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0장 27절 (몸의 용도) 231219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20장 27절 (몸의 용도) 231219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0장27절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라고 되어있습니다. 왜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만약에 사두개인이 여기 있다면, 왜 당신들은 부활이 없다고 여깁니까? 라고 하면 그 사두개인이 이렇게 이야기할거예요. “그럼 부활이 있어요?” “부활이 있습니까?” 되물을 거예요.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이죠? 지기 전이기 때문에 부활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부활이 없지요. 부활이 없는데 부활 이야기를 사두개인이 거론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말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을 의식해서 하는 말이에요. 바리새인은 부활이 있다고 얘기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바리새인이 왜 부활이 있다고 했을까?’ ‘저 미친 거 아니야?’ 이렇게 돼야 돼요. 이 사두개인의 존재,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 존재는 우리들로 하여금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두개인이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세오경만 믿기 때문에 그래요. 모세오경. 모세가 직접 시내 산에서 받은 것에는 부활이 없다, 부활이란 없어요. 직접 받은 거에는. 나중에 부활 나오는 것은 에스겔 또는 다니엘 부활 나오죠, 시편에도 나오고. 그러나 모세오경은 부활이라는 게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랑 동행하는 거죠, 동행하는 게 있어요. 에녹은 죽지 않고 갔다 이렇게 되어있죠. 죽지 않고 간 거예요. 죽어서 부활된 게 아니고. 동행하면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초반부터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두개인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들어보고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옳아 보이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인간 이야기가 쭈욱 계속 돼서 인간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이게 천국까지 간다. 이게 1번, 그럼 천국에 무슨 이야기 있겠습니까? 인간 이야기가 그대로 살아있죠. 부활은 뭐냐 하면 인간 이야기가 되다가 인간이 죽었어요. 죽었다 이 말이죠. 부활이란 말은 죽었다가 살아나잖아요. 여기에 누가 개입하느냐, 하나님이 개입해요. 그러면 인간은 죽었으니까 인간 이야기가 여기서 끊어지겠죠. 끊어지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받아준다. 이게 바리새인의 주장입니다. 바리새인의 주장이에요.
자, 그러면 예수님은 사두개인의 말을 따라요? 바리새인의 말을 따라요? 아니면 독자적입니까? 당연히 독자적이에요. 사두개인이 인간 이야기부터 시작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을 개한테 줬어요? 원숭이한테 줬습니까? 짐승한테 줬습니까? 누구한테 줬어요? 인간에게 줬지요. 인간에게 율법을 줬다는 말은 계속 인간 이야기가 이어져야 덩달아 뭐도 살아있다? 율법도 같이 살아있는 거예요. 율법을 지키는 인간 이야기가 이어져야 율법 지킨 인간들이 천국에 들어간다라는 것이 너무나 합리적이고 논리에 타당한 이야기이고 상식에 맞는 이야기죠. 바리새인은 율법을 줬다, 잘 지켰다, 일단 죽자. 그 다음에 율법 잘 지키면 천국, 못 지키면 지옥 간다, 뭐 나쁜 부활이 된다. 바리새인은 요 주장이에요.
그러면 사두개인이 봤을 때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의 이 주장은 아주 불허한, 위험한 사고방식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 보고 율법을 줬는데 인간은 죽어서 내 몰라라 하는 게 이게 말이 되냐 이 말이죠.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법을 줬는데 ‘나 죽었으니까 이제 고만 닦달내세요’ 이래버리면 율법이 머쓱해져버려요. 율법이. 그래서 율법 이야기는 뭐로 달라져야 된다? 얼마나 잘 지켰냐 하는 인간 이야기로 율법이 인간 이야기로 바뀌어져야 이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에 부합하다, 이게 사두개인의 주장이에요. 바리새인은 그 점을 인정해요. 하지만 인간이 죽는 건 맞잖아? 죽고 난 뒤에 바리새인들은 착하게 율법 지킨 사람은 괜찮은 죽음, 행복한 죽음, 부활로 다시 살아나야 된다. 그게 왜? 그게 모세오경엔 안 나오지만 다른 데에 나오니까 다른 계시도 보충하는 것이 이게 우리가 널리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는 게 되지 않냐.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겁니다.
자, 둘 다 문제가 뭐냐 하면은, 여러분한테 물어봐야 소용없고 제가 일방적으로 하겠습니다. 둘 다 문제점이 뭡니까? 묻고 싶은데 안 물을게요. 뭐냐 하면은 ‘인간은 잊지 못한다.’ 인간 자신을 잊지 못해요. 예수님은 율법과 자기를 매칭시키면서 인간 이야기를 끊어내고요, 무슨 이야기로 바꾸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야기로 바꾸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로 바꾸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동의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로 바뀌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로 바뀌는 이유가 뭐냐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야기로 안 바뀌고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로 바뀌느냐, 인간이 자꾸 하나님을 거론하게 되면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그 생각 속에 하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잊을 수가 없어요. 못내 못 잊어요 자신을. 사람이 제일 사는 게 힘든 이유가 뭔지 알아요? 본인을 잊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본인을 못 잊어요. 이게 피부 트라우마까지 막 생긴다니까, 인간은 본인을 못 잊기 때문에 모든 건강 문제나 이 사회에 있으면서 막 입술 터지고 그래요. 신기한 얘기지만 사실입니다.
제가 어느 노래 가사를 들려드릴 테니까 이게 얼마나 실제인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란 사실을 한번, 노래 가사 속에 있어요.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보세요. 상대방이 물어도 답변을 안 해. 전화해서 잘 있었냐 하는데, 답변이 없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럴 때 뭡니까? 메마른 나의 입술, 갑자기 자기가 왜 입술 가에 습도가 낮아져서. 메마른 나의 입술. 그래서 직접 만났어요. ‘차가운 네 눈길에 얼어붙은 내 발자국’ 상대방이 뭐라 해서 그냥 차갑게 봤는데 갑자기 여기가 동상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는 내 발자국. 그래놓고 아무 소리 안하고 돌아서거든요. ‘돌아서는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데, ‘안녕 안녕’은 해줘야 되는데 그 상대방은 ‘목 메인 그 한마디’ 그리고 마지막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양희은 노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가사에요. 기타치고 싶어 지금. 양희은 노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가사에요.
이걸 가지고 히스테리라 하는 겁니다. 손도 안 댔는데 내 육체가 반응을 나타내요. 이유가 뭘까요? 그 사람을 아는 나의 기억이 들어있는 나를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난겁니다. 인간은 혼자 자기 것만 기억하는 게 아니고 자기 것 관련된 모든 타인이 이미 내 안에 내 몸의 컨디션을 조종하고 있어요. 나를 못 잊는다는 말은 그동안 나한테 인생에 관여했던 모든 사람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식이죠, 자식.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 바치라 합니까? 네 자식 바치라 하죠. 오늘 본문에 나올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 우리 부활이 아니고, 지금 바리새인의 문제점은 자기를 못내 못 잊어서 본인이 부활된다고 율법을 계속해서 율법책의 성경 해석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인간 부활은 없습니다. 인간 부활은 없어요. 모든 인간이 바리새인이든 사두개인이든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잊었어요. 심지어 십자가 달릴 때 열 두 제자도 예수님을 잊기로 했어요. 예수를 잊는다는 말은 나는 때려 죽여도 나는 나 자신을 잊을 마음이 없다는 뜻이에요. 잊을 마음이 없다. 그래서 부활은 누구 이야기냐, 십자가 부활은 누구 이야기입니까? 어느 인간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에 해당 돼요. 그게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부활 아니에요. 부활의 첫 열매는 죽었다가 살아난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예수님 때 죽었다 살아난, 야이로의 딸 같은 그런 사람이 부활의 첫 열매 아니에요.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첫 열매가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는 어느 인간도 생각 못한 부활입니다. 누구냐? 예수님이 첫 번째 부활이에요. 첫 번째 부활. 인간이 생각하는 부활은 내가 부활된다 잖아요. 주님의 부활은 내가 부활된다가 아닙니다. 부활의 세계가 오는 거예요. 부활의 세계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세계가 등장하는 게 부활이에요. 나의 부활은 잊으세요. 부활의 세계 속에 들어가면 그게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의 세계 속에서 온 능력이 예수님을 죽은 가운데서 살려낸 그 능력이 부활의 세계를 이루는데 그 능력을 성령의 힘이라고 해요요. 그 동일한 성령이 찾아 와요. 우리 성도에게 찾아오게 되면 성도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영이 너희 속에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기억나지 않는 나를, 여전히 나는 기억나지 않아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기억하는 조건 하에 예수님 앞에서의 십자가 앞에서의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함께 기억하게 만들어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걸 기억하게 만들어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은 성령 오기 전까지는 상상도 내가 그 정도였는가 할 정도로 상상도 못 할 나였습니다. 맨날 ‘나는 죽으면 안돼’ ‘난 죽으면 안돼’ 맨날 이러고 있어요. 나는 죽으면 안돼 이 말은 ‘내 기억을 나는 안 놓칠거야’ 이런 뜻이에요. 그동안 산다고 얼마나 노고가 많았습니까, 수고했습니다. 근데 그 내가 산다고 했던 모든 관계, 여동생하고 관계 이 모든 관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복수할거야”, 이러고 있다니까. 복수할거야. 로마서 14장에 ‘복수는 네가 하는 게 아니다’ 복수는 아예 네가 할 자격이 안돼요. 복수할 권한이 없어요.
한번 적어볼께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계속 주시니까 인간은 이거를 뭐로 삼았냐 ‘권리’로 여기는 거예요. 웃기죠? 당연히 받아야 될 권리처럼 생각한다고요. 은혜가 징벌이란 사실을 상상도 못했죠. 은혜 주고 값을 요구합니다. 그걸 후불제라 합니다. 후불제예요. 우리가 치룰 값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해서 치룰 만한 값을 준비할 수도 없고 제공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나라 못가요. 그래서 부활 이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어요. 그 피로 값 주고 우리로 하여금 내 중심의 세계로 생각했던 그 죄인 중에 괴수 된 모든 것을 값을 치러줘요. 내 중심으로 생각했던 나를 못내 못 잊어하는 내 중심의 세계. 어떤 문장에 보면 이런 적절한 문장이 있어요. ‘인간은 각자 자기 섬을 갖고 있다.’ 자기 섬.
섬 특징이 뭡니까? 섬은 바다에 떠있는 섬이잖아요. 아무도 내 섬에 못 와요. 바다에 오면 총 막 쏠 거예요 아마. 노량대전이에요. 예수님 들어오면 막 쏴버려요. 각자의 섬으로 스스로 각자 섬이 있어요. 여러분 이걸 자유라 합니까? 폐쇄입니까? 폐쇄된 거예요. 언뜻 보면 자유처럼 보이지만 자발적 폐쇄에요. 자발적 감옥, 자발적 투옥, 감옥에 갇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각자 자기 섬을 갖고 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뭐냐, ‘인간은 각자 한 편의 영화’, 관객도 없고 무대도 없는 영화, 인간은 한 편의 영화다. 누구 영화? 나의 영화를 찍고 있어요. 나의 영화. 자기 혼자, 관객이 없어요. 자기가 혼자 자기 관객이 되는 자기가 연출, 본인 주연 해가지고 한 편의 영화 찍고 죽으면 그 영화 날라가죠. 영화 찍는다. 요 가사는 어디에 나오냐면 카더가든의 명동콜링 노래입니다. 크리스마스 때 눈 올 때 들으면 좋은데 명동콜링 노래에요. 그 노래 나와요. 이게 가사에요. 관객도 없고 한 편의 영화 같다 “달링~” 이렇게 시작해요.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인간이 알지 못하는 부활을 준비했다면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그 부활은 어떻게 해서 부활이란 개념을 형성하는가 부활이 있다 하는 쪽, 없다 하는 쪽 “다 드루와 드루와” “부활이 없다 하는 쪽도 드루와”, 그게 오늘 본문 27절입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는 논조를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서 예수님께 대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이 죄악된 거는 충분히 자기 몸에 반영을 해줘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가 살아요. 죄 때문에 죽어야 되거든요. 죄 때문에. 죄라는 것은 인간의 윤리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있는 섬, 영화 그들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하나의 독립된 월드, 세계로 반영해서 필요로 했던 개념들이 있어요. “그 체계. 드루와. 갖고 와. 그 체계 갖고 와.”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공격하고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매일같이 공격하는 그것을 미리 선배 격이라 볼 수 있어요. 성경이 그런 점에서 굉장히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을 미리 주님 앞에 질문을 던지는 셈이 되었어요.
자,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조목조목 따져서 부활이 없는 이유를 알겠지 라고 하는 그 논조는 제가 설명하기 전에 먼저 결론부터 내립니다. 사두개인들의 주장은 부활이 없는 이유는 뭐냐면 ‘부활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겁니다. 부활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줬다면, 그 율법을 조립해서 늘 인간은 율법을 조립해가지고 우리 인간이 이해되는 언어를 가지고 율법을 충족시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줬으니까 우리 선에서 일을 해야 그게 실천에 옮기잖아요. 실천에 옮길 만한 필요한 개념들을 개발하고 그걸 짜집고 연결시켜서 모든 행동을 해도 그 언어의 시스템 안에서 말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 받고 구원 받는 최고의 민족이 된다 라는 것이 사두개인입니다. 그럼 거기에 동원되는 언어는 이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다 갖추어놨어요. 인간 언어가 필요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부활에 대해서는 모르고, 내가 자기가 부활된다고 우기는 거예요. 살아있을 때에 율법 잘 지키면 인간은 죽으니까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이 부활해주겠지. 그게 사두개인이 보기에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그러면 죽어버리면 율법의 노선이 이게 인간 이야기가 끊어지니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두개인의 주장은 뭐냐, 부활이 없다가 뭐냐? 하나님께서 살아계실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예요. 에녹처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뭘 보지 않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있죠. 이제는 하나님과 늘 함께 있는 그 상태, 죽으면 흙 되겠죠. 흙 되더라도 인간 세계에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 그거 자체로 복이 아니냐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냐 부활이 있는 게 아니고 뭐겠어요? 비록 몸은 죽어도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 그게 사두개인 주장이에요. 지금 몸의 부활 이야기는 굳이 왜 몸이 부활해? 영혼이 함께 있으면 되지. 이제 사두개인에 다 넘어갔다 이제. 이게 너무나 이게 알기 쉬운 거예요.
인간은 혼과 육으로 되어있고, 살아있으면서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잘 지키면 영혼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으면 되잖아요. 에녹처럼,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함께 있잖아요. 그럼 되지요. 왜 굳이 이 몸이 다시 부활될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몸이 부활될 이유를. 바리새인은 그것도 모르고 성경에 있으니까 있지 이러하는 거고, 이 내막도 몰라요.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이 사두개인 말이 맞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할 언어가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언어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 부활, 영생, 예수, 생명책 어떤 것도 부활의 능력이 안 됩니다. 언어 헬라어 히브리어 백날 해봐도 그건 아니에요. 따라서 사두개인 말대로 부활은 없습니다. 율법대로 없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설명할 언어를 개발했겠죠? 부활을 설명할 언어를 개발했습니다. 그 언어가 뭐냐 하면 인물이에요. ‘인물’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것은 뭐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에요.
이걸 가지고 이 인물을 뭐냐 하면 ‘언약 사람’, 언약을 품고 있는 사람의 등장, 언약을 품고 있는 사람이 되려면 조건이 뭐냐 하면 사탄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아는 사람만이 언약을 아는 사람이 돼요. 사탄을 품은 사람이 누구냐면 베드로입니다. 마태복음 16장23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 보고 하는 말이 “사탄아 물러가라” 했지요. 근데 베드로는 본인에 사탄이 들어갔다는 것을 인정해요? 못해요? 인정 못합니다. 평소대로 자기 견해대로 상식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사탄아 들어오라’ 해가지고 ‘사바사바사바’ 해서 볼펜 들고 이렇게 안 했어요. 뭐 강심술하고 이런 거 안 했어요. 그냥 살았어요. 그냥 살았는데 귀신이나 사탄은요 내 허락 맡고 들어오지 않아요. 그냥 갖고 놀아요 그냥. 그냥 들어온다구요. 사탄이 있는 건 언제 아느냐 사탄이 나갈 때 알아요. 사탕이 아니고 사탄. 사탄이 나갈 때 알아요. 그게 뭐냐면 ‘터치’ 하는 거예요. 성령 들어오고 사탄 나가고. 바톤 터치하는 거.
성령이 들어오면 ‘아 그동안 내가 마귀가 시키는 대로 말을 했다’는 사실, 그게 뭐냐면 자기를 부정 못하는 거예요. 나를 잊지 말아라. 나를 잊을 수가 없어요. 나를 안 잊으면 골치 아프고, 나를 내쫓지는 못하고, 진퇴양난이에요. 그냥 있으면 골치 아프고 나의 지나온 과거가 생각이 나가지고 힘들어 죽고, 내 안에 과거가 남아있으니까 나와 엮인 뭐 여동생 있고 모조리 다 있어요. 내가 나를 감당을 못해요. 감당하지 못합니다. “목사님 저 잠이 안와요” 잠이 안 오는 이유는 네 안에 네가 들어있으니 잠이 안 온다. 맨날 마이 스토리, 나의 이야기, 내 인생 내 이야기에요. 심지어 꿈속에도 내 이야기에요. 꿈속에도 내 이야기. 예수님께서는 우리 속에 성령을 줬는데 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자, 부활의 영의 특징을 정말 알기 쉽게 말씀드립니다. 부활의 영의 특징은 ‘내가 감당 못할 영’. 부활의 영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영이라 하는데 이거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게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산 밑에 있는 백성들이 모세의 영광을 감당했습니까? 감당 못했습니까? 감당 못했죠. 감당 못하니까 모세가 말을 못하니까 그 빛나는 광채 때문에 말을 못하니까 모세가 신광타월, 송월타월 그 수건을 이렇게 얼굴에 덮었죠. 이거는 뭡니까? 감당을 할 수가 없다 이거에요. 성령이 내게 오게 되면 내 인생을 내가 감당하는 것을 이제는 손을 들어 포기를 해줘야 돼요. 인생을. 물 건너 간 거예요. 내 섬에 북한 미사일 떨어진 거예요. 내 영화 스크린 찢어진 거예요. 내 섬 자체가 박살난 거예요.
이게 바로 부활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온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은 뭡니까?’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언약맨’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언약의 사람이 된 거예요. 졸지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계열이 되어버려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특징이 뭐냐 하면은 우리 속에 죽음에서도 이겨낸 영이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기서 그들은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살아있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살아있는 이삭의 하나님, 살아있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그 다음 차례는 누구 차례에요? 성령 받은 사람의 차례에요. 다시 말해서 너 살아 있다가 아니라 네 속에 내가 살아있다고 증거하는 거예요. 내 속에 주님이 살아있으니까 주님의 살아있음을 내가 값을 치른다든지 어떤 호응을 한다든지 “주님께 제가 협조해드리겠습니다.” 이런 것 다 주제 넘는 일이에요. 주님께서 우리 협조 받아서 일 안합니다. 일방적으로 일하죠.
마치 사탄이 베드로에게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다룬 것처럼, 주님도 우리에게 올 땐 일방적으로 다뤄요.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자 특징이 뭐냐 하면은요. 내가 살아있으면,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여기서 몇 명 등장해요? 너 등장하고 나 등장하잖아요. 내가 혼자 그걸, 너의 침묵을 감당할라고 하니까 입술만 바짝 바짝 타는 거예요. ‘차가운 네 눈길에 얼어붙은 내 발자국’. 모든 관리 내 인생 관리를 누가 해요? 내가 혼자 담당하고 내가 책임져야 돼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이 오게 되면 책임자가 내가 아니고 누구로 바뀌어요? 나 아니고 누구로 바뀝니까? 내 속에 다른 분이 바뀌었죠? 다른 분이 책임지죠. 그게 뭐냐 하면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선물인데요. 믿음 소망 사랑은 내가 누구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함께 있을 때 그때 성령의 기쁨이 어느 정도인지는, 들려주세요. 이거는 말로 설명이 잘 안돼요. 자, 이거는 영어인데 음악을 들어가면서 제가 바로바로 이야기할께요. 먼저 이야기할 것은 홀로 있지 않고 누구와 같이 있을 때에 어떤 감정이 드는지.
‘I bless the day I found you’ (당신을 만난 날은 축복 받은 날이요)
‘I want to stand around you’ (당신 곁에 머물고 싶어요)
‘And so I beg you Let it be me’ (그러니 당신 곁에 머물게 하세요)
‘Don’t take this heaven from one’ (이 하나 밖에 없는 천국을 빼앗지 말아주세요)
‘If you must cling to someone’ (설령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간다고 해도)
‘Let it be me’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머물게 해주세요)
‘Each time we meet love’ (우리가 사랑을 만날 때마다)
‘I find complete love’ (나는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발견했어요)
‘Without your sweet love’ (당신의 달콤한 사랑이 없었다면)
‘What would life be?’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So never leave me lonely’ (그러니 날 외롭게 두지 마세요)
‘Tell me you’ll love me only’ (오직 나만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and that’s you’ll always’ (언제나 내 곁에 떠나지 않을 거라고)
‘Let it be me’ (말해주세요)
자, 보세요. 사랑은 미친 거예요. 왜 미친 거냐면 자기는 완전히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아무 중요하지 않아요. 뭐가 중요해요? 내 곁에 당신이 있는 게 중요해요. 이게 바로 성령을 주신 믿음 소망 사랑이에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이 성령의 사랑이 없이 “목사님 어떤 말씀 지켜야 구원받습니까? 뭘 어떻게 실천해야 구원받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어요. 본인을 아무리 실천에 옮기고 아무리 애써도 결국은 뭘 못 잊어요? 나 자신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나 자신을.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나를 못 잊어요. 50년 40년 동안 교회 봉사하고 헌금했습니다 이것만 기억나니까, 근데 여기에 ‘Let it be me’ 1960년대 나온 노래에요. Everly Brothers가 부른 2중주, 남자 2중주 노랜데.
‘나 당신을 만난 날은 축복 받은 날이에요’ ‘당신 곁에 머물고 싶어요’ ‘그러니 당신 곁에 머물게 해주세요’ 이건 완전히 미친 거예요. 어떻게 자기를 타인에게 빼앗깁니까? 이 하나밖에 없는 천국을 빼앗지 말라, 천국에 이미 다 왔어 다 왔어. 사랑 왔으면 천국에 다 온 거예요. 지금 불신자들의 문제점은 누가 자기를 안 빼앗아가서 문제예요. 홀랑 다 빼앗기고 싶은데 아무도 자기 것을 빼앗질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 홀로 자기라는 섬에 수감생활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에요. 사두개인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사랑이 없잖아요? 아무것도 받은 게 없어요. 없으니까 뭐로 버팁니까?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걸로 버티는데 그게 뭐냐? 신명기 25장5절 가지고 들이대는 겁니다.
신명기 25장5절 뭐냐 하면은 한번 찾아봅시다. 누가 한번 큰 소리로 읽어보세요.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절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아멘. 어떤 맏이하고 아내, 줄줄이 시동생 있다. 둘 사이에 그 집안에 대를 잇기 위해서 맏이가 자녀를 낳아야하는데 맏이하고 아내 사이에 아들이 없습니다. 25절, 아들이 없어요. 그러면 이 잘못은 어디 있습니까? 아들이 없는 잘못은 어디 있죠? 아들이 없다는 것은 이게 이스라엘이거든요.
잘 들으셔야 돼요. 이스라엘 내부에 자식이 계속 이어져야 땅을 상속받아요. 그 땅은 누구 땅이냐? 하나님 땅이에요. 하나님의 상속분이 계속 사람과 만나서 이어져야 그게 나중에 약속의 땅이 완성이 되는데 그 땅은 있는데 그 땅에 살 거주민들이 대를 이어 지파마다 상속분이 있거든요. 기업인데 그걸 받을 아들이 없을 때에 이 둘 중에 누가 문젭니까? 자식이 없을 때에. 율법이 뭐라 합니까? 누구에게 문제가 있어요? 이 여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여자가 죽음입니다. 여자가 가는 곳에 다 죽여요. 다 죽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한 죽음이 있어줘야 이스라엘이 나중에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요. 메시야가 등장한다고요. 메시야가.
다시 오늘 누가복음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20장4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시편 110편 이야기 언급하시고,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하는 말씀 있죠. 이스라엘은 죽음이 관통해야 이스라엘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와요. 근데 그 관통은, 형수는 바늘이고 형수 바늘 뒤에 실인데 그 실이 죽음의 실이에요. 계속해서 죽음이 이스라엘을 파고 들어가야 돼요. 죽음이 관통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이 메시야가 죽은 데서 나온 메시야여야 돼요. 죽은 데서.
그럼 이 말은 기존에 이스라엘은 뭐로 되어있다? 육신으로 되어있고 육신의 자식은 하늘나라에 인정을 못 받습니다. 그런 자식은 하나님이 율법으로 거부해버려요. 율법에 의해 태어난 자식이어야 돼요. 율법에 의해 태어난 자식. 그러면 율법이 율법 되려면 뭡니까? 맏이가 아들이 없어야 되니까 맏이가 아들 없는 본인은 어디 앉아있습니까? 아들에게 있는 게 아니고 형수한테 여자 쪽에 있어요. 왜? 메시야는 누구의 자손이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이거든요. 여자의 후손이에요. 창세기 35장에 유다가 다말 보고 “네 때문에 우리 집안 거덜 나겠다”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 맞아요. 다만, 거덜 나야 한다는 것이 언약맨이에요 언약. 하나님의 언약은 쉬워요. 하나님의 언약은 죽었다가 인간의 육은 죽고 영으로 다시 나야 이게 언약맨이 될 수 있다고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어야 돼요. 그럼 아브람은 죽어야 돼요. 이삭도 자기가 생각한 아들에게 밀어준 이삭은 이삭이 아니에요. 야곱을 통해서 아버지가 갱신돼요. ‘아 내가 잘못 되었구나 내가 엉뚱한 맏이한테 밀어줬구나’ 이것이 내가 알던 내가 아니어야 돼요. 야곱이 거짓말함으로써 이삭이 자기가 아는 이삭이 아니에요.
여러분 거울 볼 때 자기 모습대로 보이는 거울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자기를 찌그러지게 보이는 거울을 원하십니까? 어느 쪽일까요? 자기가 못나게 보이는 거울일까요? 자기가 잘 생겨 보이는 거울, 어느 거울을 원합니까? 인간은 잘 생긴 거울을 원하죠? 율법은 못 생긴 거울이에요. 그래서 율법을 안 본다 해요. 성경 말씀을 안 들으려 해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인간들이 납득되는 성경 해석을 보는 거예요. 왜 자기 이야기가 중간에 찌그러지면 안 되니까 나는 건전하니까 끝까지 나는 나를 괜찮은 나를 잊지를 못해요. Don’t forget. 전혀 잊지를 못해요. 항상 괜찮은 나를 우상시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모든 인간이 악마와 만나서 이 악마 속에 있으니까 이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대한 대안은 뭐냐 하나님의 조치는 율법으로 쑤시고 들어가는 거죠. “죽어라 인간아” 가정의 대표는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남자이죠. 그러니까 아들을 낳아야 돼요. 딸은 나중에 시집가게 되면 땅 자체가 약속의 땅에 토지 상속분이 없어지니까요. 그 집에 가니까. 아들 몫이거든요. 아들이 없다는 주님의 땅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말은 주님의 언약에 상속자가 못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낳아야 되는데 아들을 못 낳았다는 말은 결국은 무슨 뜻이냐면 우리 인간은 여호와의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율법이 그 시대에 계속해서 일러주고 가르쳐주고 있는 거예요. “아들 없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게 내 뜻이었어. 너는 상속될 자격이 없어” “그럼 어떻게 해요?” “율법이 네게 알려줄 거야” “무슨 율법이요?” “신명기 25장 5절과 6절” “그게 뭔데요?” 시동생하고 결혼해가지고 시동생은 자식이라 말하지 못하고 자식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하지 못하고, 삼촌 해야 돼요. 콩가루 집안 되어버려요. 자기는 아버지가 뻔히 있는데 큰아버지가 자기 아버지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왜? 그게 바로 자식 내 중심 아니고 아버지 중심 아니고 약속의 땅 중심이기 때문에, 언약의 땅 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의 땅은 율법대로 사는 율법맨, 율법대로 사는 사람만 이스라엘 자격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형수는 율법대로 들은 얘기에서 자식을 못 낳는 겁니다. 그런데 사두개인은 이 되물어가지고 뭐만 생각하냐 수평적인 지리적인 약속의 땅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이야기가 안 죽고 계속 유지되고 있는 상황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 천국이라 생각하고 그 상황을 계속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그 몸이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모순에 빠지는가를 바리새인들이 논리를 설명합니다. 형수가 애 없어서 시동생, 또 없어가지고 시동생, 둘째 셋째 지하 7층까지 해가지고 했다. 했을 때 ‘나중에 몸의 부활이 없는데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나중에 일곱이 다 아내를 취했으니 부활 중에 그것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고 출제의원 되는 본인들이 답을 제안을 해 놨어요.
딱 출제 질문이 뭡니까? 군소리하지 말고 첫째나 둘째나 셋째나 넷째 그 중에 하나만 고르라는 거예요. 예수님 보고. 왜 본인이 출제 냈으니까. 이 사두개인 출제는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써먹었으면 바리새인은 거기에 대해서 우물쭈물 아무도 답변을 못했죠. 바리새인들이 답변 못한 거, 우리 차례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답변해야 되잖아요. 예수님 답변 보지 마시고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정답 말씀드릴께요. ‘인간 시간은 없다’ 이걸 가지고 뭐냐 ‘천사와 동등이다’ 천사와 동등이다. 시간은 인간 이야기의 도로가 아닙니다. 주님 이야기의 도로, 통로지요. 우리 이야기하라고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진 게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