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22:41-46 (주 主)
Re..마 22:41-46 (주 主)
이름 : 이근호(IP:)
주
2005년 3월 6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22:41-46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22: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22: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야, 즉 오실 구세주를 뜻합니다. 이는 인간 세계는 스스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에 의해서 구원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세계에 항상 문제점이 있다는 점과, 그리고 그 인간들에 의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두 가지 점을 한꺼번에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하기에 메시야를 믿어 구원에 나서야 된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잘못된 신앙관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즉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힘이란 본인의 희망이나 다른 사람들의 기대감이나 혹은 본인의 결단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서만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사람들의 뜻으로 여기면서 메시야를 믿는 것과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면서 메시야를 믿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날까요? 그 차이점을 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선제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다윗의 주님이 과연 다윗의 후손으로 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질문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위해 태어나는가 아니면 태어날 자식 때문에 아버지가 우선적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에 자식이란 아버지를 위하여 존재한다면, 아버지의 행위 여하에 따라 자식의 운명은 결정 나 버리는 겁니다.
출애굽기 20:5-6절에 보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 본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본인의 그 행위로 말미암아 자자손손 천 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후손들이 복을 받아 아니받고는 선조가 되는 본인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만약 선조가 행동을 잘못하게 되면 그 저주가 후손까지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후손의 운명은 선조의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선조의 주님께서 그 선조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자칫하면 선조가 행동을 잘못하면 그 주님이라는 후손도 저주받는 일이 생겨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운명은 인간 손에 의해서 좌우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주님' 값을 못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다윗의 주님'이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의는 듣는 이로 하여금 기존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엉터리임을 고발하는 질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여, 아버지가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아들이 생긴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견해에 의하면, 아버지는 아들이 생겨나기 위해 먼저 있어야 할 사람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이 비록 이삭을 낳았지만,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들 이삭의 이삭됨을 위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 먼저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가 있는 겁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뒤바뀜으로 예수님의 주신 질문에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애초부터 아브라함의 혈통적 인식이나 사람들의 뜻으로 파악될 분이 메시야가 아닙니다. 도리어 기존의 그 혈통개념을 역으로 부셔버리는 식이 아니면 예수님이 제시한 질문에 답변이 불가능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이라는 자식은 분명 자신의 혈육이 부정당한 상태에서 출현된 자식입니다. 이미 자기 아내 사래의 태가 죽은 상태에서 임신이 된 자식이 이삭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예상치도 못한 자식인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본인의 구원됨이 어디서 기원되었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사람의 뜻이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나야만이 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눈이 올 때는 소리없이 옵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은혜도 소리없이 지금도 퍼붓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요청하거나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혈육적 자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이삭이라는 '약속의 자식'이 태어나야 합니까?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하실 일이 미리 담겨져 있기에 생긴 현상입니다. 메시야 어떤 일을 하실까요? 그 점은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편 110편에 나오는 말씀인데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혈육의 내림을 왜 하나님께서 차단시켜야 하는 이유는, 그 헐육 속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아들이 되어버리면 그 아들은 아버지의 운명처럼 저주받는 운명의 연속일 뿐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를 구원하고자 한다면 아버지의 혈육을 부정해야만 하는 요소가 아들 안에 새로 담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약속' 하심입니다. 메시야가 내세운 약속의 위력이 인간의 혈육적 관련성을 끊어버립니다. 즉 혈육을 부정해버리고 정죄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아버지로 하여금 축복이 되게 하는 자식이 태어나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축복된 약속에 준해서 자식이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그런 사람이요. 이삭에게 있어 야곱이 그런 사람이요, 야곱에게 있어 요셉이 그런 사람이요, 다윗에게 있어 주님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그러니까 후손이 선조를 살리는 방식이 바로 '사람의 뜻'을 꺾는 방식입니다.
이런 메시야는 사람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시는 메시야가 아니라 도리어 메시야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는 사람이 요구되는 겁니다. 이 요구는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즉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서 이땅에 태어났기에 결코 자신의 뜻에 의해서 구원되지 않았음을 증거해야 될 자들입니다.
눈이 소리없이 오고 조용히 쌓여가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주님에 의해서 소리없이 나타났고 조용히 흘러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나를 위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염두에 두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