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31214b행7장38절(외지인)-이 근호 목사
안양20231214b행7장38절(외지인)-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시간에서 인간은 이미 죽었다고 되어있지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는 것은 인간선에서는 이제는 더 이상 할 말이 아니에요. 그걸 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저 남아있는 것은 뭐냐, 말씀 자체가 사느냐, 죽느냐가 중요하지요. 말씀 자체가. 내가 죽어서 좋은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 왔다면 그건 가짜교회고요. 진짜 교회는 말씀이 말씀대로 살아있으면 진짜 교회고 말씀이 희박해지고 말씀을 교인들이 외면한다면 그건 죽은 교회가 되는 거예요. 기준은 성경 말씀에, 복음 말씀에 있습니다.
자,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 참된 교회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장벽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거예요. 이런 게 어려워요. 하나님의 쓰시는 방식이 휀스, 장벽가지고 하는 거예요. 도저히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쪽에 있는 사람이 저쪽으로 건너올 수 없고, 저쪽에서 건너 올 수 없는 장벽가지고 말씀이 말씀대로 다시 되돌아오는 순환구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벽이니까 이 장벽을 한 번 그려보지요. 장벽이 있다. 이쪽은 뭐냐, 이방인이에요. 이쪽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중에서 극히 숫자가 적은 작은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하면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택했다. 택했다. 무엇으로 택했는가, 사랑으로 택했다.
또 이야기한다면 질투. 질투심으로 택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거 다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이방인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해당되면서 택했으니까 이방인은 이 선택된 것에 넘어 올 수 없는 거예요. 왜 이 장벽을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왜 세우느냐, 이 장벽의 시작은 창세기3장24절에 벌써 시작됩니다.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있는 곳에 쫓겨나간 인간이 결코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차단시켰지요. 에덴동산의 동쪽에 그걸 차단 시킨 거예요. 들어오지 말라고.
인간들의 생각은 그 생각이 아니고,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어서 들어오라고 길을 만들어줘야 이게 좋은 하나님이고, 착한 하나님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의 교인들이 그걸 생각하고 교회에 오는 거예요. 이렇게 아까운 시간 다 줄여가면서 그 없는 돈까지 헌금까지 준비하면서 이렇게 정성과 성의를 보였으면 주께서는 성의를 봐서라도 길을 열어줘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만약에 어느 불국사에서 행사를 하는데 시간이 지나서 문을 닫아놨는데 멀리서 전라도에서 와가지고 불국사 들어오려고 이렇게 헌금에다가 이렇게 했으니까 넣어주세요. 하면 불국사 주지가 안 넣어주겠어요? 헌금까지 하겠다는데. 넣어주겠지요. 이게 인지상정.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안된다만 있는 게 아니고 안되는 것도 정이 가면 통한다, 라는 게 인간들의 생각이거든요.
인간들도 자비가 넘치고 인간의 동정심이 넘치고 선한 양심들이 각자 있다면 법으로 안되는 거 맞지만 그래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게 있는 것이 인간들의 선한 품성이라면 인간보다 더 선한 품성을 가진 어떤 존재. 절대적 존재. 그게 누구지요? 신이라면 인간이 그 하나님의 성품을 약간은 분여받았다 하지요. 분여. 할당받았다면 할당받은 그 최고의 자비심의 결정체가 뭐냐, 신의 속성이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 인간들끼리도 서로 정을 통하고 다 법을 넘어선다면 진짜 하나님은 애정사정하면 다 들어주게 되어있다. 라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지요. 그러면 뭐가 의미가 없게 돼요? 에덴동산 동쪽 길은 완전히 차단같은 것은 이건 그냥 하나님께서 그냥 겁주려고 급박하려고 준 거지요. 그냥 실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지요.
보세요. 배후에서 악마가 인간을 얼마나 삶아놨는지 여러분이 아시겠지요. 우리도 악마의 생각에 수시로 온천수처럼 터져나옵니다. 눈 한 번만 감아주소. 이런 거. 죽은 뼈다귀 주제에. 마귀가 자꾸 니 살아있다. 가능성있다. 훌륭하게 될 수 있어. 성화되면 천국가는 거야. 이런 식으로 자꾸 마귀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장벽이 있습니다.
장벽은 바로 창세기3장24절에 있는 장벽, 그걸로 꽂아놓은 거예요. 이 장벽은 이스라엘 쪽에서 세운 게 아닙니다. 이방인이 세운 게 아니에요. 누가 세웠겠어요? 율법이 세웠어요. 율법이. 율법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율법은 어디에 있는가,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이에 있었던 거예요. 그 사이에. 그 틈에 있었어요. 율법 때문에 되돌아 갈 수 없어요. 선악과 따먹고 물어드릴게요. 생명나무 선악과 나무 심어놓고 물으면 되겠지요. 얼마면 돼요? 내가 물어드릴테니까. 다시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갑시다, 할 수가 없어요.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야 되돌아갈 수 있어요. 율법을 지키면. 인간은 못 지킵니다. 못 지키면 저주에요. 그래서 이 율법을 꽂아 넣어버린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있지만,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율법에 준해서 이스라엘은 성전되었고, 이쪽의 이스라엘이 성전됐다면 이방인은 어떻게 돼요? 선택되지 못했지요.
지금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고, 십자가가 중심이 되는 것을 신약에서는 뭐라고 한다? 교회라고 한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교회가. 교회 자체가 장벽이 되는 거예요. 교회 자체가. 교회 자체가 장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만약에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자체가 교회가 돼요. 그리고 이방인들은 단 한 명도 구원의 반열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단 한 명도. 들어올 수 없어요.
그런데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면서 이스라엘 중심이 아니고 주신 율법, 말씀, 언약, 약속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약속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이스라엘 내부에서 뭔가 버짐 또는 구멍, 또는 상처, 뭔가 질서가 허물어지는 듯한 그런 증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율법으로 처음에 율법으로 전체를 일괄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뻥! 뻥! 하고 이스라엘 내부에 원래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이스라엘로 병들어가는 현상을 보이게 되는 거예요. 이게 율법이 주어지면서 생긴 후유증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율법과 이스라엘이 합체되는 조건으로 이스라엘에게 줬는데 이게 합체되지 않고 드디어 율법의 이탈현상이 이스라엘 내부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자, 율법의 이탈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부에 이탈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려주는 시그널같은 신호를 계속해서 주께서 보내줬었습니다. 그 시그널 역할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장벽을 넘어선 사람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는 현상이 일어나요.
룻에게서, 또는 라합에게서,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전부 다 뭡니까? 이방인들이지요. 장벽 때문에 들어올 수 없는 이방인이 이스라엘 내부에 드디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혼합체가 되는, 처음부터 혼합체였어? 라는 인상을 갖게 되지요. 이스라엘은 눈치를 챘어야 돼요.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만드신 적이 없다는 것을 눈치를 챘어야 돼요.
하나님은 언약을 위한, 완전한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택한 거예요. 무엇의 완전체냐 하면, 장벽의 완전체. 또는 완전한 장벽.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라고 예수님이 이 말씀 하실 때 그 말씀을 하시는 근거는 뭐냐, 예수님의 자신의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내 말이. 내 말을 너희에게 전하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이사야6장에서 이야기할 때 그 이사야가 어떤 시대였습니까?
남북이 이미 갈라진 상태지요. 이제 남쪽에서는 북쪽 이스라엘은 날아가버리고요, 공중분해 되고, 남쪽도 서서히 허물어지는 그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되어있지요. 십분의 일이 남아있을지라도 짤려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그루터기밖에 없다. 이사야6장이야기입니다. 그루터기 밖에 없지요.
그럼 그루터기는 왜 남겨 놓았는가, 방금 남겨 놓기 위해서 한 거예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잘라내고, 잘라내고, 잘라내고, 잘라내는 계속 뭐냐, 남은 거, 남은 거, 남은 것의 연쇄과정에서 계속 이어지겠지요. 그 이스라엘의 남은 자. 오직 몇 명이겠어요? 남은 자. 두 명? 세 명? 몇 명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남은 자.
율법을 유지하고 있는 장벽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최후의 남은 자는 누구겠어요?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나는 잃어버린 이스라엘 양을 구하러 왔지, 이방인을 구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돼요.
그러면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이 말씀의 대상이 세 개가 돼요. 첫째는 뭐냐, 첫째는 역사적 이스라엘. 둘째는 역사적 이스라엘과 대비되는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 세 번째는 언약에 의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국가 민족의 형태가 이 세 가지에요.
기존의 이스라엘, 이방민족, 그 다음에 언약에 의해서 생겨진 진짜 이스라엘. 진짜 이스라엘은 민족 혈통이 이방인이냐, 아브라함의 혈통이냐, 이런 것을 전부 다 극복한 거예요. 그 조건을 취소시키는 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언약적 이방인 이 사람들은 이쪽 역사적 이스라엘, 이방민족한테는 뭐가 되느냐 하면 외지인이 돼요. 외지인. 외부 사람이 돼요. 외부 사람.
아, 외부 사람, 외지인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그 외부인의 반대말이 내부인. 우리끼리이지요. 우리끼리. 우리끼리 통하는 이 말을 우리끼리는 아는데 바깥에 나와서 우리끼리 말은 바깥에서는 통하지를 않잖아요. 한국인이 한국인끼리 이야기하면 아는데 베트남사람에게 하면 우리 한국말을 하면 베트남사람 알아봐요? 못 알아봐요? 못 알아보지요. 이게 세상에서 말하는 베트남 사람은 한국사람에 비해서 외지인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외지인은 제3의 종족이라 할 수 있는데 외지인은 반대입니다. 인간들끼리 서로 통하는 그 말의 뜻을 외지인이 비로소 알아요. 제가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 왜 저들이 지옥 갈 수밖에 없는지. 주의 언약과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는데 그 뜻은 일방적으로 잘못된 뜻으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지인이기 때문에 비로소 그걸 간파하고 있는 거예요.
외지인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하거든요. 아까 성령을 뭐로 받는다 했습니까? 선물이지요.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주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요. 주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주의 말씀이 무엇을 함유하고 있는지를 알아요.
안다고 하니까, ‘갑자기 내가 뭘 알고 있지? 나, 지금 모르는데. 깜깜하네.’ 이런. “다 알지요?” 하면 “뭐? 나 모르는데.” 부산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지요. 남편이 “니, 성경공부 좀 해라. 성경 그렇게 몰라도 돼?” 할 때, 아내가 들어요. 들으면서 남편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성경공부해서 많이 아는데 나는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등신이 돼. 모르겠다.” 그게 정답이지요.
자, 외지인이란 외지인이 알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예수님이 홀로 행하셨다는 사실’ 이걸 알아요. 왜냐하면 외지인중에 최고 외지인은 이 지구상의 사람이 아닌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그 인간 지구 밖에 있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있는 인간이 쫓겨난 그 동네에 함께 계신 분. 생명나무와 함께 계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분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같이 생명나무에 들어오게 된 사람은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아는 거예요. 예수님은 홀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하늘나라 들락달락 하시면서 다 이룬 거예요.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도 처음이고, 전부 다 그런 분을 성경에서는 주님이라 하거든요. 그 예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우리의 주님이라 하잖아요. 계획하신 것도 마감하는 것도 일방적으로 주께서 다 하신 거예요. 그 점을 누가 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만 그 점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해석 할 때는 어떻게 해석한다? 반드시 어디를 경유해요? 주께서 다 이루심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 해석할 때의 시작점은 왜 우리는 못하는가, 왜 우리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는가,부터 출발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왜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오해들을 우리가 양산하고 있는가를 아는 거예요. 그래야 주님께서 니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그러한 평가를 가슴에 맞바람을 우리가 품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품고 성경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아, 우리는 성경 보면서 항상 내가 안 놓치려는 것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이 말씀을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이 말씀을 지켜서 이런 것, 저런 것 지켰습니다. 내놓을 만한 어떠한 존재가 되겠다는 그 의도. 그 의도에서 우리는 지금 꾸준히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지요. 주님이 다 하셨는데 우리는 주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이 말씀을 지키면 되잖아. 지켜서 구원받으면 되잖아. 이런 식이에요. 예수를 믿어라. 아! 믿지. 믿습니다. 이리 되거든요. 믿음이 문제에요. 믿음이. 믿습니다, 나오는 게 문제에요. 문제.
인간은 자기 행위를 믿게 되어있어요. 마귀에 의해서. 자기 행위가 아니면 안 믿게 되어있어요. 자기 행한 것만 기억한다고요. 그게 우리의 과거를 형성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행한 것만 해야 돼요. 주의 모든 말씀에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겁니다. 없는 사람이 있다.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없는 사람이 있다. 없다, 있다, 서로 반대에 있는데 이건 한 문장에 같이 쓰고 있잖아요. 없는데 왜 있지? 없는데 왜 있다고 해요? 없으면 없는 거고, 있으면 있는 거지. 왜 없는 사람이 있느냐. 외지인이거든요. 외지인.
인간들이 서로 알고 있는 인간세계가 아니고 그 바깥에 없는 분이라 말이지요. 그럼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그거 잘됐네. 그럼 이 땅에 우리가 있으니까 우리 있는 것도 알고, 우리에게 없었는데 우리에게 나타난 그 분도 같이 알아서 둘이 보태면 더 온전한 진리가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 아신 분이 쫓겨나갔어요. 쫓겨나갔다고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 댕강. 쫓겨나간거예요.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를.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이 있다고 보지를 않아요. 인간 배후에 누가 있다고 봤습니까? 인간 속에 이미 악마가 접수했어요. 이미 인간이라는 이 나이트클럽을 이미 악마가 접수했거든요. 조폭. 하늘나라 마동석이 와야 돼요. 어디서 까불고 있어. 한 번 패야 돼요. 악마가 인간세계를 다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악마가 지배하면서 나오는 가치관, 내 목숨의 가치는 보잘 것 없는 게 아니라는 대원칙. 대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음 전하고 말씀 전할 때 듣는 사람 이 원칙에 깔고 전해야 돼요. 그래서? 그래서? 내 가치가 어떻게 높아질 수 있다는가를 그 이야기를 해주셔야지. 이런 식이에요. 내 가치를. 그러니 이건 죽은 뼈보다 더 못해요. 죽은 뼈는 아예 아무소리 안하고 있지요. 이건 말이 많아. 대들고. 진짜 마동석이 한 번 불러서. 그러니까 입다물라는 말이야. 그걸 누가 입다물라는 그 고백을 누가 했습니까? 욥이 고백했잖아요.
욥이 말이 많아. 제가 뭐가 잘못됐는데 고난받습니까?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게. 아직 내 목숨의 가치는 하나님이 보장해줬잖아요. 하나님이 보장해줘서 가치있다 이 말이에요.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이 보장해줘서. 하나님이. 불교신자 같으면 부처님이 나를 니 보살, 부처라고, 보장해줬다는 거예요. 우리교회 목사님이 내가 신자라고 인정해줬다는 거예요. 끝까지 내 목숨의 가치를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고 이건 귀한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아, 이 성깔 죽어야 없어질 거예요. 벌써 복음 들을 때, 인상 보면 알아요. 이게. 강의중에 뛰어나가기도 뭐하고, 좀 참고. 이런 인상 있잖아요. 그런 인상 딱 하나밖에 없어요. ‘니가 뭔데 내 존재 가치를 모독하느냐.’ 지금 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요한복음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듣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게 틀린 말입니까? 기둥 뒤에서 하던 말을 강대상 앞에서 했다 말이지요.
제가 노래 가사를 하나 쓸게요. 김민기의 작사.작곡, 양희은이가 처음 불렀던 노래 이라는 가사 내용이에요.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에 시련 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에 시련 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긴밤 지새우고, 한밤중을 참았어요. 풀잎에 맺힌, 아침에 풀잎에 맺히기 위해서 긴밤, 어둔밤 힘든 세월을 끝내 이기고 이겼다가, 아침에 하니까 진주보다, 이슬로 보지 말자. 값진 진주가 하나 맺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파를 견뎠습니까. 그 세파를 진주보다 귀한 아침 이슬처럼. 그 다음에 내 맘에 서러움이 태양이 묘지 위에 태양 떠오르고, 데모 노래로 나오는데. 이게 방금 우리가 배웠잖아요. 이게 한마디로 뭡니까. 내 목숨의 가치가 그렇게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노래가 통곡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평소에 우리가 잠자고 있었던 내성을 건드린 거예요. 누가? 마귀가. 내가 이렇게 월급이 얼마 되지도 않고 이렇게 살지만,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은 무시당한 자격도 안 돼요. 장모님뼈다귀해장국이 무슨 뭘 그냥 뼈인데, 무시고 뭐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이미 죽었는데. 그런데 죽을 건 죽더라도 아직은 안 죽었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고집이에요. 이게 지금 외지인이 아니고 내지인이래서 그래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태어날 때 받았던 그 언어가 인간의 언어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인간은 주의 말씀을 무슨 뜻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끼리 통하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경이라는 게 인간언어로 되어있잖아요. 인간의 언어로 되어있으니까 얼씨구나 하고 지키자. 고귀한 가치가 말씀을 만나서 비록 힘든 긴긴밤이지만 이슬처럼 진주처럼 빛날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진주인가. 안 되겠다. 노래를 들어야겠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 낮에 찌는 더위는 나에 시련 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가사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자기의 목숨에 가치에 대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지를. 눈물이 확 쏟아져요. 세상이 나를 안 알아주는데서 오는 서러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진주하고 자기 마음을 일치시키잖아요. 죽었지만 태양은 떠오르는 거예요. 어딜 가는데? 광야에 세례요한 있어요? 젊을 때 양희은 노래입니다. 양희은 목소리에요. 기타치고 청바지 입고 그 때 양희은이에요.
이게 인간 죽을 때까지 이 마음이에요. 죽은 묘지 위에 태양은 있지만, 그걸 하나의 시료로 보는 거예요. 내가 더 연마될 수 있고 더 우수할 수 있고, 더 훌륭할 수 있는 거. 나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곳은 교회지요. 교회가서 말씀을 갈고 닦으면서 하나님 보란 듯이 “하나님, 저 보세요. 이런 식으로 단련하고 연마하고 있고 아침이슬 같이 진주처럼 아름답게 연마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당신이 보내신 목사들이 가르친 성화론이거든요. 사실은 바리새인 뒤에 마귀가 있는데. 주의 말을 알아듣지를 못해요.
뭘 빠뜨렸습니까? 장벽을 빠뜨린 거예요. 십자가를 빠뜨린 거예요. 십자가를. 구원될 자격도 없고 지옥가야 마땅해요. 장벽이 선물로 주지 않는 한. 장벽 자체로 선물이에요. 예수님 자체가 우리에게 장벽으로 주어집니다. 십자가 자체가 장벽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내 가치를 보존하는데 거기에 집착하다가 주님의 장벽이 왔을 때 그 장벽을 우리는 비로소 구경하게 되고 그걸 마주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일은 구원은 누가 했다? 그 장벽을 홀로 넘으신 예수님이 넘으셨다는 사실을 장벽 넘어 에서 주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주님의 선물이에요. 십자가가.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랑할 것은 하나밖에 없다. 십자가라는 장벽. 따라서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설교하고 난 뒤에 하는 말이 28장26절,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왜? 그동안 사도바울이 뼈다귀보고 설교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이 놀라는 것은 분명히 뼈인데 뼈가 왜 이 말을 알아듣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신기한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따라서 내린 결론은 뭐냐,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거예요. 어떤 능력? 말씀이 말씀으로 회수하는 과정에서 누구 하나 얻어걸린 거예요. 부메랑이 돌면서 하나 얻어 걸린 거예요.
그냥 건짐을 받은 거예요.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선택하듯이 누구 하나 선택된 거예요. 뽑혀 나온 거예요. 이게 바로 말씀이 와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으로 돌아가는 이 원칙. 그 안에 흐르는 것은 모든 것이 시작도 주님이고, 모든 일도 주님이 혼자 했고, 마감도 주님이 하셨다는 그 원칙이 말씀 안에 그 사연이 담겨있어요.
그런데 11페이지에 보면 한국교회에서 일하는 것은 보수신학이에요. 보수 신학. 자, 여러분, 신학이라는 게 왜 필요한가, 성경신학, 조직신학, 목회신학, 실천신학, 신학을 크게 네 종류로 나눠요. 실천신학 상담학 같은 거. 목회신학은 교회 예배당 등록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런 거. 상담학도 사실은 목회신학에 포함되고 실천신학이라 하는 것은 선교, 전도하는 거를 실천신학이라 하지요.
조직신학은 하나님론, 구원론, 이성적 논리를 가지고 집어넣어서 정리하는 것. 성경신학은 성경의 헬라어, 히브리어, 그거 파헤쳐가지고 그 원뜻이 원래 헬라어, 히브리어, 원뜻이 무슨 뜻이며, 그것은 전체 맥락에서 어떤 뜻을 갖고 사용했는지 그걸 연구하는 게 성경신학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신학교 가고 싶어요. 지식이라는 욕구가 확 올라옵니까. 알면 알수록 더 무식해지면 천만다행입니다.
그래서 14페이지에 밑에서 10번째, 점점 더 보혈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을 줬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같이 공유해야 그게 교회다 이 말이지요. 아까 했지요. 내가 나의 문제점을 내 입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스스럼없이 나와 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 아는 교인들끼리 입다물고 말을 안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제가 보기에는 내숭 떠는 것밖에 없어요. 그럼 내숭 떨면 안되느냐, 떨면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내 존재의 가치가 이게 손상이 가기 때문에 그래요. 내 존재 가치가. 아침이슬 못돼서 환장할 일 있습니까.
그걸 흔한 말로 “부끄럽잖아. 우사스럽잖아.” 이런 거. “그거 남들이 알면 내 얼굴 못 든다.” 원래 얼굴 없어요. 원래 얼굴 없는 거예요. 또 이런 사람 있어요. 그걸 과거에 되지도 않는 일을 또 떠드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또 십자가 자랑하는 게 아니고 지 못난 걸 자랑하니까.
15페이지 중간에, 그런데 이게 우리한테 손해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주님 것은 하나님께 영광된 분이 낮아졌지만, 우리는 원래 애초부터 낮아져야 될 자가 낮아진 거니까. 이건 당연한 것이지 뭐 그것 가지고 대단한 일 했다고 해서는 안된다 이 말이지요.
그게 15페이지 밑에 세 번째,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이방인 이지요. 이방인은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려주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존재 자체가 장벽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지옥가야 마땅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수님 올 때 바리새인이 하는 거 있지요. 나는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그리고 마태복음8장에서 백부장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할 때 그 백부장이 이방인이에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지요. 천국의 본 백성들은 “다 나가! 니는 끝났어!” 다 쫓아내고 그 자리를 누가 채운다? 나를 믿는 이방인이 채워진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차이가 없어지고 바로 십자가라는 언약에 의해서 새로 소집되고 모집된 집단, 그것이 주의 율법의 완성과 연계가 돼요. 율법이 완성됐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것은 어려운 이야기했는데, 다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진짜 교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뭐라 했습니까? 장벽. 진짜 교회가 장벽 노릇, 장벽 기능을 해요. 그래서 장벽 기능을 하기 때문에, 장벽 기능을 하게 되면, 아까 한 거 세자로 하면, 외지인이 돼요. 외지인.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외지인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아주 박해하고 핍박했고 추방했지요. 똑같은 대우를 누가 받아요? 오늘날 성도들이 받는 거예요. 주님은 인간이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아는데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이 오히려 자기들의 하는 일에 동의가 안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동네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걸 아웃사이더라 하지요. 소외됐다. 배제됐다. 우리동네 사람이 아니니까 “나가!” 이리 된 거예요.
성도도 똑같은 대우를 가정에서부터 직장, 교회, 모든 모임에서 성도가 그런 대우를 받아요. 또 이상한 짓해서 교회에서 나가라 그것 때문에 나가는 건 아니고요. 뭐냐 하면 그 모임 자체에 인간의 어떠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태도 때문에 자기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쪽에서 추방되는 현상. 그 현상을 받게 될 때 성도로서의 당연한 조치를 받는 거죠.
이것을 저는 특정교회를 예로 드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가정에서 그런 경험을 하라는 거예요. 가정에서. 엄마가 생각해서 자식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자식이 거부하지요. 그 이유가 뭐겠어요? 그 자식이 육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엄마, 아빠 육에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육적인 아브람의 자손이라서 그래요. 육적인 자손. 그래서 엄마가 어떤 잔소리를 하던, 아빠가 어떤 잔소리를 하던 간에 안에서 측정을 판단을 해요. 내 가치를 인정해 주느냐, 내 가치를 무시하느냐, 그걸 판정해서 무시하면 단호하게 거부해요.
그리고 이런 소리합니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성공해서 엄마가 훌륭한 자식을 뒀다는 것을 엄마 자랑으로 내가 자랑스런 인간이 되어 볼게.” 그런 식으로 큰소리 쳐요. 그럼 엄마는 속으로 이야기하지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냐. 뭐든 니 맘대로 되는 줄 알아?’ 안돼요. 왜냐하면 이 세상의 욕망은 인간의 욕망보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그래요. 속도가 빨라요. 밋밋한 휴대폰. 할아버지들이 쓰는 휴대폰. 이걸로 해가지고 좋사오니 하다가 폴더 이런 게 나오면 와~~ 이런 휴대폰이 다 있느냐, 하지요. 5G나오고 그러면, 속도가 인간의 욕망이 세상의 욕망을 못 따라가니까 한 번 치고 인간은 엄마말 아빠말 다 때려치우고 그 욕망 따라 가는데 바쁜 거예요.
그러니까 중소기업은 안 가는 거죠. 왜? 그 욕망따라 가려면 그 돈가지고는 욕망을 달성할 수 없기때문에. 그런데 큰 소리는 되게쳐요. 큰 소리는. “엄마 실망 안 시킬게.” “엄마가 원하는 게 뭔데?” “나는 밥 한 끼만 줘도 괜찮은 존재입니다.” 라고 이렇게 자기의 존재가치를 아는 걸 엄마가 원하는데 지는 크게 성공해서 엄마, 아빠의 자랑거리가 되겠다는 거예요. 자랑거리가 되는지, 나중에 영원히 결별하는지 모르지요.
18페이지. 진도 빨리 나간다. 제목이 뭐냐,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이냐, 라고 설명하기 위해서 이 대목을 쓴 거예요. 19페이지. 이렇게 있지요. 19페이지 위에서 4번째 줄에 그 당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어떤 정의를 내렸느냐 하면, 교회란 하나님과의 고난에 같이 동참한 하나님의 고난입니다. 백성 고난에 하나님이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한 백성을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무슨 교회라고 하는가 하면, 광야교회라고 하지요.
광야교회는 누가 이야기했는가,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집사가 광야교회라는 말을 했어요. 광야교회라는 말을 할 때는 다른 말로 하면 고난교회. 교회란 고난 받는다. 주님의 고난에 연속체다. 해서 사도행전7장38절에서 광야교회라고 한 겁니다. 그 스데반집사가 모세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광야교회 나온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는 어떤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했었나, 19페이지 중간에 문장이 나와 있지요.
19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예수님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그 당대의 유대인의 일시적 감정의 흥분의 발로가 아니라 구약 전체에 흐르는 모든 부정적 요소의 사상이 드디어 진짜 하나님과 만났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과 만났을 때에 거기에는 살해당, 살해사건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말이지요.
내가 믿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이 만났을 때 살인사건이 일어나게끔 우리는 이 땅에 육으로 태어난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나쁘게 먹은 게 아니고 잘못된 엉터리 책을 봐서가 아니라 타고난 게 우리는 나의 가치를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는 식으로 타고났고 진짜 하나님은 그거와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스파크 일어나면서 내 가치를 포기하는 한 당신을 믿지 않겠다는 식으로 우리는 주님을 대접할 수밖에 없고 만날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을 우리는 타고난 거예요.
그러니 새삼스럽게 내가 나쁘다가 아니라 회개라는 말은 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 지금 환경 자체가 달라졌음을 내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 환경이. 예수님을 죽인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는 그런 새로운 환경에 대한 인식이 발생되는 거예요. 이게 회개에요. ‘아~ 이게 상황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판사,검사 시험에 합격했다. 또는 회사가 너무 잘되어가지고 상장해서 주식이 막 오르고 그냥 막 재벌집에 들어간다. 라는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났을 때 우리 주위에 일어났을 때, 그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상황이 바로 예수님을 배척한 상황이라는 감을 잡을 때 그 사람은 회개하는 상태에서 사업을 하고, 농사를 짓고, 애를 키우고 뭐든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상황 전체를 한꺼번에 아는 거예요. 그게 회개에요. 한꺼번에 아는 거예요. 보통 수상한 동네가 아니다. 이 세상이. 주님께서 불태울 만하구나! 그렇다면 하루 하루 사는 이것은 기적이고 은혜다. 은혜가 하루 이틀이 아니고 계속해서 은혜가 이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의 장벽으로서 휀스로서 가정에 주께서 꽂아놓은 겁니다. 성령을 주셔가지고 니가 예수님 역할, 교회의 역할, 하나님의 그 생명나무 따먹지 못한다는 그 천사의 역할, 한꺼번에 니가 그 지점에서 다 해보라는 겁니다. 그 고난을 받는데 20페이지에 등장한 사람이 아브라함, 요셉, 모세, 같이 있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즐겨했으니 이는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11장24절, 25절, 이런 거 좀 액자해서 만들어놔도 괜찮아요. 자기 존재가치를 지키는 사람한테는 확 집어 던져버리겠지만. “니는 왜 매사가 부정적이야!”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돼요? “니는 주제파악도 못하고 왜 그렇게 긍정적인가, 뭘 그리 긍정적이야? 하나님은 죽었는데 우리 인간은 헤헤거리고 있다. 지금. 뭐가 그리 잘났어?” 이리 하지요.
바로 우리가 외롭지 않은 것은 구원받은 천국 가 있는 선배들이 바로 그 고난의 길을 밟아왔다는 거예요. 앞으로 우리에게는 어떤 고난이 있는지 그건 21페이지부터 다음에 시작해야 되겠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시대를 말씀을 통해서 다시 파악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이 누군가 아직도 우리는 어떤 성질에 매여있는가 갇혀있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주께서, 성령께서 도우사 갇혀있다는 사실, 묶여있다는 사실조차도 자유로 느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