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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1201a 울산강의-역대기상(26강) 28장 6절 : 성전의 불연속성자유게시판역대상

20231201a 울산강의-역대기상(26강) 28장 6절 : 성전의 불연속성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28장, 다윗이 성전을 짓게 된 취지, 그 내력을 백성들에게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겠다고 자기가 제시했지만 자기로서는 짓지 못하고 자기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지어지는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28장에 4절부터 나와 있습니다. 28장 3절에 보면, 다윗은 성전을 짓지 못한다. 근데 솔로몬을 통해서는 성전을 짓는다. 6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전을 건축하고” 그렇게 나와 있어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다윗이 성전, 안 된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은 된다. 이게 뭐냐 하면 솔로몬 성전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느냐 하면, 다윗의 아들이라는 요소가 솔로몬의 성전을 짓게 됩니다. 아버지는 성전을 못 짓고 아들이 성전을 짓는데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솔로몬 성전을 짓게 된 것은 여기 어떤 요소가 추가적으로 들어갔느냐 하면, ‘너의 아들이 성전을 짓는다’라고 돼 있으면서 여기서 어떤 교체가 일어나요.

다윗의 아들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솔로몬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아들로서의 솔로몬은 여기서 탈락이 되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탈락이 된다는 말은, 다윗의 탈락이 되고 그 탈락된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감으로써 성전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상당히 어렵지요.

그냥 집 지으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성전 안에는, 성전은 뭐냐 하면 ‘건물 짓다’도 포함되지만 ‘내 아들이어야 한다’라는 것도 같이 두 개가 겸하여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거예요. 사람의 아들은 성전을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돼요. 그것이 역대상 28장 6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전을 건축하고 내 여러 뜰을 만들리니 이는 내가 저를 택하여 내 아들을 삼”았다. 네 아들이 내 아들이 된다. 하나님이 이야기하신 거예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바뀐다는 것, 바뀌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를 오늘 살펴봐야 돼요. 다윗은 왜 성전을 못 짓는가? 다윗은 설명하기를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라고 돼 있어요. 하나님의 성전의 조건은, ‘내 이름이 내 이름다워야 한다’에요.

그러면 내 이름이 내 이름다울 때 그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내 이름이 내 이름다워야 한다는 것은 어떤 요소가 빠지느냐 하면, 다윗 네가 땅에 피를 흘렸다는 겁니다. 이 땅에 피를 흘린 요소가 내 이름을 내 이름답지 못한 요소가 된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전 짓는 것도 재료 있고 설계도면 있으면 되는 것 아니에요? 이건 뭐 조건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 많은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막과 성전이 달라요.

성막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설계대로 이 땅에 이스라엘 속에 함께 한 겁니다. 그러면 성전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온 게 맞지 않느냐? 그런 점에서 둘 다 성막이나 성전이나 하나님이 인간세계 속에 들어온다는 점에 동일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성막은 기존의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온 방법이에요. 그런데 성전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제거를 해버려요. 기존의 이스라엘은 없고 새로 만든 이스라엘 속에 성전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성막에 있는 언약궤가 성전에 그대로 들어오게 되면 이게 성막과 성전 사이의 연속성이 유지가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거예요. 성막은 한 데 별로 좋지 않은 천막 속에 생활한다면 성전은 그럴싸한 인간의 건물, 왕궁보다 화려한 성전에 거한다는 점에서 어떤 연속성이 있을 게 아니냐고 생각할 건데, 지금 제일 우리가 봐야 될 것은 땅에 피 흘렸다고 왜 성전을 못 짓는지 그 점을 여러분들이 파악을 해내야 돼요.

이 성전에 대해서 논리를 따져 가면 굉장히 복잡하지만 이때는 결론부터 먼저 보는 것이 요령이 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성전 완성의 요건이 나옵니다. 2장 6절, 7절에 보면,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이렇게 돼 있어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지 아니하면 성전이 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성전으로 인정하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을 초빙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살겠다는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이름이어야 성전이 갖추어지는 겁니다. 인간에게 배척받는 하나님만이 성전의 모퉁이돌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막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막과 언약궤와 함께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다, 라고 생각하게 성막이에요. 그런데 성전은 뭐냐? 그렇게 생각한 너희들 기존의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을 때 비로소 내가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을 때 비로소 성전이 돼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사람들이 버렸다고 흔적이 남아 있는 그 돌만이 성전을 이룰 수 있는 모퉁이 돌, 아주 시작점, 기초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땅에 피를 흘린 것이 왜, 이것은 신약 때 완전히 다 드러난 사실이고요. 그럼 구약 다윗 시대 때 다윗이 이야기한 거예요. 내가 땅에 피를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언질을 주셨다. 이게 무슨 뜻이냐 말이죠. 다윗은 군인이라서 땅에 피를 흘렸다. 왜 피를 흘렸지요? 각혈했어요? 폐병 걸렸습니까, 왜 땅에 피를 흘렸지요?

다윗에게 어떤 기대가 있었습니까?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왕이기 때문에 뭘 건사해야 되고 뭘 지켜줘야 돼요? 이스라엘을 지켜줘야 돼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왕으로서 이방나라와 싸웠던 겁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하나님 나랍니까, 다윗이 나랍니까? 다윗의 나라 되지요. 모든 백성들은 다윗의 전쟁의 성과에 완전히 속박이 되는 겁니다. 얽매이는 겁니다. 다윗이 승리하면 자기는 살고, 다윗이 패배하면 이스라엘은 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백성들은 다윗의 나라에 집합돼 있는 겁니다. 전부 다 거기에 예속돼 있는 사람들이에요. 다윗의 나라에요. 그러니까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한다는 말은 거기에 예속된 모든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다윗이 대표니까 다윗과 더불어서 박탈당하는 겁니다. 성전 지을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솔로몬의 경우에는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솔로몬의 경우에는 건물이 있다. 그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내 아들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말은, 다윗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내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돼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과, 하나님을 우리 집에 모셔서 하나님과 잘해보겠다는 것과 이거는 전혀 연속성이 없어요. 딴 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아들이 없는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고 그 아들 속에 하나님이 들어온다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에요. ‘우리 집에 하나님 왔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와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온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에요.

여러분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줬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서울에 사는 시댁이 재벌이라고 합시다. ‘너희들 생활하는 데 어렵지 않도록 매달 조금씩 보내줄게. 한 이천 만원씩’ 이 시어머니가 좋습니까, ‘나 너희 집에 살래’ 어느 쪽이 좋습니까? 재벌이고 뭐고 간에 우리 집에 사는 건 싫어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우릴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그거는 내 것이 있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다윗이 생각했던 다윗의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쪽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도와달라는 거예요. 내가 전쟁할 때마다 승리해서 하나님이 주셨다는 이 약속의 땅에서 정착하는 데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전쟁을 벌인 거예요, 다윗이. 그리고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 거예요. 그리고 그가 하는 모든 전쟁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여기서 다윗 자체에 큰 교체가 일어나요. 내가 나를 버려야 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밧세바를 보냈고요.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뭐냐 하면 왜 다윗이 밧세바와 그 남편 우리야를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본인이 이스라엘 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문제 삼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냐고 문제 삼아요.

다윗은 부하의 아내와 부하를 죽이는 것이 왜 왕의 입장에서 해서는 안 되는지 몰랐어요. 몰랐는데 다윗에게 다윗 자신을 잃어버리는 그런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를 들면 여러분,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부모가 살아 있는데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자식은 부모의 미래에요. 나의 미래가 자식한테 대물림 되고 자식한테 기대를 거는 거예요.

그러면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곧 누가 죽었다는 말이에요? 나의 미래가 잘렸다는 겁니다. ‘나의 미래는 없다’가 돼요. 나의 미래는 스톱이 돼요. 자식이 죽으면 미래가 스톱이 되는 거예요. 다윗의 자식이 죽어요. 그 죽은 자식의 엄마가 누구냐? 임신한 자가 밧세바에요. 밧세바와 다윗이 간음해서 임신이 됐는데 그 임신한 자식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은 나를 이스라엘 왕에서 잘랐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내가 이스라엘 왕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러면 기존의 이스라엘은 뭐냐? 지금 다윗이 내가 왕이에요. 백성들도 다 인정합니다. 왜? 전쟁에서 본인이 승리해서 건사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지켜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밧세바와 다윗 사이의 아이를 난지 칠일 만에 죽였거든요. 여기서 다윗은 자기가 자기와 결별해야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금식도 중단하고 굉장히 기뻐하는 데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밧세바와 나 사이에 생긴 아이를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은 보통 사람 같으면 이렇게 생각해요. 저 여자가 계속 안에 있으면 재수 없는 여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너도 남편 가는 길에 죽이든지 안 그러면 쫓아내든지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왔을 때 시편 51편에 나단 선지자가 한 이야기를 다윗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집에 많은 양이 있어요. 이 부자한테 손님이 온 거예요. 그럴 때 자기 많은 양을 손님 위해서 잡지 않고 한 마리 양이 있는 하인의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다고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들어서 지적을 해요. 여기서 생각해보세요. 왜 부자는 많은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안 잡습니까? 왜 한 마리밖에 없는 종의 양을 왜 잡아요?

그것은 다윗은 자기가 왕이잖아요. 어차피 나라는 왕을 위해서 있는 거고요. 왕이 살아야 나라가 살아요. 종은 있으나 마나에요. 종의 양 한 마리는 있으나 마나라고요. 왕의 재산에 흠집나면 안 돼요. 왕이 재산이 손실나면 안 돼요. 왜냐? 하인은 왕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밑의 직원들, 종의 양을 잡는다는 그것이 흠이 되질 않아요. 다윗은 이스라엘 자체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왕이기 때문에.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들기를 부자라고 이야기하니까 다윗이 화가 나서 내가 속해 있는 이 나라에 자기밖에 모르는 그러한 부자가 있었어? 누구야? 율법대로 네 배나 갚아야 되고, 네 배가 아니라 그 사람 잡아 죽여도 상관없어. 적어도 내가 왕으로 있는 이스라엘에는 율법으로 철저해야 돼, 라고 강조하면서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들었던 그 사람에 대해서 ‘누구야, 그 사람? 내가 왕으로 있는 한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하니까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사람 누구라고 밝혔지요. 누굽니까?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왕이라는 걸 왜 잊어버렸느냔 말이죠.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지 당신이 아니다 이 말이죠. 당신은 율법에 종속돼야 돼, 예속돼야 된다고요.

하나님께서 우리야와 밧세바를 나단 선지자를 통해 뭐로 비유했느냐 하면 건방진 당신 때문에 잃어버린 양으로 당신 나라에서 왕이라는 입장에서 범죄를 유발시켰다는 거예요. 근데 다윗은 그걸 기뻐한 이유가, 내가 밧세바나 우리야를, 다른 데는 그런 게 흔해요. 그 점을 꼭 집어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이스라엘 나라는 내가 통치하는 게 아니고 율법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연속성을 견지한다는 뜻에서 기뻤던 거예요.

내가 잘나고 모자라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와 상관없이 언약대로, 율법대로 이 나라를 제대로 이어가게 했다는 것에 대해서 반겼던 겁니다. 그러면 그 우리야와 밧세바, 밧세바는 자기 남편을 잃었고 자식 잃었잖아요. 그렇다면 이거는 뭘 뜻하느냐? 아까 성전의 조건이 돼요. 뭐냐?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잃어버린 것이 새로운 성전의 기초 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거기에 대해서 가해자로 등장했고.

그러면 다윗은 뭐냐? 가해자인 나와 하나님의 혜택을 입은 나 사이에서 내가 나와 빠이빠이를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나와 분리돼야 되고, 내가 나와 결별돼야 돼요. 내가 둘로 쪼개지는 겁니다. 그 쪼개지면서 그 안에 뭐가 들어간다? 하나님의 억울하게 죽었던 우리야의 피가 개입되면서 내가 나를 버릴 수가 없었던 나를 이제는 과감하게 차버릴 수가 있었던 거예요. 다윗이.

하나님께서 밧세바 아이를 죽임으로써 다윗은 그 아이의 죽음은 자기 자식이 죽었으니까 이건 다윗의 미래가 죽은 거예요. 다윗 본인 자신이 미래가 없이 끊어진 거예요. 끊어지고 그 뒤에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에 속한 밧세바와 동침을 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은 위반했지만 사랑은 이어진다는 뜻에서 이름이 ‘여디디아’라 해서 누가 태어납니까? 솔로몬이 태어나지요.

그러니까 성막에서 성전으로 바뀔 때는 어떤 조건이 있어야 된다? 바로 인간의 모든 하나님은 내 편이 돼야 된다는 그것이 뭐로 바뀌어야 돼요? 연속성이 아니고 뭐로 바뀌어야 돼요? ‘불’연속성, 다시 말해서 나는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나에게 끊어져야 구원받는 사람 돼요. 끊어진 나와 새롭게 성립된 나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자로 끼어들어가는 겁니다.

성막은 이방민족 앞에서 ‘우리는 성막 있다, 언약궤 있다. 언약궤 앞장세우면 너희들 작살나는 것 다 알지’ 하고 언약궤로 기존의 자기 것을 지켜내고 견지해내고 버티는 도구로 사용했던 거예요. 다윗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언약궤를 너무 한 데 추운데 초라하게 놔두면 안 되겠다. 근사하게 모시겠다. 그동안 우리에게 전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을 좋게 모시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은 말하지요. 그게 누굴 위함이냐? 네 눈에 보기에 네가 이스라엘 왕으로 보이냐? 너는 지금 행동하는 게 이스라엘 왕으로 행동하지? 그렇다면 저 백성은 네 백성이야, 하나님 백성이야? 이렇게 다그치고 묻는 거예요.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안 죽였으면 거기에 대해서 다윗은 아무 해답이 없었을 거예요. 밧세바와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그것도 그냥 죽였으면 아무 문제없었어요.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와서 지적을 하면서 나단 선지자가 직접 이야기하지요. 그 사람이 기분 나쁘든지 상관없이 직접 이야기해요. ‘당신이야.’ 당신이 바로 충실한 이스라엘 백성, 내 백성을 네가 죽였어. 왕이라는 작자가 내 백성 죽였잖아. 이래도 네가 왕이야? 너 하나 살겠다고, 네가 왕 행세 하겠다고 네가 우리야와 밧세바 그들은 망쳐버렸다는 거예요.

다윗은 그런 밧세바와 헤어질 수가 없지요. 왜? 헤어지면 안 되지요. 나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율법으로 주어진 사건 자체를 자기가 왜 피해버립니까? 나를 죄라고 고발한 십자가를 우리가 왜 피해요? 십자가 아니면 어디서 내가 지옥 갈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겠어요? 십자가 아니면. 다 지 잘난 맛에 사는데요.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면, 더 난해해집니다만 할 수 없지요. 해야 될 것은 해야 되니까.

이 문제를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세요. 제가 질문을 적어볼 테니까요. 여러분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답변해도 내가 할 테니까.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셨는가? 애굽이란 땅에 살던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왜 살게 하셨는가? 주관식으로 하면 답변하기 곤란하니까 객관식으로 골라잡기 하겠습니다.

①정착시키기 위해서, ③번도 골치 아프다. ②정착시키지 않기 위해서. 몇 번입니까? 이유도 모르지만 ②번이 정답 같이 보이지요. 이미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정착했어요. 정착을 십년, 이십년 한 게 아닙니다. 사백년 동안 정착했어요. 정착해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강제로 끌고 왔어요. 애굽에서 강제로 끌고 간다고요. 그러면 그들은 땅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모든 땅은 주인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애굽의 땅 나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주인 없는 땅에 가는 줄 알았어요. 이 세상에 주인 없는 땅이 어디 있어요? 주인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가나안 땅도 토착민이 있어요. 토착민은 그 땅을 자기가 주인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애굽에 살던 자가 거기서 강제로 이주했어요. 강제로 이주해서 땅이 없었다 이 말이죠. 땅 없는 곳에 가는 줄 알았더니만 가나안 땅에는 토착민들이 있었고, 토착민들이 얼마나 강대한지 이거는 뭐 빼앗을 수가 없어요. 전쟁하나마나 이스라엘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는 자들이 가나안 땅에 있다 이 말이죠.

차이점이 뭐냐 하면 애굽에서는 그냥 애굽 땅에 살았는데 나올 때는 땅은 없는데 그 대신 하나님이 동행합니다. 땅은 없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그러면 계속 동행하고 나그네 생활하지 약속의 땅은 왜 주시는가? 뭐가 문제냐 하면 이게 문제에요. 정착하는데 ‘땅에 정착할 것인가, 주의 이름 안에 정착할 것인가?’ 이걸 이스라엘에게 묻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아니라면 나는 땅에 정착하지 않겠다는 신앙심을 갖고 있는가를 확인해보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의 땅에 여호수아로 정복해서 했지요. 땅을 정복하자마자 뭘 날려버렸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날려버린 거예요. 애굽에서 땅 위에 살았잖아요. 그러면 그 토착민들, 이스라엘 아닌 그들도 땅 위에 살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 땅이 위에 정착하는 것이 왜 나쁘냐’는 거예요. 이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제가 분명히 넌지시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울산에서 사는 게 왜 나쁩니까?’ 하여튼 눈치도 없어. ‘울산에서 사는 게 왜 죕니까?’ 주의 이름을 잊어버리면 그래요. 지금 주의 이름이 하늘에 있다. 그건 틀린 말이에요. 그럼 주의 이름이 어떤 분이냐? 땅에 오셔서 하늘에 가 계신 분이에요. 땅을 흩어보시고 올라가신 분이거든요. 인자는 이 땅에 머리 둘 곳도 없었으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가 우리의 신앙이 과연 제대로 된 신앙인지 확인 차 성령께서 성경을 보게 해요. 마태복음 15장 27절에 보면 여기에 수로보니게 또는 가나안 여자로 돼 있는데 이방 여인입니다. 이방 여인이 와서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다고 예수님 뒤에서 소리 질렀어요.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돼 있지요.

참 예수님의 그 말씀이 정말 깊이가 있지요. ‘잃어버린 양 외에는 나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분명히 언급했어요. 문제는 잃어버린 양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 치고 스스로 자기가 잃어버린 양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윗 같아서 정착하려고 해요. 정착하는 의지가 뭡니까? 안 잃어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내가 내 인생 건사하려고,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버티려고 하는 거예요. 안 잃어버리려고.

사람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버림받기 위해서 살아가버리면 버림받은 집에 성전에 합세하지 못해요. 하나님께서는 다윗 이후, 솔로몬 이후에는 이스라엘 속에 건물로 성전이 아니고 새로운 이스라엘 자체를 성전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규명하면서 솔로몬 시대를 엽니다. 다윗은 건물을 지어드리려고 했잖아요. 솔로몬은 건물 말고, ‘나는 사람 자체가 내 집이다’ 이래 되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 에베소서에 들어가면 뭐냐?(이번 수련회는 에베소서 합니다) ‘인간이 곧 성전이다.’ 성령으로 지어진 집이 성전이에요. 전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다윗의 나라에, 다윗이란 한 인물에 예속돼 있다면 완전한 성전은 예수님이란 인물에 완전히 예속돼 있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 자체가 버림받은 돌이 된다면 같이 버림받아서 모퉁이의 돌에 합세한 자만이 하늘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집엔 안 간다 하니까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2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

잃어버린 양 외에는 찾아오지 않는다 하는데 잃어버린 양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나타나고, 생산되느냐? 그 여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는 주인이 있기 마련이라고 운을 떼요. 개인은 독자적으로 자기가 주인이 아니에요. 개에게는 뭐가 있다? 주인이 있다. 그러면 개에게 떨어지는 혜택은 어디에서 주어진 혜택입니까? 개 본인이 원한 게 아니고 주인 상에서 떨어진 게 있으면 그제야 주어먹을 수 있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개의 신세에요. 철저하게 주인에게 예속돼 있는 개란 말이죠.

예수님은 말합니다. 그게 바로 잃어버린 양의 태도, 자세란 겁니다. 왜? 개는 자기 운명이 개 자기에게 너무나 알기 때문에. 주인이 주면 먹고 안 주면 자기는 끝나는 거죠. 주인의 운명에 자기가 따라가는 거예요. 이게 잃어버린 양이에요. 그것과 여러분 비교해보세요. 같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사람과 비교해봅니다.

어떤 청년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19장 16절에,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쭉 나오지요. 22절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렇게 돼 있어요. 이 청년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재물에 손상이 갔습니까, 안 갔습니까?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돈에 축 났습니까? 아니지요.

재물은 그대로 있는데 뭐가 날아갔어요? 영생 날아갔지요. 장사 참 자알 했다. 돈은 그대로인데, 이 청년이 앞으로 돈 더 잘 벌 수도 있어요. IT사업해서. 돈은 벌었는데 뭐가 없어요? 영생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15장의 이 여인은 돈은 없는데 뭐는 있어요? 영생이 있는 거예요.

돈이라 하는 것은 내 세계를 지탱하고 연속적으로 이어가는 데 꼭 필요한 게 돈입니다. 나를 이 땅에서 정착시키는데 꼭 힘이 되고 에너지 되는 게 돈이에요. 돈은 자존심이에요. 돈 있으면 나 있고, 돈 없으면 나 없는 거예요. 이걸 마다해요? 부자 청년 보세요.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주께서 뭘 건드렸지요? 자존심을 건드렸지요. ‘네 많은 재산 팔고 빈털터리 되어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그 청년 계산했을 거예요. 돈이 없으면 어디서 못 산다? 땅에서 못 살지요. ‘그래 땅에서 못 살면 나를 얻을 것이다. 땅에서 네가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으면 그제야 너는 나를 이해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 듣고 청년만 놀란 게 아니에요. 누가 놀랐겠어요? 같이 있던 제자들이 놀랐어요. 그다음부터 벌벌 떨어요. ‘주여,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바람에 이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주여,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봤지? 부자가 천국 못 가는 것 봤지? 부자가 천국을 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해라.” 있을 수 없어요.

제자들이, ‘누가 구원받습니까?’ 이 말은 뭔 뜻이냐? 누가 구원받겠느냐고 묻는 게 아니고, 구원받을 사람 단 하나도 없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해요.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겠습니다.’ 뭔 뜻이겠어요? 자기들은 예수님 붙어 다니는 이유가 있었어요.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따라다닌 거예요.

제자들의 잘못은 뭐냐? 자기와 자기를 못 떼어놓았다. 떼어놓지를 못했어요.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날 지키랴.’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 도와달라는 거예요. 내가 현재 A, 그리고 미래의 나, 그걸 B라면 이 속에 연속성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기서 은혜로 도와주셔야 지금의 내가 나중의 내가 됩니다. 지금은 세상에 있지만 나중엔 천국 가는 내가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고 주님이고 예수님이고 삼위일체고 개입해서 도와 달라. 이것 때문에 교회 나오잖아요. 이게 부자 청년이라고, 이게 부자 청년이에요. 미래의 나와 끊어질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자꾸 나 있는 곳에 하나님 좀 찾아와 달라는 거예요. 나도 멀쩡하고 멀쩡한 하나님 찾아오시고. 그런데 주님께선 멀쩡하지 않은 주님이 멀쩡한 내 속에 아예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나는 내가 멀쩡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멀쩡하지 않게 여긴 그 예수님이 진짜로 멀쩡한 예수님이란 것을 발견합니다. 그동안 왜 그걸 발견 못했어요? 자기 멀쩡한 데 온 정신을 거기다 팔고 있었기 때문에, 나 잘 되기 위한 조건 하에 예수 믿었기 때문에 진짜 예수를 못 알아보고 가짜 예수, 가짜 주님만 믿습니다, 하고 닦달내면서 열심을 냈던 겁니다. 나 버리지 말아달라는 거예요.

여러분, 다들 구약성경 백독은 했지요. 그 구약성경에 나오는 성도들 보세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을 위해서 결별됐지요. 맞지요? 이스라엘 위해서 야곱이 결별됐지요. 맞지요? 잘 나가는 이삭이 나중에 그 잘 나갔던 아버지 이삭이 거짓말에 당하는 또 당해야만 마땅한 거짓 아버지, 엉뚱한 데 축복을 준 아버지라는 것이 들통 났지요. 그리고 야곱의 형제들이 자기한테 하자가 있고, 근원적으로 문제 있다는 것을 요셉을 통해서 발견하지요.

이게 구약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가 꿍치고 우리가 못 놓는 나 자신을 놓아버리게 하는 그런 권능, 그런 능력이 우리를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 주님의 능력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 디도 3장에 나왔지만 사람이 자기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구원을 받지 못한다 했어요. 이건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5장 4절, 제가 크게 읽어보겠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뭐하고? “끊어지고” 그러면 보세요.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지 않으려고 하는 작자가 있던가요? 없지요.

그러니까 뭡니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나에요. 끊어진 나는 끊어져야 돼요. 시작을 내가 나를 건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니까요, 모든 인간들은. 이거는 우리 선배가 되는 유대인들이 다 그런 짓한 사람들이에요. 율법 주니까 우린 선택됐다, 율법까지 주셨네. 하나님이 왜 주셨겠는가? 말씀 지키면 구원받고 복 받기 때문에 지킨다. 그러니 교회 가서 열심히 말씀 지키자. 이 생각 안 한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이 생각 안 하겠습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인간 치고 이 생각 안 하겠어요? 율법은 무엇을 자극시키느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어떤 심보를 갖고 있는가를 들춰내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율법 주니까 아까 부자 청년 처음에 뭐라 했어요? ‘영생 어떻게 얻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안 그러면 영생 얻는 자기 어릴 때부터 노하우를 이야기했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영생 얻기 위해서 뭘 했습니까? 십계명대로 다 지켰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본인이 본인을 안 잃어버리겠다는 하나의 몸부림이에요.

그냥 성막 있으면 좋겠다, 해서 다윗이 성막 있는 건 좋은데 너무 바깥에 비바람 다 맞고 천막으로 해서 안 되겠다. 안쓰럽다. ‘ 가 거창한 안정된 집을 지어드려야지’이게 뭐냐? 성전 짓겠다는 취지의 다윗의 시작이었어요. 너 잘렸어. 너 아들이야 할 때, 내 아들? 아들이 있어야지. 네 아들 죽었어. 뭔 뜻입니까? 아들 죽이고 그 죽은 자리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아들은 이건 다윗 자기와의 연속성이 아니고 불연속성이에요. 성전은 성막과 불연속성입니다. 왜? 사람에게 버림받은 그 돌이 모퉁이 돌로서 성전이 이뤄지기 때문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그다음에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실제로 은혜 받은 적도 없고요,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적도 없어요. 그냥 흉내 내기로 그리스도 믿습니다, 하는 자는 실제론 다 끊어졌어. ‘너는 들어온 적도 없고 끊어졌어.’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다음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이렇게 돼요. 율법은, 시간이 약간 지났습니다만 이것마저 해야 내가 안 간지러워요.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율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라 해요. 그러면 그전에 율법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율법이 사백삼십 년 후에 새로 생겼다는 말은 율법의 끝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 10장 4절에서는 율법의 마침이라 한 거예요. 율법은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기 위해서 준 거예요. 탐색전이죠. 뭘 탐색합니까? 내가 모르는 나의 옛사람이 꿍꿍이가 얼마나 악마적인지, 마귀적인지 탐색하려 들어왔다 빠져나와요. ‘주제파악도 안 되면서 네가 구원을 받겠다는 그 심보, 그게 십자가 지신 주님이 가신 길과 네가 같게 보이느냐?’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의 마침과 율법의 완성을 달라요. 율법의 마침은 자기 경험 다하고,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한 게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사랑한 겁니다. 이것 아시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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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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