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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31027a 창세기3장 15절(하나님에 대한 원한)-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광주강의20231027a 창세기3장 15절(하나님에 대한 원한)-이 근호 목사

p.254【Ⅲ. 결론】부분 해봅시다.【다니엘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무너져 내리는 역사적 베일의 현장에 서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건 누구도 부정 못하는, 진짜 누가 봐도 이건 사실 그대로다’ 라는 것을 제가 세 가지로 한번 뽑아봤습니다. 뽑아놓고 그것이 성경과 어떻게 차이 나는가를 보겠습니다. 이건 성경 없이 확실한 것. 이건 사실 아니야, 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것 세 가지.

[①모든 인간은 죽는다.] 모든 인간은 죽어요. 그 모든 인간 속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나’가 포함되어 있죠. 두 번째 확실한 것은, [②인간은 언제 죽을지 본인이 정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해서 인간은 정할 수 없어요. 이것을, 인간은 죽음의 종 혹은 죽음의 노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살고 싶어 해요. 그러나 차 한대에 받치면 죽잖아요. 언제 죽을지를 몰라요. 이것도 분명한 사실이죠. 세 번째 분명한 사실은, [③인간들은 남들을 쳐다보고 산다.] 그들의 영향력과 관계망을 형성한다. 그러니까 독불장군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렇죠? 이거 부정 못하죠.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이걸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면, 인간의 결국, 마지막은 죽음이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죽기 위해 지금이 있다.] 이거 부정 못하죠. ‘나 이거 안 믿을래.’가 돼요? ①번, ②번, ③번 어떤 경우라도 이것은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안되죠. 이 죽음 문제.

이야기해보세요. 이게 사실 아닌 거예요, 사실이에요? 사실이죠. 죽음이 인간을 지배하는 거 맞죠? 지금 우리 나이가 96세라면 어떻겠어요? 내 10년 뒤 계획을 세우겠습니까? 소용없죠. 왜? 사실이니까. 그러면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는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어느 쪽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이걸 정상으로 여기는 사람 봤습니까? 막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 봤어요? 없죠. 그리고 ‘나는 남들 안 쳐다보고 산 속에 갈 거야’ 이게 돼요, 안돼요? 그러면 다 벗고 다니죠, 길에. 안되잖아요. 벌써 남의 시선과 영향력을 입고 남과의 어떤 관계망을 이미 형성하고 있죠. 어릴 때부터 그렇잖아요, 어릴 때부터. 어릴 때부터 도움도 받지만 간섭도 받잖아요. 잔소리 듣잖아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딱 내가 원하는 나다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본인이 정상이고 싶어 해요. 멀쩡하고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되고 싶어 해요. 그런데 죽는데요? 그리고 멀쩡하다고 우기는데 어떤 일이 있을 줄 모르고요. 또 점점 나이 들면 몸이 어떻게 됩니까? 아프죠. 몸 아픈 것을 ‘아, 정상이야. 그래, 난 몸 아프기를 소원했어. 몸 아픈 것, 눈썹이 길어서 내 눈 찌르는 걸, 난 이게 되고 싶었어. 난 이걸 정상이라고 봐.’ 그렇지 않죠. 폐암 걸리고 또 대상포진 걸리기를 학수고대 기도하고 그랬어요? ‘나 대상포진 안 걸리고 싶어.’라고 약간의 불안감을 갖고 있죠.

그 전부를 합쳐버리면 뭡니까, 이게? 비정상이죠. 그러면 이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은 뭡니까? 여러분들이 이게 비정상인데 언제까지 비정상으로 살 거예요? 이걸 한꺼번에 정상적인 내 모습으로 돌리는 방법, 여러분 있습니까? (자살) 그렇죠. 해답은 벌써 나왔어요. 자살입니다. 자살하면 돼요.

사람들은 자살이 나쁘다고 이야기했어요. 자살은 나쁘다. 그럼 ①번, ②번, ③번 가운데 어느 관점에서 자살이 나쁘다는 겁니까? ①번입니까, ②번입니까, ③번입니까? 어느 관점에서 자살이 나쁘다는 평가를 받아요? ③번이죠. 다른 사람은 살려고 노력하는데 너는 왜 자살하느냐? 벌써 본인 스스로 자살하고 싶어도 이미 ③번, 인간들의 시선과 자기와 관계되어 있는 가족들, 이 사람들이 자살이 나쁘다고 이미 규정했죠.

그러니까 자살한다는 것은 ‘나 나쁜 사람 될게.’ 각오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쁜 사람 될게’라고 마음먹는 것이 자기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자기를 비정상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본인이 생각하는 정상은 또 어떤 자아가 정상인 거예요? 어떤 자아가?

방금 제기된 문제가, 성경을 10년, 20년 아무리 봐도, 20년, 30년 믿었다, 복음 안 지 50년 되었다 해도 이것은 우리 속에 같이 잠복되어서 같이 살아가고 있어요. ①번, ②번, ③번에 의하면 우리는 비정상이에요. 그러면 복음을 공부한다, 또는 성경을 본다, 신앙생활 세계에 발을 들여놔볼까, 이건 뭐에요? 비정상을 뭐로 전환시키려고 애쓰는 겁니까? 정상인 걸로, 정상적인 사람 한번 돼볼까, 라고 이렇게 시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잠시 성경에 발을 한번 들였다고 봅시다. 성경 속에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고 할 때 성경은 진리를 뭐로 봅니까? 예수님으로 보죠. 예수님. 진리를 예수님으로 보는 거예요. 나 진리에요, 아니에요? 나는 진리 아니죠.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이겁니다. [성경은 죽은 자를 상대로 주신 책이다.] 성경은 죽은 자를 상대로 주신 책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어떤 사람에게 들리냐 하면, 자살하고 온 사람에게 들립니다. 자살하고 오너라.

이 땅에서 인간은 아까 ①번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죽죠. 그럼 평소에 하루 일과는 죽을 준비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죽을 준비하니까 안 들어오는 거예요. 성경은 이미 죽은 자를 상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도 안 들어오는 이유가 안 죽으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왜 안 죽으려고 하느냐 하면, 내가 비정상인 건 맞는데 언젠가 내가 원하는 나다움, 어떤 정상이 있지 않을까 하고 자꾸 희망을 거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죽은 자를 상대로 주신 책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뭐냐?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삶이란, 이미 자살(죽음)한 자의 뒤치다꺼리.] 이미 자살된 상태에서 뒤치다꺼리하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인간은 늙어죽든 차에 받쳐 죽든 어떻게든 죽잖아요. 그렇죠? 죽게 되면 지나온 과거는 버려야 될 거죠. 이미 자기가 죽었으니까.

자, 2052년에 죽었다 칩시다. 태어나기를 1970년에 태어났다면 살아있던 기간이 있어도 2052년에 결국은 죽잖아요, 결국은. 결국이에요, 결국. 버티든 뭐든 모르겠어요. 하여튼 결국은 죽잖아요. 죽게 되면 1970년부터 2052년까지… 많이도 살았어, 하여튼. 몇 살이야 도대체. 82살. 82살 살아온 것은 쓰레기에요, 쓰레기 아니에요? 쓰레기죠. 쓰레기다 이 말이죠.

성경은 아직 우리가 2052년 안되었지만 2052년이든 2100년이 됐든 상관없이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지금 우리가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은 쓰레기로 뒤치다꺼리할 부분만 늘어날 뿐이에요. 쓰레기로 뒤치다꺼리할 부분이 계속 증가할 뿐이라는 그 사실을 보게 하는 겁니다.

지금 제 말 잘 이해했는지 다음 질문을 통해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질문: 내가 죽었습니까, 내가 죽어가고 있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1번이에요, 2번이에요? 사실은 둘 다 같은 말이에요. 내가 죽어간다는 말은 결국 죽을 때 되면 ‘아, 나 죽기 15년 전에도 내가 죽은 것 맞구나.’를 확인하는 게 죽는 순간이에요.

그럼 주님의 방법은 뭐냐? 어떤 인간도 죄인이기 때문에 멀쩡한 인간은 없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경을 볼 때 그 사람을, 네가 100살을 살든 200살을 살든 죽은 자로 간주하고 성경을 주시는 겁니다. 죽은 자로 간주하고.

여러분 집에서 분리수거하거나 쓰레기치울 때 귀찮죠. 귀찮지만 죽을 일입니까, 그게? 쓰레기치울 때 아파트 같으면 분리수거하는 데 내놓거나 빌라 같으면 길에 내놓는 게 참 귀찮은 일이죠. 쓰레기차 올 시간 맞춰 내놔야 되니까. 안 그러면 그 전날 내놓던지. 그런데 그 전날 내놓으면 옆집에서 자기 쓰레기통 없다고 그 위에 덤으로 얹어놔요. 우린 많이 겪고 있으니까, 지금도. 어쨌든 음식 쓰레기든 뭐든 할 때, 이게 죽을 일입니까, 아니면 귀찮은 일이에요? 귀찮은 일이죠.

그 귀찮은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키는 거예요. 신자, 불신자 관계없어요. 이거는 신자, 불신자와 아무 상관없어요. 아이고, 신자니까 그런 생각한다. 신자니까 그런 생각하는 게 아니고 성경이야기 떼버리고 무엇이 사실인가를 보자는 거예요. 무엇이 사실인가. 무엇이 사실입니까? 이게 사실이잖아요.

지금 이 논리가 어려운 거예요? 뭐 생뚱맞은 겁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죽었기 때문에. 왜 이제 와서 자살하려고 해요? 이미 죽었는데 무슨 자살을 해요.

쓰레기 나왔으니까 쓰레기 한번 봅시다. 자, 쓰레기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일상입니다. 일상생활. [첫 번째, 성경의 언어는 이미 죽은 자를 향한 언어]죠.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은 쓰레기를 분석하는 거예요. 하루하루 일상의 생활을 분석하는 겁니다. 그러면 [두 번째, 인간의 언어는 타자(남)]이죠. 남들과 소통하거나 소통 안 해도 괜찮아요, 내 의사표시를 위하여 쓰는 언어죠.

그래서 인간의 언어는 쓰레기가 되는 거예요. 이 안에 무슨 요소가 빠졌습니까? ‘나는 이미 죽었다’가 빠졌죠. ‘죽어 갈 것이다’가 빠진 게 아니고 ‘나는 이미 죽었다’가 빠진 거예요. 그래서 쓰레기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가 이미 죽은 시점에서 볼 때 그동안 남들 맞춰주려고 남들을 납득시키고 설득시키고 남 앞에 너는 나쁜 짓을 했다는 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어떤 변명 또는 자기 정당성, 자기 합리화를 해왔던 거죠.

그걸 더 어려운 용어로 하면, 강남강의에서 했던 용어인데, 정합성(整合性, matching, mutual consistency). 정합성은 딱딱 아귀가 맞는 논리를 정합성이라 합니다. 딱딱 맞는 거예요. 키트를 사서 조립할 때 모든 구성물이 딱 들어맞는 것. ‘내가 너희들 보기에 나 이렇게 해서 앞뒤가 딱딱 맞아.’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들어맞는 언어를 사용하는 거죠.

왜 그런 짓합니까? 이것은 자기가 죽음과 연관해서 비정상인 것을, 죽을 때까지는 비정상이기 싫고 자기 자신이 정상이고 싶은 거예요. 이게 정상이에요? 내가 정상인 것을 확인해주고 정상인 것을 증명해줄 누가 필요한 거예요? 타인이 필요한 거예요, 타인이. 인간은 그래서 남들 속에서 못 빠져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 타인 가운데 자식도 있고 부모도 있고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가족들이 있겠죠.

그들이 내 주변을 비추죠. 디스코 팡팡처럼. 인천에 놀이동산 가서 앉아있으면 빙글빙글 돌든지 한다는 거죠. 회전목마 비슷하게. 회전목마는 회전목마 본인이 돌지만, 그렇지 않고 남들이 내 주변을 도는 거예요. 출몰이죠.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친구하자 친구 안하자,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 출몰되는 여러 가지 타인들이 내 주위를 홀연히 출몰했다가 꺼지거나 사라지다가 없으면 또 등장하거나 하는 이런 것. 이 모든 것 속에 그 타자들과 상대해서 내 언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언어를 사용해서 뭐하려고 하는데요? 뭐하는데요? 시험 끝나니까 애들이 독서실 안와요? 애들 오면 안 죽습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이건 성경을 떠나서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에요. 이러다가 나 죽는다는, 지금 이 순간도 죽음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빼버리고 남들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험 끝나니까 애들 안 와서 살기가 힘들다고. 합기도가 훨씬 나았는데, 이런 거.

자, 이렇게 하니까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뭐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 보는 데에 비해서 모든 인간의 특징은 타인의 언어를 사용해서 자기를 방어하면서 자기가 정상인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보세요. 바울되기 전에 사울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바울되기 전 사울이 뭐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아니면 누구를 공격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을 공격했던 사람이죠. 예수는 이단이라고. 예수 믿는 자를 공격했던 사람이었어요. 예수를 죽이는 것은 정합성, 이 타자의 집단에서 옳은 결정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도록 주도한 본인은 지금 정상적인 자아상을 구현하고 있는 거예요. 사형당한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스데반 집사를 돌로 죽이도록 부추기고 추진하는 그 책임자로서의 자기 행동은 너무나 정상이라고 본 거예요. 스데반 집사뿐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 있었잖아요. 이건 아주 싹쓸이 씨를 말려야 돼요. 하마스 씨 말리듯이 완전히 씨를 말려버려야 되죠. 정상이죠. 아무 하자 없어요.

그런데 누가 찾아왔죠? 예수님 찾아올 때, 나중에 사도가 된 사울은 지옥 갔습니까? 어때요? 지옥 갔어요? 답변해보세요. 지옥 갔습니까? 영생 얻었죠. 바로 그 과정 아니면 천국에 못 갑니다.

제가 어제 버스 타는데 메시지를 받았어요. 메시지를 보낸 분이 누군지는 몰라요. 그런데 그 질문이 오늘 강의와 관련되어 있고 너무 중요한 질문이라서 제가 그분의 질문을 그대로 한번 써보겠어요. 제가 제 의견 이야기할 테니까 여러분부터 먼저 답변해보세요. 질문은 이겁니다. ‘목사님, [주님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천국 갑니까?]’ 이 질문이에요. 버스 안이기 때문에 답변을 못해서 아양교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답변을 해드렸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이 질문을 받았다면 이 밑에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여러분, 지금 타자입니다. 남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남과의 관계망, 대화 이외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할 줄 몰라요. 뭐라고 답변해야 되겠습니까? 성의 있게 답변을 해줄 때 뭐라고 답변을 할 것인가? 질문한 성의에 따라서 성의 있게 답변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시간 가니까 제가 보낸 답변을 말씀드릴게요.

[주님의 사랑이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을 이깁니다. 그런데 그 전투장(쟁투장)이 당신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점에서 아까 제가 말한 사도가 된 사울 있잖아요. 또 하나 예를 들면, 베드로 있잖아요.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제가 죽기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 하다가 나중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극혐했죠. 극히 혐오하듯이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었어요. 세 번씩이나 저주한다는 진심을 이야기했다고요. 난 당신을 저주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지옥 갔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경우를 겪지 않는 것이 지옥 갈 확률이 높은 게 아니겠어요?

지금 이 사람이 정말 지옥 간다면 이런 질문을 저한테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사님, 목사님 설교에 보니까 천국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이야기에요, 저주받으니까 천국 못 갑니까?’ 본인이 본인을 측정하고 판단한 거예요.

이게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니에요. 본인이 본인을 측정한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판단하고 측정한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알아서 내 안이 어떤 이질적인 것과 전투를 벌이는 그런 장(場), 영토 되는 것을 없애버리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정서적인 안정을 원해요. 투쟁 없이, 갈등 없이 심리적으로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경말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전 16:22)는 그 말씀이 들어온 순간, 우리 마음은… 평소에 사랑이라는 단어 있잖아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같은 이웃이나 남이나 타인들과 주고받던 우리의 언어사용이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쓰는 단어는 남들과의 소통, 연결하기 위해서 관계 맺기 위해서 쓰는 단어라고요.

그래서 내가 답변하기를 이렇게 해놓고, 우리가 쓰는 사랑 말고 기이한, 어떤 특이한 사랑 개념이 우리 속에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그 말씀과 동반해서 그 사랑이 들어와요. 그럼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하면, 마지막에 쓴 것이, 나의 죄를 들추어내는 그것이 바로 사랑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답변 보냈어요. 그 뒤에 한 10초 지나서 ‘감사합니다.’ 답이 왔어요. 우리는 자기를 자꾸 정상화시키기 때문에 뭔가 내 것이 아닌, 또 내가 알고 있던 남 것이 아닌 이질적인 게 들어오면 그걸 쫓아낼 생각해요. 쫓아낼 생각한다고요. 자기가 자기관리하고 싶어서 쫓아내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쫓겨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들어와 버리죠. 베드로가 예수님 배신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아이, 진작 헤어질 걸.’ 이랬습니까? 안 그러면 울었습니까?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엄청나게 울었어요.

왜 웁니까? 그동안 자기가 알던 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동안 베드로와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여느 사람과 같이 남이라고 생각했어요. 여러 남들 중에 하나로 본 겁니다. 내가 있으면 주변에 회전차가 도는 것처럼 나는 거기서 선택, 결정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탁탁 집어서. 마치 쟁반이 돌아가는 초밥 집처럼 내가 먹고 싶은 걸 딱딱 골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 할 때 어떤 인간도, 예수님은 죽은 자를 상대한 언어거든요, 누구든지 예수님 말씀은 이미 죽어버린 자를 상대한다는 그 생각을 못하고 예수님 말씀도 내가 더 정상적이고 우수한 인간되는 데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후딱 집은 거예요.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후딱 집었는데 그게 안 되거든요. 나하고 맞질 않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후딱 집었으니까 도로 던져 놔버리는 거예요. 던지면서 어떻게 했다고요, 베드로가? 엉엉 울었죠. 엉엉 울었어요.

사도가 된 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이런 말하죠. “나는 내 속에 악마를 보았다.” 내 속에 죄를 보았다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원초적인 죄니까. 내가 죄 지으려고 해서 지은 죄가 아니고요. 내가 지은 죄는 내가 기억하고 있죠. 그 죄 말고 원초적인 죄.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였잖아요. 그건 다윗이 알고 있는 죄에요. 다윗이 아는 것은 자기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것은 나쁜 거고 이거는 죄고 이건 의야, 그런 식으로 아는 것 말고 이질적인 것, 낯선 걸 알았어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내가 듣도 보도 못한, 내가 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무리 목숨 연장해도 나는 이미 주님 보시기에, 죽을 목숨이 아니고 이미 죽은 목숨이 되는 거예요, 죽은 목숨.

제가 이러면 또 그럴 거예요. ‘죽은 목숨인데 왜 자꾸 삽니까?’ 이렇게 할 거예요.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죽었어요. 인간은 이미 죽었다. 그런데 왜 자꾸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느냐? 그것은 인간의 상처가 살아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상처가 살아있어요.

창세기 3장 15절에서, 물어봅니다. 약속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죠. 그중에 상처 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두 존재가운데 누가 상처 났죠? 예수님입니까, 마귀입니까, 둘 다입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울 때, 상처 난 존재가 둘 다입니까, 어느 한 쪽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둘 다잖아요. 둘 다. 우린 예수님의 상처만 보면 안돼요. 바로 악마도 상처 입은 거예요.

악마는 머리가 날아갔어요. 머리 날아간 괴물 됐어요. 머리 날아가니까 몸체만 꿈틀거려요. 몸체는 살아있는데 얼굴부분이 날아갔어요. 그래서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가 하늘나라, 시내산 위에 갔는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안 만났습니까? 시내산에서 만났죠. 만났는데 어느 부위는 못 봤습니까? 얼굴부위는 못 봤어요. 얼굴부위는 못 봤다고요.(출 33:20)

얼굴부위는 못 봤던 모세의 후계자가, 우리가 지금 교재로 삼고 있는 ‘70이레’ 앞의 제목이 뭐였죠? 이 논문 제목이 뭡니까? ‘다니엘 70이레’죠. 다니엘이 어느 계통이냐 하면, 모세가 선지자거든요, 다니엘이 선지자잖아요. 선지자의 특징은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얼굴부위가 점점 더 선지자에게 알려지는데, 다니엘에게서는 인자(人子)같은 영광스러운 얼굴이에요. 영광스러운 얼굴. 희미하게나마 인자의 모습, 인간 모습을 본 거예요. 그러나 모세는 그것도 못 봤어요. 아직까지 계시가 더 확장 안 되었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모세나 다니엘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현재 자기 자체를 정상으로 봤습니까, 비정상으로 봤습니까? 비정상이죠. 비정상인 거예요. 자기가 이미 죽은 자인 걸 알죠. 왜? 온전하지 않으니까 죽는 거예요. 하나님이 만든 그대로가 아닌 온전치 않은 인간이니까. 그런데 모세, 다니엘은, 또 베드로, 사울 나중에 사도 바울은 온전치 않은 이유를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일반인들은 뭡니까? 온전치 않으면서 어디를 봅니까? 자꾸 주변에 회전하는 초밥처럼 또 이 사람 만나고 또 저 사람 만나고 자꾸 같은 죽은 자가 죽은 자끼리의 언어를 수입하는 거예요. 똑같이 죽은 자면서도.

나는 사람들에게 실망했다고요?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다른 사람도 다 이야기해요. 쟁반초밥 하나 먹는데 초밥 맛이 좀 나쁘다고요? 남들도 너를 쟁반초밥으로 생각한다고요. 해답 없습니다. 다 같이 쓰레기인데 쓰레기에서 무슨 해답이 나와요.

우리는 타인의 언어로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언어, 남들의 언어로. 남들의 요구조건으로. 남들이 나를 보는 인상, 시선, 그리고 욕망, 그걸로 가득 차 있어요. 거기서 탈출하는 방법은 뭐밖에 없다 했습니까, 아까? 자살.

그럼 세상 사람들은 자살이 나쁘다 하죠. 그건 세상 사람들의 견해이고 성경은 많이 좀 많이 매정해요. 골로새서 1장 16절,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고요? 예수님이죠. 고린도후서 5장 14절, 예수님이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은 죽었다. 그 두 성경구절을 통해서 다른 융통성 있는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모든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함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주님 앞에서 이미 죽어버렸다. 다 죽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만약 자살을 하잖아요. 죽은 자에게 자살도 없지만 하여튼 자살을 했다 치고 자살했을 때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그것도 내 뜻이었다. 모든 만물은, 일어난 모든 일은 주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걸 누가 알았습니까? 그게 골로새서에 나와 있죠. 사도 바울이 안 거예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이다”라는 말을 하고 “나는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하죠. 이미 죽었다고. 그럼 살아있는 것은? 죽은 자가 귀신 돼서 자기 집에 가가지고 살아있을 때 썼던 유품 있잖아요, 이건 한 5만원 받겠다, 그 뒤치다꺼리 정리하는 기간이 인생이라 하는 겁니다. 그걸 영어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My way. 이게 마이 웨이에요. 합기도를 하든 뭘 하든 이게 마이 웨이입니다. 뒤치다꺼리.

그러니까 자살을 해도 그것마저 주의 뜻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걸 누가 알았다고요? 주님의 종, 의의 종인 사도 바울이 이걸 안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과거에 스데반 집사 죽은 데에 가담했으니까 살인죄잖아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 잡아 죽였으니까 살인죄에 해당되죠.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런 게 있습니까? 없어요. 참 뻔뻔해요.

다윗이 밧세바의 남편 죽인 것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가지고 끙끙 앓다가 더 이상 못 견디겠다 하고 자기도 자살했습니까? 아니죠. 뭡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한 게 아니고 죄가 했다는 거예요. 터무니없는 언어사용이죠. 터무니없는 언어사용. 우리가 살아오면서 타인과의 소통되는 단어에 전혀 안 섞이는 단어죠. 섞일 수 없는 단어죠.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죽어가는 자를 살려주려고 상대를 살리려고 주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를 확인 사살하는 겁니다. 자살을 생각하지 마라. 이미 죽었는데 무슨 자살이 있느냐. 이미 죽었잖아, 이미. 안 죽어? 그 말을 거부해? 그럼 안 죽나? 몸이 안 아파요?

구원받는 사람치고 자기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없죠. 죽는다는 말은 더는 내가 살릴 요량이 없다.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나한테는 전무하다. 전혀 없음을 아는 거예요. 이게 복 아닙니까?

왜 그러냐 하면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상처가 있는데 이 상처가 독해요. 마귀상처거든요. 마귀가 주님 앞에 된통 당했거든요. 이건 악마의 원한이에요. 악마의 원한. 악마의 원한이 인간 개인 각 사람 앞에 하나씩, 국화빵 만들 때 전부다 앙금 하나씩 넣는 것처럼 한 사람당 악마의 원한이 다 들어있어요. 초등학교 키 크다고요? 4학년? 5학년? 손녀? 우리 집 손녀, 손자? 모조리 원한이에요. 마귀의 원한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그 원한은 누구를 가리키게 되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야. 신에 대한 원한이죠. 그러니까 마귀와 예수님과 원수 관계이고 인간은 들러리입니다. 계속 들러리에요.

그런데 그 들러리를 주께서 폐기처리하지 않고 그 들러리 속에서 인간이 갖고 있던 악마의 상처와 그다음에 주님 자신이 갖고 있는 상처, 창자국과 못자국이 있어야 돼요, 사도 요한이 그걸 보고 주님이라고 했잖아요, 그 상처가 있어야 될 이유가 그 상처가 있어야 인간 개개인에게 있는 악마의 상처로 악마가 나를 죽이려고 했고 실제로 죽였다는 사실을, 죽인 그 당사자로서의 구세주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앎,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이라는 타인과 통하는 언어의 주제입니다. 그 십자가를 가지고 나의 모든 죄를 파헤치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목사님,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천국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 그 질문에 다시 한 번 답변해봅시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도 천국을 갈 수 있습니까?

제 답변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천국 못 간다는 그 말씀과 더불어서 그 말씀이 속에서 마주쳤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던 그 죄,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 하늘나라에 통하지도 않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 평소에 네가 너를 사랑했고 평소에 네가 남을 이용해서 써먹던 그 사랑이라는 단어, 그 사랑은 내(주)가 아예 안 받는 거예요.

인간이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주님이 인간을 사랑했으니까, 사랑이란 단어가 이미 죽은 자를 향하여 쓰는 단어는 주님이 쓰는 단어이고 지금 자기가 이상적인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타인에게 써먹던 사랑 단어는 주께선 받아주지도 않는 단어에요.

그 단어 사이에 투쟁장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주께서 사용하셔서 기어이 누가 이긴다? 기어이 주님이 이기는 겁니다. 눈물 흘리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성경 이해하는 것은 다 헛방이라는 사실을 속 시원하게 다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속은 자만이 속지 않은 자인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속여 왔고 자신에게 속아왔습니까.

마귀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주님으로부터 상처받은 탓을 남 탓으로 돌려버려요.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만 상대한다고요? 눈에 보이는 다른 타인들과 상대하죠. 성경 떠나서 이게 맞죠. 부모, 자식, 남편, 아내 다 상대하잖아요. 그들로부터 내가 구성됐습니다. 그들의 입장에 맞춰주려고 애쓰면서 어느새 나는 내가 된 거예요. 다음 시간 초반에 복사해놓은 것 할 거예요.

남들은 다 눈에 보이죠. 실선입니다. 그런데 여기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점선)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마귀, 천사,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그럼 ‘나 이제 그딴 소리 안 듣는다니까.’ 이렇게 되죠.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건요?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나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안 믿어.’

그렇다면 그럼 안 믿는 당신은 안 믿는 당신을 정상이라고 봅니까, 비정상이라고 봅니까? 정상이라면 자살할 필요 없죠. 비정상이니까 자살하는 거죠. 그러면 해답은? 없죠. 해답 없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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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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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