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40509a 요한일서 2장 22절(가짜 인간)-이 근호 목사
서울강의20240509a 요한일서 2장 22절(가짜 인간)-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2장 23절입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은 무엇과 견줄 수 있느냐면 ‘내가 여기 있다’가 현재 여기서 대결구조를 형성합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과 재원씨가 거기 있다, 우리 지금 싸우는 관계에요? 아니죠. 인간 대 인간의 존재는 서로 친하게 지내면 되죠. 왜 인간은 인간하고 친하게 지내야 되느냐? 너나 나나 똑같은 세계 안에 구조 안에 놓여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인간 대 인간이 놓여있는 이 세계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어두움이라고 이야기해요. 어두움은 깜깜하다, 새카맣다 이런 것보다도 어두움을 무엇의 누락으로 표현하는데 ‘빛의 없음’을 어두움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두움은 자기가 어둡다는 걸 모르죠.
인간들은 이 세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예요. 이 세상을 더 높은 데서 보면 이 세상에 뭔가 빠졌다고 생각할 텐데 이 세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봐서 처음부터 온전한 것으로 봐버리면 누락, 빠져 있음이라는 게 없죠. 빠져 있음이 없으면 내가 속해있는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사람들은 알아채질 못합니다. ‘아, 깜깜해.’ 이건 밤에 하는 얘기지, 낮엔 깜깜하다고 하질 않죠.
성경에서는 빛이 없으니까 어둡다는 거예요. 그러면 빛이 있는 세계, 빛의 세계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빛이라는 거예요. 예수님 계시게 되면 빛이다. 그럼 인간 대 인간, 너와 내가 있는 인간세계는 어두움이 되는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게 어둡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제가 아까 말한 대로 예수님이 계시는 것과 내가 있는 것이 어떤 상태에 있다? 서로 대결상태에 있는 거예요. 서로 결합될 수 없는 상태, 충돌될 수밖에 없는 그런 세계죠. 붙었다 하면 폭발되는 세계.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가 없죠. 피조세계가 창조자를 못 이기잖아요.
그러면 요한복음에서 또는 요한일서에서 이 세상 자체는 어둡고 빛이 없다 했는데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아버지가 함께 계신 예수님이 없다는 말은, 어두움에는 뭐가 없다는 거예요? 어두움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곳.
그래서 23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여기서 이제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질문 하나 던지고 시작하겠습니다. ‘지옥이란 뭐냐?’ 지옥이 뭐냐? 여기 24절, 25절에 의하면 아들 예수님 안과 아버지 안에 있지 않으면 그것을 지옥이라고 해요. 아들의 안과 아버지 안에 있지 않으면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과 아버지 안에 있지 않으면 지옥이 되는 이유는 거기에는 25절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이것은 확정났어요. 확정된 거예요. 확정된 것. 쓸게요. ‘지옥이란 확정된 거다. 확정된 것.’ 지옥에서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묻지를 말아라. 지옥은 지옥다워야 되니까. 확정된 거예요.
그래서 지옥에 있는 사람이 영생을 탐한다는 것은 지옥답지 않죠. 지옥이 지옥답다는 말은, 지옥은 어두움이거든요, 어두움은 반드시 대결상태가 이루어져야 돼요. 그래서 생명이 생명 되려면 반드시 어두움의 세력에 의해서 거부당하는 요소가 있어줘야 천국이 천국입니다.
방금 제 이야기에 인간위주가 있어요, 없어요? 전혀 인간위주가 없어요. 확정된 거예요. 인간들이 어떻게 하고 이런 것과 관계없어요. 역시 인간들을 다 빼는 거예요. 빛과 어두움, 어두움과 빛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어두움의 세계 일부를 구성하고 있어요. 어두움의 세계.
약간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하면, 어두움의 세계는 너와 나가 있고 너와 나의 세계 특징이 뭐냐? 결핍을 모른다는 거예요. 결핍을 모른다. 태어나보니까 하늘이 있고 태어나서 보니까 강이 있고 바다가 있다. 뭐? 이게 뭐가 문젠데? “그건 어두운 거예요.” “뭘 어두워? 낮에 해 뜨는데 뭐가 어두워요? 밤에 가로등 불 켜는데 뭘 어두워요?” 약간 어둡긴 하겠다만.
이 세상 자체에 대해 문제 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문제 삼을 이유가. 그래서 인간의 관심사는 ‘내가 문제 있다’가 아니라, ‘문제없는 이 세상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 이게 평생 필생의 소망입니다. 평생을 걸쳐서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뭐냐? 이 세상에 보다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 자다, 그런 의식이죠. 요지부동이죠.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이렇게 봅시다. 어두움은 어둠 속에서 빛은 빛 속에서 뭐가 있느냐?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요. 관계가. 23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이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관계되어 있다는 거예요.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눈뜬 사람은 생명, 영생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 세계에서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인간세계는 어두움이라 했죠. 어두움은 뭐라 했습니까? 인간세계 자체가 지옥이라는 말은 거기에 아들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그래서 어두움이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용어를 따라서 자꾸 연결, 연결시키려 하니까… 요한복음 개념 자체가 어떤 융통성을 용납하지 않아요. 그냥 이런 뜻이에요. ‘그 개념 안에 다 들어 있잖아. 너희가 앞으로 체험해보면 알 거야.’ 뭐 이런 식이라니까요. 똑같은 개념을 여기도 쓰고 여기도 쓰고 저기도 쓰는 이유가 그 개념과 개념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 생명, 영생, 어두움-2장 11절에도 나와요, 어둡다는 게- 이런 개념들을 가지고 하나하나 집어내어서 이게 뭡니까, 저게 뭡니까 묻지 말고 그 관계가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가, 그 얽혀 있는 것을 포착하라는 겁니다.
어두움은 어두움대로 빛의 세계는 빛의 세계대로 관계가 있는데, 빛의 세계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돈독한 관계가 있고 어두움은 바로 그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빠져있고 누락된 것이고 그게 이 세상이다. 그걸 주님은 어둡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있든 상관없이 그들은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잘 살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요한일서를 썼던 분도 사도 요한이고 요한복음을 쓴 분도 사도 요한이거든요. 요한일서의 개념을 찾기 위해서는 그 개념을 받쳐주는 사건들이 있다고요. 예수님의 사건. ‘그 예수님의 사건을 요한복음은 요한일서에서 어떻게 그걸 해석해서 정리했는가’ 이렇게 생각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요한일서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꾸 요한복음의 사건으로 되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때 무슨 말을 했지만 그 당시에는 제자들도 몰랐었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예수님의 한 마디 한 마디, 예수님의 표정과 움직임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내용이었구나.’ 하는 거예요. 그걸 요한일서에 다 담아놓은 거예요. 최종 정립해서.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되어 있어요. 그럼 어두움은 어두움대로 빛은 빛대로 따로 있는 거예요. 이 어두움의 세계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이 없어요.
그러면 제 질문이 뭐냐? ‘지옥이란 뭐냐?’ 확정된 것인데, 지옥이란 존재+존재. 있음과 있음의 집단, 이게 바로 어두움이에요. 지옥이란 있음과 있음의 집단. 너 있고 나 있고, 에요. 지옥이라 하는 것은 뭐 염라대왕 어떻고 괴물 나타나고 불붙고 그런 거 생각했는데, 요한복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너 있고 나 있는 것. 나 말고는 다 너니까 나 말고 다수의 너가 있어서 같이 어울려 있는 것, 이게 바로 지옥이다. 이게 지옥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요지부동 그 지옥상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한 적 없다. 이 말은, 지옥은 자기가 지옥인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사도 요한이 상당히 과격하죠. 상당히 과격해요. ‘너나 제대로 하세요’가 아니에요. 너나 제대로 하라 하면 이건 존재에 관한 거잖아요. 지금 사도 요한은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다,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없으면 아버지와 예수님 관계가 없으니까 지옥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존재로 보지 말라는 이유가, 지옥이 존재와 존재(존재+존재)잖아요. 거기다 플러스(+), 빨간 걸로 할게요, +예수님, 예수님이 딱 등장하니까 사람들은 ‘나도 존재, 너도 존재, 예수님 당신도 존재’ 이렇게 하거든요. 예수님은 존재가 아니고 뒤에 아버지가 있죠. 예수님은 존재가 아니고 관계에요, 관계.
그리고 나, 너는 그냥 존재로 시작해서 존재로 끝나기 때문에 뭐가 날아가요? 관계라는 게 성립이 안돼요. 서로서로 잠시 기쁘고 이용하고 서로 친하게 지낼 수는 있지만 그러나 항상 후다닥 어디로 돌아옵니까? 자기 존재로 돌아오는 거예요. 자기 존재로.
그러면 성경에서 지옥이면 그냥 지옥으로 살지, 빛은 왜 등장했는가? 예수님이 빛으로 등장하신 이유가 굳이 있는가? 그냥 지옥이면 지옥대로 살도록 내버려두고 나중에 심판하면 그만이지, 왜 예수님께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오셨는가 하는 거예요.
이제 어렵다 정말. 어려워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예수님 몸의 변화를 통해야 밝혀진다는 거예요. 몸의 변화를 통해야 밝혀지는 거예요. 예수님 몸이 변해요. 그 변하는 이유가 예수님을 못 잡아먹어서 달려들어서 그런 거예요.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 존재의 몸은 숨어있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의해서 몸 자체가 변화되는데, 이 변화는 뭐 예수님께서 요술하듯이 ‘얍! 내가 몸이 변한다’ 이게 아니라 몸이 변할 때 여기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 모든 구약의 성경이 다 동원돼요. 이 몸의 변화에 말씀이 주어지는 거예요. 말씀이.
그러면 예수님의 그 몸이 뭐로 변하느냐 하면 나중에 뼈로 변해요. 요한복음 19장에. 오늘 할 게 많기 때문에 여러분 귀찮게 하지 않고 내가 쭉쭉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할 게 많아요. 요한복음 19장 36절에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몸 중에서 뼈를 주목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 성경말씀과 관련되는 모습으로 몸이 보여줘요.
이거 진짜 어려운 건데요. 여러분 믿고 그냥 어려운데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의 관계 때문에 변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냐면 예수님 몸의 변화에 따라서 하나님 자체가 변한다는 말도 돼요, 이게. ‘하나님이 변한다? 그건 신이 아니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인간의 몸은 젊었다가 나이 들어 늙었다가 할 수 있지만 인간의 그 몸은 그냥 애초부터 예상한 몸이에요. 그냥. 누가 칼로 찌르고 안 하는 이상 자연스럽게 늙어죽는 몸이에요. 자연스럽게 늙어죽는 몸이죠.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게 나만 늙어죽는 게 아니고 남들도 다 늙어죽으니까.
자신의 몸은 그냥 이 몸으로 끝까지 내 몸으로 가는 거예요. 어떤 관계가 없어요. 나는 나랑 계속 상대하고 있는 거예요. 내 존재로서 시작했으면 마지막도 내 존재로서 끝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버지하고 관계가 없으니까. 그걸 뭐라고 했어요? 어두움이라 했죠. 어두움. 그게 어두움이에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말씀드리면 어두움이란 뭐가 누락됐어요? 예수님과 하나님 관계가 누락된 것을 어두움이라 하고 그걸 바로 지옥이라 합니다. 왜 지옥이라 했어요? 뭐가 없기 때문에 지옥입니까? 불이 막 세서? 꼬챙이로 찔러서? 뭐가 지옥이에요? 생명이 없어 지옥이잖아요. 생명이 없으니까.
백화점에서 생명 팝니까? 안 팔죠. 그럼 그 백화점, 지옥입니다. 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들이 들락날락해요. 거기에 예수님이 들락날락하지 않아요. 그냥 같은, 존재하는 인간들이, 존재, 있는 인간들 몸이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우리는 거기에 너무 익숙해졌고 너무 적응이 잘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지옥이 지옥인줄 모르고, 뭐가 누락된 줄 모르고 그냥 이 몸 가지고 이 세상에 잘 버티면 살만큼 살다가 뭐 죽으면 그만이지, 이런 식이라. 누가 가면 어디 가는지도 모르겠고.
예수님이 오시면서, “너희 전체는 어두움이다. 나는 빛으로 왔다. 그런데 어두움이 빛을 영접하지 아니한다.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기에게 누락된 걸 모르고 있다. 이것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은. 나는 빛인데 아버지와 관계가 있다.” 이렇게 오신 거예요.
그러면 “너희 아버지는 누군데?” 물을 거 아니에요. 너희 아버지는 누군데? 주님이 하나님이라 했어요, 아버지라 했어요? 아버지죠. 뭘 피합니까? 이 성경말씀은 하나님이죠. 성경말씀은 하나님인데, 예수님이 마치 하나님을 잘 아는 식으로 나는 그의 아들이라 이야기했어요. ‘마치’라는 말은 적당치 않아요. 정말 잘 알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홀로 아는 것처럼, 단지 혼자만 하나님 아는 것을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아버지.
혼자만 아버지를 알고 그리고 아버지가 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모든 성경말씀이 거기에 동원되어 있어요. 모든 말씀이 총동원되어 있어요.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에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인간에게 쏠리는 게 아니고, 오히려 인간에게 쏠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어디에 전부다 모인다? 집중된다? 예수님께만 모든 말씀이 다 집중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에게만 영생이 있어요. 나머지는 지옥이죠. 영생이 없으니까. 그리고 대자연도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영생은 공짜다’ 이런 이야기를 해요. 주님은 영생을 공짜로 여기는 사람에게 영생의 값을 찾으십니다. 공짜라 하는 것은 그 뒤에 공짜로 소유에 성공했다 뭐 그런 뉘앙스가 있죠. 그냥 공짜로 끝나는 게 아니죠. 내가 언제든지 가져갈 수가 있다 이 말이에요.
예식장에 가서 결혼식 끝나고 나중에 식사할 때도 그거 공짜 아닙니다. 표 줘야 돼요. 물론 먹을 때는 표 낸 사람끼리는 그냥 공짜로 먹으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회식장 바깥에 있는 사람한테는 표가 있어야 들어가는 거예요. 그 표 얻으려고 하면 부조내야 되죠. 요새는 관례가 뭐냐 하면 결혼식 할 때 물어야 돼요. 실례지만 식사비 얼마 나옵니까? 얼마 전에 결혼식 했는데 식사비가 4만5천원 나왔어요. 아주 싼 거죠, 서울에 비해서. 그럼 계산해야 돼요. 자, 내가 부조를 얼마 해야… 식사비가 1인당 4만5천원이니까 둘이 하면 9만원, 그럼 부부가 참석하면 도대체 부조를 얼마 해야 부조했다는 티를 낼 수 있느냐? 최소 20만원 해줘야 10만원은 값 치르고 10만원 한 셈이 되니까요. 옛날 촌에서처럼 내 때에 촌에서 불 피워가지고 육개장 끓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뭐 밥 퍼주고 하는 그거, 막걸리 먹고 또 행패부리고 싸우던 그때 그 시절은 아니잖아요.
영생에 값이 있다 이 말이에요. 영생의 값. 그 영생의 값을 누가 치러야 되는가? 어두움이 치러야 된다는 거예요. 어두움이. 감히 영생이 왔는데 어두움이 공짜로 받을 수 없죠. 그럼 어두움이 갚아야 될 영생의 값은 뭐냐? 새카만 어두움 그 자체에요. 짙은 어두움이에요.
짙은 어두움이 되려면 철저하게 자기 부정이 되어야 되겠죠. 자기 부정. 자기가 죽는 것도 모자라요. ‘에이, 목숨 하나 버리지. 주님을 위해서.’ 안 돼. 그것도 안돼요. 그런 건 베드로가 다 했어요. ‘제가 목숨 바치겠습니다.’ 안 돼. 그거 안돼요.
그래서 이 존재가 갖고 있는 어두움의 깊이를 주님 앞에서 값으로 다 이게 노출되어야 되고 다 들추어져야 돼요. 철저하게. 그러면 들추는 방법은 뭐냐? 그들이 예수님을 학대해야 됩니다. 학대하는 방법은 뭐냐? 가만있으면 예수님을 별로 학대 안 해요.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삽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떤 방법을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은, 사람들이 혹하도록 만들어요, 예수님께서. 그래서 기대를 잔뜩 하고 예수님께 달려들게 만들어요. 요한복음 6장에서. 부조도 안 받고 주님께서 또 공짜로 오병이어 가지고 오천 명을 먹였잖아요. 사람들은, 진짜 이거 공짜다! 이런 분을 우리 임금 삼아야 돼. 한동훈 저리 가! 이재명 저리 가! 예수님이 우리의 대통령해야 돼. 모든 문제 해결.
혹하게 만들고 반기게 만들고 적극적으로 추종하고 따라오게 만들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그걸 가지고 영생의 값을 치르는 대가로 사용해요. 예수님께서 거기다 몇 마디 딱 던지니까 그들은 예수님한테 희망 걸었던 거보다 몇 배나 더 분노와 실망스러움을 느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말씀은 어렵도다” 그다음에 하는 유명한 말, “누가 믿을(들을) 수 있느냐”(요 6:60) everybody 아무도 못 믿어. everybody가 아니라 nobody에요. nobody nobody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거예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지옥이 철저하게 지옥으로 살래. 본인은 그런 뜻이 아니지만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지옥에서 나 안 나갈래. 나 지옥이 좋아. 나 이 지옥 껴안고 살래.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관계 없어도 괜찮아.’ 왜? 내가 다른 내가 되면 안 되니까. 나는 당신으로 인하여 내가 다른 내가 되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나는 내 존재로서 충족되니까 이것을 나는 계속 밀어붙이겠다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들 이야기 들어보니 이야기가 좀 이상하죠? 어떤 점이 이상하냐 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영생은 공짜로 알고 있고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 걸로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믿을만한 요소를 누가 먼저 미끼 던지느냐 하면 예수님 쪽에서 미끼를 던진 거예요.
강의하시다가 설교하시다가 ‘어이구, 벌써 점심시간 됐네. 다들 집에 가시고 잡숫고 오세요.’ 이러면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없고 점심 먹고 다들 올 거예요. 야, 이건 권세 있는, 권세 있다는 말은 우리가 못 들은 새로운, 말이다 해서 올 건데 ‘너희들이 식사해결해라.’ 제자들보고. 제자들이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성심당 빵집 그거 대전까지 가서 오천 명 먹을 빵 사려면 성심당 문 닫아야 돼요.
거기서 빌립이 시험받았고 그다음 안드레가 애 도시락 들고 왔어요. 안드레도 참… 애 도시락 먹도록 놔두지, 그걸 뺏기는 또 왜 뺏나. 그 도시락을 들고 왔는데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어린애 먹는 거예요. 어른 먹는 거 아니에요. 양이 충분치 않아요. 그걸 놓고 축사하시고 떼어줬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게 공짜죠. 공짜 밥을 먹은 거예요. 공짜 밥을.
그래서 제자들과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기위해서 적극적으로 정말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모시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과 같이 목회하시고 천국백성 만드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와~ 오니까 그야말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나가떨어지게 했어요.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하나도 없이 다 가버렸다 이 말이죠. 열두 제자는 빼놓고 나머지는 다 가버린 거예요.
왜 떡 줄 때는 공짜인데 영생 줄 때는 공짜가 아니죠? 야, 참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죠? 믿기만 하면 영생 주는 거 아닙니까? 아니죠. 믿기만 하면 영생 안 주죠. 이 말은, 영생은 인간이 값을 치러야 되는데 내가 있는 존재 자체가 지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영생이 공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자기가 지금 ‘나는 지옥에 태어났어. 지옥에서 살다가 지옥으로 빠져죽는다. 아하하, 기분 좋아. 나 이 세상 너무 좋아.’ 이런 미친 인간이 어디 있어요? 아니, 본인이 지옥에서 태어난 것도 인정 안하고 지옥에 산다는 것도 인정안하고 지옥 간다는 것도 인정 안합니다, 인간은!
내가 늘 즐겨 부르는 노래 있죠. ‘저 바다에 누워~’. 이 한 몸으로 태어나 저 바다에 누워~하잖아요. 우리가 태어나기를 지옥에서 어두움에서 태어난 거예요. 왜? 주님과의 관계가 없으니까. 아버지와의 관계가 없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죠. 제 말 잘 들으세요.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씀을 보잖아요. 보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모세의 율법을 보면서 하나님 믿는다고 자부했는데, 요한복음에도 굉장히 많이 나와요, 거기서 뭘 못 찾았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녀라는 관계성을 찾아내지 못했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나온 말씀처럼 모세가 너희를 고소할 것이다. 결국 저희들이 이거 지키면 천국 간다고 지키고 있는 그 법이 오히려 우리 자신들이 소경이며 이거는 어두움이며 예수님을 죽여야 될, 예수님을 시체로 만들어야 될 그 주인공들인 거예요.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릴 주인공, 빛의 전사들이에요. 그걸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대립관계죠, 대립관계. 대립관계에 있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요. 요한일서나 요한복음을 한두 번 봤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보면서 자기 쪽에 어떤 변화가 없어요. ‘아, 나는 처음부터 지옥가야 되는구나.’ 이런 변화가 없다고요. ‘나 있는 자체도 괜찮지만 괜찮은데다가 요한복음, 요한일서까지 공부하니까 앞으로 더 괜찮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생, 피를 값없이 주셨으니까 주겠다는데 받지 뭐. 공짜로 받지 뭐. 그럼 나는 예수님과 더불어서 천국 간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것은 인간의 존재와 존재가…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잖아요. 아버지와의 관계라고요. 이 관계로 들어가야 되는데 들어가지를 못해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 들어올 수 있는 방안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한일서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라고 해서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 믿고 나는 천국 가야지’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앞장서서 일단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먼저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그럼 오늘날 우리 같으면 ‘아, 예수님 믿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온 걸 믿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걸 믿습니다.’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자리가 어떤 사고방식의 자리냐 하면, 오병이어 때 떡 해주고 공짜로 양식 줬다고 해서 ‘아, 나 양식주신 예수님을 나는 믿습니다.’하는 그 사고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추방되기 직전입니다. 주님 곁을 떠나기 직전의 사고방식, 마음가짐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간에 일어나는 그 일에 대해서 그 일과 동일한 일이 그다음 예수님과 나 사이에서 동일하게 일어나줘야 돼요. 그런데 공짜라고 해서 그냥 맞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동일하게 일이 일어난다는 말은, 관계없는 자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새롭게 거기다 적용된다는 뜻이에요.
존재라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나에게서 와서 나로, 나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나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게 존재에요. 여기 있음,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관계라 하는 것은 나 있음이 아니고 적어도 몇 명이 되어야 돼요? 둘이 되어야 관계가 생겨요. 둘이 되어야. 예수님의 존재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위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위해서. 거기서 영생이 있으니까요. 인간은 꿈쩍도 안하죠.
그래서 여기 2장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령이 너희한테 있는데 그것은 누가 줘야 돼요. 주님께서 성령을 준 사람에게만 성령이 그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드디어 관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제가 이 짧은 시간 관계상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 많은 구절을 다 찾아드릴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들어가야 되겠죠. 중요한 것은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내 안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는 것. 요한복음 10장 뭐 여러 군데 많이 나와요. 요한복음 7장, 5장에도 나오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예수님이 인정하는 자기 백성은 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아버지 안에 있고 내 안에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성도는 특징이 뭐냐? 그냥 나 존재로서 있는 게 아니에요.
존재로 있어버리면 이게 지옥이죠. 지옥의 특징을 여러 번 했는데 또 합시다. 지옥의 특징은 뭐냐? 자기 누락을 모른다는 거예요. 자기 결핍을 모른다는 거예요. 태어나면서 하나님과 무관계에 있다는 말은 곧 영생이 없다는 거거든요. 인간은 이래요. ‘나 영생 같은 거 없어도 괜찮아요.’ 이렇다니까요.
어린이집에 가서 물어보세요. ‘혹시 여기서 오늘 점심에 피자 먹을 사람?’하면 ‘저요! 저요! 저요!’ 하는데, ‘오늘 점심에 영생 먹을 사람?’ 조용. 아무도 손 안 듭니다. 지금 영생은 나한테 그다지 필요치 않아요. 그러면 피자는 왜 필요한가? 내 몸을 내가 추스르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필요한 거예요.
오병이어 줄 때 사람들이 주님한테 막 삐쳐서 떠났습니까? ‘뭐 맛있는 거 주지. 오병이어가 뭐야?’ 이렇게 삐쳤습니까? 아니죠. ‘놀랍다. 놀랍다.’ 이러면서 자진해서 추종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배부르면 주님과의 관계가 정상입니까? 자기 존재나 볼록하니, 아랫배나 볼록하니 나오지, 관계가 볼록하게 나온 건 아니라 이 말이죠.
그래서 주께서는 “영생 줄까?” “영생 주세요!” “모세는 만나를 줬는데 나는 영생 줄까?” “영생 주세요!” “그러면 너희들이 나를 찔러 죽여라.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들에게 영생이 없다.” 그 이야기 듣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했겠어요? ‘예수님, 저희들은 주님한테 호의적입니다. 난 주님을 좋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왔잖아요. 물 건너 산 건너 바다 건너서 따라왔잖아요. 그런데 저한테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고요? 그게 모세 율법의 완성이라고요? 믿지를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믿지를 못하겠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는가를 알죠? 믿음은 예수님의 영생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믿음은 예수님의 영생을 차단하기도 하는 게 믿음이에요. 그것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육에서 나와서 육으로 가면서 여기서 인간들의 믿음이 나온다는 거예요. 육에서 육으로 가면서 믿음이 나온다는 거예요. 어두움의 믿음이죠. 빛을 거부하는 힘이 믿음으로 나오는 거예요. 빛을 거부하는 힘이.
그래서 유대인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는 여호와를 믿습니다.’ 요한복음에 많이 나와요. ‘여호와를 믿습니다.’ 그리고 베데스다 못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믿습니다. 이 호수 물이 찰랑할 때 먼저 뛰어들면 우리는 병이 낫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직 어렵고 중요한 것은 시작도 안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가 변하는데 누가 협조를 해줘야 되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특히 불신자들이 협조를 해줘야 예수님의 몸이 변할 수가 있어요. 아까 봤죠. 뼈까지라도 성경말씀과 관련되어 있어요. 뼈까지라도.
뼈가 나왔다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육이 발려지고 그 안에 꽉차있던 말씀이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성취되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 처참한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말씀이 성취된다는 겁니다. 그 관계가.
이건 말보다도 실제로 보는 게 좋겠어요. 요한복음 15장 25절,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잘 한번 보세요. 이 성경말씀을 예수님 빼고 다른 인간이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 못 지킵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말씀의 관계성이 다른 인간에겐 성립되지 않고 있어요. 이게 성립되지 않으면 다른 인간은 그냥 지옥맨, 지옥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요한일서에서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너 지옥 가!’ 이런 뜻이에요. 아까 봤죠? 아들을 시인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가 없으면 영생이 없다고 되어 있잖아요. 반대로 아들을 인정하게 되면 아버지를 인정한 게 되고 아버지를 인정하게 되면 영생이 있다,가 돼요.
그러니까 영생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우리한테 현재 뭐가 없다? 돈은 몇 푼 있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없어요? 부동산은 있지만 뭐가 없어요? 자식은 있지만 영생은 없는 거예요.
‘영생 없으면 영생을 어디서 구하는데? 영생을 어디서 구하는데?’ 대번 그렇게 나오겠죠. ‘영생 나 갖고 싶어요.’ 없다니까 갖고 싶다는 거예요. 값을 치르라니까, 값을! 무슨 값? 말씀에 의해서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잖아요. 그러면 너는 너에게 버림받을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네가 너에게.
지금 나를 위해서 영생 받으려고 하는 입장에서 내가 영생 포기해? 포기각서 써? 어디 뭐 사채 썼어요? 신체 포기각서? 내가 어떻게 영생을 포기해요. 영생을 얻고자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 믿는 순간 너는 영생 얻은 자라고 자부할 수 있나?’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이게 안 되죠. 이게 될 수가 없죠.
그러니까 모든 교회 다니는 사람들 다 사기꾼들이죠. 목사도 사기꾼이고 전부다 사기치고 있는 거예요. 넘볼 걸 넘봐요. 넘볼 걸 넘봐.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다고요, 이게. ‘그냥 세상에 적응해서 교회 다니고 세례 받았으니까 챙길 건 챙겼고 세상에 나가서 돈 벌고 살고 그렇게 살면 되지. 그렇게 살면 미완성인 내가 또 완성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너무 안일하게 가져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든 말든 뭔 뜻인지… 알아서 죽었겠지 뭐. 십자가 믿습니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 시편 35편 19절, “무리하게 나의 원수 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것이 이 어두움 세계의 일부겠습니까, 전부겠습니까? 전부죠. 왜? 어두움의 요소니까. 존재는 어두움의 요소에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진 모든 존재는 동일한 본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그다음에 시편 69편 4절, 거기에도 ‘무고히’라는 말이 나와요.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무리하게)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이게 뭐 돈 관계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했는가? 진짜 어려운 이야기할게요. 하고 첫째 시간 쉽시다. 이렇게 하나님을 미워하도록 누가 유발했느냐? 누가 예수님을 미워하도록 누가 유발했는가? 예수님이 유발했다니까요! 이게 전략이에요, 전략. 예수님이 유발했다고요.
예수님이 처음에 귀신 쫓아내고 물 위를 걷고 할 때 어땠습니까? 사람들이 혹 했어요. 메시아 왔다고 난리도 아니었죠. 걸려들었어, 너희들. ‘아휴, 예수님 가든 말든 나는 내 일 해야지.’ 이게 아니라 ‘그래, 우리의 소망이 왔어. 메시아 떴어, 떴어!’ 너도 나도 다 가는 거예요. 그들이 누구를 죽여요? 예수님을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