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240508)요약 스가랴14장16-19절 (초막절)
수요설교(240508)요약 스가랴14장16-19절 (초막절)
수요 설교 요약 가운데서 애굽에 남은 자들, 그 당시의 출애굽 정신은, 이스라엘이 망해도 출애굽 정신은 안 망한다, 살아있다. 출애굽 정신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뽑아내는 정신. 그런데 출애굽 정신을 갖고 있을 때에 그 출애굽 정신을 실제화 시키고, 역사화 시키는 것은 율법이 있어줘야 돼요.
왜냐하면 유월절 어린양은 그 때 한 사건에만 유효했잖아요. 죽음의 천사가 와서 칠 때, 피 바른 쪽과 안 바른 쪽을 구분했죠. 그러면 유월절 어린양은 일회용으로 있죠. 그런데 율법은 그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반복하라는 거예요. 되풀이하라, 반복하라, 그래서 반복하는 거예요. 그런데 유월절을 반복한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어떻게 반복이 됩니까? 애굽 사람이 없는데..그렇잖아요. 애굽 사람이 있어야 애굽 너는 너고, 나는 나고 구분이 되는데 애굽 사람이 없는 입장에서 어떻게 반복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애굽 백성하고, 하나님 내가 어린양 할게.’라고 이렇게 위치를 바꾸는 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부여받은 거예요.
율법을 받게 되면 이제는 율법이 그들 앞에 나와서 율법 안에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그 안에 들어 있어요. 들어 있고, 그것을 되풀이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인간으로 여겨서 봐주는 게 아니고 그 때 유월절의 어린양이 특별하기 때문에 그 정신을 유지하는 한 애굽에 내린 재앙을 너희에게는 유보시키겠다, 안 내리겠다가 아니라 계속 유보시키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무슨 뜻입니까? 율법의 정신만 살리겠다는 거예요. 사람 살리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내가 집어 넣어준 그것만 돋보이게 살리겠다는 겁니다. 그럼 그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절기가 들어 있어요, 절기가. 그러면 그 율법을 가지고 율법의 완성으로 가야될 것 아니겠습니까? 방향성이 있으니까. 완성이 어디냐?
구약시대의 완성은 약속의 땅에 입성하는 걸 말합니다. 자, 약속의 땅에 입성하니까 아, 율법에 나오는 절기가 광야에서 지키라는 절기가 아니고, 물론 광야에서 지켰어요, 본격적으로 절기를 지키려면 그 땅에 농사지어서 어떤 수확물이 있을 때, 그 절기에서 이야기하는 추수라는 개념과 맞아떨어지죠.
처음에 이삭이 있다, 그 이삭이 나온 식물이 약속의 땅에서 나온 거죠. 약속의 땅엔 그들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애굽하고 다르죠. 애굽에서는 노예였는데, 이제는 본인이 농사해서 본인이 하나님의 친백성으로서 얻어먹는 열매가, 양식이 있어요. 그러면 그 양식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양식 먹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양식 먹는 백성을 로테이션 하는 거죠. 서킷(Circuit)이란 말도 했잖아요, 로테이션. 처음에 이삭 패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추수하는 게 맥추절, 그 다음에 그걸 다 모아서 추수 끝났다. 추수 끝~ 그 다음에 그걸 모으는 걸 수장절. 그때마다 감사하면서 주님이 주신 양식을 먹으니까 ‘우리는 주님이 친히 먹여 살리시는 백성입니다’ 라는 것을 반복되는 절기를 통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 문제, 이 열매가 어디서 나왔느냐? 동반된 의미가 또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린양의 죽음과 그 다음에 율법과 그 다음에 초막절. 어린양이 죽은 유월절 날, 그들은 쓴나물을 먹었잖아요. 초막절 행사에도 그게 들어가요. 쓴나물을 먹는 것은 어린양의 죽음에 우리가 같이 참여해서 죽음이라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전환시키는 거죠, 그 절기만큼은.
그 다음 칠칠절에 율법 받고, 그리고 초막절은 멀쩡한 집 놔두고 광야에 텐트 치는 거잖아요. 이건 뭐 거지 떼거리가 따로 없죠. 집 놔두고 왜 한 데 잡니까? 그것도 얼기설기. 이게 뭐냐 하면, 우리 같은 것들은 주께서 지켜주지 아니하면 한 방에 훅 간다, 한 방에 그냥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아주 약하디 약한, 내세울 게 없는 존재인 것을 반복해서 적용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초막절이 있음으로써 초막절의 고난, 역경은 어린양이 이런 수모를 당했다는 것에 참여하고, 그 죽음에 참여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절기를 반복을 시켜버립니다. 반복을 시켜버리면, 시작은 유월절로, 그리고 절기의 대미는 초막절로. 그래서 스가랴서에는 초막절이 마지막에 나와 있죠.
그 초막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분명히 율법의 절기에는 어린양의 죽음을 집어넣어서 나왔어요. 착해서 나온 게 아니고,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나왔는데 그 때부터 율법 주니까 인간들이, 이스라엘이 오해를 한 거예요. ‘야, 이거 지킬 수 있다.’ 거 봐, 민수기 29장에 보면 유월절 지키는 거 나오죠.
‘뭐, 야무지게 우리가 마음먹고 한 턱 쓰면 이 정도 제물은 바칠 수 있습니다. 복만 주신 다면.’ 그래서 율법에 대한 태도가 뭐냐? 이건 야무지게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걸로 본 거예요. 그런데 율법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완성 단계로 간다고요. 가니까 도대체 율법의 완성의 끝은 율법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가 계속해서 미지의 것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율법의 대미를 장식하는 초막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죠.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에게는 유월절, 오순절날 물 떠서 대야에다 붓는 의식처럼, 초막절 의식의 대미를 장식할 때, 물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성전, 새성전에서 물 나오는 것, 거기서 물 나오는 것을 거기다가 같이 연결시키는 거예요.
성전이 있으니까 물이 나와줘야 나오는데, 그 성전에서 물 나오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의 네 개의 강이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발원지가 되어서 거기서 네 개의 강이 돼요. 물이 위에서 저수지처럼 되어서 생명의 강이 흐르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흐르고 양쪽에 생명나무가 가로수처럼 쫙 펴져있는 모습 나오죠.
살리고, 살리고, 계속 살려주는 거예요, 끝없이 영원토록 살려주는 겁니다. 반대로 지옥은 저주하고, 저주하고, 계속 저주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천국을 모르고 관심 없는 사람만큼 아이큐가 낮은 사람이 없어요. 진짜 바보 등신 같아요. 정말 바보 등신 같아요. 그 절기의 대미는 바로 모든 인간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님 홀로 이루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주시는 영이 와야 되지, 내 안에 개발한 내 영을 거룩하게 만들어서 주님의 영과 접선을 시도하는 것은 접신, 무당이 하는 짓이죠. ‘할렐루야, 주님 믿습니다.’ 이런 거요. 이건 무당들이 하는 짓이에요. ‘내 영도 괜찮은데 주님, 쓰여 졌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철야할게요.’ 오산리 기도원 가서 몇 시간씩 기도하고..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성령의 오심의 특징은 뭐냐 하면, 너는 뭘 해도 망했다는 인식으로, 갑작스런 인식으로 오는 거예요. 아, 나의 희망과 꿈 이거 다 개꿈이구나. 아, 나는 이미 완전히 망했구나 라는 데서 오는 가벼움, 존재의 가벼움. 내가 미쳤지, 내가 왜 스스로 짐을 지고 살았어? 내 책임자가 내가 아닌데 왜 내가 책임지려해?
내가 가장으로서 집안 책임지고, 돈 벌어오고 왜 쓸데없는 그런 짓을 했나? (그렇다고 취직 안하고 그만두면 안돼요. 가장의 업보니까) 그러니 이걸 보면서, 직장 가도 룰루랄라 가벼움이 있는 거예요. 오늘 또 직장에서 뭘 하면서 망하는지, 얼마나 내가 쪼다고 남한테 욕 얻어먹어도 마땅한 존재인지를 오늘 직장 생활하면서 한 번 경험해보자는 마음으로 가는 거죠.
뭐가 없어져요? 다툼이 없어지겠죠. 누가 이기냐, 잘났냐, 똑똑하냐 경쟁이 없으면 우울증은 벌써 해결됐습니다. 우울증 해결된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이 오게 되면, 온유와 화평과 자비 등의 성령의 열매가 맺히면서 이 우물이 내 소유의 우물이 아니라 주님이 일방적으로 들어온 주님이 내 속에서 오순절날 물을 계속 샘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영광입니다. 혼자 살지 말고 같이 있는 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