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2장 18절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 240319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2장 18절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 240319b-이근호 목사
세상 멸망의 새로운 출처는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가 안 등장했으면 세상은 멸망할 이유가 없어요. 포도나무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그동안 있었던 모든 관계는 간선도로에 있습니다. 간선도로에 있고 중심도로가 있죠. 중심도로라 하는 것은 중앙된 것과 바로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것을 중심도로라 하고, 간선도로는 연결되는 이 선과 이 옆으로 가는 것을 간선도로라 하죠. 주님께서는 포도나무로 왔는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그러면 주님과의 관련성은 이 중심도로와 되야 해요. 그런데 이 포도나무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뭐가 된다? 멸망의 이유가 밝혀졌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 빼놓고는 다 뭐였다? 다 육이였어요. 영은 없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혼자서 아기를 낳는다’ 마치 아담 같이요. 아기를 혼자서 낳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포도나무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은 뭐냐? 우리가 할건 없네. 우리는 어떡해야 되는가,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중심 간선적인 중심 도로를 연결해야 되는가?
성경은 멸망과 관련해서 이 점을 이야기합니다. “너의 시간은 다 썼다” 너를 위한 시간은 일체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남아있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시간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사용할 시간이 다 썼다는 말은 뭐냐면, 다 소멸했다는 말은 ‘앞으로 잘 할께요.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앞으로 바르게 살께요. 앞으론 태만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말이 예수님한테는 해당이 되지를 않습니다. 일체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이 마태복음 13장 36절에서 43절까지 제가 후딱 읽어드릴께요.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인자입니다. 예수님이 씨를 뿌리는 거예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그러면 예수님만 뿌립니까? 또 누가 뿌려요? 악마도 세상에게 씨를 뿌리지요. 가라지이긴 하지만.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마태복음 13장 36절에서 43절까지 보면 우리가 해야 될 게 아직도 남아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막 씨 뿌립니까? 내가 막 씨 뿌리고 내가 막 거름 주고 물 뿌리고 그래요? 그렇지 않지요? 왜 주님은 우리의 시간을 다 빼앗아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시간이 일체 남아있지 않으냐?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태어나가지고 12살부터 33살까지 예수님의 흔적이 성경에 없어요. 그냥 뭐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고 이래가지고 끝나버렸어요. 12살부터 33살 때까지.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때 아무 활동을 안했다 이 말이거든요. 활동을 안 한 그 시기 동안에 세상에서는 무엇이 마구마구 번창했겠어요. 무화과나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번창한 거예요. 주께서는 팔짱 끼고 지켜본 겁니다. 딱 지켜본거에요. 왜냐하면 포도나무의 시작은 반드시 무화과나무의 멸망과 연계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너희 육적인 무화과나무, 막 해 해. 내가 다 작살내줄 테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선 드디어 30세 되는 그 해에 활동을 나서버리니까 그때부터 예수님은 뭐만 지적하면 돼요? 너희들이 과연 무화과나무로서 열매 맺었냐? 그 이야기만 계속 하면 되는거죠. 그 이야기만. 예레미야도 그렇고 이사야도 그렇고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봐요. 무화과나무 농장. 하기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죠.
예수님께서는 딱 30세까지 시작해서 어디로 가느냐 포도나무와 관련된 일을 하세요. 포도나무와ㅏ 관련된 일. 십자가 죽으심으로 가는 길을 주께서는 시동을 이제 거는 거예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는 일에 시동을 겁니다. 왜? 다른 사람은 다 육적이니까 예수님 혼자 영적이에요. 성령이 혼자만 임해서 다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 30세 때까지는 다른 사람 성령 받은 사람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만 영이요 나머지는 다 뭐다?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다 육이 되는 거예요. 영의 극대화가 뭐냐? 저주받을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지적하지 아니하면 영은 극대화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만은 성도는 굉장히 난폭해야 돼요. 대충 뭐 봐주고 이런 거 하면 안돼요. 난폭해야 돼요. 그렇다면 여기서 간선도로라는 것은 육이고 중심도로는 영이라 할 수 있죠. 이 영과 오늘날 성도들은 어떤 식으로 관련성이 연결되어 있는가? “마치 ~와 같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에 나와요. 7장 29절에서 32절까지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됐습니다.
영어로 하면 ‘as if’ 마치 ~없는 것처럼,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왜? 주님하고 영적으로 중심도로하고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나로써 종결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마치 내가 내 아닌 것처럼. 그니까 나는 예수다 하면 안 되죠. 우리는 예수님에 속한 것처럼. 그걸 가지고 성경에 뭐라 하냐면 가족이라 해요. 패밀리. 가족의 중심은 아버지에요. 아버지가 없으면 가족이 생길 수가 없으니까 이름을 대표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이고 그 뒤에 줄줄이 자식들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넷플릭스 우리 나라의 높은 여자 간부가 하는 말이 “넷플릭스 우리 회사는 절대로 우리는 가족이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해요. 보통 회사들이 티낸다고 ‘우리는 가족 같애’ 이렇게 하는데 그럼 가족 아니고 뭐냐 “우리는 우수한 인재들만 뽑아있는 팀원입니다. 팀” 자, 팀은 뭐가 안되느냐 하면 임신도 안되고 애기를 낳지도 못해요. 팀이니까 독자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니까 출산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가족으로 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모친인가” 육은 우수한 팀이고 영은 뭐가 되고? 가족이 되는 거예요. 마치 ~인 것처럼. ~인것처럼 이 말은 우리가 주님한테 잘렸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 육이잖아요. 육신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용도로 수단으로 매개로 우리를 우리와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더 쉽게 해보겠습니다. 영국에서 체코까지 가는 호화 여객기차가 있다고 해봅시다. 영국 런던에서 체코 프라하까지 가요. 가는데 중간에 어딜 가냐 하면 도버 해협이 있는데 거기에 해저 터널을 갑니다. 가는데 기차가 가는 게 아니에요. 뭐가 가냐 하면은 거기 일등석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버스에 태웁니다. 리무진 버스에 버스를 태우니까 손님들이 ‘아 우리는 버스 타고 도버 해협 영국에서 프랑스 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버스 타니까 버스가 가질 않아요. 버스가 해저 터널을 막 달린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버스는 가만 있어요. 가만 있는데 속도가 나요. 버스를 기차가 운반시키고 있던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끝까지 우리가 할 수 있고 우리가 더 추가해야 될 일들을 끝까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그 토큰는 다 썼어요. 없어요. 내가 나를 위해 쓴 잔고는 아예 없어요. 바짝 말랐어요. 우리는 육이니까. 육에서 영으로 맡겨야 되거든요.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해서 내 신세를 호전시켜볼까 내 인생을 바꿔볼까 그런 생각은 뭐냐 하면 아직도 내가 쓸 그러한 시간이 남아있다고 할 때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문제적인 문제들, 골치 아픈 것들 그걸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그건 간단하지요. 그것도 누구 일이냐 주의 일이에요. 자기의 형편을 호전시키기 위해서 ‘주님이여 내가 어떻게 봉사하면 이 난처한 형편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버스 탔는데 왜 벗어나요? 버스 벗어나면 이 물에 빠져요. 예수 안이 있는 그대로 영국에서 프랑스로 이동시켜주는거에요. 멸망 받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동하는데 지가 막 버스 내려가지고 돌아다니면 안 되죠.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들이닥친 어떤 일도 이거는 주님의 일이지 절대로 우리에게 맡겨진 우리가 해야 될 남아있는 일들은 없어요. 일절 없습니다. 우리가 포도원 갈고 우리가 포도주스 만들어 가지고 먹고 이럴 필요 없어요.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우리 인간은 다시 먹을 수가 없어요. 천국이 올 때까지라는 말은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다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그 뜻이에요. 우리 그 외손녀가 있는데요. 외손녀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에요. 자기 같은 반에 맘에 드는 남학생이 있었나봐요. 그래서 자기 할머니한테 ‘나 쟤랑 결혼할거야’ 그랬는데 할머니가 ‘결혼? 돈 없으면 결혼 못 하는데?’ 그렇게 하니까 외손녀 하는 말이 ‘나 돈 벌잖아’ ‘뭐’ 할머니한테 과외 받으면 공부 끝나면 500원 이상 줘요. 그러니까 외손녀의 관심은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결혼하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결혼은 무조건 성사되어야 돼요. 그러면 돈은 매일 500원 버니까 결혼 하면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목적이 뭡니까? 중심도로에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어떤 현상들을 영적 일들을 계속 일으키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영적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육적인 것을 박살내면서 그것을 지적하면서 영적인 것이 그 현장에 드러나는 겁니다. “나 이렇게 못 산다. 이래가지고 죽는 게 낫지. 이래가지고 어떻게 살아” 라고 할 때에 바로 그러한 육적인 것을 우리 입으로 그대로 폭로되도록 조치를 하지요. 폭로 되도록 해놓고 성령이 오게 되면 ‘네가 바로 네 생각 이 중심노선도 모르고’. 이 간선이라는 말을 제가 왜 했냐면요. 이 중앙 광장하고 나하고 연결되어있는데 이 선이 전부다 중심이 예수그리스도하고 연결이 되어있는데 사람들은 이건 안 보이고 다른 사람들하과의 관계, 비교 이 간선에 굉장히 관심이 있는 거예요. 베네치아 중앙 광장 있지만 옆 길 골목들 많잖아요. 중앙으로 바로 가면 되는데 자꾸 옆에 길을 새요. 거미줄 같은 옆에 이 간선도로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이강인하고 손흥민하고 친하게 지내는 게 좋아. 이강인하고 손흥민하고 둘 다 죽으면 나중에 다 멸망당하는데 지옥 가는데. 육적이 없으면 영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육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자체가 육이에요. 우리 육을 포도나무에 나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무화과나무에 불과하고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면서 그러면서 오직 예수님만이 마셨던 그 포도나무의 것, 그것이 얼마나 유효하게 우리에게 나타나는지 보란 말이죠. 그것이 뭡니까? 이사야 보니까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돼요. 왜? 무화과나무는 죄를 지어서 저주받는 게 아닙니다. 육이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이에요. 내가 인생이 힘든 것은 육이다. 육이니까 이거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우리는 힘들어야 돼. “호호호” “히히히” 미친 거죠. 나 인생 완전 조졌어. “아유 기뻐” 이런 거. 육을 육 되게 하는 병행구조 같이 나란히 영이 나오는 거예요.
자, 누가복음 22장 진도 나가봅시다. 오늘 이 강의를 보면서 24절 한번 봅시다. “또 저희 가운데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어난지라” 했지요? 이게 뭡니까? 간선도로에요. 간선도로의 특징은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못 알아들어요. 왜? 영적이니까 성령 안 받았기 때문에. 인간 대 인간으로 자꾸 비교하는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유념해야 할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비교한다고 내가 남하고 비교하는 게 아니고 나는 먼저 나 자신과 비교해요. 내가 되고 싶은 것과 현실의 자기 꼬락서리하고 비교한다고요. 그래서 또 준비한 게 있지요. 옛날부터 지금 여러분 받으시는 이 가수에 대해서 꼭 내가 언급하고 싶었어요. 옛날부터. 잠시 노래 먼저 듣고 하겠습니다.
‘Why me Lord, what have I ever doneTo deserve even oneOf the pleasures I've knownTell me Lord, what did I ever doThat was worth loving YouOr the kindness You've shown
Lord help me Jesus, I've wasted itSo help me Jesus, I know what I am’
자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아 이게 아쉽네. 자 여기 ‘why me Lord’ 왜 하필이면 접니까 주님 이라는 노래를 채택을 한 이유가 인간은 먼저 자기와 자기를 멱살 쥐어요. 다른 사람 멱살 쥐면 안되지요.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되게 못 마땅해요. 왕짜증 왕짜증. 그걸 왕짜증이라 하는데 ‘체증’ 얹혔다. 뚫리질 않아요 내 인생이. 이게 확 뚫려야 되는데 이 ‘체증’되어있어요. 꽉 찼어요. 그러니까 이게 본능이 뭐냐 하면은 주님이여 내 문제 어떻게 손 써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why me Lord. 왜 저한테 이런 불상사가 왜 일어납니까? 해가지고 그 내용 보면 임재범하고 똑같아요. 그 내용이 보면 자기 딴에 할 회개는 다 해요. 얻어맞기 전에 회개는 다 하는데 주님에 대해서 극 존칭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이 하신 일 ‘my soul in your hand’ 내 영혼은 당신 손에 있습니다. 하자 없도록 누가 봐도 나를 지적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복음적인 내용을 다 하는데 결국 뭐냐 하면은 ‘Lord help me Jesus’ 예수님 도와주세요. 이게 말이 돼요? 예수님 왜 우리를 도와줘야 되죠? 멸망 대상인데. 중간 중간에 나와요. Lord help me Jesus 예수님 도와주세요. 난 그동안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도와주세요.
이게 뭐냐면 중심도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간선입니다. 간선. 왜? 자기를 자기가 멱살 잡고 스스로 자기를 학대하고 있어요. 인생 꼬라지 이래 살아야 되겠어? 남들 저렇게 살 때 너 뭐 했어? 자기가 질문하고 답을 자기가 해요. 자기가 한다고요. 카이스트에 어느 교수가 이런 문제를 냈습니다. 문제가 뭐냐면 ‘네가 문제를 내라’ 이게 문제에요. 괴짜 교수인데 지금은 카이스트 총장이 됐어요. 네가 문제를 내봐라. 그러니까 인간은 매일 생각이 뭐냐면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출제하는 삶이 육적인 인간들의 24시간입니다. 이래 해볼까? 저래 해볼까? 이러면 내 삶의 형편이 편해질까? 나아질까 다른 사람이 나보고 욕을 적게 할까? 남들 보기에 그럴싸해 보일까? 매일 생각하는 게 그거에요. 첫째 시간에 우리가 누가복음을 보면서 뭘 느꼈습니까? 난폭해야 된다는 거죠. 기생 라합처럼 난폭해야 돼요. 무너지는 것이 기정사실이고 무너지는 것에 대해서 박수 쳐야 돼요. 근데 지금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1972년 이 사람은 자기한테 박수를 못 칩니다. 감사도 없어요. 지금 짜증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이런 식이라면 이게 지금 주님 중심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사는가? 또 준비한 게 있는데. 이것도 짧게 음악부터 먼저 듣고 가실께요.
‘And I love you soThe people ask me howHow I've lived till nowI tell them I don't know
I guess they understandHow lonely life has beenBut life began againThe day you took my hand’
이게 페리 코모의 노래인데요. 여기 보면 아까 크리스토퍼슨은 누구하고 따지고 있어요? 직접 하나님과 따지고 있지요. 근데 이 ‘and I love you so’ 이거는 이토록, 이토록 당신을 사랑한다. 뭡니까? 자기 자신이 날라가버리고 모든 공로와 모든 은혜를 상대에게 다 넘기지요. 당신이 내 손을 잡아주었을 때 내 인생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자기 우수함, 자기 괜찮음, 자기 대단함 이게 이 사람은 없지요 왜? 자기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중간에 해석을 보면 ‘삶의 교훈은 믿음이에요. 일단 한 페이지를 읽어졌을 때 사랑만이 남을 뿐 나머지는 모든 것이 쓸모없게 되죠. 나는 그것을 믿어요’ 이 성경 보세요. 성경 전체가 뭐라고요? 무조건 뭐하는 겁니까? 무조건 사랑하는 거예요. 성경 전체를 우리가 뭘 행하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뭘 지키는 책이 아니고 그냥 성경 전체가 보게 되면 ‘일단 한 페이지만 읽어졌을 때 사랑만이 남을 뿐 나머지는 모든 것이 쓸모없이 되고 말죠’ 가사가 보통 가사가 아니죠. 아까 그 크리스토퍼슨은 주님한테 대드는 거고요. 여기 ‘이토록 저를 사랑합니다’ 이거는 대드는 게 아니고 그냥 반대로 틈만 나면 갖다 앵기는 거예요. 틈만 나면 나를 ‘주님 하셨죠 주님이 하셨죠’ 자꾸 주님한테 모든 것을 인계하고 넘겨주는 거예요. 왜? 그쪽에 사랑 있으니까.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로마서 13장에 보면 율법에 뭐 하지 마라 있지만 모든 완성은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완성입니다.
자, 그렇게 해서 누가복음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22장 24절에 “그 중에 누가 크냐” 다툼이 일어나죠. 이게 뭐냐? 중심노선이 아니고 뭡니까? 간선, 중심도로가 아니고 간선도로. 다른 사람하고 누가 세냐 멱살 잡고 싸움하는 거 그런 태도입니다. 그러면 중심도로와 간선도로의 둘 사이에 어떤 구분이 있느냐. 간선도로는 본인이 살아있어요. 늘 본인이 중심이고 살아있어요. 근데 중심도로는 내가 남자든 내가 여자든 내가 돈이 있든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그것은 ‘as if’ 마치 ~같기 때문에. 내가 나에 대해서 규정할 이유가 없어요. 근데 간선도로 식으로 교회 다닌 사람은 맨날 목사한테 묻기를 “저 예정되었어요? 저 선택되었습니까? 저 구원 받았어요?” 맨날 묻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규정하는 거예요. 이 정도 하면 믿음이라고 쳐주십니까? 교회를 45년 다녀도 맨날 하는 생각이 그거에요. 이 정도 하면 충분하겠죠 구원받는데. 주님께서 ‘네 산을 한번 들어봐라’라고 이야기할거에요. 26절 봅시다. 지금 26절부터 나오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저녁 후에 내 피로 세운 언약이 그 중심도로 그 광장 있잖아요. 광장이 as if의 원리에 의해서 자기 백성들을 잉태하니까 번식하니까 번식된 자기 안에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흘러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중심도로를 할 때 그 때 주께서 이야기하신 거 그거를 뭐라 했습니까? 육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육 맞아요 육인데 육을 통해서 뭐를 보여준다? 영을 보여주는 거예요.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자 이거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더 웨일’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정말 돈 안들은 영화, 뚱뚱한 사람이 자기 딸하고 대화하면서 영화 끝나는 아주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 지루하면서도 의미 있는 게 여기에 등장하는 장면이 뭐냐 전도하는 사람이 몸무게가 140 이상 나가는 뚱뚱한 사람이 지 몸도 못 움직이는 사람에게 전도하러 갔어요. 당신은 곧 죽는데 죽기 전에 복음이나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라고 이렇게 하니까 그 주인공 뚱뚱한 남자가 먼저 선수 칩니다. 성경 나 두 번이나 읽었다. 그러니까 전도하는 사람이 두 번 읽으니까 무슨 내용이 있던가요? 그게 아주 신기하고 반가워서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누가복음 이야기하는 과정 속에 있어요. “하나님께서 75억 명의 인구를 만들어놓고 어떻게 14만4천만 달랑 구원을 받냐” 뭐 이런 불합리가 어디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75억 명 비교해보세요. 75억하고 14만4천하고 도대체 몇 대 몇이에요? 엄청나지요. 7천만 대 1이에요. 합격 비율이. 그러니까 그 뚱뚱한 주인공이 전도하는 사람을 조롱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거예요. 성경을 봤는데 왜 어떻게 인구를 이만큼 만들어놓고 14만4천만 건지냐 할 때 여러분들은 지금 그 사람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전도한 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전도했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자기 구원’이에요. 당신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하러 왔거든요. 할 때 그 상대방이 뭐라 하냐면 75억 놔두고 왜 14만 이렇게 답변했을 때에 전도자가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여러분 한번 답변해보세요. 여러분이 전도자라고 하고. 전도해본적도 별로 없겠지만 한다고 치고. 이런 반박이 예상된다고 하면 뭐라고 여러분 마음의 준비를 해야 돼요? 성경을 두 번이나 봤다는 거에요. 어떻게 반박할수 있어요? 성경을 창세기부터 끝까지 보더라도 뭐만 중점해서 보는 겁니까? 나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춰서 봤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던 거, 하나님은 육적인 것을 어떻게 한다? 전부 다 죽여버리지요. 다 죽여버린다고요. 왜 그걸 죽이는 작업과 동시에 영이 등장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포도주가 등장, 포도주의 의미가 등장하거든요. 그러면 오늘 본문 제자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고 이야기했다고요.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고 하는 것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우리는 예수님 만났기 때문에 이제 천국 가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고 우리는 열두 지파 다스리면 되고 이 생각만 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걸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런데 열두 지파를 다스릴 때에 어떤 자세로 다스려야 된다고 되어있습니까? 25,26,27 어떤 자세로? 섬기는 자로 다스려야 되겠지요? 그럼 이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 섬기면 뭐된다? 열두 지파 두목이 되는구나 다스리는구나 이렇게 되겠지요. 그게 문제에요 그게. 여기서 섬기는 자는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 단 한 분밖에 없어요. 왜? 예수님만이 사랑이이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거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잔혹한 멸망 이야기, 혼인 잔치 이야기를 다 한 겁니다.
31절 한번 봅시다. 제가 진도를 약간 빨리 나가는 이유는 이제 중요한 것은 성경 내용이 아니고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간선도로가 아니고 중심도로와 연결해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홀로 자기 가족을 나눈다는 것, 잉태하고 해산한다는 것 번식한다는 것, 인간은 아무리 해도 영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해석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31절에 나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음이라” 제가 대구강의에서 이 비슷한 대목에 대해서 언급을 해드렸잖아요. 베드로의 말하는 언어에 문제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문제점이 있느냐 하면은 뭘 빠뜨렸어요. 뭘 빠뜨렸다 했습니까? 베드로가 이 말 할 때 33절에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준비되었습니다 할 때에 지금 방금 예수님이 이야기한 가운데서 어떤 단어 한 개를 빠뜨리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31절에는 무슨 단어가 나왔느냐 하면 사탄이 나와요, 악마가 나온다고요 악마가. 악마 언급했는데 지금 베드로는 33절에 뭐라 합니까? 악마가 등장할 자리를 누가 메꿔요? 내가 하겠습니다 하고 자기가 메꾸는 거예요. 이게 육이에요. 나에게서는 영이 안 나옵니다. 영은요 예수님이 사탄과의 결단을 내려서 그 결과로서 우리에게 영이 쏟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는 지금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사탄의 그 권력과 권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빠져나올수가 없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빠져나올 수가 없다면 어떻게 빠져나올수 있습니까 라고 여러분은 그렇게 질문을 할 수 있겠죠? 그런 질문이 성립이 안 됩니다. 그렇게 첫째 시간에 얘기해도 우리는 아직도 자기 구원 문제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질문 자체를 보게 되면 못 빠져나오는데 어떻게 빠져나옵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아.안 빠져나와도 되는데 왜 빠져나올라 하죠? 왜? 마귀 떠난 괜찮은 사람 되고 싶어서요? 사도 바울도 사탄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빠져나올 생각 안 했어요.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예수님만이 육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사탄이 우리와 함께 결부되고 활동을 해줘야 그때마다 예수님만이 영이라는 거 예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이 그제사 그게 밝혀지는 거예요. 시몬이 “주여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길 내가 준비했습니다” 31절에서 사탄이 너를 지금 청구했다는 이야기 들었는데 지금 베드로는 사탄이고 뭐고 보이지도 않고 주님과 자기 사이에 간선도로를 깔아놨어요. 중심도로가 아니고 간선도로에요. 좋게 지냅시다 이런 뜻이죠. 제가 할 도리를 다 하고 제 정성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다해 주를 섬기겠습니다 됐습니까? 그런 인식 자체가 결국은 주님을 영광 돌리는 게 아니고 자기 구원에 환장한 사람이에요. 자기 구원에 환장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포도나무는요 죄에 상관없이 의인되는 거예요. 죄 상관없어요. 따라서 죄 상관없이 의인되기 때문에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우리는 늘 죄가 나올 수밖에 없고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는 이 자신감 이 객기 오지랖 우린 매일같이 이게 나오는 거예요. 고맙다 베드로. 베드로의 말이 우리의 심령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뭘 열심히 좀 했고 주님이 그만큼 사랑했으면 나도 보답을 해야지 이런 되지도 않는 그런 우쭐댐, 촐랑댐.
그래서 34절을 봅시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했잖아요. 자, 여기서 왜 하필이면 닭이냐하는 거에요. 주님이 의도가 있어요. 이 뭐냐하면 나중에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잖아요. 그 부인할 때 닭이 베드로에게 시비 걸었습니까? 아니면 옆에 있는 어떤 작은 소녀가 시비를 걸었어요? 소녀죠? 나에게 시비 거는 것은 닭이 아닙니다. 같은 인간이 시비 걸어요. 너 나사렛 예수하고 한 패지? 너도 잡혀야지. 아저씨 여기 같은 편 있어요. 라고 할 때에 강남강의 뭐 첫째 시간 둘째 시간 다 들어도 소용없어요. 아니야 아니야 SNS 반박문 내고요 난리도 아니에요. 내가 그런 거 말한 적이 없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온갖것 다 해요. 요새 공천 한번 보세요. 막 인사하고 절하고 내가 5.18에 대해서 잘못 오해했습니다 막 이러고 난리도 아니라니까요. 근데 그 지적한 게 닭입니까? 닭이에요? 주님은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뭐보다 못하다? 닭 아래 있다. 닭 아래 있어요. 네가 그렇게 무시하고 아무 것도 아닌 그렇게 아이큐가 낮은 그 닭보다 못한 인간들을 너는 굉장히 의식하면서 네가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닭보다도 못한 인간이에요. 닭이 뭐 베드로한테 지적하지 않았어요. 그냥 울었어요. 꼬끼오 그냥 울었는데 그 반응이 대단합니다. 통곡을 해요. 통곡합니다. 특히 닭 같은 경우는 울면 그 목 졸라가지고 닭도리탕 해먹으면 끝납니다. 아무것도 아닌거에요.
너는 내가 이 예수님 보기에 너 같은 인간은 정말 닭보다 못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의 모든 의식과 그들이 말한 것에 대해서 네가 그렇게 신경쓸 정도로 너는 육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겠지요. 마귀가 어디 보입니까? 닭은 보이지만 마귀는 안 보이잖아요. 닭을 통해서 영적인 것을 끄집어내시는 주님. 무화과나무에서 영적인 것을 끄집어내지요 포도나무에서 영적인 것을 끄집어내지요. 왜? 주님은 마귀하고 싸우는 거예요. 우리 상대하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할께요. 바르게 할께요. 최선을 다 할께요. 그런 이야기는 전부 다 자기 구원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헛소리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안 하면 내 구원 없다 그건 끝난 거죠 뭐. 그러니까 구원이 없는 거예요. 그 소리하니까 구원이 없는 거예요. 기생 라합이 뭘 그리 걱정했어요? 기생 라합은 뭘 들었습니까? 누가 쳐들어온다? 하나님이 쳐들어오신다 들었잖아요. 그러면 기생 라합의 남은 해야 될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자기 시간을 뭐가 덮칩니까 먹구름 허리케인 덮치듯이 주님의 시간이 매일같이 내 시간을 덮쳐버리면 지금 내 시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덮쳐진 주님의 태풍 구름 속에 우리가 놓여있으면서 신바람이 이박사지요. 아 이런 식으로 내가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지는군요. 잘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대하면서 성경 보는 관점이나 자세 바탕 토대 전혀 없이 그저 자기 구원에 환장한 채로 성경을 봤으니 바로 우리가 베드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홀로 다 하셔서 그게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줬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