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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40411b 요한일서 2장 22절(거짓)-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40411b 요한일서 2장 22절(거짓)-이 근호 목사

거짓 선지자가 노략질하러 온다는 이 말은… 이미 거짓 선지자가 믿습니다. 뭘 믿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믿어요. 거짓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실이다 하는 것은 그 기준을 자기한테 이익이냐 손실이냐 그걸 이미 따지고 거기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믿음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전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내가 알아서 내 인생 꾸려나간다는 그게 전부에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이 이야기는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 빼놓고는 이 땅에 참된 선지자 없다는 뜻이에요. 예수님 빼놓고는. 세례 요한 믿으면 구원 받아요, 안 받아요? 세례 요한 믿으면? 아브라함 믿으면? 안되죠. 예레미야 믿으면 안되죠. 그들은 바른 선지자지만 바른 선지자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믿으라’가 아니고 엘리야, 모세 같으면 ‘장차 오실 십자가 죽으시는 분을 믿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변화산에서 주께서 별세하실 것을 이야기한 것이 모세, 엘리야 아닙니까.

자기한테 이익이 있을 수도 있고 관심 있는 것을 관심 휙 돌려버리는 거예요. 나 말고. “나 왜? 저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예수님이에요.” 돌릴 수 있어야 돼요. 돌아가야 돼요. 좋은 엄마라고 자식들에게 존경받을 때 “내가 아니야. 예수님이야.” 하고 돌릴 수 있어야 돼요.

그럼 여기에 거짓 선지자는 뭐로 아느냐? 열매로 안다. 좋은 열매, 나쁜 열매. 무엇이 좋은 열매고 나쁜 열매인지를 거짓 선지자가 스스로 판단한다면 이것도 소용없는 거거든요. 예수님께서 좋은 열매, 나쁜 열매 언급하는 것은 네가 판단하라는 말이 아니고 19절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그다음에 “불에 던지우느니라” 불에 던지운다.

이 말은, 믿으라는 거예요. 불에 던질 때까지 하나님의 일은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네가 흔쾌히 즐거운 마음으로 네가 거기에 고개 끄떡여지느냐? 이걸 묻는 거예요. 아휴, 잘 하셨습니다. 조져야죠. 오케이! 그게 믿어지냐 이 말이죠. 그게 믿음이거든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나한테 어떤 것도 내가 지킬 게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지킬 게 있으면 나는 그걸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짜 믿음을 가리는 거짓 믿음이 되겠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굉장히 편한 거예요. 오히려 너무 편해서 도리어 의심이 될 지경이 되어야 돼요. 아휴, 내가 이걸 왜 믿지? 본인이 따져 봐도 설명할 길이 없어요.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한다는 것이 어떻게 믿어졌냐 이 말이죠.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신다는 말은 그 안에 무엇도 포함되었느냐 하면 내 구원에 대해 내가 알아서 챙기려고 전전긍긍했던 내 손모가지를 비틀어서 내 구원, 내가 쥐고 있는 그것을 주께서 가져가가지고 ‘내가 너 구원해줄게’ 하고 빼앗아간 것조차도 믿어지니까 이 얼마나 해피한 순간입니까.

아, 세상에. 복도 복도 뭐 이런 복이 다 있네.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그 반대되는 게 뭐냐 하면 지지리 복도 없는 년 하는 거 있잖아요. 자식 복도 없고 남편 복도 없고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거하고 정반대죠. 지지리 복이 없다는 것은 뭔가 시도하려고 했는데 안 된다는 뜻이고, 진짜 너무나 복이 되는 순간은 내가 안했는데 이미 주께서 알아서 척척 다 해주니 고마운 게 아니고, 그게 믿어지는 게 고맙다니까요. 그게 믿어지는 게요.

아유, 막 킹콩처럼 답답해서 가슴을 치고 싶어요. 이게 왜 믿어지냐는 말이죠. 그리고 이게 기분 좋지만 설명할 길이 없어 답답한 거예요, 설명할 길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듣고 “나는 안 믿어지는데 너는 왜 믿어지는데?” “몰라, 그건. 나는 믿어지네 그래.” “몇 분간 믿어지는데?” “몇 분간이 아니고 계속 믿어지지.” “난 3초 가는데.” 계속 믿어지는 거예요.

특히 여기 마태복음 7장 끝에 보면 거짓 선지자의 극단이 나옵니다.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요령부리는 자들은 여기서 전부 다 탈락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장 13절, 뭐 까짓 거 부르지. 그렇게 불러버리면 뭐가 믿어지느냐? 내가 주님이라고 부른 그 행위를 내가 포기 못하고 믿는 거예요. 그 행위를 믿는 거예요. ‘나는 주님을 주라고 믿습니다. 부릅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그걸 믿을까요. 얼마나 개코도 믿음이 없었으면 뭐라도 안하면 섭섭해서 뭐라도 하는 걸까요. ‘주여 주여’ 왜 이런 짓 하는 거예요?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믿음이 없어서.

그러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못 들어간단 이야기죠.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거예요. 이것이 믿는 사람에게는 또 기분 좋은 이야기에요. 주님의 뜻대로 행하신 당사자가 누굽니까? 주님이잖아요. 주님 뜻대로 천국에 넣어줬다는 것, 이게 또 퉁탕퉁탕 킹콩, 이게 왜 믿어지냔 말이죠.

내 구원이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었습니다. 나는 천국은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도 안하고 있던 나를 이미 천국에 넣어줬다는 그것이, ‘넌 천국에 가는 거야’ 하는 그것이 내 일인 듯 내 일 아닌 내 일 같은 나의 일. 따지고 보면 내 구원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 되어버리죠. 내 선에서 떠난, 주님 손에 가있는 주님의 일이 왜 그게 인정이 되고 수긍이 되고 믿어지냐 이 말이죠.

자, 그 믿음의 증거가 뭐냐? 감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감사. 수십 번도 더 이야기했어요. 감사가 일어나면 성령의 일이고 억지가 되면 불안과 두려움과 억지가 되면 이건 악령의 일이에요. 이게 감사가 되는 거예요. 뭐 24시간 늘 감사하라는 말이 아니고, 항상 수시로 주께서 지킬 것은 너의 육신과 상관없는 것, 예수님의 육신과 관련된 십자가를 지킨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고마움과 감사로 연결된다는 거예요.

불신자 같으면 ‘하든 말든 그건 주님이 알아서 하고 나는 내 일 따로 있습니다.’ 하고 자기 일을 믿을 건데, 내 일은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의 일이 감사가 되고 더 고마움이 될 때 그게 요한일서에서는 주 안에 사귐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 안에 있다고 하고 성령 안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요한일서에서. 요한일서가 굉장히 어려운 책인데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굉장히 이게 쉽고 가볍고 고마운 일이에요.

요한일서 2장 14절 한번 봅시다. 2장 14절 끝에 보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 있다 했어요? “너희 속에 거하시고” 이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러려고 노력을 해요. 억지가 돼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아, 내 뜻은 아닌데 주의 뜻이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고 활동하도록 그렇게 하시는구나.’ 하고 이게 믿어진다니까요.

믿음을 설명하면서 믿어진다는 말 말고 다른 표현을 하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성경에서 다른 표현은 부정적인 표현밖에는 동원할 게 없어요. 뭐냐 하면, ‘주의 말씀이 내 속에 있어서 나로 하여금 소소한 나의 모든 꿈과 희망을 주의 말씀이 그걸 전부 다 개무시해주신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문제는 그래서 기쁘냐, 감사하냐, 고마우냐를 덩달아 거기에 덧붙여야 되죠. “너의 소소한 모든 계획이 다 좌절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나?” “고맙죠.” “왜 고마운데?” “말씀이 친히 내 안에서 ‘네 뜻 나가. 내 뜻을 일방적으로 실시할 거야.’ 하니 세상에 그처럼 고마운 게 어디 있습니까.” 이게 또 감사하죠.

2장 24절 봅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논리적으로 따지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워요. 그러나 한번 믿어버리면 이게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딱 믿게 되게 되면,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내가 아들 안에 있고 아버지 안에 있다. 당근이지. 그거 당연한 거지, 뭐. 이렇게 되거든요.

방금 한 것을 상세하게 이야기한 것이 요한일서 5장에 나와요. 5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는 거예요. 자, 이렇게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일은 오로지 거짓의 바다 위에서만 가능하다.’ 거짓의 바다. 그것도 넓은 바다. 아무도 그것을 뚫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넘실대는 거짓, 그 거짓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일이 그 안에 주어집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믿으라 했을 때 그걸 믿지 아니하면 그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거짓의 바다가 하나님 일을 믿으면 되는데 왜 안 믿느냐? 그것은 그들의 최종 근거지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게 유다서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바로 앞이에요. 11절,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자, 여기 두 사람 나왔죠. 한 사람은 가인, 또 한 사람은 발람 선지자 나왔죠. 이 두 사람이 거짓되다고 규정해놨는데 거짓이 뭐냐? 거짓이란, 최종 근거가 없어요. 바탕이 없어요. 뭔지 몰라요. 내가 딛고 있는 이 존재의 바탕이 과연 안정감이 없고 확실한지 그걸 본인이 알 수 없고 모호해요. 내 기초가 모호하다고요.

그래서 12절에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의 특징이 뭐냐? 이 땅에 어떤 기초가 없어요. 그냥 구름이니까 바람 따라 흘러가는 거죠, 그냥. 기초가 없으니까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뿌리까지 뽑혔으니까 기초가 없는 거예요.

13절은 더 노골적이죠.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그다음에 뭡니까? “바다” 그리고 “거친 물결”. 물결은 바다의 표면만 일어나는 거예요. 바다의 표면. 그러니까 그냥 스쳐가는 현상 같은 것이 뭐냐? 이 세상 모든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에요. 스쳐지나가는 것. 종잡을 수 없어요. 안정적인 자리가 없어요. 그냥 사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뿌리라는 게 없다니까요. 뿌리. 근거가 없어요.

불신자들이 뿌리가 없다, 근거가 없다 하는데 그러면 성도의 뿌리는 무엇이냐? 언약입니다. 노아 언약 한번 생각해보세요. 노아 언약. 무서운 물의 심판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영원한 안정적인 shelter, 피난처를 주께서 친히 마련해주셨습니다. 그게 방주입니다. 그게 방주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볼 것은 천지창조 때 천지창조의 기초가 뭐냐 하는 거예요. 천지창조의 기초.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을 일단 제시했는데요. 창세기 1장 9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천하에 물이 있고 물 바닥에 뭐가 있었습니까? 땅이 있었죠. 그럼 땅의 기초가 뭐죠? 천지창조는 그게 나타나지 않아요. 물은 땅 위에 있었다. 따라서 물이 거두어지면 땅이 나타난다. 그 땅의 기초는? 없죠.

지금 물도 기초가 없고 땅도 기초가 없는데, 기초가 없는 물과 땅을 불신자들이 안전빵이라고 여기고 그게 안정적인 자연 질서라 여기고 그 토대위에 그들은 문명을 이뤘습니다. 이 지구상에. 그런데 베드로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냥불로 긋는 것처럼 어떻게 됩니까? 홀라당 타서 없어지죠. 불로 다 태워져서 사라지죠.

그러면 이 세상에 안정적이라고 여겼던 하늘의 해와 달과 별과 이 창조의 모든 것은 허상이었어요. 허구였고 허상이었어요. 그것만 허상입니까? 인간의 몸도 허상이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죠. 물론 이쁜 흙도 있고 못생긴 흙도 있지만 흙은 흙이죠. 결국 죽으면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다 돌아가잖아요.

근거가 없잖아요. 근거가. 토대가 없잖아요. 토대가. 이 세상도 토대가 없고요. 하늘과 땅, 자연도 토대가 없어요. 그러면 토대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언약에 의해 언약에 준해서 오신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 토대는 아버지에요. 아버지 하나님이에요. 예수님과 아버지만이 언약이라는 토대를 갖고 있단 말이죠.

거기에 노아가 잠시 참여를 했죠.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갔거든요. 그리고 방주가 안정적인 처소로서 비 왔을 때 일 년 동안 버텼단 말이죠. 이제 방주에서 나옵니다. 일 년 후에. 나왔을 때 근거가 어디 있어요? 기초가, 살 곳이 어디 있습니까?

노아는 그 다음 언약을 기다려야죠. 그다음 준비된 언약. 노아 다음에 준비된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노아의 자식 가운데 셈의 후손, 아브라함이 언약이 되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식 낳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어디서? 기초가 없는 땅 위에서. 그러면 아브라함의 기초는 뭐냐? 이삭이 되죠. 그게 이삭 언약이에요. 이삭은 야곱 언약. 야곱은 요셉.

요셉의 후손들은 어디에 살았죠? 애굽에 살았죠. 애굽에 살던 그들에게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하신 그다음 절차가 뭐냐 하면 바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기초가 되는, 율법 언약이 기초가 되는 세계죠. 율법 언약 그다음에는 다윗 언약의 성전이고 성전이 지나면 성전을 인물화시킨 것이 예수님이죠.

결국 내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기초는 하나님께서 진리로서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오직 마지막 최종적으로 남아있는 영원한 것, 그것은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냐 이 말입니다. 이게.

이게 믿어지냐고 제가 말씀드리면 “그거 못 믿을 거 뭡니까? 감사히 믿어집니다.” 이렇게 하죠. 그런데 국민의 힘 이번에 다수 의원되라고 표 찍어줬던 대구 사람들, 부산 사람들, 서울 강남에 서초구 사람들 그 사람들 투표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민주당에게 완전히 주도권이 다 밀렸다. 그럼 어떻습니까? 마음에 감사가 막 올라옵니까?

민주당, 국민의 힘이 기초입니까? 이게 기초에 해당돼요? 노아 방주도 아니죠? 그런데 왜 교회에 복음을 안다는 사람이 대화하는 내용 그 모든 것이 기초가 없는 흔들리는 부초 같은, 아무 바닥도 없고 뿌리도 없는 것가지고 마치 게임하듯이 ‘이거 승리해야 돼. 이번 일은 내가 표 던지고 내가 힘쓴 것이니까 반드시 상대방을 이겨내야 돼.’ 기초도 아닌 여기에 왜 그렇게 울고불고 감정이 상하고 화를 내고 왜 그러느냔 말이죠.

물론 거기에 비트코인도 포함됩니다만. 주식도 포함되지만. 돈에 기초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런데 거기에다가 자기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왜 다 소모하느냐 이 말이죠. 모든 정서적인 것, 감성적인 것을 왜 거기에 매달려 살아가냐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아까 다시 욥기로 와서 이야기했습니다. 욥은 욥의 고난 가운데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욥기 6장 6절에 내가 고난 받고 사는 것이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맛이 없다는 거예요. 계란 흰자같이. 계란 흰자 맛있던데… 물론 소금을 쳐야 되지만. 계란 흰자같이 소금이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사나.

그러니까 인간은 왜 맛으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죠, 욥이? 욥의 기초가 없었습니다. 욥의 기초가 없으니까 한순간 순간 재미나게 살아야 그때 그때마다 마약하듯이 재미, 재미, 계속 연속된 재미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뭐가 재미일까를 늘 살피고 찾는 가운데 있어요.

전에 몇 번 이야기했지만 우리 교회 나오는 어떤 집사님은 공부 좀 한 분인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사치를 모르는지 샤넬이 뭔지를 몰라요.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프랑스의 고급 브랜드 이름을 모른다니까요. 집에 돈도 없는 것도 아니에요. 의사에요. 그런데 병원에 운동화 신고 돌아다녀요. 왜냐하면 그게 빨리 빨리가 되니까. 왔다갔다 왔다갔다 가보면 나보다 더 빨리 움직여. 가운은 입어놨으니까 안에 뭐 입었는지 표 안 나잖아요. 안에 입은 것은 교회 올 때 드러나요. 츄리닝 비슷한 거. 저게 중국산인가 할 정도로 하여튼 사치를 모르는데요.

남편도 만만치 않아요. 여기 메모지 있죠. 남편도 의산데 약국에서 오는 메모지를 쩍쩍 들어붙는 메모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모아놔요. 모아서 나한테 줬어요. 나 이거 떼고 붙이는데 귀찮기는 좀 귀찮지만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두꺼운 것도 있지만 이것보다 더 작은 것도 있어요. 작은 것도 떡떡 붙어있어요. 약국에서 제약회사에서 주는 거. 하여튼 취미도 전혀 없고요. 오직 병원 일밖에 몰라요. 병원 일. 허 병원 취직해서 일하는 병원 일밖에 몰라요. 남편도 마찬가지고. 집안에 가구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묻죠.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노? 무슨 재미로 사느냐? 그런데 그 두 분은 너무 바쁘기 때문에 무슨 재미로 사는지 질문조차 할 시간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의사가 사명감이에요. 사명감. 무슨 재미로 사는지 그걸 제가 얼마 전 설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타인이 나로 인하여 즐거우면 그 재미로 살아요.

타인이 나로 인하여 즐거우면 나의 존재감이 살아나요. 나의 존재감이. 나의 모든 일이 그 사람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면 내가 얼마든지 지금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도 좋소.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의료계의 유관순 여사 같아요. 그게 바로 또 나름대로의 인생의 사는 맛입니다.

그렇다면 뭐 돈도 별로 없으면서 골프 치러 다니고 시건방 떨고 이런 것은 결국 그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시건방 떨고 골프채 잡고 돌아다니고 왜 그렇게 하는가? 나로 인하여 즐거운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그렇죠. 그러면 내 즐거움은 누가 챙겨야 돼요? 내가 챙겨야죠. 늘 자기가 자기한테 보답하듯이 과소비를 해줘야 돼요. 과소비를 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늘 상장 제시하고 선물 주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거짓됨을 그런 식으로 감추는 겁니다.

그러면 욥은 어떤가? 욥은 바로 남을 도와주고 구제하는 데서 그리고 믿음 좋다는 소리를 듣는 데서 욥은 맛을 느꼈던 겁니다. 그런데 몸이 아픈 순간부터, 돈이 다 날아가고 재산 다 날아가고 몸이 아픈 순간부터 일절 그것이 다 끊어졌거든요. 그러니까 욥이 하는 말이 도대체 내가 사는 맛을 모르겠다는 겁니다. 사는 이유도 모르겠고 재미가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무슨 재미로 살죠? 거기에 대해서 요한일서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질문을 제가 그렇게 한 이유가 성경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성경에서 말하는 그 의미와 동떨어지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우리가 세상 속에서 실감해야 돼요. ‘이거 뭐 다 아는 이야기인데. 나는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을 믿는데 그다음 나오는 질문은 ‘그런데 인생 무슨 재미로 살지?’ 이런 거. 예수님 믿는다 해놓고는 인생 사는 재미는 따로 챙기려고 시도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진실은 거짓과 만나야 드러난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을 한번 보게 되면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고 되어 있죠. 이 말에 함축된 말이 굉장히 많이 들어있어요. 엄청나게 많이 들어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어요. 없어야 뭐냐?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죄,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부각되고 완전히 돋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진실한 사랑은 거짓된 사랑과 만나야 진실된 사랑이 돋보이기 때문에 우리 역할은 뭘 하게 되어 있어요? 거짓된 사랑. 거짓된 사랑을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육신 자체에서 이게 뿜뿜뿜 뿜어져 나와요. 복음 아는데 요새 사는 게 재미가 없어.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주님의 진실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벌이신 거예요.

자, 요한일서 5장 5절 봅시다. 또 한 가지 예가 있어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되어 있죠. 여기 세상을 이기는 자가 등장하는데 인간이 사는 재미, 존재감이 뭐냐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되고 남한테 안지고 늘 이기는 사람이 되는 걸 인간은 사는 재미로 느껴요. 왜 우리에게 그런 본성과 본능이 나오는지 그거는 우리 육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건 말릴 수가 없어요.

진실은 예수님의 육신입니다. 그럼 거짓은 뭡니까? 죄 있는 우리의 육신이 거짓이에요. 죄 있는 육신과 진실이 만났을 때 진실한 사랑이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아까 ‘주님이 하신 것을 흔쾌히 가볍게 믿습니다.’ 하는 그게 진짜 계속 유지되는지를 한번 살펴보자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래, 우리는 뭐 조심해야지.’ 또 이렇게 나온다면 지금 아까 주님의 하신 일만 그냥 푸근하게 믿습니다, 하는 그게 다 날아가버렸어요. 자기 또 단도리 한다고요. 제가 몇 가지 질문만 했을 뿐인데 ‘아, 앞으로는 조심해야 되겠네.’ 뭘 조심해. 세상 일이 조심한다고 이게 됩니까. 내가 억누를 수는 있지만 이게 전부 다 거짓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이 노리는 게 뭐라는 걸 알아요. 그게 뭐냐? 우리 힘으로 내가 세상을 이기는 자 되고 싶은 거예요. 지기는 싫은 겁니다. 그게 사탄의 일이죠. 지난 시간에 했지만 다시 한번 보게 되면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오늘 바다, 거짓된 바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게 육신에 있는데 없을 리가 있어요. 우리의 육신이 있는데.

그러니까 요한일서 말씀을 지킬 생각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지키는 게 아니고 믿는 거지, 지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알아서 거하는데. 계속 거해주세요, 이런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오늘 강의에서 딱 한 가지만 기억하라고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는 것,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결같이 그것만 있어요. 그러면 우리도 거기에 끼어들고 싶은데 우리는 육신의 정욕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성부 성자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고발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에 우리가 자랑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삶의 보람인 양 여기고 살아갔다는 것을 지적해주는 거예요. 뭐가? 말씀이 우리 안에 계셔가지고. 그러니까 지적받을 때는 기분 나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까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그 자체도 한량없이 또 즐겁고 기쁜 일이에요. 특혜죠. 다른 성령이 없는 사람한테는 있을 수 없는 일. 늘 지적해주는 것.

2장 19절에. 요한일서는 자꾸 반복해야 돼요. 지나간 것 알았다고 넘어가면 안돼요. 전부다 보일러 배선처럼 연결되어서 하나를 건드리면 다른 것도 다 이야기해야 돼요. 2장 19절,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 분류작업은 우리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속의 말씀이 그렇게 하게 해요. 누구하고 헤어졌다고? 임용재? 임용재가 들었으면… 이 강의 듣겠나.

2장 21절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건 진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거 설명하려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언급해야 돼요. 예수님이 비유는 너희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 대목을 봅시다.

다 아시지만 마태복음 13장 13절에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이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게 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이사야 말씀은 어떻게 된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이사야 55장 11절에 나와요. 55장 11절,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주님이 보내신 뜻은 헛되이 돌아오는 법이 없고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데 그 이루어진 내용이 뭐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하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오해를 하느냐 하면 우리는 딱 들으면 압니다, 안다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 말씀 딱 들으면 아는 쪽이죠. 그렇죠? 듣기는 들어도 모르는 쪽은 저쪽 불신자 쪽이고 우리는 딱 들으면 아는 쪽이죠. 그렇죠, 예수님?”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자들의 이 사고방식이요. 주님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말씀이 너희 안에서 말씀이 이루어지고 너희는 그냥 믿기만 하라. 그 말씀이 알아서 하는 것을 믿기만 하라.” 이렇게 주께서 한두 번 신신당부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많이 했잖아요. 했는데 제자들은 자꾸 뭐냐 하면 이제 알았으니까 우리가 알아서 처신 제대로 해서 보답을 해주겠다는 거예요. 무슨 보답을 해요. 주님이 알아서 하는데.

그럼 그건 결국 뭐냐? 우리의 본성 가운데서 믿으라 해도 주님을 안 믿고 결국 주께서 어떤 아이디어를 주면 최종 행함으로 일구어내는 나 자신만을 이미 믿고 있었다는 것이 티가 나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해석을 보게 되면 항상 뭐를 경유해야 되느냐? 주께서는 십자가를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그걸 경유해서 나한테 오게 되면 아, 나는 성경말씀을 내가 행함으로 그걸 실천에 옮기려는 의도가 이게 나의 믿음 안에 내용으로 꽉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이 거짓됨이 들통나는 기쁨과 감사와 고마움이 병행돼서 일어나줘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보고, 압니다. 맨날 안대. 무슨 뜻입니까? 알아서 잘할게요. 누가 잘하래, 누가? 참내. 아니, 누가 잘하라는 이야기 아니에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헛되이 돌아옴 없이 다 성취된다. 반드시 이루어진다. 내게 주신 자는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된다.’ 거 이상하네. 그게 믿어지네.

그게 믿어질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행위에 대해서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자기 행위에 대해서 안 믿죠. 그럼 자기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안 믿죠. 자기 행동에 대해서 어떤 열매가 있기를 원합니까, 안 원합니까? 그걸 안 원하죠.

결국 믿음이 있다는 말은 일체 내 자신의 어떤 것에 대해서 내가 믿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나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믿어라 믿느냐~’하는 노래 있죠? 안 믿어요. 자신에 대해서 안 믿습니다. 아무것도 안 믿어요.

그러니까 이 결과가 뭐냐 하면 사도 요한과 함께 붙어 있다가 떠나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게. 성령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면서 왔다가 사도 요한의 이런 말 듣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요한일서 2장 27절 봅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이상하게 믿어집니까?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이렇게 되어 있죠.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제가 여러분한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이 ‘아무’ 속에 우리 자신이 포함됩니까, 안 됩니까? 포함되어야 되겠죠. 내가 나를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내가 범인인 사건에 대해서 경찰서장이 나한테 수사를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범인인데 내가 범인인 그 사건에 대해서 경찰서장이 지시를 해가지고 “어이, 수사팀장. 자네가 이번 사건을 수사해서 나한테 보고서 올리게.”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수사를 어떻게 하겠어요? 일주일 뒤에 수사보고를 어떻게 올리겠습니까?

“서장님,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범인 찾았습니다. 제가 범인에 대해서 잘 압니다.” “그래? 왜 그리 빨리 됐나?” “제가 범인에 대해서 너무 잘 압니다.” “그 아줌마 제가 죽였습니다.” 그 아줌마 제가 죽였습니다. “그럼 너는 교도소 가야되겠네.” “지금 교도소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제가 사건을 해결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상하게 미친 것처럼.

지금 그 사람은 교도소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사건 해결했다는 것으로 기뻐한다는 것은, 서장이 내게 주신 그 말씀이 그동안 나의 이 삶의 현장을 지배했다는 뜻이거든요. 그 사건을 조사하는 가운데서. 사건 수사하는 작업에 내가 대상으로 참여되어 있다는 사실이에요.

성경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그 모든 내용이 바로 그거에요. 이사야 말씀대로 ‘저희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라는 그 말씀에 대한 수사를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맡기는 거예요. 제자들은 “우리는 아니다. 그치? 우리는 다 알지, 그치? 무슨 뜻인지 알지, 그치? 그런데 불신자들 한번 조사해볼까?” 이러고 있다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는 깨닫기 위해서 너희에게는 특별히 비유로 이야기해줄게.” 이랬거든요. 나중에 그 비유를 제자들이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46년 된 성전이 무너져서 사흘 만에 짓겠다. 우리가 그 뒷내용을 전혀 모른다 치고, 예수님께서 길 가다가 “몇 년 동안 지었나? 46년 동안? 내가 3일 만에 지을게.” “그걸 어떻게 사흘 만에 짓습니까?” 다 하겠죠.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고 난 뒤에 그들은 이렇게 깨달았어요. 저 성전을 짓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을 하신 성전이란 단어를 언급하신 그 예수님 자신이 바로 성전이란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아까 그 노래에 두 명이 탈 수 있는 배. 요한일서의 내용이 뭐냐? 절대로 혼자서 말씀처리하지 말라는 이 말이죠. 여기 영어 가사에 있잖아요. ‘and both shallow row' 같이. both. 보쓰. 발음도 어려운데, 강의 제목 이걸로 하고 싶다, 정말. 함께. 같이. 더불어. 사귐. 다 같은 말이에요. 요한일서의 말씀이에요. 성령이 함께하사 이 일은 네 일이 아니고 예수님 내가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을 내가 성취하는 바로 나의 일이라는 거예요. 나의 일에 네가 거기에 같이 성령에 의해서 부름 받은 거예요.

넌 어차피 쪼다에요. 아무것도 못해요, 우리는. 돌아서면 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미쳐가지고 아휴, 요새 사는 게 맛이 없네, 이러고 있다고요. 뭐 재밌는 일 없나, 이런 식으로. 뭐 류현진이도 공 던지는 폼 보니 뭐 프로야구 한화 응원 할랬더니만 류현진 벌써 2패해버렸고 졌고. 그다음에 손흥민이는 왜 소식이 없어, 이런 거. 남자들은 그런데 여자들은 요새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어요. 여자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요? 뭐 신상 나온 거 평가질? 신상 나온 거 합니까? 아니면 연예계에 누가 또 이혼했는가 그런 거 보는 재미에요?

남자나 여자나 이 세상에 재미는 돈 버는 재미보다 더 위대한 재미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 있어요. 돈을 썩히면 비료처럼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 있어요. 퇴비처럼 냄새가 난다. 돈은 굴려야 맛이지. 퇴비 놔두면 썩는 냄새 나잖아요. 돈은 놔두면 안돼. 돈은 자꾸 굴려야 돼. 이게 유대인들 탈무드의 처세술이에요. 이게 바로 사는 즐거움과 재미입니다.

사는 즐거움과 재미의 특징이 뭐냐? 욕망이 육신처럼 부유물처럼 떠다녀서 이 바람 불면 확 떠밀려 울고불고 난리고 짜증내고 난리고 도대체 고정된 자리가 없어요. 언약의 자리가 아니에요. 육신의 욕망이라는 게. 탐심은 끝이 없고. 자꾸 말씀 버리고 복음 버리고 세상 쪽을 향하여 돈 벌어서 남들 보기에 자랑질하고 싶은, 그래서 그 나름대로의 내가 세상을 이겼다 외치고 싶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그래도 돛대처럼 살았다는 이름을 외치고 싶다. 세상은 나를 보라, 뭐 이런 거.

이거는 혼자 살 때나 하세요. 혼자. 주님이 가만두지 않죠. 그러니까 우리의 그 못된 성격을 주님께서 성령께서 사랑으로 계속해서 내가 주님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 말씀대로 “너 사랑하지 않았지? 그러니까 말씀대로잖아.”

그러면 비유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은 이것은 진짜 현실이고요. 비유도 아니고요. 실제로 죽었다가 실제로 부활했어요. 내 지갑에 돈 있는 것만 현실이 아닙니다. 진짜 현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혜, 그 능력. 그걸로 모든 것은 만사 다 끝났어요. 이제는 그 십자가를 향하는 말씀이 우리 속에 있어서 날마다 십자가로 기뻐하고 계속 새롭게 새롭게 끝없이 고마워할 때 바로 우리는 언약에 기초를 둔 영원한 주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 거짓하지만 우리 자신이 거짓됨을 십자가 피 앞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이것이 우리 인생의 기쁨이고 감사고 인생의 맛이고 재미고 즐거움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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