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9장 5절 (베일) 231010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9장 5절 (베일) 231010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9장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삭개오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앞에 누가? 인간이 이렇게 등장하게 될 때 여기서 이 관계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 그리고 심판과 구원을 하시는데 인간을 만나야 그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어떻게 되고 심판이 어떻게 되고 가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구원과 심판에서 빠트린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창조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만나서 하나님이 창조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어떤 목적으로 창조를 했는가가 나옵니다. 그럼 이 창조 안에 심판과 구원을 여기에다가 통합시킬 수가 있어요. 창조가 통합시켜버리면 ‘여기 있네’ 라는 창조 하나 나올 거고 두 번째 ‘어? 심판 받네’ 라는 창조. 창조된 모든 것이 불 심판 받네. 세 번째 ‘새로운 창조’네.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집니다. ‘여기 있네’ 창조, 이게 이제 인간들이 아는 창조의 한계입니다. 인간들은 만들어졌으면 그게 창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삭개오가 등장하잖아요.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고 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만 삭개오를 보는 게 아니고 삭개오도 누굴 보는 거에요? 예수님을 보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어떻게 봤는가? 1번인가 2번이냐 3번이냐 저 셋 중에서 어떤 식으로 삭개오는 예수님을 봤는가. 예수님을 보는 자리가 나무 위에서 봤어요.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거기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보는 거에요. 그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하고 볼 때에 삭개오는 자기가 있다가 되겠지요. 내가 나무 위에 올라갔잖아요. 본인이 올라갔잖아요. 본인이 여기 있잖아요. 그럼 자기가 없으면 없다가 되겠지요. 나는 창조된 게 있다. 그럼 내가 없으면 창조된 게 없다. 없다가 돼요. 있다, 없다가 돼요. 인간은 창조를 있다 없다 로 보는 겁니다. 이 안목으로 누굴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보는 거에요. 예수님이 저기 보이네. 예수님이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만약에 죽어 없어지게 되면 어떻게 돼요? 없다가 되는 거에요.
그럼 거기서 삭개오가 볼 때 이 구원, 심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이거는 안 보이지요. 보일리가 없지요. 특히 이건 새로운 창조가 있네 이런 건 모르죠. 또 뭘 몰라요? 어? 모든 있는 것은 불심판 받아야 되네. 이것도 어떻게 됩니까? 삭개오 입장에서는 모르는 겁니다. 삭개오가 보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는 것을 누가 보느냐? 밑에서 예수님이 보고 있는 삭개오를 또 보는 거에요. 그래서 삭개오는 자기가 예수님을 보고 있는 인식, 그게 삭개오한테는 전부가 되는 겁니다.
이걸 한번 적어볼게요. 인간이 생각하는 창조는 1. 여기 있네. 신이 창조했구만. 이게 인간이 생각하는 창조입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은요 인간이 창조했다고 아는 것 전부가 신의 창조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신이 창조해도 인간한테 허락 못 받으면 창조 안 한 게 돼요. 인간이 창조했다고 믿는 그것만 창조한 거에요. 별 있네. 누가 만들었을까? 별이 있네. 누가 만들었을까? 신이 창조했다. 인간이 창조했다고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그 전부가 인간에게는 창조가 되는 겁니다.
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알아 맞춰보세요. 자연의 사물과 인간의 인내, 안다 이런 거죠. 인식의 세계가 일치될까요? 불일치될까요? 어느 쪽일까요? 자연의 사물과 인간의 인식의 세계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성경에 인간은 안개와 같아가지고 아는 게 좁아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욥기에도 나와요. 욥아 너 알아? 너 자연에 대해서 알아? 아무 소리 못하죠. 모르는 게 왜 저한테 고난이 옵니까 라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네가 네 전부를 알아? 주는 대로 먹어. 황무지에 비 오는 이유를 알아? 사람이 개간하지도 않는 황무지에 비 왜 오는데? 낭비처럼 보이지? 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지? 그거는 네 생각이고 삭개오 네가 나를 볼 때 그렇게 본다고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볼 때 그렇게 본단 말이죠. 나무 위에서.
사물의 영역과 인식의 영역은 영역이 달라요.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일치되지 않습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주체와 객체는 영역이 다르다 이 말이에요. 영역이 다르다. ‘나’라는 주관과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게 뭐냐 하면은 내가 이해 안되는 게 아니고 노는 동네, 영역이 달라요. field가 달라요. 영역이 달라요.
왜 날씨가 더운데? 날씨가 덥다. 온난화다. 이거는 인식 세계, 인간이 과학적으로 따져서 탄수화물의 메탄가스가 하니까 빛이 반사되서 튀어나가야 되는데 튀어나가지 못해서 온실효과 때문에 온도가 올라간다는 거에요. 이게 올라가니까 북극의 빙하가 녹지요. 빙하가 색깔이 하얗잖아요. 하얘가지고 햇빛을 반사를 해줘가지고 그나마도 온도가 안 높게 했는데 반사해줄 빙하가 점점 없어지니까 반사가 아니고 반대로 흡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흡수가 되지요. 흡수가 되니까 그 빙하가 녹아서 바닷물의 농도가 옅어지지요. 짠 게 덜 짜지요. 짠 게 덜 짜니까 그 덜 짠 해류가 속도가 빨라져요. 빨라지니까 남극에 있는 빙하 속도가 더 빨라지는 거에요. 이게 바로 인간의 인식의 세계입니다.
왜 그런데? 왜는 몰라요. 그냥 탄수화물이 높아진다. 탄수화물이 높은데 왜 온도가 올라가야 되는가? 그거는 주어진 영역이 그러니까 하거든요. 글쎄 그 주어진 영역이라니까요. 주어진 영역. 우리가 그걸 활용하는 영역하고 활용하는 영역은 주체의 영역이에요. 주어진 것은 객체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미 주어진 것은 손 쓸 수가 없어요. 달로 도망가던지 화성으로 도망가던지. 그것도 돈 있는 사람들 도망가겠지요.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인간이 일치되지 않은 자연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 너머에 있어요. 자연의 영역보다 다른 영역에 속한 거에요. 인간은 그동안 자기 인식의 세계에 거기에 몰입해가지고 성경에 천지를 창조했다니까 창조도 창조했다는 그것을 본인이 주체가 나서서 창조한 것을 헤아립니다. 그게 눈에 있던 것의 전부를 가지고 그들은 창조세계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골로새서 1장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은 창조에 포함됩니까? 안됩니까? 보이지 않는 것. 포함되지 않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예수님을 위해 창조했다면 예수님이란 그 객체는 인간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고 그 너머에 바깥에 있는 거에요. 바깥에 있는데 삭개오는 나무에 올라가가지고 뭘 봅니까? 예수님을 쳐다보는 거에요. 그 오실 분이 그분이 맞는지. 병 고친다는 분이 과연 저분이 맞는지.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냥 빤히 쳐다보는 것 같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기 위해 오신 십자가로 하여금 새로운 창조를 만드는 그것은 못하겠지요. 약간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조의 세 가지 있다고 했지요. 1. 인간들의 영역에서 이해되는 창조. 이건 바로 있음. 있다는 거에요. 별이 있네 달이 있네 있다는 거에요. 있음 속에 누가 포함됩니까? 나 여기 있잖아. 나 여기 있는 거 누가 만들었는데? 신이 창조했지. 이게 인간이 아는 창조에요. 내가 있듯이 별이 있으면 나와 별 전부 다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엉터리죠. 있는 것만 헤아린 거에요. 있는 것만 헤아리기 때문에 수학이 카운트되는 거에요. 과학과 수학이.
2. 어! 있는 세계가 심판 받네. 불 심판 받네. 심판 받는 창조. 인간은 이해 못합니다. 왜 굳이 만들어놓고 굳이 다 불로 싸지르는지. 이걸 모르는 거에요. 3. 구원 받는 창조. 이건 뭐냐? 모든 창조가 불 심판되고 난 뒤에는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창조. 새로운 창조에 대해서 인간은 몰라요. 어디 매여 있기 때문에? 자기를 포함한 여기 있음에 매여 있기 때문에 어떻게 있음이 심판을 통과할 수가 없지요. 거부하니까. 왜 있는데 왜 우리를 없앨려고 합니까? 막 저돌적으로 저지하지요. 거부하는 거에요. 있는 거나 잘해주세요. 믿어줄게. 이런 식이에요. 있는 나를 없애는 것은 나는 어떤 신이라도 나는 안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이런 거요.
그걸 아까 동영상도 했지만 누가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그 난리를 쳤잖아요.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하니까 이건 예상 밖의 문제가 훅 들어온 거에요. 예수님 입에서 나올 때 이거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건 감당할라고 맘 준비 다 하고 만났거든요. 그런데 예상 밖에 그런 예상 문제를 생각도 못했어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 전에 예수님이 이야기한 적 없어요. 진작에 이야기하지 이제 와서 난감하게 만들어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못가요.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기껏 내세운 게 뭐냐? 있음에서 있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을 다시 생각하는 거에요. 인간의 영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요. 있음에서 있음. 엄마가 있어서 내가 태어난 것.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거에요. 엄마 말고 성령. 야 이거는 니고데모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구원받는데 좀 보탬이 되는 행동을 정치적 조치를 한번 해볼라고 왔다가 이거 뭐야 이거. 완전히 자기가 전혀 하늘나라와 상관없는 자로 발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안하는 조건은 자기 쪽에서 해볼 게 전혀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바람같이 온다는데 바람을 내가 손오공도 아니고 바람을 이리 오라 저리 오라 못하잖아요. 그리고 바람 안 오면 어떡할 건데. 바람 안 오면 어떻게 할 거에요. 성령 와야 거듭날 건데 성령 안 오면 어떡해요. 자, 성령 안 오면 어떻게 되지요? 지옥가지요. 그 말을 니고데모가 못 알아듣는 게 뭐냐 하면은 그 뒤에 또 예수님이 책망을 해요. 어떻게 내가 한다는데 왜 네가 어떻게 해볼라고 하느냐! 내가 이 땅에 온 이유가 뭔데?! 이 땅에서 내가 하는 일을 지금 내가 너한테 이야기한 거야. 그런데 네가 주제넘게 네가 할 수도 없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네가 왜 거기서 끼어드냐 말이죠. 내가 할 건데. 내가 할 거야. 내가 할 거야. 내가 한다니까. 인간이 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오신 분 아닙니까. 상철아 누가 소설을 거꾸로 읽느냐? 그런 게 있어요. 상철이. 16기 영숙이가 이야기한 건데. 상철아 왜 소설을 거꾸로 읽어! 미국에서 시애틀에서 그렇게 읽어? 상철이 그 사람이 시애틀 사람인데 Solo에 나온 사람인데. 소설을 거꾸로 읽는 거에요. 소설을. 인간은 소설을 거꾸로 읽을 수 없어요. 왜? 자기가 소설의 일부니까. 미래에 대해서 모르죠. 소설 쓰시는 분은 주님 몫. 심판, 새 창조 그건 주님 몫이에요. 왜냐?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됨을 위해서 실시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의 세계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주께서 이거는 이 창조는 엉터리 창조에요. 있음은 아닙니다. 있음이 아니고 뭐가 있을 건데 뭐냐 하면은 십자가의 효력으로 만들어진 새 창조. 십자가의 효과, 효과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 창조가 기존 창조를 대체합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슨 하늘과 무슨 땅? 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 십자가의 효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죠. 삭개오가 주님 보는 취지는 저 분 평가할려고 나 있듯이 저분 있는데 저분은 어떤 분이지? 삭개오가 이해하는 예수님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 하면은 있음 빼면 없음이 돼요. 인간 세계는 그것뿐이에요. 있다가 없어지면 그건 없는 거에요. 있음, 없음 그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있는데 심판 있다. 있는데 새 창조 있다. 그거는 인간에게는 인간은 발견 못합니다. 왜?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발견을 못해요. 삭개오가 예수님 봤다면 삭개오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삭개오가 누굴 쳐다봅니까?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갔으니까 삭개오가 우러러보는 거에요.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 봤어요. 제가 여리고에 가가지고. 그런데 그 나무 안 믿습니다. 그런 나무가 한두 개도 아니고. 별로 높지도 않아요. 2천년 넘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예수님이 삭개오를 밑에서 보고 있는 거에요. 보고 있을 때 예수님과 삭개오의 눈이 만났잖아요. 그러면 그 삭개오는 예수님에 의해서 해야 될 일이 삭개오에 도달됩니다. 그럼 삭개오가 뭐냐? 십자가에 지는 삭개오가 돼요. 소멸되는 삭개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삭개오 안에서 스스로 셀프 처벌하는 삭개오. 스스로 자기를 처벌하는 삭개오. 4배나 값겠나이다 나오죠. 8절에 나오죠. 시키지도 않았어요. 내가 토색한 게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4배나 값겠나이다. 스스로 처벌을 내가 내 스스로 처벌을 내리겠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이 잔을 내가 마시겠나이다 하고 그걸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시선을 좇는 순간 그 삭개오는 이제 삭개오를 떠나서 예수님의 인간의 영역이 아닌 예수님에의 영역에 포섭이 된 거에요. 삭개오와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이 앞으로 십자가라는 십자가의 일이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 삭개오의 역할은 뭐냐? 삭개오의 역할은 베일이에요. veil. 장막. 가림막. 베일. 천. 다시 말해서 이 천지창조했던 천지창조 있잖아요. 그게 베일이었어요. 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베일에 속한 무늬들은 그 베일 뒤에 뭐가 있는지를 모르고 그 자기가 속해있는 베일 전체의 영역만 알아갈 뿐이에요. 그것도 다 알지 못하고 알아갈 뿐이에요.
베일이라고 하는 것은 뒤에 감추어놓은 게 있는데 그냥 막, 커텐에 불과하거든요. 펄럭이는 커튼. 바람 따라 부는 커튼. 그 커튼 속에 모든 인간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세계에서 커튼이 통하는 그 언어는 진실, 다시 말해서 일치.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의 세계는 객체를 설명할 수 없어요. 커튼 안에서만 유통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막 안에서만 놀지 막 바깥에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언어는 필요 없는가? 베일로서 막으로서 필요하지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11절에 보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무엇을 더하여 되어있어요? 무엇을 더하여? 비유. 은유. 비유, 은유입니다.
비유, 은유 좀 설명 필요하겠지요. 비유 설명합니다. 인간은 상상합니다. 인간은 상상해요. 상상하고 그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실제로 봐요. 실제로 봅니다. 정신병자 같으면 노골적이에요. 나는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이라고 우기는 정신병자에게 물어보세요. 이 세상에 나폴레옹이 누구야? 나야. 이러거든요. 그 사람한테는 뭡니까? 실제로 남 보기에는 혼자 상상한 거죠. 그런데 혼자 상상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부 다 혼자 상상해요. 너도 상상 전부 다 상상 머릿속에 상상하고 있는 거에요. 이 상상하고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상은 그냥 상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실제와 결합된 상상이에요. 내가 상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상상하는 것은 다 가짜야 이런 것은 상상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상상한다는 것은 진짜야 진짜 내가 이런 사람이야. 이런 사람이야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여자가 가는데 여자가 말하길 나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라는 거에요. 누가 봐도 이거는 상상이 아니고 이거는 실제처럼 보이지요. 통합해서 이걸 상징이라고 해요. 상징.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10명 20명 모두가 동의해도 이게 확신이 있다고 특출한 인물 등장해서 결론내기 전까지 임시적으로 맞다 해줄게 하는 것이 바로 상징입니다. 임시적으로 맞다 해줄게. 그래 너 여자 맞다 해줄게. 이게 상징이에요. 심볼. 상징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어릴 때부터 뭡니까? 상상이죠. 특히 애들 구구단 좀 하면 전부 다 부모는 자식을 뭐로 봅니까? 천재로 상상하지요. 그러나 그거는 집에서 할 때 상상이고 본인은 뭡니까? 진짜 천재야. 우리 애가 진짜 천재라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프리카에 평소에 츄리닝을 입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동네 사람이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을 부자로 보는 거에요. 다른 사람은 츄리닝을 비싸서 못 입으니까. 그것도 츄리닝 메이커 있는 츄리닝 아디다스. 아디다스 츄리닝 입을 때 전부 다 이 사람은 부자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미국이나 잘 사는 나라 가보니까 이거는 자기 나라에서는 안 입고 구제품으로 주워서 입은 거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부자라고 뭐했다? 상징화된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 동네 사람들 7656명한테 물어보니까 그 사람 부자에요. 그런데 외부에서 딱 한명만 와도 그건 뭡니까? 그거는 그래 너 부자 많이 해라. 상징화시킨 거에요.
이게 상징이 또는 상상이 진짜 실제가 될려면 모든 인간 다 끌어모아도 안돼요. 아직도 여지가 있어요. 마지막 한명이 아니요 하면 온전한 합치가 안 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아시겠지요. 인간은 하나의 자체가 베일, 뭔가 중요한 진짜 중요한 진리를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가리는 펄럭이는 그냥 앞에 펄럭이는 베일에 관한 문제지요. 그 베일 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삭개오입니다. 삭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베일을 거치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베일이 올 때 베일 당사자인 삭개오도 이해 못하고 주변 사람도 이해 못하죠. 단지 예수님만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이해하는데 인간들이 뭘 이해를 못하는지를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베일, 이 세상 창조 자체가 베일입니다. 왜냐 하면은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창조가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1장 10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했지만 그거는 후패해질 것이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언젠가 허물어질 것을 창조했다 이 말이에요. 히브리서 1장 11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만들었죠. 인간은 만들었다 까지만 알아요.
그 다음에 인간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은 ‘멸망할 것이라’ 이걸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은 왜 멸망하는지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멸망을 몰라요. 그리고 누가 멸망시키는 것도 몰라요. 멸망할 분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도 몰라요. 그냥 있는 대로 좋은 게 좋은 대로 그냥 갑시다 이런 식이에요. 하나의 상상이고 상징이고 베일에 지나지 않는데 그게 전부라고 여기는 겁니다. 베일에 지나지 않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예수1과 예수2로 나눠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1과 인간2로 나누기 위함입니다.
인간1에는 누가 나옵니까? 삭개오1과 삭개오2가 나와요. 삭개오1은 어디 위에 있는 삭개오?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 자기 쪽에서 예수님을 보는 삭개오. 삭개오2는 예수님과 함께 자기 집에 끌려간 삭개오. 셀프 처벌하는 삭개오. 내 잘못은 네 배나 값겠나이다 했던. 나 처벌 받아야 마땅합니다. 나 준비되어있습니다 하는 삭개오. 이 삭개오의 모습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은 십자가가 삽입되어 들어오는 거에요. 죽으면 죽으리라. 죄의 쓴잔을 마시고 죄의 무거운 짐을 제가 짊어지겠나이다. 마태복음 16장 24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게 인간이 자기가 노린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시선이 있어야 돼요.
주님의 시선이 있으면 주님의 시선에 의해서 자기가 있던 창조의 영역에서 홈 패어가지고 구멍 뚫려가지고 양말 구멍 뻥 뚫리지요. 옛 창조에서는 나는 없어요. 나는 이미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까요. 나는 구멍 뚫리고 주님 안에 흡수, 포섭되고 흡수, 통합되어버렸어요. 이때는 뭐냐 하면은 그냥 창조가 아니고 심판될 창조를 같이 경험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같이 경험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있는 그러한 삭개오2가 되는 겁니다. 이 삭개오2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맞이해야 될 그 모습을 삭개오가 재연하게 되는 거에요. 삭개오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고 삭개오가 예수님하고 같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고린도후서 13장 5절 한번 읽어 보세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창조에서는 있음 자체가 절대로 버리지 않는 상태로 보는 거에요. 인간은. 있잖아. 있는데 뭘 버려. 있는데. 있으니까 버려질 이유가 없는 거에요. 여기 있는데. 여기 있어가지고 성형하고 여기 있어가지고 돈 벌고 여기 있잖아. 있는 게 있고 싶어서 하겠다는 거에요.
미쳤다고 내가 나를 버려요? 내가 왜 나를 버려. 여기 있는 게 여기 있으면 안 버려지지요. 국가가 나를 버려도 나는 나를 안 버려. 그렇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에요. 나를 안 버리겠다는 마지막 몸부림이 자살이에요. 거봐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처리했잖아. 내가 안 버렸잖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버린 자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안에 계신 줄을 모르는 자는 이게 밀려버린 거에요. 주님의 영역이 나를 주시하지 않으면 내가 나를 바라보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자가 된다는 거에요. 그럼 신앙이라는 게 뭐냐? 신앙이라는 것은 내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내가 버려진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신앙이잖아요. 내가 나를 볼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날 봐야지 내가 뭔데 나를 봐요.
내가 왜 예수를 보고 믿습니까. 그 믿음 버리세요. 내가 봐서 예수를 믿는다 하는 것은 그 믿음은 갖고 있으면 안돼요. 주님이 나를 봤을 때 우리는 기존의 창조가 아니고 심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든 창조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것이 나의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예수1과 예수2가 될 때에 예수님은 초라하게 왔지만 영광스럽게 되고, 인간은 자기가 마음으로 봤지만 예수님이 봤을 때 인간2다. 이 말이냐? 여기서 수학. 행렬수학이 동원돼요. 행렬수학. 2x1=2가 되도 1x2=-2가 되는 행렬수학이에요. 일반수학하고 달라요.
행, 열 이런 집단과 집단의 곱하기에서 앞에 있는 k1, m1, k2, m2 두 개의 숫자가 있다면 이 앞에 것은 뒤에 것과 곱하기 하고 뒤는 앞에 것과 곱하기 하면 앞에가 행이고 뒤는 열이라면 앞에 행과 뒤의 열과 앞에 열과 뒤의 행과 곱하기 하는 것이 행렬 학이에요. 이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느냐? 이게 수학에 보면 이래요. 햄버거 두 개사고 골라 두 개 사는데 k사와 L사 두 개가 있다면 한 군데서 햄버거 콜라 다 사는 게 아니고 햄버거는 K사고 한쪽은 L사 살 때 어느 것이 값이 들으냐 할 때 행렬이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1과 인간2와 관련하면 돼요. 초라하신 예수님이 나무에 가서 내려다보는 그 삭개오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만나는 거에요. 그리고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는 안에 삭개오 집에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는 겁니다. 예수1은 인간2와 인간1은 예수2와 만나요. 마치 행렬수학처럼.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십자가 자체가 전복이기 때문에. 거꾸로 뒤집는 사건이기 때문에. 십자가 빠지면 십자가 이야기한다고 이단 안 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로 인하여 유도 엎어치기 있지요. 십자가 와서 엎어치기 돼야 돼요.
보세요. 인간1이 나중에 나 이렇게 될래 하는 인간2가 있을 거잖아요. 인간1이 이렇게 가면 안돼요. 예수1이 인간과 만날 때만 인간2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개혁주의 신학은 뭐냐 하면은 현재 한국 기독교 내가 예수님 말씀 듣고 연구해서 내가 원하는 인간2가 되는 거에요. 그 가운데서 뭐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뒤집어짐이 없는 거에요. 인간1이 인간2가 되는 이것이 바로 이게 심판받을 창조에 속하는 인간 주체 안의 영역, 인식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어요.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법이에요. 인간1이 노력하는 거에요. 열심히 하는 거에요.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아마 니고데모가 예수님 만나고난 뒤에 허리 나갔을 거에요. 왜? 엎어치기 당해가지고 완전 뒤집어져버렸어. 한판 그대로 날라갔어요. 이게 재미있는 게 삭개오가 위에 있잖아요. 나무 위에서 봤지요.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예수님1이 오신 이유가 모조리 위에 있는 것은 저 아래로 떨어트리는데 어디까지 떨어트리느냐 “십자가 죽기까지 복종하심이라”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까지 이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전복을 시키는 거에요.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일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그 앞에 뭐냐 하면은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그 마음을 우리가 무슨 수로 그 마음을 품어요. 내가 여기 있으니 절대로 있음을 키워야 되고 있음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왜? 이걸 포기하게 되면 내가 사는 보람과 이유가 없기 때문에. 예수를 만나든지 부처를 만나든지 나는 무조건 없어지면 안돼요. 더 형편이 나빠지면 안돼요. 내가 죽으면 안돼. 여기서 인간의 절대사명은 뭐냐 하면은 절대 죽지마라! 어떤 경우에도 죽지마라. 살아남아야 돼. 이게 자기한테 부추기는 사명감이에요. 인간은 사명감 없는 사람 없어요. 다 사명감 있어요. 어떤 경우라도 죽으면 안돼. 그냥 살아남아야 돼.
하마스한테 인질 잡혔어.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아다오. 유대인 부모가 간절히 기도하지요. 베일은 뜯겨야 되고 밑에서 라이터 불 질러서 없어져야 돼요. 모든 있음은 불 질러야 돼요. 잘 탄다. 모든 있음은 타도 괜찮아요. 태울 거에요. 주께서 태울 거에요. 아까 동영상에도 나왔지만 이스라엘 중심에 성전 있고 성전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했거든요. 시온에. 시온성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시온성은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 적들이 와서 불태워버리죠. 하나님이 자기가 만들라 한 성전을 누구 손에서? 하나님 본인 손에서 태워버리는 거에요. 이제 전복이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는 거에요. 네가 생각하는 네가 상상하는 하나님이 버렸지 진짜 하나님은 그걸 그 커텐을 열어젖혀야 나오는 하나님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은 인간에게 버림받아야 나타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남들은 주를 다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거 누가 이야기한 거에요. 누가 준 명언입니까? 누가 이야기했지요. 제자 제자 수제자 누구입니까? 대표로 이야기한 거에요. 다 버릴지라도 저는 저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하게 함으로서 그 말을 나오도록 예수님이 기다린 거에요.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버림받아야 돼. 내가 기다렸다. 그 말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니까 버림받아야 된다고. 버리지 않겠나이다를 버림받아야 돼. 저는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가 부인돼야 된다고요. 모든 게 있음에서 나오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의 신앙을 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에요. 버리면. 하나의 커텐이니까요. 막이란 말이죠. 막. 우리자신이.
그렇다면 이 삭개오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1, 삭개오2 나타나죠. 예수님2는 뭘 만납니까? 지금인간들 눈에 보이는 삭개오1을 만나는 거에요. 예수님 안에 있는 진짜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이 건방진 삭개오 안에 들어와서 뭐로 이끈다? 허름해보이는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는 그 결과, 다시 말해서 삭개오를 십자가 지고 가는 삭개오로 변모시키는 이야기가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삭개오 이야기. 위에 집단에서 아래 집단으로 들어오는 거에요. 위치만 나무 위에 있다가 밑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위치만 옮기는 게 아니에요.
이번에는 좀 더 어렵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에 대해서 뭐라고 평되어있습니까? 이렇게 평되어있어요. 삭개오라고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고 또 뭐다? 19장 2절 부자지요. 부자. 부자는 무엇을 부자라고 하면 돈 많은 사람 부자지요. 이 돈은 인간에게 뭐가 되느냐 양식이 된다. 인간의 양식. 지금 삭개오가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자기 시선은 거부당하고 주님의 시선으로 무장된 삭개오가 삭개오를 이끌고 있어요. 안에 예수님2가 들어있는 초라한 그 모습의 예수님1. 그 예수님1, 사람들은 누가 봐도 예수님1은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구나. 저 아버지 목수잖아. 이렇게 생각해요. 안에 하나님과의 동듬됨을 아무도 몰라요. 예수2를 몰라요.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1밖에 볼 줄 몰라요.
왜? 자기하고 똑같이 생겼으니까. 이 창조에 속한 존재물이니까. 똑같은 거니까. 자기들은 내가 나를 알고 내가 이웃을 알고 알 듯이 똑같이 생긴 예수님에 대해서 빠삭하게 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우리가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삭개오를 쏘아보지요. 응시. 쏘아볼 때에 이 부자가 돈, 양식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아래로 내려와요. 뭘 품고?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집으로 내려오면서 이 모든 인간에게 양식이 된다는 돈, 양식이라는 말은 왜하느냐? 인간은 돈 없으면 못 사니까. 인간은 돈 없이 못 살잖아요. 인간은 돈이 양식이에요. 양식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겁니다.
내려와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삭개오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자, 여러분 이제 알았지요. 이 이야기가 삭개오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이야기입니까? 삭개오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이 하실 일이죠. 양식을 나눠주는 거에요. 나눠준다는 것은 풍족한 데서 결핍된 곳으로 간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의 주실 양식은 모자람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인간 창조의 세계에서는 부자가 해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왜? 부자는 누가 봐도 돈이 많으니까. 돈 많은 사람이 자비를 베풀 수 없는 사람에게 줘야 된다는 거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실제로 일어난 비유죠. 커텐에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에요. 거기 사는 모든 인간의 행동과 모든 나타난 모습도 커텐이라는 범위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숨어있는 진실이에요. 감추어진 진실.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삭개오를 딱 자기 사람으로 뽑아서 삭개오를 변화를 통해서 인간들이 모르는 그 뒤의 진실이 있다 지금 그걸 설명하는 거에요. 안 믿는 눈치인데.
요한복음 4장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4장. 이 위치, 위에서 아래 이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 말씀, 왕 비유와 같은 구조가 되어있어요. 요한복음 4장 8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죠.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로 동네에 간 거에요. 자, 우리가 공부했지요.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갔다. 이건 비유입니까? 비유 아닙니까? 비유죠. 이 땅에 인간들이 움직이는 모든 것은 숨어있는 새 창조 입장에서 보면 이건 비유가 되는 거에요.
그러나 인간이 상상하는 것은 곧 진실이라고요. 그게 실제라고. 배고픈데 배고픈게 무슨 상상이에요. 배고픈걸 나는 상상한다 이러지 않습니다. 소리가 나는데 꼬로록. 이게 무슨 상상이에요. 진실한 거에요. 그러나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실을 놓쳐버린 겁니다. 양식 사러 갔잖아요. 그 다음에 31절 봅시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수님이 여자 만난 사이에 제자들은 빵 사러갔다가 빵 사가지고 드디어 도달한 거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연극을 보고 계시는 겁니다. 연극을.
그 한 씬이 끝났어요. 여인하고 이야기하는 씬이 끝나고 그 다음 씬이 뭐냐? 큐! 제자들이 빵 사들고 오는 그 씬이 들어온 거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잡수소서” 하니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 어떤 양식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지금 제자들은요 주님이 어떤 특별한 양식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몰라 하지만 우리가 빵 사오면 주께서 진실한 양식을 알려줄 것이다 라고 짐작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전혀 짐작 안했어요. 배고파서 빵 사러갔는데 그것까지 신경 안 쓰지요. 그들의 행동이 하나의 비유가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는 것을 빵 사기전에 이야기 안했어요. 빵 사고 왔을 때 이야기했다고요. 빵 사고 왔을 때. 그러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했어요. 참 제자들이 얼마나 합리적인지요. 박수치고 싶어요. 33절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잡수실 것을 드렸습니까? 우리보다 더 합리적이고 우리보다 철저하고 실제적이에요. 어느 정도로?
10분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