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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1113a 부산강의 : [시편]63(47:5)-주님의 폭력성자유게시판시편

20231113a 부산강의 : [시편]63(47:5)-주님의 폭력성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47편 해봅시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손바닥을 칠만큼 하나님이 좋다. 어떤 경우에 손바닥을 칠만큼 하나님이 좋으냐? 그것은 시편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신 경우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는데 지상에 내려옵니다. 지상에 내려오면 임금, 또는 왕으로 오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상에 임금, 왕으로 오실 때에 여기서 필히 일어나는 것은 뭐냐? 폭력이 동원돼요. 곱게 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는데 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은, 폭력이라 하는 것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는 분이 왕으로 오신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해서 인간 속에 함께 있으면서도 안 보이는 방식으로 지상에 왕으로 군림한 게 있어요. 안 보이는 방식인데. 지상에 임금, 왕이 있지만 그 배후에 왕이 또 있는 거예요.

인간들의 지도자 그 배후에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배후자 있습니다. 배후세력이 있어요. 모든 인간보다 왕보다 더 세죠. 인간세계에 왕 중의 왕이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기 오고, 여기서 누가 오느냐 하면 지상의 왕. 지상의 왕은 신약성경에선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이게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에도 나오고요. 이 세상에 신이, 그 대목을 봅시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뭐라고 돼 있는지.

고린도후서 4장에 이 세상 신이 하는 일이 있어요. 그냥 가만 놀고 있는 신은 아닙니다. 나름 바빠요. 바쁜데 여기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세상 신이 행위의 주체자가 돼요. 행위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란 뜻이에요. 중요합니다. 인간이 행동하고 뭘 해도 자기가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아니고 인간의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주체는 따로 있는 겁니다.

따로 있어서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러나 교회나 성당이나 안 믿는 노인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그들은, ‘나 그런 것 믿기 싫어. 관심 없어. 나 그쪽 취미가 아니야. 골치 아파.’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온다 할지라도 그 반응을 무시하시고 그 배후를 생각해보세요. ‘나는 다 알고 있어.’ 복음에 관심 없다는 것은 그 개인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든지 간에 그 배후에 작용하는 힘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한다.”에요.

그러면 여기서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질문을 던진다면 인간의 마음은 누가 주관한다는 거예요? ‘이 세상 신’ 인간의 마음은 내가 주관하는 게 아닙니다.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내가 주관하는 게 아닙니다.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그것을 고민하는 이유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실수를 줄이고 오류를 줄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철저하게 자기가 실수를 줄이고 싶은 것은 이건 상식적으로 중요한 참 좋은 건데요. 실수와 오류에 탄식하고 후회하고 그것을 가슴 치면서 탄식하는 이유는 울지 않고 살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서 울지 않으면서 살고 싶은 거예요. 웃으면서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여기서 제가 법칙 하나 드리겠습니다. 웃으면서 사는 사람 지옥 가고, 울면서 사는 사람 천국 가요. 왜 그러냐 하면 운다는 것은 실수하고 실패를 연속했다는 거예요. 실수의 연속이 천국으로 이끌고, 성공의 연속이 지옥으로 이끄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라고. 온 세상 전체가 어떻게 하면 완벽한 인생이 될까, 노심초사하는 가운데서 철저하게 세상 신에 노예가 돼 갑니다. 마귀의 종이 돼 가는 거예요. 복음을 거부하고 복음 대신에 괜찮은 나를 영접하려고 해요. 복음이 뭐냐 하면, 성도는 알고 있죠. 실수와 오류를 없애버리면 이게 웃음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실수, 오류를 안 하려고 하는 사람 속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피가 없어요. 그 마음속에 피가 없기 때문에 실수, 오류를 줄이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라는 것은 인간이 협상할 대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다 이루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그게 표준으로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온이 있거든요. 47편에 시온과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 나오거든요. 아브라함 나오고, 4절에 야곱의 영화라고 돼 있고, 9절에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오늘 핵심 단어로 이렇게 됩니다. 성도는 상속된 존재에요. 상속이라는 것은 성경용어로 바꾸면 기업으로 물려받은 존재. 기업으로 물려받았다는 것은 그 특이한 씨앗이 아브라함언약, 야곱언약을 통해서 성공이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다는 거예요. 그 증거물이 뭐냐? 성도의 출현이에요. 그러니 성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도, 천국 백성은 없어요. 없는데 생겼으니까 이게 폭력인 거예요. 성도의 존재 자체가 폭력이에요.

‘너 뭐냐, 너 누구냐?’ 이게 폭력이라니까요. “왜 우리와 다른데? 뭐야? 너 어디서 온 거야?” “우리 집에서 왔는데, 버스 타고 왔는데.” “너희 집이 어디야?” ‘너희 집이 어디야’란 이 말은 뭐냐 하면 ‘소속’이 어디냐는 거예요. 소속의 반대말은 ‘자아’에요. 자아를 우리말로 하면 ‘나’에요. ‘나는 이렇다’ 에요. 모든 인간의 특징은 ‘나는 이렇다’를 잘 구축하기 위해서 오류와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아라 하는 것은 오늘 여러분들이 어려워도 할 수 없다. 어려워도 밀어붙이는 겁니다. 여기까지 아시겠지요. 자아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자아는 고정된 의미에서 나와요. 고정된 의미가 자아를 형성하는 겁니다. 고정된 의미는 실제가 아니고 본인 상상의 세계에요. 고정된 의미는 그럼 어디서 나왔느냐? 타인과의 비교에서. 남 가진 것과 비교에서 나온 겁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유비’라 해요. 이거는 비교해서 비스무리, 유사성.

교회 처음 나왔을 때에 찬송 부르거나 분위기 파악할 때 곁눈질하잖아요. 옆 사람들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기도하는지, 예배드릴 때 언제 시점에 타이밍 맞춰 일어서야 될지. 그게 뭐냐 하면 유사성으로 하여금 교회 처음 와서 모호한 자아가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비스무리 섞여서 섞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여러분, 질문할게요. 파리에 가면 에펠탑 있지요. 에펠탑 근처에 기념물 있는데 기념물 된 에펠탑과 진짜 에펠탑의 차이는 뭡니까? 어떤 관계지요? 그걸 유비관계. 유사한 관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어린애가 태어나서 자아가 빨리 구축하는 방법은 주변에 만나는 식구들로부터 유사성을 빨리 갖추는 거예요. 유사성을 갖추는 방법은 뭐냐 하면 그 부모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되면 비슷하게 되면 칭찬이 따르고 상도 받고, 만약에 틀리게 되면 이거 누구 자식이야, 하고 맴매 막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미 자아의 구성은 환경에서 되는 거예요. 그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 환경이 단일화되지 않지요. 그걸 연합 환경이라 해요. 환경이 하이브리드에요. 환경이 여러 가지 잡것들이 다 섞여있는 환경이에요. 연합 환경, 이걸 성경적 용어로 바꾸면 이렇게 합니다. ‘이 세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잡것들의 세대. 여기 눈치 봐야 되고 누구 눈치 봐야 되고. 자기가 소속된 단체의 눈치를 봐야 되는 겁니다.

사두개인은 사두개인들의 눈치를 보고요. 사두개인은 고위 제사장, 고위 귀족들 집합체에요. 그다음에 바리새인은 바리새인들끼리 하나의 연합체를 이룹니다. 바리새인들은 중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바리새인이라 해요. 저 밑에는 하층이고. 중간 계층이라 숫자가 많다는 게 아니고, 율법에 대해서 따로 어떤 계파를 만드는 거예요. 그다음에 서기관들은 바리새인에 속해요. 장로들은 어디 속하느냐? 사두개인에 속하고.

그러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의 연합체를 이뤄서 뭘 했습니까? 무슨 일을 도모했지요? 예수님을 죽였지요. 이건 뭡니까? 폭력을 가했지요. 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육신이 되신 하나님에게 폭력을 가하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그들에게 폭력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민중들이 일어나고 호산나 이야기하니까 자기들의 안정성에 대한 위협 인물로 본 겁니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지상에 와서 임금이 된다는 말은 그냥 올 수 없어요. 폭력사태가 유발됩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거죠. 예수님이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 거죠. 그럴 때 지상의 입장에서 보세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 편은 몇 명이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그것이 복음의 핵심요소로 등장합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

예수님의 단독행위에요. 이 단독행위의 내용을 집약한 걸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에요. 내 이름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은, 내 이름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이름이 끼어들 수 있다, 없다? 끼어들 수 없어요. 그래서 아무도 구원받지를 못하는 거예요. 오직 예수님만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한다는 것은 전부 다 사기에 해당됩니다. 반드시 옮겨져야 돼요. 내가 구원받지 못해요.

주의 이름은 주님의 존재를 이야기하거든요. 하늘에서 온 존재. 내 이름은 어디 존재? 이 연합 환경 속에 있는 거기서 할당한 이름이에요. 부모가 나한테 지어준 이름은 구원받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이란 건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디 있느냐? 구원은 예수님의 이름에 구원이 있어요. 그래서 나의 이름이 뭐로 바뀌어야 구원이 된다? 주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폭력이 일어나야 돼요. 내가 나에 대한 폭력이 일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거거든요.

내가 성공적인 존재가 되게 되면 이거는 주의 이름에 대한 폭력을 가하게 되는 거예요. 배후의 세상 신이 작동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자꾸 내 이름이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내가 잘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 때는 본인만 잘 되면 돼요. 집에 부도나고 이사 가도 그 어린애는 자기가 놀던 장난감을 포기를 못합니다. 부모가, “우리 망해서 이사 가는데 그 장난감 좀 버리고 가지?” “싫어.” “어떻게 너는 집안도 모르고 너밖에 모르느냐?” 그게 어린애니까.

어린애가 커가면서 뭘 아느냐? 소속을 아는 거예요. ‘아 우리 집안 망했다는 건 곧 내가 망했다는 것이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잡다한 연합 환경에 자기 자신을 거기다가 집어던지지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이 잘 되는 것이 나한테 잘 되는 것이란 인식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바로 서서히 인간은 이 세상과 한 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자아가 뭐로 바뀌느냐? 자아가 주체로 바뀌는 거예요. 내가 속해 있는 그 단체, 조직에 대해서 인정받는 것을 주체라 해요. 나 혼자 상상하는 것을 ‘자아’라 하고, 내 주변의 타인들이 나를 뭐라고 하는데 있어서 고개 숙이는 걸 ‘주체’라 합니다. 누가 와서 내 이름을 불러줄 때 ‘예’하고 달려갈 때 그것이 바로 예라고 굴복할 때 그 사람의 소속입니다.

‘신분증 봅시다. 어디 근무하세요?’ 그것이 나를 살려요. 우린 거기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친숙해지고 그것에 길들여진 거예요. 평생을 살면서. 너는 어디 가도 우리 집안 망신시키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배우는 거예요. 집안이 우릴 구원합니까? 아니지요. 당신 어디 소속이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정통), 그게 우릴 구원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너 종교가 무엇인가? 종교 알아서 뭐 하는데? 종교가 구원하는 게 아니네요. 왜냐하면 종교 자체가 마귀가 만든 거예요. 신천지뿐만 아니고 구천지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사람이 나의 주체 안에 자아가 들어있거든요. 자아를 살리기 위해서 주체가 되기로 마음먹었단 말이죠. 전에 어릴 땐 철딱서니 없어서 나만 고집부리다가 ‘이게 고집부릴 일이 아니구나. 남한테 굴복해야 돈 한 푼이라고 챙기는 거구나.’

시편 47편을 여러분 보시면서 대조 돼야 돼요. 뭐와 대조 되느냐 하면 시편 47편 여기 있다 칩시다. 이게 시편 47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냥 ‘말씀이다. 배워야 공부해야지. 공부하면 나한테 은혜 되고 구원받겠지’ 이렇게 다가서면 안 돼요. 시편 47편을 다가설 때는 반드시 어떤 게 전제돼야 하느냐 하면, ‘나는 돈 없이는 못 산다’ 바로 이 존재성을 가지고 시편 47편을 봐야 돼요.

그러면 시편 47편 1절을 보면서,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면서 즐겁게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라’ 할 때 진정 자기에게 물어봐야 돼요. 하나님 알아서 손바닥 쳤는지, 돈 생겨서 쳤는지 어느 게 손뼉 소리가 크던가요? 돈 생길 때 이거는……. 그래서 어제 주일 날 설교했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용의자로 세우지 않고 성경 해석한다고요. 자기를 법정에 세우지 않고 성경 해석한다고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올 때 피를 머금고 폭력을 이미 유도하고 유발하는 조건으로 오셨거든요. 왜냐? 보이지 않는 마귀가 있으니까요. 하나님도 안 보여요, 인간에. 안 보이는데 ‘나 보일게 너도 보여라’ 이렇게 된 거예요. 주님이 육신이 됨으로써 보이는 하나님이 되어버린 거예요. 보이는 하나님과 보이는 악마들 사이에서 폭력, 피가 터지는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그래서 시편 47편은 이게 말씀으로 가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에요. 가만 머물러 있다고 여긴 것이 바로 원어연구해서 진리 파악했다는 그 작자들이 말씀이 가만있는 줄 알고 있어요. 마치 횟감 해놓고, ‘기다려 봐. 회 쳐서 맛있게 요리해줄게.’ 이런 게 아니거든요. 그 도마 위에 있는 고기가 나를 때린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횟감 고기한테 귀때기 맞아본 적 있습니까? ‘이게 어디 칼 들고, 갈치 맛을 볼래?’ 하고 갈치가 나를 때린다 이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시편47편이 바로 우리가 무슨 은혜가 들어있는지 찾아오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대들지요. ‘시험 들지 말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네가 방해하고 있잖아’라는 음성이 시편 47편에서 먼저 선방 때리면서 나타나는 거예요. 네가 평소에 말씀 보겠다는 의도가 뭐냐? 또 방해하려고? 네가 말씀 볼 때마다 방해하고 있어. 네 존재 자체가 복음을 가로막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파악하면 되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전쟁은 뭐냐? 투쟁이란 것은 예수님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그 약속을 망치로 깨보면 그 안의 시럽이 들어있어서 그것이 온 세상에 시간이 전개됨에 따라서 같이 펼쳐지죠. 그러니까 모든 시대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투쟁사에요. 인류사가.

그런 걸 잘 보여주는 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중에 바로 사사기 같은 경우에 사사기의 특징은 하나님의 전쟁의 심오함을 보여주는 데, 사사기 여러분 다 아시죠. 사사기에 적이 없어요. 적이 보이질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적이 있어요. 아직까지 토착민들이 안 쫓겨나서 이스라엘 가는데 달려들고 이런 게 있어요. 그러나 사사기는 이미 적들이 그 동네에 없어요. 없는데 이스라엘이 적들을 초청해요. 같이 놀자고.

‘이제 약속의 땅이 우리 동네거든. 와서 한바탕 놀아보세.’ 판소리하는 사람도 오고 추임새 넣는 사람도 오고 고수도 와서, ‘어허 한바탕 놀아보는 데’ 하고 마당놀이를 만들어버려요. 왜? 여호와가 심심하거든요. 여호와에 대해서 박수 치고 감사할 게 없어요. 잡다함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애굽에 있던 그 본성이 그리워서 여기다가 잡다함이 왔는데 이방인을 불러놓고 보니까 그들이 이스라엘을 구박하는 거예요. 구박하는 그 틈새에서 ‘여호와 살려주세요’ 하는 식으로 비는 것의 연속이 바로 사사기에요.

그렇다면 사사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없는데 무엇이 오는가? 구원이 없는데 틈이 생기면 틈에서 나온다. 틈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원래 하나님이 지정한 언약의 본질이 있잖아요. 언약백성은 이러해야 된다. 언약백성과 자아가 복음을 방해하고 유혹받은 내가 세상 것에서 주체가 되고자 하는 그 마당놀이 사이에서 그 틈이 벌어지면서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복음이 나오는 전쟁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고 이스라엘 백성은 틈을 제시하는 하나의 도구로 쓰여지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성도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과 하나가 되어 설치다가 성도기 때문에 조패는 거예요. 성도기 때문에 조팰 때 성도는 수시로 잊어버리는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호소를 하게 돼 있어요. 거기서 십자가 복음이 성도의 삶을 통해서 분출되게 돼 있어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아주 적절한 예가 되지요. 물어보는 식으로 볼게요. 사마리아 여인이 집에 물이 떨어져서 근처 우물가에 물 길러 왔습니다. 묻습니다. 나쁜 짓입니까, 옳은 짓입니까? 이게 나쁜 짓도 아니고 옳은 짓도 아니고 일상의 정상적인 거죠. 정상적이라 하는 것은 틈이 매워져 있는 틈이 없는 거예요. 왜? 남들 다 그래 사니까. 우리는 서로 모방하고 베끼는 식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에 저쪽에 문제없으면 나도 문제없고 비스무리하면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먼저 틈을 내기 위해서 시비조로 하지요. “그 물 먹는다고 네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게 아니야. 또 목마를 거야.” 시비 건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여자도 가만있지 않지요. “무슨 그런 물이 있습니까? 또 길러 오고, 길러 오고. 이게 인생사지. 한 번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런 물이 어디 있습니까?” 주께서 “내가 그런 우물 만들어줘?” 이렇게 된 거예요. “아이고, 고맙지요.”

“고마워? 그럼 네 목마른 것 이야기해줄게. 지난 날 남자 다섯 명 있었잖아.” 과거사를 확 들춰내죠. 여기서 추정인데 일단 그 여자는 예뻤다는 게 사실로 드러나야 돼요.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여자는 뭐한 여자다? ‘나는 핫한 여자다.’ 예쁜 여자라는 자아를 감추고 물 길러 오는 주체자로 살아온 거예요. 자아와 주체를 겸하는 데 그 사이에 틈을 내버린 거예요.

남편을 데려오라 하니까 숨기는 방법은 거짓말이죠. “남편이 없나이다.” 주께서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말이, “네가 바른 말을 했구나.” 이게 더 무서운 말이에요. “그래 맞아. 다섯 명은 다 지나간 남자들이었고 지금 사귀는 것은 여섯 번째잖아.” 여자가 찔렸지요. 찔리니까 반응적으로 예수님을 자기의 타자로 보는 거예요.

인간은 타자의 평가에 오류와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움찔하면서 빨리 메우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행동이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내 죄는 우리 동네에서는 그리심 산에 주님께 예배드리면 죄 사함이 됩니다, 라고 자기 종교성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의 종교라 하는 것은 자기의 허물을 자기 방식으로 메움으로써 내 구원을 챙기겠다는 거예요. 남이 뭐라 하던 나는 무조건 천국 가야겠다, 라고 시도하는 게 종교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된다는 데 어느 쪽이 나를 구원하는 방식이냐고 묻지요. 주께서는 삐,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구원이 없다. 인간 어디에도 구원이 없는 거예요. ‘구원이 없다’잖아요. 구원이 없을 때 주께서 ‘없다’를 언약의 분으로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로 오셔서 구원이 없는 인간에게 메시아와 만나면 여기서 뭐냐 하면 그 사람 자체를 ‘너 구원 없어. 저리 가’가 아니라 그 여인 마음에다 틈을 내어서 없는데 틈이 찢어지면서 예수님의 성과가 여기서 분출되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어디서 일어난다?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기쁨이고 슬픔이고 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47편에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한다고 해서 교회에서 이걸 인위적으로 흉내 내서 손바닥 불나게 치고, 기쁨으로 웃읍시다, 해서 웃으면서 정신 치료한다는 미친 사람 비슷한 것 있잖아요. 아하하하하, 돈 주고 가서 인간의 스트레스 풀고 우울증 치료한다는 그런 데서.

그게 바로 유비에요. 유사, 가짜란 뜻이에요. 진짜가 아니고. 진짜는 모르겠고 그냥 서로서로 베낀 모형에 불과한 거예요. 이건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게 아닙니다. 모방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모방은 교육이죠. 모방은 세뇌시키는 거예요. 가스라이팅하는 겁니다. 모방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니고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건 백 프로 가짜인 거예요. 성령이 불 때는 임의로 부는 거예요. 바람을 누가 잡아요.

인간이 자기가 뭘 잡아서 하겠다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단독행위기 때문에.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떻게 나라는 것, 자아, 다시 말해서 내 이름. 내 이름이 뭐로 바뀐다? 주의 이름으로 바뀌는가? 지금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이것 안 바뀌면, 웃으면서 지옥 가야지요 뭐. 시편에 보면 웃으면서 지옥 가는 사람들 나와 있어요. 어떻게 평생을 살면서 환란도 없느냐. 죽을 때로 건강하고. 그래서 내가 미끄러질 뻔했다. 시험 들어서.

시험이란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시험에 의도가 있어요. 시험하는 악마의 의도가 뭐냐 하면 의도가 복음을 방해하는 거예요. 아까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왔지요. 복음의 광채를 방해하는 거예요. 어떤 방식으로든 방해하는 이게 시험든 거예요. 방해하는 방법은 자아에 대해서 관심 두는 거예요. 집중하는 것. ‘내 눈을 바라봐. 내 눈을 바라봐.’ 공중부양까지 하면서 허경영이. 계속해서 집중하게 하는 거예요.

집중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집중한다? 아니에요. 집중하는 나를 집중하게 돼 있어요. 이게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교육방식이에요. 그걸 교회도 써먹잖아요. ‘주님을 바라봐.’ 뭡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게 아니에요. 주님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스스로 가짜를 만드는 거예요. 거기에 뭐가 동원되는가? 성경 구절들이 동원되는 거예요. 손바닥 치고 박수 치고. ‘나 구원받겠다.’ 십만 명 모아놓고 지는 헬기 타고 내려오고, 이만희는.

그것 한 마디로 귀신 들렸거든요. 집단 십만 명이. 그것보다 숫자 더 많은 귀신들린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무슬림들이에요. ‘신은 위대하다.’ 미친 거예요. 신이 뭘 위대해요? 신은 초라해요.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분이 신이에요. 왜? 우리 속에 우리 마음에 마귀가 들어있기 때문에 마귀가 있는 신은 위대한 신이에요.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어요. 이사야 53장에. 심지어 제자들도 귀히 여기지 않고 가룟 유다도 귀히 여기지 않았어요. 불가능성이에요, 이거는.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불가능성, 기적입니다.

기적이란 예수 믿는 것이 기적이다. 맞는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좀 더 내용을 깊이 하기 위해서 풀어보면, 나를 고려하지 않는 게 기적이에요. 내 실수나 내 잘못에 대해서 내가 평가하고 나에 대해서 탓하지 않는 게 기적이에요. 더 나아가면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게 기적이에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남이 만들었기 때문에, 남의 잔소리가 만들었기 때문에, 남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나 되게 했기 때문에.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기적이죠.

그러면 남한테 신경 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그냥 하던 일이나 하세요. 이게 움직임입니다.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냥 내게 주어진 움직임이, 내가 지시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환경에 따라서 하게 했단 말이죠. 이게 돈을 버는 일인지 놀러가는 일인지 상관없어요. 크루즈 여행인지 골프 치는 일인지 관계없어요. 어떤 일인지 간에 무엇을 하든지 주께 영광으로 하라.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금지하고 이걸 안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시킨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게 뭐가 되던 주께 영광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잘해야지’가 아니라 하는 일 자체가 감사가 되는 거예요. 완벽이 아니에요. 완벽이 아니고 실수가 아니고 완벽, 실수 차원이 아니고 그냥 감사되는 일, 고마운 일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이 마음을 누가 장악하는가?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장악하면 되지요. 그게 바로 언약이 들어오면 되는데 우리 마음속에 누가 있다 했습니까? 마귀가 있지요. 여기서 폭력사태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마귀가 들어있다는 뜻이 뭐냐 하면 ‘내가 곧 왕이다’란 뜻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소비자가 왕이란 것과 같은 건데 내가 곧 왕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가 왕이에요. 왕인데 예수님과 우연히 우물가에서 만나지 않는 한 자기는 이것이 곧 자기라고 생각한 거죠.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내가 구원받지 못할 존재란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구원받지 못할 이 존재를 주께선 그대로 가져가서 뭐냐? 구원된 존재로 전환시키면서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구원받지 못한 존재를 버리는 게 아니에요. 이게 다 주님이 하신 일을 위해서 쓸모 있게 사용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나의 육신의 재설정, 설정을 다시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없어지지 않잖아? 아니죠. 구원받지 못한 존재의 특징은 나, 자아 중심이에요. 그런데 구원받고 난 뒤에 재설정된 주님이 다루는 육신은 ‘나’가 아니고 ‘소속’이 되죠. 누구 소속에? 새로운 나의 소속. 그 새로운 나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바뀐 주의 이름에 소속된 나가 돼요. 전에는 소속이 내가 나한테 소속됐어요. 우린 마귀를 알 수 없으니까, 내가 왕이니까. ‘내가 왕이 될 상인가요?’

내가 왕이니까 나한테 소속되는 거예요. 모든 의미는 결국 나한테 돌아와요. 이게 얼마나 옳은지 그른지, 가치 있느냐, 가치 없느냐의 판단은 ‘내게 이익이냐, 아니냐’로 모든 것이 종결돼요. 의미가 거기서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뭐냐? 자아는 고정된 의미라는 거예요. 모든 의미는 나한테 와야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고정된 의미에요. 그걸 상상의 세계라 하는 거예요.

언약이 상속돼야 된다는 그것이 47편 계속 봅시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2절) 그 임금이 어떤 임금이냐? 8절에 봅시다.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아까 시온이 여기 나온다 했지요. 시온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를 시온으로 적어놓은 거예요. 거룩한 보좌를 지금 성경에서 뭐라고 한다 했어요? 시온이라 했어요. 시온을 다른 말로 예루살렘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무한이 이 안에 공간으로 축소되는 겁니다. 축소를 다른 말로 하면 집약되는 거예요. 이제부터 좀 어려운 것 나갑니다. 47편 6절, 여호와께서 뭐 중에 올라가신다? 5절에,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 가시도다” ‘나팔 소리’요. 지금 언약은 상속되는 거예요. 근데 그 나팔 소리까지 상속되는 겁니다. 나팔 소리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출애굽기 19장 19절에 시내 산에서 나타난 거예요.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그게 어디까지 상속되느냐 하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예수님 재림하실 때 나팔 소리와 동반해서 나오게 돼 있어요(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예수님 재림 왜 하십니까? 이걸 여러분들이 예수님 재림하신다는 이걸 마땅히 기뻐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잖아요. 의식적으로. 그런데 정말 예수님이 다시 오는 걸 기뻐할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땅이 망해도 진짜 희망이 일체 여지가 없이 망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내가 올게’라는 말을 손바닥 치고 기뻐할 사람은 망했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망한 자에게만 재림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좀 살만하면 ‘재림, 오셔야지요’ 해놓고, ‘근데 굳이 오실 이유가 없는데? 한 달 뒤에 딸 결혼식 있는데 앞으로 열흘 후에 와버리면 결혼식은 어떻게 되는데? 진짜 깽판 놓을 거예요, 내 딸 결혼식을?’

주님 나타남 외에 다른 기쁨의 요소가 다 사라진 자, 상실된 자에게만 기쁨이 그 사람 마음속에 재림이 살아 있는 겁니다. 어떤 희망이란 게 남아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희망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는가? 희망이란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상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 쪽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불가능성이기 때문에 자꾸 거기다가 기대를 걸면 안 돼요.

여기서 시온이 예루살렘이 되는데 왜 예루살렘과 시온이 연관성이 있느냐? 시편 76편에 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제가 평소에 전에부터 의미 있게 둔 구절이에요. 시편 76편 2절, “그 장막이 또한” 어디에 있음이라? 살렘에 있다 했지요. 이 살렘이 지상에 없는 처소입니다. 그럼 어디 있느냐? 창세기 14장에 보면 멜기세덱이 살던 동네에요.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멜기세덱 존재 자체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있는 존재가 멜기세덱이에요. 이게 굉장히 어려워서 히브리서 6장에 보면요 그냥 초보들은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모르게 돼 있다고 된 거예요. 단단한 것을 먹어야 멜기세덱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멜기세덱이란 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멜기세덱은 없어요.

없는데 있다는 걸 어떻게 하는가? 거기서 맹세가 나와요. 히브리서 6장, 7장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맹세는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을 배제하는 맹세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맹세하는 걸 거기서 맹세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는데 그건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만 거짓말 안 해요. 인간을 배제하는 거예요.

왜 인간을 배제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전부 다 거짓말로 들리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와 생명나무 어떻게 됐어요? 이미 벌어져 있지요, 관계가 끊어져 있지요. 끊어진 상태에서 한쪽이 이야기하면 한쪽은 거짓말로 들리는 거예요. ‘선악으로 우리가 납득되는 이야기를 해 달라.’ 이게 인간들이 신에게 하는 요구조건이에요.

‘신은 위대하시다’ 이런 거죠. 신은 초라한데. 이게 왜냐하면 생명나무는 생소한 거예요. 누구한데? 선악을 아는 모든 이에게 윤리, 도덕과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 지혜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 생명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어느 정도 생소하냐? 10분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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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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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