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31116b 요한일서 2장 15절(정욕의 세상)-이 근호 목사
서울강의20231116b 요한일서 2장 15절(정욕의 세상)-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작하면서는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서 출생을 한다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이 어떻게 같은 세계를 이룰 수 있는가? 그 방식이 뭐냐? 방법이 뭐냐?’ 그것을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예수님 안에서 출생하면 참 좋죠.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에요. 아까 성령께서 오셔서 한다는데 성령께서 어떤 원리를 가지고 우리를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삼을 수 있느냐? 성령께 어떤 원리가 있기에 그것이 성립이 되느냐? ‘넌 하나님의 백성이야’라는 성립 근거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냥 성령 받으면 구원받는다, 지금 이렇게 억지 부릴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에 대한 힌트가 요한일서 2장 16절에 나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되어 있죠.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의 내부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먼저 선점해있는 거예요. 선점. 먼저 점령해 있어요, 우리 마음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세웠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고 우리는 그걸 귀히 여기지 아니했다 했거든요. 예수님의 그 모습과 태도를 보면서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그만한 가치는 없다는 데에 그들은 의견을 통일했습니다. 그게 그들 자신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그들 속에 어떤 다른 수상한 마음이 있어서 그래요? 어떻게 마음이 하나같이 예수님 앞에서는 통일되어버렸어요. 하나같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서로 원수지간이었는데 예수님 죽이는 데에서는 어떤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도대체 인간 속에 뭐가 들어있어서 그러느냐 이 말이죠.
여기 표현에 의하면 모든 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에요, everything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되어있어요. 이점을 한번 보자는 거예요. 그걸 논리로 따지면 이 저녁에 피곤한데 또 잠이 오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이 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베드로전서 3장 6절에 나온 말씀인데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칭했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칭하고 칭하기만 한 게 아니고 복종했다고 되어 있어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 이 말이죠.
자, 이걸 한번 따져봅시다. 아까 바닥 이야기했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럼 창세기 2장에 봅시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들고 여자를 만들었잖아요. 여기서 질문, 왜 여자는 그때 남자로부터 독립하지 않았는가? 왜 남자는 여자로부터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했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이야기했어요.
두 사람이잖아요. 두 사람인데 어떻게 한 몸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신비’라고 이야기해요.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에베소서 5장에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신부로서 교회를 보면서 부부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니고 한 몸이다. 내가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교회라고 이야기한다 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이 말이죠. 내 몸 따로 있고 네 몸 따로 있어서 두 사람 몸인데 생각도 다르고 살아온 과거도 다르고 다 다른데 어떻게 그걸 한 몸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두 사람이 한 몸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 서열이 매겨지면서 한 몸 돼요. 한쪽은 주(主)가 되고 한쪽은 복종하는 관계가 되면서 한 몸 관계가 형성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복종하는 자가 없으면 주가 없다는 이야기가 되고 주가 없으면 복종할 대상도 없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누구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주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있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몸만 내 몸이 아니고 다른 몸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바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이걸 방해하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너에게 독보적인 존재가 되라고 방해하죠. ‘너의 최종적인 가치와 의미는 너 자신뿐이야. 아무도 너를 대신할 수가 없어. 네가 최고야.’라고 매일같이 우리 마음이 우리에게 하소연하고 격려하고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TV에 솔로라고 연애하는 프로그램인데 16기 상철이하고 영숙이하고 17기, 18기도 쭉 나오는데 그 젊은이들이, 나이 젊다 해도 30대 다 넘었죠, 40 가까이 된 사람도 있고, 그 젊은이들이 자기가 연애하고 싶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찾을 때에 그 행동과 태도를 한번 보세요. 보게 되면 주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찾지를 않아요. 내가 복종할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어림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독보적인 내 몸을 이미 확정지어놓고, 내 몸을 내 몸이라고 존중해줄 수 있는 그런 배우자를 찾아요. 내가 나를 존중하잖아요. 이 존중만큼 같이 합세해서 나를 존중할 사람을 찾아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속으로 그랬어요. 너희들 백날 해봐야 결혼 못한다. 연예인 되려면 나와. 따로 유튜버 되려면 나오고. 결혼은 못한다.
왜 인간은 자기가 주의 자리를 포기 못할까요? 이렇게 자기를 독보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솔로 보면 내가 상철이하고 결정할까, 아니면 종수하고 할까. 자기가 선택을 하는 거예요. 본인이, 내가 부처를 믿을까, 예수를 믿을까 이러고 있단 말이죠. 안 그러면 무종교로 나갈까. 종교 없이 자유롭게.
다시 말해서 ‘어느 쪽이 내가 독보적인 존재임을 강화시켜주고 그걸 확실하게 굳혀줄까?’ 이걸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근호 목사라는 사람이 설교하는데 뭐 복음으로는 막 살아도 되고 자유를 줬다 하더라. 그거 괜찮네. 그거. 이근호 목사 설교 그거 괜찮네. 내가 신이니까 이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까지 제공해주니 말씀의 근거까지 제공해주니 이거 뭐 신바람 났죠.
내가 누구한테 복종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1도 없는 거예요. 그래놓고도 신자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무슨 그런 소리를 합니까? 사라는 주님께 주라 한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에게 주라 했어요. 아브라함에게.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당신과 나를 한 몸으로 형성시켜주는 이 신비를 제공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나의 주됨을 포기시킨 주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내가 최종 의미가 아니고 내가 최종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나를 그렇게 만드신 분, 그것은 아브라함 당신 안에 있는 우리 주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 주님의 약속이 당신 안에 있어서 나는 기꺼이 당신을 주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하는 일인 언약적 일에 대해서 나는 기꺼이 복종할 마음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단독으로 한 몸이 아니올시다] 이 말이에요. 내가 주라고 복종할 수 있는 분을 만나야 비로소 나는 그분과 한 몸이 된다는 겁니다. 한 몸이. 이렇게 되면 이제 구약/신약, 신약/구약 쪽에서 할 이야기가 굉장히 풍성해지고 많아지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의 모든 오류와 실패가 결국은 무엇에 실패한 거예요? 주님 앞에서 본인, 자기 자신의 단독으로 내 몸 하나로 내가 최종적이라는 것이 파괴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해버린 겁니다. 나를 위해서 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자기를 망친 거예요.
내 목숨을 기꺼이 바칠 분을 찾는 것, 그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소중하지 않습니다. ‘나도 소중하지 않고, 내가 너라고 부르는 너도 소중하지 않고, 너와 나의 그동안 우정과 관계도 소중하지 않고, 이 세상 전부가 이건 소중하지 않습니다.’ 라는 고백은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면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주와 한 몸이 되었기에 세상을 평가할 수 있어요. 세상은 뭐냐?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고 보는 거예요. 꽉 채워져 있다고. 이생의 자랑이니까 단독자로서의 내 자랑이에요.
내가 비록 죄를 지어서 교도소에 있지만 난 그래도 완전하게 나쁜 자는 아니다, 이런 거.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10년 복역하고 있지만 내 친구들한테 물어봐라. 내가 얼마나 인심이 좋고 인간성 괜찮은지. 어려운 사람 막 제일 먼저 달려가서 도와주는 사람이지. 다 물어봐. 나 그런 존재야. 비록 내가 전과자가 되었지만 그렇게 막 되어먹은 존재는 아니야, 라고 하면서 그런 인간들끼리 조폭을 이루는 거예요. 그 조직폭력배 안에 전부다 나름대로의… 내가 양아치 생활하지만 이 돈 모아서 나 혼자 사치스럽게 쓰지 않고 나보다 더 못난 조카 학비 대준다고 열심히 마약 팔았다, 이런 거. 자기 조카, 자기 아는 사람 어려운데 도와준다고 내가 마약을 좀 팔았다, 왜? 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단 이야기야? 그래, 이선균한테 좀 팔았다, 왜? 이런 거.
전부다 변명이에요, 변명. 그런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그래서 당신이 누구한테 복종하는데? 자기 잘남에 자기가 복종하는 거예요. 자기 잘남에. 나는 끝까지 여전히 내 안에는 아무리 망가져도 끝까지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요소는 내 안에 남아있다. 나는 거기에 복종할거야. 나는 내 자신에게 복종할거야.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남편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이에요? 남보다 빨리 서둘러 퇴근해서 집에 후딱 남편이 와가지고 “오늘 당신 왜 일찍 왔나?” “당신한테 복종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왔어요. 뭘 시키실래요?” 그런 남편 봤어요? 남편이 아내한테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낙으로 사노?” “무슨 낙으로 살긴. 당신을 주님이라 부르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그 재미로 살지.” 이런 거. 그런 아내, 솔로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 없어요. 아이고, 그때 상철이 만나는 건데 종수 만나가지고 이게 뭐야, 이게 내 인생이, 이런 식으로.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세상의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은 이미 모든 악마로부터, 악마라는 것은 주님의 복음을 방해하는 자죠, 대적하는 자죠, 대적하는 자가 뭐를 장악했다? 서울, 대전, 부산? 그것은 물론이고 우리의 마음부터 이미 장악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의 출생은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서 출생해서 무덤으로 가는 겁니다. 부활이고 뭐고 없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다가 자기 잘난 맛에 죽는 거예요.
제가 어제 수요일에 설교를 했습니다. 회사에 월급 주는 사람은 회사가 어려운 것을 전부다 직원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고, 직원들은 하여튼 틈만 나면 놀 생각으로 가득 차서 오늘 또 회사 가서 뭐하고 놀꼬, 뺀질이처럼 시간 때울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양쪽 다 복종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직원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경에 보면 직원은 주인에게 복종하면 안돼요. 주님에게 복종해야 돼요. 주님에게. 그러면 복종이 안 되죠. 복종이 안 된다는 말은… 예수님한테도 주라고 이야기하고 ‘아이고, 랍비여.’하고 예수님께 뽀뽀한 사람 누구죠? 가룟 유다죠. 무슨 행패에요, 그게. 친근을 가장한 마지막 배려? 당신 내 손에 죽었어. 복수? 보복? 3년 간 당신 따라다닌 내 나름대로의 보상책인가요? 내 것 아니면 팔아먹는다는 심보 아닙니까. 내 것 아니면. 네가 뭔데 왜 내 세계에 네가 협조하지 않느냐? 이제 남은 것은 당신에 대한 나의 복수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의 부부라 하는 것은 상호 복수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닐까요? 전쟁? 내 탓을 저쪽 탓으로 넘기기 위해서 배우자와 결혼해서 사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배우자가 병으로 일찍 죽으면 이 야속한 인간아, 나 두고 왜 일찍 죽느냐고 탄식하는 이유는 더 이상 탓할 사람이 날라가버렸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있어줘야 탓할 사람이 생기는데 누구 탓을 해요 그럼.
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구약에서 율법을 가진 사람이 뭐를 잘라냈는가를 보세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이 하나님의 율법 또는 하나님의 계명 또는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내 속에 있는 이 정욕이 내 손에서 이게 잘려나가는 현상을 보인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로 했으니까 이제 예를 한번 들어봐야 되겠죠. 다 같이 한번 봅시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거기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이야기했어요. 아말렉이 당신에게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당신은 아말렉을 마주해서 전쟁을 벌여야 되는데 전쟁을 할 때 그 아말렉에 대해서 3절에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지시한 거죠.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사울이 여기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신났죠. 무슨 거부감입니까? 한쪽의 적이 완전히 우리 손에 섬멸 당한다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어요? 이런 사람은 합천의장 돼도 괜찮아요. 청문회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전쟁을 통해서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사울 왕은 자기도 미처 몰랐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자기 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9절에 보면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되어 있죠.
다시 3절 봅시다. 지시한 것은 뭐냐 하면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했거든요. 여기에는 좋은 것 따로 고르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다 죽이라 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사울도 기분 좋아서 오케이하고 들어간 거예요. 하고난 뒤에 보니까 아, 아까운 거예요.
그러면 이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이스라엘을 붙이는 가운데서 세상 모든 인간이 갖고 있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어떻게 이게 현실 그 자체인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이게 현실 그 자체에요. 현실 그 자체.
인간은 현실을 안다고 우깁니다. 아니에요. 현실은 우리가 모르는 그 이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어요. 어떤 어려운 사람이 배고파서 힘들고 잘 데도 없어가지고 교회 와서 “집사님, 내가 곧 취직되는데 한 몇 일간만 잠자리하고 하루 세끼만 주면 고맙겠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너무 불쌍해서 갑자기 어떤 성경구절이 막 수십 개 떠오르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도우면 내가 보상하겠다든지 이웃을 사랑하라든지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고 뭐 온갖 구절이 다 나오잖아요. 오른 손이 한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그런 구절도 뭐 하여튼 들은 게 문제라. 쭉 들어가지고 도와줬다 이 말이죠.
도와줬을 때에 자기는 뿌듯했겠죠. 하나님의 성령이 있는 내가 드디어 성령 값을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스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 할 때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천사들이 기뻐하고 그게 성도야, 짱이야, 그게 간증거리지, 하고 했겠죠. 설마 자기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그렇게 건사해줬더니만 그 사람이 나중에 일주일 뒤에 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장롱 속에 있는 폐물 다 들고 나갔을 때 그 많이 알던 주의 말씀은 다 제켜두고 세상에서 통하는 한 문장만 그 머릿속에 마지막 남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어주는 게 아니다’ 이건 성경에 나오는 게 아니고 세상에서 나오는 거예요. 세상 것이 후차적으로 알았던 성경지식을 이기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은 세상 것입니다. 다음에 만나면 죽여버린다.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니고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사랑을 은혜를 욕으로 돌리는 이거는 반칙이지, 우리 게임에서! 돈을 요구할 게 아니고 나가면서 고맙다는 소리를 하고 나가야지, 이게 뭐고? 그게 어떤 폐물인데. 갑자기 정 문제에서 돈 문제로 바뀌어버렸어요. 돈 문제로 바뀌었어요.
그렇게 가고 난 뒤에 신고를 하죠. 드디어 체포했어요. 체포하니까 또 생각나는 거예요. 몇 번 용서합니까? 일곱 번 용서에다가, 장발장 이야기 있잖아요. 어떤 신부가 장발장이 훔친 금촛대를, 그거는 내 것 아닙니다. 내가 준 겁니다. 해가지고 또 소설에 나오는 장발장 이야기까지. 그래,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주께서 주신 신의 공유적 속성, 착한 양심은 있으니까 감동받을 거야. 형제여, 오세요. 우리 노래 하나 부릅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노래 부르고. 참내. 그래서 인사하고 그날 밤에 가면서 그 사람은 초등학교 자식들 저금통을 다 털어가지고 나갔을 때, 또다시 생각나는 것은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어 주는 것이 아니다’ 또다시 되풀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위 신자라고 우기는 교인은 주님을 믿어본 적이 없고 자기의 착함을 믿은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자기 자신을 우상화시킨 거예요. 혹시 길에서 그런 어려운 사람 있거든, 도움 달란 사람 있거든 오늘 재수 되게 없네, 생각하고 그냥 도와주고 잊어버려야 돼요. 오늘 또 잘못 걸렸다. 의미를 두면 안돼요. 의미를. 지난 번에 헌금 10만원 그거 안했더니만 강제로 뺏어갔구나, 저 사람 통해서. 주께서 내 돈을 뺏기 위해서 그 사람을 보낸 거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이 세상 자체가 게임판이고 경쟁장입니다. 경쟁에 있어서 힘이 있느냐 없느냐의 판인데 힘은 돈으로 측정하는 거예요. 저 사람이 나에게 돈을 소비시키느냐, 돈을 벌어주느냐로 이 세상 모든 가치는 결정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단독적인 내 자랑에서 내가 발을 뺄 수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되느냐에요. 그걸 지금 두 번째 시간에 해보자는 이야기에요. 어떻게 하는가? 사무엘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죠. 여기 15장에 보게 되면 14절에 사무엘이 이야기합니다. “이거 무슨 소리야? 내 귀에 들리는 소리가 이게 환청인가? 아니면 이게 무슨 소리야?” 소리가 들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 양 소리, 소 소리가 들린 거예요. 이게 뭐야, 이게? 저 양이 왜 살아있고 저 소가 왜 살아있는데? 음메에~ 그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어수선한 거예요. 깔끔하게 정리하라 했는데 어수선해버렸어요.
그러니까 사울이 여기서 또 종교를 빌미로 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또 끄집어냅니다. 15절에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참…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왜 하나님이 인간의 것을 탐을 내요?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지, 받는 분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 받아요. 우리의 죽음도 우리 몸도 안 받아요. 오직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 몸만 받아요. 우리는 아예 배제해버리고 받지도 않아요.
“주여, 이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했을 때, “아유, 귀한 몸이구나. 같이 가자.” 이랬습니까? “오지 마! 저리가! 오지 마. 나 가는 곳에 네가 올 곳이 못돼. 네가 거길 어디라고 와? 너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너 환상, 꿈꾸고 있는 거 아니야? 너 같이 붙어있다고 해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올 수 있을 것 같아? 누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어?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넌 오지 못해. 못가. 갈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해요?” “내가 다시 올게.” “안 오면 어떻게 해요?” “안 오면 할 수 없지 뭐.”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미 정욕 안에 지배받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없애거나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내 자랑에서 내가 탈출하고 싶지를 않아요.
자기 애가 공부를 못할 때는요. “야, 네가 진짜 효자다. 뭐 맨날 50점, 20점. 너 성적 보니까 엄마로서 교회 가서 네 자랑할 수 있는 여지를 안 주니 네가 참 효자다. 네가 너 때문에 많이 겸손하다.” 그러니까 아들이 하는 말이, “이번에 모의고사 1등 했는데요.” “아, 그래? 그럼 생각 다시 해볼게.” 그러고 교회 가서 “이건 우리 자랑은 아니고, 애가 미쳤지. 모의고사 1등 했대. 나중에 서울 의대까지 내다볼 수 있겠나.” 이런 식으로. 자랑은 아니고, 뭐 이런 식으로.
사람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못하는 것은 그런 기회가 안 와서 그래요. 그런 찬스가 안 와서 그래요. 개뿔도 자랑할 게 있어야 자랑하지. 개코도 자랑할 게 있어야지. 몸이 튼튼합니까, 돈이 있습니까, 뭐 자랑할 게 없어서 말이죠. 그럴 때는 자기 자신이 나는 자랑 안한다고 정리해버려요. 이게 큰 실수에요. 자랑 안 하는 게 아니고 할 찬스를 안줬다니까요, 할 찬스를! 자랑은 아무나 하나. 자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주제파악을 해야죠.
방법은 뭐냐? 방법은 여기 32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아말렉 왕이 착각한 거 보세요.
사울 왕이 자기를 살려줬잖아요. 살려주고 난 뒤에 아주 좋은 유대관계를 맺겠다고 했거든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마스 수장을 살려준 거예요. 그러니까 하마스 수장은 신난 겁니다. “우리 휴전합시다. 인질 교환합시다.” 이러고 있다고요. 그런데 이스라엘 선지자 사무엘이 와가지고, “하마스 대장 이리 와.” 그러니까 우쭐대면서 에이, 임금님도 용서해줬는데 용서해주겠지. “이제부터 내가 여호와 믿고 잘 하겠습니다.” “그래?”
그 다음에 33절,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어떻게 했습니까? “찍어 쪼개니라” 그러니까 아각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대나무 조각으로 보고 찍어 쪼개버렸어요. 아각을 찍어 쪼갰다는 말은 뭐냐?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 찍어 쪼개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결국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너를 대체할 자가 찍어 쪼개지는 것이, 우리 속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있다는 것을 표하는 방법이죠.
그러면 우리 대신 누가 저주받았습니다. 누가 저주받았죠? 우리 주님이 저주받았죠. 그 분이 왜 저주받죠, 아버지한테? 죄 때문에 저주받죠. 그 죄는 누구 죄 때문입니까? 누구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우리 손으로 해결합니까? 해결할 수 있어요? 내 자랑을 내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내 정욕과 내 육신과 내 자랑이 내 손에서 해결 안 됨을 확정짓는 거예요. 너는 백날해도 사람 된다, 안 된다? 사람이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당장 찍어 쪼개져도 지금 네 수명을 여기서 중지시켜도 너는 그동안 살아온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라, 이 말이에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이상해. 아각인데. 이름 바꾸세요, 김 아각, 최 아각, 전부 다.
우리의 정욕이 안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을 텐데 정욕이 있어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 더러운 게 있어야 이게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감사로 이어지는 거예요. 감사! 십자가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에요. 정욕을 없애는 게 성도가 아니고 감사가 성도라니까요.
잠재되어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은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마주치면서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될 거예요. 여기 계신 분이 한 달 수입이 한 이천만원 늘어난다든지, 부동산 한 서너 개 갖게 되든지, 애가 뭐 수석으로 합격한다든지, 스스로 ‘나는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하는 16기 영숙이가 오든지 뭐.
평소에 사람이 그럴 기회가 없으니까 자기가 굉장히 건전하게 사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데 인간은 건전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기 치는 자와 사기 당하는 자 두 종류밖에 없고 사기 치는 자의 특징은 다 한때 사기 당했던 자에요. 사기 당한 자만이 너만 치나, 나도 칠 줄 안다 해가지고 자기보다 더 어리숙한 사람에게 사기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마. 세상에서 살지 말라, 가 아니라 이 세상 것을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께서 계속 머물게 하고 살게 하는 겁니다. 무엇이 우러나게 하도록? 감사가 우러나게 하는 거예요. 곰탕이라 하는 것은 우려내는 맛이에요. 곰탕 집 아가씨 트로트 하는 사람 있죠. 맨날 나올 때마다 우리 집 곰탕집인데 내 트로트도 곰탕 우러나오듯이 그렇게 맛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맛이 감사하는 맛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계속 우러나는 거예요.
아, 이게 내 욕심이었고 이게 정욕이었구나. 이게 탐욕이었고 이게 자랑 아닌 척 하지만 이게 내가 자랑 못해서 환장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는 거구나. 내 나이 팔십에 봐라. 거뜬하게 일어섰잖아. 목숨을 쥐고 있는 분은 주님인데, 그 목숨 쥐고 계신 분께 복종을 하는 자세 같으면 ‘지금 죽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될 건데 ‘아, 그래도 뭐 흑염소 좀 먹어놨더니만 효과가 있긴 있네.’ 그 흑염소를 죽이든지 해야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운영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는 거예요.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을 지옥에서 없애버리는 방식, 이스라엘 속에서 구원을 끄집어내는 방식이 그거에요.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파괴해주신 분께 감사할 때, 그것은 주께 복종하는 마음자세일 경우입니다.
그들이 누굴까요? 그들이 바로 선지자였어요. 선지자가 이스라엘 망한다 소리 들어가지고 예레미야, 미가 선지자들 있죠, 후선지자, 이사야부터 해서 욕 되게 많이 얻어먹었어요. 진짜 고난 많이 받았어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는 죽인다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미가야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그 선지자들이 양보를 할 수 없었어요. 왜 양보를 못하느냐 하면 그게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은 망하라고 있는데 만약에 세상에 대해서 격려해버리면 세상이 자꾸 착각을 하게 돼요. 우리가 안 망할 자들인가? 우리가 왕이 될 상인가? 뭐 이런 식으로. 우리가 안 망해도 되는가? 뭔가 착각을 할 수 있어요. 망하라고 만든 게 세상인데.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와 함께 폭삭 망하게 되어 있어요. 자랑도 포기 못하고 육신도 포기 못하고 정욕도 포기 못하면서 망하기는 계속 망하면서 그 속에서 감사하는 사람은, 이미 그 바닥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출생된 사람만 감사하지, 다른 사람은 감사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코로나, 태풍, 지금 아이슬란드는 지진 900번 일어났죠. 곧 대화산 터진다고 5000명 피신해 있습니다. 미얀마 내전. 세상 곳곳이 경쟁이고 투쟁이고 생존 경쟁이에요. 그래서 소위 신학자라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여, 선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어찌하여 이런 불상사가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혀가 있어도 말 못하는 혀 잘린 하나님이십니까? 이런 식으로 또 민중항쟁하고 광주에 가서 데모하고 전두환 죽이라고 협박하고….
제가 부산강의에서 알라 믿는 사람들이 뭐라고 한다 했어요? ‘알라는 위대하다’ 했잖아요. 제가 그걸 바꿨잖아요. 신은 위대한 게 아니고, 신은 초라해요. 누구보다 초라하고? 우리보다 더 초라하죠.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우리도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초라하기를 왜 거부합니까? 벌써 낌새가 다르죠? 분위기 다르잖아요. 주님은 낮아졌는데 우리는 높아지려고 하잖아요. 버티려 하고 나름 선방하려고 애쓰잖아요. 도대체 그 마음이 뭐였겠어요? 나는 망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근거가 뭔데?
주님의 뜻은 그게 아니에요. 네가 이미 거듭났으면 충분히 망해져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세상에 살게 하고 안 살게 하고는 주님의 소관입니다. 우리가 애쓴다고 더 사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 땅에 감사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임무와 사명이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
끝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거에요. 우리가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을 제거하지 못한다고 단정 지었었는데, 나름대로의 노력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그런 주관이 있을 수 있어요. 노력하면 되지 않느냐. 이 정욕이라는 게, 욕심이라는 게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것은 원리니까요, 여러분 다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했고 에베소서에서도 할 수가 있어요, 앞으로.
인간이 있는데 인간의 욕심, 정욕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게 아닙니다. 만들어 낸 게 아니고 주위에서 덮어진 거예요. 내가 속한 세상에서 덮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생산물이에요. 세상 따로 나 따로 이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내가 세상의 일부에요.
내가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상은 나에게 영향을 주면서 우리는 그렇게 나의 이야기, 일생의 이야기를 지금도 일기책에 적고 있는 거예요. 내가 쓰는 단어, 내가 쓰는 개념, 다 어디서 온 겁니까? 이건 좋고 이건 나쁘고 그 구분은 어디서 온 거예요? 그것은 교육에서 온 거예요. 누가 교육시켜줍니까? 세상에서 세상사람 되라고 철저하게 교육시킨 거예요. 그 교육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반응을 나타냅니까? 거부반응은커녕 스펀지가 빨아들이듯이 쏙쏙 빨아 당겼습니다. 이미 우리 속에 있는 악마와 세상을 장악하는 악마가 서로 잘 통하도록 되어 있어요.
거부는 어디서 오는 거부냐 하면 십자가의 자기 부인, 그거는 거부대상이에요. 우리가 이유도 없이 무조건 거부해요. 십자가의 자기를 부인하라는 그 이야기는. 그리고 십자가만이 현실이고 이 세상이 무덤이고 무덤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거부합니다. 이 찬란한 문명은 어쩌라고? 수많은 사람이 오늘도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는 이건 무의미하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너만 구원받았나. 구원이란 개념도 몰라요. 구원은 개인이 받는 게 아니고 어느 소속된 환경이 구원이에요. 예수님의 세계가 구원이지,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 출신이죠. 예수님의 성령의 작품이죠. 우리는 성령의 작품으로서 이 세상에 살고 세상 사람은 악마의 생산물로 이 세상에 살고.
따라서 세상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떠한 거부감도 없고, 성령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푹 젖어있으면서도 그것보다 더 센 힘으로 ‘이게 바로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이 이런 상황, 이런 경우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구나.’ 하는 것을 감잡죠. 감을 잡는다고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것이 굉장히 신기해가지고 ‘너는 어디서 무슨 공부, 누구한테 그런 설교 들었는데 그런 감이 오느냐?’ 이건 설교 듣고 온 게 아니에요. 이건 성령이 없으면 거부감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니까요. 내가 그토록 죄인입니까? 그토록 난 어떤 희망도 없단 말입니까?
왜 여러분한테 희망이 없습니까? 희망 있죠. 골라먹는 재미가 있잖아요. 죄, 골라짓는 죄. 31가지의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골라먹는 재미가 있잖아요. 주께서 살려주는 한 이것저것 집적대면서 ‘아, 이것도 육신의 정욕이고 내 자랑이구나. 아, 주께서 이것 때문에 수난 당했구나. 이것 때문에 짓밟혔구나.’ 그것을 경험케 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요,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산에 가서 자살하고 그런 거 없어요.
우리에게 있는 그 거부성, 육신의 정욕은 복음을 거부하죠, 그 거부성이 있는데 거부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가 작용하기 때문입니까? 세상의 정욕과 육신의 자랑보다 더 센 힘으로 오히려 정욕과 육신과 자랑을 다루고 계시는 분의 힘 있는 권세, 여기에 대해서 항상 회고적으로 감사하고 돌이켜서 고맙다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하등 오류도 없고 실수 한 적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아멘이고 모든 것이 오케이고 모든 것이 수월하게 방해받음 없이 일이 제대로 잘 추진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세상을 한꺼번에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변화를 기대하죠. 지금보다 더 나은 내 삶을. 그러나 변화는 없습니다. 오직 ‘변했음’만 있죠. 이미. 과거완료에요.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 몸이 되고, 나는 복종해야 될 주님이 계시고, 우리의 재미는 주어진 상황이 주께서 주신 상황인 줄 알고 그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그냥 술술 받는 거예요. 그 상황을. 그게 세상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평가하지 마시고. 이것도 주께서 주신 선물인데 말씀이 말씀대로 증명하기 위한 선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것을 바로 내 자랑거리로 여겼던 내 죄입니다, 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선물로 남은 인생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 밤도 즐겁게 보내시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말씀대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욕심만 살아나지 말고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말씀도 같이 겸하여 살아나서 결국 찬양과 감사는 우리가 복종해야 될 주님께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