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40220a 부산강의 : [시편]65(49:12)-재물의 효능자유게시판시편

20240220a 부산강의 : [시편]65(49:12)-재물의 효능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49편 할 차례입니다.

“만민들아” 만민이라 하는 것은 말씀이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겠지요. “세상의 거민들아” 마찬가지입니다. 다 해당됩니다.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찌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 하면 5절, 6절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죄악이 나를 둘러 포위를 해서 꼼짝 마라, 하는 그때에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환란, 와와. 핍박, 오라는 거예요. 환란과 핍박을 피해서 도망하는 게 아니에요. 내 안에 있는 진리가 바깥에도 진리답게 작용하는. 복음을 안다는 사람이 나는 진리를 안다는 사람이 바깥세상에는 내 안에 들은 진리가 작용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하고 있어요. 그건 진리 없으니까 나는 도망쳐서 복음 안에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거는 진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무탈하기를, 진리 덕분에 내가 편안히 살기를 원하는 꼼수 같은, 인생에 꼼수 같은 겁니다.

진리가 내 안에도 진리라면 내 바깥에도 진리이겠어요, 아니겠어요? 진리겠지요. 천국에서 진리라면 지옥에도 뭡니까? 진리가 되는 거예요. 진리에 마음을 둬야 되는데 진리, 진리 언급하면 자기 편한 인생에다가 꽂혀서 어떻게 하면 요령껏 사는 것에 꽂히니까 진리 아는 나는 진리 모르는 더러운 세상에서 더럽힐 것 뭐 있나, 하고 나 혼자 몸 하나 피하면 되지, 하고 도망치는 인생을 살아요,

시편 49편 초반부터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하고 있지요. 인간의 심보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심보는 도망칠 준비, 같은 말이죠. 내뺄 준비. 또 같은 말이에요. 도피할 준비. 이걸 다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따로 나를 챙길 여지, 공간 마련에 열중. 도망칠 준비, 내뺄 준비, 도피할 준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온다? 그러면 후딱 나를 다른 장소로 옮겨서 나라는 것을 곱게 보호할 아지트를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고 교회 다닙니다. 교회 다니고 말씀 공부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환란 때여 오라가 아니라 ‘제발 환란, 나 좀 따라다니지 마라’ 이런 취지에요. 여러분들에게 해당 안 되겠지만, 안 됐으면 좋겠어요. 결국 이 전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일종의 비겁, 다른 말로 하면 자신감이 없다. 어떤 자신감? 하나님을 일관되게 의지할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자신감이 없으니까 이걸 신약에 와서 이야기하면, 신약에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뭐냐 하면, 믿음이 없으니까 진리가 없으니까 자꾸 진리 찾고 믿음 찾고 복음 찾는 거예요. 자신감이 없어요. 자신감이 없으니까 믿음, 소망, 사랑을 수입을 자꾸 하고 싶은 거예요. 매일같이. 코스트코 가서. 교회 가서 계속 믿음, 소망 말씀 가지고 잔뜩 담아서 집에 쟁여놓는 거예요. 왜? 믿음이 없으니까. 자기가 자기를 지킬 자신감이 없으니까.

결국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신종 뭐 같아요? 부적 같은 거예요. 예배는 뭐냐 하면 일종에 푸닥거리하는 것.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자기를 어떤 식으로 지킬 것인지 신경을 쓰니까 마귀가 이걸 모를 리가, 알지요. 동네 일곱 귀신 불러다가 투입을 명합니다. 아예 드론으로 더 나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귀신같은 것 다 불러서 하는 거예요. 그럼 어쩔 줄 몰라서 성경공부 더 자주 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자신감이 없고, 결국 말씀 공부를 부적처럼 사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49편 5절에 보면 오라는 거예요. 와, 오라. 왜 그러냐 하면 진리는 내가 환란 피해서만 진리가 아니라 환란 속에 뭐가 드러나기 때문에? 환란과 더불어서 내가 골라잡은 진리가 아니고 진짜 참된 진리는 환란과 더불어서 오게 돼 있어. 환란 들어오면 누가 깨집니까? 내가 깨지지요. 그게 진리에요. 내가 깨지는 게 진리에요. 왜? 그 뒤에 나옵니다.

12절에 다 같이 시작.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내가 아담으로 말미암아 벌써 우리에게 전수된 마음은 짐승의 마음입니다. 그동안 이 짐승의 마음을 누가 그렇게 받아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왔느냐 하면 진리가 아닌 마귀가 그 짓해 온 거예요. 잘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너 원래 착하잖아. 지금부터 예수 믿고 더 반듯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구원 보장해준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에 대해서 내가 나를 포기 못하도록 부추여주고 격려해줘 온 것이 마귀였어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반대로 나간 겁니다. 너 같은 인간은 환란 속에 들어가 봐야 진짜 네 모습이,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예레미야에도 나오니까(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정말 썩고, 썩고 더러운 것이 바로 너라는 사실, 이게 바로 영어로 하면 truth, 이게 진리에요.

그동안 우리가 헛살아 온 것은 썩은 것을 붙잡으려고, 썩은 것을 포장하고 위장하려 했고, 썩은 것을 못 놓는 것, 썩었음에도 불구에도 여기에다 기대와 희망을 걸고 살아온 것, 그러니까 이건 마귀는 좋아하고 뭐는 점점 멀어집니까? 진리와 복음은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시편 49편에서 어디로 이어지느냐 하면 환란과 6절과 연관시키는 데 요 연결고리를 제가 될 수 있는 한 자세히 설명해 줄게요. 왜 그러냐 하면 환란과 그다음에 나오는 6절,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한다, 라는 이 대목 있잖아요. 이 대목이 현재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대변해주고 있는가? 환란의 최후의 대처방법은 ①복음이다, ②돈이다. 몇 번이겠습니까? 바로 인간은 마음이 부패하고 짐승 같아서 처음에는 복음으로 말씀으로 교회 다니고 성령 받아 버틸 대로 버티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믿을 것은 돈밖에 믿을 게 없는 겁니다. 돈이 마지막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니까 마음이 부패하고 돈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이 사실을 돈을 추구하고 돈만 의지하는 이 사실을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이걸 어디다가 집어넣느냐? 진리 범주에다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나 복음 알았으니까 돈으로부터 자유로워’ 이런 것, 어디서 거짓말하고 있어. 진짜 진리는 나를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돈, 돈밖에 없어요. 돈도 한국 돈 말고 딸라. 달러 아니면 금이든지.

인간의 마음이 짐승이고 썩었다, 부패했다 이런 말을 할 때 사람들은 어디 흉악한 나쁜 범죄자, 흉악범의 마음가짐, 교도소 가 있는 사람, 술 먹고 자기 마누라 개 패듯 패는 그런 것들만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자기를 고상하고 굉장히 고상하고, 고상하고 건전한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서 힘들여 교회 나왔기 때문에 이 고귀한 그동안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지켜왔던 바비 인형 같은 이 고운 마음을 내가 아무리 성경 말씀에 이걸 짐승 같다고? 나 인정 못하겠다.

내가 얼마나 나를 정화시킨다고나 할까요. 탈색, 또는 묵은 때를 제거하는 데 게으르지 않은 삶, 조금만 죄 지었으면 몇 배나 회개하면서 반짝반짝 빛나게 금을 연단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단련한 이것이 곧 짐승이란 모습에 우리는 얼른 동의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인간은 적을 찾는 거예요. 나보다 못한 인간 발견해서 공격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누가 빛난다? 내 자신이 저보다 낫다는 데서 어떤 신앙생활의 힘을 동력을 거기서 뽑아내려는 심보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성경, 그런 것 일체 안 봐줍니다.

지금까지 한 것 다시 정리해봅시다. 인간은 도망친다, 피한다, 도피한다, 숨는다. 그리고 내가 혹시 환란에서 다칠 가능성 있을 때 내 영혼이 마음에 상처 있을 때 내 마음이 복음과 떨어져있다 싶으면 얼른 다른 곳에서 내 영혼을 맡기고 찾아가서 기어이 끝까지 내 영혼은 내가 책임지고 지키려는 심보, 그것 왜 그렇습니까?

나를 지키려는, 앞에 하나 붙이면 좋지요. 나를 건전하게 지키려는 심보, 평생 갑니다. 문제는 이게 나를 건전하게 지킬만한 가치가 있느냐를 누가 이야기했어요? 성령이 이야기했습니까? 이거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아요. 따라서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결론은 ‘나는 나를 모른다’에요. 하나님은 내가 아는 것보다 나를 더 많이 알고 있어요. 나는 나를 몰라요.

나를 모르지만 스타트, 개시 점은 뭐냐? 나는 건전하다. 이걸 개시 점으로 시작해서 교회를 다니든 복음을 듣든 그다음부터는 내가 나를 지키는 쪽이라면 그걸 찾아서 계속 찾아다니는 거예요.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나를 고상하게 지켜내기, 그것 딱 하나밖에 없어요. 당연히 진리 아닙니다. 그것을 신약에 와서는 이런 모습이 마귀적이란 걸 모르지요.

사도 바울은 이걸 뭐로 보느냐? 이걸 ‘저항’, 어떤 저항? 내부 저항. 무엇에 대한? 진리, 이미 확인된 십자가 복음의 진리에 대한 내부 저항이 꼭 이런 모습으로 그 최종의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누굴 만나도 속으로 이야기해요. ‘너 나보다 건전해? 너 나보다 더 순수해? 내가 더 순수해.’ 벌이나 받아라. 거기서 경쟁해서 상대적으로 더 순수하다는 데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으로 아직도 숨 쉬고 살만한 용기를 인간들은 갖고자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정의는 살았고, 정의가 불의를 이길 때 세상은 아직도 살만하다고 하고 싶은 겁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보통 드라마 보면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 하지요. 선은 결국 이깁니다. 아무리 나를 학대해도 쓰레기 같은 남편, 쓰레기는 쓰레기와 결혼해야지. 너 내 남편과 결혼해. 나는 재벌3세와 결혼하고. 대리만족이죠. 바로 내 인생이 저리 됐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대리만족을 해줘야 드라마 시청률 올라가지요. 안 그러면 드라마 볼 이유가 없잖아요.

근데 여기서 연결고리에서 약간은 난해한 건 아닌데 복잡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떻게 진리 대신 돈이냐? 진리 대신 돈이냐 하는 것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계효용의 법칙’ 인간의 욕망은 똑같은 물건을 골라도 첫 번째 물건, 두 번째 물건 할 때마다 그 구매욕망이 뚝뚝 떨어지게 돼 있어요. 하나를 구입할 때마다 뚝뚝 떨어지는 것, 그걸 ‘한계’라 해요. utility ‘효능’ 만족도가 떨어지게 돼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가게에 콜라를 파는데 코카콜라 하나에 천 원이에요. 그런데 바로 옆에 콜라 두 병에 천 원. 같은 가게에요. 콜라 세 개에 천 원. 똑같은 천 원인데 하나, 둘, 셋. 셋을 사겠지요. 근데 조건이 붙어요. 조건은 뭐냐? 이 자리에서 다 먹고 가기. 콜라 하나가 주는 만족도가 100이라면 두 개는 20, 세 개면 마이너스 60 되지요. 이제는 억지로 먹기도 싫어. 120-60=60이니까 세 개 사면 60밖에 안 되고, 두 개 사면 120은 돼요. 하나는 100. 그러면 사람들은 어느 것을 사겠어요? 천 원 주고 두 개를 사는 거예요. 세 개 사면 앞의 콜라 먹는 기쁨까지 다 훼손돼요. 손실된다고요.

그러니까 이것이 심히 인간이 부패한 마음, 짐승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평소의 이런 자기 욕망의 만족도에서 분명하게 소비가 되고 생산 되는 이 경제 활동을 짐승 같은 세상이라고 누가 욕합니까? 욕할 수가 없어요. 자,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세 병을 여기서 다 먹게 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져가셔도 됩니다, 하면 사람들이 하나 사겠습니까, 둘 사겠습니까, 셋을 사겠습니까? 세 개 사겠지요. 집에 가서 하나 먹고 100, 그다음에 이틀 뒤에 먹으면 또 100, 그다음에 먹으면 또 100, 300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그 유명한 분산투자입니다. 하나에다 모든 돈을 투입하는 그 기쁨보다 하나가 투자됐을 때 손익을 계산해보면 약간 불안감을 다른 데다 투자하면 보충이 될 여지가 있으면 분산투자를 하는 거예요. 투자할 때도 분산투자지만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인생이 0살부터 100살까지 있다면 인생에서 젊을 때 돈 좀 번다고 차 몰고 까불지 말고 60부터 100세까지 수입이 없을 때 생각해서 지금 소비 같은 경우에 스스로 조절을 하는 거예요.

내가 60 이후에 직업이 없을 때 대비해서 100을 쓸 걸 60을 쓰면 여기도 동일하게 60내지는 50까지는 버틸 계산을 하잖아요. 이게 뭡니까? 이게 너무나 상식적인 이거는 인간치고 누구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진짜 정신병자, 내가 나중에 돈 더 번다, 이렇게 미친 인간 말고 누구나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이렇게 하지요. 문제는 이게 바로 짐승 같은 생활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우린 경제 활동 따로 하고, 교회 와서 말씀 들으면 되고, 또 집에 가서 경제 활동. 교회 오는 것도 착한 일, 경제 활동도 놀지 않고 열심히 했으니 착한 일, 내 만족도, 내 계산, 내 능력 계산해서 미래를 대비해서 지금 착실하게 힘들지만 돈 모은다는 게 세상에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라도 이걸 나쁘다고 할 사람 없을 것이라고 착각들 하고 있어요.

여기서 이것이 마음이 부패하고 짐승 같은 인간이다. 성경에서 시편 49편이나 예레미야에서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계속 이야기할 때 결국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요령 있고 합리적으로 경제 활동에서 인간이 스스로 그걸 포기할 수 있는 인간이 있습니까? 없지요.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은 마음은 날 때부터 부패했기 때문에 성경에서 뭐래도 하나님이 뭐라 하든 알았습니다, 해놓고는 결국은 자기의 본색은 경제 활동을 통해서 재물 모으기를 통해서 모든 본심을 거기에 다 쏟아 붓게 돼 있어요, 인간은.

그래서 이거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 모른다? 몰라요. 이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지 내가 경제 활동에서 노력해서 밥 먹고 사는 것을 가지고 ‘너 누가 시키더냐?’ 누가 시킬 문제가 아니고 내가 우러나서 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자연스러운 것은 죄 아닙니까? 자연스러우면 그게 진리에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 자연스러운 것이 내 속에 있는 부패한 마음, 짐승 같은 마음, 죄 있는 마음이 그게 자연스러움이 경제 활동이란 이름으로 흘러넘쳐 나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인은 없고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럼 그걸 왜 이야기하느냐? 사람들은 내 자연스러운 것은 나쁘지 않고 그냥 내 자연스러움을 가지고 새로운 하나님의 깊은 말씀 들으면 그 두 개를 합치면 이 내가 천국 갈 수 있다고 이렇게 우기는 겁니다.

그렇게 우기니까 환란이 오니까 어떻게 합니까? 환란이 올 때 내빼기 바쁜 거예요. 누구 챙기고? 자기 자신을 챙기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 내가 너 챙겨줄게.’ 여러분들이 이 문장을 꼭 필히 잊지 말아야 돼요. ‘내가 나의 어미다.’ 영원한 어미에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엄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나의 엄마에요. 아무리 내가 못 됐고 무슨 짓을 해도 다독거려주는 것은 누구밖에 없다? 내 자신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 나를 내가 부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정 못해요. 엄마를 부정해버리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데요?

이 엄마가 누구냐? 어릴 때는 누가 키워줘야 돼요. 갓난애가 경제 활동 못합니다. 경제 활동하는 엄마가 자식을 키우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나요. 반면에 동물들은 완숙된 상태로 나오지만 인간은 미숙한 채로 태어나요. 태어나서 계속해서 스무 살 될 때까지 두뇌가 완성되는 것이 의학에서는 28살, 25살 하고 있는데 그게 정확한 건 아니지만 하여튼 이십 대 돼야 두뇌가, 특히 생각하는 피질이 완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 여기서 엄마가 자식을 키워주잖아요. 엄마가 자식을 키울 때 개 키우듯이 키우지는 않아요. 밥 주고 사료 주고 키웠다고 하지 않습니다. 뭘 하느냐? 말을 해요. 약간 더 신경 쓰이지요. 어렵지요. 엄마의 말이 내 안에서 나의 주체가 됩니다. 인간은 몸이 있고 몸이 자라면 자아가 돼요. 자아는 나에요.

나에서 그다음에 뭐로 나가야 되느냐 하면 이게 주체가 돼야 돼요. 주체란 쉬운 말로 내가 나의 주인공이다. 내 몸이든지 내 머리카락 다 내 거란 거예요. 자아는 뭐냐? 나는 난데 이 정도밖에 아니라면, 주체는 적극적이에요. 그 나를 자아를 누가 케어해야 돼요? 내가 책임져야 돼. 주체. 그런데 이 주체 되면서 개입한 게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엄마로 표현된 부모의 언어가 자아 속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 자아 안에 엄마의 욕망, 아빠의 욕망이 내 안에서 주체를 만들어내요.

커서는 엄마, 아빠한테 잔소리 안 듣지요. 잔소리 안 듣지만 주입된 것은 다 엄마, 아빠 것이에요. 그래서 가정교육을 철저히 받은 아이는 집에서만 아니라 어디 친척집이나 바깥에 가도 그냥 신 벗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신발 나란히 하고, 문 열고 턱 들어오는 게 아니고 뒤돌아서 문 닫고.

비 온다. 우산 쓰고 버스 탔다. 배운 집 아이들은 우산 펼친 채 있는 게 아니고 돌돌 말아서 빗방울이 다른 승객한테 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태어날 때부터 DNA가 그런 거예요. 얼마나 잔소리를 해댔겠습니까. ‘너는 너만 생각하면 안 돼.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 돼야 돼.’ 엄마가 그렇게 한다면 그 엄마는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자기 친정엄마한테 배웠겠지요. 이 주체.

그러니까 자아가 엄마의 욕망, 아빠의 잔소리 있으면 인간은 어떤 모습이냐 하면, 이게 마음이라면 마음을 엄마, 아빠가 늘 꼭 감싸 안은 쪽이에요.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 지시를 통해서 나오는 게 바로 사탄이 인간에게 준 게 나와요. 그게 무슨 체계겠어요? 선악체계. 네가 이렇게 하게 되면 너는 사람 보기에 착한 주체가 되고, 사람 보기에 착한 주체란 말은 그 다른 대타자, 다른 타인, 전능하신 하나님 보시기에도 너는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이 논리에 대해서 사람들은 의심을 할 수가 없어요. 왜? 요모조모 따져도 바른 소리, 바른 소리, 바른 소리의 연결로 된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 점이 뭔가 틀어졌다, 의심해야 된다, 라는 생각이 1도 아무것도 없어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나는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바른 사람이라고 밀어붙이지요.

이 주체로 말미암아 인간은 뭐냐 하면 자립형 인간으로 이제 사회에 나갑니다. 자아에서 엄마가 너는 착하고 너는 반듯한 사람이라고 나가야 되는데, 그래서 주체라 했지요. 나가야 되는데 엄마, 아빠는 내가 착하다 했는데 막상 사회에 나가니까 사회에서 기다리는 것은 뭐냐 하면 사회는 무슨 세계입니까? 누가 요령 있게 돈 많이 벌었느냐, 로 그 사람의 신용도를 결정하는 세상이거든요.

‘나 교회 다닙니다. 믿음 좋습니다.’ 이것 보고 은행 대출 안 해주지요. 당신 아파트 얼마짜리인데 이것 보고 대출 해주든지 하잖아요.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인격 자질 이런 것 고려하지 않고 현재 갖고 있는 소유 재물이 얼마냐에 따라 그 사람이 믿을 사람인지 못 믿을 사람인지 결정하는 게 사회입니다.

그런데 얘가 밖에 나갔다 엄마한테 도로 뛰어들어 와버렸어요. 왜? 나는 착한데 사회가 이 착한 나를 인정을 안 해줘버리네요. 여기서 뭡니까? 균열이 일어나요. 그러면 이 사실을 엄마, 아빠가 미리 간파하고 있지요. 그러면 제대로 된 가정에선 어떻게 됩니까? 바르게 살아라. 그다음에 결과가 뭐냐? 순진한 가정에선 바르게 사는 것이 그 인간의 최종 목적이었잖아요.

그러나 현실적인 가정에선 뭐냐 하면 바르게 살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줘서 너로 하여금 부자 되게 해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바르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부자 되는 그것이 행복이며 거기에 수단으로 바르게 사는 거죠. 그럼 여기서 이 둘 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엄마의 욕망, 아빠의 욕망이 주체가 돼버리면 얘 가정으로 도로 튀어들어 오는 게 아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뭐만 벌면 돼요? 돈만 벌면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나를 사람 취급해준다는 드디어 사회 사람이 돼요. 사회에 훌륭한 신용 있는 사회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빠른 시간에 인정받기 위해서 욕망이 오버했어요. 욕망이 너무 과해서 속도를 너무 내서 사업 벌이다가 망했습니다. 망했을 때 얘가 가정으로 들어올까요, 교회로 들어올까요? 어떻습니까? 일단 교회 들어오고 그다음에 가정 들어오죠. ‘아빠 대출 좀 해줘’ 그건 나중 문제고, 일단은 신이시여 내 인생을 어떻게 전능하신, 전능해야 돼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인생 좀 여전처럼 만회해달라고. 남들이 그동안 나를 사람으로 인정해준 수준만큼 높여달라고 교회 와서 기도하겠지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이게 이 세상 교회에요. 선악체제에요.

인간은 처음부터 범죄인이었다는 것을 어느 인간도 동의 안 하려 해요. 저항이 있어요. 선악체계만큼 이것마저 버린다면 나는 진짜 짐승 같은 인간이 되는 게 싫다는 거예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이 자체마저 버리면 허하다는 거예요. 이것으로 내가 자아를 구성하고 주체를 구성했는데 선악체제 말고 이것 다 바닥나고 날아가 버리면 도대체 내가 나를 구축한 기초 자체가 날아가 버려서 내가 나답지 않은 허망한 또는 허무한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무섭다는 거예요.

성경은 바로 뭘 하느냐 하면 환란이라는 것이 내가 스스로 버릴 수 없는 선악체제를 환란이 와서 그것까지 깨버리는 거예요. 창호지, 우리나라 한지로 만든 창호지는 굉장히 얇아요. 손가락에 침 발라 누르면 구멍 납니다. 대구강의에도 언급했는데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있다면, 인간이라 하지 말고 자아, 사회에 나가면 주체, 주체란 쉬운 말로 내가 주인공이다.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 책임자가 나란 말이죠. 어른 됐는데 뭐 누구 때문에 그러지 말고 책임자가 나란 말이죠. 죽든 말든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나가고 가꾸어나가는 책임자란 말이죠. 책임자인데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이 말 자체도 잘못된 거예요.

세상 일이 왜 내 마음대로 돼야 돼요? 인간은 도대체 이유 같은 것은 완전히 없고요 무조건 내가 잘 돼야 돼요. 그것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욕망입니다. 욕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게 욕망이에요. 내가 욕망을 다스리는 게 아니에요. 욕망이 나를 통치하고 있어요. 충동, 욕망이 정신없이 나를 몰아세우고 있어요. 그러니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붕 떠있어요.

그래서 자아와 주체 사이를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라면, 깊이 상세한 건 아니지만 자아가 주체로 나아갈 때 여기서 환상을 만듭니다. 엄마, 기다려봐. ‘내가 사회에 나가서 이 정도 돈 벌어 엄마 호강시켜줄게.’ 이게 뭐예요? 사회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노력하면 되겠지.’ 노력하면 되겠지, 가정법 ~if지요. 뭐하면 뭐 되겠지, 환상입니다.

이러면 여러분들 불만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인생 그것마저 환상이라면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는데, 이렇게 저한테 달려들고 싶을 거예요. 인생은 우연으로 살아요. 우연의 마주침으로 살아요. 사업을 하던 뭘 하든 간에 노력한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일본 표준말로 아다리라 합니다. 아다리 된 거예요. 행운입니다. 행운은 우연일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헛된 말이 있잖아요. 인생에 기회가 세 번 온다고. 그중에 하나 잡으면 된다고. 한 순간에 붕 뜨는 수가 있단 말이죠. 사업 망해서 짜증나서 술 먹고 나이트클럽에서 블루스 추다가 남자 만나서 잘 됐다, 이런 것. 인생은 어떻다? 한 방에 훅 갈 수 있지만 한 방 붕 뜰 수가 있어요. 우연히 남자 잘 만나서 신입사원이 커피 들고 가다고 재벌3세와 마주쳐서 그 회사 인수하는 것 있잖아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마주침이에요. 어떤 변수가 와서 마주칠지 몰라요. 사거리 교통량이 심한데 갈 때에 차를 타고 가든지 걷든지 어떤 차가 이쪽에서 박을지 모르는데 받히면 방향이 바뀌지요. 그게 내 인생이에요, 지금까지. 이래 받혀서 저리 튕기고, 저리 튕겼는데 받히고. 이게 바로 내 인생이란 겁니다. 거기서 무슨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어요. 인간은 확률적이고 우연적 존재에요. 필연적 존재가 아니고.

그러면 환상은 뭐냐? 환상은 자꾸 나를 필연적 법칙을 세워서 이 법칙의 마지막 골인 지점은 내가 남보다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을 늘 꿈꾸고 있어요. 환타지, 우리말로 하면 꿈이죠. 노래 가사를 하나 또 챙겨왔어요.

(조덕배)

꿈에 어제 꿈에 보았던
이름 모를 너를 나는 못 잊어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지난 꿈 스쳐간 여인이여
이 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바로 그 모습
떠오르는 모습 잊었었던 사랑
어느 해 만났던 여인이여
어느 가을 만났던 사랑이여
난 눈을 뜨면 꿈에서 깰까 봐
난 눈 못 뜨고 그대를 보네
물거품처럼 깨져버린 내 꿈이여
오늘밤에 그대여 와요

그러니까 늘 인간은 환상 속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앞은 시시한 거고 중요한 것은, ‘물거품처럼 깨져버린 내 꿈이여’ 이겁니다. 물거품처럼 깨져버린 내 꿈이니까 그걸 다시 보기 위해서 ‘오늘밤에 그대여 와요’ 눈을 뜨면 사라진 사람, 하지만 꿈꾸면 나타나는 사람, 이게 인생이에요.

인생이 꿈을 꾸는 게 아니고 인생 자체가 꿈이에요. 이 자아가, 주체가 꿈이에요. 근데 인간은 몸은 꿈은 아니지만 몸에서 피어나는 자아와 주체는 꿈같은 겁니다. 허망한 거예요. 그 허망이 뭐로 채워져 있다? 나를 내 몸을 내가 지키는 식으로 채워져 있으니까 이 꿈의 내용은 돈이에요. 돈이라고요. 경제활동이에요. 굉장히 건전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고 하나님 아니라 누가 와도 그건 나쁘다 못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경제활동.

근데 방금 뭐라 했습니까? 그 경제활동조차도 뭐였다? 우연이다, 우연. 그냥 마주침이고 부딪침이에요. 당구공 같아요. 참 이십 대에 눈이 삐었지. 뭐 저런 남자를 만나서. 지금 다시 이십 대로 가보세요. 맨 그 남자 선택하게 돼 있어요. 내가 다른 남자 만났으면 이 고생 안 하지. 그런데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보세요. 그때는 선택지가 그것밖에 안 돼요. 왜? 내 결정은 나의 결정이 아니고 환상이 환상을 선택하는 식으로 인생이 꾸려져 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 인생 전체가 꿈같아요. 자욱한 안개 같습니다. 야고보서 4장에 있는 말씀. 나 홀로 걸어가는 자욱한 안개 같은 것. 그러니까 안개 같은 게 슬프다든지 허망하다가 아니라 그게 바로 진리라는 거예요. 그게 진리였어요. 그러니까 진리를 누가 방해했어요. 내 환상이 방해한 겁니다.

이제 환상은 어디서 오는가? 환상은 언어에서 와요. 언어는 뭐냐? 기존에 있는 의미체계입니다. 이 세상에 의미가 없는데 꿈인데 마귀는 인간에게 이 세상이 의미가 있다고 온갖 의미를 다 집어넣게 돼요. 한국의 축구팀은 4강에 떨어지면 안 되고, 의미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비트코인 있으면 오만 원 이상 올라가야 되고, 투자했으니까. 내가 투자한 영풍제지는 막 올라가야 돼요. 그게 세상에 주가조작의 대상이 되고 폭락할 줄은…….

이 모든 것은 홍콩ELS(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 망했어요, 망했어. 홍콩 펀드 망할 줄 누가 알았어요? 시진핑도 몰랐어요. 아무도 몰랐어요. 왜? 우연이니까. 그럼 올랐다 칩시다. 그래서 갑자기 열 배 올라서 우린 또 요령 부린다고 아까 분산투자했지요. ‘투자 계산하면 안 돼. 땅 사야 돼.’ 땅 샀는데 땅 값이 내려갔다. 어떻게 할 거예요? 안 되겠지요.

그런데 의미체제 전체가 부동산 하락이에요. 안 판다, 안 판다 했는데 계속 의미체제 전체가 내려갈 때는 팔자. ‘대출이자 안 나온다 팔자.’ 이건 내가 선택한 거예요, 의미체계가 나한테 강용한 인생입니까? 강요했지요. 사람이 어리석은 것이 자기 자신의 단편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 자기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남은 허망해도 누구는 진실하다? 나는 나한테 이게 꿈이 아니고 실제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실제조차 진리를 방해하고 저항하는 데서 실제지 진짜 진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진리를 방해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이게 신약에 오면 누굴 방해하는 겁니까? 나의 중심이 예수님 중심을 방해하고 있어요. 비 진리로 작동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이걸 가지고 수상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실을 왜 이제야 알았지 좀 진즉에 알았으면, 하고 그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돼요. 그러면 진즉에 알면 나한테 이익 되는 건 뭐냐? 다시는 뭐가 안 돼요? 다시는 도피하거나 숨거나 도망치는 게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49편 5절에 환란이 나를 어떻게 한다? 나를 에워싸는 거예요. 환란 없는 곳으로 도망할 수 있는 인간 입장이 아닙니다. 환란이 올 때 다만 우리는 그 환란 안에서 어떠한 대처를 하느냐? 그다음에 6절에 나오는 게 뭐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거예요. 부자만 그런 게 아니고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이 결국 자기가 진리가 아닌 티를 내는 것이 내 돈 가지고 그야말로 밥 먹고 살자, 라는 식으로 그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것을 성경은 시편 49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1강의 결론은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모든 것은 말씀대로 돌아간다. 시편 49편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네가 아무리 건전한 척해도 돈 없을 때 보자. 돈 없을 때도 건전한지 보자. 먹을 것 없을 때 건전한지 보자.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에 시험받을 때 성령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쫄쫄 굶겨놓고 만나게 했어요. 거의 죽은 자로 만나게 해줬어요.

그렇다면 10분 쉬고 두 번째 하겠는데, 두 번째 시간에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부자라는 것, 재물이라는 것 그 자체가 과연 나쁜 것일까? 약간의 희망 같은 것?? 진정 그게 그렇게 나쁘단 말이냐, 이런 것. 과연 그럴까? 10분 뒤에 봅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17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8,022 자유게시판 안양20240215a창34장31절(진정한 보상)-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24-02-24
8,021 자유게시판 국문의 현장 - 이미아(2015.10.12) - 최고관리자 24-02-24
8,020 자유게시판 32강-스가랴 11장 15-17절(못된 목자) 240221 - 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24-02-23
8,019 자유게시판 20240220b 부산강의 : [시편]65(49:12)-재물의 효능 시편 최고관리자 24-02-22
열람 ➜ 자유게시판 20240220a 부산강의 : [시편]65(49:12)-재물의 효능 시편 최고관리자 24-02-22
8,017 자유게시판 91강-예레미야 17장 9~11절(존재의 뿌리)240218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4-02-18
8,016 자유게시판 4강-히브리서 1장 8-9절(기름부음)240218-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24-02-18
8,015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귀신의 세상 / 240218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24-02-18
8,014 자유게시판 서울강의20240215b 요한일서 2장 18절(적그리스도들)-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최고관리자 24-02-17
8,013 자유게시판 서울강의20240215a 요한일서 2장 18절(적그리스도들)-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최고관리자 24-02-17
8,012 자유게시판 31강-스가랴 11장 11-14절(가격 매기는 세상) 240214 - 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24-02-16
8,011 자유게시판 461강-YouTube강의(영적 전쟁 이사야 41:10)20240213-이 근호 목사 이사야 최고관리자 24-02-14
8,010 자유게시판 460강-YouTube강의(서열 민수기 16:35)20240213-이 근호 목사 민수기 최고관리자 24-02-14
8,009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20장 43절 (과부의 위치) 240206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4-02-12
8,008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20장 43절 (과부의 위치) 240206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4-02-12
8,007 자유게시판 90강-예레미야 17장 5~8절(시간에서 구원)240211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4-02-11
8,006 자유게시판 3강-히브리서 1장 4-7절(천사의 기능)240211-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24-02-11
8,005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살아난 다비다 / 240211 - 최고관리자 24-02-11
8,004 자유게시판 2월 부산 성경공부 일정 변경 시편 최고관리자 24-02-10
8,003 자유게시판 30강-스가랴 11장 4-10절(목자 시스템) 240207 - 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24-02-09
8,002 자유게시판 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에베소서] 1~9강(재정리)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24-02-07
8,001 자유게시판 459강-YouTube강의(심판의 양편 시편 119:67)20240206-이 근호 목사 시편 최고관리자 24-02-07
8,000 자유게시판 458강-YouTube강의(마음 잠언 6:19)20240206-이 근호 목사 잠언 최고관리자 24-02-07
7,999 자유게시판 20240202b 울산강의-역대기상(27강) 29장 15절 : 불 속의 성전 - 최고관리자 24-02-05
7,998 자유게시판 20240202a 울산강의-역대기상(27강) 29장 15절 : 불 속의 성전 - 최고관리자 24-02-05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