어야 엄마 거기 있으매 비로소 내가 있는 거예요. 순서가 1.거기 있으매 2.내가 있는 거예요.
이게 여자에요. 여자는 두 번째 사람이에요. 첫 번째 사람이 없으면 두 번째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린 여자에 대한 징벌이 뭐냐? 남자를 사모한다. 본인은 본인을 사모 못해요. 본인을 사모할 수가 없어요. 왜? 자기는 두 번째니까. 첫 번째 있음, 그것도 든든해야 돼요, 든든한 첫 번째 있음에 자동적으로 자신도 그 품 안에서 든든한 거예요.
그런데 그 든든한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한 눈 판다. 가까운 주변에 정지칼, 경상도 말입니다, 부엌칼 있으면 그냥 성질상 죽이고 싶죠. 네가 뭔데 나를 없애느냐? 네가 있으매 내가 있어야 되는데, 네가 다른 여자 있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돼요? 내가 있을 자리가 날라가 버렸잖아요. 그럼 내 자리를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참, 남편 안 죽인다. 그 여자의 머리카락이라도 잡아 쥐어뜯고… 폭력이죠, ‘늑대야!’ 다시 말해서 파괴(수련회 교재 [3.자폐증] 참고), 파괴시키죠. 파괴시켜버릴 때 나는 비로소 남편 있으매 내가 있는 겁니다. 이게 어린아이에요.
대전강의에서 했는데,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의 특징이 뭐에요? 공통점이 부재(不在)입니다. “고아 본인이 있잖아요. 됐잖아요.” 아니에요. “나그네 있잖아요.” 안돼요. “과부 자기가 있잖아요.” 아니요, 아니요. 내가 없어요. 뭔가 나로 나 있게 만드는 다른 미지의 것이 있어줘야 돼요. 나의 고향이 있든지 나의 남편이 있든지 나의 부모가 있든지.
그럼 이 미지의 물음표 자리에 누가 나옵니까? 룻 보세요, 룻. 누가 나옵니까? 고엘. 누가 나와요? 그냥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죠, 하나님이. 뭘 주세요? 율법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모압 여인, 고향 잃은 이방 여인의 제대로 된 유일한 존재가 되죠. 그게 신약 성경에 오면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이 되는 거예요. ‘율법 안, 복음 안, 새 언약 안’이 되는 겁니다.
어쨌든 어린아이와 엄마에게 있어서 엄마는 스스로 자기가 존재해버리는 겁니다. 스스로 존재하죠. 지금 ‘죄가 무엇이냐’를 위해서 어제 제가 교재를 실었기 때문에 교재 내용을 이렇게 우회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럼 교재의 핵심 부분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의 부재를 증명한 거예요. 어디에서? 이 땅에서.
특히 요한복음 12장 많이 언급했죠. 뭐 읽어보셔야 진도를 나갈 건데.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나는 어디로 간다?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아버지께로 가죠. 그럼 뭐에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버리면 열두 제자부터 해서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 쪽으로 의미가 가는 진짜 예수님이 아니고, 저 예수는 나를 어떻게 구원하고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있지도 않은 예수, 가짜 예수를 그동안 자기 의미를 충족시키는 재료로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럼 이거는 회개가 안 된 거죠. 나 있는 세계를 고집하고 고수했기 때문에. 오늘 광주 여러분께만 특별히! 특별히 지금 교재에 대해 얘기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 아무도 몰라요, 이거. 예수님은 자기 부재가 증명돼요. 내가 있는 곳에 아버지가 있다고. 그런데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부재 증명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죠. 그게 뭡니까, 한 자로? ‘죄’가 되죠.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부재하는데 네가 존재한다고 하니까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데서 의미가 오는데 인간들은 그 의미를 누구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음부터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어떻게 저를 구원해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 결과적이 아니고 항상 시작을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천당 갈 수 있습니까? 목사님,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선택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모든 의미를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질문을 자기로부터.
그러니까 자기로부터 시작할 때는 자기에게 선악 체계가 있잖아요. 윤리 도덕이 있잖아요. 이 정도 착하면 됩니까? 이 정도 나쁜 짓 안하고 버티면 되겠습니까? 결국 그 사람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 안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게 뭐냐. 물론 돈 잘 버는 것도 잘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잘할 수 있는 것은 선악 체제에 따라서 내가 아주 개망나니처럼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렇게 노력하는 중이니까 이 노력을 하나님이여, 가상히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자, 여기서 좀 더 깊이 있게 나가보겠습니다. 깊이 있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인간이 존재한다.’ 여기서 의미 나옵니다. 의미의 내용은 뭡니까? 자기 의죠. (존재→의미→자기 의) 무조건 이 의는 나를 비켜가서는 된다, 안 된다? 절대로 비켜 가면 안돼요. 의미를 안다는 자체가 이미 ‘나는 의롭다’에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라캉(Jacques Lacan, 1902-1981,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정신분석학자)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가 바람피운다고 의심해서 계속 그 증거를 찾는 거예요. 그걸 의처증이라 하죠. 계속 증거를 찾으면서 ‘아, 바람피울 거야. 아마 지금 바람피우고 있을 거야.’ 계속 증거를 찾는 거예요. 어떤 남자가. 그럴 때 ‘맞아. 내 아내가 바람피우는 거 맞아. 내가 기어이 증거 찾아낼 거야.’ 해서 그 남자가 증거를 찾았어요. 찾았을 때 라캉이 하는 말이, “네가 한 말대로 아내가 바람피운 것이 맞다할지라도 너는 정신병 환자다.”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왜 굳이 남을 의심하는 방식으로 네 정체성을 구축해야 되는가. 그게 정신병이에요. “거봐. 내 말 맞잖아.”하는 그게 정신병이라니까요. 왜 본인이 옳아야 되죠? 아, 모든 인간이 정신병이에요. 왜 인간은 본인이 옳아야 되죠? 이거 한번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집사님, 생각해본 적 있어요? 내가 왜 옳아야 되죠? 이것도 모르고 교회 다닌 거죠. 이것도 모르고 성경공부 하러 다녔잖아요. 지금 말고 옛날에.
교회 왜 나가죠? 나의 정당성을 보증해줄 확실한 분을 찾기 위해서 교회 나갔잖아요. 하나님이, 위대한 하나님이, 절대적 하나님이 내가 옳다는 것을 판정할 때까지 고집스럽게 그 증거 찾잖아요. 대전강의 첫째 강의 제목이 뭡니까? 죠. 증거를 찾는 거예요. 아, 이거 참. 이 정신병자를 어쩌면 좋죠. 이 정신병자를.
그렇게 자기 의를 고수했던 그것이 시대가 바뀌었어요. 뉴턴부터 해서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줄기차게 시대가 바뀌어가지고, 이 자기 의를 종교에서 신부나 목사의 교훈으로서 하나님이 보증해주신다, 성경 계시를 통해 보증 받던 이 시대가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과학자에게 의존하는 식으로 바뀌고 말았어요. 과학자에게 의존하는 식으로.
과학자에게 의존하는 식으로 바뀌어버리면 교구의 신부나 담임목사가 ‘당신 구원받았어요. 당신은 창세 전부터 예정된 사람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해서 마음의 행복을 느꼈던 그 행복을 지금은 그딴 건 참고로 하고 진짜는 뭐냐? 과학자한테 맡기는 거예요. 맡긴 결과가 이런 도표로 나오는 겁니다. (첨부파일 그림 참고)
도파민(dopamine), 세로토닌(serotonin),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 같은 말로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 유럽 쪽에서는 노르아드레날린이라 해요. 이 교차지점에서 나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기분이에요. 인간은 뭐로 산다? 기분 따라 살아요. 내 기분이거든요. 남 기분이 아니라 내 기분이 중요해요.
내 기분을 유지하고 균형 맞추기 위해서 정신과 의사한테 묻는 겁니다. “뭐를 더 높이면 내 의욕이 생기겠습니까?” “도파민입니다.” “내가 지금 우울증 걸려서 절제가 안 되는데 뭘 하면 됩니까?” “세로토닌 이거 약간 높이면 됩니다.” 이거 신경전달물질이거든요. 음식 먹으면 이런 게 또 들어있어요. 세로토닌 최고에요. 이시형 박사가 주장하는 거. 노르에피네프린 또는 노르아드레날린 이것도 균형을 맞추면 당신 기분이 좋다, 이걸 두 자로 하면 뭡니까? 행복. 이게 행복한 거예요.
그런데 이 이론의 문제점이 뭐냐? 정신과 의사들의 주장은 세로토닌 주입시키는 것으로 치료하는 게 아니고, ‘당신이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을 하게 되면 세로토닌이 생성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생성될 겁니다. 이건 말 하나 마나에요. 세로토닌을 주는 게 아니고, 높이는 약물이 있는 게 아니고, ‘앉아서 열심히 운동해서 자생적으로 세로토닌이 증가하게 되면 당신이 좋아질 겁니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도파민을 주는 게 아니고, 생각을 긍정적으로 먹으면 도파민이 생성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도파민 생성이 목적입니까, 내가 도파민 생성을 목적으로 해서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면 그게 이미 목적을 달성한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목적을 달성한 거예요, 그냥. 행복해라, 행복해, 행복해져라. 이러면 되는 거예요. 행복해라. 오~ 행복하네.
도파민은 엑셀레이터 밟는 것, 뭔가 가라앉았을 때 의욕을 부추기는 것. 이걸 보상회로 시스템이라 해요. 도파민은 이쪽에 관여하고, 세로토닌은 고통회로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세로토닌이 떨어지면 고통스럽다는 말이 아니고요. 고통스러울 때 ‘아, 이게 고통스러우니까 내가 행동을 주의하는구나.’ 하면 세로토닌이 나온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과학도 결국 결과적이에요. 결과적 진단, 판단을 내릴 뿐이지, 내 병은 결국 내가 알아서 하면 돼요. 그럼 이 짓을 왜 합니까? 기분 좋아지라고. 행복하기 위해서. 이걸 제가 쭉 강의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바로 존재하는 나에게 의미를 주는 행위죠. 이걸 뭐라 했습니까, 한 자로? 죄가 되죠.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살아있으면서 모든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두뇌에 있는 신경전달물질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의 행동은 기분 따라 행동하게 되어 있죠. 그리고 기분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 이게 또 말장난이 되는데, ‘내가 기분을 좋게 해야 돼’ 이 말이 맞아요, 아니면 ‘기분이 나를 결정해야 돼’ 어느 말이 맞습니까? 기분이 나를 결정하는 거죠, 기분이.
그러면 기분은 어디서 오는가? 이건 바로 환경에서 오죠. 환경은 뭐냐? 꿈의 확장인데요. 꿈은 누가 관리하죠? 꿈은 내가 관리 못해요. 꿈은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죽은 자 속에서 나한테 묻지도 않고 그냥 내 속에 있는 기억을 끄집어내어서 나라는 이 세포의 기계가 자아라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지 맘대로 몸이 알아서 움직여버리니까 나는 내 몸의 종이 되는 거죠. 노예가 되는 거죠. 끌려가고 말려들어가는 거예요.
기침을 하고 싶다. 지금쯤 기침해라, 이게 안 되잖아요. 나올라 하는데… 참아야 하는데, 하다가 나오잖아요. 몸은 내 맘대로 되질 않아요. 그리고 내 몸도 내 뜻대로 안 되지만 몸도 몸 자기 맘대로 안돼요. 몸을 둘러싼 환경이 이끄는 대로 해야 돼요.
현재 인도 최고 기온이 52도인데, 뭐 기분이고 자시고 간에 몸이 완전히 쳐질 판이에요. 최고 기온 52도. 40도만 되도 우리는 모든 게 짜증나는데 52도까지. 인간의 몸은 세포로 되어 있잖아요. 단백질로 되어 있단 말이죠. 환경에 소속되어있단 말이죠. 환경이 52도 같으면 안 되죠. 될 수가 없죠.
그러면 환경 속에서 인간의 죄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그거는 10분 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