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6b 울산강의-역대기상(24강) 23장 2절 : 실제성과 모호함
20231006b 울산강의-역대기상(24강) 23장 2절 : 실제성과 모호함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성전은 자기를 지키는 곳이 아니고 자기를 버리는 곳입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공간이라는 게 있어요. 그걸 아까 자기 자리라 했잖아요. 자기를 만든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하나님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에요. 하나님께서 거절하는 공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사물적인 것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보인 것 같이 인간의 사물성을 하나님께서는 받지를 않습니다.
받지를 않으면서 결국은 하나님과 인간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뭘 했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내세운 사물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이 뭐가 됐어요? 육신이 되었지요.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다면,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지금 우리가 역대상 이야기란 말이죠. 그럼 역대상 23장 1절에는 뭐냐 하면 여기서 다윗이 등장합니다. 다윗이란 인물이 사물성으로 등장해요.
그러면 다윗은 죄 짓기 전에 다윗과 간음과 살인죄 짓기 전의 다윗과 그 후의 다윗이 달라요. 계속해서 달라지지요.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이런 이야기합니다. 자기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일이었다는 거예요.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난 자, 이것은 내가 평소에 몰랐던 나의 출생의 비밀이었지요.
인간은 자기가 허무한 것도 모르고 그냥 느낌 상 허무한 데 자기 육신을 지키려고 했지요. 다윗은 특히 뭘 지키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리를 자기가 지키고자 한 거예요. 밧세바와 간음한 거나 우리아 장군을 죽인 것도 다 이유가 어디서 나옵니까? 본인이 왕이라는 지위 때문에 생긴 거예요. 일반인이면 그래 하지 않아요. 왕이기 때문에 한 거예요. 왕이기 때문에 자기 부하를 시켜서 죽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 다윗이 느낀 것은 뭘 느꼈느냐 하면 나라는 인간을 내가 모르는 근원, 나의 원천적인 나. 그걸 알리기 위해서 주변에 사건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그 사건 중에 결정적인 사건이 뭐냐? 내가 죽어야 되는데 내 대신 누가 죽은 거예요? 그게 밧세바와 자기 사이에 생긴 아이가 자기 대신 죽었어요. 그리고 자기 대신 죽어야 될 아이는 밧세바의 본남편 우리야의 죽음,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계속해서 영구히 영원토록 나한테 그 죽음을 내 속에 삽입시킨 조건 하에 나를 구원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없애버리고 주님의 믿음을 우리 속에 형식 속에 내용물로 집어넣을 때 그냥 ‘믿습니다’가 들어오는 게 아니고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예수님의 죽음을 내용으로 해서 우리 형식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 소망, 사랑은 어디서 온 거냐 하면 모호한 데서 온 거예요. 모호한 왕으로부터 주어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설 때 이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욥기 38장 18절에 하나님이 욥에게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네가 모든 걸 알아’ 이랬지요.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욥 보고 ‘너 모든 걸 알아?’ 모르지요. 그런데 신약의 성도는 모든 걸 알아요.
모든 게 뭐냐 하면 바로 다윗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다윗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고,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이 사실을 알게 하는 그 일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과 관련돼 있습니다. 기껏 다윗 하나 살리기 위해서? 아니요. 다윗과 똑같은 팔자를 갖고 태어날 분이 모든 것, 그게 뭐냐 하면 다윗처럼 죽었다가 산 것처럼 예수님이 바로 죽었다가 근원적인 죄로부터 가장 근원적인 의로 태어나지요.
그러니까 결국 이건 뭐냐? 부활인데요. 부활 안에 뭐가 있다? 최후의 심판을 내용으로 가질 때 이게 부활이 되는 겁니다. 방금 잘 들었습니까? 부활은 안의 내용이 뭐라고요? 최후의 심판을 내용으로 한다. 그러면 뭐가 부활됐다? 최후의 심판이 부활된 거예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저주의 부활, 저주의 양산, 생산, 그게 바로 성도의 해야 될 사명입니다. 기쁜 저주를 유포하는 자, 즐겁게 저주를 전파하는 자 이게 성도의 할 일이에요. 여러분 앞에 누가 돈 많다고 껍죽대거든 그땐 즐거운 일이 생기지요. ‘저주나 받아라. 네가 최후를 알아? 네가 심판을 알아? 네가 저주를 알아?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 걸 알아?’
그래서 아까 마태복음 7장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22절)라고 할 때 이러한 고백이 불법일 수밖에 없다는 근거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돼요. ‘그런 사람도 있겠지’ 그렇게 건너뛰지 말고요,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불법이란 사실을 그 이유를 필히 아셔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정답 나갑니다. 십자가 앞에서 어느 누구도 내가 했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 때, 강의 때 요 근래 여러 번 한 게 있어요. ‘악’ 다른 말로 죄지요. 악은 무엇이냐? 자기를 소환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불러내는 게 악이에요. ‘가을이다, 허무하다.’ 이게 악이에요. ‘네가 뭔데 가을 없애야 돼?’ 이래 나오거든요. ‘네가 모든 걸 알아?’ ‘모릅니다.’ ‘모르면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탄식하는 거야?’ ‘인생은 허무합니다.’ ‘허무하다는 소리하지 마. 네가 알기나 알고 허무해? 네가 허무하다고 말할 자격조차 안 돼.’ 그 정도로 허무해요.
자꾸 우리의 육신 안을 나를 위한 자리, 나를 위한 공간으로 여기고 있어요, 인간은. 이걸 평생을 다하여 내 공간을 꽉꽉 채울 일만 생각하고 그걸 누굴 만나도 그 이야기만 대화로 나와요. 우리 따뜻한 대화해봅시다. 대화하면 뭐합니까? 그 안에 나는 이래서 허무하지 않다, 그 이야기만 나올 건데요.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목사를 하고, 그 이야기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내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 나올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이러면 되지요.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증인 했는데 그게 죄였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간단하지요. 뒤에 뭐 붙이면 돼요. ‘나는 주님을 믿고 십자가 믿습니다, 라는 믿음이 엉터리입니다.’ 이렇게.
내 자체 안에 반드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대신 죽었어야 할 내용을 내 안에 이미 담겨있는 티를 성도는 감출 길이 없습니다. 왜? 그게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게 모든 것이거든요. 뭐 빛에 대해서 연구해서 노벨상 타고, 화학상 타고 모든 것은 그게 다 노벨상 타도 그게 죄고 안 타도 죄고 가만 놀아도 죄고 설쳐도 죄고 죄 아닌 게 없다는 것, 이게 모든 것이에요.
마태복음 7장에서 불법을 행한 자란 이 말은 내 것을 가지고 지고 들어가야 그게 불법이 아니고 비로소 의가 되는 거예요. 주의 것. 그런데 주님의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란 것은 네 죄 때문에 내가 희생되었다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봅니다, 답변을 기대하지 않지만.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이 눈을 떴잖아요. 소경이 눈을 떴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였던가요?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고, 소경은 눈 뜨게 해줬지요. 그러면 눈 뜬 사람은 새삼스럽게 본인이 뭘 알게 된 겁니까? ‘나 눈 떴다’ 이걸 아는 게 눈 뜬 게 아니에요. 눈 떴다는 말은 내가 누군지 아는 거거든요. 나는 소경이 되나 안 되나 나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한 이게 눈 뜬 거예요. 모든 것에 눈을 뜬 거예요. 나 때문에 예수님 죽었다는 모든 것을 알게 된 거예요. 말썽꾸러기 나 때문에.
아까 세상나라의 왕 제도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어요. 세상나라에 왕이 있다 했지요. 애굽 나라에 왕이 있다 했지요. 그게 아까 사물성부터 시작합니다. 사물성에 사물성을 제곱을 해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여기서 나온다면 인간의 왕이 되는 거예요. 허무하지 않은 육신이 있는 육신을 육신의 극단, 육신의 극한, 최고의 영웅이죠.
우리나라 핸드볼 선수 가운데 국회의원 된 사람 있지요? 여자 핸드볼 선수 임오경, 국민의 영웅이었지요. 국민의 영웅이니까 유명한 게 돼요. 유명하다는 말은 내 사물성으로 해내지 못한 보다 더 수준 높은 다른 더한 것을 추가적인 보여줄 때 그걸 영웅이라 하는 겁니다. 내가 못하는 데 그걸 넘어가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인간은,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인간은 왕이 최고의 영웅이잖아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미국 대통령 할 사람도 없다, 나이 팔십 넘었는데 또 나온다더라. 그럼 니 해봐라. 나 안 해. 난 못해. 왜 못 해? 나는 기타 쳐야 되니까 못해. 미국의 국무장관이 국무장관하면서 밴드해요. 둘 다 놓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뭐냐 하면 인간은 왕이 있잖아요. 영웅. 영웅에서 일정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특정거리, 특정한 자기만의 거리. 회사 운영하는데 국가가 간섭하면 싫지요. 내 돈 버는데.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서 북한의 인민군이 와서 회사를 다 빼앗았다. 그럴 때 뭐라 합니까? ‘우리도 든든한 나라 있었으면 안 빼앗길 텐데’ 이러지요.
지금 우크라이나가 그 상황 아닙니까. 우크라이나가 전쟁 일어났을 때 젤렌스키 대통령 존경했어요? 별로 존경 안 했어요. 그런데 러시아가 공격하니까 나라가 어떻게 돼요? 개인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18세 이상 60세까지 모든 남자는 어디 간다? 군에 가야 되지요. 하나로 단결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어떤 특정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단 말이죠. 내 자유를 보장해주면 왕이라 할게. 하지만 내가 어려움에 쳐했을 때 누가 나서야 됩니까? 여러분? 군대가 나서줘야 돼요. 우크라이나 아줌마들 애들 있지요. 애들 누가 보호해요? 자기가 슈퍼우먼 되어 보호합니까? 남자들이 나서서 전쟁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귀한 내 자식 키울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국가라는 것이 필요 없다가 아니에요. 만약에 내가 여자가 되어서 가는데 누가 성추행하려고 달려들 때에 뭐라 합니까? ‘경찰 뭐하냐? 신고하면 빨리 와야지.’ 자, 경찰을 왜 호출해요? 날 보호하라고 호출하지요. 경찰은 자기가 월급 줬습니까, 누가 월급 줍니까? 국가가 월급 주잖아요. 자기가 태권도 5단 쯤 돼요? 아니지요. 여자가 태권도 5단해서 이길 수 있습니까? 안 되잖아요.
사물성은 나보다 뛰어난 사물성에 뭐가 모였느냐 하면 약간의 거리 양만큼 권력을 양도해요. 권력을 양도한다는 것은, 내가 약간의 자유를 떼어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자기의 자유를 어디에 사용하느냐? 내가 나를 왕이 되기 위해서 그동안 나의 자유를 활용해왔던 거예요. 내가 하나의 왕이에요. 심지어 어린애도 마찬가지에요. 가족끼리 놀러가서 ‘점심시간인데 중국집에 가서 먹자.’ 아버지가 “오늘은 짜장면으로 통일한다.” 딸이 “안 돼. 나는 반대에요. 난 짬뽕이에요.”
왜 아버지가 짜장면 먹겠다는 데 딸은 짬뽕 먹겠다고 나선 이유가 뭡니까? 아버지만 왕이가, 누구도 왕이다? 내가 왕이다. 나는 짜장면 먹으면 힘이 안 나. 어제까지의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짬뽕 먹을 타이밍인 거예요. 그래야 나의 패턴이 돌아가고 그러면 나한테는 나의 고유의 힘이 채워지는 겁니다. 이 형식의 내용이 ‘나는 잘났다’ 내용이 계속 유지가 돼요. 뭐 먹고? 짬뽕 먹고.
옛날에 선생님은 선생님이 시키면 가는 거예요, 그냥. 하라 하면 하면 돼요. 그런데 요새 선생님은 애한테 물어봐요. 왜 물어봐요, 그걸? 이해가 안 돼. 그걸 왜 물어봐?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생각이 왜 필요한데요? 차라리 선생님으로 내가 보기엔 학원 일타강사를 모셔야지. 선생님이 뭐 선생님이에요? 학생보다 위에 있다고 부모들도 인정해준 자리가 그 자리잖아요.
그런데 선생님 자리를 포기하고 같은 애들 친구 돼버리면 애들은 뭘 원합니까? 나를 지켜주는 선생님 자리를 학원 강사한테 찾을 게 분명하단 말이죠. 무든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인간은 자기 잘 되기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 한 겁니다. 왕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내가 왕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왕이란 뭐냐? 권력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나는 힘 모으고 권력 모으고 내 하고 싶은 것, 다시 말해서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힘 모으는 그 작업을 하는데 내가 작은 왕이에요. 작은 왕을 지키기 위해서 큰 왕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것 때문에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왕과 어떤 거리? 일정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대통령 필요 없어’ 이런 소리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도 너무 가까이 오면 나는 표 안 찍을 거야’ 이렇게 하는 것도 나고.
이게 뭐냐 하면 사물성으로 유지되는 현 국가에요. 왕인 국간데 이걸 가지고 성경에선 뭐라 한다? 이걸 짐승이라 하지요, 짐승. 짐승은 마귀의 종이에요. 이게 악마가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은 거예요. 교회 이야기해봅시다. 목사님이 계시다. 목사님은 복음을 전한다. 전하니까 존경한다. 이게 뭡니까? 교회 단체가 뭐예요? 짐승이지요, 뭐. 그 어디에도 자기를 폐기처분한 요소가 없잖아요. 내 믿음을 구겨버리는 게 없잖아요.
‘목사님, 제 믿음 어때요? 저 믿음 좋지요.’ 이래 나온다고.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으로 나를 더 강화시키고 단단히 하는데 교회를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일상이고 그게 우리의 삶의 패턴이에요. 사물성의 패턴입니다. 어디에도 그게 밟히고 구겨지고 뭉개지고 괴물 되고 파괴되는 게 없어요. 예수님은 이거 하라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부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105편 15절에 나옵니다. 방금 이야기. 어떤 교회는 이 대목을 시편 105편 15절을 기둥에다 적어놓은 교회도 있어요. 실제로 제가 봤어요, 옛날에.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기름 부은 자가 대표로 누구냐 하면 처음에는 왕과 선지자였어요. 그게 멜기세덱이 그렇습니다.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요 하늘나라의 제사장이죠. 기름 부은 자.
지금 우리가 역대상 23장, 24장을 하고 있는데 역대상 23장에서 레위 지파가 해야 될 것은 뭘 지키는 겁니다. 문지기도 지켜요. 세 가지 요소입니다. 하나는 레위인들 재판, 문지기, 그다음에 찬송. 돌아가면서 찬송하는 것. 제사장들은 뭐합니까? 제사장들이 레위인들을 지휘해서 제사장들은 근본적으로 제사, 제사를 제사답게 하기 위해서 그 공간, 성전이라는 공간을 재판하고, 재판이라는 것은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소환시키는 거예요.
재판, 문지기, 찬송, 이렇게 해서 어떤 특정 공간을 영구히 하는 그 작업을 하는데 이 제사장 위에 누가 있습니까? 역대상 23장에 의하면 누가 있어요? 왕이 있지요, 왕. 그러면 이 백성들은 왕과 일정 특정거리를 유지를 해야 되는 거예요. 이 자리에. 이 말은 나의 자리는 정기적으로 성전에 와서 내 자리를 찢어야 돼요. 나를 위한 공간을 없애야 된다고요. 어디서? 성전에 와서 거기서 율법, 말씀 배우면서. 가르치는 자는 제사장이 가르치고.
또 그들이 어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으면 율법으로 어떻게 하나님이 판결 내리는지 재판도 받아야 되고. 그리고 그 공간이 너무 거룩한 공간이기 때문에 찬송이 되고, 그다음에 그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 문지기까지 필요하고요. 시편 84편에 보면 하나님 집에 문지기라도 좋사오니, 라는 대목 나오지요(10절).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제사장 또는 그냥 레위 지파는 왕의 몸통이다. 왕은 모호한 왕 여호와의 왕 되심의 몸통이 되지요. 사물성이 되니까. 이 관계, 하나님이 왕이시고 너희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나오는 말씀.
그러니까 이건 뭐냐? 보이지 않는 모호성이 보이는 육신, 사물성으로 나타나는 그 모습을 신약 때의 성도들도 그렇지만 신약 오기 전에 이미 다윗 시대 때 다윗이 이스라엘 왕의 자리를 자리답게 자기 자리로 여기지 않고 누구 자리로? 여호와 하나님의 모호한 이름이 계시는 자리로 그렇게 확정을 짓고 다윗이 활동을 한 거예요. 그 전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고 제사장 레위 지파가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대표 지파였습니다. 왜? 그들만이 죽음이라는 모든 것을 그들의 활동공간에서 처리해내기 때문에 그래요.
지난 수요일에 한 것 다시 한 번 말씀드려야겠어요. 뭐냐 하면 인간의 죽음은 그냥 고장 난 죽음이에요. 죽음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뭐라 그랬느냐 하면 진짜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죽인 죽음만이 진짜 죽음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늙어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요 인간은 죽어도 안 죽은 게 돼버려요.
진짜 죽지 아니하면 진짜 부활에 이르지 못합니다. 진짜 부활에 생명에 이르려면 진짜 죽음을 통과해야 돼요. 진짜 죽음을 몸에 짊어져야 돼요. 그런데 진짜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되고 하나님의 율법, 말씀 앞에서 진짜 죽어야 돼요. 율법의 완성 앞에서 그걸 다윗 시대 때는 왕이 관장하고 있는 제사장의 성전이 바로 진짜 죽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는 호들갑 떨게 없어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둘로 이스라엘 내부를 구분해봅시다. 한쪽은 사물성, 인간의 육신이죠. 육신이 농사도 짓고 장사하는 사물성. 이들이 다수지요. 다수인데 하나로 집결돼야 되는 겁니다. 하나의 자리, 이들은 각자 삶의 자리, 자기 가정이 있지요. 그 가정은 하나의 장소, 하나의 자리, 이 자리가 뭐라 했습니까? 바로 성전. 성전에서 활동하는 자는 누구다, 무슨 지파다? 레위 지파. 지금 레위 지파 이야기에요, 23장.
다수가 하나로 정규적으로 모여야 돼요.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씩 모여야 됩니다. 자기 자리에 의미를 부여받는 거예요. 내가 나를 규정하지 않아요. 규정받기 위해서는 내 자리에서는 규정하면 안 돼요. 이 하나밖에 없는 이 자리에서 규정받아야 돼요. 그러면 이 레위 지파 배후에 누가 있다 했어요? 사물적인 왕, 다윗 왕이 있지요. 다윗 왕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모호한 왕이 계시는 겁니다. 이게 다윗언약이란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오늘날 우리들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의 내용은 주로 어떤 겁니까? 뭐 사돈의 팔촌 기억합니까? 그 사람 어디 사는지 내 일 아니잖아요. 인간은 자기 일만 기억하지요. 그걸 추억이라 하는 겁니다. 추억들이 있어요. 집에 가서 앨범 보세요. 누런 사진 빛바랜 것부터 해서 생생한 것까지 보게 되면 자기역사 있지요. 그걸 보게 되면 다시 기억나지요. ‘춘자, 요새 춘자 뭐하는지 모르겠다.’ 그 옆에 여고동창생 찍은 것 있잖아요. 소풍 가서 한쪽만 바라보고 있던.
모든 것이 누구 중심이에요? 내 중심에 내 자리, 내 공간 못 버립니다. 버릴 수가 없어요. 인간은 뭐만 기억한다? 자기의 관련성만 기억하지요. 그러면 성전은 뭘 기억합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을 기억하지요. 유월절 어린양, 그것도 기억하고 노아 홍수도 기억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다 성전에서 기억하는 거예요.
성전이 불탔다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기억과 너희들이 분리됐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억에 포함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안 된다? 안 되는 거예요. 네가 기억하는 이 기억이 하나님의 왕 되심의 기억과 특정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에요. 언제든지 부를 때에는 냅다 와야 돼요. 전쟁할 때 군에 가야 되는 것처럼. 평소에는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논산훈련소 오라 하면 까불다가도 그만두고 논산훈련소 들어가야 되잖아요.
‘국가가 뭔데 날 불러?’ 못해요. 우리는 국가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국가의 혜택을 입은 게 뭐가 있는데’ 하거든요. 자갈길 한 번 운전해보지요. 아스팔트 누가 깔았는데요? 국가가 깐 거예요. 일기예보 누가 하는데? 국가가 하잖아요.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대한민국의 몸통이에요. 일단은 대통령은 머리로 두고 몸통이라니까요. 이스라엘의 몸통은 뭐냐? 이스라엘이죠. 그럼 머리 부분 임금님은 누굽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잖아요. 여호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뭐가 연결돼 있다? 거미줄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연결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에서 이 다윗, 다윗은 육신을 갖고 있지요. 육신을 갖고 있으니까 사물성이죠. 사물성으로 나타난 다윗이 사물성을 갖고 있는 레위 지파를 다스려서 사물적으로 눈에 보이는 그 당시 성전, 솔로몬 때 성전 짓습니다. 솔로몬 성전 안에서 여기서 눈에 보이는 양과 염소, 소를 잡지요. 전부 다 뭐예요? 사물성이죠. 사물성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 되는 겁니다.
어떤 공포물에 이런 영화가 있어요. 새로 결혼한 신랑, 신부가 낡은 집 사서 수리하고 이사를 했어요. 이사한 첫날에 현관문 열고 거실에 들어갔는데 수리했으니까 깨끗해 보였지요. 그런데 옛날 거울이 있어요. 거울은 앞에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반사해주는 게 거울인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까 현재 자기가 수리했던 집의 모습이 비치는 게 아니고 낡은 집 옛날 모습이 거울에 비치는 거예요. 공포물입니다. 그럴 때 뭐라 하느냐? 거울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그 신랑, 신부는 그 집에 살아 있는 것이 누가 살아 있어요? 본인만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또 누가 살아 있어요? 거울아, 거울아. 거울이 살아 있는 거예요. 거울은 사물성이죠. 본인도 사물성이지만. 그러나 거울이란 사물성은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공포물이니까 영화 내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 거울은 어떻게 돼요? 기분 나쁜 거울을 깨잖아요.
그게 십자가에요. 깨져버리면 조각나지요. 조각들 있지요. 그 조각들이 쓰레기로 쓰레기차가 분리수거해갔는데 밤마다 꿈마다, 갑자기 호러물로 바뀌었다. 밤마다 꿈마다 깨진 거울이 내 다리 내놔라는 식으로 깨진 거울 조각 하나하나가 나는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할 때 그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이게 더욱더 무서운 일은 거울이 과거를 유일하게 안다는 것뿐 아니고 그 신랑, 신부가 그 집에 이사 올 것을 이미 거울은 예측하고 있었다는. ‘너는 내 집을 안 사고는 못 배기는 식으로 너는 1982년에 태어났어야 했어.’ 출생까지 오직 이 집에 살기 위해서, 그리고 누굴 만나기 위해서? 거울을 만나기 위해서, 언약을 만나기 위해서, 십자가 만나기 위해서 이 땅에 이사 와야 한다면 이게 정녕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안 그러면 이걸 기쁜 소식이라 이야기해요? 성경에선 이걸 기쁜 소식이라 하는 거예요.
내가 여호와와 일정거리 관계에 있었구나, 하는 사실. 내가 세상사람 자기만 소환하는데 주께서는 자기 언약으로 나를 소환시켜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생각하면서 호들갑 떨지 말란 말입니다. 성전 안의 특수한 공간은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있는 농사짓는 사람 누구도 들어가기 싫어하는 곳이에요. 왜? 나를 잃어버려야 되니까.
그래서 그 공간은 나중에 어떻게 변하는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공간으로 왕이 이걸 변질시켜요. 이걸 누가 지적하느냐? 왕이 기름 부었지요. 처음에. 제사장 기름 부었지요. 제사장이 제사장답지 못하고, 왕이 왕답지 못했을 때 기름 부은 자들이 등장해요. 누구냐 하면 바로 선지자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거울이에요. 그들 속에 인간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는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성신을 통해서 기억하게 한 거예요.
시편 51편 봅시다.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창조입니다. 기존에 있는 형식에 담은 내 마음 아니고 내 내용이 아니고 다른 내용이 들어오게 하옵소서. 그 다른 내용이 어떤 내용입니까? 나로 인하여 꺾어진 뼈, 나 때문에 죽었던 그 뼈가 주인공 되는 그 내용이 다윗이란 형식, 육신에 들어오게 하옵소서.
그다음에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그다음에 뭡니까?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러니까 나의 기억과 나한테 들어오지 두 번 다시 나가지 않는 주님의 기억의 투쟁장이 오늘날 우리의 사물성이에요. 우리의 육신입니다. 깨끗하게 사는 게 성도가 아니에요. 투쟁하는 거예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 위주의 공간, 날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공간 있잖아요.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고 하든 말든 나는 나 사랑하고 싶어. 내 인생이니까 내가 다듬어 나가고 싶어. 내가 이렇게 요모조모로 예쁘게 남한테 자랑할 만한 인생이고 싶어.’ 그것과 그다음에 그걸 털어버리라고 짓밟고 파괴, 그걸 최후의 심판으로 끌어당기어 온 주님의 십자가 기억이 둘이 공존하는 곳이 오늘날 우리의 육신입니다.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미쳤다고 하겠지요. ‘니 인생 니가 알아서 살지 뭐 교회 다니느냐?’ 그 사람들에겐 뭐가 없느냐? 사물성 밖에 없어요. 모호성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사물성을 허무로 만드는 내가 어디서 뭘 하면 어떻게 살아왔든 그게 다 허무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주는 새로운 예수님의 희생, 허무한 우릴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 희생, 피, 죽으심, 시편대로 하면 꺾으신 뼈, 그것을 다윗은 말합니다. ‘그 뼈의 정신을 내게서 쫓아내지 마소서.’
보통 기도라 하는 것은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이라 하잖아요. 성경에서의 기도는 그게 아니고 이 자체가 응답이 기도형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미 안 쫓아내는 게 확정됐기 때문에 쫓아내지 마소서, 란 말이 나와요. 여러분 주기도문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완수하고 돌아가신 그 코스가 주기도문이에요. 따라서 주기도문은 우리보고 하면 올게, 가 아니라 이미 다 주께서 이런 내용을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주기도문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예수님께서 투쟁의 장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의 요소가 이렇게 돼요. 그림으로 그리면 모호한, 점선이에요. 그리고 사물성, 눈에 보이는 게 어디 있느냐? 이 안에 우리의 투쟁의 장이 겹쳐져있지요.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내 잘난 것만 기억하잖아요.
우리가 아주 편하게 쉽게 생각하면 내 잘난 것 내가 간수하기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괜찮은 나 간직하기에요. 이게 이 세상요소잖아요. 그런데 난데없이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왔지요. 십자가 영이 들어왔잖아요. 이 가운데 우리가 세상에서는 나를 잃어버리면 안 돼요. 왜?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서는 뭐라 합니까? 너를 미워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하여튼 그래서 제가 제일 답답한 것은 뭐냐 하면 교회에서 ‘주님을 사랑합시다, 형제를 사랑합시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 했습니다’ 자꾸 그 이야기만 하는데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너 미워하란 뜻이에요. 왜 미워하란 건 빼버리고 말씀을 국어시간처럼 집어넣고 은혜 받았다, 그런 소리가 왜 나오느냐 말이죠. 진짜 살인충동이 막 일어나…
그거는 사기잖아요, 사기. ‘주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귀신 쫓아냈습니다.’ 그것 사기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이쪽에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성경을 무슨 흉내를 내겠습니까?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각양 좋은 것은 자기 형식에다 내용을 다 담는 거예요. 담아서 뭐할 건데? 하나님 앞에 압력 넣기 위해서.
‘하나님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까 이래도 날 구원 안 할 거요?’ 이거는 청와대에 압력 넣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내가 시키는 대로 예수도 믿고 십자가 믿고 피 믿고 다 믿었으니까 이래도 나 구원 안 할 거요?’ 이거는 공갈협박, 이거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겁니다. 이걸 종교라 해요. 결국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쪽으로 다 가게 돼 있어요, 결국은.
온갖 성령 받은 흉내를 다 내도 결국은 티를 내게 돼 있어요. 자기 자신을 못 미워하니까 자기를 버릴 마음이 일도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진 데 놀랍게도, 이 ‘우리’ 속에 여러분 들어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놀랍게도 그게 바로 죄야. 네가 너를 매일같이 소환하는 게 죄야, 라고 지적하는 게 들어올 때 이게 무슨 나라냐? 육신의 나라가 무슨 나라겠습니까? 짐승의 나라죠. 이쪽은 뭡니까? 천국이죠. 양쪽 다 이것을 겸비한 사람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그 본문하고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6절에서 38절까지 누가 읽어보세요. 오늘 강의에서 처음이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일을 왜 당합니까? 그냥 양보하면 되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하지요?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말씀이 나오지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이 일은 내가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에요.
옛날 유대교가 돼지고기 먹지 말라는 레위기에 나오는 말씀 있지요. 그래서 그걸 알고 로마 안티오크스 4세 그 사람이 헬라 사람인데 일부러 유대인 놀린다가 잡아다가 ‘너 돼지고기 먹을래, 살 껍질 하나씩 벗겨나갈래’ 할 때 ‘나는 돼지고기 안 먹고 벗겨지겠다’ 하니까 지독한 자 해서 살갗을 벗기는 고문을 했다는.
‘이래도 돼지고기 안 먹을 거야?’ ‘안 먹을 거야. 나 죽음을 받아들일게.’ 이래서 순교자 된 거예요. 이게 외경에 나와요. 마카베오서 외경에 나온다고요. 어떻게 봅니까? 이게 순교자고 믿음 좋은 겁니까? 지금 천주교에서나 외경 인정하는 곳에서는 난리도 아니에요. 오늘날 이런 순교자가 안 나타나느냐? 내가 보기에는 마귀 짓이에요. 돼지고기 먹으면 되잖아요.
죽음은 아버지가 죽여야 돼요. 내가 거둔 죽음은 인정 안 해줍니다, 하늘나라에서. 나 보고 돼지고기 먹으라 하면 먹지요. 네가 예수님 사진 밟을래, 안 그러면 예수님을 부인할래? 나는 밟지요. 내가 사진 밟는 것과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주의 일인데 주의 일을 왜 선교의 흉내를 내고 있어요. 이것은 바로 자기 믿음을 자기가 관리하려 하는 거예요. 자기 추억을 관리하고자 하는 거예요.
여기 나오는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한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하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본인이 감당한 게 아니에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공산당이 싫어요’ 하다가 공산당 오거든 ‘나 공산당이 좋아요’ 이야기하면 돼요. 그것과 구원받는 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강도질하고 천국 가는 것 상관없어요. 그걸 강도가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거예요. 구원은 내 속에서 주께서 일으키는 주님 자신의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우리가 모방하거나 흉내 내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는 그저 뭘 해도 죄인된 것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나인 것을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