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9장 30절 (큰 구원) 231024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9장 30절 (큰 구원) 231024a-이근호 목사
오늘은 19장 28절부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그렇게 시작하는 그 대목입니다.
예수님이 이 나귀 타고 오시는 이 대목은 큰 핵심으로 보면 이겁니다. 이별입니다. 인간과 헤어지는 단계. 헤어질 때 참 이상하게 헤어지지요. 나귀타고 헤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헤어지는 것과 인간들이 예수님을 쳐죽이는 것과 다른 문제에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의도적으로 보내는 거고 예수님이 나귀 타고 인간과 헤어지는 것은 주님의 의지가 강렬한 거에요.
내쫓아보내느냐 스스로 인간과 분리되느냐. 그 두 가지 양상을 예수님을 통해서 다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과 헤어지겠다는 뜻은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은요 인간이 스스로 우수함을 겨냥하며 사는 거에요. 자기 존재를 우수한 존재로 만드는데 인간들은 환장을 했습니다. 주의 뜻은 뭐냐 하면은 이것과 반대겠지요. 어떻게 반대냐 하면은 내 목숨을 드릴 곳이 어디입니까? 이게 반대가 돼요. 사람은 이 내 목숨을 드릴 정도로 가치 있는 곳에 제 목숨을 좀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식의 인간, 이런 인간은 찾아보기 힘들죠. 대부분이 반대에요. 제가 뭘하면 지금보다 더 우수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거기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인간과 이별할 수밖에 없어요. 말이 통하지를 않으니까요.
그러면 오셔서 그냥 돌아가시지 왜 나귀는 왜 끌고 가시느냐. 이게 인간들이 이미 우수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늘나라 들어갈 수는 없어요. 이걸 생각하면 딱 정답이에요. 벽. 하늘나라와 인간 사이에 예수님 자신이 벽이 되는 거에요. 벽의 구성 요소가 뭐냐? 둘로 되어있어요. 예수님의 몸과 그리고 인간의 몸. 이걸로 믹스해서 벽을 만들어버립니다.
제일 쉬운 예가 데이비드 카퍼필드 마술사가 만리장성을 뚫었어요. 만리장성 있잖아요. 그러면 카메라가 있고 카퍼필드가 여기 서 있고 그 뒤에 보니까 저쪽 카메라 보니까 막 벽 속에 들어가는 거에요. 보니까 벽을 뚫고 나온 거에요. 대단한 마술이었어요. 자유의 여신상 날리는 것보다 못지않게 큰 대단한 마술을 했는데 나중에는 밝혀졌지요. 카메라 트릭이라는 것. 어떤 타이거 마스크 쓴 사람이 그대로 흉내내가지고 이게 마술계의 허상이라고 보여주니까 사람들이 아! 그렇게 통과했구나. 사실은 인간의 몸이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만리장성을.
물리적으로 안 따져도 아시겠지요? 에너지 밀도 차 때문에 인간의 몸은 만리장성의 분자구조를 뚫을 수 없는 거에요. 인간의 몸이 내부적으로 예수님의 몸과 합체하거나 뚫고 지나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몸이 온 것은 마크하기 위해서 천국에 그 몸 가지고 오지 못한다고 마크하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인간들은 율법을 가지고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천국에 돌진합니다. 가자! 죽어서 좋은데 가자! 예수님께서 아서라 말아라 니가 왜 이러냐. 내 몸이나 뚫어봐라. 내 몸 뚫으면 천국 간다. 뚫립니까? 예수님의 몸이? 뚫리기는 커녕 죽이잖아요.
방금 한 이야기가 쉽게 하면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지옥 간 부자가 제안을 하지요. 이미 낙원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지금 세상에 아직 죽지 않은 동생 5명이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나사로 부자의 생각이에요. 이 부자의 생각을 우리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이유가 오늘날 교인들의 생각하고 똑같아요. 교인들의 생각. 간증 집회 있잖아요. 기적. 똑같습니다. 획기적인 기적이 나타나고 두 번째 그 기적에 도달하는 방법을 주시면 우리가 그 방법을 따라서 해서 그 놀라운 기적 속으로 들어갈 용의가 되어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제 마음이 얼마나 가상합니까? 제 마음이.
아까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마음 가지면 그 사람이 우수해지지요. 마음이. 착해지고 고결해지겠지요. 인간은 지금 수준보다 제가 더 진실 되고 착실하고 착해지고 훌륭한 그것을 인간들은 얼마든지 상상해내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 본성은 어느 인간도 다 갖고 있습니다. 일등하면 좋고 꼴찌하면 싫고. 우수함이 딱 드러나니까요. 그럼 그 다음에 찾는 것은 너는 어떻게 공부해서 100점 받았어? 이게 탁 나오게 되어있어요. 수학 100점 맞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인간은 간주하고 싶어 해요. 수학도 100점 맞는데 천국도 방법 알고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 방법이 뭐냐? 아 사람들은 죽어서 살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자 이야기입니다. 제 이야기 아니고 죽어서 살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어서 다시 살아오게 되면 내가 천국 가봤거든. 가보니 이렇거든 그러니까 너희들 정신 차려. 안 가봤으니까 네가 그냥 아무렇게 살아가는데 내가 가보니까 너한테 이야기하는 건데 후회하기 전에 하나님 믿고 천국 와. 이런 말을 동생들이 아직 안 죽었으니까 죽은 나사로가 있으니까 해달라는 거에요. 어떻습니까? 이 부자의 아이디어가. 이 제안이. 사람들은 그건 아니지. 우리는 무조건 아니지. 무조건 아니지 하지 말고 이것까지 생각해야 돼요. 저게 지옥 갈만한 요소구나 이렇게 봐야 돼요. 이건 아니지 정도가 아니고 소극적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아! 저래서 지옥 가는구나. 저래서.
그러면 아브라함이 제시한 내용이 뭐냐 하면은 30절 보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절에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비교할 거리가 등장했지요. 두 개가 서로 비교됩니다. 한쪽은 뭐냐 하면은 부자가 제안한 거에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이 방법이냐? 죽은 자가 살아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이 간증을 듣고 거기서 동의하고 신뢰하고 믿고 지적으로 의지적으로 일치를 시키면 천국 가느냐 이 방법과 아브라함이 제시하는 것은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아니하면 소용없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 아브라함의 말에 의하면 이 논리에 의하면 모세와 선지자 글과 죽은데서 살리는 이걸 플러스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이게 없다는 거에요. 없다는 말은 이걸 쪼갤 수 있는 안목이 있느냐를 묻는 거에요 이걸. 그러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서 꿈에 계시 줬다 이렇게 할 때 정말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어디서 가짜가 들이대!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이렇게.
아후라 마즈다 이런 신이 있어요. 조로아스터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신입니다. 년도가 불확실한데 BC 2000-1000년 사이에 있었던 이란 북쪽, 지금의 키르키즈스탄 그 근처에 있던 사람이 배화교. 배화교라 하는 불의 종교가 여기서 나와요. 최고 절대 신이 아후라 마즈다에요. 빛과 지혜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절대 신을 만난 게 뭐냐? 천사장을 만나 이런 계시를 받았다는 거에요. 천사장. 교인 수가 엄청났답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교도소도 보내고 감옥도 보내고 했어요.
여러분들이 교주 또는 어떤 종교단체 이런데서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그 매력점은 바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 지옥 간 부자의 심성이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과 매치를 시키는 거에요. 궁금했지?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내가 알려줄게. 이러면 다 당기는 거에요. 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뭐로 본다? 우수한 존재로 되는데 있어서 기회를 붙잡으려고 모든 인간은 그걸 시도하기 때문에 현재보다 더 우수한 존재, 더 나은 존재, 지적으로 모든 것이 더 풍성한 존재, 지금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의미가 더 깊은 그런 존재를 누구나 추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알고 주님께서 뭘 만든다 했어요? 벽을 만들죠. 벽. 벽은 뭡니까? 못 온다. 네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모세와 선지자의 글의 완성자가 예수님 본인인데 너희들이 원하고 찾고 궁금해하고 바라고 있는 것 일체 내가 제공할 마음은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너희들이 얼마나 죽어서 천국가고 싶어 하는지 꿀떡같은지 내가 아는데 너희들의 그 욕구와 욕망을 나는 너무나 알기 때문에 나는 거부한다 이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그러면 내 속에 뭘 부인하라 말이냐? 하나님께서 아니다 하는 그것들이 네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너 자신을 거부하라. 너나 저나 한통속이다. 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왜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했습니까? 어제 대전강의에서 제가 노래 하나 띄었지요. 무슨 노래입니까? 등대지기. 가사에 나오지요. 거룩한 마음, 고상한 마음. 이 등대지기가 우직스러워요. 우직스럽게 뭐냐 하면은 자기 청춘 인생 다 포기하고 뭐만 지킵니까? 등대만 지켜요. 왜? 이 등대를 지켜야 불빛이 있어야 암초있는 쪽으로 배들이 안 오니까 등대 지키는 거에요. 그래서 유대인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자기가 목숨 걸 것을 찾았어요. 뭐냐 하면은 모세 율법을 지키는 거에요. 모든 율법을 지키면 잘 지켰다고 우직하게 지켰다고 충성된 종이라고 해서 죽은 다음에 천국 간다는 것이 그들의 확고한 체계가 신학체계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누구든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쳤는데요. 아주 약을 올려버려요.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보고 가라고 안식일에. 그리고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에서 먹었어요. 소경된 자를 안식일에 눈 뜨게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그러고 하시는 말씀이 “안식일의 주인은 난데” 이렇게 하시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의 몸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 인간의 내 몸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합치시키는 것 이것 전면 거부하시고 이 율법을 어느 몸으로? 예수님의 자신의 몸으로 인수인계시켜버린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몸이 있기 때문에 뭐를 추구하느냐? 구원을 추구하지요. 이 구원 다 헛방이었던 겁니다.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네 몸이 구원받는 것은 애초부터 이런 일을 말씀해주신 적이 없어요. 우리 몸이 구원받는 것 없어요. 그러면 주의 모든 말씀은 뭐냐? 우리 몸의 구원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를 위해서 주께서 오신 거에요. 구원 그 자체. 구원 그 자체의 주인공은 우리 몸이다? 아니다? 우리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냐? 예수님의 몸을 구원해요. 왜? 예수님의 몸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골로새서 1장에 나온 말씀처럼 그 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주님 형상이니까 우리 몸이 주님을 따라가게 되면 우리도 하나님 형상 입어서 구원받겠네 라는 시도, 이거 오해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벽이에요. 벽.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뭘 탔습니까? 나귀도 아니고 나귀새끼. 나귀새끼. 초라함의 극치죠. 너무 초라해서 민망할 정도에요. 아이고 그게 뭐야. 왕인데. 만왕의 왕이 그게 뭐야. 그것도 절뚝절뚝 나귀 새끼. 이게 뭐에요. 이게. 그런데 주님 뜻은 뭐냐 하면은 나귀 타실 분이 나 말고 누구 있어? 나귀새끼 타실 분이 나 말고 누구 있어? 나귀란 의미가 스가랴 9장 9절에 나오는데 그 말씀이 뭐냐 하면은 아예 없는 것보다 더 초라한, 없는 것보다 마이너스에요. 없으면 제로잖아요. 0보다 더 낮은 것. 없음보다 더 없는 것. 인간의 한계는 없음이 한계에요. 있다 없다 그걸로 끝이에요. 그런데 있는데 없음보다 더 없는 게 등장한 거에요. 분명히 있는데.
이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이 벽이 되기 때문에. 이게 벽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 인간과 이별해야 비로소 점점 더 드러나요. 이별해야. 하찮은 나귀새끼. 하찮은 나귀새끼 위에 타신 왕, 어떤 왕이냐? 하찮은 나귀와 일치된 채 탔기 때문에 이 왕은 어떤 왕이냐? 하찮은 왕이에요. 이것은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모세 율법에서 밝혀낸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는 대단한 메시아하고는 너무나 안 맞아요. 너무나 맞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22장에 다윗이 예언한 게 있어요. 왕이 올 때 메시아가 올 때 얼마나 대단하게 온다는 것.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구름과 땅이 다 갈라져요. 그 메시아가 올 때는. 그래서 어느 정도냐? 땅이 진동해요. 예언대로. 그 예언을 누가 파악했어요? 유대인들이 성경학자니까 파악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파악한대로 그 메시아 거기에 해당되는 합당한 어울리는 메시아를 고대했겠지요. 그걸 주님께서 염두에 두시는 거에요. 너희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어떤 큰 영광성으로 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역으로 나가세요. 반대로 가시는 겁니다. 이래도 너희들이 나와 안 헤어질 거야? 이래도 나와 안 헤어질 거야? 뭐 나한테 붙어서 묶어서 같이 나 가는 곳에 같이 가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따로 떼어내는 거에요. 인간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것 떼어내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어느 정도로 하찮은 존재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상상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좀 더 우수한 존재가 되고 싶어 환장한 입장에서 내가 어디까지 망가지면 좋겠습니다 라고 요청하지도 않아요 사람들은. 지금은 양반이다 이런 인간 될 자격도 없습니다 라고 그걸 찾고 다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습니다. 자진해서 종이 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어요. 여기 그 뒤에 보게 되면 37절 38절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예루살렘이 이렇게 성벽이 둘러싸여있어요. 성벽이. 있는데 이쪽이 동쪽이에요. 동문이 있는데 여기 지금 유대인들 공동묘지가 있어요. 유대인들 공동묘지가 감람 산에 메시아 오게 되면 제일 0순위로 빨리 부활될라고 대기하고 있는 거에요. 비싸요 전부 다. 여기 감람 산이 있어가지고 예수님이 기도하던 감람 산, 감람 교회가 있고 고개 넘어 베다니 나귀타고 내려오는 거에요. 내려와서 거기서 여기까지가 제가 보니까 한 500m 안돼요. 한 300m 정도 되는데 여기가 기드론 골짜기에요. 여기 천성교회 있고 여기는 대형 버스들이 막 있어요.
내려오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이게 어느 대목에 나오느냐 하면은 시편 24편 8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호산나로 불렀어요. 호산나는 ‘우리가 구하오니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구원을 요청하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게 호산나 뜻이에요.
그런데 호산나 그것을 마태복음에서는 뭐냐 하면은 어린애들도 그 민중들에게 섞여가지고 군중들과 섞여가지고 불렀다는 거에요. 이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애들이 뭐 안다고 애들 선동해가지고 뜻도 모르면서 메시아라고 하느냐 라고 되어있지만 여기 누가복음 오늘 본문에서는 더 심하게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40절에 하는 말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뭐들이 소리 지른다고 되어 있어요? 40절에 누가? 돌. 돌멩이들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입니까 도대체가.
저 군중들 찬양에 참여하는 예수님 따르고 참여하는 그들은 하나의 벽돌에 해당된다는 거에요. 벽돌. 하나님께서 계획한 것은 개인 구원이 아니에요. 구원이라는 하나의 곡을 만드는 거에요. 대곡을. 작곡을 하는 거에요 구원의. 또는 연극이라고 해도 괜찮고요. 또 건물이라고 해도 괜찮고. 구원 그 자체에 대해서 어느 인간도 만약에 구원받겠다고 개입한다면 그거는 본인 구원으로 쳐주는 게 아니고 하나의 전체 구원을 장식하는 하나의 벽돌 또는 돌멩이 이런 것을 너희들이 인정하라. 다시 말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 구원에 참여할 수 없는 그 구원이 진짜 구원이라는 거에요. 내 구원을 거기서 얻고자 시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 그 구원이에요. 전체 구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기타가 있다면 줄이 여섯 줄이거든요. 지판이거든요. 지판에 기타 치는 사람 손가락 가지고 왼손 가지고 지판을 딱 짚잖아요. 그러면 줄에다가 손가락을 눌러요. 그리고 오른손으로 튕깁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 해당되느냐 하면은 이 사물에 해당돼요. 프렛, 줄에 해당되고 누르고 어떤 지점을 누를 때 이게 바로 개인이 되고 그 개인을 튕기는 것은 주님이 튕겨버리면 거기서 뭐가 나오겠어요? 노래가 나오겠지요. 그 노래 작곡 누가 한 겁니까? 이거 주님이 하신 거죠. 나도 솔이잖아 이러면 안돼요. 솔도 기여했잖아 이러면 안돼요.
그런데 인간은 뭐냐? 너무나 계산적이라서 미, 솔, 라, 파, 레 각자 스스로 뭘 느끼느냐 하면은 여기서 어떤 결핍을 느낍니다. 아 나는 미인데 쟤는 솔이래. 아 죽어버릴까. 나는 낮은 도인데 쟤는 높은 도래. 아 언제 저렇게 출세했어. 아 쟤 높은 레래. 그러면 빨리 구원받는데 나는 구원도 못 받고 저 낮은 파에 속했다 이 말이죠. 나 빨리 노력해가지고 신앙생활 잘해가지고 높은 도가 될래. 이러고 있단 말이죠 지금.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교회에서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거에요. 지금 제자들을 염두에 두는 것도 있지만 먼저 그 당시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상대로 해서 이별을 한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하면 되겠어요.
이제 내가 할 만큼 이야기했으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권력을 잡은 이 권력체에서 나 이제 너희들과 작별한다, 이별한다. 이별할 때 그냥 너희들 나보고 욕해라. 저게 무슨 저게 무슨 왕이야. 그냥 해프닝이지. 그런데 스가랴 한번 봅시다. 스가랴 9장 9절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뭐하셔서 나귀를 탔지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이 겸손을 이해하고 겸손을 받아들일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나귀는 어떤 나귀? 큰 나귀? 대단한 나귀? 아닙니다. 어떤 나귀? 나귀의 어떤 것? 작은 것 곧 무슨 새끼? 나귀 새끼. 뭔가 타기는 타요. 왕이기 때문에.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은 해요. 왕이시기 때문에. 시편 24편 8절이 그러니까.
그런데 시편 24편 8절 그리고 아까 호산나는 시편 118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118편 25절에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렇게 되어있는데 이 시편의 이야기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이 말씀 가지고 그 당시의 유대 백성들을 통치하고 있었어요. 말씀을 그들의 정신 속에 다 삽입을 시켜놨다고요. 염려하지마. 로마에 압제 당한다고 너무 기죽지마라. 언젠가 이 말씀대로 그대로 성취할 날이 올 겁니다. 올 겁니다. 이렇게 한 거에요.
이제 주님은 그들과 헤어져요. 그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제자들과 헤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제자들이 갖고 있는 의식이 기존에 있는 유대사상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은 기존의 권력 세상과 이별을 안 할라고 그렇게 몸부림친 거에요. 주님 혼자 가세요 이런 뜻이란 말이죠. 난 안 갈랍니다. 나 죽어요. 이런 거에요. 결국엔 뭐냐 하면은 나귀는 아무나 탈 수가 없다는 것이 등장하지요. 나귀는 아무나 탈 수가 없어요. 왜 나귀를 아무나 탈 수 없는 것은, 쉽게 합니다.
나귀는 아까 스가랴에 겸손한 짐승이죠. 그것도 나귀보다 더 겸손한 게 나귀새끼죠. 나귀새끼가 지니고 있는 그 개념이 겸손의 극치 노골적으로 말해서 초라함의 극한이에요. 못나고 못난 가장 낮은 짐승의 대명사처럼 한단 말이죠. 그러면 나귀를 탄다는 것은 나귀를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고 나귀와 일치, 동치한다는 뜻이에요. “나귀야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해?” “하찮게 여겨요.” “그러면 좋아! 와! 이제부터 너는 나와 같이 되는 거야.” 하찮게 여기는 거에요.
마태복음에서 이 나귀 타는 대목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놀리는데 어린아이가 왜 거기에 와. 애들. 애들이 뭐 안다고 거기서 호산나 하면서 같이 합류해. 이 무식하고 무지한 이 군중들이. 예수님한테 현혹되어서 옛날에 병고치고 귀신 내쫓고 하니까 뭐 호산나 했다. 그렇게 해서 하는데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죠. 죽으러 가시는 거에요. 예루살렘에 죽으로 가시는 거에요. 나귀와 일치시키고 동치시키는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아무도 이 나귀새끼를 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에요. 자기 품위가 있으니까. 인간은 지금보다 더 우수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자기가 점점 더 초라해지고 하찮은 존재가 되잖아요. 자기 수준 맞게 대단한 존재 그런 짐승을 타야 되는데 나귀도 아니에요. 그보다 더 못한 나귀새끼를 탔단 말이에요.
평소에 나귀에 대해서 어떻게 대우했는가. 그거는 성경 민수기 21장에 보면 나옵니다. 민수기 22장 23절에 보면 발람 선지자 이야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뭐하니? 채찍질하니. 때리죠. 너는 맞아도 싸다 이 말이죠. 인간에게 나귀라는 것은 뭐냐? 때리면 때리는 대로 그냥 고분히 맞아야 될 자기 개인 승용차 쯤 되는 거죠. 다시 말해서 나귀는 내 밑에 있다. 내 밑에 있다. 그러나 주님은 나귀새끼를 할 때 나귀새끼가 주께서 쓰시겠다 한다 했어요. 주의 개념이 하나님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쓰신다는 말은 지금 나귀 같은 신세가 되어서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다루어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아무도 제자들 중에도 아무도 예수님이 왜 이런 해프닝을 벌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그 군중들 대중들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외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다 없어졌지요.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그들하고도 결론적으로 작별을 고한 겁니다. 그럼 작별할 때 요란스럽게 작별하느냐 그냥 잘 있거라 나 다시 올게 이러면 끝날 문제를 왜 나귀를 타셔가지고 이슈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케 하는 진짜 왕인가? 진짜 메시아가 맞는가? 그런데 우리가 아는 메시아는 저렇게 초라하게 사람으로 오는 게 아닌데 그러면 우리가 지금 메시아에 대해서 뭔가 오해하고 있는가? 저분이 메시아라면 우리가 아는 메시아는 잘못된 메시아인가? 이러한 언지를 계속 제공하고 주고 있는 거에요. 그 행위 하나하나가. 그런 의미에서 또 작별, 이별되는 거에요. 그들이 자기 해석을 포기할 게 아니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한 걸 이렇게 한번 결론 내려봅시다. 보이는 것에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구원은 따로 있다 이겁니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지금보다 자기 형편이 더 행복해지고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이건 모든 인간의 욕망이잖아요. 욕망 속에 보이지 않는 구원은 따로 분리되어 있어요. 어떻게? 초라함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초라함. 이 초라한 구원은 예수님의 개인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개인 구원.
왜 예수님의 개인 구원이냐 하면은 왕부터 초라해요. 왕. 왕으로 오셨는데 극히 초라해요. 그래서 초라한 왕이 굳이 초라해야 될 이유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아까 처음에 누가복음 16장에 이야기한 것처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듣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 스가랴도 선지자지만 왕이 나귀 타고 온다는 것이 스가랴 9장 9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럼 모세와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데 예수님께서 딱 행위 하나하나를 하면서 그 많은 가운데서 얼마나 뭐 영광스럽게 대단하고 하늘이 진동하고 구름타고 오고 얼마나 좋은 게 많고 혹하게 하는 게 많은데 주께서는 뭐를 딱 꼬집어서 하느냐 하면은 천하디 천한 이게 뭐야 하는 나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것도 나귀새끼. 나귀새끼가 사람 몸무게 감당하겠어요? 절룩거리죠. 뭐 힘이 어느 정도 차야 사람을 싣고 다니지 나귀새끼가 무슨 힘이 차겠습니까. 간신히 버티겠지요. 저거 죽은 거야? 산 거야? 분간도 안 될 정도로.
그 나귀새끼의 모습으로 영광의 시편에 기록된 모세와 선지자의 기록된 본 모습이 나귀새끼로 표출되고 있다는 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게 구원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겸손하지 않는 자다. 겸손하지 않는 자를 그걸 교만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그럼 교만은 뭐다? 구원받고자 하는 사건, 보이는 거죠. 보이는 나를 의미를 두는 모든 것은 바로 구원이 될 수가 없는 것들이라고 보면 돼요. 보이는 것들의. 아까 기타의 솔, 라, 시, 도. 너는 미야. 솔이야. 나는 파야. 이거. 주께서는 미도 괜찮고 솔도 괜찮아요. 손으로 짚고 튕기면 여기 음악이 나와요. 작품이 나온다고 작품이.
말로 하는 것보다 실제로 하는 게 낫겠죠. 마침, 때마침 기타가 있네. 제가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기타 사물체입니다. (기타 연주)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어.” 방금 음악이 어디 나옵니까.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라는 노래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노래 실력을 일부러 안내요. 그리고 반주도 들릴락 말락 해요. 반주가 들릴락 말락 가늘게 들려요. 이게 뭐냐 하면은 그 가사에 집중하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 노래 자체가 구원이라면 우리는 뭐했습니까? 눌렸지요 이렇게. 도, 라, 눌렸잖아요. 여기 내 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나귀 문제는 모든 보이는 것들의 시도와 헤어지는 거에요. 모든 보이는 것들. 대단하게 애들 따라다니면서 했을 때에 잠깐 보여주는 거에요. 이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돌들이 움직인다 해놓고 주께서는 자기에게 호산나 부르는 사람 구원해줬습니까? 아니죠. 그들의 몸과 자기 몸을 섞어서 뭐를 만들었습니까? 벽을 만든 거에요. 벽을. 어느 누구도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알아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그 말을 알아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내가 다 발각시키고 들추어내는 거에요. 거지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내 동생도 구원되겠다고? 그걸 막는 게 모세와 선지자의 글이에요. 그걸 막기 위해서 완성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사적인 개인 구원이 나의 구원에서 포기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미가 되고 솔이 되고 파가 되고 레가 되고 몇 명 모이면 c코드가 되고 몇 명 모이면 d코드가 되요. 음들이 모이는 것을 코드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성경 보면서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자, 그동안 사람들이 이 누가복음 나귀 타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을 해왔는가 그것을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겸손해서 나귀 탔다. 따라서 우리도 겸손해서 구원받자. 낮추고 낮추고 목사가 됐으면 섬기는 자가 되고 섬김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돼야 한다. 100% 가짜지요. 그 목사 100% 가짜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없습니다. 왜 그 이야기를 못해요. 왜 그 이야기를 못합니까. 목사가 불확실해서 그래요. 본인이. 목사해서 구원받을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장로해서 구원받고 나는 목사해서 구원받고 너나 나나 지금보다 우수한 존재 되는 게 우리가 딱 까놓고 이야기해서 우리 소원이잖아. 모델은 누구? 예수님이 모델. 예수 본받아서 우리 우수하게 되자. 그 욕망 외에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어린 애가 됐든 주님께서 우리를 표현할 때 뭘로 표현했습니까? 돌. 돌은 뭐냐 하면은 돌의 특징은 자신이 자신을 평가할 어떤 권한도 없는 것이 돌이에요. 내가 나를 나쁘다 좋다 잘했다 못했다 조차도 평가할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존재하잖아요. 그냥 존재하는 거에요. 그냥 존재하는 거에요. 뭐가 필요 없는? 타자가 필요 없는. 아무리 너는 나와 친구라 하지만 그 말은 결국은 나를 위한 친구로 되돌아와 버리는데. 있는 그 자체로 의미 없는 거에요. 그냥 있음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를 모릅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없음보다 더 없는 그 세계를 몰라요. 없음보다 더 없는. 거지 나사로가 그렇게 고생했으면 하나님 믿는 자라 했는데 믿었으면 말년에는 좀 이렇게 편하게 살고 몸도 안 아파야 하는데 거지 나사로의 특징이 뭐냐? 끝까지 몸 아파요. 끝까지 거지에요. 나중에는 어느 정도까지 내려가느냐 하면은 개한테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 돌보다 더 낮은 존재. 거기에 천국 백성이 생깁니다. 돌보다 더 못한 존재. 그러니까 이거는 누구 소관? 우리 소관 아니지요. 우리 소관 아니에요.
그럼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이 누가복음 이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들어와서 주님이 우리하고 헤어질려고 오셨다는 사실, 헤어질려고 오셨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돼요. 그러면 내 구원은 진작에 포기가 되면서 이제 남은 구원은 뭐 밖에 없습니까? 내 구원은 재꼈지요. 안되지요. 그럼 무슨 구원밖에 없습니까? 내 구원은 아니지만 누구 구원입니까? 주의 이름의 구원이 있지요. 주의 이름의 구원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것 바라보시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