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선지자 2002년 11월 2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5:10-12
Re..마 5:10-12 (예수님과 선지자)
이름 : 이근호(IP:)
예수님과 선지자
2002년 11월 2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5:10-12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사람은 같은 시대에 같이 살아 있는 사람하고만 관계하려고 합니다. 물론 과거의 훌륭한 영웅들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존경의 태도를 보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나고 뛰어나도 어디까지나 과거의 사람일 뿐입니다. 지금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혹시 이런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요한계시록 3: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항상 계시는 분으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하고 동시대 인물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고자 할 때에 한 때 사셨던 과거의 분의 업적을 뒤적이면서 그 흔적을 연구한다고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영생이신 분과의 실제적으로 사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생 안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사람이 자기말고 따로 누구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보통 사이가 아닐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과거 인물로 봐서 그분의 유적이나 들추는 것은 예수님과 현재 사귀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 분을 위하여 현재의 내가 손해본다는 것은 더더구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과 우리가 함께 살아서 서로 사귀고 있다고 한다면,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라는 경우가 성립됩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뭔가 피해가 덮치고 손실이 된다고 여길 때면 앞 뒤 보지 않고 방어와 공격에 나설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지금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현재 엄연히 살아있는 이상, 이 예수님을 옹호하거나 아니면 핍박하는 것이냐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옹호냐 아니면 핍박이냐는 천국 백성이냐 아니냐와 상관이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를 위하지도 않고 또 의로 인해 주어지는 핍박도 받지 않으려는 사람은 결국 천국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같은 내용을 11절에서는 예수님으로 채웁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핍박을 받지 않는 자는 곧 천국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자진해서 지옥하려는 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하는 곳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그 때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천국의 백성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법을 전혀 모르고 또한 듣지도 못한 이방인들에게 난데없이 성령이 임합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사도들은, 구원이란 율법과 무관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작품이 곧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통해서의 구원을 철저하게 유지했던 유대인들은 졸지에 헛수고 한 것이 됩니다. 그 중의 한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로 변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철저히 율법을 준수해서 구원이 얻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과거에나 존재했던 그런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누구시냐고 사울은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고 했습니다. 과연 핍박이라는 것이 왜 생길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단순히 한 때 과거의 인물로 여기고, 현재 생생하고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핍박이 유발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때에 완전히 인간이 바뀌어졌습니다. 소위 거듭난 겁니다. 어떻게 거듭난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십자가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자가 감히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모독해서 그 벌로 처형된 십자가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죄를 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 때문에 생긴 일이고, 여기서 말하는 죄란 곧 율법을 준수하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인식을 뜻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드릴 때는, 십자가를 지게 만든 그 죄까지 제대로된 죄관으로 함께 받아드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 때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은 철저하고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면서 그 법대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인식이었고 죄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왜 율법도 모르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법을 초원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그냥 주었는지를 그 내막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여기에 보면, 이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은 지금 어떤 세력 아래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지옥이란, 천국과 사이에 두고 사람이 마음대로 골라서 갈수록 있고 혹은 싫으면 선택 안해서 안 갈수도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 일이야 지금의 자기 선택에 의해서 결과가 얻어지는 것입니다만,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선택과 상관없습니다. 천국 안가고 지옥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서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지옥으로 끌려가는가? 그것은 지옥으로 끌려가서 지옥행이 아니라 원래부터 지옥이라는 우물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은 자력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배권을 쥐고 있는 어두움의 힘을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3-5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만 새삼스럽게 그 지옥의 우물에서 탈출할 수가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이 미쳐 몰랐을 때에는 사도 바울은 필히 예수님을 핍박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의 효과를 모르는 그것이 곧 지옥 백성입니다.
천국 백성은 예수님의 긍휼로 인해 지옥의 우물에서 빠져나왔기에 빠져 나와서는 예수님의 긍휼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물론 이들도 핍박을 받겠지요.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인하여 욕을 얻어먹고 핍박을 받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렇게 지옥에서 빠져 나온 사람의 특색이 무얼까요?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선지자'라는 명칭이 나옵니다. 선지자란 참으로 이상스럽고 특이한 인생을 사는 분입니다. 여기에 대한 한 가지 예는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왕을 만난 면전에서 왕의 나쁜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왕이 화가 나서 그 선지자를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왕의 손이 말라버렸습니다. 왕은 너무 겁이 나서 선지자에게 자기 손이 낫도록 부탁합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기도해서 손을 원상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왕은 너무 고맙고 감격해서 선지자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왕의 집 절반을 주더라도 저는 받지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자는, 선지자 노릇으로 밥먹고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그것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 대기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즉 선지자는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런데 한 거짓 선지자가 이 선지자를 유혹합니다. 자기도 같은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있어 잘 대접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그 선지자는 길에서 사자에게 물어뜯겨 죽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사귄다든지 하나님의 받는 경우가 없기에 괜찮아 보이는 참된 선지자에게 잘 대접하려고 한 것이 결국 이런 비극을 낳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의 개혁을 외치고 목사의 바른 자세를 성토하고 주장하는 목사가 있다할지도 그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틀렸다가 아니라 단지 그분이 증거하시는 분이 분명히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눈치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생이란 그 목사와 사귀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영생의 주시는 예수님과의 사귐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복음과 예수만을 전하는 훌륭한 목사와 사귄하고해서 지옥의 우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신 분도 따로 있고 먼저 부활하신 분도 따로 있습니다. 그 분은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그 분과 사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 구경만 하지말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과 늘 사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