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0장 43절 (과부의 위치) 240206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0장 43절 (과부의 위치) 240206b-이근호 목사
그 다음에 20장 45절에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자, 이 말씀의 특징은 이것부터 먼저 아시면 이 문제는 쉽게 풀이됩니다. 과부는 헌금하는 자가 아니고 과부는 헌금의 수혜자예요. 헌금의 혜택을 받아야 될 사람이에요. 과부 자체가 일종의 헌금함이라고 보면 돼요. 헌금함. 자, 여기서 구약의 율법에 나오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그 수혜자의 삼종세트에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플러스 어떤 분.
이 분은 뭐냐 하면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더불어 함께 계셔요. 사람들은 율법으로 헌금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헌금을 하거든요. 헌금할 때 하나님은 보이는 이 사람을 경유해서 나한테 헌금하라는 거에요. 이 사람을. 이들을 통해서 나한테 헌금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고아와 과부의 생산 또는 출현은 바로 뭐냐 하면은 출애굽 정신의 유효성을 말하거든요. 출애굽 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뜻에서 그 시대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요. 갑자기 남편이 죽는다든지 갑자기 아버지 엄마가 다 죽는다든지. 그리고 모든 것이 거덜 나서 이주민으로 온다든지 하는 이스라엘 속에 유대인이면서도 나그네 신세로 거지 신세로 들어온다든지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은 출애굽 정신에 대해서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그 선언같은 겁니다.
방금 이야기가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나옵니다. 21절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부르짖음이 나오지요. 이 부르짖음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동기로 보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심한 고역과 심한 노동을 할 때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거든요. 그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출동하시면서 모세와 아론을 출동시켰고 그들에게 율법을 준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건져내겠다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 되게 했던 그 삶의 정황 자체에서 그들을 건져내는 동시에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학대하는 그들에 대해서 내가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겠다.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고아와 과부 나그네 이 삼종세트의 뭐냐 하면은 이 땅에서 아무도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일가친척이고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출처, 통로는 다 끊긴 거죠. 사람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하는 지경에서 사람들에게 학대당하는 두 가지 요소.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한다. 모든 것이 다 힘들게 살고 그 힘듦에 대해서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하고 다 끊어졌다. 이 두 가지 요소를 갖추고 메시야가 와요. 예수님이 오신다고요.
예수님에 대해서 누가 도와줬어요? 아무도 안 도와줬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일가친척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어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고아고 내가 과부고 내가 나그네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래야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쪽으로 이 세상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고 거기에 대해서 정당한 심판을 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 좀 더 봅시다. 22장 24절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고아가 아니고 과부가 아니고 나그네 아닌 사람의 허점이 뭐냐 하면은 고아와 과부의 입장을 생각 못하는 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취약점이라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부자의 가장 단점은 뭐냐?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지를 그 아슬아슬함을 본인이 체험을 안 했으니까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다시 누가복음 오늘 본문을 봅시다. 그 체험이 못된 사람이 또 있어요. 그 서기관들 지도자죠. 법을 다루는 사람이 지도자인데요. 지도자가 하는 말이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되어있지요. 서기관들이 건성으로 길게 기도하면서 노리는 것은 과부의 가산을 탐내는 이유가 어떻게 하든지 저들은 고아와 과부 안 될라고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는 입장이에요. 나는 저들처럼 팔자 더러운 인생은 살기 싫다 뭐 이런 거죠. 누구 인생 조질 일 있나. 내가 왜 뭐가 부족해서 내가 망가진 인생을 살겠어. 나는 그런 인생 살기 싫어. 그러면 그들이 인생 살려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과부의 가산을 탐을 내고 그걸 법적으로 법이니까 법적으로 약한 자니까 모르지요. 그걸 빼앗는 겁니다. 서기관들뿐만 아니고 지도자들 다 그렇지요.
자,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왜 하나님께서 이런 불의를 보고 왜 가만히 있느냐? 왜 하나님께서 가만 두시느냐? 서기관들 목을 치던지 하지 왜 가만 두시느냐. 이 서기관들 못된 사람이 있어야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생성될 게 아니겠습니까. 듣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 기분 되게 나쁘지만. 네가 있음으로서 세상 심판할 수 있는 근거 마련이기 때문에 너 좀 참아라. 팔자려니 하고 생각해라. 내가 값아줄께. 문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자기 신세에 대해서 이걸 흔쾌히 하나님의 뜻으로 안 받아들인다는 게 문제에요. 나도 언젠가 떵떵 거리며 살겠다는 그런 의도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가난하다 한마디로 그 당시에 최빈곤층이잖아요. 최빈곤층의 소망은 이것보다 빈곤할 수 없을까? 이걸 소망하지 않아요. 대를 이어서 내 자식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이런 거지 자식 불러놓고 자식아 우리 가난하지. 어머니 너무 가난해요. 다 내 덕인 줄 알아라 이것아. 뭐 이렇게 자식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있어요. 어디? 21장.
21장 가난한 이 과부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하고 작별하는 것을 그렇게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겁니다. 마지막 생활비에요. 이것 다 내면 드디어 나는 더 이상 나한테 낼 게 없어요. 내가 낼 게 없으니까 더 이상 내 멱살 잡고 닦달낼 게 없어요. 다 털었으니까. 사렙다 과부 비슷하게 엘리야 시대 때. 마지막 남은 밀가루 그거 먹고 죽겠다고 아들하고 같이 먹고 죽겠다 하는데 그걸 낼름, 마지막 아름다운 최후의 파티도 그걸 낼름 엘리아가 뺏어 먹잖아요. 그걸 뺏어 먹어요. 아 독하지요. 제대로 죽어라 이 말이지 제대로. 죽는 척 죽는 폼 하지 말고 죽을려면 제대로 죽어라. 이거 과부 제대로 죽는 거예요. 그 서기관들이 활동을 어디서 주로 활동을 하느냐. 랍비들 서기관들 어디서 활동하는가? 그 당시에 성전이 있어요. 성전 구조가 이건데 성전 중간부터 그리면 이렇게 돼요. 여기 지성소 플러스 성소. 바깥뜰에 물두멍 있고 제단이 이렇게 있어요. 계단 8개 있고요 이 바깥에 행각이 있어요. 행각. 이쪽이 바로 뭐냐 하면은 이게 이스라엘의 뜰이에요. 이스라엘의 뜰. 이스라엘의 뜰이 됩니다. 뜰이 있고 계단이 있고 이걸 더 늘려서 이게 뭐냐 하면은 여인의 뜰이에요. 여인의 뜰. 남자 여자 다 갈 수 있는데 여자는 여기 까지만 가는 거예요. 여기 여인의 뜰에 보면 이렇게 행각이란 게 있어요. 행각은 뭐냐 하면은 복도식 칸막이 방들이 여기 있어요. 여기에 시니어 랍비들, 고참 랍비들이 여기 있고 여기 솔로몬 행각이 있어요. 솔로몬 행각에서 오순절 성령이 일어났던 그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 뜰이 되요. 한 뜰이 되는데 이 뜰 바깥에 이방인의 뜰이 있어요. 이방인의 뜰. 여기 있고 진짜 바깥에 있고. 여기 여인의 뜰에 13개의 헌금함이 여기에 마련되어 있어요. 13개 있습니다. 이런 법을 누가 정하느냐 하면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다 정해요.
13개의 헌금함에 번호가 매겨져 있어요. 1번은 초태생의 처음 난 초태생의 속전을 거기에다가 헌금함에 넣습니다. 초태생의 속전.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 할 때 바로 여기 여인의 뜰까지 가서 우리 아들 장자 태어났습니다 헌금하는 그 헌금함. 2번째가 산모의 정결. 레위기 12장에 보면 남자를 낳으면 33일 여자를 낳으면 66일 동안 더러워지고 거기에 번제로 양이나 비둘기를 드리는데 양, 비둘기 번거롭잖아요. 그걸 헌금으로 바꿔서 헌금하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3번과 4번 헌금은 번제, 속죄제. 비둘기를 대용해서 드리는 헌금을 3번 4번 헌금함에 집어넣습니다. 5번은 제단에서 사용되는 목재, 땔감을 구입비용을 5번 헌금함에 넣어요. 6번은 분향단에 사용되는 헌금을 거기에 넣습니다. 7번 헌금함은 성전의 금잔을 제조하고 또 새로 바꾸는데 필요한 비용을 7번 헌금함. 8번 헌금함은 속죄제 제물을 드리고 그 남아있는 비용을 거기에다가 드리는 것. 9번 헌금함은 속건제 제물을 드리고 남은 비용을 넣고 10번 헌금함은 비둘기 제물을 드리고 남은 돈을 거기에 넣어요. 11번은 나실인, 자원해서 맹세하는 것, 나실인 내 몸을 드리겠습니다 하는 그때 서원하면서 넣는 비용. 12번은 문둥병자가 정결한 후에 넣는 돈. 문둥병자 정결한 게 이 모퉁이에 보면 문둥병 이렇게 예식하는 게 있어요. 물 뿌리고. 13번 하는 게 바로 오늘 과부가 드리는 감사헌금에 있는 겁니다. 그 헌금함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 헌금함은 뿔처럼 생겼어요. 뿔. 헌금함이 이상하지요. 오늘날 교회 헌금함이 아니고 입구는 좁고 도착지점은 넓어요. 한번 던진 헌금 도로 못 빼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법을 했던 이 자들이 13개를 해 놓고 뭐를 감시하겠어요? 헌금이 제대로 탁탁 들어가는지를 지켜보는 역할이 그들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일이 자기들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 재산을 착복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그들은 상상도 못해요. 신명기 14장 한번 봅시다.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29절에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일으키든지 어떻게 해서 어떤 집안을 작살을 내요. 박살을 내버린다고요. 다른 집안은 아빠 엄마 하하 호호 행복하게 웃으면서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하는데 그 집안은 모든 게 작살나가지고 세상적인 어떤 기쁨이라든지 남이 누리고 있는 즐거움을 못 누리는 그러한 집구석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럴 때 그 당사자가 얼마나 자기 인생을 혐오하고 좌절하겠습니까. 이거 뭐야 이거 내 인생. 왜 나는 남들처럼 살지도 못해. 이거 뭐야. 나만 왜 이 지경이야. 얼마나 자기 인생을 서러워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차이 나잖아요. 그것도 나쁘게 차이 나잖아요.
그런데 여기 신명기 16장 11절에 보면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함께’라고 되어있죠. 함께. 함께. 사람이 재정적으로 차이가 나게 되면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가 안 되지요. 노는 바닥 수준이 다른데 무슨 ‘함께’가 되겠어요. 수준이 다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 하나하나가 이상하게 우리가 못 지키는 말씀을 줘요. 그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에. 그냥 건전하게 살면 건전한 줄 알고 있어요. 내 인생의 어떤 인기 같은 것, 내 인생에 흠을 내는 것이 끼어들지 않기를 바래요. 내 인생에. 내 인생의 가치가 힘드니까. 친척이 있는데 다른 친척 다 잘 사는데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다 망해버리는 친척이 있다면 우리는 그 친척을 설에 와서 형님 제가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하면 온 사람 내보낼 수는 없고 가서 떡국이나 먹고 가라. 말썽부리지 말고. 뭐 얼마면 돼? 돈 얼마 뜯으러 왔어? 좀 노골적인 사람은 속으로 그렇게 이야기할 거고. 맛있는 거 좀 내놔라. 고스톱 친다고 하하 호호 난리고 끼어주지도 않고. 학폭이 따로 있습니까 그게 학폭이지. 배제시켜버리죠. ‘함께’가 안 되는 거예요.
12절에 보면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렇게 되어있다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앞장 세워서 너희들 여전히 출애굽 정신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이 날라가버렸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자, 출애굽 정신이 뭐냐? 그렇다면 출애굽 정신이 뭐냐? 14절에 보면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함께 나오지요. 출애굽 정신은 이겁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이게 출애굽 정신이에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처럼. 출애굽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거기서 애굽에서 빠져나올 힘도 없었고 재주도 없었고 단합도 안됐을 뿐더러 애굽에서 나온다는 자체가 인간의 아이디어가 결코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그 과부는 내가 헌금하면 마지막 생활되는 것은 이거는 본인의 의지가 아니에요. 출애굽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는 나의 의지에 의해 사는 게 아니다. 이 정신입니다. 나는 내 뜻에 의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이걸 달리하면 사는 게 기적이다. 여기 앞에 하나 더 붙이면 더 좋지요. 출애굽 정신 안에서 사는 게 기적이다. 그냥 사는 건 기적이 아니에요. 출애굽 정신 안에서 사는 게 기적이에요. 출애굽 정신이라는 그 위치, 아까 첫째 시간에 위치 이야기했지요. 그 위치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걸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 사는 겁니다. 내가 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보호를 받고 용서를 받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게 이게 기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듯이 사랑이라는 것은 전제가 뭐라고요? 누굴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요? 사랑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내놓을 게 없으니까. 개코도 내놓을 게 없으니까. 심지어 내놓을 게 없기 때문에 사랑을 안 해도 할 수 없어요. 왜? 내가 뭐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맹탕 고아와 과부 신세로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그 정신이에요 그 정신. 따라서 그 정신 모일 때에 땅 좀 있고 잘 산다. 위에 진짜 진면목은 네 옆에 있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진짜 네 모습이지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전혀 내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신명기 8장 한번 봅시다. 8장 12절에서 14절까지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할 때 우리 인간은 생각해요. 옛날에 참 고마워했었습니다. 다 지나간 옛날 이야기입니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그 옛날이 옛날이 아니고 지금 똑같은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똑같은 하나님이. 건져내주셨다 끝이 아니고 건지고 건지고 건지고 계속 건져주시는 거에요. 옆에 누굴 두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두고 계속 건져내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뭐냐?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데 네 마음이 교만하여”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고 집을 짓고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가 뭐에요? 너는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네가 어렵게 사니까 하나님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하지 내가 그 말에 안 속아 넘어가. 네가 잘돼 봐. 잘되고 야 농사 너무 잘됐다. 창고 크게 짓자. 자기가 자기하고 작별을 안 해요. 이별은 안 해요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한 20년은 간다. 보험 5개 넣어놨지. 펀드 7개쯤 넣어놨지. 걱정하지마라 할 때 출애굽 정신이 뭐냐? 오늘밤에 2시47분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네가 모아둔 저것이 다 누구 것이 되겠는가? 이 어리석은 자여. 출애굽 정신을 모르는 자가 어리석은 자에요. 철학박사, 의학박사 뭐 문학박사고 물리학박사라도 어리석은 자예요. 오늘 밤을 모르면 오늘 밤에 데려가면 모든 것이 무효가 된다는 것. 그래서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어요? 다윗의 자기 본 모습은 뭐라고요? 무덤에 내려가서 내 시신이 썩는다. 그게 네 모습이다. 이게 바로 ‘함께’입니다.
그 다음에 신명기 26장 12절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십일조를 줄 때에 마음 자세가 땅이 없어서 생산물이 전혀 없다는 그 상태가 나의 본디 나의 위치였다는 거예요 내가. 땅이 없으니까 생산물이 없으니까 레위인도 자기 땅이 없어요. 고아와 과부 나그네 역시 자기 땅이 없고요. 그러니까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도와주라는 의미가 아니고 위치를 바꾸라는 거예요. 땅 없어 자력으로 살수 없는 저 모습에서 누가 함께 있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면 그러면 가진 게 있어서 나 혼자 사는 내 쪽은 하나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안 계신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고아와 과부 나그네 찾아가가지고 도와주세요 뽀빠이! 하듯이 도와주세요 하면서 내 가진 것을 주는 거예요. 이거 내 것 아니고 당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말은 다 줬다는 뜻이에요. 다 주고 난 뒤에 제발 10분의 9만 좀 주세요. 이게 십일조거든요. 다 주고 난 뒤에 10분의 9는 받는 거예요. 그러면 9배나 더 받네. 만물의 위치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있다면 우리는 10분의 1을 가졌어도 만물에 종속된 입장에 있습니다. 종속이에요 종속.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는 예수님이 맏아들 되는 거예요. 맏이라고 하는 것은 맏이 있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 맏이에 철저하게 종속되는 겁니다. 그 맏이에게 일어났던 그 맏이가 얻게 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같이 공유하게 되어있어요. 합체하는 겁니다. 철저하게 주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오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것 가운데 가장 아무것도 없는 게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십일조예요. 예수님이. 예수님이 십일조이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는 10분의 9를 얻어먹고 있는 거예요. 구제가 아닙니다.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반대로 도와주세요 하면서 내는 거예요. 도와주면서도.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 궁금해 미칠 거예요. 요즘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어디 있습니까? 할 거예요. 없어요.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이 신명기 문항을 옛날에 바리새인들이 이걸 했거든요. 바리새인들이 할 때 법적으로 했어요. 법적으로 하니까 소위 삥 뜯는 거죠. 삥 뜯는 것.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우리가 아니면 너 굶어죽어 라고 하는 그것이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인간은. 누가 누구를 도와주면 하나의 상위 위치, 그 받는 사람은 자기보다 서열상 낮은 위치가 되어버려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래서 문제 되는 거예요.
구제할 때 뭘 불지 말라고 합니까?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지요. 아까 헌금함이 어떻게 생겼어요? 나팔이죠. 나 구제했다. 옛날에는 십일조 모아서 구제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고아와 과부 나그네 그 사람들이 어디에 종속되겠어요? 반대로. 자기한테 구제비 주는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 말을 듣겠어요? 안 듣겠어요? 들을 수밖에 없지요. 안 그러면 자기 굶어죽으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된 구제도 없을 뿐더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도 없어요. 왜? 돈 있는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으니까. 주님만 쳐다보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이 시대에 없어요. 그래서 이 바리새인 지나고 난 뒤에 유럽이 기독교 국가가 됐잖아요. 기독교 국가는 18세기 산업문명 이 구제를 누가 하느냐 하면은 전에는 교회에서 했어요. 십일조를 걷어서 했는데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중세 때 성직자들이 아까 삥 뜯는 것처럼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삥 뜯은 거 가지고 토지를 사버리니까 그걸 봉건주의라고 합니다. 모든 토지가 피라미드 형식으로 되어 가지고 토지 가진 사람이 대장질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중세 지나고 난 뒤에 페스트 일어나고 십자군 운동 이후에는 성경 계약이 날라가버리고 인간 대 인간의 계약으로 나가요. 존 워커의 사회계약설입니다. 뭐냐 하면은 그게 민주주의의 시초지요.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의논하고 산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옛날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에서 민주주의 제도 했던 그 방식을 도입하는 거예요. 그럼 구제는 누가 하느냐? 국가가 맡아서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스웨덴 북유럽에서 최초로 시도한 바로 복지정책입니다. 복지정책에서 이걸 시도하는 거예요. 최저생계비. 시급. 상향 조정. 고아와 과부를 없애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대에 고아와 과부가 없는 거예요. 없어요. 21장에 나오는 과부. 마지막 생활비를 무슨 용도로? 내가 나와 작별하는 용도로 사용해버리는 거예요. 왜? 그것이 바로 나는 사람 보고 사는 게 아니고 주님 말씀 보고 산다는 것. 그 말씀과 이 과부는 자기 마지막 생활비를 바꿔치기한 겁니다. 그게 구약에도 나오지요. 룻 나오지요. 룻. 시어머니가 며느리 보고 시켰어요. 남자 꼬실 때 그렇게 꼬시는 거 아니다 이렇게 꼬시는 거다. 잘 때 밑에서 이불 살살살 해서 올라가라. 거부할 남자 아무도 없다. 그래서 까꿍 이렇게 해라. 까꿍. 누구세요?!!! 룻이 하는 말이 나 율법인데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한 그 조건이 충족된 율법이에요. 그러니까 가만 있어봐라 생각 좀 해보고. 우리 율법이 있으니까. 나보다 선순위가 있으니까 물어보고 포기한다하면 내가 너의 집안에 돈 다 물러주고 너 내 아내 되어라. 그래서 룻이 결혼했잖아요. 그 율법의 정신에서 뭐가 나오느냐? 다윗 언약이 나와요. 그러니까 룻이 그 집안을 살린 거죠. 엘리멜렉 집안을 살린 거죠. 이것은 뭐냐 하면은 그 시대가 사사시대였어요. 율법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는 시대에 주님의 율법 언약의 지속성은 인간은 멈춰도 주님은 멈추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 누구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 자기 의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때 사정이 룻의 사정을 그렇게 몰아세운 거예요. 몰아세운 거예요. 그리고 그 룻이 이삭을 줍는데 하필 그 밭이 보아스 밭이란 말이죠. 하필이면. 그것도 율법이 살아있다는 뜻이죠. 아 이게 율법은 안 지키지만 율법은 살아있어요. 오늘날 시대에 말씀은 안 지키지만 말씀은 살아있어요. 세상에 어떤 보화보다도 이 말씀과 자기 자신을 바꿀 줄 아는 사람, 이게 바로 21장에 있는 이 과부입니다.
그 다음에 신명기 27장을 봅시다. 19절. 아까 구제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당연히 줘야 돼요. 왜? 하나님이 거기 계시니까. 신명기 27장 19절에 보게 되면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말씀이 성취가 될려면 쉬지도 않고 객이나 고아나 과부가 계속해서 발생 돼야 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한 게 고아나 과부나 객은 왜 생깁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골고루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다 잘 살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왜 고아와 과부 불행으로 뒤집어씌운 그런 가정이 왜 태어나는가? 그 점을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이거는 어려운 게 아니에요. 제가 수백 번 이야기한 겁니다. 율법과 더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지요. 율법과 더불어 나왔습니다. 나와서 시내산에서 율법 줬잖아요. 그렇다면 어느 것이 주가 되느냐 하면은 율법이 주가 되고 이스라엘은 율법에 종속되는 겁니다. 율법이 주가 되고 이스라엘이 종속됐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어떤 조건이냐 하면은 땅이 없어야 돼요. 땅이 없다. 애굽에서 나올 때도 땅이 없었고 광야에 지날 때도 땅이 없었지요. 그러니까 남들 보면 거지떼들이에요. 광야 지날 때. 사람들은 우르르 가긴 가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애굽에서 가지고 온 가축이나 패물 같은 게 있는데 그런 것들도 어디에 냈습니까? 성막 짓고 하는데 다 내놨잖아요.
이거는 하나의 뭐냐 하면은 모험이에요 모험. 모험이고 일종의 투자 정도가 아닙니다. 투자는 수익을 기대하죠. 투자가 아니고 이거는 그냥 투기에요 투기. 다 던져버리는 거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만 계시면 주의 이름만 계시면 우리는 없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없어도 괜찮다. 그래서 이 상태를 유지하면서 어디를 가느냐? 약속의 땅에 가요. 약속의 땅. 그런데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가서 개판 됐습니다. 뭐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약속의 땅 같으면 약속의 땅을 바라봐야 되는데 약속은 떼버리고 뭘 봤습니까? 땅을 본 거예요. 땅을 보니까 자기의 근본 된 토지가 마련되는데 땅을 뭐라고 하느냐? 기업 또는 상속분이라고 합니다. 레위기 25장 한번 봅시다. 레위기 25장 55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약속의 땅에서 계약조건이 뭐냐 하면은 땅 소유자가 누굽니까? 여호와가 땅 소유자에요. 땅 소유자고 거기 품꾼은 누구에요? 품꾼은 누구냐 하면은 이스라엘이죠.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 비유 있습니다.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겼는데 농부들이 상속자가 오니까 죽여버리고 이거는 자기 땅 된다 했지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의 특징은 천국을 가도 내 땅 없어요. 천국 가도 내 땅이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천국 갈려면 내 소유가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에요. 내 것이 없다는 것이 벌써 실습이 돼야 돼요. 실습이 돼야 된다고요. 내 것이 없는 거예요. 내 것이 없고 품꾼이 되니까 주님께서는 거기서 농사를 짓게 합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농사를 짓게 되면 자동적으로 농사 짓게 됩니까? 아니면 아무리 열심히 농사지어도 농사가 안 되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아무리 해도 농사가 안 되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땅 자체가 창세기 3장에 아무리 그들이 수고를 해도 저주가 있기 때문에. 그러면 저주를 커버를 해줘야 되요. 제거를 해줘야 된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은 그들 가운데 성막이 있어요. 성막 가운데서 땅 없는 레위인들이 제대로 제사 언약을 유지가 되게 되면 땅을 슬금슬금 갈아도 고구마 이만큼, 대충했는데 포도가 들지를 못할 정도로. 그런데 내가 한 노동이 대가가 아니라 신기함이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럴 때 약속의 땅의 백성들은 땅에 초점을 하지 말고 약속이 계속해서 유효하게 지속되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돼요. 이 약속은 뭐냐 하면은 신기함입니다. ‘신기함’. 이걸 신기함을 이렇게 표현하면 제일 좋지요. 나는 진즉에 죽어야 하는데 왜 살지? 자기 사는걸 오히려 의무시할 때 이 사람에게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신기함이 포함되어 있지요. 그런데 여기 약속의 땅이잖아요. 이 말을 고쳐야 돼요. 나는 왜 말씀을 못 버리고 살지? 하나님의 약속을 나는 왜 못 버려. 세상 사람들 성경 이거 던져버립니다. 불신 집안에 예수 믿으면 성경책 여러 권 찢어져요. 불쏘시개 막 들어가든지. 성질 드러운 형이 막 네가 취직은 안하고! 이러면서 시집도 안가고 이거 쳐다보면 시집 보내주나! 막 이래가지고. 나는 솔로나 나가라. 핍박하지요.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래야 돼요. 우리가.
그런데 신기한 게 뭐냐 하면은 말씀이 읽혀져. 전에는 말씀 보면 잠이 왔는데 전에는 말씀을 읽었잖아요. 이제는 말씀이 들어와요. 말씀의 위치가 책에 있는 게 아니고 위치가 내 속에 위치하고 있어요. 말씀이 자꾸 내 속에 위치하고 있는 거예요. 졸지에 나는 이제는 돈 있는 고아요 집 있는 고아요 한달 수입 2천만원 되는 나그네. 내가 너무 거창하게 했나. 돈은 많고 집도 넓고 다 좋은데 나그네예요. 이 땅의 나그네고 주님 없이는 못 살고 주께서 계속 신기함을 주는 겁니다. 아버지 돌아가셨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 아버지 돌아가셔서 나는 어떻게 살지! 이게 아니고 아버지가 문제가 아니라 이 말씀이 있다면 가족들 섭섭한 이야기지만 아버지고 뭐고 누구고간에 이 말씀이 있다면 그거는 말씀이 말씀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런 나로 하여금 말씀 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로 살기로 작심하게 하시고 이렇게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애가 성적이 내려간다. 전에는 죽어라고 패고 했다만은 공부 뭐 슬슬해라 뭐 2등할 수도 있지 뭐 이런 거예요. 대충 2등 계속 유지해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 거예요.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전혀 신비롭지 않아요. 그건 남들 다 하는 거예요. 돈 있어서 하는 건 남들 다 하는 겁니다. 돈 없어 그런 거 말고 다른 플러스 알파. 여분의 것. 그게 뭐냐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약속이에요.
자, 끝으로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이 땅을 좋아할 수밖에 없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약속의 땅에 갔을 때에 그들은 이것이 황폐했고 그들은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약속 더하기 약속의 땅 더하기 플러스 여기 사람 있잖아요. 사람은 있다? 없다?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던 거예요. 신약에 보면 약속의 땅에 부합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시체 돼야 되고 썩어야 마땅합니다. 주께서는 신약에 다 이루심으로 구약에 약속한 것을 여기에다가 채우지요. 채워서 약속 때문에 너는 이곳에 와 있다. 이 약속의 땅이 바로 천국입니다. 과부는 이걸 알았던 거예요. 과부로 헌금하는 자가 아니라 실은 뭡니까? 헌금을 받아야 될 사람이에요. 받아야 될 사람을 서기관이 삥땅을 다 해버렸지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과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심판 받을 마지막 모습이라는 겁니다. 누가 나 안 도와준다고 섭섭해하지 마시고 본인이나 잘하세요. 우리 자신으로 주님이 말씀과 함께 있어서 출애굽 정신을 유지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예수님처럼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말씀, 돈 되는 것도 아니고 팔자 피는 것도 아닌 그 말씀이 우리의 생명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