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1124b 누가복음23장 28절(고장난 인생)-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31124b 누가복음23장 28절(고장난 인생)-이 근호 목사
인간세계는 구원을 멈추지 못합니다. 유한한 데에서 유한한 것을 건지는 그 치열함, 내가 법을 지키고 그 법이 나에게 힘이 되고 미진한 것은 천국에서 보상받는다는 그 구원에 대한 집착, 욕망이 인간에게 멈춰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어봐야 알지. 사람이 천국 가봐야 알지.’라는 소리를 하거든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아놓은 것은 유한의 세계의 지혜입니다. 인간의 지혜죠. 인간의 지혜에 분기점이 발생했어요. 그걸 끊어버립니다. 내가 무한에 대해서 알려줘? 무한은 바로 너희들에 의해서 너희 손으로 죽인 자가 무한이라는 겁니다.
이런 내용이 되죠. [예수님께서 먼저 생명을 내놓으시면서 모든 인간이 이 피에 대해서 빚지게 만들었다.] 빚을 지게 만들어버렸어요. 이 피는 무한의 피에요. 다시 말해서 너는 무한히 죄인이고 저주받아야 되고 그리고 이 피를 받은 자는 무한히 사랑받아야 되고 의롭고 영생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 분기점이에요, 분기점. 유한의 세계가 알고 있는 그것과 무한의 세계가 알고 있는 그 사이에 확연하게 둘이 노골적으로 그 차이성을 분기점을 통해 다 드러내신 거예요.
그러니 복음이 복음 되려면 이 세상에서 불화되는 일들이 의도적으로 일어나야 마땅하죠. 이 세상이 불화된다는 말은 교회 내의 불화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내 마음 안에 불화가 일어나야 되죠. 이 빚지게 만든 분기점을 통해서, 건널래야 건널 수 없는 곳으로 이미 주님 혼자 가버렸을 때 예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제거된 이름이 돼요.
제거된 이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제거된 이름. 누구로부터 제거된 이름이에요? 나로부터 제거된 이름이에요. 내 이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제거하고자 했던 그 이름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죠.
그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제가 죽였습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주님을 싫어했습니다. 왜?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었기에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수 없었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제거시킨 거예요.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들고
멀어지는 그대와 나의 슬픈 사랑을 초라한 모습 감추며 돌아서는데
주님을 믿어서 구원받고자 하지만 그 주님이 내가 원했던 주님이 아니었던 거예요. 이 삭제된 이름에 합류되는 것이 구원이에요. 그게 구원이에요. 이 삭제된 이름은 인간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삭제된 이름은 명명(命名)불가능한 이름이기 때문에.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이름이에요. 명명이 불가하죠.
출애굽기 3장 13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이 뭐냐고 물었죠.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궁금증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물을 때 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자,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나타날 때만 나타나고 내가 감추어버리면 너희는 나 있는 곳에 있지 못한다. 유한과 무한을 분명히 구분 짓는 그러한 기능을 하는 하나님, 그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은 이미 이름이 있잖아요. 이름이 있으면서도 같이 부를 이름이 없는 하나님이 아니고, 있기는 있는데 이름 가진 너희들이 부를 이름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이름을 드러낼 때와 감출 때는 일방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정한 거예요. 그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보통 이름 부를 때 누가 있을 때 이름 부르잖아요. 강아지든 누가 있든. 나타날 때와 스스로 숨길 때를 주께서 일방적으로 정해버리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이에요.
그럼 여기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인간이 자유롭습니까, 하나님이 자유롭습니까? 질문 자체가 너무 의도가 있어서 쉽게 답변을 못하죠. 어렵지만 이걸 한번 해보겠습니다. 누가 자유로운지. 아까 했던 것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인간이 어릴 때는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처럼 생각하죠. 그런데 점차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가면 인간 내부는 세상을 닮아서 구조화되죠. 인간은 구조화된다 했습니다. 인간은 게임 판에서 게임을 하는 거예요. 게임은 노리는 게 있어요. 승자가 되는 거예요. 승자만 되고 나는 패자가 안 되려고 하는 거예요. 패자가 안 되기 위해서는 내가 의도적으로 누구를 패배자로 만드는 작업을 해줘야 돼요. 혼자 운 좋게 승자되는 건 없어요.
로또 사는 그런 낭비를 해줘야 누구 하나 로또 1등이 되는 승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패자로 들어가야 승자가 발생되지, 내가 패자가 되지 않으면 승자가 안 나오는 겁니다. 언젠가 내가 승자의 자리에 돌아올 날이 있겠지, 해서 복권 사는 거거든요.
여기 에도 나와요. 초반에 나오는데, 나한테 진리를 이야기하지 말고 나를 승자로 만들어주는 하나님이어야 되고 예수이어야 한다는 것을 민중들이 군중들이 원하고 있어요. 대중들이 게임에 들어온 거죠. 게임에 들어오면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신의 이름을 부르잖아요.
그런데 아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죠. 부른다고 나옵니까? 안 나오죠. 부른다고 안 나와요.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찾아오지 않느냐 하면, 이름을 부를 때 이름 부른 자, 자기가 이미 존재하고 있잖아요. 자기 이름이 있잖아요. 자기 이름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부르는 게 아니고, 자기 이름을 자기 이름대로 견지하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요. 그런 이름은 준 적이 없어요. 내 이름 묻지 마라. 나는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다. 너희는 너희 할 일이 있어. 나는 내 할 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주님 할 일하고 우리는 우리 할 일하면 되겠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해서 복음이 오질 않아요. 복음이 나타나지 않아요. 복음은 인간의 게임에 주님이 참여하는 거예요. 이거 놀랍지 않습니까? 이 인간의 더러운 게임을 주께서는 마다하지 않고 그 더러운 게임에 참가해요.
참가해서 승자가 되겠습니까, 패자가 되겠습니까? 왕창 망하죠. 빌립보서 2장 8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가장 패자가 돼요. 제일 loser가 돼요. 가장 저주받은 자가 돼요. 그것도 죄도 없으면서. 저주받은 자가 되죠. 심지어 누구한테 미움 받느냐 하면 강도한테도 미움 받았어요. 강도에게도.
게임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게임하기 마련이니까. 게임이 있다 할 때 인간들은 이 게임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내가 여기 있다’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옥이 여기 있다’. 네가 있는 게 아니고, 지옥의 일부로서 네가 있는 거예요. 그럼 주님이 게임에 들어온다는 말은 주님께서 지옥에 들어온 거예요. 방향성 있는, 그냥 게임이 아니고 어떤 방향으로 수렴되는, 쭉 쏠리고 있는 어디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그 지옥에 주께서 들어오신 거예요.
들어오셨으니까 유한한 인간들이 있는 곳에 무한한 분이 들어오셨잖아요. 주님이 어디로 빠져나가셨습니까? 십자가 저주로 빠져나간 거예요. 이 세상이 가는 방향이 지옥 방향이었어요. 인간은 모르죠. 우리 주님은 아시죠.
인간과 인간끼리 있으면 항상 거기서 법이 드러납니다. 내가 지키는 규칙과 네가 지키는 규칙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 맞는지를 드러내는 거예요. 결혼해서 신혼 초에 어지간히 많이 싸우죠. 왜냐하면 살아왔던 나를 구성했던 자아를 구성했던 규칙이 달라서 그래요.
처음에는 뭐 ‘우리 서로 사랑하며 재미나게 지내자’ 할 땐 규칙이 없다가도 애 하나 낳게 되면 애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숨겨진 자기의 규칙이 막 드러나요. 그게 극대화 되면, 이럴 거 같으면 헤어져, 막 나오죠. 애를 망치려고 아주 작심을 했어, 그러면 다른 한쪽에서 또 가만히 있질 않죠. 게임에서 진짜 지면 안 되니까. 네가 망치지, 내가 애 살린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언성이 높아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번 물어볼게요. 자유가 뭡니까? 인간세계에서 자유란? 인간세계에서 자유라 하는 것은 내 절대적인 법에 어느 누구도 도전하지 말고 관여하거나 잔소리하지 말고 내가 최고가 되는 것이 인간세계의 자유죠. 그런데 나한테 도전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헤어지고 싶다 하겠죠.
‘I want to break free’를 나는 너하고 헤어지고 싶다고 번역했는데 그 앞 가사에 보면 나는 자유롭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노래 많아요. 많은데 왜 이 가사를 택했는가? 여기 중간에 보면,
I want to break free from your lies
나는 너의 거짓말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You're so self satisfied I don't need you
너는 너무 자기만족에 빠졌어 나는 네가 필요 없어
I've got to break free
나는 자유를 가져야 돼
그다음에 보면,
God knows, God knows I want to break free
신은 알아, 신은 알아 난 자유롭고 싶어
이 대목 때문에 이 가사를 채택했어요. 이 대목 때문에. 왜 자유롭고 싶어 하면서 신의 재가(裁可, 안건을 결재하여 허가함)를 왜 득(得)해야 되죠? 왜 받아야 되죠? 아 참… 이게 정말 난해한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의도한 건데 인간은 (율)법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무한을 만들어요. 무한을 만들어냅니다. 이 이라는 책에서 계속해서 집요하게 공격하는 것이 뭐냐? 인간세계에서 만드는 메시야, 하나님을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이 책 내용이.
자체적으로 무한을 만들어내요. 이게 창세기 11장에 바벨탑이에요. 바벨탑에 방향이 있어요. 바벨탑의 목적이 있다고요. 그 목적이 뭔지 여러분들 아시죠?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닿게 하자.(11:4) 하나님 세계에 합류하려는 거예요. 유한이 무한을 기어이 달성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 무한의 목적을 위해서 제발 우리끼리 덜 싸우고 우리끼리 힘을 합하고, 바벨탑이니까, 우리끼리 양보 좀 많이 하고 내 주장 내세우지 말고. 하나를 위해서. 뭘 위해서? 무한을 위해서. 하나님께 재가 받고 인정받는 거예요. 인정받으면 하나님께 인정받고 우리 마음대로 살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그러면 악마가 하는 이야기가 뭐에요? 네가 신과 같이 된다.(창 3:5) 동격이 돼요. 악마가 이미 아니까. 우리 조상 아담의 본성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신과 동격 되는 것을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부추겼죠. 만들어 낸 거예요. 이제 어려운 질문 들어가기 전에 이 노래도 한번 들어봐야죠.
“I want to break free” Queen의 노래에요.
I want to break free
I want to break free
I want to break free from your lies
You're so self satisfied I don't need you
I've got to break free
난 네가 필요 없어. 하나님 신이 필요한 거예요, 자유를 얻는 데에.
God knows, God knows I want to break free
I've fallen in love
I've fallen in love for the first time
And this time I know it's for real
I've fallen in love, yeah
God knows, God knows I've fallen in love
…
가사에 나와요. 이제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연애를 해봤거든요. 연애를 해서 막상 사랑에 빠져보니까 그것이 나의 자유를 완성시킨다, 방해한다? 방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은 알아.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너를 떠날 수밖에 없는 걸. 나는 나 혼자 이겨내는 걸 신이 알아. 나는 자유를 가져야 돼.
그러니까 여자보다 자유를 원하는데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그 전제조건이 뭡니까? 내 자유를 누가 재가해주고 누가 인정해준다는 겁니까? 신이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신을 도피해서 자유를 얻는 게 아니고 신을 데리고 자유를 얻는 거예요.
기독교입니다. 이게 기독교에요. 이게 교회잖아요. 전부다 자기 위주로 살면서 누구한테 재가 받았다고요? 하나님한테 재가 받았다는 거예요. 이 노래를 모란봉이 불러요. 김정은이 같이 박수쳐가면서. 인민 남성합창단 한 200명 동원해가지고 ‘갓 노우즈 갓…’ 이러면서 신 이야기를 해요.
제가 문장을 하나 쓸 테니까 이게 무슨 문장인지 여러분이 자신있게 해독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보면서 ‘그래, 복음 모르면 죽어야 돼. 가짜 교회 없애야 돼.’라고 그렇게 이해하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신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요. 마약하는 자와 마약 안 하는 자가 똑같아요. 신을 믿는 자나 신을 안 믿는 자나 똑같아요. 우리가 이 점을 생각해봐야 됩니다.
제가 문장을 하나 쓸게요. [당신은 사실 천국으로 가면서 왜 내가 당신이 천국 간다고 믿도록 합니까?] 당신은 사실 천국으로 가면서, 당신이 ‘나 천국 간다’고 내가 믿도록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이걸 이중기만이라 해요. 이 문장의 내용을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본인이 천국가면 되는데 ‘내가 천국 가는 것이 당신은 정말 믿어지지?’라고 그걸 왜 나한테 강요하느냐 이 말이에요.
아까 강의 가운데 제가 드린 질문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취지가 뭐냐 하는 거예요. 인간은 영적 싸움을 하는 게 아니고 누구하고 싸운다? 타인하고 싸운다. 남을 의식해서 하는 거예요. 남을 의식해서. 인간의 행동 하나 말 하나… 벌써 뭔가 튀어나왔다, 말한다, 행동 전부다 남을 의식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남을 의식하느냐 하면 그 사람에게 십자가의 현장이 없을 때 남을 의식해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있죠. 강도가 예수님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도 구원 못하면서 어떻게 당신이 사실 천국 간다고 나한테 이야기를 하느냐?”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강도는 예수님을 나와는 다른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평소에 사람들에게 타인이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냐 하면 나에게 나의 존재를 강화시키고 나에게 이익을 주고 나에게 잘해주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꾸준히 강도짓하며 살아온 거예요. 꾸준히. 그 대상으로서 예수님까지 포함을 시킨 거예요. ‘그럼 내가 원하는 걸 내놔 봐. 내가 당신 믿어줄게.’라는 생각이죠.
이제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시겠죠. 진짜 아는지 단어 하나 바꿔볼게요. 단어 바뀌면 이해하기가 곤란해요, 또. [당신은 사실 지옥으로 가면서 왜 내가 당신이 지옥 간다고 믿도록 합니까?] ‘천국’ 단어를 ‘지옥’으로 바꾸는 거예요. 더 어려워요. 당신 사실 본인이 지옥 가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한테 ‘내가 지옥 간다’는 그 말을 왜 하느냐 이 말이에요.
이것은 타인을 의식하는 게 아니고 복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복음이. “나 지옥 간다. 어떻게 너희 기분 좋지?” 이 말은 이 질문 자체가 상대방에게 뭘 의도합니까? “나는 지옥 가는데 너는 지금 어디로 끌려가고 있어?”라고 질문 형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질문 받고 답변해보세요. 누가 이 질문을 했다. 집사님이 답변해보세요. “나 지옥 가고 있거든. 나 사실 지옥 가고 있어. 나 지옥 간다고 너한테 말해줄게.” 할 때,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해?” “나는 지옥 가는데 넌 어디 가?”하고 은근히 물어보는데 답변 뭐라고 하면 돼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답변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전에 잘하던 답 있잖아요. 쓸데없이 그런 걸 왜 묻냐고.
왜 대인관계에서 언어가 통하느냐 하면, 대인관계를 통해서 만남을 통해서 법이 필연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규칙이 나와요. 이 곤란한 질문은 빨리 지우겠습니다. 너무 실례를 범한 것 같아요. 아까 퀸이 말하기를 I want to break free,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심정이죠. 타인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나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 모든 질문을 제가 강의 초반에 이미 해드렸습니다. [나 어떻게 하면 고장 나지요?] 이 질문은 남들한테 할 필요 없어요. 인간은 천성적으로 아담의 죄성을 받았기 때문에 나를 강화해요. 자기 의죠. 누가 나한테 어떤 욕을 해도 내가 교도소를 간다 할지라도 나는 내 안에 자기를 지키는 원리가 있습니다.
같은 또래 취업준비생을 죽인 여자의 재판 결과가 오늘 나왔거든요. 검찰은 사형인데 판사에서 무기징역을 내린 게 있어요. 정유정인지 있죠.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진정으로 피해자에게 사과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 이야기를 왜 해요? 내가 남한테 사과한다는 자체가, 아무리 너희들이 나보고 막가는 인간이라 욕할지라도 나는 전적으로 나를 부인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왜? 그 속에 너희들이 모르는 의로움이 있고 너희들이 모르는 양심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어떻게 양심과 의조차도 부정하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은 “따먹기는 왜 따먹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가 그걸 알라 했어? 먹지 마라는 것이 이미 들어온 이상은 ‘먹지 마라’와 더불어서 우리는 함께 폭망해야 되죠. 같이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내 의와 내 양심과 함께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무슨 수로 무너집니까? 이거 안 무너져요. 나쁜 짓은 부정할 수 있어도 착한 짓은 부정 못 하잖아요. 내 양심이 고운 것은, 나빠도 아주 나쁘지 않은 것은 부정 못하죠.
그런데 제가 아까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최후 마지막 순간에 모든 저주와 심판을 무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인간에 의해서 그 무한의 극단적인 전부, 주님의 생명을 죽이심으로써 모든 인간에게 빚을 지게 만든 거예요. 이걸 악마가 알죠. 그래서 영적 전쟁이에요. 영적 전쟁.
이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이중적 기만을 하죠. 차라리 지옥가고 있다, 그것을 자랑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천국 가고 있다고 자랑하니까 그걸 왜 자랑해요? 내가 천국 가고 있으니까 나 이만큼 착하니까 너도 날 알아달라는 거예요. 그걸 남한테 왜 부탁합니까? 게임이기 때문에. 이게 내가 사는 법이고 규칙이기 때문에. 사람한테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옆엔 강도죠. 구원받은 강도는 누구한테 인정받은 거예요? 사람 필요 없어요. 누구한테 인정받은 거예요? 예수님이지, 하나님 아닙니다. 그 현장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는 자리에요. 하나님의 아들 죽이는 것에 합류된 거예요. 저도 죽여 달라고. 예수님 죽는 게 하나의 찬스에요. 십자가 찾아온 게 찬스라고요. 내 마지막 남은 의와 양심마저 제거될 수 있는, 그 의와 같이 망할 수 있는 기회로 온 거죠.
그러니까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빚진 자라는 말은 내가 복음을 안 이상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이방인에게 내가 빚진 자다.(1:14) 그리고 말하기를 복음을 아는 자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1:16)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나는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누가 원하는데? I want to break free가 아니고 주님이 원한 법의 잉여, 법의 넘쳐흐름에 그 폭력에 내가 일찌감치 거기에 뛰어듦으로서 이 세상이 내 인생이 내 여생이 어떻게 돌아가도 내가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부끄러워하지 않으니까. 그럼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에게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주님에게 주도권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기독교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건 좋은데 걱정할 필요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남은 인생은 뭐냐?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다시 복습해봅시다. 강의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의미한 짓이기에 해야 한다]. 무의미한 짓이기에 아무 의미 없기에, 해야 되는 거예요. 무의미하니까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왜 구애받지 않는가를 계속해서 주께서 무한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성령이죠, 무한이 들어와서 유한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겪었던 그것을 우리에게 반복시켜버리는 겁니다. 주 안에서. 무의미한 짓이기 때문에 계속 해야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게임할 때 나한테 승리가 오지 않으면 안 해버려요.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람은 늘 승리해야 된다는 결핍 때문에 다른 희생물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나는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처럼 구질구질한 고기는 안 먹고 그 고기 먹느니 차라리 산정 높이 올라가 홀로 죽겠다. 죽어라. 조용필의 있죠? 내레이션 나오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모든 대중가요나 팝송 이런 게, 클래식은 가사 없으니까 별 의미 없고요, 이런 것들이 인간의 참을 수 없는 자기 본성을 그대로 가락에 실어서 유포했고 동감한다고 그게 유행하는 노래가 히트노래가 되어버린 거예요.
자, 그러면 ‘머리글’ 그다음 페이지 한번 봅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제 딱 아귀가 맞아 떨어지죠. 아, 이것 때문이구나.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너 죽이기 위해서 왔다 이 말이에요. 나는 죽기 위해서 왔다. 나랑 같이 죽을래?
그런데【예수님은 인간들이 창안한 그 연락 사무소를 거부】합니다. 왜? 인간 자체에서 뭘 만든다고 했습니까? 무한을 만들어내요. 왜냐하면 마귀의 정신이 뭐냐? 신이 인정한 안에서 나는 같이 신이 된다.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만한 힘을 우리는 필요로 했던 거예요. 뭐든지 하면 되는데 꼭 하나님의 재가를 얻어서 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자기 의가 되는 거예요.
상담 많이 받아봤죠? 모든 상담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냥 하면 되는데 무슨 재가를 얻기 원한다? 복음적으로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행동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무의미한 게 아니고 의미 있는 행동을 본인이 하게 됨으로써 자기가 계속 의로운 존재로 증명되기 때문에 그런 상담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적 전쟁이 계속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결국 예수님과 결별】하죠. 결별하고 이 땅에 특이한 예수가 등장하는데【돈 벌어주는 예수, 복 내려주는 예수, 뒤에서 종교 사업을 밀어주는 예수가 민중들의 스타】로 확산됩니다.
그다음 페이지에【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개나 돼지에게 함부로 던져 주어서는 안 된다… (복음을 이용하여 큰 교회를 꿈꾸는 자의 손에 복음이 넘어가 난자당하더라도) 시기하거나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야, 이거 중요해요. 그러니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그들을 시기하고 부러워한다면 이거 뭐에요?
아까 문장 다시 이야기한다면 이런 경우 있거든요. “나 지옥 간다.” 하니까 “너 사실 지옥 가는데, 그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나한테 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진짜 네가 지옥 가는 것을 믿게 만드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따지고 보면, 그게 복음적이기도 하지만 복음적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지옥 간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게 천국 가는 사람인 것을 티내면서 네가 갖고 있는 세상 것을 나는 안 부러워한다고 발악하고 있는 거예요. 안 부러워한다는 것도 부러워하는 거 아니에요? “너는 돈 있지? 우리는 주님 있다!” “그래, 주님 있다 하고 가, 그냥.” “나한테는 주님 있다니까?” “주님 있는 데로 가라니까.” “너는 돈 있지? 나는 주님 있다.” “뭐 어쩌라고? 어쩌라고?” 가짜에요, 가짜.
다음 장, ‘2007. 7. 7’ 사실은 2008년입니다. 그 위에【피는 낭만인가 아니면 여전히 신의 각혈인가?】자, 낭만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피 흘림이 낭만이냐? 낭만을 영어로 하면 로맨스(romance)죠. 낭만이라 하는 것은 추가적으로 즐기는 거죠. 추가적으로 즐기는 거예요. 말년에 은퇴하고 항구에 낚시하러가면서 립스틱 짙게 바른 다방 마담하고 히히덕거리면서 쌍화차 시켜놓고 낭만을 위해서. 그거는 아직 배 덜 고팠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고난의 길을 가느냐? 아니요. 고난 길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각혈, 토해내는 피죠. 그 앞에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빚진 자 되게 만들죠. 그 빚은 주님이 지출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어떤 인간의 지출로도 그 지출을 갚을 수 없습니다. 아홉 번 일곱 번 용서해도 안돼요. 천 번을 용서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향수를 뿌리는 게 아니라 보석을 갖다 바쳐도 눈물을 바가지로 흘려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p.18 봅시다. 밑에서 9번째 줄,【“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눅 23:28)”】그러니까 이 아줌마들은 예수님 망가지는 걸 보고 울었어요. 그런데 본인이 고장 나야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어릴 때부터 얼마나 귀하게 컸는데. ‘내가 망가지면 안 돼. 절대로 귀하게 커야 돼.’라고 누가 언질을 줬어요? 아빠, 엄마가 포근하고 안락한 가정이 계속해서 우리한테 그런 식으로 각인시켜 놓은 거예요. 나는 사랑받기 좋은 사람이고 나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계속 각인 받았어요.
그런데 사회 나가니까 아빠, 엄마와 같은 그런 것이 수급 안 되잖아요. 그럴 때는 사랑에 대한 결핍, 어릴 때 누렸던 그 사랑에 대한 애정결핍을 느끼면서 그걸 뭐로 보상하느냐? 이제는 돈으로 그 사랑을 매수하려고 하겠죠. 나 가진 거 돈밖에 없어, 이런 거죠.
교장이 되었으면 옛날 교장이 썼던 의자 그대로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뭐에요, 이게? 뒤로 젖히면 넘어가는 거. 이게 이백 만원 넘는답니다. 교장 바뀌면 전에 이백 만원짜리라도 버려버리고 새로 산대요. 왜 그런 짓합니까? 추가적인 사랑을 교직원으로부터 더 얻어내기 위해서.
사랑을 왜 얻어내야 돼요? 아까 그 도표 봤죠? 자기가 그 집단의 모든 힘의 신처럼 군림해야 하나의 질서가 잡히니까요. 신이 여러 명 되면 안 되니까요. 내가 겸손하다고 해서 말썽꾸러기가 안 생기는 게 아니고 내 대신 다른 쪽에 말썽꾸러기 생기죠. 교장이 기죽어 있으면 행정실장이 신처럼 설치게 되고 고참 교사가 설치게 되고 뻔하거든요. 누구 하나는 잡아야 된다 이 말이죠. 안 그러면 이사가 잡든지 잡아야 되거든요.
이거는 직업가진 사람들에겐 다 해당됩니다. 학교 가서 조리사 상대할 때도 군기 안 잡으면 밥이 되겠어요? 8시 출근인데 언니 봐주소, 해서 9시 다 되가지고 오면 일이 되겠어요? 욕은 내가 다 얻어먹는데. 조직사회는 어쩔 수가 없어요. 내가 욕 안 얻어먹기 위해서는 밟아야 되는 거예요. 북한이 그런 거예요, 북한이.
그럼 우린 말하죠. “바르게 살고 싶어도 왜 바르게 못 삽니까? 주님, 제가 여기 있는데….”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거기 있는 게 아니고, 지옥이 거기 있다. 너는 지옥을 구성하는 지옥의 구성원이고.” 지옥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p.20, 진도 빨리 나가요. 쭉 나갑니다.【가공되어 기분 좋게 다듬어진 복음】요한복음 5장 27절 되어 있는데 한번 보세요.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지금 예수님이 여기서 십자가를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심판주 이야기합니까, 예수님 자신이? 심판주 이야기하죠.
이건 아까 이야기한 뭘 유도한 거예요? 유한한 인간들이, 심판주라고 내가 분명히 언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퇴출시키죠. 퇴출시키면 어떤 효과가 되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이 땅에 없는 효과가 돼요. 아예 구원자가 없어요.
결국 오늘 강의를 끝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구원은 효과]입니다. 주님이 홀로 주의 이름으로 홀로 일하신 그 모든, 완벽하게 오케이 사인이 끝난 그 효과가 힘을 초월한 잉여의 힘으로 우리에게 흘러넘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다? 십자가에 있음을 알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과 십자가와 우리 자신과 주님의 일하심을 한꺼번에 알게 하옵소서. 무지가 공포를 낳으니 이제는 복음을 앎으로써 구애받지 말고 수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마음껏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