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3b 부산강의 : [시편]63(47:5)-주님의 폭력성
20231113b 부산강의 : [시편]63(47:5)-주님의 폭력성
(강의:이근호 목사)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사로잡힌, 여기 보면 올라가실 때에 열방을 치리하시고, 이렇게 돼 있는데 주께서 올라갈 때는 궤도 마련돼야 돼요. 위에서 내려와서 성과를 다 이룰 때에 여기서 궤도, 그러니까 케이블카 비슷한 것, 궤도 마련돼야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가는 길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늘나라 있다고 올라가는 길 있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 가는 갈이 따로 있어야 돼요. 그 길은 단독행위에요. 주님의 단독행위지 우리가 거기 섞이면 안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길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친히 주님께서 시내 산에 오셨는데 거기 나팔 소리가 들렸단 말이죠. 출애굽기 19장 19절에(“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그 나팔 누가 불어요? 아무 분 사람이 없다니까요. 이스라엘에서 나팔 소리라 하는 것은 전쟁 중이다, 전쟁하러 왔다. 이것은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하나는 머리를 치고 하나는 발꿈치를 물고. 이것은 이미 평화상태가 아니에요. 나만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면 되지, 지금 그 문제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어떤 평화라는 게 없어요.
사람은 평화롭게 살고 싶지요. 조용하고 싶은데 인간에게 어떤 경우라도 협상 대상이 아니고 흥정 대상이 아닌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 내부에 뭐가 있느냐? ‘죽음의 힘’이 작동하고 있어요. 이거는 인간이 흥정하거나 취소시킬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의 죽음이란 게. 그런데 인간이 죽게 된 이유가 성경에 보면, 인간이 알지 못하는 죄 때문에 죽음이 와요. 근데 인간이 알고 있는 죄는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게 아니고 바르게 인도하잖아요, 선악으로. 덜 죽게 인도하고 안 죽게 인도하고 건강하게 인도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그러면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죄 자체가 그 죄가 아닌 거예요. 가짜 죄에요. 인간의 죄는 뭐냐? 반성이 가능한 죄에요. 반성이 가능하고, 인간의 죄는 자기의 행위에 의해서 수정이 가능하고, 회개하면 용서가 가능한 죄를 인간은 죄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부 다 가짜에요. 인간은 반성하고 회개하고 뭘 해도 없어질 죄는 가짜 죄에요. 이거는 마귀가 연막해서 만든 가짜 죄에요.
사람이 반성을 하고 회개를 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죄가 미워지는 게 아니고 그 죄에 대해서 그걸 극복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런 죄를 짓지 않는 자기 자신이 우상화 돼버립니다. 이거는 뭘 피하다 뭘 만난 게 돼요. 죄를 피하다가 큰 죄를 만난 거예요. 누가 공짜로 집에 상추와 파를 줬다. 오늘 식사는 돈이 적게 들겠구나. 천만의 말씀. 상추 있고 파 있으면 고기를 사요. 비용이 더 들어요. 싼 저녁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예 못 나면, 못날 조건을 갖췄다면 예를 들면 문둥병, 세리 창기 이럴 같으면 자기 포기가 되는데 이건 뭐 율법 알고 바리새인에다가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가능성 있고 남을 도와줄 수 있고, 남을 불쌍히 여기고 이러면 이거는 갈수록 가관이에요. 아프리카에서 우물파기부터 시작해서 참…, 북한에 선교하기, 북한의 인권문제 쓸데없이…, 니 개 인권이나 찾아라. 북한은 좋다고 김정은 보고 눈물 흘리고 있는데 거기다 무슨 인권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이건 상식적으로 알아야 되는데, 인간성이라 하는 것은 정신 차린다고 인간성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만드느냐 하면 환경이 만들어요. 환경이 뭐냐 하면 어버이 수령이 환경이잖아요. 그러면 그 자체가 ‘어버이 수령이 있으니 이 세상 우리 북조선인민보다 행복한 인민들 없으리라’ 이러고 살고 있다니까요.
저 가자지역 그 사람들은 ‘신은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하지요. 북한에 가면 누가 위대한 줄 알아요? 김정은이 위대해요. 행복한데 왜 우리가 신경 써요. 본인이 행복한데 약간 배는 고프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 아니에요. 종교단체에요. 이만희라는 보혜사로 행복하다는 데 뭘 전도해요. 세상에 이런 천국은 없어라, 이러고 있는데.
인간의 죄라는 것은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이 잘 되면 이건 선이 되고, 그 조직이 흠집이 생기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업이 잘 되려면 사원들 아주 모욕감을 줘서 신입사원 훈련할 때 ‘이번 실적이 얼마야, 실적이 얼마야. 복창해’ 고함지르게 하고 땅에 기게 만들어요. 중국기업에 그런 게 있어요. 땅에 기어서 모욕감을 줘서 용기를 가지고 물건 하나 더 팔아먹게 하는 것, 왜 그런 짓합니까? 조직이 살아야 내가 사니까.
목사가 교회 신경 쓰는 것, 조직 조폭입니다. 왜? 교회라는 조직이 십자가를 대신하기 때문에. 왜 목사가 문제 되느냐 하면 자기를 잊을 수 없어요. 자기 의미를 자기가 포기 못해요. 그러니까 진짜 무서운 것은 회개를 못해서 무서운 게 아니고 그 회개할 죄가 근원적인 죄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무서워요. 회개했다, 반성했다는 나의 의를 어떻게 처리할 건데요? 기도원에 가서 사흘 동안 금식해서 은혜 받은 나를 처리할 건데요? 은혜 받은 내가 죄 아닙니까, 그게 우상 아니에요?
우리가 뭘 자꾸 놓치느냐 하면 울지 않으려고 살면 뭐가 없어지냐 하면 감사가 사라진다. 눈물 안 흘리고 살려고 하면 자꾸 감사가 없어져요. 내가 괜찮은 시절, 행복했던 시절 빨리 그걸 보상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신에게 기도하든지 헌금하든지 해서 빨리 눈물 그만 흘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눈물을 흘려야 친히 눈물을 닦아주는 동네가 따로 있어요. 요한계시록 21장에, 그때는 눈물이 없다. 왜? 악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그 세계는 위에서부터 내려오게 돼 있어요. 이제부터 골치 아픕니다.
주께서 폭력을 유발해서 동반하면서 내려왔다가 올라가면서 여기 궤도, 길, 천국 가는 경로가 밝혀졌지요. 그 경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의 이름을 아담의 이름을 뭐로 바꾸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바꾸는 거예요. 바꾸면서 올라갔다가 내려가면서 제가 아까 소속이 바뀐다 했지요. 소속이 바뀐다는 말은 전에는 내가 소유였던 것이 내가 내 소유를 포기하게 만들어요. 이게 자기 부인이에요.
나는 내 소유가 아닌 거예요. 죽어도 내 소유가 아니고 살아도 내 소유가 아니에요. 사나죽으나 소유가 따로 있어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이름을 위해서 먹을 걸 줬고 오늘도 살아온 거예요. 그래서 어제 오후의 기도제목이 뭐냐 하면 이 순간이 주께서 주시는 마지막 혜택이라고 여겨라. 오늘 하루가 주께서 주는 마지막 배려인 줄 알아라. 봐주는 거예요. 마지막 배려로 생각하라. 늘 거저주시는 배려로 살았지 내 행동 똑바로 해서 얻은 게 아니에요.
이 경로,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것, 그 장소가 이게 힘이 있어야 돼요. 힘이 있어야 뚫을 수 있어요. 그 힘이 바로 시온입니다. 시온이 있는데 그 시온이 하늘에 있는 시온과 연락이 닿게 돼요. 축약이니까 무한이 특정 장소에 압축이 돼 있으니까. 하늘의 모든 무한이 압축돼 있어요. 그걸 어려운 말로 신약성경에선 예수 안, 또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안,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안, 다른 말로 하면 언약 안이라고 돼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구원할 때는 반드시 붙는 게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고, 예수 안에서 너는 이미 죽었고, 예수 안에서 네가 사는 거예요. 내 안에서 부활이란 게 없어요. 내 안에서 죽는 건 없어요. 예수 안이라는 그 환경, 저 사람과 나와 함께 있다는 것, 주님이 보좌로 앉아 계시는 그 환경에 효과, 환경의 효력으로서 이미 우리는 죽었다가 산 게 된 거예요.
그리고 지상에 나타날 때는 죽어가는 육신으로 그대로 재설정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 것이 전혀 구애 받으면 안 되지요. 왜? 우리의 생명은 따로 챙겨놓았으니까. 생명은 뭐냐? 예수님의 단독행위로 얻은 생명이에요. 예수의 살과 피. 우리 피 아닙니다. 우리 살 아니에요. 예수의 살과 피로서 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망가져도 그거는 망가지게 하시는 주님 소관이지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닌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와서 물 안 길고 양동이를 버려뒀다는 거예요. 아마 시어머니 있었으면 혼났을 거예요. “너 도대체 왜 거기 갔어?” “누굴 만났어요?” “만나고 자시고 네 자유지만 물은 떠와야 우리가 먹고 살지?” “저는 이미 살았어요.” “미쳤구나.” “물 안 먹어도 살아요.” “이게 뭐야? 네가 시내 산의 모세야?” 모세도 안 먹고 살았잖아요. “예, 그래요.”
우리는 죽어도 살은 거예요. 살아도 살은 거고. 그러면 밥은 먹지 말지 밥은 왜 먹느냐? 그거는 우리가 보여줄 것은 경로를 보여주니까 이렇게 살던 우리가 구원받았으니까 이렇게 살던 그 일을 열심히 해야지요. 돈 벌어야지요. 어떻게 살아도 생명이 아니고 지옥 갈 몸인 것을 이 땅에 남은 육신으로 주께서 활용케 하시는 거예요. ‘이게 돈 맛이구나.’ 만끽해야 돼요. ‘이런 맛에 골프 치는구나.’ ‘크루즈여행 이렇게 가는구나.’ 벌벌 주여 이것 영광을 가리고. 영광 가리고 자시고 간에 네가 존재한 자체가 내 영광이라면 살아 있어야 돼요. 자살하면 안 돼요.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돼요. ‘절 자체가 속세다.’ 이 땅에 거룩한 공간은 없습니다. 이미 올라갔으니까. 지금 올라갔다는 말은, 내가 일체의 희망, 너희들 것은 내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올라갔거든요. 올라갈 때 교회 자체가 더러운 곳이다, 이 말이에요. 절로 표현하면. 절에서 뭐라 합니까? 속세를 떠나라. 뭘 떠나요. 절이 속세인데 뭘. 절이 속세잖아요. 속세가 따로 있는 줄 알아요? 인간이 가는 곳이 다 속세고, 성도가 있는 곳이 바로 주의 이름이 함께 있는 두세 사람이라도 그게 천국이에요.
그렇게 되려면 이게 ‘성령 안’ 이렇게 되거든요. 이게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것이 성공리에 작업이 완수가 돼야 돼요. 이것 완수 안 되면 그냥 시도해보는 거예요. ‘이것 옳네. 옳지만 열심히 해보자.’ 이걸 개혁주의 신앙이라 하는 거예요. 개혁주의 신앙은 자꾸 미뤄요. ‘한 번 해보지 뭐.’ 열심히 하면 뭐 되겠지. 없어요. 개혁주의 신앙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유대교 신앙이에요. ‘메시아가 오실 거다.’ 왔는데 오실 거라고. 주께서 재림하실 거라고. 그 재림한 분이 이미 오셨는데? 재림하실 분이 오셨어요. 오신 분이 재림하지요. 오신 분 안 믿으면 재림도 그분이 아닌 거예요. 이 땅에 오신 분.
그러면 오실 때 뭐로 왔는가? 폭력으로 왔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지요. 이 대목에서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오실 분이 장소를 정해서 오셨어요. 장소를 정한 게 아니고 장소를 만들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시온이에요. 시온은 뭐라 했습니까? 축약이죠. 그러면 이 시온은 시내 산에서 주께서 율법을 줬습니다. 시내 산에 오셨다는 자체가 이미 충분히 내려온 거예요. 특정 공간에 오셨다는 것. 주님께서 시내 산 말고 다른 곳에 계신 게 아니고 시내 산에 계신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모세를 불러 특정 장소에 오라 해요. ‘네가 아무 때나 가. 만나줄게.’ 이게 아니고 ‘특정 장소=특정 인물’을 의미하는 거예요. 나중에 이게 언약적으로 발전하면 특정 장소란 특정 인물을 의미하는 거예요. 특정 장소에서는 아직까지 시공간이 유효하다는 뜻이고, 특정 인물 되면 시간과 공간은 이미 불로 싸질렀기 때문에 특정 공간, 특별 은혜 받은 그런 것 없다는 거예요. 특정 인물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러면 특정 장소에서 특정 인물이 되려면 특정 장소는 충분하게 다 활용이 돼야 돼요.
자꾸 내가 너무 어려워서 주저하게 되는데 진도 나갑시다. 어려워도 여러분 참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여기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거예요. 누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선물을 주시는데 사로잡힌 자가 왜 필요한데요?
여기 사로잡고 사로잡혔다는 것의 중심처가 있어요. 중심 되는 장소가 있어요. 사로잡았다는 말은 뭔 뜻이냐? 뭐하는 중이다? 전쟁 중이죠. 전쟁 수행이 성공리에 작업을 마쳤을 때에 등장하는 도성이 뭐냐 하면 시온 성이에요. 왜냐하면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 중에서 마지막 남은 도성이 있어요. 최후의 전쟁, 그 도성 이기면 다 이긴 거예요. 그게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접수하면 다윗은 진정 이 땅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는 거예요. 원래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 없어요. 왕이 없는데 왕을 주셨다는 말은 왕이 없을 때는 각자가 율법을 지켜야 했던 시절이에요. 왕을 주셨다는 말은 각자가 율법을 지키는 데 모조리 실패했다는 것을 근거로 한 집약된 인물이 왕이에요.
왕 하나 율법 살면 백성들이 율법을 위반해도 구원이 되는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율법은 많아요. 그야말로 율법을 지키려면 인간의 힘으로선 유한한 인간이 못 지킵니다. 왜? 율법의 내용은 출제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무한자에요. 그래서 율법을 못 지키는 이유가, 우리는 유한하고 출제자 의도는 무한하고. 뭐 지켰습니다, 하면 그것도 지킨 거냐? “거짓말하지 말라 해서 거짓말 안 했습니다.” “네 자체가 거짓이야. 네가 인생을 덜 살았구나.” 한번 맞아봐야 십계명 지켰는데 아말렉이 왜 쳐들어오는지 이유를 알아야 돼요. 십계명 다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아람나라가 왜 쳐들어옵니까?
다시 말해서 십계명 다 지키면 영생 주는 것 맞잖아요, 라고 우겼던 사람 있었지요. 마태복음 19장에 누굽니까? 철딱서니 되게 없는 부자 청년. 젊을 때 부자 좀 된 모양이라. 자기 걱정하니까 율법,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기 때문에 영생 얻을 줄 생각하고, ‘영생 주실 거죠?’ 이게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다는 그 자체가 그들은 아직 계명이 뭔 줄 모르는 거예요.
계명은 율법은 한 인물로 축약되는 겁니다. 그 인물을 사랑하는 자가 모든 율법을 지킨 게 이룬 게 돼요. 로마서 13장.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겁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아요. 옛날에는 율법 안 지키면 저주받아요. 이제는 율법 대신 한 인물이 율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예수님을 사랑 못해요. 왜냐하면 자아 때문에. 자아가 방해하거든요. 이미 선점해서 사랑하는 대상이 난데 이걸 무슨 수로 뺍니까? 이걸 빼면 사람도 같이 빠지게 돼 있어요. 나 없는데 사랑만 달랑 남는다? 그런 일은 없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끝까지 마지막으로 뒤에 감추어놓고 있는 숨겨진 내용이 있어요.
사랑은 날 사랑이 기본이고, 날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게 순차가 순서가 그래 돼 있어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사랑이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겁니다. 왜 부부가 싸우는지 알겠지요? 결혼했다고 한 몸이라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없어요. 일단 내 사랑에 네가 고개 숙이고 기어들어오라, 이게 부부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어디서 감히 남편이 나한테 대들어? 이게 어디서 그런 교육을 받았어. 그런 수가 있네. 남편인데? 니 남편이지? 남편인데 아내한테 대들어? 요새 많이 풀어줬더니 간땡이가 많이 부었구나.’ 옛날에는 ‘여자가 하늘같은 남편한테 대들어? 이게 어디서 토, 토, 토, 토를 달아?’ ‘임춘애가 라면 먹고 금메달 딴 것 알지? 어디서 토를 달아? 내가 임춘애라면 임춘애야.’ 송광호가 한 대사 아닙니까(). ‘내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야.’ ‘남편은 따라야 돼. 성경에 뭐라고 돼 있어? 남편에 복종하라 돼 있지.’
하여튼 아까 성경 지킨다는 자체가 뭐라고요? 죄가 되는 거예요. 자기 사랑 그대로 있으면서 뭘 지킵니까. 성경을 방해하지요. 성경 인용 자체가 방해하는 거예요. 이미 시험 든 상태거든요. 이사야 2장 봅시다. 도대체 인간은 못하는 거예요. 인간은 못하는데 주께서 어떻게 하는지 보자는 거예요. 전쟁을 벌이는데 어떤 식으로 하느냐? 누가 읽어보세요. 이사야 2장 2절부터 좀 깁니다. 2절과 3절 읽어보세요.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오케이 됐습니다. 율법이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시온에서 나오지요. 그러나 우리가 알기는 율법은 시내 산에서 나와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 받았어요. 근데 갑자기 시온 산이 왜 등장하느냐 말이죠. 그 시온은 시내 산을 제치고 이 세상의 어떤 산보다 더 높은 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수고스럽지만 한 군데 더 봅시다. 시편 68편 15절, 16절 한 번 더 읽어주세요.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시기하여’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시온 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 가만히 그냥 행복하게 살도록 하지 않고 깐족깐족 건드려요. 건드려서 그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벌어집니까? 폭력사태가 일어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들이 뭐가 연상돼요?
어떤 특정 인물이 이 땅에 와서 그분이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게 아니고 그분이 내뱉는 모든 말이 소위 최고로 율법을 잘 지키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경건하고 가장 성스럽게 살았다는 자를 어떻게 한다? 시기 나게 만들고 건드리고 질투하게 만드는 작업을 누군가 했지요. 누가 했습니까? 예수님이죠.
‘너희들은 하나님나라에 가고자 하지? 나는 하나님이다.’ 어떻게 됩니까? 이건 높낮이가 비교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높낮이가 비교가 안 됩니다. ‘너는 시도하잖아. 뭔가 될까 싶어서 구원될까 싶어서.’ 그러나 나는 이 땅에 하나님으로 왔다는 말은 결국은 차이가 되는 거예요. 하나는 시도하는 것과 이미 되어진 사이에, 완료와 미완료 사이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완료와 미완료 사이에 조금만 보태면 되는 게 아니고 이것은 전면적으로 뭘 하느냐? 이걸 부정해버려요. 그래야 이들이 달려들거든요. 인간들은 미완료+시간, 추가 시간 더하면 뭐 된다? 완료된다는 희망을 안고 있는 게 인간이에요. 이들은 뭐하게 만들었다? 시기 나게 만든 거예요. ‘니들은 희망 없다. 겸손해도 안 돼.’ ‘나는 부족합니다.’ 부족해도 안 돼요. 아예 안 돼. 왜? 너라는 인물 자체가 나의 인물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나를 대체할 수 없지만 나는 너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게 주의 복음입니다.
법 없는 왕이 왕 없는 법을 대체해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율법 외에 한 의,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지적질하기 위해 준 거예요. 저주받기 위해서. 로마서 3장에. 인간이 율법을 알고 있잖아요. 율법으로 뭐합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바리새인처럼 그 나라에 가고자 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단 말이죠. 커트라인을 넘어서려고 아주 애를 쓰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처럼.
마태복음에 빛과 소금 되라 하잖아요. 그 소리 듣고 가만있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빛과 소금되기 위해서 나는 나이트클럽의 조명이 되란다, 이런 것 없잖아요. 그 소리 듣고 가만있을 인간이 없어요. 시도를 하게 돼 있다니까. 어제보다 더 향상된 나의 품격, 그 성화작업으로 지금까지 교회를 운영해 왔던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성화를 미끼로 해서 전부 다 닦달 내는 거예요. 그걸 목사가 목회라 해요.
교회 가면 목양실 있지요. 목양실 뭐하는 겁니까? 신부들 삐딱하게 앉아서 상담하는. 들어보고 요 점이 모자라니 그것 좀 보충하시면 주께 영광됩니다, 구원받습니다. 처방전내리는 그것으로 종교단체가 운영해 왔던 거예요. ‘당신은 당신 신경 쓰지 말고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그럼 십일조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이러면 성가대 복장은 무슨 돈으로 사고? 교회 형광등은 전기료 누가 내고?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는 거죠.
완료가 완료되고자 하는 자를 부정하는 거예요. 인간이 법을 알고 있는데 법 없는 왕이 오셔서, 그러니까 예수님은 전혀 법이 없어요. 로마서 4장에 지킬 행함이 없다니까. 행함을 인정하지 않아요. 아무 일한 것도 없이 의로움을 받았다는 겁니다. 누가? 아브라함이. 그때부터 아브라함이 그 소리 듣고 아브라함 행동은 개판 돼버렸어요. 이건 뭐 이스마엘 낳아버리고요. 그게 상속된 존재에요. 그래야 주님의 궤도를 타고 올라갈 수 있어요. 내가 나를 놔버려야. 왕 없는 법,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율법의 저주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사기에서 각기 보기에 왕이 없으니까 어떻게 한다? 지 마음 내키는 대로 자기 소견 했더라. 소견대로 행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레위 지파에서 자기 첩이 죽었다고 해서 그걸 열두 토막 내는 그 행위, 그게 바로 자기 소견대로, 주님의 지시가 없는 지 성질대로 한 거예요. 남들 보기엔 정의롭지요. 그게 정의란 이름의 폭력입니다. 인간은 정의를 논할 자격도 안 돼요. 그 정의란 것은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한 폭력행사에 불과한 겁니다. 핑계에 불과한 거예요
따라서 주께서 이미 완료가 됐잖아요. 완료되고 난 뒤에 전쟁을 하는 거예요. 전쟁을 하면서 무엇에 유념하느냐 하면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이렇게 돼 있어요. 에베소서 4장에, 또 시편 68편 18절,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높은 곳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높은 곳은 아니지요. 인간들을 질투 나게 만든 하나님이 없던 산을 만드신 거예요. 그 산이 시내 산이다, 시온 산이다? 시온 산입니다. 시내 산은 율법을 줬기 때문에 인간은 각자 율법을 지켜야 될 의무감에 짓눌려 있어요. 최선을 다해 보지요.
최선을 다하는 데 인간의 문제는 아말렉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마음의 내부에서 물 없고 양식 없다고 원망하는 그 원망된 마음과 율법의 만남 거기서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뭐 물이라도 주고 양식이라도 주고 율법 지키라 하지 양식도 물도 안 주고…. ‘야, 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런 마음이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나오는 거예요. 인간 속에 이스라엘 속에 애굽이 떨어져나간 게 아니고 애굽이 그대로 있었던 거예요.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율법을 지킨다? 이게 말이 됩니까? 주어진 것은 불 뱀이 주어지지요.
주님께서는 그들을 물게 한 그들을 물어서 아프게 해서 죽을 때 그냥 죽지 않아요. 불 뱀 물리면 너무나 아프게 해서 죽였던 지긋지긋한 불 뱀을 그걸 놋 뱀으로 만들어서 또 보게 한 거예요. ‘봐라. 너 죽어 마땅하지?’ 그게 불 뱀이잖아요. 그 불 뱀은 요한복음 3장에서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것 봐. 예수님 죽었잖아. 실은 네가 죽어야 돼.’ 고통스럽게. 그걸 그대로 우리에게 새겨주는 겁니다.
여기 시편 68편 18절에 높은 산이 있는 이유가, 그 높은 산이 되기 위해서 지상에 있는 모든 산들과 전쟁을 벌여야 높은 산이 마련돼요. 높은 산이 되게 되면 그 밑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천천이란 말은 하나님의 무기는 천사다 이 말이죠. 천사까지 동원한 거예요. 여러분 천사하면 항상 야곱을 생각하면 됩니다. 야곱이 누굴 만났어요? 마하나임, 천사의 군대를 만났잖아요.
그러면 야곱은 하나의 들러리고 실제로 야곱과 그 후손, 야곱의 후손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실제적으로 지키는 것은 누굽니까? 천사들의 활동이죠. 천사들의 활동은 뭐와 대비되는가?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과 극히 대비가 돼요. 못난 것들로 승리케 하는 거예요. 못났다는 말은 율법대로 산 사람은 없는 자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획기적인 프로젝트입니다. 인간들의 머리로는 상상도 못한 거예요.
왜 인간은 그걸 상상 못하느냐? 인간은 이미 선악에 대해서 민감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벌 받는다는 그 이데올로기에 악마의 이념에 빠져있기 때문에 자꾸 양심에 가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스로 조마조마하고 콩닥콩닥하고 자기 자신을 닦달 내는 거예요. 가만두질 않고 자꾸 자기를 학대하는 거예요. ‘똑바로 해, 인간아. 너 때문에 내가 구원 못 받겠다. 네가 과거에 그런 망나니짓을 왜 했어? 그때 제대로 선택하고 결정했으면 지금의 너는 잘 먹고 잘 살았잖아.’ 하고 누가 지적해요? 내 속의 내가 나를 너무나 냉혹하게 지적합니다.
그걸 보고 주님께서는 어처구니가 없어요. 이건 용서하신 자의 용서는 완전히 면상을 까고 모독한 거예요. “용서했다니까.” “내가 용서가 안 됩니다.” “이게 어디서 음성 높이고?” “내가 용서가 안 되는데.” “한 번 더 맞을래? 내가 용서했다니까.” “내가 용서가 안 되는데요.” “너, 나하고 싸우려하지?”
주께서 올라간다는 말은 모든 산들은 내려간다는 뜻이에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지금 지옥으로 깔아 앉는 그 토대 위해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늪에 빠지면서 웃으면서 지옥 가고 있습니다. 왜? 올라가는 것이 눈에 안 보이니까. 그중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는 게 상속된 존재에요. 주께서 전쟁해서 악마에 잡힌 중에서 전리품으로 챙긴 자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에요. 왜? 모세 율법에 그들은 모조리 다 복 못 받고 저주받을 자로 확정이 됐기 때문에.
악마한테 저주의 죽음의 사탄의 율법에 사로잡힌 자를 주께서 친히 율법을 입으시고 그들 속에 들어가서 승리하셔서 그들을 전리품으로 데려오는 거예요. 그중에 누가 들어 있느냐? 열두 제자에서 가룟 유다 빼놓고 열한 제자도 포함된 겁니다. 그들을 그냥 방치해두면 그들은 주를 사랑하지 못하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뭘 보냈느냐? 성령을 보낸 걸 사로잡힌 것을 선물이라 한 거예요. 다시 에베소서 4장 8절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사로잡힌 자와 정반대되는 성격을 준 거예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았다는 말을 그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리에 작업을 마친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줌으로서 그 선물을 받은 자의 특징은 뭐냐? ‘우리는 마귀한테 사로잡혔던 자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이에요. 기도하다가 뜨겁다, 그게 성령이 아니고요. 남을 용서하면, 이게 성령이 아니고 바르게살기, 이게 성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죄인은 죄인이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된다? 골라가면서 직장 구하고 골라 가면서 사는 게 아니고 죄인 된다면 어떤 인생이라도 내가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몸이 아프든지 시집을 못 가든지 중소기업에 취업해서 한 오년 동안 따박따박 월급 나오다가 오년 뒤에는 소식 없이 체불해도 노동부에 진정해도 소용없고, 부도내고 사장은 해외 도피하는 그런 사태 얼마나 많습니까?
더러운 세상, 같이 더러운 걸 몰랐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단지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경우라고 흔쾌히 수용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왜? 그게 선물이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서글픈 환경이 선물이에요. ‘주여 이러다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럼 지금까지 살아온 건 뭔데? 네 덕이었어? 선물 아니었었어?’ 새벽마다 문간에 새벽배송 오듯이 하루치의 목숨을 우리에게 늘 선물로 주고 있었던 거예요.
따라서 무엇을 먹든지 입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입는다는 말은 여기서 이백만원 이상의 원피스도 포함되는. 무엇을 타든지 간에 괜찮아요. 주께서 주신 선물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도 많이 해서 얻은 선물로 여기지 마시고.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누구에 대해서 같은 죄인에 대해서 말발에 대해서 기죽을 필요가 없지요. 그게 유령들의 만남이에요. 둘 다 유령이라. 귀신이 귀신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약간의 예쁜 귀신은 있지요. 예쁜 귀신도 귀신이고, 키 작은 귀신, 키 큰 귀신이고 일단은 귀신은 귀신이에요. 문제는 주님께 사로잡혔느냐, 아니면 혼자서 나대고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사로잡혔다는 말은 전쟁에 의해서 성사된 통로가 마련된 거예요. 이게 뭐냐?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다른 길은 없나니.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시편 47편 8절에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그다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9절) 방패, 방패가 어디 쓰는 물건입니까? 뭐할 때? 전쟁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쟁은 끝까지 전쟁 중에 있습니다. 이 땅에선 승리했기 때문에 승리한 전쟁이 주어지고 있어요. 그게 바로 재림이십니다. 다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제는 완전히 파멸하기 위해서 그때는 왕으로 등극해요. 왕으로 나타납니다. 등극할 때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무슨 소리가 들린다? 나팔 소리가 들린다.
끝으로 나팔 소리 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6장 20절요.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뭘 붑니까? 나팔 소리. 그러니까 이게 히브리서에 나오는 모형이고 은유고 비유인 거예요. 하늘에서 위에서 하는 나팔 소리, 주님이 전쟁 중이라는 것을 그대로 베껴서 지상의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이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역할을 한 겁니다. 백성이기 때문에 나팔을 부는 거예요. 나팔 소리의 의미를 무슨 뜻인지 아는 거예요. 전쟁 중이란 사실, 나팔은 전쟁 중이란 거예요.
그 전쟁 중에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는 데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기생 라합이에요. 그래서 기생 라합은 주님의 전쟁의 전리품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이 그 말이거든요. 이스라엘 백성 제쳐놓고 기생 라합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게 되지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기생 라합의 남편 이름이 뭐냐 하면 살몬이에요.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다.
그러니 사로잡힘을 모르는 자 중심으로 이 땅에서 주께서 전쟁 중인 것을 내가 증거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로잡힌 자는 그럼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냐? 아니 이미 성공리에 마쳤어요. 성공리에 마쳤다는 증거가 뭐냐? 피입니다. 모든 것을 용서받은 피. 그래서 했잖아요. 안에 피가 있지 아니하면 자꾸 딴 성공을 사적인 성공을 꿍꿍이를 기대한다고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실패입니다. 그 실패를 즐겨야 돼요. 무슨 일을 해도 예를 들면 어디 투자를 했는데 백 배 이익이었다. 그거 실패거든요. 운동 좀 하니까 아픈 게 없어졌다. 실패한 거예요. 세상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실패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에 고마워하라고. 단독행위에 고마워하라고 우리의 인생을 실패와 실패의 연속인데 그 실패를 통해서 박수 치고 감사하면서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모든 일을 끝냈습니다’라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한 게 아니라 주께서 이런 식으로 일했음을 왜 우리는 평소에 그걸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놓치고 있었습니까? 사적인 일에 몰두해서 자신의 성공을 꿈꾸니까 그것이 복음을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늘 자신을 돌아보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