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31116a말4장2절(피의 구조)-이 근호 목사
안양20231116a말4장2절(피의 구조)-이 근호 목사
말라기4장, 오늘 마지막으로 말라기를 끝내겠습니다. 말라기 끝나고 난 뒤에 다음 달부터는 하겠습니다. 책이 많이 있다면 합니다. 찾아봐야 돼요. 여기 4장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 교만과 악을 행하는 자라는 그 규정. 어떤 식으로 규정이 되는가, 율법 때문에 규정되는 겁니다.
율법에 의해서 나온 결과가 교만한 자, 악을 행하는 자가 이게 나옵니다. 율법이 들어옴으로서 숨겨진 교만이 나오고 숨겨진 악이 현실 속에 나오게 하는 거예요. 율법은 회개케 하기 위함이 아니고 율법은 죄를 들추어내기 위함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용광로 불같이 이르는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용광로 불같이 불 싸지르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려면 필히 교만한 자와 악이 일어나야 되고, 그런 자들이 등장해야 되고, 그런 자를 등장하는데 율법이 활용됩니다.
율법을 집어넣어서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끄집어내서 그 다음에 뭐냐,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리 되어있어요. 이런 말씀을 주께서 일관되게 해주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주께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에 대해서 박수치고 동의하고 찬동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는데 누가 말려요. 말릴 수가 없어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이리되어있어요. 그 다음에 2절에 보면. 그러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라는 것은 교만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는 자들인가, 그들은 율법에 의해서도 교만하지 않다고 판정받고 율법에 의해서도 악을 행한 적이 없다고 판정을 내린 그 사람들인가, 라는 질문을 해봐야 됩니다. 그런 인간이 없지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치료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데 하나님 입장에서 치료해 줄자와 치료 안 해줄 자가 그렇게 둘로 나누는 거예요. 치료해 준 사람은 그 치료자에 의해서 그 이름을 경외하게 되어있고, 치료를 안 해준 사람은 지 교만하지요. 특히 재미난 게 교만이거든요.
율법을 통해서 교만이 드러난다는 말은 교만한 자가 나는 교만하다고 이야기 하겠어요? 안하겠지요. “내가 뭐? 그럴 수 있지 뭐. 이게 어떻게 죄야? 이게 어떻게 교만이야?” 라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봐라.” 하면 율법을 “저리로 가라!” 하고 쫓아내지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의 죄를 지적하는 율법을 거절하는 것이 뭐다? 교만이다 이 말이지요.
나를 대단한 존재로 인식해 주는 그런 교훈과 그러한 경우를 찾아다니는 게 교만인 거예요. 주의 일을 방해하는 겁니다. 학생들이 컨닝하면 무슨 죄에 걸리지요? 컨닝을 하는 게. 컨닝죄 라는 건 없거든요. 컨닝하는 죄는 무슨 죄냐 뭐냐 하면, 입시 방해죄에 걸리는 거죠. 방해하는 거예요. 공정한 입시 행위에 방해하는 죄가 컨닝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만은 뭡니까? 주께서 공정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방해하는 죄가 교만이에요. 하나님이 그러든 말든 나는 내 식대로 살아간다. 그게 교만이잖아요. 하나님은 계획이 있는데, 나는 그 계획 모르겠고, 하나님의 계획 그런 거 이야기하지 마. 나는 모르겠고 나는 내 인생대로 내 계획대로 밀어붙일 거야. 그게 교만인 거예요.
율법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시내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시내산에서. 시나이산에서 내려왔지요. 주께서 시나이산. 시나이산과 대비되는 것이 모리아산이거든요. 모리아산. 모리아라는 것은 하나님이 지켜본다는 뜻이에요. 주시한다는 뜻이에요. 갈라디아서4장에 한 번 봅시다. 24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낳은,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낳은 것이라. 시내산에서 종을 낳았다고 본 거예요. 시내산의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모조리 다 죄의 종이에요.
그럼 죄의 종이 아닌 자가 누구냐, 그것은 없지요. 없는 걸 가지고 또 다른 곳엔 예루살렘이라고 본 거예요. 예루살렘은 모리아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 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졌거든요. 모리아산의 특징은 뭐냐 하면 종인데 이젠 종없다. 내 아들이다. 절차가 주입된 율법의 종이었었는데 그 사람은 죽고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들된 사람. 그것이 어디서 태어나는가, 모리아산에서 또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자다 이 말입니다. 그 예루살렘은 위에 있다고 되어있지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다. 곧 우리 어머니다. 우리 어머니다.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어머니가 있고, 두 종류의 어머니가 있음으로서 두 종류의 자식들뿐이다, 고 보는 겁니다. 하나는 시내산 율법에서 태어난 자식은 종이고, 그건 저주의 율법의 저주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주를 이겨낼 수가 없어요.
또 하나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이미 죽었고 그 인간은 죽었고 율법에서 벗어난 약속에 의해서 새롭게 잉태된 자. 그 사람들은 예루살렘 출신이다.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다. 엄마다 다르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엄마가 다르다. 신약에서는 갈라디아에서는 새로운 아들을 등장을 이야기하는데 오늘 말라기에서는 뭐냐 하면 여기 치료를 이야기해요.
그러면 치료라는 것은 교만하고 악한 것은 이 말라기 자체가 율법이에요. 말라기 자체가 레위기 율법이니까. 율법에 의해서 교만과 악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인간에 교만의 극치가 바로 율법으로 온전한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교만이었다는 겁니다. “니가 제대로 제사장이야? 니가 제대로 제사법을 알아? 이것도 제물이라고 준 거야? 이 흠 있는 걸 내가 받으라는 말인가, 니는 온전히 나한테 제대로 된 제사법에 의해서 제대로 제사를 드릴 수 없었어.” 라고 말라기에서 계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1장부터 계속 그것을 지적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4장에 와서 그 치료가 된 사람은 치료자가 누구냐 하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내 이름이 등장해요. 내 이름. 율법의 자녀 말고, 그 노선 말고, 다른 노선. 주님의 이름에 의해서 직접 치료를 받은 자의 사람은 그 사람은 치료대상이면서 어떻게 치료가 되느냐 하면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외양간의 송아지니까 송아지 자체적으로 어떤 인식이라든지 그런 것은 전무하지요. 없지요. 방금 엄마소에서 튀어나왔는데 뭘 알겠어요. 아무것도 모르지요. 그러니 치료된 자의 특징은 아무것도 할 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고 그런 거예요. 마치 어린아이 같아요. 어린아이한테 신학을 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겁니다.
어린아이한테 칼빈신학을 물으면, “칼빈신학이 나를 낳은 게 아닌데요.” 이리해요. 다른 말로 하면 법이 나를 낳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새로 낳았어요. 법 말고. 주의 이름으로 새로 낳습니다. 치료라는 것은 노선 변경이지요. 노선 변경.
기존에 있던 율법에 속한 것을 노선을 변경시켜서 송아지같이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노선 변경에 누가 개입하느냐, 주의 이름이 개입해서 주의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거기서 노선에서 이탈해서 빼내주는 겁니다.
그런데 송아지의 특징이 뭐냐, 여기 송아지 같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뛰리라. 뛴다. 거침없이 하이킥이지요. 그냥 뛰는 거예요. 구애받음이 없음. 마치 주님께서 이 세상의 율법에 대해서 구애받음이 없는 것처럼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모든 법에서부터 벗어나고 완성자라 하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해서 지독스럽게 이 인간들의 형편을 압박을 하고 있어요. 소위 쫀다 하지요. 딴 소리 못하도록 쪼아버려요.
산상설교 한 번 봅시다. 마태복음5장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일종의 욕설인데. 나가 죽어라. 이런 뜻이겠지요.)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저 인간 왜 사냐 하는 자는)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게 일점일획도 하나님께서 변경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인간을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내 분노를 상대에게 퍼붓기 위해서 만나요. 친구 좋은 점이 바로 그거에요. 내 속에 있는 분노를 퍼붓기 위해서 말 상대자가 되는 거예요. 제 정신에 안 되니까 술 한 잔, 소주 한 잔, 막걸리 먹고 퍼붓는 거예요. 명절날 집안끼리 모이는 좋은 점이 그 점이에요. 서로가 분로를 서로를 향하여 퍼부을 수 있는 단란한 만남의 장이 되는 거예요.
말로 해서 안 될 때는 팔과 손힘으로 하는 겁니다. 일단 제사음식 물려놓고 판내라. 화투내라. 해가지고 고스톱치면서. 고스톱치면 팔이 아파요. 나는 잘 안해봤지만. 때리면 아프잖아요. 정신없이. 옛날에는 윷놀이 했는데 윷놀이는 짜증나. 귀찮아. 계산하는 것도 귀찮아. 그냥 간단하게. 점200에 간단하게. 이게 편하다고요. 그냥 패는 거예요. 그냥. 화투를 대용해서 패는 거예요. 죽으라고 패는 거예요. 이게 나오나 안 나오나. 나왔다! 스트레스가 확 풀리지요. 끝나고 돈 모아서 3차 노래방 가는데. 형님은 노래도 잘해. 이런 거.
그 다음에 끝나고 난 뒤에 제사음식 챙기고. 제각기. 경상도 말로 지즘 지즘. 제각기 해가지고 차타고 가면 집안 어른들 트렁크에 “야, 야, 우리 이거 안 먹는다. 이거.” 해가지고 사과 실어주고. 올 때 지 아들 수능친 거 점수 자랑하러 와가지고 사과, 배 얻고 가지요. 속으로 ‘어머님, 올 한 해 오늘 찾아온 걸로 끝입니다.’ 특히 며느리 아주 좋아하지요. 올해는 요걸로 끝냈구나!
타인이 있어야 될 이유는 내 분노를 쏟을 휴지통 같은 그런 게 있을 때 사람은 살맛이 나는 겁니다. 나이 별로 안 많은데 배우자가 일찍 죽게 될 때에 다른 사람은 맹숭맹숭한데 그 보호자는 그리 울어요. 울면서 뭐라고 하는지 여러분들이 다 아시지요. “이 야속한 사람아! 나를 두고 그냥 가나? 왜 먼저 가노. 이 야속한 사람아!” 뭐 더 있어야 쓰레기통 역할을 하라는 말인지. “야속한 사람아! 나를 두고 가면 나 우이 살라고.” 이렇게 아주 진정성있는 울음을 토해 내지요. 처음에는 손님보고 참다가 나중에는 하관예배할 때 마지막 공동묘지 갈 때는 막 따라가요.
이처럼 인간이 인간세계가 산상설교에 의하면 인간은 산상설교에 의해서 교만하지 않은 자 없고, 악을 행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왜 주님께서 산상설교를 했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교만하고 악한지 기준의 율법해석을 기존의 율법해석가지고 전부 다 자기 정당성으로 다 바꿔났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래서 니가 율법을 하자없이 지켰다 이 말이지? 그러면 이건 어때?” 하고 추가적으로. 율법에 율법을 추가적으로 주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말하기를 맹세하면 지키라고 했지. 내가 말한다. 맹세하지 마! 맹세하지 마! 마음 속 간음하는 것도 간음죄야.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아실 거예요. 산상설교보면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시작해서 니 오른 손이 범죄하거든 눈을 빼어버리라. 이건 인간이 도무지 지킬 내용이 아닙니다. 지킬 내용이 아닌데 이게 율법으로 추가가 되어버려요. 오히려 율법의 완성이 되어버려요.
그리고 이렇게 합니다. 니가 훌륭한 말씀입니다. 잘 들었습니다. 이걸로 끝내려고 했지. 내가 분명히 한다.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나중에 다 무너진다. 내가 그냥 빈소리한 게 아니야. 이건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그런 소리가 아니고 내 말을 듣고 다 지키지 못한 자는 마지막에 홍수가 나서 무너짐 같이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이 다 무너진다. 그렇게 산상설교를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이미 확정된 거예요.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그것도 하나님이 불같이 내려지는 것은 확정된 겁니다. 이건 못 바꿉니다. 그러면 이 불같이 전체를 불로 심판한다는 그 근거는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바로 노아홍수에서 왔어요. 이제부터 난해할 건데 여러분들이 참으시기 바랍니다.
노아홍수에 대해서 사람들이 뭔가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노아홍수로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는다하니까 노아홍수로 이제는 두 번 다시 벌주는 게 없겠지. 라고 쉽게 단정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구약의 시편 같은데 보면 노아홍수가 끝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노아홍수를 본격화시켰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노아홍수로 인하여 모든 세계가 수족관 신세가 된 거예요. 수족관 신세가 되었다. 물이야 수족관 있으면 신나지만, 인간 같은 경우에 수족관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이건 뭐 답답해서 미치겠지요. 노아홍수의 의미가 이 땅이 산이 있었고, 강이 있었고, 바다가 있었잖아요. 이 전체를 뭐로 덮었습니까? 물로 덮은 거예요. 물로 왜 덮었는가, 이 전체가 죄악에 덮여 있다. 죄악에 덮여있음을 물리적인 자연을 소재로 해서 그걸 실감 있게 보여준 거예요. 죄의 깊이만큼 물의 깊이가 된 겁니다. 의로운 건 하나도 없었고, 전부 다 죄밖에 없었던 거예요.
이렇게 물과 죄의 만남이에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물이 거두어졌잖아. 물이 말랐잖아.” 물이 마른 것은 죄까지 마른 게 아니에요. 물이 말랐다는 말은 그 전의 사건 물이 죄 있는 곳에 덮었다는 그 취지가 달성된 상태기 때문에 그 상황이 그 물이 없어진다고 해서 그 구조가 변화지 않는 채로 그냥 계속 간다는 겁니다.
그럼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은 왜 했는가, 여기에서 무지개가 오면서 하나님께서 여기 죄밖에 없는 세계, 물로 지금 당장 덮여도 죽어 마땅한 죄밖에 없는 속에다가 언약을 집어넣어서 언약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있는데 이건 유보에요. 유보. 긍휼과 자비라 하는 것은 죄 없다가 아니라, 죄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어릴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너희 죄를 묻지 않겠다고 창세기8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요 이야기를 실제로 시편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러면 더 실감날 겁니다. 시편69편1절,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이상하잖아요. 인간의 신체구조에 물이 어디 70%하지만, 이 물은 그 물이 아니고 내 내부의 물이 아니고 바깥의 물이거든요. 언제 그 바깥의 물이 흘러들어왔지요. 여러분,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뭔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오해하고 계신 게 아니에요? 아닙니다. 인간 내부와 외부의 전체를 다 이야기한 거예요.
그 다음에 시편18편4절,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뭐로 되어있지요? 창수. 불의의 홍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습니다. 불의. 악. 악이 뭐같이 덮였다? 물같이 덮였다. 마치 노아홍수의 물처럼. 헤엄쳐서 빠져나갈 수 없듯이 죄악의 창수에서 버틸수 없다. 그게 뭐냐 사망의 줄. 그 죄가 있기에 사망이 나를 이렇게 얽매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시편42편7절,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꼬. 하는 걱정 근심이 마치 노아홍수가 엄습해서 나를 덮었듯이 어느 한 구석, 어느 한 순간도 근심걱정의 이 바다에서 밀려온 파도를 버틸 수가 없게 만들었다는 뜻이에요. 하나 해결하면 또 파도가 와서 덮치듯이, 때리듯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돌발적으로 출몰해서 나를 근심과 걱정에 그 파도 속에 숨도 못 쉬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기존 사장이 갑질하다가 사장 바뀌면 또 갑질하고. 회사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회사를 직접 운영하는 사람 같으면 직원이 와가지고 갑질한다고. 새로운 직원이 와가지고 또 말썽일으키고. 도대체 한시도 편안할 숨을 쉬지를 못하고.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아요. 나를 짓누른다. 시편88편7절,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물, 물결이에요.)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의 태도는 이거에요. “그럴 거 같으면 저를빨리 죽이소서.” 주님은 니는 나한테 죽여달라 할 권한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은 주님의 언약과 관련되어서 죽여야 돼요. 교만하고 악을 들추어내면서 죽여야 되는 거예요. 심판의 죽음이지. 그냥 힘들다고 죽는 죽음은 하나님이 허용한 적도 없고 그걸 용납한 적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을 위한 구조지, 인간을 위한 구조가 아니거든요.
시편88편17절 봅시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물같이 종일 나를 에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물은 액체지요. 나는 고체잖아요. 고체같으면 같이 상대해가지고 마동석이 해가지고 같이 싸우고 때리고 하는데 아니면 행정소송해가지고 민사소송하면 되는데 상대가 사람이 아니고 고체가 아니고 물이에요. 오는 비보고 고소합니까? 소나기보고 고소할 수 있어요? 액체인데. 소송 대상도 안돼요. 물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둘러쌌나이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시편124편4절,5절,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언제? 언제 그렇다는 말입니까? 바로 노아홍수 때도 그렇지만 특히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 속에 들어갔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닷물이 그냥 육지가 이렇게 계곡을 이루어서 통과를 하면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요. 육지는 고체잖아요. 땅은 고체기 때문에 갑자기 휩쓸릴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고체가 아니고 액체로 되어있는 우리 인식에 물은 언제든지 흐를 수 있다는 그러한 까딱까딱한 그러한 상황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들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면서 건넜겠어요. 어떤 사람은 만져봤을 거예요. 만져보는 것도 겁날 거예요. 이게 물이야? 얼음이야? 어, 물이네. 그런데 물이 갑자기 벽이 됐지? 이 쪽 다 벽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언제든지 마법이 풀려버리면 다시 전부 다 함몰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납득되고 우리가 이해되는 죄 용서를 해주신다든지 은혜를 주시면 우리는 기꺼이 고마워하겠는데, 우리가 납득되지 않는 방식의 죄용서가 와버리면 죄 용서 받아도 간당간당한 거예요. 이거는. 죄용서가 뭐냐 하면 네가 마련한 방식이 아니고 내가 마련한 방식 또는 다른 말로 주님의 가신 길로 그게 내가 길이니까 그쪽으로 자기 백성을 끌고 가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보고 이런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아무 걱정하지 마! 니 아무걱정 하지 말고 자기 십자가만 지고 와!” 그런데 십자가 진다 하는 게 이게 생각을 2분40초 지속되면 그러면 2분45초는 십자가 생각이 안 나면 그냥 무너지는 거예요. 죄 용서는 취소되는 겁니까?
어떤 경우라도 죄 용서를 통과하는 과정 속에 어떤 경우라도 내가 행할 수 있는 거, 내가 가능성을 집어넣는다면 이건 즉시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환경, 배경을 조성하고 우리를 이끄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자기 행함으로 언제든지 돌아서거든요. 그래서 돌아설 때마다 죄용서가 취소되는 게 아니고 돌아설 때마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과 항상 접촉으로 점화가 일어나게 만들지요. 내 것 돌아설 때마다. 성도한테만 해당돼요. 불신자는 십자가가 지식이니까 해당 없고요. 점화가 되면 불꽃이 일어나지요.
늘 불꽃이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언제? 이만하면 구원은 됐고, 주님이여, 내 이런 소박한 소망이 있는데 오늘 우리 애가 수능치는데 뭐 그저 큰 욕심내지 않습니다. 지 아는 것만 나오게 하옵소서. 떨리지 않고 밀어쓰지 않고 칸막이 밀어쓰지 않고 실수 없이 지 아는 욕심내지 않고 지 아는 것만 나오기를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하지요. 벌써 뭐가 날아갔습니까?
주께서 자식보고 수능치게 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주께서는 용서만 하고 나머지는 이 어미한테 맡겼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한테 맡겼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수능치고 난 뒤에 엄마, 베렸어. 한 문제 틀렸어. 어떡해. 나 서울의대 못갈 거 싶어. 한 문제 틀린 거 같은데. 큰일났구나. 킬러문제 있었어? 한 문제 틀렸어. 나 다 맞는 줄 알았는데. 전혀 우리하고 상관없는 예시를 한 겁니다.
주님께서 그 산상설교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뭐냐 하면 그 나라 의를 구하라는 거예요. 그 나라 의. 형제를 욕하지 마라 이 정도가 아니고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딴 것은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지만, 그 나라 의를 구하라 하는 것은 적극적인 거예요. 따라서 산상설교는 주님 혼자 통과하는 구간이고요. 율법구간이고. 아무도 주님 이외에는 아무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통과한 그 성과를 가지고 있어야, 효과를 가지고 있어야 우리가 계속 치료하면서 홍해바다 걷는 것이 악마와 이 죄악된 구조와 천국 구조사이를 통과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라기 마지막은 구조이야기에요. 이미 우리는 이곳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시편130편1절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이리 되어있지요. 이러한 이야기는 이스라엘 외에는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어요. 언제 우리가 물속을 통과했습니까? 이방인들은 그렇게 할 거예요.
모든 인간은 물속에 있었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왔었고, 또 이스라엘은 요단강도 건너왔잖아요. 그 요단강, 홍해, 그 노아홍수, 그들의 물은 무엇이 있기에 물이 덮친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죄의 깊이만큼 물이 온 거예요. 그러면 그 물 이야기를 다 빼고 나면 인간의 마음은 현재 어디에 갇혀있다? 죄에 노아홍수를 심판할 그 심판 속에 갇힐 만한 마음가짐 죄악된 마음가짐에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갇혀있는 셈이다 이 말이지요. 그런 형국에 있어요.
자, 그렇다면 아까 노아홍수할 때 언약이라 했지요. 언약. 노아홍수의 언약은 창세기9장에 나와요. 피. 피를 중심으로 무지개가 떠있어요. 피 중심으로.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은 유보하거든요. 죄 속에 갇혀있고 저주속에 갇혀있는 것을 언약이 있는 곳에만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무지개가 펴있는 겁니다.
무지개라는 것은 심판 끝났다~ 심판 끝났다는 뜻이에요. 한 때 심판이 있었는데 그 심판이 끝났어. 무지개는 물이 있어야 습기 있는 곳에 무지개가 피니까. 무지개라 하는 것은 “한 때 물의 세계였어. 한 때 그런 세계였었어. 지금은 아니야.” 라는 뜻이 무지개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구약에서 무지개 떠있는 곳이 어디지요? 에스겔1장, 10장, 그걸 그대로 요한계시록4장에 따라 보게 되면 어디에 무지개가 떠있습니까? 에스겔이 봤던 하나님의 보좌에 무지개가 떠있어요. 하나님의 보좌에. 그 하나님의 보좌에 떠있다는 말은 속시원하게 심판할 건 심판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고 만족하게 해준다는 뜻이에요.
심판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습니다. 죄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만족하는 거 없어요. 심판을 처리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무지개의 취지는 더욱 더 사는 거예요. 잘했어. 천사 잘했어. 그래. 사방 다 작살냈습니다. 잘했어. 잘했어. 그게 무지개의 취지에요. 그 무지개가 바로 어린양의 보좌에 피어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예수님의 형상이 있는 곳에 무지개가 피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구조적이라니까요.
내 개인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아니에요. 내 마음을 어떻게 잡고. 이거 아니에요. 니 마음은 그냥 교만하고, 니 마음은 그냥 악한 거예요. 다른 구조가 와서 바뀌는 겁니다. 시내산 아들에서 말고, 시내산 아들에서 처리된 모리아산의 아들로 되는 거예요. 예루살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이게 구조적이에요. 주께서는 이 땅에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그 새로운 구조 안에 있는 걸 가지고 치료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언약의 피다 말이죠. 피니까. 여러분,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공식으로 잡아도 상관없습니다. 공식. 뭐냐 하면 물의 구조 그 다음에 피의 구조, 그 다음에 불의 구조. 아까 불 이야기 나왔지요. 피의 구조로 언약을 집어넣는 것은 자기 백성의 노선을 빼내기 위해서 특혜를 주는 거예요.
그야말로 뭐냐 하면 편애에요.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저쪽은 편애가 아니고 편 잡고 증오하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미워하는 거예요. 한쪽은 일방적으로 미워하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야 구조가 잡혀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거지를 사랑하고 일방적으로 부자를 하나님께서는 내쳤습니다. 부자 쪽에서 아무리 뭔가 신앙적인 티를 내도 안 받습니다. 복음적 티를 내도 “내가 사랑 안하는데 니가 나를 사랑한다고? 나는 니 사랑 안 받는다.”고 밀어내지요.
그러니까 그걸 아는 성도는 뭐만 쳐다보고 살겠어요? 그러한 권한을 행세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주의 이름이지요. 주의 이름만 쳐다보고 홍해바다 그 한 속을 한 복판을 걸어가는 거예요. 물 만지고 하지 마세요. 이게 든든한지 “이건 얼음일 거야. 물이 쏟아지게 되어있어. 얼어있어.” 이렇게 점검하지 말고 내 이름을 걸고 하지 말고. 내 이름 말고 주의 이름을 하신 일을 보면서 그냥 걸어가는 거예요.
그 홍해바다를 만화로 그린다면 홍해바다가 이리 갈라져 있고 양쪽이 갈라져 있잖아요. 이 사이를 계속 남자만 60만 오잖아요. 올 때 하늘나라에서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치료하는 광선을 보낸다. 그러면 밑에 있는 것은 마치 뭐 같으냐 하면, 인형 같아요.
누가 사로잡고 있는데요? 주님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복음을 위해서 사로잡힌 자, 사로잡힌 자에요. 이게 디모데후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디모데후서2장26절,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다는 것은 바로 위에서 하나님이 무지개 있는 쪽에서 아래 쪽으로 언약을 위해서에요. 언약을 위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 자체를 이 땅에서 건지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건지는 뜻에 의해서 나를 건지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건지는 거예요.
그 과정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포기하고 주의 이름을 따르도록 그렇게 우리가 바뀌어진 거죠. 주의 이름으로 먹고 마시고, 주의 이름으로 죽고 사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 아래에 있는 것은 주님. 위에는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위험한 홍해바다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그러다가 진짜 물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그런 거 같으면 무너질 수 있는데 인간의 행동에 따라서 무너질 수 있는데, 주의 이름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 주의 이름은 부활의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가 되신 것은 죽었다가 부활함으로 주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을 압박하고 숨 못 쉬게 하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아버지의 뜻이 그냥 가만 두지 않지요.
마태복음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는 대목이 나옵니다. 시험 받는 끝부분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11절에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이에 마귀가 예수를 떠나고 그 다음에 뭡니까? 천사들이 와서 수종드니라. 천사들이 와서 수종든다. 그럼 그동안 천사들은 뭡니까? 팔짱 끼고 쳐다본 거예요. 왜냐하면 시나리오상 배역이 카메라 속에 들어올 타이밍이 아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가 그 다음 순서가 뭐냐, 악마퇴장, 천사등장이에요. 딱 각본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각본대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늘 마귀에 시험들지요. 그 마귀의 시험을 하게 되면 우리는 혼자 오는 게 아니고 천사와 성령께서 우리를 수종들지요. 최수종 수종보다 더 수종 들지요. 이게 주의 일에 포함돼 있습니다. 크레파스 통 보게 되면 애들이 노랑색을 좋아한다 말이지요. 노랑색을 하는데 애가 엄마한테 막 우는 거예요. 노랑색만 있고 빨강색은 왜 없어. 통 봐라. 통에 보니까 기다랗게 노랑색 옆에 빨강색이 있잖아요. 옆에 천사가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마귀한테 시험 받는 걸. 성령도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빨강색 들어오고, 초록색 들어오고 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구조에요. 전부 다 크레파스통안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것과 예수님의 성과를 각자 성도가 부분 부분이 모자이크처럼 그 인생을 성도의 일생을 순간 순간을 통해서 예수님의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주께서 어떤 것을 다 이루었는가를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게 하는 겁니다.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되려면 기본적으로 한 박스안에 구조안에 들어있어요. 나를 위한 박스가 아니고 주의 이름을 위한 박스. 내 이름을 위한 게 아니고요. 내 인생을 위한 게 아니고요.
다시 들어가 봅시다. 물의 구조에서 그 다음 무슨 구조에요? 피의 구조지요. 피의 구조가 되려면 불의 구조와 물의 구조 그 양쪽을 피의 구조가 양쪽을 다 포섭하고 있습니다. 포섭하는데 차이점이 뭐냐, 피의 구조는 한 분에게 집약되어있습니다. 집약되어있다. 노아홍수는 온 천지에 퍼져있지요. 불의 심판도 온 지구상에 다 퍼져있지만, 그 물의 심판의 진정한 의미, 불의 심판의 진정한 의미는 그 한 분의 하신 일이 최종 토대가 돼요. 기준이 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아요. 그러나 신약에는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왜? 모든 율법이 한 분에게 집약되어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지키느냐가 정답이지 내가 율법을 지키는데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이런 건 없어요. 그런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성심성의껏 지키겠습니다. 이건 안됩니다.
율법은 반드시 예수님의 피의 구조를 거쳐서 나와야 율법의 의미가 생겨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의 위반이에요. 그걸 어디서 알 수 있는가, 율법을 지킨 자가 예수님에게 폭력을 행세했거든요. 그 폭력의 희생자가 등장합니다.
여기 4장5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불심판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 누굴 보냅니까? 엘리야를 보내지요. 엘리야. 선지자 엘리야. 엘리야가 율법구조를 주장했던 유대교에 율법적 폭력에 희생물이 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자가 엘리야에요. 이게 엘리야에요. 세례요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면 세례요한이 당한 폭력이 그게 하나님께서 율법구조의 허점을 보여주는 그 폭력이 전부냐, 최종적인 것이냐, 아닙니다. 엘리야가 겹쳐있어요. 세례요한이 엘리야가 되면서 예수님이란 엘리야가 뒤에 숨어있다가 세례요한이 기존의 율법적 체제 구조에 의해서 폭력을 당하고 제거되고 난 뒤에 비로소 진짜 엘리야가 그 뒤에서 예수님으로서 등장해서 말라기 4장5절을 완성시켜 버립니다.
요 구조는 좀 복잡하겠지요. 그 때는 10분 쉬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