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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31124a 누가복음23장 28절(고장난 인생)-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광주강의20231124a 누가복음23장 28절(고장난 인생)-이 근호 목사

이 책 최대로 어렵게 읽기. 이걸 왜 어렵게 읽어야 되느냐 하면 영적 싸움이거든요. 육적 싸움이 아니라 영적 싸움이에요, 복음의 싸움은. 영적 싸움의 대상 가운데 교회가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복음을 방해하는데, 교회가 복음에 대해서 방해해요.

이것이 어려운 것은 복음에 대해서 교회가 방해하고요. 여기서 멈추지 않아요. 어디까지 나가느냐 하면 내가 복음을 방해해요. 내가 방해하죠. [교회가 (복음을) 방해하고 내가 방해한다.] 그렇게 되면 영적투쟁에서 이 내가 복음 편에 과연 끼어들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내가 하나님과 한 편이 되어서 세상에 있는 교회와 세상에 대해서 싸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

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나도 알지, 기독교가 허상인 거. 나는 복음 편에 서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허상인 게 잘 보여. 엉터리 교회 아주 실컷 두들겨주자.’ 뭐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그렇게 이 책을 쭉 읽어보게 되면, 실은 이 책이 우리 자신보고 하는 이야기인데 내가 싫어하는 적을 설정해놓고 그 적에 대한 공격용의 내용으로 왜곡될 수가 있습니다.

나까지 포함해서 복음의 적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 되죠. 그렇게 되려면 이렇게 되어야 돼요. [복음이 나와의 만남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 살아야 고장 날까? 내가 어떤 식으로 살면 내가 고장이 나겠느냐?]

새로운 차를 구입했을 때, ‘어떻게 하면 저 차를 잘 유지해서 오래 타도 고장 안 나겠나?’가 아니라 ‘이 차를 언제 일찌감치 고장 낼 수 있는가? 그 방법이 뭔가?’를 연구하면서 차를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은 의식이에요.

그런 사람 있습니까? ‘나 이 땅에 태어났다. 한 평생 산다. 나 어떤 식으로 하면 살아가는 내가 망가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못하죠. 그런 생각을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복음은 전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다. 나는 지옥에서 한 철 보낸다.] 이게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에요. 지옥에서. 그래야 영적 싸움이 돼요. 주님께서 세상과 영적 싸움을 할 때, 그 세상 속에 우리 자신도 포함이 되어 있단 말이죠. 우리 자신도. 그런 것을 좀 감안해주고 우리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이걸 감안 안 해버리면, 하나님 믿으면 믿을수록 자기 고생한 탓을 하나님께 돌릴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방치하는 것 같아. 그렇게 내 생각과 주님 생각 사이에 틈이 생겨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성 좋은 내가 참지.’ 하고 그걸 참아버려요. 참아버리니까 이 생각은 마귀의 생각과 동일하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아먹은 게 아니고 아주 참고 참았다가 나중에 마지막 순간에 결국 예수님께 복수하잖아요. 파는 것으로 복수하잖아요. 돈도 얼마 되지 않는 은 삼십 냥 가지고 복수해버린다고요.

한번 정리해봅시다. 복음은 이 세상이 지옥이다. 여기 악마가 있으니까 영적 싸움을 하는데 나는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 내가 아닌 타인과 싸우는 거예요. 내가 아닌 타인과 싸우게 되면 이 싸움의 목적은 뻔해요. 내가 건재하는 거예요. 내가 멀쩡한 거. 내가 고장 안 나는 거. 하나님 믿고 난 뒤에 복음 알고 난 뒤에 내가 더 우수한 존재가 되는 거. 이 싸움을 인간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의도와 복음이 만났을 때, 이미 나는 나를 지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대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인생이 펼쳐지지 않으면 예수님이나 하나님마저 탓을 돌릴 수 있는 원망의 대상이 되죠.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뭘 했습니까? 하나님께 원망을 했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본색 또는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그곳이 광야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우리 모든 인생을 나그네 인생이라 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예로 들어 “이 세상은 나그네 인생입니다. 이 땅에는 우리의 본향이 없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들은 이 땅에서 본향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본향을 찾는 우리는 뭐가 돼요? 이 땅에서 본향을 찾지 않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이 땅에서 안정적인 내 자리를 확보하겠다 하는 것은 결국 이 사이에 대립이 생기죠. 그러면 영적 싸움은 날아가버리고 오히려 내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 인생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요모조모 따지면서. 제가 하나님한테 이거해주고 이거했는데 하나님이 주신 건 뭡니까?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리고 복음은 인간들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죠. 그럼 인간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복음은 인간들이 나를 멀쩡하게 만들기 위해 타인과 싸운다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화시키고 복음은 영적 싸움을 하는 거예요. 영적 싸움을. 그렇게 되려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면 이렇게 해요. [의도적으로 불화를 일으킨다.]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불화를 일으킵니다. 의도적으로.

이 을 교재로 해서 강의할 때, 여러분 생각에는 하나 읽고 설명한다고 생각이 들겠지만 저는 강의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단어를 뽑아내요. 예를 들면 ‘머리글’ 봅시다. 초반에는 페이지 수가 나타나지 않고 18페이지부터 나와 있는데 ‘머리글’ 다음 쪽, 마태복음 10장 34-39절 찾았습니까? 그 대목에서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다음 줄에 나온 것은 ‘연락 사무소’라는 단어 나왔죠. 그다음 밑에서 5번째 줄, ‘결별’ 나오죠. 그다음 밑에서 3번째 줄에 ‘민중들의 스타’.

그다음 쪽 봅시다. 페이지수가 초반에 안 나와서, 그다음 쪽 중간에 보면 ‘개나 돼지’ 나오죠. 그다음 쪽, ‘억울한 소리’ 단어 나오죠. 그다음에 ‘하소연’ 나오죠. 단어가. 그다음 ‘예수님의 눈물’ 바로 앞에 쪽, 거기 보면 ‘업소’라는 단어 나오죠. ‘낭만’ 나오죠. 마지막에 ‘신의 각혈’ 나오죠. 2007년 아니고 2008년 7월 7일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의 눈물’ 나오죠. ‘예수님의 눈물’ 봅시다. 책 읽기 쉬워요. 중간에 ‘허덕거림’ 단어 나오죠. ‘우량품’ 나오죠. ‘고액으로 사 간다’, 제일 밑에 ‘성화’. 이제 다음 쪽부터 페이지수가 나오는데 p.18 보면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눅23:28)’ ‘예수님은 그들의 종말이 애처롭다’ 이렇게 단어를 찾아보는 거예요. 단어를.

왜냐하면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게 불안한 것은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그래요. 적절한 단어. 적절한 단어만 찾으면 인간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호한 단어 말고 적절한 단어. 적절한 단어가 세상을 밝혀줘요. 여러분, 심리적으로 많이 흔들리는 사람 있죠? 그 사람은 자기에게 딱 맞는 적절한 단어를 못 찾아서 그렇게 흔들리는 거예요.

찾질 못하니까 이 단어 가져오고 저 단어 가져오고 계속해서 끌어 모을 때까지 끌어 모으는데 그중에 어느 것이 나하고 맞는지 맞춤이 안돼요. 홈쇼핑에서 옷을 하나 샀는데 이 옷이 아닌 것 같아서 바꿨지만 또 그것도 안 맞고. 액젓 하나 사는데 새우젓 액젓 했는데 다른 게 오고, 이거 묽은 거 말고 약간 덩어리 있는 거, 이런 거 있잖아요. 인간의 평생은 맞추기 한다고 세월 다 보내요. 내게 딱 맞는 거.

적절한 단어를 맞추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세상에 떠도는 단어를 내가 임의로 선택했다는 그게 화근이에요. 이게 문제점이 돼요. 왜냐하면 그 단어 고를 때 의도가 고장 안 나려고 뽑기 때문에 뽑는 것 자체가 벌써 본인이 실수한 거예요.

이 두 단어 중에서 여러분들이 어느 단어를 뽑을지 생각해보세요. ‘성공’ 이 단어를 뽑기 원합니까, ‘실패’ 이 단어를 뽑기 원합니까? 성공을 원하지, 실패를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이 지옥 구천을 헤매듯이 계속 평생 지옥을 헤매는 거예요. 무슨 싸움한다고? 남들 붙잡고 나를 지키는 싸움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동네가 지옥이에요. 그렇게 지옥에서 한 철 보내다 나중에 죽게 되고. 끝까지 사람들은 죽으면서도 ‘내가 왜 죽지? 왜 살았지? 나는 누구지?’ 이런 것을 한꺼번에 물을 수 있는 그런 단어를 찾아내질 못해요.

그러면 아까 그 모든 단어, 이것을 하나로 집결한 단어를 제가 강의하면서 벌써 제시해드렸어요. 그 단어가 뭐였습니까? ‘복음’이죠. 영적 싸움을 할 때 ‘마귀하고 예수님하고 싸운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해도 되는데, 그렇지 않고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바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무엇을 전파한다고 했습니까? 기쁜 소식, 복음을 전파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 기쁜 소식, 마가 기쁜 소식, 누가 기쁜 소식, 요한 기쁜 소식이죠.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어떤 소식이 들어가요? 기쁜 소식이라고 보면 결국 어디로 이게 모아지는데, 모아진다는 단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수렴(收斂)’이라 해요. 한쪽으로 모아지는 거예요. [일관성 있게 모아지는 국지적 지점]. 이 땅에 특정 지점. 다른 말로 하면 [극소화된 국지적 일관성].

같은 말인데요. ‘극소화된 국지적 일관성, 진짜 극소화된, 극히 작게, 최고로 작게’ 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 말도 적당치 않아요, 복음에 대해서는. 작은 정도가 아니라 없어지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없다는 0보다 더한 무엇이에요. 마이너스(-)로 가요, 마이너스(-)로. 그런 지점이 있다고요.

이 세상이 평면이라 하면 사람들은 이 세상 평면 안에서 헤맨다고요. A지점, B지점, C지점에서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사는지 돌아다니는데, 이 평면에 구멍이 나 있으면 사람들은 안 가요, 빠져버리니까. 여기 빠져죽으니까요. 그럼 이건 실패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선택 대상치 후보감에 아예 들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떤 인간도 가기 싫어하는, 죽는 것이 늙어 죽는 게 아니고 우연히 차 사고로 죽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죽으신 이 지점, 0보다 더 낮은 마이너스(-) 지점에 극소화된 국지적 특정 지점을 주께서 주신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 이 말이에요. 복음.

그럼 우리가 설명해야 될 것은 뭐냐? 일관성이거든요. 일관성 있는 거거든요. 복음이 일관성 있는 극소화된 국지적 특수한 지점이잖아요. 그럼 일관성을 제가 한번 표현해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있음을 견지하기 때문에 유지하기 때문에 마이너스(-)보다 플러스(+)를 좋아해요. 더하기를 좋아한다고요. 집에 자꾸 사 모으고 그러는 게, 돈이 생기는 걸 좋아하지, 날라가는 건 좋아하지 않잖아요.

그러면 우리 스스로 물어보는 거예요. 플러스(+)냐, 아니면 마이너스(-)냐? 어느 쪽이냐? 우리는 플러스(+)쪽이에요. x+x+x+…+x=0(죽음) 인간이 플러스한 마지막은 죽음이에요. 죽습니다. 다 잃어버려요. 그러니까 이건 0에요. 0은 죽음. 더한 x의 개수가 n개라면 nx=0에요. 그럼 (x+(-x))=0를 위 식에 대입해보면 n(x+(-x))=0가 돼요.

매 순간마다 죽음이 관여하지 않은 순간이 없는 거예요. 왜? 플러스(+)로 인생 다 살아봤자 그러고 난 뒤에 죽으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살아있다(x+)는 옆에 0이 붙어있는 거예요. x+0. x를 펼쳐보면 x+0=x이에요. 죽음과 함께 살아있는 겁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x가 되기 위해서 (x-x)를 배제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배제하는 것이 뭐냐? 마이너스를 배제하고 플러스를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이 도입하는 것이 법이에요. 법을 도입해요.

법이 있어야, 나는 법 지켰으니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보장되고, 나한테 해코지하는 것은 그냥 밀어내려면 미안하니까 법을 만들어서 밀어내는 거예요. ‘그건 내 취향이 아니에요.’ 이거 뭐에요? 나는 그 취향이 아니라고 밀어내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인간세계에 이미 법이 있는 거죠. 법은 플러스가 플러스되기 위해서 법을 도입한 거예요. 그래서 수요일에 한 것처럼 고아와 과부, 나그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은 법의 혜택 범주 바깥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걸 희생물이라 합니다. 하나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잘라낼 필요가 있어요. 안 그러면 있는 것들이 플러스가 안돼요. 법이 잘라내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힘을 얻고, 법인데 힘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법, 이것이 배제를 낳는 거예요. 배제.

그러니까 여러분들 보세요. 모든 인간은 죽잖아요. x-x=0로 가잖아요. 가는데 자기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0이 안 되는 것처럼 이 법을 도입했다고요. 그럼 0쪽에서 어떤 분이 오셨다면, 인간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법에 대해서 포용의 대상이 될까요, 배제의 대상이 될까요? 배제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율법에 보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신약에서는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어요. 몸과 정성,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이것은 예수님이 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해요. 아버지의 마음을 유일하게 아는 분이 아들이에요. 아들이 아니면 한 집안 사람이 아니면 한 식구가 아니면 아버지의 뜻이 뭔지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오게 되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기존에 있는 율법을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법으로 일방적으로 바꿔치기했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율법 때문에 죽었으니까. 자기가 존재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 율법을 사용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누구를 만납니까? 예수님을 만나거든요. 진짜 율법을 아는 분과 율법의 뜻도 모르고 자기 힘 키우기 위한 집단과의 마주침에서 예수님은 배제 당했죠. 배제 당했으니까 결과적으로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차분하게 하자 없이 확연하게 그 진리가 드러나 버린 거예요.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자, 법이 힘을 사용할 때는 법은 나를 지키고 그다음에 나를 지키는 데에 방해되는 것은 배제하죠. 그럼 법은 배제 당하는 쪽을 파괴시킵니다. 파괴시키는 것에는 목숨을 빼앗는 것도 포함되고요.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x+x+x+…+x=0가 되죠. 0이라 했죠. 결국 인간은 아무리 싸워도 모든 인간은 0가 돼요. x+x+x+…+x 이 전체가 0가 된다는 말은 유한(有限, finite)하다, 한계가 있다는 뜻이에요. 한계가 있는데 여기에 대들었던 오신 분은 한계가 없어요. 그럼 뭐가 됩니까? 무한(無限, infinite)이 되는 거예요.

무한으로 오신 예수님이 유한의 세계와 마주치면서 인간은 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를 스스로 증명해버린 셈이 돼요. 스스로. 유한에 갇힌 거예요. 인간은 스스로 죽음에 갇힐 만해서 갇힌 셈이 되어버렸다고요. 그 이유가 뭐냐?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누구를 배제했습니까? 무한을 배제한 거예요. 무한을 밀어붙인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킬 때는 본인들이 어느 나라 가기위해서 율법을 지킨 거예요? 천국 가기위해서. 천국 가기위해서 율법을 지켰잖아요. 천국 가기위해 율법 지킨 그것이 결국 예수님을 배제하게 만든 거예요. 폭력을 행사하고 예수님을 파괴시킨 거예요. 무한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공격했고 파괴했다는 말은 스스로 나는 죽어 마땅함을 증명해낸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인간의 유한세계 평면에서 A에서 B에서 C에서 아무리 열심히 율법을 연구해도 그들은 오류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오류의 반복. 계속 실수에 실수를 연속한 것뿐이에요. 이 지평 안에서. 평지 안에서.

그러니까 이 세상은 누구와 싸우느냐 하면 예수님을 배제하는 건 물론이고 자기들끼리도 싸우는 거예요. 자기들끼리도 싸우는데 그게 마귀세계를 주님께서는 그렇게 만든 거예요. 여기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25절,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오신 이유가 이 세상을 불화케 하기 위함이에요. 마태복음 10장 34절에도 나오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화평이 아니고 화평의 반대, 검을 주러 왔다. 검을 주러 온 거예요.

유한한 세계가 자기의 무한을 위해서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천국 가기 위해서 인간은 법을 도입해서 자기를 마이너스가 아니라 계속 플러스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함으로써 인간들은 나를 지키는 힘을 이 율법 지킴을 통해서 자기가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러면 남들도 그렇게 하겠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복음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타인과 싸우는 거예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타인과 싸우는 거예요.

그렇다면 법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가? 평소에 우리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런 법칙 속에 우리가 이미 놓여버렸어요. 이미 우리가 고장 난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게임 속에 들어가요. 게임 속에 들어가서 규칙을 만나고, 규칙은 아까 법이라 했죠, 규칙을 만나서 법으로 규칙을 만들면 이건 구조가 되고 이 구조에서 승자가 되면 보상을 얻는 거예요.

게임 → 규칙(법) → 구조 → 승자 → 보상

x₁+x₂+x₃+…계속해서 인간은 살아가는데 살아가면서 x₁으로 자족하고 만족하는 사람 없어요. 여기서 결핍을 느끼는 거예요. 결핍 또는 결여. 처음에 20대 후반에 공무원 시험 쳐서 합격하잖아요. 개그맨 선전한 것처럼 에듀윌 해서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하면 그걸로 몇 개월 만족합니까? 이건 뭐 전세사기 만나서 떼돈 안 벌면 만족이 없죠. 의사시험 합격, 의사시험 합격하면 만족합니까? 의대 정원? 미쳤어? 나도 지금 병원 가게세도 못 내고 있는데… 이미 수요 공급이 확정된 데서 갈라먹기, 뺏어먹기를 어떻게 힘들어서 하겠나, 이렇게 나오죠. 그럼 다른 수를 찾는다고요. 의사 돼서 미국 가든지 캐나다 가든지. 결핍을 느끼겠죠.

이 자체가 뭡니까? 타인과의 싸움. 이걸 뭐라고 합니까? 이게 게임이에요, 게임. 이게 게임이고 게임에서는 막 싸우면 안 되니까 규칙을 만들게 되면 규칙에 대해서 또 더 영특하고 똑똑한 사람들만 규칙에서 살아남겠죠. 여기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 내가 게임이고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와의 게임이고. 그 게임은 힘을 끌어 모으는데 그 힘은 승자가 될 때 내가 미흡한 것을 채울 수 있는 보상책으로서 주어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다툼과 다툼의 연속인 겁니다. 그런데 그게 뭐를 빌미로 한다고요? 이게 법으로 나와요.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서기관들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큰 소리 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죠? 나라 자체가 게임판인 데에서 누가 십일조를 얻고 누가 어른 대우 받을만하냐 이 말이죠. 무식한 세리 창기냐, 아니면 자기들이냐 이 말입니다. 너희들은 나한테 배워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이 게임 판에서 무지(無知)라는 것은 곧 공포를 야기하죠. 공포는 내가 계속 플러스 존재가 되기 위해서 채워져야 될 그런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데에서 오는 공포에요.

너 고2인데 요새 영어 좀 공부하나? 싫어. 수학은? 빵점. 그럼 너 어떻게 살래? 보세요. 앞으로 걔가 맞닥뜨릴 사회가 무슨 사회? 게임 사회. 게임 사회에서는 뭐를 모르면 탈락? 규칙 모르면 탈락. 규칙은 뭡니까? 너 수능 몇 등급이야? 딱 나오잖아요, 딱. 딱 나오죠. 나 춤출래. 춤 그 동네는 어디 뭐 게임이 없는 줄 알아요? 그 동네는 규칙이 없는 줄 압니까? 리아 킴부터 해가지고 벌써 스트리트 댄서들 쫙 수천 명이 그 위에 있는데. 트로트 가수 백댄서나 해야지.

도대체 이 세상에서 이 유한한 세계에서 나를 그냥 살려줄 어떤 위인도 존재하지 않아요. 엄마가 도와주겠지. 엄마는 게임 안합니까? 시집갔으면 네가 알아서 살지, 몇 푼도 안 되는 돈을 왜 네가 뜯어먹어? 네 새끼 네가 낳으면 네가 책임져라. 왜 여기 와서 기거하고 하느냐? 너 때문에 나 마이너스 된다.

가정에서는 아직까지 이걸 못 느껴요. 그러나 가정을 벗어나서 사회가 되어버리면 인간은 게임에 들어옵니다. 이걸 인간의 사회화라 해요. 인간은 사회의 일원이 돼요. 그렇다면 무작정 나는 공주고 무작정 나는 왕자라서 엄마 아빠가 다 해줘, 할 때 그 애의 정서는 아직까지 정리가 안됐어요. 정리 안 되다가 걔가 사회에 나가면 자기 내부가 구조화돼요.

구조는 사회의 법과 규칙이 삽입되어서 이게 응결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즐기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 사회 규칙이 응결, 딱딱하게 굳히는 거예요. 두부 만들 때 있죠. 또 묵 같은 거. 이게 굳어져버려요. 굳어지면서 융통성을 발휘할 기회가 점점 더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희망은 뭐냐? 내가 나중에 은퇴해서 촌에 가서 혼자 잘 살래. 그걸 젊을 때부터 생각한다고요. 지금 혼자 잘 살고 계십니까? 하고 싶은 대로? 완전 묵이 해체돼버렸어요. 플러스로 잘 살고 계시죠, 플러스로.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지. 이건 보상 아니에요? 인간의 자기 결핍에서 오는 보상.

이게 무의식 쪽에서는 구조가 되는데 문제는 인간들이 게임을 하고 규칙을 만들고 구조를 만들고 그래서 더 똑똑하고 더 힘세고 더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자가 결국 승리한다, 사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다, 라고 지내면 세상은 그렇고 그런데 여기에 누가 들어왔어요? 무한한 분이 들어왔잖아요, 무한한 분. 무한한 분이 들어왔죠. 어디에 들어왔어요? 유한한 인간세계에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그 무한한 분이 어떻게 됐어요? 퇴출당했죠. 배제 당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은 위기에 봉착한 거예요. 이게 이에요. 무한한 분의 복수에요. 유한에 대한 복수.

인간들이 뺑뺑이 돌잖아요, 뺑뺑이. 오늘 제일 중요한 대목에 지금 이르렀어요. 나 이거 할까, 직업 저거 할까. 직업을 골라도 이미 있는 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직업을 고른다 이 말이죠. 이렇게 유한 안에서 뺑뺑이 도니까 여기서는 방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방향성이 없어요. 이 안에 갇혀서 뺑뺑이 도는데 무슨 방향성이 있어요. 이걸 아까 반복이라 했죠. 이 세상은 반복만 해요.

뭐가 없느냐 하면 ‘분기점’이 없어요. 분기점이 없는 거예요. 끊어냄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방향성을 어떻게 제시하느냐 하면… 방향성이죠, 수학에서는 벡터(vector)라 하는데 하나의 질점이 방향을 보여줄 때 이걸 벡터로 계산해요. 어떤 특수한 방향이에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극소화된 국지적 일관성 있는 지점은 하나에 수렴한다 했죠. 수렴이 방향성이에요, 방향성.

주님께서 수렴되는 점으로 빠져나오면서 주님의 의도대로 그들이 한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한 거예요. 그 방향이 지옥의 심판 쪽으로 가도록 유도한 거예요. 어떻게 유도하는가? 그들로 하여금 한 놈만 죽이도록.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과 일들이 한 사람만 한 놈만 죽인다는 의식으로, 그들이 분열되어 있었다가… 사탄의 세계는 분쟁하면 안 되거든요. 예수님 앞에서는 사탄의 세계가 분쟁하는 세계가 아니고 똘똘 뭉친 세계로 주께서 의도해서 단결케 한 거예요.

어떤 사상과 어떤 타인이 있더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전부다 똑같은 플러스(+)가 되게 한 거예요. 똑같이. 그래서 예수님을 사형시켜 보내버렸죠. 주님이 의도한 겁니다. 그럼 주님의 이러한 의도, 그렇게 해서 주께서 얻고자 한 게 뭐냐? 사건을 이렇게 일으켜서 주께서 얻고자 한 것.

국회의사당에서 서로 서로 내가 잘한다고 내가 옳다 하다가 한 사람이 와서 엉뚱한 소리하게 되면 야당 여당 없이 다 공격하는 거 있잖아요. 이미 북한이 그 일을 지금 꾸준히 해오고 있어요. 북한의 어떤 임산부가 김일성 초상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고 손가락질 했다면서 그 임산부를 공개 처형했거든요. 애 있는 여자를, 초상화 설명한다고 손가락질 했다고 죽여버렸단 말이죠. 시범조로 한 놈만 죽이는 거예요. 한 놈만.

그 여자는 그걸 의도한 게 아니지만 주님은 아예 의도했어요. 너희는 땅에서 났고 나는 하늘에서 났다. 오죽 의도했으면 제자들도 도망치고…. 그러니까 제자들이나 가룟 유다부터 해서 주님의 말과 섞일 여지를 주님 쪽에서 허락을 안 한 겁니다. 모든 인간은 x옆에 -x가 있기 때문에. 0(zero)가 있기 때문에. 그게 최종성이기 때문에.

주께서 어떤 방향성을 정함으로써 주께서 의도한 게 뭐냐? 그것은 바로 ‘힘의 잉여(넘침)’입니다. 힘은 넘치는 거예요. 넘치는 표시를 어떤 사람은 ⋌ 이렇게 표시했는데 이상한 기호지만 부등호(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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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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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