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31019b 요한일서 2장 15절(세상이란)-이 근호 목사
서울강의20231019b 요한일서 2장 15절(세상이란)-이 근호 목사
성도는 이 세상과 상관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일찌감치 세상으로부터 쫓겨났기 때문에 그래요. 쫓겨났기 때문이고 성도는 쫓겨난 그분의 분신으로서 이 땅에 출생한 거예요. 분신으로서. 그러니까 족보가 달라요. 성도는 족보가 다릅니다. 이 세상에 잉태치 못한 자의 족보에요. 그럼 멜기세덱의 족보죠.
세상이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세상이. 세상이 예수님을 버렸는데 성도가 세상의 인습과 제도를 따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시진핑이 어떻게 하든 김정은이 어떻게 하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대선을 치르든 국민의 힘이 어떻게 되든 민주당이 어떻게 되든, 그야말로 마귀가 하는 말처럼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게 성도에요.
그런데 우리는 ‘성도됨에 대해서 감이 안 옵니다.’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감이고 대추고 간에 안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성도의 관리권은 누가 주관하고 있느냐 하면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과정 속에서 성도가 되는 거예요. 성도가 자기를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 관리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라는 것은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에요. 율법에 속한 자 같으면 자기가 율법을 지켜야 되는데 성도는 성령 관할이에요. 성령은 이미 율법이 완성된 것을 완성된 차원에서 성도가 성도로 살도록 주께서 친히 이끄시는 거예요. 성도라는 게.
주님이 일찌감치부터 버림받았다 이 말이죠. 버림받았으니까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성도도 같이 세상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이참에 좋잖아요. 상관할 필요 없잖아요. 우릴 버렸잖아요. 버렸는데 우리가 왜 거기다 끼어들고 상관을 해야 됩니까? 상관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세상 관계에서, 방금 세상이 예수님을 버렸다 했잖아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버렸죠.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3장 17, 18, 19절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했다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심판했다는 말은, 성도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나야 됩니까? 이유는 뻔하죠. 성도로 하여금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성도로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아이고, 난 세상 싫고 저기다 기도원 지어서 예수원 같은 기도원에서 기도나 할까, 지금 이렇게 살라고 성도된 게 아닙니다. 그건 비겁한 짓이에요.
마태복음 28장 20절은 여러분들 안 봐도 다 외웁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말씀 여러분들 아시죠? 어디서 들어본 적 있죠. 묻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십니까? 질문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계시다며요. 너희들과 함께. 그런데 어디 계십니까? 히말라야? 튀르키예? 소말리아? 주님 어디 계셔요? 계시다면서요.
그러니까 그 질문 자체가, 여러분들 보세요. ‘어디 계십니까?’ 육하원칙이죠.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디에 계십니까. 육하원칙이 예수님에 대해서 적용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되죠.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기사를 쓸 수가 없죠. 육하원칙으로 신문기자가 기사 못 쓰죠. 왜 그러느냐 하면 세상이 버렸거든요. 세상이 예수님을 버렸다고요.
버린 상태에서 성령께서 성경을 써버렸던 거예요. 그러면 성경은 뭐냐? 버림받은 자가 쓴 책이에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가 쓴 책. 버림받았는데 왜 썼느냐? 심판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3장 18절에,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마치 이와 같아요. 판사가 심판자잖아요. 범인은 피고가 되고. “너는 이렇게 못된 사기를 쳤기 때문에 징역 7년을 언도한다.” 땅땅땅! 해놓고 그 사기꾼한테 “요새 시세 얼마 하는데? 형량 감해줄테니까 나한테 얼마 줄 건데?” 판사가 그런 일을 굳이 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필요 없죠. 그럼 판사하질 말든지. 그건 변호사가 하는 거지, 판사가 하는 게 아니잖아요. 판사는 선고했잖아요. 이미 사기꾼으로. “교도소 가면 7년인데 내가 면회 자주 가줄게.” 그런 소리 할 필요 없고, “5년으로 감형해서 내가 빼내줄까?” 그러한 뇌물 쓸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하면 뭐가 부정됩니까? 자기가 판사라는 자체가 부정되잖아요.
항상, 성경은 누가 썼다? 세상에서 쫓겨난 분이 썼어요. 쫓겨남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본격적으로 주께서 정당하게 이 세상을 불심판으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발생된 겁니다. 발생될 때 ‘왜 세상은 굳이 심판받아야 되는가?’ 그걸 증명하는 책이 성경책이죠. 그럼 성경해석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세상 조지자. 세상을 하나님께서 박살내는 이유에 대한 판결문이 바로 성경이 되는 거예요. 판결문.
그런데 성도도 육신으로 되어 있잖아요. 성도도 육신으로 된 몸이거든요. 육신으로 된 몸이기 때문에 판결문에 대해서 저촉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인간의 육신이니까. 육신은 가만있는 게 육신이 아니에요. 안에 아담의 속성이 끊임없이 발굴이 돼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도 소원이 있는데 빨리 죽고 싶다’는 이것이 뭐냐 하면 육신 때문에 자기가 괴롭다는 거예요.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가 죽는 것도 감사하죠. 말씀으로 제거해주니까. 어디 티눈 있어요? 빼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우리의 육신을 알아서 제거해주니까 얼마나 고맙고 뭐든지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은, 육하원칙으로, 어디 있든지 언제든지 누구와 함께 있든지 어떻게 있든지 왜 있든지 무엇 때문에 있든지 간에 항상 그게 고맙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성도의 특징입니다. 내가 그 상황을 관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가 조작할 이유도 없고 내게 유리한 쪽으로 그것을 수정할 필요도 없이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어진 거예요.
그 말씀 중의 하나가 뭐냐? 어떤 상황이 주어질 때, 물론 그런 일은 없겠습니다만 갑자기 뭐가 잘못되어서 모르는 변호사가 와서, 당신이 모르는 양아버지가 있는데 당신 주라고 26억 남기고 어젯밤 죽었다. 그런 일이 번번이 있어요.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우리는 그 26억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누구한테 빼앗기기 전에 후딱 받아버려야죠. 왜? 26억에 대해서 감사하기 때문에. 어떻게 받는다? 고맙소~ 고맙소~ 고맙소, 하고 얼른 받아버려야 돼요.
그런데 받고 난 한 달 뒤에, 아이고 이거 주소 잘못 알아서 배달 잘못해서 가져가버리면 뭐라고 해야 됩니까? 고맙소~ 고맙소~ 이런 상황을 통해서 세상과 더불어 내 육신이 사라져야 된다는 것을 한시도 쉬지 않고 확인시켜주는 그 고마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2장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한 것은 뭐냐? 사랑하지 않도록 내가 완벽에 완벽의 조치를 다 해놨다는 거예요. 너를 앞장세워서.
아까 말씀 중에 나왔던 요한복음 3장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보고 사도행전 8장 한번 보겠습니다. 18절,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라고 되어있죠. 저를 믿으면 더 이익이 온다,가 아니라 기껏 해주는 게 뭐냐 하면 저들과 함께 심판을 안 받도록 조치한 것을 주신다는 거예요. 누굴 믿으면? 독생자 예수를 믿으면. 뭐 다른 거 기대할 필요 없어요. 함께 안 망하도록 해준 것보다 더 귀한 복은 없다 이 말이죠.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대상이다.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심판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이 세상은 뭡니까? 예수님을 버린 이 세상은 어떤 경우라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야 이 이야기가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판결문이에요. 판결문을 들이밀어서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함께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해줄게.’라는 것이 주께서 할 수 있는 전부에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럼 됐지, 더 뭐 필요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 말은, 어떻게 몸부림쳐도 이 세상은 사망 그 자체다. 저주 그 자체에요.
이 복음을 전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세상적으로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도행전 8장 18절-20절,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그 대목입니다.
자, 시몬이라는 사람. 성령 받는 걸 보니까 성령을 받고 그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가 생기는 걸 보니까 ‘야, 사람을 저렇게 다룰 수 있구나. 저런 재주 같으면 나도 얻고 싶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이러고 돈 주고 사려고 한 거예요. 이 시몬의 잘못된 점은 뭡니까? 시몬의 잘못된 점.
사도행전 8장 18절에서 시몬 자신의 잘못은 뭐냐 하면, 돈 주고 구매하는 것이 심판받는 세상의 운영방식 중에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나오는 태도가 세상을 떠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았잖아요. 시몬은 세상에서 버림받을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이게 문제에요. 그게 문제라니까요. 세상에서 이름 얻기를 원하고, 세상에서 존경받기를 원했지, 세상에서 사람 구실하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랬잖아요. 악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게 악이라 했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 인간은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다. 자기 새끼를 챙겨야 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그게 악이에요. 무슨 요소가 빠졌습니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누가 쫓겨났습니까? 메시아가 쫓겨났어요.
자, 메시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메시아라 하죠. 그럼 요한일서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2장 20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참… 이거 보통 문제 아니죠. 시몬처럼 나도 성령 받았다, 하고 티내면서 세상 구석구석 자랑질 하고 싶은데…
예수님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잖아요. 메시아잖아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어요. 꼴 보기 싫다고 나가 죽으라고 한 거예요. 그 동일한 기름 부음이 여러분에게 왔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처신해야 됩니까? 시몬처럼 처신해야 되겠어요?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반 속이고 헌금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나니아, 삽비라의 잘못은 헌금을 반 낸 게 아니고, 눈에 보이는 인간과 눈에 보이는 내가 결합해서 세상이 구성된다고 하는 이게 잘못이에요. 이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주도권이 넘어가 있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이미 알아야 되는데 성령은 생각 안하고, ‘사도가 뭘 알겠느냐? 자기가 사도면 사도지. 내가 반 숨기는 거, CCTV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어떻게 알겠어?’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너는 나를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였다는 거예요.
사도 입에서 인간들이 익히 아는 이야기 있잖아요, 이 세상에서 학교에서 배우는 이야기, 그 이야기 말고 더 초과적인 이야기가 나와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오, 사도 대단하네. 똑똑하네.’ 이게 아니고 사도의 말은 현실이 되어서 그에게 즉사가 주어진 거예요. 죽음이 주어진 거예요, 죽음이. 죽었어요, 그래서. 아나니아, 삽비라가. 신문에 났어요, 죽었다고. 헌금 반 내서 죽었다고. 교회에 소문이 확 났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가만있어보자. 내가 헌금 반 속인 적 있는지 한번 계산해보자.’ 하는데 우리는 제가 아까 했잖아요. 누가 죽이든 우리는 주어진 상황 자체가 말씀에 입각해서 주어진 상황에 대해 고맙다고 알고 감사하다고 알면 누가 뭐래도 그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좀 조절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 일어난 일과 나는 상관이 있기, 없기?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리는 그냥 공짜로 얻어진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이걸 알아야 돼요. 공짜하고 이것하고 분간 좀 하셔야 돼요. 공짜라고 해서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되게 비싸요, 이게. 공짜로 주어진 이것이 우리한테는 공짠지 모르겠지만 그 배경에는 예수님의 피로 주신 거예요. 세상에 온 천하를 주고도 그 값이 대체가 안 되는, 그 정도로 귀한 것으로 거저 주신 거예요. 거저 주신 것으로 이 세상을 이기라고 거저 주신 겁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보다 귀하기 때문에 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다는 근거. 사도 요한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요한일서 1장 7절에 나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그다음에 뭡니까?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피가 깨끗케 한다는 것은 주님의 피가 우리를 이미 심판해버렸다는 거예요. 심판을 했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심판이 없기 때문에 사망에서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긴 거예요.
우리가 옮긴 게 아니고, 우리가 통밥 굴려서 ‘자, 뭘 믿으면 영생 얻겠나?’ 해서 안 게 아니라 피의 능력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우리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미 심판받은 자로 규정해서 한번 심판 받은 건 두 번 심판 없습니다. 유월절 같이. 한번 유월절 피 발라놓으면 그냥 넘어가잖아요.
천사가 올 때, ‘이 집은 피 없어도 히브리인이야.’ 하고 그냥 넘어간 게 아니에요. 히브리인이라고 그냥 넘어가주질 않습니다. 히브리인이든 애굽인이든 심판은 제외가 안돼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 쫓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저주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미 저주의 대상인데 어린 양의 피는 이걸 대신해서 치른 거예요. 대신해서 치렀다는 말은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그 안에서 이미 심판이 끝나버린 거예요. 심판이 종결된 거예요.
따라서 이 세상에 어떤 법이라든지 헌법, 형사법, 민사법, 어떤 법이라도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국가의 어떤 법도. 간첩법도 상관없어요. 중국 안가면 되지 뭐. 가고 안가고 죽고 사는 문제는 이 땅에서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상관 안 해도 답답한 분이 따로 계세요. 주님이 계세요. 주님이 알아서 해요. 내가 언제 죽을지, 어디에 갈지, 어디에 웃을지, 어디에 울지.
인간은 되지도 않는 것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고요. 짬뽕 먹을까, 짜장 먹을까. 뭐 기도하겠죠. 주여, 짬뽕 먹을까요, 짜장 먹을까요. 주의 응답은 끝났습니다. 죽은 놈은 상관하지 말라고. 짬뽕을 줘도 공짜고 짜장 먹여도 공짜고. 주께서 그렇게 이 세상과 상관없이 살게 하신 거예요.
자, 한번 정리해봅시다. 지금까지 한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나, 육신, [나는 나와 상관없다]. 나는 나와 상관없죠. 그렇죠? 이미 심판받았으니까. 심판받은 자를 내가 왜 살리려 해요? 심판받은 자는 심판하신 분이 살리기 때문에 내가 굳이 심판받은 자를 살리려 할 필요가 없죠.
[나는 타자(남)와 상관없다] 나는 타자와 상관없죠. 남이 뭐라고 궁시렁거리고 평판해도 나는 거기에 휘둘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나는 나와 상관없다는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저주받지 않으려는 자가 저주받는] 거예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저주받는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뜻이에요.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나를 붙들고 산다는 겁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끝까지 내가 되고 싶은 나에 대해서 집념을 못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까 안양강의에서도 했지만 그 나는 누가 만든 거예요? 나는 누가 만든 겁니까? 남이 만들잖아요. 남이. 내 주변에 있는 가족들, 내 일가친척들, 친구들이 나를 만들었다고요. 맨날 그 사람들한테 묻잖아요. 그 묻는 걸 뭐라고 한다고요? 대화. 전화통화. “야, 잘 있나?” 이거부터 시작하잖아요. “잘 있다.”
그걸 왜 묻느냐 하면 현재 이 순간, 이 시점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나를 어떤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가를 탐색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 너 요새 얼굴 참 좋아 보인다.” 그 소리 듣는 순간, ‘이야, 이거 요새 좀 살맛나네.’ 이렇게 하는데, 전화해서 “그런데 요새 너 얼굴 왜 그렇게 안돼 보여? 무슨 고민거리 있어?” 이러면 그다음부터 ‘이거 보약을 또 한의원에 가서 지어먹어야 되나? 진맥 한번 받아야 되나?’ 또 이 이야기한다고요. 놀아나요. 누구한테? 타인에게. 남들한테 놀아나요.
시어머니가 “야, 며느리 행동 그렇게 하면 안돼.” 타인이죠. 타인이 나보고 그렇게 하지 말라 할 때, 아까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죠. 그런데 남들이 그렇게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구애받죠. “어머님,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갑자기 정신 번쩍 차리고 이렇게 하죠. “야야, 네가 교회 가는 건 내가 안 말리겠다만 세상 살면서 사람이 사람답게는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아, 이거 설득력 있네요. 아, 설득력 있어요. 네가 막 사는 건 아니야, 이런 식으로 설득력 있죠.
갑자기 뭐가 생겼습니까?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잖아요. 옮겼는데 도로 사망으로 들어온 거예요. 이것을 왜 반복시키느냐? 그래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이 말씀이 계속해서 유효해지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그런 시어머니를 만나게 해서 시어머니한테 그런 통화 오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시어머니 아플 때 봉양했다면 또 시어머니 주변에 있는 노인정에서 와가지고 “세상에, 이런 며느리 없다. 복 받겠다. 복 받겠어.” 할 때 갑자기 기분 좋아지고, 뭐 오랜만에 왔는데 “시어머니 보러 한 달 만에 오나. 시어머니가 너 얼마나 씹었다고. 죽을 때 되니까 낯짝 보이는구나.” 이러면 또 기분 확 나쁘면서 자기들이 뭐 안다고 우리 집 살림까지 간섭인가 또 기분 나쁘죠.
도대체 인간의 기분이라는 게 누구한테 좌지우지됩니까? 타인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잖아요. 그걸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걸. 주님은 누구한테 평가받았어요? 주님은 온 사람들이… 제자들까지 전부다 화살을 주님한테 집중시켰습니다. 슈슈슉- 온 화살을 다 맞고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이것이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 목자를 치니 양떼가 흩어진다.” 이게 말씀이라는 거예요, 말씀. 이게 미래라는 거예요. 이미 이 세상에 찾아온 기름 부음이 하실 자기 업무이고 자기 일이에요. 이제 그 업무를 누가 부여받는가? 주님에 의해서 우리한테 부여되었어요. 그것도 선물로. 그것도 공짜로. 따라서 우리는 육신만 제공할 뿐이에요. 일은 누가 합니까? 다 이루심이 우리에게 일을 터트리죠.
자, 구약을 한번 봅시다. 구약을 두 군데 보겠습니다. 사사기 한번 보겠습니다. 사사기 19장 29절. 어떤 레위 사람에게 첩이 있었는데 그 첩이 질 나쁜 동네에 가다가 부랑배한테 걸려가지고 윤간 당해서 죽었죠. 밤새도록 욕을 보이다가 죽었습니다. 베냐민 사람 부랑배들이 그런 짓을 했거든요. 첩이 죽고 난 뒤에 레위 사람이 29절에,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몇 개로 나눴습니까?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택배로 새벽탁송으로 다 보냈어요.
그러니까 보는 사람들이 그 베냐민 지파 부랑배들이 한 짓을 보고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런 짓은 상상도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삿 19:30) 그럴 때, 여기서 그 일로 인하여 벌어진 게 뭐냐? 20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전쟁을 준비합니다. 그 전쟁하는 명분이 있어요. 정의의 하나님이여, 우리 정의의 편에 서서 승리케 하옵소서.
그러면 열한 지파 대 1, 1대 11로 붙는 거예요. 베냐민 지파가 그런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나머지 열한 지파가 나서서 이스라엘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한쪽을 처벌하는 그러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요?
레위인이 열두 토막을 가지고 전 지파한테 다 날렸잖아요.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한 지파가 잘못된 게 아니고 열두 지파가 공동적으로 인정해야 될 죄가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지금 구약이잖아요. 그럼 구약에서 신약에 오게 되면 바로 언약 세계, 언약의 완성이 되게 되면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신앙 공동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것, 성령이 함께 있는 성령 안에 있는 교회가 돼요.
그럼 성령 안에 교회는 이 사람들이 기름 부음을 받은 이유가 내가 착해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까? 아니죠. 일방적으로 누가 준 거예요, 기름 부음을? 누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까? 예수님이 주셨잖아요. 예수님이 주셨죠.
그럼 이것과 구약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이 강간당해서 죽었던 그 사건과 한번 비교해보세요. 구약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한번 보란 말이죠. 구약에서 열두 지파 가운데 베냐민 지파가 죄를 지었잖아요. 그런데 언약적으로 보면 베냐민 한 지파가 죄를 지은 게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 지파가 다 죄를 지은 거예요. 제 말 잘 들어야 돼요.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오해를 하느냐 하면, 베냐민 지파가 잘못되었고 나머지 열한 지파는 그런 흉측한 일을 안 했으니까 이것은 베냐민 지파를 처벌할 수 있는 정의로운 권한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은 뭐냐? 너희 열두 지파가 다 잘못되었다고 보는 게 하나님 뜻이에요. 이 차이가 나죠.
이 차이를 하나님이 어떻게 메꾸느냐 하면 전쟁을 일어나게 해요. 그들은 명분이 있죠. 나쁜 지파를 처단한다고. 전쟁을 했는데 누가 이깁니까? 1차 전쟁, 2차 전쟁, 3차 전쟁. 1차, 2차 누가 이겨요? 베냐민이 이겨요. 누가 많이 죽었어요? 정의의 연합군이 죽었어요.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에요? 장차 올 교회를 생각해볼 때, 이것은 어떤 개인이 범죄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성립되지 아니한다. 다 죄를 지었지, 누구 특정 인간이 죄짓는 것은 이스라엘의 언약적 속성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언약적 속성에.
왜 그래야 되는가? 신약에, 누가 착해서 성령의 기름 부음 받았어? 이게 없어요. 오직 예수님 때문에 다 같이 의인되었고 다 같이 이 세상과 상관없고 다 같이 이 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심판해야 될 책임이 있는 바로 거룩한 성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여기서 개인이 어디 있습니까? 개인 있어요, 없어요? 개인은 없죠. 개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사사기는 이제 째든지 지우든지 매직으로 그어서 없애야 되겠네요.’ 이렇게 나오죠. 아니에요. 구약 사사기 이 이야기가, 이 오류가, 이 인간들의 성급함과 잘못이 그들이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지금 성도인 우리도 육신을 갖고 있죠. 사사기적 요소의 오류가 우리도 일어나죠. 그러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 갑자기 십자가 은혜 공짜로 준 건 다 잊어버리고 나는 잘났는데 너 나빴으니까 내가 너를 처벌하겠다는 권한이 막 발동되겠죠.
그럴 때 다시 한번 주께서 피 흘린 것을 생각나게 하는 하나의 동기가 돼요. 이 땅에서 주어진 상황이. 아, 우리는 다 죄인이었지. 그것도 죄인 중에 괴수였잖아. 누구는 나보다 더 나쁘고 악하다는 게 없다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게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5장에서는 이걸 너무나 축약해서 너무나 단순화시켰어요.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된 것처럼 예수님 한분의 의가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어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 아주 축약을 시켜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지식으로 받아들여요.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우리의 목숨이 계속 진행되어야 돼요. 인생을 계속 살아가야 됩니다. 살아가서 ‘내가 의인된 것은 예수님 때문이고 내가 죄인된 것은 남보다 성격이 더 못돼서가 아니라 조상 아담의 죄 때문에 죄인 되었다.’ 라고 고백할 때 그 두 개가 합쳐서 언약맨이에요. 그게 노아의 방주입니다.
하나님의 창세 전 계획한 것이 우리가 주어진 삶의 상황 속에서 툭툭 일어나죠. 요한일서에서는 그걸 기름 부음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너희가 기름 부음 받았기 때문에 말씀의 완성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 몸을 언약을 드러내는 계기로 내가 사용하겠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약에서 한 군데 더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호세아 찾아보겠습니다. 호세아 1장에 보면 1장 2절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그런 자가 된 거예요. 이것에 대해 설명을 좀 해야겠어요. 구약에서 우상 섬기는 것을 ‘음란한, 간음한’ 이라고 표현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여기 있어요. 남자, 여자 차이점 때문에 그래요.
남자의 기능과 여자의 기능을 창세기 2장에서부터 성경에서 나누고 있습니다. 3장에 가면 남자, 여자가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해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죠. 쫓겨 나가고 난 뒤에 남자 역할, 여자 역할은 처음에 있을 때보다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3장에서 보여줍니다.
여자는 남자를 노립니다. 당연히 소유성이 포함되어 있어요. 남자는 다른 것을 노립니다. 다른 것을 노리면서 여자를 자기 소유로 삼아버려요. 여자는 남자를 소유해야 소유되는데, 남자는 여자를 자동적으로 소유된 것으로 간주해요, 자동적으로. 남자는 자기 세계건설을 노립니다. 여자를 예속시켜서 ‘내 하는 일에 너는 배필이 되어라’ 이런 구조가 되어버린 거예요.
여자는 세계건설, 이딴 거 관계없습니다. 여자는 그냥 솔로가 되어가지고 16기 상숙이처럼 남자만 노리면 되는 거예요. 남자만 노리고 세퍼트처럼 이빨로 물어서 안 놓으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여자에게는 남자가 노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노림의 대상이 되면서 자진해서 예속되려는 욕망을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뭐로? 벌칙으로 주신 거예요. 이게 벌칙으로 준 거예요. 벌의 한 일종이에요. 이게 벌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설명할 때, 바알신이죠, 바알신을 설명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이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데 있어서 예속되는 걸로 이미 삼아버렸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가 부부관계라는 사실을 언약관계를 통해서 맺어줬다는 겁니다. 이제 어려워요. 이게 어렵습니다.
언제 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길 때 그걸 간음이라는 용어, 음란이라는 용어로서 ‘네가 왜 다른 남자를 찾았느냐? 이 여인 같은 이스라엘아!’ 이렇게 묘사를 해버리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을 여인으로 설명하느냐? 그게 바로 호세아에 나옵니다. 음란한 자식을 낳아야 되기 때문에. 음란한 자식을 낳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는데 이스라엘을 통해서 비-언약적이고 하나님께서 저주받을 자식, 내 백성 아닌 자식을 하나님 백성에서 낳게 만들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미 남편이 누구냐? 남편은 여호와 남편이죠. 여호와 남편이라면 인간 이스라엘을 위한 세계는 언약적 입장에서는 없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여호와의 관리체제 하에 흡수 통합된 자에요.
여호와께서 뭘 보여주느냐? 죄를 양산하는 그 작업에 여호와께서 돌입하신 거예요. 이미 죄 지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게 뭐냐? 이스라엘마저 이 세상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 세상과 상관없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면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게 뭐냐? 이 세상에 아무도, 하나님 백성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하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건 뭐냐? 오직 기름 부은 자, 기름 부은 자만이 진정 내 아들이 되는 거예요. 진정 기름 부은 자만이 내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호세아가 있음으로서, 호세아가 없는 것보다 있음으로서 장차 예수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예수님이 자기 신부를 구해버려요. 정결한 신부를.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은 정결한 신부되는 데에 탈락했다는 겁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가 오시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가 될 수도 없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것을 미리 인간의 한계와 취약점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 기능을 한 겁니다. 그 역할을 담당한 거예요. 호세아에서.
그래서 뭐? 그건 그렇고 그게 왜 오늘 이 세상과 관련되어 있는가? 세상이라는 것을 구약을 가지고, 망해버린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세상에다가 집어넣자 이 말이죠. 아니 그걸 왜 집어넣어야 되느냐? 집어넣어야 기름 부음의 의미가 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기름 부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기름 부었기 때문에.
그럼 세상 좀 좋아하면 어떠냐? 좋아하는 그것이 호세아에 나오는 내 백성 아님의 표시라는 거죠. 그러면 이 세상 좋아하지 말고, 열심히 하나님 사랑해야 되느냐? 아니. 그럴 능력은 우리한테 없어요. 그럼 어쩌란 말인가? 기름 부음이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조치함을 네가 받아들이는 자가 하나님의 성도라는 뜻입니다.
이 긴긴 논리, 그래야 구약의 이스라엘과 이 세상의 내용이 채워져요. 이 세상의 내용은 그냥 ‘세상이다’가 아니라, ‘예수님 버렸으니까 세상’인 게 아니라, 구약 때부터 인간들이 열심히 바르게 살려고 백날 애를 써봤자 구약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이것이 세상의 한계임을 이미 구약에서 실험 실습 다 끝난 이야기에요.
우리로서는 우리 힘으로 해서 세상 사랑 안하기가 어려워요. 힘들어요. 육신 자체가 그러니까요. 또 하나님께서 그걸 의도해서 그런 죄를 키웠고요. 따라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세상이란, 나쁜 짓하는 인간들의 집합이 아니죠. 아닙니다. 세상이란 나쁜 짓하는 인간들의 집합, 경건치 못한 자들의 집합 아니죠. 이거 아닙니다. 이건 너무나 세상적이에요. 그럼 [세상이란 메시아를 믿지 않는 것], 이게 정답이에요. 예수님의 기름 부은 자, 메시아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착한 사람도 많지 않느냐? 주님 보시기에 메시아가 봤을 때, 이 세상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바다처럼 흐르고 넘치는 세상으로 내가 그렇게 만들고야 말리라. 메시아가 없어도 착한 사람 있지 않느냐, 에 대해서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풍성하도록 그렇게 내가 조장해나갈 거라는 거예요.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 세상 자체에서 이게 분별이 안 되고 분간되지 못하게 내가 만들겠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생각하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봐서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세상 자체가 세상이어야 되지. 그래야 기름 부음이 의미가 있어요. 더 쉽게 이야기할까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세상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에게 분간되는 게 세상이고, 성령을 받지 아니한 세상은요, 그냥 나쁜 사람들, 교도소 갈 사람들, 돈만 아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이런 거 피하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자연인 되면 돼요. 지리산 들어가면 돼요. 도 닦으러 가면 돼요. 세상 더럽다 욕하면서 자기는 고고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기도원 짓고 수도원 짓고 살면 돼요. 천주교처럼 수도원 있잖아요, 사진기자도 못 오는, 신문기자도 못 들어오는 그런 데 있잖아요. 도 닦는 사람들. 세상을 도피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미하는, 기도하라 노동하라 이런 거 있잖아요. 오직 경건한 마음으로 드리는 거.
그게 세상이에요. 다시 말해서 그게 바로 기름 부음을 거부하는 마귀의 소굴이 되는 겁니다. 말씀 자체의 능력 말고 내 종교심으로 뭘 해보겠다는 그것이 바로 마귀가 대장질하고 있는 세상의 현장성이에요.
결국 요한일서 이 대목을 마감하면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하나님께로 온 게 아니고 아버지께로 온 거죠. 그럼 아버지에게 의미 있는 것은 뭐냐? 아버지니까 아들이죠. 예수님께 의미 있는 거죠.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화목 제물을 모르는 것은 예수님 피가 언약이기 때문에 전부다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것을 이미 아는데 여전히 우리의 육신은 이걸 지식으로만 떡 걸쳐있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공짜로 우리에게 이것을 지식이 아니고 현실로 바꿔주시는 아주 친절함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친절함 때문에 내 것 다 날아가고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죠. 너무 친절해서.
그런데 어떤 경우든지 고맙고 감사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새롭게 새롭게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주어진 성경책을 우리는 마치 내가 살기 위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책으로 오해했었습니다. 다 끝난 문제인데. 다 이루었고 다 끝난 문제, 주의 다 끝났음이 무슨 뜻인지 우리 내부에서 주께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날마다 그 활동을 감지하는 하루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