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31214a행7장38절(외지인)-이 근호 목사
안양20231214a행7장38절(외지인)-이 근호 목사
오늘부터 이 책을 가지고 하겠습니다. 교회 뒤에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나타난 것은 교회라는 가연체고 뒤에는 보이는 않는 말씀이 있고. 그 뒤에 있는 말씀과 앞에 있는 교회가 연결되어있는가, 일치되는가, 그 내용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는가를 우리가 한 번 따져보자는 거지요. 생각해 봐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라는 것이 있음을 우리가 모른 척 할 수가 없잖아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동의가 있었다는 뜻이고, 그럼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람들의 동의와 인정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교회가 문제 있다, 라고 말을 하려면, “그러면 너는 교회를 부정하고 도대체 뭐를 내세우느냐” 그렇게 누가 이야기를 하면 답변할 수가 있어야 되지요.
교회가 없다면 그러면 당신이 내세우는 것은 뭐냐, 라는 말을 할 때에 교회 나쁘다, 교회 썩었다. 지금 이걸로 이것은 아무나 정답이 될 수가 없어요. 교회를 잠깐 비우면 거기에 교회는 문제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한결같다. 이런 이야기가 되어야 된다 말이지요. 그럼 한결같은데 그 한결같은 것을 니 입으로 정리해 보라.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이 책을 쓰게 된 것이 내가 대구의 대덕교회의 부교역자로 있을 때에 쓴 책이에요. 그 때의 제목은 라는 제목을 했습니다. 가 아니고 . 처음에 나온 책은 제 집에는 이렇게 허름한 얇은 책이 제 집에 있습니다. 초판 처음 나온 거. 그 책을 재판한 것이 제목 바꿔서 나온 것이 입니다.
그 부교역자로 있으면서 교회 안에서 약간의 돈을 주니까 그 교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떠날 수가 없지요. 부교역자니까요. 또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에 집어넣어주었으니까. 그럼 그 교회의 담임목사 설교하는 거 거기에 대한 교인들의 반응, 그 목사에 대한 말씀은 말씀대로 듣지만 각각의 가정생활에서 그들의 생활 자세, 태도, 마음가짐, 이런 것을 제가 가까이 볼 수가 있지요. 왜? 부교역자가 하는 일이 심방이니까요. 세밀하게 그들의 생활 속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목사는 심방을 잘 안하니까요.
그 당시의 대덕교회 목사는 자기는 말씀에 전념한다는 목사기 때문에 그 목사 이름은 윤희준 목사에요. 대구에서 말씀 잘 가르친다는 소문난 목사에요. 말씀 하나 듣기 위해서 다른 교회 다 다니다가 그만두고 이 대덕교회 와가지고 교회는 작은데 많을 때는 180명까지 모였어요.
수용인원은 그만큼 안 되는데 초대교회 부흥한 것처럼 꽉꽉 찼지요. 숫자 세기가 나중에 포기할 수밖에 없지요. 작으니까. 그거 헤아리는데 신경 쓰니까. 그럼 저는 이 책을 어떻게 원고를 하느냐, 목사가 설교를 하면 저는 제일 뒤에 앉아서 앞에 기둥이 있어요. 안 보여요. 목사는 설교하게 되면 나는 그 본문 가지고 내가 따로 설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그 목사의 설교가 뭐 그리 좋다고 뭐를 원해서 그들은 듣고 있는지, 그리고 성경 본문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목사는 아는 게 그것 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전하는데 대구 시내에 있는 교인들이 그 목사 설교 들으려고 왔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유대교였습니다. 목사도 유대교고, 교인들도 유대교고 둘 다 바리새인이에요. 왜 바리새인으로 모든 인근의 종교성이 바리새인으로 최종 종결되는 현장 속에서 이 책을 쓴 거예요.
자, 바리새인, 유대교이지요. 유대교. 유대교의 특징은 여러분들이 제가 말을 하지 않아도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알 겁니다. 유대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행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구원 획득이지요. 구원 획득. 더 정확히 말해서 행함을 뽐냄으로 구원쟁취, 구원을 쟁취하는 거예요. 행함을 뽐냄으로.
행함을 뽐낸다는 말을 집어넣는 이유는 자기 행함을 부정할 의도가 없어요. 의도가 없다. 이게 유대교입니다. 이들의 행함은 근거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그들이 갖고 있던 윤리성에서 나온 거예요. 윤리성. 윤리성이라는 것은 모든 판단을 뭐로 하느냐 하면 선이냐, 악이냐로 판단하는 것이 윤리성이에요. 저건 나쁜 거고, 이건 옳은 거고. 여기에 작동되는 것은 선과 악의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선과 악의 차이가 있다. 선은 악이 아니고, 악은 선이 아니라는 거예요.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선과 악의 차이가 있다. 요기까지는 선이지만, 여기까지는 악이라고 볼 수 있다. 라고 자기 판단이 서있는 겁니다.
그 판단은 그들은 판단할 때 그 판단은 어디서 가지고 온 것인가, 바로 유기적 분위기의 가정환경과 + 사회 환경. 이것이 1970년도, 1980년도의 우리나라의 사회 환경입니다. 지금처럼 개판 같은 사회가 아니었어요. 어느 정도 정돈되어있어요. 내 행동, 내 주먹, 내 마음대로 한다.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자칫 행동하면 사회 지탄을 받는 그래서 사회가 인간의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압박을 가했던 그 시료가 통했던 사회에요. 그 사회가.
그러면 이들이 교회에 온다는 말은, 교회에 오는 이유는 이렇게 하면 정리가 돼요. 뭐냐 하면 나의 존재가치를 함양하고, 그 다음에 뭐겠어요? 함양에다가 더 보태서 성숙시켜 나가는 것. 자기 존재 가치. 내 착함을 계속 함양하고. 함양이란 성숙이랑 같은 말이에요. 성숙하겠다는 거예요.
성숙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사회환경과 가정환경이 무엇을 옹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선한 사람에 대해서 호위를 베푸는 사회로 아직까지는 유지가 돼요. 아직 그 때 사회가. 1970년도 1980년도는 그 때 사회가 그게 형성되어있던 거예요.
자, 만약에 예를 들어서 그 사회에 어떤 모습인가를 하나의 예를 들면 돼요. 그 사회에 만약에 10월말에 11월초에 할로인 축제를 한다고 합시다. 그 때 1980년도에 할로인 축제를 한다고 칩시다. 그럼 할로인 축제는 뭐냐 귀신축제지요. 귀신축제 때 한껏 까불기 위해서 의도적인 탈선을 의도적으로 분출된 욕망을 터트리듯이 탈선을 해보는 거예요. 해볼 때 혼자 하면 재미있겠어요? 재미없겠어요? 혼자하면 재미없겠지요. 탈선 혼자하면 그건 맹숭 맹숭해서 재미없어요. 나쁜 짓해도 같이 나쁜 짓해야 재미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탈선할 때는 우르르가 되겠지요. 우르르. 우르르. 같이 휩쓸리고 우르르.
거리에 뛰쳐나와서 그런데 그 거리가 약간의 경사가 있다고 칩시다. 그들이 우르르 모인 것에 대해서는 그들이 정신적 에너지가 업이 돼요. 무슨 큰 일에 내가 참여된 것에 무한한 희열을 느끼고요. 인간이 느끼는 그 이상의 예상보다도 더 이상의 쾌감을 느끼게 되어있어요. 우르르에요. 지금도 유럽에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토트남 축구보세요. 남미가 그렇게 살기 어려워도 남미가 숨통이 돌아가는 이유는 축구 때문에 그래요. 맥시코 축구. 미국도 마찬가지고요. 마약은 꼭 마약을 해야 마약이 아니에요.
스포츠가 마약이에요. 왜? 혼자하면 찐맛이 없어요. 우르르한다고요. “얘야, 크리스마스때는 조용히 가족과 함께 보내자.” “내가 세 살인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유치원 애들도 그리 안하는데. 요새. 밖으로 무조건 뛰쳐나가서 밖에 크리스마스츠리 안에서 피자를 먹든지 뭘해야 돼요. 그게 우르르에요. 그런데 그 우르르에 너무 좋아서 어느 정도 좋으냐, 앞에 압사되고 밟혀도 너무 좋아. 이 쾌락을 위해서 희생하는 그것이 쾌감을 더욱더 돋보이게 만들어요.
옛날 같으면 어떻습니까. 죽은 사람은 역시 잘 죽었고 거기에 참석한 인간도 진작 죽어야 돼요. 거기에 애를 보냈다는 것은 그 집안에서 우사스러운 일이에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사회 윤리 기준이 지금하고는 너무나 다른 시대에요. 다른 시대. 바르게 사는 것이 사회로부터 사람대우 받고, 인간의 존재 가치가 있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자기가 나쁘게 살았던 과거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자기 존재가치의 수준을 레벨을 높일 필요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냥 높여버리면 거기서 교회 안에 뭐가 있습니까. 경쟁이 생기지요. 그러면 더욱 더 높은 자가 천국에 근접했다는 스스로 자기가 신학을 만들어내요. 교인들이. 그런 신학을. 착함에 착함에 점점 높으면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용납할 수 있는 거리안에 들어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여러분이 한 번 답변할 차례입니다. 방금 이런 생각, 내 존재가치를 높여서 내 행함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이것 이게 뭐가 나쁩니까? 이게 왜 나쁘지요? 굳이 이게 나빠야 돼요? 이게. 그러면 이리 안하고 이게 나쁘다면 아주 반대로 가서 더 망가져야 돼요? 매일같이 할로인데이 해가지고 주르르 가가지고 압사하고 이래야 돼요? 그게 바람직한 사회에요? 아니면 착한 사람을 양성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함이 우대받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인식, 이게 뭐가 문제고 뭐가 나빠요? 답변 안 할 줄 알았어요.
성경에 보면 스스로 자기 잘못을 발설 못하는 사회가 지옥입니다. 스스로. 스스로 자기 잘못을 발설 못하니까 억지로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옥이에요. 기쁨으로 하지를 못해요. 기쁨으로 들어가는 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기쁨으로. 기쁨으로 또는 감사함으로 이걸 합치면 자유함으로. 이걸 못하니까 주님께서는 환경 자체를 지옥으로 만들어서 그동안 얼마나 인간이 자기 부정을 못하는 존재임을 지옥에 가서 까발리게 돼요. 지옥에 집어넣어서 까발려요. 자기 부정을 못해요. 자기 부정.
인간의 출생은 오류로부터 출생했잖아요. 창세기에 보면. 벌써 잘못되게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될 것은 전에는 몰랐는데 요게 잘못됐다고 주의 말씀에 호응해서 잘못된 걸 이야기하면 돼요. 그게 주님의 말씀의 세계에 부합되는 현상이라니까요. 부합되는 현상. 지금 여기에 대덕교회 분위기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여기 대덕교회 나오는가 모르겠어. 저자 소개에 나와요? 대덕교회 빠지고 박사교회 나오네. 대덕교회 빠졌네.
처음부터 인간은 오류고, 그 오류의 결과가 어제 수요설교에서 한 것처럼 흙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변동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도 외면한 내가 나빠요. 외면될 수가 없어요. 있는 그대로니까요. 팩트니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보기에 죄인으로 보잖아요. 그럼 우리는 거기에 호응해서 무슨 이야기하면 됩니까. 어떤 이야기하면 되지요? 내가 이래서 죄인입니다. OK? 간단하지요. 궁지렁궁지렁 뒷말 달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면 다 죄인인 것 같으면 우리는 살맛이 없지 않느냐” “방금 뭐라고 했어? 궁지렁. 궁지렁?” “궁지렁 궁지렁”
계속해서 변명하고 뭔가 자기가 노리고 있던 것을 포기가 안 되니까, 이건 뭐 내가 뭐 인생사는 것은 다 내 주위 사람이 나빠서 전부 다 남 탓으로 돌려버리고 자기 부정이 안 되는 거예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뭐를 지라? 십자가 지라 하니까 자기 부정으로 들어가지 않으니까 무엇과 연결이 안돼요? 십자가와 연결이 안 되는 설교를 하는 교회. 그런 목사. 기둥 뒤에서 쓸 수밖에 없었지요.
그 목사는요,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오직 아는 것은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 외에는 없어요. 이게 왜 목사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릴 때 가정환경이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목사니까 남한테 티 잡히는 일이 없어야 본인발이 선다는 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이름을 등에 입고 마치 이 땅에서 내가 목사니까 하나님의 대리자로 우쭐되고 싶은 그 높아지고 싶은 심보, 악마적 심보, 그것을 바른 설교랍시고 그걸 감추고 있지는 않는지. 그 목사만 그렇다는 게 아니고 모든 목사가 다 그렇다고 보면 돼요. 모든 목사가 다. 목사 사모 없으니까 내가 마음 놓고 이야기한다. 모든 목사가 다 그렇다고 보면 돼요. 목사하고 교인하고 차등을 줘야 교회에서 권위발이 서는데 그 권위발은 윤리발이 된다.
완벽. 더욱 더 말씀을 아니까 교인들은 목사님이 말씀을 아니까 말씀에 부합되는 생활을 할 거고, 목사는 그걸 이용해서 그러니까 이 교회에서 군소리하지 말고 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당신은 할 의무 있고, 당신들은 나한테 충성할 의무 있고, 나는 당신에게 충성 받을 권한이 있다. 그래야 교회가 질서가 잡힌다. 교회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조직이 다 그런 게 아니에요. 병원도 마찬가지고 학교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그럼 제가 이렇게 죽 이야기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다음과 같은 것을 궁금해 해야 돼요. 그렇다면 그게 그렇게 설교하는 게 나쁘고 비복음적이고 십자가 복음 빠져있고 이런 설교라면 그럼 당신은 그 때 어떤 설교를, 그게 전면적으로 부정되어야 된다면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성경가지고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당신의 대안을 제시해 봐라. 라고 그런 투로 반발 아닌 반발이 들어올 수가 있을 거예요. 반발 아닌 게 어디 있어요. 그게 반발이지. 들어올 수 있지요.
거기에 대해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목사나 교인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마음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관 속에 딱 안치하지요. 관 속에. 그 때 예배를 무슨 예배라고 합니까. 입관예배라고 하지요. 자, 입관예배에서 주위의 유족 다 부르지요. 다. 다 가라. 관 속에 사람이 죽었잖아요. 칭칭 감고. 장례사 다 가. 설교자가 있다 합시다. 딱 두 사람 남지요. 죽은 자에게 어떤 설교를 해야 될까요. 그 설교를 하면 돼요. 죽은 자에게 하는 설교.
살아서 어떤 것을 희망을 주고 이런 거 없어요. 죽은 자라면 죽은 자에게 어떤 설교를 해야 되는가,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또 에스겔이 37장 에스겔이 또는 하나님이 예수님이 설교할 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죽은 자에게 설교했어요. 듣는 사람은 이미 눈 감고 들었어요. 이미 죽었으니까. 왜 죽은 자로 여겨서 설교를 해야 되느냐 하면, 행함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자기 행함 때문에 죽었거든요.
행함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이미 행함으로 완전히 돌아가셨다면, 죽은 자의 특징은 도로 행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요. 대목을 성경을 한 번 봐야겠습니다. 에스겔37장1,2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골짜기에 뼈가 한 두 개 있습니까, 아주 많습니까, 뼈가 아주 많지요. 많은데 특징이 뭐냐, 그 중에서 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 인간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 그냥 갑시다. 이미 죽었습니다. 가능성 없습니다. 가능성 있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갑시다.”이리 될 게 아니겠어요. 하나님께서는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다짐을 해요. 살겠느냐, 다짐을 합니다.
이것을 왜 물으십니까? 산다는 것은 이미 끝났어요. 살지 못합니다. 인간은 출생부터가 끝났어요. 하나님이 죽으라고 이 땅에 살기 때문에 인간은 죽는 이외에는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인간이 살아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건 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이 죽었다는 표내는 티내는 중에 하나가 바로 종교라는 것이고 윤리, 도덕이라는 거예요. 그것가지고 못 살거든요. 못 살지만 뭐라도 해보는 거예요.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서 뭐라도 해보는 거예요. 그냥 그럴싸하게 거룩해 보이고, 아까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구라고 했어요? 바리새인이 했어요. 바리새인이 그렇게 해보는 거예요. 그냥.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참 훌륭한 일을 하지만, 약간 모자란다. 그랬어요? 아니면 느그 애비는 누구라고 했어요? 느그 애비는 악마라고 했어요. 악마기 때문에 거기에 몰입하고 있는 거예요. 그 방식을 몰입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보시기에 악마가 함께 있으니까 이미 그건 하나님의 관계와 끊어졌으니까 죽은자지요.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뭐를 시켜요. 니가 나서서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어다. 했지요. 마른 뼈들아! 이게 진짜 참 실소가 나오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공동묘지에 가가지고 하나님께서 “야, 너 목회하게 해줄게.” “목회 장소가 어딥니까?” “공동묘지다. 가자.” “자, 공동묘지 있지. 설교해. 그렇다고 또 너무 길게 하지 말고. 한 30분 설교해.” 할 때 이미 죽은 자에게 그 설교자가 설교하는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행함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들이 죽은 이유가 행함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어느 쪽입니까? 바로 행함 때문에 죽었다고 이야기하겠지요. 행함 때문에.
교회 안 다니는 자식들에게 복음 전한다고 해가지고 엄마가 살살 달래고 하지 마세요. 그냥 공동묘지의 마른 뼈라고 생각하고 들을 일이 없는 것으로 기정사실화시키고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됩니다. 귀한 성경 말씀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나도 니처럼 이미 죽었었다. 나도 니처럼 죽었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에스겔37장4절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전도입니다. 사람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요. 시체로 합니다. 시체로 해주는 건 좀 점잖은 거고, 좀비에요. 마구 마구 달려든다고요.
자, 이렇게 됐을 때 제가 묻습니다. 1번, 말씀이 허비되었다. 2번, 말씀이 허비되지 않았다. 몇 번입니까? 답은 보나마나 두 번째지요. 인간들 보기에 말씀허비, 시간허비, 금전적허비, 건강까지 허비 다 됐지요. 그러나 주님보시기에는 전혀 허비된 게 없어요. 그것은 ‘말씀의 자체적인 순환’ 때문에. 말씀은 부메랑이라 합니까. 확 던지면 뱅뱅 돌았다가 돌아오는 거 있잖아요. 말씀은 던진 쪽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어있어요. 허비라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던짐으로서 “거봐, 내가 이제 이 지구에 불심판 내려도 너희들 없지. 다 죽은 거 맞지. 그것 봐! 한 명도 말씀의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죽었다 하는 말이 틀린 게 아니고 맞잖아.” 라고 말씀이 부메랑처럼 빙 돌면서 서서히 회수를 하는데, 잠깐만요! 잠깐만! 하고 죽은 자리에서 깨어난 사람 있다 칩시다. 어마야! 화들짝 놀라야 돼요. 저게 죽어야 되는데 왜 살았지? 이게 바로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전도였습니다.
사도행전2장 38절 한 번 보겠습니다. 오순절이야기에요. 오순절날 하늘에서 성령이 오셨잖아요. 그 성령이 오신 것에 대해서 어제 수요설교 본문을 이 본문을 뽑았어요. 38절에. 여기에 뭐냐 하면, 성령을 뭘로 받는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성령을 선물로 받지요. 선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면 앞에 것도 뭐가 돼요? 선물이 되지요.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고 죄사함 받는 것도 바로 선물의 연속성이지요. 선물의 같은 노선에 있지요. 이 이야기를 베드로가 했는데 그렇게 이야기한 베드로와 12제자 그 사람들, 예수님 살아 승천하셨을 때 알고 있던 그 사람들은 이런 코스 밟았습니까? 안 밟았습니까? 베드로부터해서 이 코스를 밟았어요? 안 밟았어요?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고 죄사함 받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그대로 했어요. 38절에서 문장이 짧지만, 그 안에는 긴긴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사가 다 담겨있는 거예요.
그 베드로가 예수님과 하면서 성령 받고 난 뒤에 다시 자기의 과거를 뒤돌아 보세요. 전부 하는 것이 회개해야 될 죄사함을 받아야 될 죄만 길게 끌어온 거예요. 죄만. 그러니까 어제 수요설교한 것처럼 우리의 과거가 무엇의 과거로 바뀌었다? 주님이 개입한 과거로 바뀌면서 덮쳐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출생이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이 주신 선물이 되지요. 우리의 출생 자체가. 성령만 선물이 아니고 이 땅에 태어나게 된 것도 선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필연이 아니고 전부 다 우연한 사건이에요. 나의 출생이. 딸을 원했건만 아들이 태어난다. 이게 뭡니까? 이것도 우연한 사건. 아들을 원했건만 딸이 태어났다. 이것도 우연한 사건.
우리는 모든 것이 우연한 사건의 집합체.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 거울로 비쳐보이는 여러분의 육신과 여러분의 모습이 주님의 선물입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노끈으로 묶지는 않았지만. 예쁜 매듭으로는 하지는 않았지만. 여러분의 머리부터해서 매듭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끈이 저 발까지 십자가 모습으로 묶어서 그 통째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 인생에 관여했던 나 아닌 나의 타자들, 타인들, 남편, 자식, 시가집 식구들, 친정 식구도 마찬가지고. 그런 모든 것이 나라는 존재의 선물을 선물답게 하기 위해서 관여된 관계망들이지요. 그래서 당신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 맞는 말이에요.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인데요. 왜 맞는 말이냐 하면, 당신 때문에는 그거는 흐릿하게 들으시고 뒤에 말, 나 망했다, 하는 그거 진짜입니다. 그거 우리는 처음부터 망하기 위해서 망하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회개할 거리가 있고, 죄사함 받아야 할 대상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나라는 존재를 우리라는 존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선물의 마감은 이제 무엇을 줌으로 끝나버립니까. 성령이 오심으로서 끝나버리지요. 그 성령이 아까 봤던 에스겔37장에 주께서 그 성령이 오실 때 말씀으로 오신 거예요.
어떤 분이 부산강의 마치고 집에 오는데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부산강의 참석하시는 분인데, 강의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참을 수 없어 질문한다. 질문이 뭐냐 하면 성신과 성령의 차이가 뭐냐, 성신과 성령의 차이는 성신과 성령은 다 같이 영어로 되어있으니까 번역할 때 인위적으로 번역하는데 신과 영을 호환해도 바꿔도 되는데 인위적으로 구약의 성신하고 신약의 성령하고 이렇게 한 게 아니냐, 라고 나한테 질문을 한 거예요. 그런 궁금증이 여러분의 없지 않아 있었지요. 뭐가 궁금한 것도 모르지요. 내가 뭘 궁금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성령은 환경이 신약 환경에서의 성령이고, 성신은 구약 환경에서의 성신입니다. 환경이. 하나님의 활동하는 영역이 성신은 구약 때고, 성령은 신약 때입니다. 차이가 뭐냐 하면 성신은 미완성이에요. 언약의 미완성이에요. 왜냐하면 새언약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성 속에서의 성신이기 때문에 악신 걸렸다가, 성신 걸렸다가 이게 유도리가 있어요. 왔다 갔다 해요.
그러나 성령은 이미 완료가 다 되었어요. 다 이루었다가 돼요. 십자가에서. 다 이룬 상태라는 것을 확인차 그러니까 완성의 선물. 완성되었음을 선물로 주어진 것이 성령이에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빼고 자시고 하는 것은 이건 없어요. 구약도 아니고 신약이 다 완성이 되어버렸어요. 만약에 성령이 왔는데 빼고 자시고 마음대로 되어버리면 예수님께서 두 번 죽어야 되는 거예요. “니가 그런 소리하는 것은 두 번 죽이는기다.” 하는 거 있잖아요. 나를 두 번 죽이는 짓이다.
주께서는 두 번 안 죽습니다. 십자가 다 이루었다는 말은 심판의 최종 기준이 빰빠빠밤! 확정되었다는 말이요. 십자가 모르면 지옥, 십자가 알면 천국. 이걸 최근에 한 설교가 나와요. 부자가 지옥 갔을 때 동생 걱정해가지고 죽었던 나사로에게 다시 살려내게 되면 그들이 믿지 않겠느냐, 하는데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아니하면 설사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다 할지라도 그 믿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 최종 구원의 근거가 그게 아니거든요. 최종 구원의 근거는 내가 뭘 봤다가 아닙니다. 내가 뭘 믿었다가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에게 최종 근거가 있어요.
예수님의 선물을 줬느냐, 그 분이. 예수님이 선물을 줬느냐, 안 줬느냐, 그걸로 천국, 지옥 결정은 나는 겁니다. 이번 주일에 낮설교에서 언급을 했듯이 그게 바로 불신자를 더욱 더 분노케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하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는 좋은 거 주면 우리는 믿고 따져보고 믿고 순종이 아니라 순종 백배를 할 수 있는 용의가 되어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십니까? 그럼 순종하겠나이다.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는데 왜 그 기회조차 박탈해버리면 이건 하나님의 횡포가 아니냐 이 말이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그 주장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하시겠어요? 하여튼 죽은 해골이 말이 많아. 이미 죽어버렸는데. 죽은 뼉다구가 마귀와 결합이 되어 한패가 되어있으니까 이 죽은 뼈다귀가 마귀 말을 계속 쏟아내고 있는 거예요. 마귀 말을. 성경대로 바르게 사시면 여러분, 구원받습니다. 그 대덕교회 목사가 계속 마귀 말을 내뱉고 있는 거예요. 본인도 복음 모르고요. 복음 모르니까 와글와글이에요.
다른 목사는 복음 모르면 약간의 멈춤대고 뭔가 주춤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그 대덕교회 목사는 아주 복음 모르는 걸 자신있게 말해요. 이게 복음이라고. 그 확신과 당당한 자신감. 여기에 구원이 있는가보다 해가지고 왔고, 나는 기둥 뒤에서 책 쓰고 있고.
성도나 복음 전하는 사람이나 기본 자세는 이거에요. 왜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가, 그걸 말씀에 입각해서 다 노출시켜야 합니다. 왜 인간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말씀은 요한복음5장39절의 말씀처럼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죽은 자가 뭘 노립니까? 죽은 자가 주제에 영생까지 얻겠다고. 영생은 생명나무는 끊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해도 도대체 말을 안 들어먹어요. 인간들은. 왜 그렇습니까?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고집대로 밀어붙여요. 종교라는 걸 만들어서. 교회를 만들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요한복음5장 40절 읽어보세요.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아멘이지요. 예수님한테는 오지를 않아요. 부정적인 예수님한테 오지 않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긍정적인 자기의 의견을 들어줄 것 같은 우상적인 예수님한테 오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 교회에서 뭘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바르게 살았으니까 우리도 이렇게 바르게 삽시다. 그게 그 교인들한테는 백프로 알아먹는 설교에요. 그 목사는 더 큰 교회에서 돈 더 준다고 하니까 나갔거든요. 가기전에 목사들은요, 우리 윤희준 목사님은 아주 너무 순수해서 돈에서 초월했을 것이다. 돈에서 초월한 사람 없습니다. 돈에서 초월한 사람 없어요. 더 준다고 갔다 말이죠.
가고 난 뒤에 당장 구할 사람 없으니까 나를 강단에 세웠거든요. 나를 강단에. 그래서 요한복음17장가지고 설교했잖아요. 아직도 본문 안 잊어버려요. 1980년도에. 한40년 전이구나. 설교했어요. 무슨 설교했는가, 주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쫓겨났어요. 이제는 그 교인 숫자 안 헤아려도 돼요. 쫓겨났어요. 쫓겨나도 괜찮아요. 왜? 책 다 썼으니까. 이 책 다 썼으니까.
머리말 봅시다. 이 책을 언제 썼느냐 하면, 이게 재판되어서 1996년도 하지만, 그 전에 썼거든요. 한국교회의 실상이 뭐냐, 구원되지 못한 교회를 다니고 있다 이 말이지요. 성경에 근거해서.
그래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동원 다 한 거예요. 원인도 밝혀져야 돼요. 그 밑에 죽 보면 구원 아닌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복음이 아니지요. 이건 제가 뭘 의식했느냐 하면 한국교회의 200년전의 복음이 들어왔을 때 그 때는 복음이 열정으로 왔다는 거예요.
보자. 복음의 열정인지, 종교의 열심인지 한 번 보자. 보면 복음이 아니에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복음이 아닌 거예요. 천주교 처음 왔을 때 복음이 아니고 지금도 복음이 아니고. 아니에요. 어디 천국에 사람이 모자라서 주께서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주님이 아닙니다. 두 세사람도 나와 함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어차피 우리는 뼈다귀니까. 뼈다귀 갈비탕있지요. 장모님 뼈다귀 해장국집. 외국사람이 제일 무서워한다는 거. 장모를 죽여서 뼈를 내서 그 국인가 해서. 그 다음에 교회의 본질. 1번 11페이지. 교회의 본질부터 먼저 언급한 것은, 성경은 있고, 뭘 구축하느냐 하면 교회를 따로 구축해야 돼요. 교회를 구축해서 교회의 자체가 이러해야 되는데 기존 교회 역사가 분위기가 으샤, 으샤하는 분위기가 교회를 만들었으니까 이제 이 교회를 그대로 가져와서 성경이라는 엑스레이에 한 번 대비해 보자.
그래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알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교회의 본질의 위치가 뭐냐, 이렇게 보면 돼요. 크게 쓰겠습니다. ‘장벽’, 휀스. 성경에서 교회의 자체가 장벽이에요. 아무나 교회가 될 수가 없어요. 아무나. 그런데 누구나 교회가 될 수 있어요. 왜? 아무나 교회가 되지를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누구나 교회가 되게 하셨어요.
혼인잔치에 아무나 못와요. 그러나 길거리에 나가서 누구나 데려오라고 했어요. 그만큼 아무나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주께서 강조하신 거예요. 그러면 그 말이 맞으려면요, 그럼 인간은 어떤 식으로 교회 만들기를 싫어했던가, 그걸 필히 알아야 되겠지요. 10분 후에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