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0장 27절 (몸의 용도) 231219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0장 27절 (몸의 용도) 231219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시간이 세 종류의 시간이 있어요. 하나는 부활을 위한 창조, 시간 창조가 있습니다. 부활을 위한 시간 창조가 있고 그 다음은 사라지기 위한 시간이 있고 그 다음에 죽이기 위한 시간이 있어요. 살아있는 시간을 아이온이라고 하는데 이건 복잡하니까 안하고요 뭐냐 하면은 이렇게 구분하면 됩니다. 인간이 하나의 개인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흔히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부활을 위한 시간은 복음을 위한 시간이고 사리지기 위한 시간은 종교 시간이고 죽이기 위한 시간은 과학, 철학 시간인데 이렇게 구분하면 되는데 보통 인간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만 있고 현재 되자마자 즉각적으로 미래와 과거로 흩어지는 시간. 매일같이 현재만 있어요. 매일같이 현재.
오늘이 12월 19일이죠. 18일은 과거가 되고 20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미래가 되겠지요. 그런데 내일 20일이 되면 20일은 현재고 오늘은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산꼭대기에 올라가게 되면 항상 이렇게 갈라지는 것, 지금 이전의 것은 과거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미래. 이게 보통 인간들이 시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종교 시간은 뭐냐 하면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통합했다고 치고 한 덩어리로 생각하는 시간, 이게 종교의 시간이에요. 종교의 시간. 그래서 불교 같은 경우에는 이 시간에서 탈출을 시도합니다. 시간에 갇히면 계속해서 이 세상에 생로병사 고생만 하잖아요 고생만. 고생만 하기 때문에 제일 좋은 방법은 시간 자체에서 벗어나면 되겠지요. 그들은 그걸 해탈이라고 하는 거예요. 해탈.
참 아주 사기를 치고 있어요. 내가 보기에 바보 같애. 왜 바보냐 하면은 해탈 또는 탈출 그리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할 때 할 때 아무리 용어를 갖다가 붙여도 자기 자신은 어떻게 됩니까? 잊을 수가 없잖아요. 자기는 매이기는 마찬가지인거에요. 자기한테 매이기는. 아무리 신학교에서 신학교수가 되고 아무리 해도 뭡니까? 본인이 사라지지를 않아요. 본인이. 본인이~~~~그 사람도 사라지지를 않아요. 해탈하는 것.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구원이나 따지고 보면 아까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나 전부 다 뭡니까? 누구 이득 챙기는 거예요? 자기 이득 챙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말한 것처럼 자기 혼자 살아가는 거죠. 이 땅의 특징이 모든 취미 활동이 전부 다 무슨 취미냐 하면은 자기 혼자 재미있는 취미들이에요. 전부 다. 탁구를 치든지 난을 치든지 안 그러면 축구를 하든지 등산을 하든지 따지고 보면 바둑을 하고 장기를 두고 전부 다 요트를 하든지 전부 다 자기 즐거운 거죠. 자기 즐거운 것. 돈 벌어서 나중에 유럽여행가야지. 유럽 여행가면 누구하고 갑니까? 자기 혼자 즐겁지요. 어떤 노력해도 심지어 취미 중에 하나가 복음 연구하기, 교회 바꾸기도 포함 돼요. 백날 해봐야 내가 나하고 노는 거에요. 자기 이야기 인간 이야기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 말이죠.
죽이기 위한 시간은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현재만 있다는 이 시간이 바로 과학, 철학에서 말하는 시간입니다. 이 점을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상대성 원리라 하는 거예요. 상대성 원리는 공간 따로 시간 따로 있는 것을 공간+시간을 같이 해서 이것을 시공간이라고 같이 다뤄버려요. 시공간을 같이 다뤄버리면 절대적인 것은 뭐냐? 빛의 속도, 속도를 절대화 시켜놓고 꽉 묶어놓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시간도 달라진다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물질이니까 물질에 중력이 작용하게 되면 시공간이 이렇게 벌어지는 거예요. 벌어지게 되면 이쪽은 산이고 여기는 산 지면이라면 산에서 지내는 것이 지면에서 지내는 것보다 빨리 늙어요. 먼저 늙어요. 산 위에 시계 놓고 산 밑에 시계 놨을 때 어느 것이 빨리 갈까요? 산 위의 시계가 빨리 가요. 같은 시계인데 빨리 가요.
우주선에서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 7초 이렇게 7초 가지만 달리는 우주선에서 7초 가지면 여기 멈춰 있는 집에서 보면 1초 2초 해서 이게 10초가 되요. 10초가 된다고요. 그러니까 달리면 젊게 되고 집구석에 앉아있으면 늙어요. 왜? 더 많은 시간이 동일한 간격에 더 많은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더 빨리 늙고 움직이면 운동하고 하면 그 시간이 짧아서 그 만큼 우리가 젊게 되는 거예요. 이게 과학적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뭐냐? 오직 측정하고 있는 나, 내 위치에 따라서 시간조차도 달라지는 거예요. 절대로 자기 이야기가 뺄 수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 이야기 뺄 수가 없어요. 종교 이야기는 시작과 처음 나중 전체를 다 보고 난 뒤에 이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 무슨 세계 있느냐 이게 종교에서 나온 아이온 전체 시간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하는 시간 복음적 시간은 뭐냐 하면은 부활을 위한 새로운 창조에요. 새로운 창조. 자, 새로운 창조란 누구 시간이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의 시간이에요. 그걸 아까 언약의 시간, 예수님 자신의 시간이에요. 예수님의 자신의 시간은 철저하게 누구를 배제합니까? 인간은 배제해버려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만 죽었어요? 또 누가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이걸 달리하면 이미 모든 사람이 죽었어요. 죽은 것을 십자가에서 확인시켜주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인간은 살아도 이미 죽은 것이다. 죽은 인간이 시간을 논해? 그런다고 사냐? 죽은 인간이 종교를 논해? 해탈? 인간은 죽어야 돼. 죽는 게 운명인데 뭘 죽은 자가 어떻게 사는 방법 없겠습니까? 그 자체가 그만한 권리가 인간에게 없다는 겁니다.
그걸 누가 이야기하는가? 율법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대를 끊어놓기 위해서 대를 잇는 인물의 등장이에요. 대를 끊어놓기 위해서. 집안에 여자 하나 잘못 들이면 난리 나는 거예요. 사실은 잘 들어온 거죠. 집안에 여자 들어와서 대를 끊어놓는 거예요. 기존의 아담에 속한 대를 죽은 걸로 그것도 이미 죽은 걸로 예수님 시간으로 봤을 때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해버립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죽은 육신의 족보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부활의 족보가 나오는 방법을 사용해요. 율법이 작동해서 이게 부활의 노선으로 따로 빠져나와요.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룻기. 엘리멜렉이 자식 없이 죽었어요. 아들도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자, 약속의 땅에 있는 엘리멜렉의 땅은 누가 상속할 것인가. 누가 상속할 것인가. 정답은 다윗이 상속하고요 더 정답은 다윗 속에 있는 예수님이 상속해요. 예수님이 날라오는 율법을 온 몸으로 받고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영, 무슨 영? 부활의 영으로서 천국을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 쪽에서 날라오는 율법이 있어요.
아까 했지만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자, 이 말을 다시 풀이하면 질문의 취지가 뭐냐 하면은 다윗이 먼저 태어났느냐 아니면 다윗의 자손이 먼저 이 땅에 태어났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러면 먼저 태어난 것은 다윗이 먼저 태어났으니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중에 태어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을 다윗 있게 하는 주가 되겠느냐 라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답변 못하지요. 왜 답변 못하는가? 인간은 기껏 인간이 이해하는 나중에 늙으면 죽는다는 그 시간과 그걸 대비해서 하나님의 시간, 시작과 끝 창조와 마지막의 그 모든 시간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시간이 거꾸로 우리 시간 속에 진짜 부활의 시간이 거꾸로 차고 들어온다는 사실을 이거는 인간에게 이해 못하죠. 인간은 이해 못합니다. 인간은 감당 못하지요. 성령이 온다는 것은 인간이 감당 못하는 것 내가 감당 못하는 것을 감당케 해주시기 위해 성령이 오신 거예요.
인간은 주의 말씀을 인간 힘으로 감당 못하는 이유는 아까 조건이 뭐냐 하면은 어떤 경우라도 잃어버리기 싫어서 그래요. 나 잃고 하나님이 잘한다는 것은 용납 못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물을 테니까 답변을 해보세요. 기본적으로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지은 것을 벌한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과연 타당한 이야기입니까? 인간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벌한다 할 때 이게 옳은 이야기냐 말이죠. 이게 왜 질문거리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왜 하나님 당신이 뭔데 왜 우리를 벌해. 왜 하나님이 뭔데 우리를 벌하느냐 이 말이죠. 우리가 죄가 있다 안 있다를 왜 하나님 당신이 왜 그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 죄 지어도 내가 알아서 죄 짓고 안 지어도 내가 알아서 안 짓는데 왜 외부 존재가 왜 내 죄에 대해서 거론하느냐 이 말이죠. 평소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왔습니까? 여러분 죄 지면 남들에게 내 죄 벌하라고 남 찾아간 적 있어요? 없지요. 그렇잖아요.
지금 제가 뭘 문제 삼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사법체제 자체가 정당하냐를 문제 삼는 거에요. 하나님의 사법체제. 하나님의 사법체제가 과연 정당하냐 이 말이죠. 정당하냐. 카프카라는 독일의 문학가가 일찍이 폐병 걸려 죽었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어떤 사람이 자기를 호출해가지고 재판 받으러 오라고 하는 거예요. 재판 받으러 갔는데 문이 안 열려요. 아무리 기다려도 재판 받을 기회조차 안 줘요. 거기서 묻는 것은 이거에요. 작가가 묻는 것은 어느 평론가도 그 이야기를 몰라요 지금. 카프카가 뭘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은 판사 네가 뭔데 나를 왜 재판하느냐 말이죠. 이게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 아닙니까. 차마 말은 못하고 안 끄집어내서 그렇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아니 하나님이라도 네가 뭔데 왜 내 문제에 왜 네가 관여하느냐 이 말이죠. 사법체제를 만들어도 내가 만들어요 내가. 그런데 일방적으로 당신이 사법체제 만들어놓고 일부러 우리를 강제로 거기에다가 그 시스템을 뒤집어 씌우냐 이 말이죠. 우리는 무슨 죄냐. 오히려 죄 지은 자가 누구에요? 인간을 함부로 한 누가 죄 지었어요? 하나님이 함부로 한 게 그게 죄 아닙니까? 인간은 그냥 약하디 약한 인간은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는데.
자, 이러한 반발을 우리가 진즉에 생각을 했어야 됩니다. 해야 되는데 좋게 생각해서 이런 생각 못한 것은 전부 성령을 받아서 그런 거 같아요. 그런데 진짜 불신자는요 야야 우리 집 3대째 기독교다 교회 나가야지 하면 교회 안 나가요. 바빠서 못 나가요. 지금 고3이라서 안 나가요. 내 종교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가장 근원적인 말하고 싶은 건 그거에요. 하나님이 뭔데 나를 벌주느냐. 벌주겠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역겹다는 거예요. 감히 어떻게 나를 지적해요. 아주 강력한 반발이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우리 안에. 여러분들은 성령 받았으니까 그걸 극복을 했지요. 여러분 인간이 타인을 원하는 이유는 자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기 위해서 타인을 사귀어요. 나한테 문제없으면 혼자 섬에 들어가서 살면 돼요. 그런데 꼭 문제 있을 땐 교회 나와요. 목사님 저 문제 있는데요 이 문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거는 남 이용해서 지금 아닌 더 나아진 나로 더 향상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오은영 박사가 그래서 장사가 잘 돼요. 사자머리.
인간은 혼자 놀아요. 어떤 취미도. 혼자 노는데 교회 간다 이건 뭐냐? 역시 혼자 노는데 극복하는 오락을 하는데 힘이 안 되니까 하나님 좀 도와달라는 내가 스스로 신이 되는데 하나님 좀 도와달라고 교회 나가는 겁니다. 사람이 왜 직업을 갖는가? 직업 갖는 이유가요 남이 필요한걸 제공하고 거기서 내가 돈을 얻음으로써 나의 가치를 남들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그래서 뭔가 내 속에 뭔가 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좋은 직장으로 내가 극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 안에 뭐가 있느냐? 두려움과 공포가 있어요. 왜 두려운지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모르는데 이게 외부의 하나님의 사법체제에 대해서 이게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반발심으로 나오게 되요. 반발심으로. 그리고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마지막 죽고 난 뒤에 불지옥 심판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해보라는 거예요 나한테. 신이 있다면 납득이 되게 설명을 해봐라. 설명해봐라. 속 시원하게 한번 설명해봐라. 그 누구도 이걸 설명한 사람이 없어요.
이 주장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 속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는데 이것을 말 몇 마디에 이것이 깔끔하게 날라가고 하나도 없고 두려움과 공포가 없는 상태가 뭐냐 그걸 신이라고 합니다. 나를 절대적인 자유자로 만들어서 어떤 공포도 없고 어떤 두려움도 없는 말 몇 마디 해가지고 이걸 없애준다면 난 당신을 나의 타인으로 관계할 수 있는 타인으로 인정해줄게. 이야기 해봐. 이야기 해봐. 이야기 해봐.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나를 심판할 이런 점 때문에 심판할 이유가 있다 이야기 해봐. 그러면 흔히 하는 말이 하나님이 너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러면 창조했으면 책임져야지. 무슨 그런 아버지가 있노. 아버지가 되가지고 자식이 이렇게 힘들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지옥불이 뭐냐. 이거 이야기한 게 여호와의 증인. 여호와의 증인은 지옥이 없습니다. 너무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이 과잉이라서 없어요.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이기 때문에 지옥 이야기 왜 하느냐 겁줄라고 하는 이야기고 없어요.
창조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창조는 본인이 해놓고 우리가 죄 짓는다고 자식 보고 죄 값 받으라고 윽박지르는 그런 폭력적인 억압적인 신이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냐 설명해 보라 이렇게 나와요. 거기에 대해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대비를 했습니까? 이렇게 대비를 했습니다. 우리의 눈이 신을 보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이미 우리는 율법을 받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잘 통하는 아는 관계가 되어있어서 그러한 공포와 두려움은 우리에게는 이미 없다고 주장해요. 이걸 가지고 네 자로 하면 택한 민족.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다는 거예요. 자, 이 대목에서 어디서 잘못 됐는가? 우리의 눈이 신을 보고 있다죠. 주께서 막아버려요. 네가 보고 있는 것은 마귀를 보고 있다. 너희 아비는 악마다. 인간은 신을 봅니다. 그런데 그 신이 악마에요. 주께서 찾아온 것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정답은 바로 주님께서 귀머거리와 소경 앉은뱅이 이 사람들을 치료를 했어요. 요한복음 9장 보면 나오지요. 소경 나오지요. 치료했을 때 소경이 자기가 치료받고 난 뒤에 비로소 자기가 소경인 것을 알아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시간 자체가 예수님을 위한 시간이에요. 이건 성경에 나옵니다.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지 나를 위한 내 몸 그런 몸은 없어요. 나를 위한 내 마음 그런 마음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마음을 주시고 심지어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심은 것 인간이 죄 짓는 것 그 죄까지도 누구를 위한 죄다?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죄였어요. 그래서 소경은 비로소 소경에서 눈 뜨고 난 뒤에 멀쩡하다 한 게 아니고 비로소 소경에서 눈을 뜸으로써 내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소경이 되는 거예요. 즐거운 소경, 눈 뜬 소경. 나는 주님을 몰랐더랬습니다. 내가 소경 노릇을 제대로 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내가 귀머거리였었습니다. 내가 귀머거리가 되면 될수록 누구만 드러난다? 주님만 드러내는 거예요. 주님만 드러내는 거예요.
인간들은 축구 전반전 보고 축구 끝난 줄 알아요. 후반전이 있어요. 십자가 부활이 있어요. 전반전에 1:0 말레이시아 축구대표에 졌어요. 그런데 후반전에 4:3으로 역전해서 영웅 난리도 아니에요 지금. 완전히 김판곤이 말레이시아의 히딩크예요. 말레이시아 히딩크 됐어요 김판곤 감독이. 축구는 전반전 있고 15분 휴식 있고 후반전 있어요. 후반전 끝나야 끝난 거예요. 전반전에 인간들 십자가 밑에 다 가둬놓고 후반전은 누가 활동한다? 주께서 활동해서 결국 두 개 다 합쳐버리면 시작도 끝도 다 누굴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위해서. 이걸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께서 이 세상에 피조물로 만든 거에요. 피조물로. 전반전은 두려움과 공포 갖고 있던 우리의 사고방식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 네가 뭔데 감히 나를 지적해. 죄 문제 이런 거 내가 알아서 선악 이런 거 내가 아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나서는 고집 부리는 그것 그게 사두개인 바리새인이잖아요.
그 사두개인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죽음의 보편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율법이 옴으로써 이미 선악과 따먹고 저주 아래 있는 자를 더욱 더 저주 되게 확인해주는 거예요. 누구에게만? 이스라엘에게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율법 주어졌으니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죽은 자의 보편화. 모든 인간이 다 죽어있다는 겁니다. 모든 게 죽어있는 거예요. 죽어있을 때 그냥 죽어있는 게 아니지요. 죽는 이유까지 너희들이 죽은 자라는 이유까지 율법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죽는 이유를 인간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방식이 바로 저주 받아야 마땅한 이유가 되는 겁니다. 말씀을 지켜야 된다. 말씀을 지키려면 우리의 행함이 따라야 되고 우리의 이야기가 내가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내가 작년에 헌금 얼마하고 십일조 얼마하고 이번 달에 교인 몇 명 데려오고 이런 걸 다 목사 섬기고 이런 걸 다 잊으면 안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 쪽에서 율법으로 심판하기 전에 율법을 우리가 소지를 해요. 율법을 소지하게 되면 내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의 시행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주님의 사법체제는 날라가버리고 내가 나를 위한 나의 사법체제가 구성이 돼요. 항상 나는 의인이고 나는 선한 사람 쪽으로 판결을 내리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잘못한 건 없고 어쩔 수 없었고 남 탓이고 환경에 의해서 그렇게 해서 한 거다.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둘 다 마찬가지에요. 둘 다. 율법을 이처럼 신경을 쓰는 사람이 우리 외에 또 있겠느냐. 우리가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며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다.
주님께서 하는 말이 너희에게는 부활이 누락되었다. 나 예수한테는 부활이 있는데 너희들은 부활이 없잖아. 너희들은 부활이 없다는 거예요. 사두개인은 부활을 아예 없애버렸지요. 부활이 필요 없지요. 자기들의 착하다는 것을 증명할 그 율법적 신학체제에서는 굳이 부활이라는 게 몸의 부활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요. 영혼으로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되니까. 굳이 몸의 부활이 필요 없다고요. 내 몸은 이 땅에 살다 늙어죽는 걸로 용도 다 끝났으니까. 그 다음에 영혼만 살아있다고 보면 되지요. 그러면 주님은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내 몸의 용도는 너한테 어디에 있지요? 내 몸의 용도. 네 몸 말고 내 몸. 내 몸은 너희 속에 어디 있느냐 묻는 거예요. 없지요. 없으니까 그들은 더 이상 자기 이야기 끄집어내면 안 되지요. 없으면.
아까 처음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죽음에서의 부활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이에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죽은 자들의 특징은 부활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 단독으로 부활된 거예요. 차별해야지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됐다는 말은 이것은 모든 죄에서부터 벗어난 유일한 분이에요. 유일한 분이 영광스런 몸을 입었잖아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몸은 뭐냐? 죽은 자들 몸 말고 부활한 그 몸만 하나님께서 받아준다 이 말이죠. 그 몸만. 이거 설명은 제가 굳이 이야기 안 해도 고린도전서 15장에 한껏 들어있어요. 흙에 속한 몸 따로 있고 하늘에 속한 영 따로 있고. 아담에 속한 몸 따로 있고 그건 끝났고 두 번째 아담에 속한 몸 마지막 아담 부활은 또 따로 있고 모든 것은 따로 있어요. 그게 성령이 아니면 왜 못 믿는가? 자꾸 자기가 자기 이야기를 멈출 수가 없어요. 자기 이야기를 자기가 스스로 끊어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 보면 34절에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왜 장가 가고 시집 가는 겁니까? 혼인은 뭘 위한 혼인입니까? 죽은 자를 생산하기 위한 혼인이에요. 속 시원하지요. 죽은 자만 계속 생산하라고 혼인하는 거예요. 그래야 죽음이 보편화되니까. 퍼져나가니까. 죽음이 퍼져나오니까. 그래서 율법은 뭐냐? 대를 끊기 위한 대 잇기. 대를 끊어버림으로서 대를 잇는 거예요. 노선을 바꾸는 거예요. 노선을. 아까 룻 이야기 잠깐 했지만 룻은 이방 여인이에요. 땅이 없는 자예요. 땅이 없는 자가 얻을 수 없는 집안에 땅 없는 자가 합류가 돼요.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대를 이을 수 없는, 땅을 얻을 수 없는 그 집안에 아예 그 약속의 땅의 바깥의 인물인 이방여인이 들어온다고요. 이방여인이 들어오면서 뭘 갖고 들어오느냐? 율법을 갖고 들어와요. 율법을. 율법이 뭐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는 출애굽기의 취지가 그대로 아직도 살아있는 법. 처음 이스라엘 아니었다가 이스라엘 될 때 그때 적용되는 그 법을 이 이방여인이 이스라엘 속에 오면서 아직도 살아있는 거예요. 그 출애굽 법이. 고엘 법. 고엘 법이라고 하는 것은 후견인 법. 없는 사람 누가 대신해서 그 사람 채워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편입시키는 거예요. 편입시키는 것. 자격 아닌데 편입시켜주는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원래 처음 들어올 때 원리를 계속 갖고 있느냐의 여부예요.
룻은 이방여인이에요. 그리고 룻은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를 떠날 수 없습니다. 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나의 하나님이 어머니의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뭐냐? 어머니 죽는 곳에 나도 같이 죽겠습니다. 그 룻이 누구하고 결혼했지요? 보아스하고 했지요. 재벌 아닙니까. 옛날 토지 많으면 재벌이죠. 그 재벌이 나오미의 죽었던 재산까지 다 찾아줬습니다. 심지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증조할머니가 룻이에요. 자자손손 끝에 보면 다윗이 태어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국이 시작이 돼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원래 취지는 율법을 무시당하면서 당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진짜 율법의 진수가 나오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소경이 소경으로 죽어 마땅한데 소경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서 눈을 뜨게 만듦으로써 정작 내가 눈을 떴다가 아니라 눈을 뜨게 하신 분과 함께 있는 거예요.
‘Let it be me’ 아까 가사를 빨리 지나갔지만 사실은 완전히 자기 개인 생각이 날라가버렸어요. 사랑 앞에 뭡니까. 이거는 본인 때문에 삽니까?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살아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4장 7절. 이게 은사 아닙니까. 은사. 성령의 은사거든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주님 저 없어도 괜찮아요 주님 계시면 됩니다.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은 주님이 살아있지 나는 이미 죽었어요. 자,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죽은 씨앗을 남기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장가도 가고 시집간다 따라서 사두개인들아 너희들은 죽은 율법을 적용시켰다. 죽은 자에게. 죽은 집안이 어떻게 되고 앞으로 하면 어떻게 되느냐. 죽을 수밖에 없고 저주받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율법 해석이 현재에 있는 이 몸, 이 몸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려는 그 사고방식이 저주받을 사고방식이에요. 이 몸은 잊으세요. 붙들어도 늙어죽으면 나중에 화장터에 하나의 재가 되면 없어집니다. 안녕이에요 안녕.
그러면 부활 때 어떻게 되느냐? 35절에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라고 되어있지요. 천국에는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일곱 시동생 만나고 남편 만나고 형수도 있다면 그때는 오! 김 천사 박 천사 천사가 되어있지 여보! 이런 건 없어요. 남성 여성도 없어요. 그냥 여보 할 것도 없어요. 그리고 둘이 만나도 둘이 개인적으로 못 만나요. 어디를 경유해서 어느 자리에서 만나느냐 하면은 주님 보좌 앞에서 만나요. 주님 보좌 앞에서. 어디 김 천사 노래 한번 불러보지 찬송. 그 다음에 나 부를게 이러고. 날개로 가리고 영원히 찬양하지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못 올 곳에 왔다는 거예요. 소경이 눈을 떴다? 그러면 내가 눈 뜰 인간이 아닌데 왜 눈이 떴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 보라고. 주님 말씀 들으라고 귀 들리고 주님 말씀 보라고 눈 뜬 거예요. 눈 뜬 나 보라고 한 거 아니고.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님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Let it be me’ 사랑을 하세요. 사랑을 하라고. 미쳐버리라고. 자꾸 자기 사랑하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요령 부릴 생각하지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 이야기해야 됩니까?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 다음에 또 어려운 게 또 있네요. 37절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로 들리지만 예수님 이야기로 전환시키면 굉장히 쉽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공통적인 분이 계세요 그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각자 안에 다 들어있어요. 아브라함이 사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냐? 껍질이죠. 내 안에 주님 살아계시다 이거 증거하라고 아브라함 인생 관여했고 이삭 인생 관여했고 야곱 인생 관여한 거예요. 천국이란 이 세상이 감당 못할 세계에요. 감당 못할 세계입니다. 그럼 천국이 이 세상이 감당 못할 세계라면 천국에 들어갈 백성들이 본인이 감당 못할 자가 천국의 백성인 나에요. 내가 나를 감당 못해요.
우째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본인이 본인 일을 감당 못해요. 우째 내가 비트코인 이런걸 투자했지 이런 거 말고, 내가 미쳤지 이런걸 왜 했지 이런 거 말고. 어떻게 내가 내 인생이 있는데 어떻게 나 살려는 것이 우선인데 어떤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나만 이용해서 극복하려는 이런 것보다도 “그냥 냅둬 그냥 살다 죽을래” 왜 이런 자유함이 왜 생기느냐 이 말이에요. 배짱인지 오기인지 도대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내가 생각하는 그 행동을 왜 내 의지에서 안 나오고 있느냐. 이거는 나란 인간이 날 감당 못하는 이유는 천국 백성은 내가 감당 못해요. 백성도 감당 못해야 돼요. 내가 감당하면 안돼요. 내가 내 관리 하에 두면 안 됩니다. 제가 서울강의하면서 마리아 이야기했잖아요. 마리아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누구한테 이야기해도 알아주겠어요? 성령에 의해서 임신했다 그게 신문에도 안 나와요 그거는. 유투브 나와도 욕 디게 얻어먹어요. 말이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법체제에 대해서만 시비 걸지 난데없이 성령이 오시고 난데없이 이디오피아 내시가 난데없이 이사야 54장 펴가지고 이분 누구에요? 이분 누굽니까? 성경에 어떤 특정 은혜를 가지고 이 분이 누굽니까?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에요? 내가 감당 못할 이야기에요. 내 이야기는 내 이익만 들어있어야 돼요. 그런데 내 이익과 별개의 다른 분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통해서 이게 퍼져 나온다는 것, 사도 바울은 그걸 향기라고 했지만 이 복음의 향기가 나오는데 내가 담을 수도 없어요. 막 퍼져 나오는데. 미친 게 분명해요. 그런데 그 미친걸 고치기 싫어. 성경을 본다는 것은 도저히 말 할 수 없는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를 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110편, 시편에 친히 이야기하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라고 했는데. 하나 하나 하면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주가 한 분인 주가 둘로 갈라지는 이야기예요. 숨어계시는 주님과 나타난 주님으로 갈라져요. 숨어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나타난 주님은 아들. 이 둘 사이에 이야기가 율법 이야기에요. 율법은 우리가 끼어들면 안돼요. 율법은 끼어들면 내 이야기가 계속 유지가 돼요. 나 율법 지켰나 못 지켰나. 아이고 못 지켜서 벌 받았구나 지켜서 복 받았구나 내 이야기가 자꾸 끼어들기 때문에 자꾸 빼야 돼요. 그래서 주께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게 되면 이루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원수가 예수님을 붙잡지 못할 때 원수는 예수님 발 아래 밟혔다. 이미 게임 오버 게임 끝난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덤에 가둬둘 수 없고 악마는 예수님을 고발할 수도 없고 악마의 권세, 저주의 권세, 죽음의 권세가 예수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게임 끝난 거예요. 게임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게임은 누구 게임이에요? 예수님 혼자 한 게임이에요. 자기만의 투쟁입니다. 주의 이름만의 투쟁이에요.
따라서 자기만의 투쟁이기 때문에 여기서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시간으로 남은 시간이 모든 과거 시간을 다시 여기서 주님을 경유하게 만들어요. 주가 선배격인 다윗의 시대에 이미 미래의 주님이 관여한 걸로 되어있어요. 관여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껍질로 만들었고 다윗은 자기 이야기를 못하고 예수님이 오실 이야기를 시편 110편에서 한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어요.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다윗이야기 자리에다가 여러분 자신을 집어넣으세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다윗은 껍질을 누가 쌌다? 이렇게 해도 되고 또는 다윗이 껍질이라면 안에 예수님이 다윗 속에 있다 이렇게 해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라는 우리 껍질 속에 이미 다 이루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미 다 이루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럼 바깥의 우리는 뭡니까? 미완료가 주는 즐거움이 있어요. 미완료가 주는 즐거움. 뭘 해도 이것은 안 받는다는 것. 내가 뭘 해도 안 받는다는 즐거움과 기쁨과 가벼움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했지요. 그리고 저주했잖아요. 그것이 베드로로 하여금 악마 쪽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했다 할지라도. 왜냐하면 베드로를 그렇게 하게 한 것은 베드로가 성령 받고 알아요. 이것도 주께서 계획한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45절부터 신학 따로 행동 따로 인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은 아무리 신학을 논하고 논해도 자기 내부에 있는 자기 이야기를 타인을 통해서 자기가 더욱더 확장하고 대단해지려고 하는 그 탐욕은 버리질 못하죠. 47절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서기관들만 벌 받는가? 아니지요. 서기관들을 부러워 못 견디는 사람들이 일반 사람이잖아요. 나도 언제 저렇게 부자 되느냐 하는 거예요. 아까 살아있다는 것은 아브라함 속에 주님이 살아계시고 다윗 속에 주님이 살아 계시고 야곱 속에 주님이 살아계신 거예요. 그래서 야곱 같은 경우에는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싸우려고 할 때에 갑자기 습격을 당하는 거예요. 습격을. 습격 압니까? 예상 못했는데 밤중에 새벽될 때 습격을 당했어요.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한테 습격당한 것을 천만다행으로 고맙게 여기기 바랍니다. 고맙게 여기기 바랍니다. 고맙게 여겨요. 내 인생 벌써 망했어요. 이왕 망한 거 뭐 세상 눈치 볼 거 뭐 있어요. 이왕 망한 거. 갖다버릴 옛날 옷인데 옛날 옷 좀 더러우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버릴 옷이거든요. 옷치고 약간 아파요. 약간 아픈데. 남 이용해서 내가 더 나아지려고 극복할 생각하지마시고 이미 극복은 이루어졌습니다. 극복. 다 이루어진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잘될라고 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그것이 죄악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이 함께 성령을 주심으로서 더 이상 나의 이야기가 없음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