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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1009a 부산강의 : [시편]62(46:10)-자기 환멸자유게시판시편

20231009a 부산강의 : [시편]62(46:10)-자기 환멸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46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그렇게 시작하지요.

여기 ‘피난처’는 전쟁 중이다, 한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난처, 전쟁 중, 여기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것, 다른 말로 구출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인식해요. 새삼스럽다는 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안락하게 살기를 원하거든요. 전쟁이 없기를 원하고 평화를 원하는데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 살다가 일방적으로 포로 잡힌 생활하다가, 노예 생활하다가 나왔잖아요.

그들에게는 전쟁 개념이 없습니다. 전쟁 개념은 나의 것이 있을 때 전쟁 개념이 생기는 거예요. 나의 것. 그러나 포로 잡혀있는 그런 처지에서는 노예가 뭐냐 하면 자기 것이 없어요. 자기 것이 없을 때는 무슨 개념도 없느냐 하면 구원 개념도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냥 현실에 속해서 살면 되지 좀 이렇게 힘들더라도 그게 전부에요. 내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여기서 필사적인 투쟁 의지가 발생되는 거예요. 내 것이 있을 때.

마르크스란 사람 이름 들어봤지요. 공산당혁명 선언한 사람. 마르크스가 공산당을 주장할 때 사유재산을 주장했어요. 사유재산의 대상이 누구냐 하면 자본가들입니다. 자본가와 대치되는 개념이 뭐냐 하면 노동자 계급이에요.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의 특징은 사유재산으로 봤을 때 자본가는 사유재산에 이미 들어온 사람이고, 노동자는 자기 사유재산이 있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노동을 팔아서 그때그때 먹고 살아야 되는 존재거든요. 초창기 산업혁명 때 그랬었어요.

산업혁명 이전에는 농사, 토지에 의해서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토지는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기독교 성직자들과 귀족들과 왕, 기사 계급이 갖고 있었잖아요. 수도원도 갖고 있었고. 그런데 그 사회는 봉건사회라서 삼각형 위치에서 그냥 이 질서 자체가 신이 주신 질서기 때문에 그냥 참고 살면 돼요. 굳이 내 사유재산을 할 이유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돈 대신에 뭐냐 하면 신앙이었어요. 세상 대신에 뭘 갖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함을 갖는 거예요. 그걸로 그냥 유지되는 것이 중세사회였습니다.

중세봉건사회가 14세기, 15세기 실정에 이르면서 그 뒤에 군주, 임금님, 왕이 지배하는 나라로 전쟁이 있는데 그거는 서민들의 전쟁이 아니고 왕의 전쟁이에요. 왕들의 전쟁이라고요. 자기들의 게임이었어요. 그런데 마르크스가 산업혁명을 통해서 인간이 두 종류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하나는 재산이 있는 자와 재산 없는 자.

그러니까 재산 있는 자는 자본가가 되고, 왜 그러냐 하면, 왜 자본가가 재산 있는 자가 되느냐 하면 재산 있다고 자본가 되는 건 아닌데 자본가의 특징은 자기 재산을 그냥 그 자리에 고정적으로 유지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재산은 더욱더 늘이는 전쟁을 다른 자본가와 함께 전쟁 벌이는 자였어요.

‘있는 돈으로 살지’가 아니라 전쟁에 나서는 데 자본가들의 전쟁을 뭐라 하느냐 하면 이게 유럽 자본가고요. 뒤에서 유럽 자본가가 저희들끼리 자본을 서로 대치하니까 빼앗아야 물러나니까 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자본은 어디서 얻느냐 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얻는 겁니다. 이게 제국주의시대, 침략주의시대에요. 유럽의 자본가들이 벌인 전쟁입니다. 그 당시 국가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운영되었기 때문에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고요.

그 전쟁이 있기 전에 19세기, 20세기에 들어가면 1차, 2차 대전이 일어나잖아요. 그 전에 마르크는 뭐냐 하면 자본가의 전쟁에 노동자들이 이용당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아 궐기하라. 너희들도 너희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런데 사유재산을 왜 못 가졌느냐? 자본가가 빼앗아 갔잖아. 이제는 어떤 전쟁을 벌이느냐? ‘내 돈 내놓으라는 전쟁을 벌여야 된다.’ 이게 노동자고 이게 바로 노조지요. 노조가 되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 전쟁 이야기했어요, 제가. 전쟁 이야기할 때 거기서 등장하는 게 뭐냐 하면 종교 성향을 띠어요. 전쟁을 하게 되면 거기서 전쟁에 가담한 종교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데 그 종교적 성향을 대변해주는 게 구원이에요. 구원, 구출이죠. 그러면 자본가의 전쟁에서 구출은 무슨 개념입니까?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이죠. 언제까지? ‘이 가난은 내 시대에서 끝내야 된다. 내 자식까지 가난을 대물림할 수는 없다’ 이거에요.

옛날에 중세 때는 좋은 것은 상위 층에서 다 누렸잖아요. 지금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 구출은 뭐냐 하면 가난에선 벗어났는데 벗어났으면 방향이 목적지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가난에서 어디로 목적하느냐 하면, ‘상위 층에서 누리는 것 우리도 누리자’ 그게 도착지점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물어봅니다. 그들이 진정 자본가 돈에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자본가 돈을 탐내지요. 탐내는 그게 현실화되는 거죠. 분명히 종교적인데 그 종교가 누구를 풍족하게 만드는 종교냐 하면 내 몸뚱이를 풍족하게 가난에서 부유하게 사는 내 몸으로의 구원을 의미하지요. 현대 이 사회가.

귀족들의 누리던 넓은 침대를 우리 집에도 들이고, 귀족들이 누리던 고급차가 우리 집까지 들어오는 거예요. 10대, 20대, 30대 그들이 지금은 그들이지만 40대, 50대 사람들이 20대 때 구원이란 바로 잘 사는 사람들이 누리던 학교 도시락 반찬에 소시지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염원해서 그들은 살아왔고 40대에 먹잖아요. 그런데 지금 10대, 20대의 구원은 뭐냐 하면 돈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찾는 거예요. 자기의 자유를. 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일체 간섭 없는 걸 구원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길게 이야기한 모든 구원의 초점은 어디 있습니까? 여기 붉은 걸로 써놨지요. 내 몸의 절대성. 그러면 오늘날 종교도 그렇고 다 마찬가지지만 내 몸 하나 절대성인데 옛날 사람들은 안 아프면 된다 하는데, 그게 아니고 지금 내가 원하는 노래, 내가 원하는 춤, 내가 원하는 시간 보냄,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간섭 없기, 이걸로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의 몸은.

자, 그러면 비교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비교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있습니다. 그리고 10대, 20대 몸이 있습니다. 걔들은 왜 이렇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느냐 하면 지금 10대, 20대들은 날 때부터 이미 집안에 화장실이 두 군데 있어요. 이거 미치는 거예요. 화장실이 집 바깥에 마당에 있는 게 아니고 내 화장실이 있어요. 그리고 자기 집이 있고, 자기 방이 있고, 자기 침대가 있어요. 자기 인형을 놓을 수 있는 침대가 있고요.

이거 놀랍지 않습니까? 자기 침대가 있다는 거요, 자기 방이 있다는 거요. 문 콕 닫으면 자기세계에요. 어떻게 자기세계가 보장이 되죠? 그리고 부모가 자식한테 명령을 하면 안 돼요. 119 신고하기 때문에. ‘얘야 내 생각은 이런데 네 생각은 어떠냐?’ 의견을 물어요, 요새. 돈 버는 쪽이 돈 쓰는 쪽에게 의견을 묻는 게 이게 무슨 사회입니까?

돈 벌어줬으면 그 자체가 왕초, 왕인데 어떻게 왕이 돈을 빌어먹어야 될 신하한테 의견을 묻습니까? 그게 말이 돼요? 그것도 말도 못 놔요. ‘아드님’ 이러고. 미치겠어. ‘우리 공주님’ 이러고 있다고.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특히 공주가 키우는 개나 고양이에게 털만 건드려도 난리 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의가 나와요, 예수님의 이름이 나와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오고, 특히 예수님의 의, 이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몸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이게 왜 나옵니까? 예수님의 구원하고 오늘날 우리 몸의 구원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의와 이름과 그것이 왜 나옵니까? 나오는 이유는 제가 아까 초반에 이야기했어요.

전쟁 중에 있기 때문에 나와요. 누구와의 전쟁이죠? 보이지 않는 존재, 유령, 귀신 뭐 다 돼요.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전쟁 중입니다. 따라서 본격적인 예수님의 능력은 예수님 자체가 보이는 세상에서 나사렛 예수, 실제로 나사렛 동네 예수에서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보이는 세계에서 죽었다가 어디로 들어가십니까? 보이지 않는 영역, 부활의 영역, 성령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뭘 있느냐? 그동안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통치하고 왕으로 지배했던 악마가 일으키는 현상들을 주님께선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성령으로 이 보이는 세계에 주시는 겁니다. 보이는 세계에 예수님만 오신 게 아니에요. 보이는 세계에 예수님과 더불어서 성령께서 함께 계셨거든요.

이제 예수님은 빠지고 성령께서 예수님만 왔던 세계에 오순절 날 성령을 통해서 보이는 세계에 보이지 않는 영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에 보이지 않는 존재 악마에 메여있던 인간들을 주님의 의와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부활 능력은 십자가에서 나오니까,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들로 하여금 실질적으로 뭐해주느냐? 구원과 구출을 해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가 뭐냐 하면 이 인식을 가져요. 어떤 인식이냐 하면 영적 전쟁 중이라는 인식을 가진 자만이 이게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뭡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싸움이 아니죠. 정치적 이재명, 윤석열의 싸움이 아니지요. 김건희 논문, 그것과 싸움이 아니지요. 메달 따는 것과 군에 안 가는 것과 아무 관계없어요. 우리의 싸움은 우리의 씨름은 유도, 레슬링 그것 아닙니다. 축구, 야구 아니에요. 안세영 배드민턴, 신유빈 탁구 이 싸움이 아니에요. 우크라이나 전쟁,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그 전쟁이 아니에요. 우리의 싸움은.

인간 전쟁은 힘의 우열로 결정 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게 되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디에 보내느냐 하면 힘의 열세를 만들어서 힘을 작게 만들어서 월등한 나라를 받치는 부딪치는 마주치는 마찰시키는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그 전쟁을 이름하여 무슨 전쟁이냐 하면 이걸 ‘붙이심의 전쟁’이에요.

이 붙이심의 전쟁을 오늘날 현대어로 바꾼다면 예수님의 몸과 누구의 몸? 우리의 몸뚱이, 우리의 육신과의 전쟁이죠. 우리는 아무리 교회 나와서 기도를 해도 내 육신으로부터의 구원을 원하지 않아요. 오히려 내 육신을 보존하는 전쟁을 타인의 육신과 더불어 전쟁을 벌이는데 힘이 모자란다고 기도하러 왔다고요. 빌고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죠. ‘저 사람은 건강하고 난 왜 아프냐?’ 이런 것. ‘저 사람은 왜 잘 사는데 나는 못 사느냐?’

여러분 아픈 이유는 간단해요. 일을 많이 해서 그래요. 그럼 자본가가 왜 아프냐? 그건 신경을 쓰는 일을 많이 해서 그래요. 마르크스가 몰랐던 것은 일이라 하는 것은 시간 타임으로 일의 강도가 결정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 중국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이론에 의하면 의사보다, 교수보다 노동력이 집중돼 있는 광부들이나 그것으로 노동시간을 결정하자 하는데 그 사람들은 너무 몰라요.

자본가가 노동 강도가 더 심해요. 그건 어떻게 아느냐 하면 개인사업체 하는 사람들 회사에서 잔업 시킨다고 기분 나빠서 사표내고 자기 커피카페 차리고 파리바게트 해놨는데 지 노동시간은 16시간이 넘어요. 편의점은 24시간 넘습니다. 노동 강도가 너 세요. 자영업이 더 세다니까요. 수입은 더 적고요. 그래서 얻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자율성, 그것 하나 챙겼지요.

이 몸이라는 것은, 방금 이야기한 몸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데 우리 몸은 자기 의가 나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싸우는데 이거는 자기 이름을 걸고 싸워요. 여기는 십자가 죽음을 이긴 부활의 능력이 나오는데 이거는 악마의 능력, 죽음에 매인 하면 할수록 점점 죽는 능력 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인간이 알고 있는 구원은 그런 몸뚱이지만 이것을, 어려운 거예요. 뭐냐 하면 타인 또는 타자와의 경쟁에서 상대적 승리하면 이걸 구원이라고 이야기해요. 상대적 승리를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60년대에 그런 일이 있거든요. “너희 집에 필리핀 파출부 몇 명 써?” “두 명 써.” “나는 세 명 써.” 이런 걸 이겼다, 졌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과연 이 이야기가 맞는지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제부터 성경 찾는 시간 한 10분 보내겠습니다. 이참에 성경 안 보는 것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시편 106편 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구원의 주체가 바뀌네요. 나 구원 없어요.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나 구원, 기존에 교회에서 말하는 자기 구원은 애초부터 삐이익,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은 하나의 연극무대고요, 이 연극무대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하기 위한 환경으로서의 구원이에요.

우리는 이 세상이 내 구원이 위해서 있는 세상이 주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세상이에요. 왜냐하면 주님 자신에겐 누구 이름이 있습니까? 주님 자신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건지기 위한 구원 외에는 일체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나의 구원은 없어요. 나는 이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내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천 년 동안 기독교는 뭐냐, 천주교는 뭐냐? 구라 친 거죠. 사기 친 겁니다. 하도 인간은 마귀에 의해서 자기 몸뚱이밖에 모르고 지 몸 편한 것을 구원이라고 이해하거든요. 그걸 흔히 말해서 복 받는 걸 구원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자기 몸뚱이가 복 받는 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스라엘에게 복이 온다고 이야기했잖아. 구약에 나오잖아. 그거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께서 인원수를 체크는 대상이에요. 이스라엘 빼놓고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이스라엘도 사람이라 보지 않고 체크해서 체크에 해당되는 사람만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왜? 창세기 3장에서 모든 인간은 흙이니까. 하나님께서 분리했기 때문에 우리가 대들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언약이 주어진 민족과 그 외의 민족을 구분했거든요.

그러면 언약이 없다는 말은, 시편에 나와요. 언약이 없는 자는 저주를 퍼부으소서. 왜? 이미 복이냐, 저주냐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협의해서 결의한 게 아니고 창세기 12장에 보면 복과 저주의 기준점을 제시했습니다. 내가 언약을 주노니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만 복이 오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하는 자는,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겐 저주가 주어진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뭐 잘나서 그러냐? 아브라함이 잘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아브라함이 주가 아니고 아브라함은 하나의 언약의 객체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자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노아도 마찬가지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언약도 안 보여요.

언약이 안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언약과 하나님이 선택한 아브라함, 선택한 노아가 만나니까 거기서 하나님의 언약이 노아의 삶,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구체화돼 가는 거예요. 그럴 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 그와 함께 있다, 또는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다, 또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신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조차도 사람을 차별하는 거예요. 그 사람 차별에 무장돼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은 뭐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노아의 하나님이 동행하고 에녹에 동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동행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또 하지요. 이스라엘이 뭐 잘났다고 하나님이 동행하느냐, 왜 특혜를 받느냐? 이스라엘 나라가 없는 나라에요. 이스라엘 나라는 혈육으로 된 나라가 아닙니다. 혈육으로 된 나라는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으로 된 나라에요. 지금 이스라엘은 오해하고 있지만.

그것이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지요. 이사야에도 나오고요. 잉태치 못한 자가 복이 있어요. 결정타입니다. 잉태치 못하면 뭐가 없어요? 몸이 없지요. 육신이 없지요. 육신이 없는 자가 복이 있고, 이 말은 육신이 있는 자는 모조리 다 저주다, 이 말입니다. 아담이 행한 범죄를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저주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갖고 있는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어떤 공통점을 찾아서 신의 뜻을 구성하려고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말씀으로 시작해야 되지 눈에 보이는 인간들 은혜 받은 그런 것 끌어 모아서 하나님의 뜻이 이럴 거다, 라고 하는 그거는 안 됩니다. 그게 왜 안 되느냐 하면 우리 몸뚱이에서 자기 의가 나오지요. 이 자기 의가 결핍성을 지녔어요.

모든 인간의 자기 의는 결핍돼 있습니다. 채우질 못해요. 온전한 의로. 아니 하나님께서 이게 결핍돼 있다고 유도를 해주셨어요. 뭐냐 하면 자기 의와 뭐와 만남? 율법의 만남이에요. 로마서 3장에서, 자기 의와 율법이 만나면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돼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19절). 한 동안 입 막고 있었잖아요, 전 국민이 코로나 때문에. 입은 막았는데 자기 의는 왜 안 막겠어요? 분명히 성경에…….

자기를 지적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마스크를 벗어버리고 성경 가운데서 자기가 원하고자 하는 데에 대해서 성경말씀을 거기에 달달 외우지요. 바짝 신경 쓴 거예요. 그러면 성경말씀 가운데서 자기 의의 결핍을 유도하고 그걸 지적하는 말씀들이 어떤 말씀이 있겠습니까? 그게 방금 이야기한 율법, 하나님의 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하려 함이라, 이런 말씀.

그리고 또 대표적인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자기 영광을 위함이라. 자기 챙기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고 그 유대인들은 너무나 철저하게 육신적이었고, 그 육신적인 이유가 지 아비가 악마기 때문에 그렇다. 악마의 자식이기 때문에 자기 육신만 챙기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을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소경이다. 예수님이 관여한 사람만 눈을 뜬 사람이고 예수님이 관여하지 않는 사람은 모조리 다 소경이다. 그리고 소경도 소경이고, 눈 뜬 사람도 소경이에요. 육신적으로.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소경을 실로암 못가에 씻기면서 단계를 두 단계를 줍니다. 하나는 육신에서 눈 뜨는 것과 그다음에 자기로부터 눈 떠서 누가 나를 치료했다는 사실까지, 그게 두 번째 단계에요.

예수님을 알아본 게 눈 뜬 거예요. 따라서 처음부터 눈이 감긴 장님이라도 바로 눈 뜬 코스 안 밟고 바로 예수 알아버려요. 그 사람은 장님이라도 눈 뜬 사람 돼요. 단계 다 밟을 필요 없어요. 바쁜데 언제 단계를 다 밟아요. 바로 예수 알면 되지요. 유대인들은 생각했어요. 가난한 것은 주의 저주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오병이어 해주니까 바로 기대했던 메시아다. 모세는 기도해서 하늘에서 먹을 걸 만나를 주셨듯이 그 모세가 예언하기를 나 같은 선지자가 내 뒤에 온다고 했으니까 유대인들은 그걸 기다린 거예요. ‘드디어 그분이 오셨다! 메시아가 오셨다!’ 우리가 진짜 내 몸뚱이가 안락하게 풍요할 수 있는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셨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찾는 것은, 네가 육을 왜 찾느냐? 네가 배부른 까닭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배부르기 위해서 왔다면 너희들은 모조리 다 가짜라는 뜻이에요. 교회 배불리고 돈 벌기 위해 왔다면 모조리 다 가짜라는 거예요. 다른 코스 있잖아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네가 가난에서 벗어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예수님 알면 이것이 바로 결핍된 나의 의에서 결핍이니까 고장 났잖아요. 고장 난 것을 왜 그렇게 거기 집착하느냐 말이죠.

이 고장 난 인간의 자기 의는요 타인의 의와 비교해서 남보다 착하면 신께서 복 주고 저 사람보다 못하면 저 사람보다 더 못 산다, 이런 선악적인 논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기 의를 주장한 겁니다. 인간의 몸은 가만있는 게 아니에요. 계속해서 나오는 게 자기 의가 나오는 겁니다. 자기 의란 뭔 뜻이냐 하면 못난 나가 의가 유지되면 잘난 나가 돼요. 나는 그대로 있어요. 못난 나가 잘난 나, 그러니까 못났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타인과 비교해서 아는 거예요.

요 근래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뭐로 이해했느냐 하면 스승으로 이했다고요. 나의 구세주로 이해한 게 아니고 스승이에요. 랍비라고 했다고요. 왜 제자들이 스승을 찾느냐 하면 스승 없던 시절보다 스승 있는 시절이 남들에게 타인에게 보여줄 게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교회 가기 전에는 무식하고 짐승 같이 살았지만 교회 나오고 난 뒤에는 내가 점잖은 훌륭한 인격자로 거듭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교회 나간 거예요. 뭐는 여전해요? 나는 끔쩍도 안 했어요. 내가 끔쩍도 안 하면 여기서 자기 의, 자기 이름 계속 나오는 거예요. 성경 찾기 10분만 한다고 했는데 더 해야 되겠다.

아까 시편 106편 8절 이야기했습니다. 인간 구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구원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 자기만을 건지기 위한 구원이었다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 자기만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뚱이만 구원하는 거죠. 근데 그 몸뚱이가 확장된다면? 예수님의 몸이 하나의 새로운 몸의 머리 부분을 차지한다면 예수님의 몸은 뭐가 필요하다? 몸통이 필요하겠지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에서 왕 제도가 보여주는 겁니다. 왕과 백성이 머리와 몸통 관계에 있어요. 따라서 백성이 사적으로 아무리 열심히 한들 복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백성이 아무리 부족하고 못나도 저주받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대표자 관계거든요. 하나님과 대표자 관계에 다윗언약에서는 왕만 들어가요. 이걸 왕 계약, 다윗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왜 왕에서 그러한 권한을 주었느냐? 왕이 레위 지파를 통솔할 수 있게 되었어요. 다윗언약 이후에. 레위 지파가 성전관리하고 유지하는 데에요. 그렇다면 왕은 성전관리의 총책임자가 돼버리는 겁니다. 성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날 생각이 있다는 뜻이에요. 어디서 만나는가? 성전에서 만나지요. 왜?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니까요.

성전의 한 가운데는 비어있어요. 그 빈자리에 대제사장도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가야 돼요. 이 말은 인간이 못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그 장소에 누가 상주하고 있습니까? 주의 이름이 상주하겠지요. 이게 성전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 만난 사람 있는데 누구지요? 이사야.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어디 가서 하나님 만났습니까? 성전에서 만났지요. 그때 이사야가 느낀 것은 뭡니까? 자기의 백성들과 동일한 입장인 걸 느꼈지요.

다윗언약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왕이지요. 그럼 백성은? 백성이 잘나고 못나고 아무 상관없어요. 왕이 중요한 거예요. 그럼 이사야에서 성전에서 고백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망하는 백성 중에 한 사람이라고 본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고백하기를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것은, 망하지 않는 복이 오는 왕이 누구다? 성전의 주인공이신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란 뜻이에요.

그 보이지 않는 왕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직접 사람으로 오실 때가 있어요. 왕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올 때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이 에스겔 37장에 나옵니다. 37장 24절 누가 읽어보세요.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됐습니다.

왕이 주어지는 데 그 앞에 보면 하나님이 다윗이 된다, 하나님이 왕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직접 왕으로 오시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걸 메시아로 봤고요 메시아 오게 되면 모든 게 끝났지요. 왜? 인간이 부족하냐, 안 부족하냐를 묻지 않고 어디한테 묻는 거예요? 제대로 된 왕, 그리고 그분이 나라를 만들어요. 왕이 오셔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거든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뭐가 있느냐 하면 그 나라와 의,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모든 게 끝나요. 세례 요한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회개하라 그분이 오셨다는 거예요. 끝나는 거예요. 시간을 더 이상 진척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한테 간접적으로 묻게 돼요. 자기는 옥에 갇혔으니까. 오실 그분이 그분입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왜 시간이 자꾸 지연되느냐는 거예요. 하늘에서 불 심판이 왜 안 떨어지느냐?

이거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이 메시아 맞아?” “맞아.” “그렇다면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왜 구름 타고 안 왔어?” 왜 구름 타고 안 왔느냐, 이 말입니다. 주께서 하는 말씀이, “올 건데?” 인자가 구름 타고 온다고 돼 있어요. 그 말은 아직도 예수님이 해야 될 텀이 있어요. ‘다 이루었다’까지는 아니에요. 그럼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어디서 외치는 겁니까?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에요. 부활은 ‘다 이루었다’에 의한 환경, 새로운 공간 조성이에요.

여러분 자석이 있으면 주변에 쇳조각이 끌리잖아요. 자석을 수건으로 덮었다고 봅시다. 그런데 동서남북에서 쇳조각이 본자리에 있지 않고 슬슬 끌려온다면 그 가운데 뭐가 있다고 짐작됩니까? 자석이 있다는 게 짐작되지요. 부활은 그 끌리는 장, 필드 그게 부활이에요. 그럼 중간에 부활을 끌어당기는 자기 백성을 끌어당기는 이스라엘을 끌어당기는 그 중심에 뭐가 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끌려온 사람이 부활 보고 끌려온 게 아니에요. 십자가 보고 끌려오는 거예요. 왜? 십자가는 미련한 거니까. 십자가는 비밀이니까. 그리고 십자가에는 누구 상처가 있느냐? 내 상처가 있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있어요. 주님의 몸에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주의 몸이 뭐냐? 이 땅에 육신의 모습으로 왔지만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분이에요. 잉태의 주체자가 성령이에요. 마리아가 아니고. 마리아는 그냥 배태한 거고, 환경이고.

육신이 말씀된 게 아니에요. 말씀이 육신된 거예요. 따라서 그 몸은 이사야 7장 14절 말씀을 완성한 겁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요. 이게 참 아는 이야기지만 놀랍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고 무섭다는 표현이 적절해요. 왜냐하면 처녀에요. 처녀가 아들을 낳았지요.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이게 바로 단락이에요. 단절, 끊어짐.

다시 말해서 끊어짐, 단락은 뭐냐 하면 인간이 어떤 신을 생각하든 모든 신은 우상이란 뜻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육신부터 상상하게 돼 있어요. 인간은 육신이죠. 육신은 육신의 생각을 접을 수가 없어요. 이게 인간의 한계고, 이게 문제점이고, 마귀는 그 점을 노렸던 겁니다. ‘네가 백날 교회 다니고 은혜 받았다 해도 너는 네 자신에서 못 벗어나잖아, 이 바보야. 너는 절대로 너 자신에서 못 벗어난다고.’

이걸 누가 아느냐? 악마가 알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예외 된 존재를 악마가 알아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바른 소리를 했어요. ‘예수여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과 나 끊어졌잖아요.’ 끊어져있단 말이죠. 끊어졌는데 교회는 왜 그렇게 예수 찾는 사람이 많은지. 전부 다 안 끊어졌어. 뭔가 백 퍼 가짜 예수지요.

주님과 끊어졌음을 아는 자가 성도인데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과 끊어졌음을 안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죽기 전이기 때문에 나는 뭘 갖고 있다? 이 몸을 갖고 있는 한 나는 이 몸이 만들어내는 자기 의, 자아 있잖아요. 자기 의는 분해돼요. ‘자기 의=자기+의’잖아요. 자기가 뭐냐? 자아지요, 자아. 인간은 자기 자아를 버릴 수가 없어요. 못 버립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상황을 한꺼번에 알게 됐어요. 눈 떴으니까 소경이 아니니까. 눈 떴으니까 내가 나를 못 버리고 나한테 끊어진 상태임을 아는 자가 성도고 이게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육신을 쳐서 자기를 부인한다? 이거는 절도 그런 건 안 한다만 불교에나 하라, 불교에서. 나를 쳐서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믿습니다. 그건 절에 가서 해. 물론 교회란 절을 만들었지만. 밑에도 있어요, 절이.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없기 때문에 주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십자가 질 수 없기 때문에 네 몸과 내 몸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다 떠나버린 겁니다. 몸이 달라요, 몸이. 몸이 다르다고요.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우리의 몸은 비로소 내 몸이 왜 다른지 이유를 알았지요. 내 몸은 바로 육신의 죄에서 잉태되었다는 그 자체가 죄에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성령이 오고 난 뒤에.

그러니까 죄에서 나오니까 그 죄는 뭐다? 자기 의, 자기중심. 자기 의를 보니까 말씀 하나 비교하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결핍이 생긴다잖아요. 결핍이 생기니까 그 결핍성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 나오고 말씀 듣고 성경 보고 기도하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자기 결핍성 때문에. 결핍성이 뭐냐 하면 주님의 이름을 위한 교훈이 아니라 내가 나를 살리는 하나의 방식으로써 시도하는 겁니다.

그럼 여러분은 그 시도를 멈췄습니까, 합니까? 하지요. 해야지요. 왜? 주께서 말씀에 의하면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그러면 죄인 되는 노릇을 죽을 때까지 해야지요. 이것 자기 죄인 되는 노력은 세상에 이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하던 대로 살면 그게 죄가 되지요.

교회 가서 하던 대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던 대로 하면 모조리 죄가 되고, 강의하고 설교하면 이게 죄가 되니까 세상에 이것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쉬운 일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은 성령 없는 사람은 쉬운 일 놔두고 어려운 일한다고 결핍을 채워서 자기 의를 온전케 하려 하는, 세상에 그것 참.

이러한 일을 세상에 나온 가수들도 약간 이런 현상을 무식한 가수 말고 유식하다고 자처하는 가수들도 작곡 작사해서 이런 식으로 세상을 풍자하고 세상의 결핍을 말한 가수가 있어요. 사이먼 앤 가펑클, 두 사람 뚜엣이에요. 그 사람들이 불렀던 거기에 ‘prophets’예언자란 단어가 나와요.

그 예언자가 소리를 주는데 무엇과 대비하느냐?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소리, 인간이 들어서 소통이 되는 언어들과 달리 ‘침묵의 소리’ 마치 보이지 않는 소리끼리 서로 통한다는 시편 19편 같은 느낌, 그러한 가사가 있는데 그건 두 번째 시작할 때 제가 말씀드리겠고 첫째 시간에는 딴 데 봅시다.

시편 54편 1절 봅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이름을 구원해요. 이 땅에 이름으로 오신 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와서 이스라엘과 동행했다 했지요. 그냥 방치하면 안 되잖아요. 건져내야 될 것 아닙니까. 건져냈을 때에, 그러니까 인간들이 자기 이름밖에 모르는, 출생된 자는 자기 이름밖에 몰라요. 자기 몸뚱이밖에 모른다고요. 참 이걸 설명을 여러 번 했지만 하고 싶은데….

인간은 몸만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의가 있음으로서 자기가 있어요. 자아가 있다고요. 자아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고 몸은 보이는 부분이에요. 이게 둘이 인간 속에 있잖아요. 주님께서 오셔서 귀싸대기 때려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어디를 노리느냐 하면 육신을 때리는 게 아니고 육신에서 삐져나온 자기 의를 때리면서 율법이 자기 의를 때리면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을 구원하거든요.

그렇게 할 때 주님이 이미 이스라엘 속에 함께 있단 말이죠. 아까 말씀대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합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이 있어요. 주의 이름이 주의 의가 되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야 돼요. 그 만드는 과정에 혜택 받은 자, 선택된 자가 있어요. 이 자의 특징이 뭐냐? 자기 이름을 버리고 누구 이름을 따른다? 주의 이름을 따른다. 그게 바로 시편 54편 1절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시편 44편 5절 누가 읽어보세요.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주의 이름으로 밟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20편 7절에 보면, 이것만 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러면 여기에 병거, 말, 이게 무력이죠. 힘의 우열로 결정되는 것이 인간 전쟁이죠.

인간 전쟁에서 그들이 아니고 이것, 그들이 갖고 있는 인간의 몸에서 나온 힘이 아니고 주의 이름, 그럼 주의 이름은 뭐냐? 인간의 힘을 빼는 것, 인간이 스스로 힘을 축적하는 모든 시도를 저지하고 거부하고 공격하는 그 능력이 뭐냐? 부활의 능력이고 십자가 능력이고 주의 이름이 발현되는 능력인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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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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