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1222a 시편8편 2절(젖먹이의 출현)-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31222a 시편8편 2절(젖먹이의 출현)-이 근호 목사
오늘은 p.23【젖먹이보다 더 강한 자 있을까】역설적이죠. 이것은 시편 8편 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편 8편 2절에,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p.23에도 그대로 나와 있죠.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이 전쟁 상황이에요. 전쟁에 젖먹이가 나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전쟁에 어른들 나가지, 어린아이가 못 나가죠. 거추장스럽잖아요. 걸리적거리고. 그러니 이 전쟁은 보통 전쟁이 아니죠. 특별한 전쟁입니다. 시편 8편 2절 젖먹이가 동원되는 전쟁, 이 전쟁에 대해서 성경 시편 2편에 보면 그 내막이 나옵니다. 시편 2편 9절에,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전쟁 상황이죠. 전쟁 상황인데 전쟁을 하려면 적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적이 없는데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고. 그 전쟁에 대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시편 2편 2절에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쟁, 어떤 의미에서 최후의 전쟁. 세상 사람들 자기들끼리 하는 전쟁, 아니지요. 아니지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자기들끼리 하는 전쟁이 아니고요. 이건 최후의 전쟁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세상 대(vs) 기름 부음 받은 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표해서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등장하고, 세상은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등장으로 자동적으로 한통속이 되면서 이 최후의 전쟁에서 세상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대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이 전쟁의 시작은 이러해요. ①세상 자체를 하나님의 원수 집단으로 만드는 그러한 의도를 갖고 있고 두 번째는, ②원수니까 가만두면 안 되겠죠, 기름 부음 받은 자, 너무 길죠, 메시아의 최종 승리가 되는 두 개의 절차를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전쟁을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의도적으로 일으킨 거예요. 인간세계를 들쑤신 겁니다.
그럼 이 기름 부은 자의 등장을 시편 2편 7절에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에 대해서 전한다 이 말이죠, 이 세상 것이 아니고. 전하는데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아들이 등장해요. 아들이.
아들이 등장했습니다. 전쟁. 전쟁에 숨어있는 주인공을 뭐라고 칭하느냐?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군사가 누구냐 하면 젖먹이에요. 젖먹이, 어린아이. 이렇게 동원해서 전쟁이 진행됩니다.
세상 사람들 자기들끼리의 전쟁에서는 애들은 빠지고 힘센 어른들끼리 각자 차출해서 전쟁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어떤 내막을 들쑤시는데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 집단으로 진행되어왔다는 점을 들쑤셔내는 거예요. 들쑤셔내고 그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적이니까 그냥 방치한다? 묵과한다? 아니죠. 반드시 척결하죠. 척결할 때 기름 부은 자가 등장해서 메시아의 최종 승리로 이어지는 겁니다.
뭐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십니까? 이런 성경 내용의 이야기, 시편 2편과 시편 8편을 제가 연결시켰는데 이게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자,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전쟁인데 그동안 그렇게 관심들이 없고 처음 들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뭐냐? 성경에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데 신경을 안 쓰는 이유가 뭐냐?
[나의 전쟁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젖먹이로부터 죽을 때까지.] 무슨 전쟁이요? 꾸준히 나의 전쟁을 해왔어요. 꾸준히. 젖먹이 때는 부모가 대리전쟁 하다가 드디어 어린이집에 가면 자기들끼리 전쟁이 시작되고 어린이집에서 그다음 유치원에 가요. 유치원 졸업반을 유치원의 어르신네라고 이야기합니다. 유치원 어르신네로 발표하고 졸업하게 되면 초등학교부터 해서 이건 뭐 아는 바와 같이 자기와의 전쟁을 합니다.
자기와의 전쟁에 기본 정신 모토가 뭐냐? 이거에요. [나의 행위로 세상이 달라질까?]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행위로 세상이 달라질까요? ①달라진다, 여기 해당되는 사람이 있어요. 사기꾼, 정치꾼. ②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세상은 안 달라진다. 이것은 세상 추이(흐름)의 종이 되고자 마음 굳힌 자. 99.99%의 모든 사람들. 99.99%의 모든 사람들이 해당됩니다. 이 속에 사기꾼들도 많이 포함되죠. 세상 추이의 종이 되고자 마음 굳힌 사람들. 99.99%에요.
정치꾼들은 아니다, 내 행위로 세상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안중근 의사. 내 행동, 총을 쏨으로써 조선이 달라질 것이다. 나 하나 희생하고 나라가 살자, 이런 거. 모세가 애굽 사람 죽이고 자기 민족을 해방하려고 시도했던 그거. 그래서 뭐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나라 바뀌었어요?
대다수는 ②번, 이겁니다. 추이를 지켜보다가 후딱 갈아탈 때는 갈아타자, 이런 식이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나는 세상 추이에 스스로 자진해서 ‘노예’가 되기로 하는 거예요. 추이를 보고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종은 종이로되 좀 편한 종 되는 방법이 없을까를 보는 겁니다. 거의 99.9%에요. 어차피 나의 행위로 세상은 안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종이 되고, 세상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전쟁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전쟁을 하고 있어요.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 추이를 살피는 전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몸뚱아리, 한 몸으로 태어났기에 꾸준히 뭔가 내가 나를 위한 전쟁을 하지 않으면 내가 이 땅에서 종이더라도 비참한 종이 된다, 하는 그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대적이 된 것을 하나님은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시편 2편을 다시 보게 되면 9절에 “내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12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살아남을 길을 또 허락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12절에,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무엇이 기다립니까?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지금 시편 2편의 이 전쟁 이야기가… 시편 1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잖아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잖아요. 복 있다는 말은 율법 안에 이 전쟁 이야기가 소복이 담겨있다는 뜻이에요.
율법을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율법에서 뭘 끄집어내야 돼요? 아들이 어떤 행위를 하시는지, 준비된 아들이 준비된 행위를 어떤 식으로 드러내시는지를 보면서 우리는 그 아들에게 입 맞추고 전적으로 굴복할, 굴복이란 패배를 의미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알아서 패배해버릴 준비를 하면 돼요. 그 발 앞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제가 바로 주님의 적 맞습니다.’ 자인하고 항복해버리는 겁니다.
사로잡히는 거예요. 주님께 사로잡히는 거예요. 사로잡히겠다는 말은, ‘나는 그동안 나의 전쟁을 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을 화나게 한 행위였습니다.’ 하는 것을 자인하는 거예요.
논리상 보면 굉장히 복잡한 것 같지만, 이렇게 이야기 들어보니까 어떻습니까? 아주 간결하죠. [하나님이 전쟁을 벌였다. 알아서 기라.] 이 얼마나 간결합니까? 그런데 이 간결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동안 몰랐다는 것은, 이러한 율법 안에 있는 복, 아들이 자진해서 벌이는 이 전쟁이야기를 가리고 있는 장애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장애요소가.
연세 많은 분들이 성경 좀 읽으려고 성경 볼라치면 갑자기 눈에 백내장 현상이 일어나고 그런 거 없습니까? 갑자기 눈에 뭐 안개가 자욱하게 낀다든지 그런 현상 없어요? 갑자기 잠이 온다든지, ‘아이고, 내가 성경 알아서 뭐 하노? 설교나 듣지. 잠이나 자자.’ 하고 마음속에도 자욱한 안개 끼어서 그냥 안개와 더불어서 눕게 된다든지 그런 현상 일어나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씀을 방해하는지 알아야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8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면, 우리가 이미 젖먹이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젖먹이 시절을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어린이집도 아니고 유치원도 아니고 우리는 마음적으로 이미 어른들이 되고 말았어요.
‘주님께서는 주의 전쟁에 젖먹이를 투입한다.’ 이 말에서 젖먹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느 젖먹이도 ‘내가 했다’ 하는 젖먹이는 없어요. 뭐든지 ‘내가 했다’가 되어버리면 이건 젖먹이가 아니에요, 이미. 장성한 자의 자의식이에요. 젖먹이와 어린아이를 주께서 투입시키는 것은 이 전쟁의 승리가 바로 8편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이름으로만 고스란히 다 돌아가게 되는 전쟁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돼요. ‘젖먹이가 전쟁했는데 공로는 주께 돌린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전쟁이 다 끝나고 나니까 ‘우리가 뭘 해도 우리는 젖먹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는 것을 차후적으로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우리는 철딱서니 없었습니다.’ 하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내가 이 전쟁에 관여하거나 기여한 바는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겁니다. 구원받더라도 몸만 아프죠. 면역이 약해져서 아픈 병 있잖아요. 그럴 때 감사가 되죠.
그러니까 자기를 이미 성인이라고 간주하는 거예요. 성인이라는 말은 독자적, 독립적 판단의식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고 그걸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거예요. ‘나는 젖먹이도 아니고 어린아이 안 됨을 주께 감사합니다.’ 이런 식이란 말이죠. 판단의식이에요. 독립적인 판단의식이 있으니까 관심사가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자기 전쟁에서 한시도 자기 전쟁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단 한순간도. 자기 행위에 대해서 자기가 계속해서 판단작업을 해야 되기 때문에. 잘했을까 못했을까. 인간이 잘한들….
아까 얘기했지만 잊어버렸을까 싶어서 다시 한 번 상기시켜드립니다. 내 행동으로 세상이 달라집니까? 안 달라지죠, 내 행동으로. 안 달라져요. 안 달라지는데 우린 왜 행동해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뭡니까? 열심히 한다고 세상 달라집니까? 안 달라지잖아요. 그런데 왜 하는 거예요? 왜 열심히 살려고 하고 열심히 일하려고 하고 왜 그렇게 합니까? 뭐 특별한 이유 있어요?
이제 그 이유를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이유를 알아야 돼요. 왜 그동안 우리가 주의 전쟁에 무관심하며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주의 전쟁에서 반대편, 원수 편인데 그 편에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걸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 때문에 그래요. 남. 남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내 자아성 정립에 타인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소자(어린아이)는 처음부터 어른 되는 게 아니에요.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빈 공간에 어른들의 욕망, 바라는 것이 어린아이에게 투입되게 되어 있어요. 순서대로 볼게요.
①어른들의 요구사항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채운다. 처음 순서가 이렇습니다. 이걸 흔히 ‘양육’이라 하죠.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부모가 없으면 무슨 기회가 줄어들어요? 양육 받을 기회가 없죠. 심리상태가 촘촘하지 않고 헐거워요. 듬성듬성해요. 동물적인 본능이 따라오죠.
첫 번째로 어른들의 요구사항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채우게 되면 그다음 ②어린아이는 묻는다. 누구에게 묻는가? 어른에게 묻는다. ‘저 무엇을 하면 돼요?’ 이걸 번역하면, ‘제가 본받아야 될 타인의 욕망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저 어떤 사람 되고 싶어요?’ 이런 뜻이에요.
‘아버지, 저 어떤 사람 되면 돼요?’ 말을 쉽게 하면 되는데 왜 어렵게 하느냐? 나중에 크게 되면 이 마음, 어린아이의 자아성이 가까운 아버지를 비롯한 어머니와 식구들부터 해서 어른들의 요구사항에 눈치 보며 그걸 의식하는 식으로 사회에 나가게 되어 있어요. 빈 마음이 아니라니까요. 나를 더 키워주고 성장시키고 성공시킬 자들에 대해서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욕망에 따라 내 행동이 결정되는 겁니다.
③내가 탐낼만한 타인의 욕망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 사람에게 묻질 않죠. 누구한테 물어요? 이제 자기 스스로 자립적인 사람 되었으니까 자기 마음속에 이 마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나 심심한데 대선 출마해서 대통령이나 해볼까? 나 국회의원 해볼까?’ 이게 뭐에요? 내가 탐낼만한 타인의 욕망은 무엇일까를 스스로 자기가 자기에게 늘 질문하는 거예요.
대구 강의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어느 초등학생 소원이, 나는 초등학교 졸업해서 중학교는 국제중학교, 고등학교는 민족 사관학교, 그다음 대학교는 하버드, 그다음에 졸업하면 뭐한다? 미용사. 왜 바로 미용사 안 됩니까? 이미 마음 자체가 남의 의식에 종속된 자의식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④나는 타인에게서 내 것을 발굴하고 가져온다. 그러니까 나는 어디로 갑니까? 나는 도로 나에게 간다. 이게 바로 나의 전쟁이에요. 나의 전쟁.
순서 한번 볼까요? 첫 번째, 어른들의 요구사항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결정한다. 채운다. 두 번째, 어린아이는 묻는다. ‘저 어떻게 살면 되죠?’ 묻죠. 이걸 묻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어른들의 마음으로 장착되어 있으니까. 세 번째,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타인의 욕망. ‘국회의원? 아니. 대통령? 아니. 의사? 아니. 판사?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것, 미용사? 오 그거 괜찮네.’ 이렇게 타인의 욕망 가운데 내가 얻을 수 있는 걸 선택함으로써 자기 자의식이 나 스스로 독립했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네 번째는 그 타인을 이용해서 자기가 성공하는 거예요.
미용사 같은 경우에는, “야, 너 미용기술 있네? 내가 키워줄게. 키워주면 대회 나가봐.” 미용사 대회 많이 있잖아요. 엄청나게 많죠. 어느 미용사치고 동메달 안 딴 미용사 없고요. 동남아시아 대회에서 우승 안한 미용사 없잖아요. 그렇게 ‘내가 키워줄게’ 하면 그게 끝입니까? 아니죠. 네 번째로 나가죠. 이제 더 이상 나한테는 스승이 필요 없습니다. 나는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쟁취했으니까.
방금 한 것을, 잠시 영어시간이라 생각하고 영어로 한번 해보겠습니다.
Baby, I'd love you to want me
그대여, 당신이 날 원했으면 좋겠어요
The way that I want you
내가 당신을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처럼 말이죠)
The way that it should be
당연히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해요
그다음에 더 있어요. 아까와 반대에요.
Baby, you'd love me to want you
그대여, 당신이 내가 당신을 원하도록 바라면 좋겠어요
The way that I want to
내가 원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If you'd only let it be
당신이 그걸 허락해준다면
방금 제가 한 ①,②,③,④ 절차를 이 팝송 노래가사가 너무 정확하게 잘 보여주고 있어요. You, I가 막 번갈아 바뀌죠. 번갈아 바뀐다고요. 이렇게 해서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어떻게 세상이 달라집니까?
인간은 나의 전쟁을 하면서 요구하기는 내 세상이 달라졌으면 좋겠다 하잖아요. 그런데 내 세상이 달라졌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그 달라지는 범주가 이미 형성된 타인의 세계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거에 지나지 않아요. 이게 인간들의 한평생입니다. 인간들의 한평생. 왜 주의 말씀에 관심 없는 줄 알겠죠?
이미 타성에 젖어버린 타인의 눈치를 보면서 타인이 나한테 가져다준 것으로 인해 내 자아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제 탐을 내도 이미 타인이 갖고 있는 것을 탐내는 식으로 이미 내 심정은 굳어져버린 거예요. 거기서 벗어나질 못하는 겁니다.
'Baby'니까 그대라고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른 거잖아요. 방금 한 노래 제목이 I'd love you to want me, Lobo가 불렀던 1972년도 노래에요. Baby, I'd love you to want me~ 하는 노래에요. 그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이 팝송가사나 대중가요 노래가 ‘야,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잘 묘사했어.’ 할 게 아니고, 그게 시편에 나오는 주의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오히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전쟁에 이게 하나의 방해물로 작동하고 있어요. 자기 전쟁에 미쳤으니까.
자, 그러면 이렇게 흥분할 게 아니고 어떤 대책이 있어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하는 것은, 인간은 이미 타인에 의해서 길들여진 자아상으로 그게 한계가 있으니까, 그 타인은 나 어릴 때 있던 어른들의 세계 아닙니까, 어른들의 세계에 계속 길들여지고 그걸 흉내 내고 모방하면서 그 방식으로 나는 나만의 절대적 자아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들이 반복해서 가는 길이에요, 그게. 인간이 반복해서.
그러면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하게 되면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서 계속 뭐가 돼요?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원수가 될 뿐이에요. 하나님의 진노 속으로 그냥 자진해서 거의 대다수가 쏠려 지옥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무슨 대책이 있어야겠죠. 주께서 어떤 대책을 준비해놨을까요? 요새 ‘~까요?’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는데, 어떤 대책을 준비해놨을까요?
이 세상의 어린아이 특징은, ‘어리다’ …… 앞엔 ‘빨리 어른 되어야지’라는 기대감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어린아이들은 ‘진보’를 생각합니다. 미래,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로 세상이 알아줄, 세상에서 유명해서 다들 나에게 알아서 기고 굴복하고 아주 감탄하는 그런 미래를 꿈꾸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시간요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보가 아닌 ‘차이’입니다. 진보가 아닌 차이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인간은 차이 같은 건 모르고 내가 지금보다 더 향상되는 것에만 신경을 많이 쓰고 있거든요. 이제 학교 방학하면 장사 안 되겠다고 또 김을수 집사님이 걱정이 늘어졌어요. 진보가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이것을 도로 젖먹이로 돌리려면 어떻게 하는가?
내가 젖먹이에 불과하고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각인되고 자인되는 경우는 하나님이 벌이는 그 전쟁의 결실, 열매로서 우리가 젖먹이가 되는 거예요. 그래, 그건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그게 될 수 있는가? 그만 뜸 들이고 말씀해주세요.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가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나는 늘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을 만나왔죠. 이 자리에 낯선 타인이 들어와요. 낯선 타인. 이게 바로 주의 이름이 복음을 가지고 들어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은 아까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그냥 놀러온 게 아니죠. 주의 이름은 전쟁이죠. 전쟁하는 주의 이름이에요.
나는 타인과 떨어질 수 없어요. 하루 일과가 늘 남은 어떤 좋은 걸 갖고 있는가, 남은 어떤 욕망이 있는가 지금 그거 베끼고 그걸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정신이 바짝 쏠려있는데 여기에 주의 이름이 들어와 버립니다. 주의 복음이 들어와 버려요. 이 사람과 이 사람이 만날 때에 제3자 주님이 복음을 가지고 이 속에 들어와 버리면 이 사람과 이 사람의 인간적인 만남, 세속적인 만남은 소환됩니다. 누구 앞에? 십자가 앞에. 주의 복음 앞에 소환돼요.
학교에서 학생 둘이 싸우잖아요. 그때 그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한 선생님은 뭐라고 합니까? “둘 다 교무실로 와. 내 책상 앞에 둘 다 와.” 오죠. 그러면 그 둘 사이에 누가 끼어들었어요? 선생님이, 초월적인 타인이 끼어든 거예요. 그러면 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은 바로 A에서 B로 가지 못하고, 불렀으니까 호출했으니까 소환했으니까, 선생님이 개입하기 전에 보던 내 타인과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보는 타인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완전히 달라지죠.
이 달라지는 게 뭐냐? 십자가 앞에서 복음 앞에서 우리가 완전히 깨어지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그동안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모든 인생이 싸그리 와장창 하고 접시 깨듯이 유리창 깨듯이 그 앞에서 다 깨어지는 겁니다.
개입할 때 아는 것은, 세상은 내가 행동한다고 해서 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 이 현실성을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현실은 주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되어간다는 것을 확인하게 돼요.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림을 통해서 묘사해드리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규정을 받게 돼요. 규정을 받게 되면, “왜 죄인이냐?” “그냥 죄인입니다. 죄 지었습니다.” 이런 죄인이 아니죠. 주 앞에서 죄인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행해왔던 것이 전부다 소환되는 거예요. 네가 남하고 만날 때 어떤 자세, 어떤 마음가짐으로 만났는가 십자가 앞에 복음 앞에 소환되는 거예요.
그러면 소환될 때 우리는 뭘 다시 한 번 점검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타인을 만날 때, 어떤 자세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만났는가를 혼자만 아는 게 아니고, 주님 십자가 앞에서 이미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한 십자가 앞에서 그걸 다시 한 번 실토해내는 겁니다.
자, 그러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림 하나로 묘사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있는데 [인간이 자기의식으로 무장(武將)되어 있을 때] -무장이죠, 무장이라 하는 것은 어떤 태도를 말합니까? ‘나의 전쟁을 한번 해봐?’ 이런 적극적 자세가 무장이죠. ‘덤비기만 해봐. 건드리기만 해봐.’ 이렇게 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방어기제. 방어기제인데 어떤 방어기제냐 하면 [공격적 방어기제]. 나를 지키는 데 있어서 그냥 수비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남한테 확 쏘아버리는 거예요. 말이든 뭐든 행동이든 간에 확, 근처 오지 마! 하고 콱 밀어버리는 식으로 자기 방어기제를 가동하는 거예요.
무엇을 지키는가? 과거를 지켜요. 누구 과거? 나의 과거를 지켜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과거를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네가 와서 그걸 전부다 더럽히고 훼손하게 되면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더럽혀지잖아요. 내가 지금껏 쌓아놓은 어떤 탑이 있는데 그 탑이 무너진다면 나는 더 살 이유가 없어져요. 이것이 방어기제인데 수비적이 아니고 공격적으로 나타나요.
이것을 [(나의) 과거 고수]라 해요. 과거를 고수하는 거예요. 과거를 고수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 [자기 위주의 연속성(연결성)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방어기제까지 동원시키고 자기가 한결 같이 나는 어제와 끊어짐이 없이 계속 이어나가는데 그것마저 힘들어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자기 함몰]. 그냥 무너지지 뭐. 이게 뭐에요? 자살이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은 항상 감사가 없고 모든 말과 태도에 분노가 피어나요. 이것이 공격적 방어기제의 일부기 때문에 분노가 피어나요. 이걸 가지고 정신병이라 합니다. 그리고 분노 가운데 감사를 얻기 위해서 환상, 환타지를 자꾸 꿈꾸고 있어요.
다시 아까 한 이야기와 연결시키면 내 행위로 말미암아, 내 것을 지키는 방어기제로 말미암아 내가 있는 소박한 나의 세계는 내 행동으로 변화될 수 있고 바뀔 수 있다는 그러한 환상에 매진하고 있어요.
어떻습니까?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 있습니까? 백퍼입니다. 100%에요, 100%. 백프로입니다. 나의 과거를 늘 기억하고 그 과거와 지금을 연결시키는 거예요. 연속성이라 했는데 더 정확하게는 연결성이에요. 연결성 시도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걸 지키기 위해서 공격적인 방어기제. 까이기 전에 깐다.
그도 저도 실패하면 자살할 만반의 마음준비가 다 되어 있어요. 번개탄으로 할까,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릴까. 자기 자살도 공격적이에요. 자동 소총으로 대학교에서 열 몇 명 죽이고 나도 뛰어내리자. 체코 대학에서 어제 그런 일이 있었죠. 이게 자기 함몰이잖아요. 에이, 더러운 세상. 너 죽고 나 죽자. 내가 투자를 했는데 빚이 있으니까 아내하고 자식들 목 조르고 자기도 죽고. 자기 함몰. 이게 강력한 방어기제입니다.
이 정신병은 인간세계에 보편화되어 있어요. 이 정신병에 병명을 붙인다면 ‘나는 어른이다.’ ‘나는 자립적이다.’ ‘나는 자립적 자기의식이다.’ 이렇게 되죠.
그러면 이렇게 그림 그렸으니까 여러분들은 이제 뭐가 궁금하냐? 이게 아니라면, 이런 인간이 아니라면, 진짜 천국 가는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궁금할 거예요. 제가 또 그려드리겠습니다.
아까 자기의식이 십자가 앞에 완전히 박살난 사람인 성도는 어떤 특징이 있냐 하면 [사명감]이 있어요. 사명감. 낯선 타인에 의해서 새로운 관계를 연결하다보니까 그분이 지시하고 맡기신 사명이 있어요. 그 사명감은 매사에 [봉사]로 이어집니다. 봉사가 뭡니까? 대가(代價)보고 일하지 않는 게 봉사죠.
특징이 [과거의 상실]이에요. 내가 뭘 했지? 오 목사님 집에 가서 신이 만나거든 “누구세요?” 너하고 나하고 과거에 어떻게 있든 과거는 날아가 버렸으니까. 지금 주님께서 우리 집에 같이 살게 했다, 그게 전부에요. ‘너는 나한테 봉사 받을 준비되어 있지? 나는 너를 키울 사명감에 투철하고 있는 거야.’ 이런 거. 특히 본인이 십자가 앞에 깨어졌으니까 죄인이니까 죄인은 못하는 게 없어요. 죄인이니까. 죄인이 주는 [자유성]을 갖고 있어요. 죄인은 자유성을 갖고 있어요.
사명감, 봉사, 자유성, 과거의 상실 이런 것들이 성경에 보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이지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지금 염려를 판단할 권한은 오늘로서 우린 끊어지는 거예요.
매일 단절성이죠. 나로 인하여. 나로 인하여 단절되고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연결되고. 나는 단절되고 주님의 지시와 은혜에 준해서 연결되고. 연결되면 어제와 내가 연결되는 게 아니고, 어제의 주님의 은혜와 오늘 주님의 은혜가 연결되는 거죠. 이것을 바로 말씀으로 확인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복음으로 확인되는 거예요.
끊어졌는데 연결되었으니까 나올 수 있는 것은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데 안 죽었으니까 감사가 나오죠. 감사. 내가 살아있는 게 감사가 아니고, 주께서 살아계심을 감사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음을 감사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내 안에 살아계심을 감사하는 거예요. 나는 주님의 운반체니까. 말씀의 운반체니까요.
이런 여러 가지 있지만 제일 근본적인 것은, 사는데 나를 위해 사는 것은 타인과의 전쟁이지만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사는 것이 주의 뜻에 의해 사는 거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사명을 감당하면 되죠. 그 사명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봉사하면 되는 거예요.
방학 때도 뭐 봉사하면 돼요. 시험기간에도 봉사하면 되고. 애들 왔다 하면 “뭐 내가 도와주면 되느냐?” “아저씨, 독서할 수 있는 방 있어요?” “있지. 내가 봉사해줄게.” “하루에 얼마입니까?” “하루에 15만원. 봉사료 치고는 헐은(싼) 거야.” 한 10명 오면 150만원. 가격이 문제에요? 마음자세가 중요한 거죠.
타인이 생각하는 나 이전에 이미 주님이라는 타인과의 만남으로 내가 깨진 상태에서 그다음에 타인을 만나죠. 또 ‘이렇게 되었으니까 만날 필요 뭐 있느냐. 구원 받았는데.’ 이러면 안돼요. 그런 타인을 만났을 때 그 타인을 만난 순간, 내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식으로 내가 다가갔던가, 주님 앞에 날마다 소환되는 것이 중요해요. 이 소환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나 이제 잘났다,가 아니라 내가 남을 만날 때 새록새록 기억나는 거예요. ‘내가 바로 나의 어른스러움으로 내가 내 걸 지키기 위해서 아주 정신병자로 살았구나.’ 하는 것을 과거 이야기하듯이… 그러니까 과거 이야기해버리면 또 뭐가 나와요? 또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주님 때문에.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