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18" 5-11 (내 백성)
Re..행 18: 5-11 (내 백성)
이름 : 이근호(IP:)
내 백성
2005년 3월 16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18:5-11
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18: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18: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18: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8:11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오늘 보면 아주 특이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인데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 말씀에 붙잡힌 바' 된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붙잡혀서 살아갑니까?
보통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하고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본인에게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들 하고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며 살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살아갑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날까요?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그리고 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조차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확정된 변화를 보인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란 다름아닌, 세상으로 만족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배후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명입니다. 이 세상이 최종 어떻게 정리되는가 하는 점을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알리는 사명을 그는 놓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특이한 사람입니다. 이런 특이한 사람이 있음으로 오늘날 우리도 구원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어떤 세상적인 난관이 들이닥쳐도 그의 사명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난관조차도 배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작용해서 작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또한 '말씀에 붙잡힌 바' 되어 있기에 같은 말씀에 만남에 그 어떤 회의나 불안감 같은 것은 일어날 리가 없는 겁니다.
흔히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한다면 생활비 정도는 하나님께서 하늘에게 만나 내리듯이 까마귀를 통해서 물어다주든지 가만있어도 해결시켜 줄 줄 압니다. 그런데 18: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굴라 부부와 더불어 장막을 제조하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두 가지 직업에 종사하면서 두 업종에 다 충실할 수 있을까요? 샤도 바울이 비록 천막제조업에 종사해도 결코 그의 직업이 그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그의 직업은 복음 전파자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천막 제조업에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 나름대로 얼마든지 신경 쓸 꺼리가 많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고객들을 만족하기 위해 더 나은 기술 연마에 나서야하고, 판촉에도 힘써야 하고 사업 확장에 나서야 하고, 같은 업종에 있는 다른 업소와 경쟁에 나서야 하고 혹시 종업원들이 있다면 그들의 후생, 복지까지 신경 써야 하고 당국에 대한 세무관계나 같은 업종자들끼리 조합도 만들어 최대한의 수익을 보장받기 위한 이익단체도 결정해야 하고, 혹시 업종 변경도 고려해야 하는데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데 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막제조업이 결코 타인에게 천국에 들어가게 못하며, 그리고 천막 장사로 벌어 들린 돈이 결코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막제조 기술에 아무리 숙련도를 높여도 그 기술이 결코 눈에보이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능력일 수는 없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남에게 전도하면서, "나처럼 천막장사 하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지' 결코 '천막 경영'에 붙잡힌 바 된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라도 얼마든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습니다. 텃밭을 가꿀 수도 있고 세상 직업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붙잡힌 바 된 '목사는 한 시라도 자신의 본업은 말씀 전파에 있음을 잊지 않는 자입니다. 즉 돈을 위하여 사람을 살리는 일을 포기할 자는 아닌 것입니다.
심지어 교인이 하나도 없어 설교할 기회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온갖 세상 일에 종사한다할지라도 아직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지 않는 이상, 이 세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있기 마련이라는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전히 예수님이 보실 때 '내 백성'이라고 할 자들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 도성에 머물도록 했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들어 내신 모든 인간들을 다 '내 백성'이라고 삼으시지 않고 왜 '내 백성'과 '내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 앞에 붙는 '예수'라는 이름 안에 그 내막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메시야의 이름을 '예수'라고 붙여서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오로지 지정된 '자기 백성'만을 골라내는 작업을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21에 보면,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오직 '자기 백성'을 위한 메시야임을 분명히 합니다.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 백성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 앞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이 '죄인됨'이 감지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백성이 아닌 자는 예수님 앞에서 결코 '무조건적인 죄인의식'이 발생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된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인됨을 예수님 앞에서 느끼지 못한 자는 결코 '예수님의 자기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다 자기 백성을 삼지 않을 양으로 메시야를 보내신 것입니까?
그것은 메시야란 오직 구원하시기로 택한 자들의 메시야로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즉 메시야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바에 준해서만 오셔야 될 분입니다.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환영하고 옹호한다고해서 다 구원해 내시는 메시야로 오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구원될 자와 구원되지 못할 자를 결정짓는 결정권은 결코 인간 쪽에서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만약 구원될 자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 땅을 초월하는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보다 더 고귀한 것은 결코 그에게는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직 '내 백성'으로 택함 받은 자에게만 일어나는 희한한 현상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 된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오직 말씀이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말씀에 붙잡힌 바 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