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1006a 울산강의-역대기상(24강) 23장 2절 : 실제성과 모호함자유게시판역대상

20231006a 울산강의-역대기상(24강) 23장 2절 : 실제성과 모호함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23장부터 하겠습니다. “다윗이 나이 많아 늙으매 아들 솔로몬으로 이스라엘 왕을 삼고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았더라”(1,2절) 23장부터 24장까지 레위 자손이 다윗 왕 밑에서 뭘 했느냐에 대해서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레위 자손이니까 이것은 야곱의 열두 지파 중에 하나의 지파가 되겠지요. 열두 지파가 전부 다 평범하게 똑같은 레벨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어느 지파가 위에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두 지파가 레코드판처럼 똑같은 위치를 갖고 있는데 야곱 시대가 지나고 난 뒤에 요셉 시대가 지나고 난 뒤에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가 레위 지파 사람이에요.

여기도 나와 있지만 6절에 보면, “다윗이 레위의 아들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의 각 족속” 그렇게 돼 있지요. 그 둘째 되는 그핫 아들 이름이 12절에 보면, 아므람인데 13절에 “아므람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니” 이렇게 돼 있어요.

이스라엘 특징을 잘 아셔야 될 건데 야곱부터 열두 아들이 나오거든요. 야곱과 열두 아들은 합치면 이거는 하나의 가정입니다. 또는 일개 가족에 불과해요. 가정, 가족은 숫자가 얼마 안 되잖아요. 숫자를 확대시킵니다. 확대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사백 년 동안 사대 동안 애굽에 가서 그 자손의 숫자를 하나님께서 늘여버립니다. 남성만 육십만 돼요. 남자만 육십만, 엄청난 숫자가 되겠지요.

숫자 되고 인구 있다고 나라가 되는 게 아닙니다. 나라가 되려면 구심점이 있어줘야 돼요. 구심점이니까 이건 뭐냐 하면 곧 왕이죠. 왕은 키가 커서 왕 되는 게 아니고 인물 좋아서 왕 되는 게 아니에요. 왕은 이거는 자리입니다. 자리가 왕을 만들어줘요. 근데 다른 나라 애굽 나라 같은 데는 바로 왕이 있잖아요. 자, 바로 왕은 누구와 싸웠습니까? 애굽의 바로 왕은 누구와 싸웠지요?

바로 왕 앞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바로 왕은 모세와 싸운 적이 있지요. 그러나 모세는 바로 왕을 상대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모세 배후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셔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라고 해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에요? 모세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가 되는 거예요.

모세는 왕이 아닙니다. 왕은 아닌데 이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왕은 눈에 보이는 왕이에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왕을 제가 이번 시간에는 이걸 이렇게 하겠습니다. 사물적인 왕, 사물이란 말 알지요. 눈에 보이는 물건 같은 것. 사물적인 왕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니까 이건 뭐냐 하면 모호한 왕, 모호하니까 사물적인 것이 아닌. 사물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왕과 바로 왕이 대결했습니다.

그 대결은 왕과 왕의 대결이지요. 그런데 애굽은 애굽 나라의 군대를 갖고 있어요. 근데 모호한 왕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군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의 군대가 없어요. 원래 하나님의 군대는 여호와의 군대는 천사들입니다. 야곱에게 나타났지요. 마하나임. 천사들이 야곱의 꿈속에 사다리 오르락내리락했지요. 수많은 천사들이 있었어요. 그걸 마하나님, 마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군대가 있어요.

하나님의 군대는 천사들인데 하나님의 언약적 계획에 의하면 천사로 구성된 하나님의 군대를 이제는 뭐로 바꾸느냐 하면 사람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사람으로 바꾼다는 것은 사물적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뜻이거든요. 사물적인 나라와 그다음에 무엇의 대결이다? 사물적인 왕과 모호한 왕의 대결이죠.

그러면 제가 물어봅니다. 우리는 여기에 어디에 있습니까? 사물적인 왕과 모호한 왕, 둘 중에 어디에 해당됩니까? 성도라면 사물적인 왕에 속했습니까, 모호한 왕에 속했습니까? 모호한 왕에 속했지요. 그럼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육신을 갖고 있으니까, 육체를 갖고 있으니까 육체는 곧 뭐냐 하면 사물성이죠. 만지면 코, 눈, 입 만져지잖아요.

그러면 이 모호한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나라와 어떤 다른 차이가 나느냐 하면 육신의 사물성이, 우리도 육신이 있으니까 사물성이 있지요. 육신의 사물성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허무’로 바뀌어야 돼요. 허무란 말은 육신으로서는 육신이 왜 있는지를 최종적인 것을 끄집어낼 수 없는 것, 그게 허무에요. ‘내가 왜 있는데, 내가 왜 살지?’

추석 명절에 비가 왔습니다. 대목인데 비가 왔다. 그러면 장사하는 사람이 뭐라 하느냐 하면 ‘추석인데 비가 왜 오느냐’ 이렇게 했지요. 이 말 굉장히 중요합니다. ‘추석인데 비가 왜 오지?’ 안 왔으면 좋겠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네가 뭔데 비가 네 말 듣느냐? 비한테 추석 대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대자연에 추석 대목은 없어요. 추석 대목은 사물적인 인간들이 자기의 사물성이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낸 제도가 추석입니다. 명절이에요.

여러분 길에 가는 사람에게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인생이 뭐냐?’ 뜬금없는 질문이지요. ‘인생이란 게 뭐냐?’ 인생에 대해서 많은 노래도 나오고 책도 많이 나왔잖아요. ‘인생이 뭐냐?’ 인생은 인간은 사물인데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물이죠. 왜 사는지, 추석 때 왜 비는 오는지 전혀 아는 게 없어요. 아는 게 없어도 아등바등 시도하고 노력하고 애쓰지요.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최후의 진리에 대해서 모르면서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악을 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악을 쓰다가 결국은 허무하네, 라고 그걸 자인할 수밖에 없는 게 마지막 요양병원에 갔을 때 홀로 남아 있을 때 인생무상, 허무하구나, 라고 스스로 탄식하면서 인정하는 것처럼 하지요. ‘것처럼’ 아아 인생 참 허무하구나. 이래 죽는구나.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모르니까 허무한 거예요. 죽으면서 죽는 이유도 몰라, 아무것도 몰라 그냥 허무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물성에서 출발해서 인생 끝은 어떻게 되고 시작은 인간 있기 전에 뭐가 있었고, 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근데 개뿔도 모르면서 열심히 살았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모른다는 것은 허무를 받아들이는 건데 그게 싫은 거예요. ‘모르는 것은 모르지만 허무하기는 싫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인생이 허무한 거는 싫다는 거예요.

그래서 얘 유학 보내서 박사학위 따오고 하는데, 이게 옛날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 따고 KAL기 타고 오다가 러시아 비행기에서 쏜 미사일 맞고 삼십 년 공부한 것 공중에 그냥 날려버렸어요. 공중 분해됐어요. 그럴 때 사람들은 왜 박사학위 받은 사람까지 굳이 죽어야 되는가? 박사학위가 해답이 아닙니다. 박사학위가 인간의 허무를 되돌리지 못합니다. 추석 대목에 비 오는 이유가 추석 대목 피하고 다른데 비와야 될 하등에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의 사물은 육신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데 어디로 가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인간들은 사물적인 백성의 동의, 인정을 통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 우리들이 갖고 있는 권력을 한 장소에 모아요. 모아서 뭘 만드느냐?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웁니다.

당신이 우리를 대표해서 당신 자신의 일, 개인적인 사적인 일 하지 말고 우릴 대표해서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를 위해서 우리 백성을 위해서 열심히 희생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줘. 그래서 당신을 우리 왕으로 인정해줄게. 정치 잘하면 왕으로 인정해주고 못하면 데모해서 끌어내릴 거야, 라고 이렇게 백성들이 동의와 인정을 해서 왕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사물적인 존재가 사물적인 왕을 만든 겁니다. 눈에 보이는 왕을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왕이 있다고 해서 안 허무한 게 아니에요. 왕이 있어도 국무총리가 있어도 대통령이 있어도 허무는 여전히 동일하게 허무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다 허무해요. 그런데 여기 이스라엘 왕은 사물적인 왕이 아니에요. 인간 보기에 모호합니다.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 왕에 내세울 때 하나님이 나타난 게 아니고 누굴 앞장세웁니까? 모세를 앞장세웠거든요.

모세는 바로 왕을 봐야 되는데 자꾸 뒤돌아봐요. “안 갈랍니다. 안 갈랍니다.” “가라. 내 백성 건져야 돼.” “저 못해요.” 모세는 자꾸 뒤돌아보면서 모호한 왕과, 이스라엘 백성이니까 왕이 있을 것 아닙니까. 왕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애굽이 바로 왕은 누구와 이야기합니까? 본인과 이야기하지요. 본인의 의지하고 이야기하죠. 본인과 이야기하는 거예요. 허무한 게 허무함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모호한 왕 밑의 이스라엘의 특징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맨 육체를 갖고 있잖아요. 육체를 갖고 있는 사물성을 그들은 어떤 사람이 돼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모호한 것처럼 이 사물성을 허무로 만들어서 모호한 자아로 바뀌어야 돼요. 모호한 백성들, 사물성이 아닌 유일하게 허무하지 않는 백성이 되려면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사물성에서 모호함으로 바뀌어야 돼요.

아까 모세와 누구와 이야기한다 했어요? 애굽에 가기 전에 누구와 이야기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이야기했지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눈에 보입니까? 아니지요. 떨기나무에서 음성으로 들리지요, 음성으로. 떨기나무 불붙는 걸 보고 음성이 들리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의 눈과 귀에 자기 말도 아니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닌 낯선 것이 눈에 보이고 낯선 소리가 귀에 들릴 때 그것은 뭐냐 하면 모세의 육신, 사물성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모세 고유의 것, 모세 자신의 사물성, 육신, 육체는 하나님께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못 받아들여요.

하나님이 모세 말고 동일한 모세지만 사물적인 모세 말고 모호한 모세를 여호와 자신의 나타냄 속에 그 안에 모세의 또 다른 모세 모습을 보여준 것이 바로 떨기나무 모습이에요. 그 불붙는 떨기나무, 모세가 그걸 볼 때에 어떤 느낌 나겠어요? 모세가 물었어요. ‘어, 불은 붙었는데 타지를 않네.’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불은 붙었는데 어떤 일을 하는데 안 타는 거예요.

그럼 기존에 모세가 알고 있던 사물성, 육신과는 어떻습니까? 전혀 다른 사물성, 다른 육신을 모세가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그 떨기나무에 있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백성들의 전형적인 모델인 거예요. 그렇다면 모세가 그 떨기나무 봤을 때 모세는 뭘 느끼느냐? 자신의 죽음을, 사물적인 자기의 사물성은 죽어야 될 사물성인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나는 죽을 육신을 갖고 이 땅에 태어났구나.’

죽을 육신이라는 사실은, 사람이 살다보면 죽는다. 그거는 죽음도 아니고요 엉터리고 진짜 죽음은 내가 사물의 최후의 모습을 모세는 미리 떨기나무를 통해서 체험하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떨기나무, 사물성이죠. 불붙는다, 사물성이죠. 하나님은 보인다, 안 보인다? 안 보이죠. 안 보이는데 떨기나무의 사물성, 불붙는 눈에 보이는 것에 결합되어 나타났어요.

이게 뭐냐 하면 모세가 레위 지파에 속하잖아요. 레위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하나지요. 그러면 야곱은 누구 말 들었습니까? 야곱에게 지시하고 명령한 자는 누구였어요? 야곱의 하나님이죠. 언약의 하나님이죠. 그 야곱의 하나님이 꿈에 사다리를 내려주시고 천사가 마하나님 하나님의 군대들이 왔잖아요. 이제는 천사의 군대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육신을 가진 사물성 모습으로 군대가 바뀝니다.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 해요. 출애굽기 12장, 안 찾아봐도 여러분 다 아시는 거니까 하나님의 군대에요.

하나님의 군대는 뭐냐 하면 눈에 비록 사물성으로 보이더라도 그 총지휘자, 그 가운데 계시는 임금님, 왕은 모호한 하나님이에요. 사물성 없는 하나님이 사물성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앞장세워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성, 허무함이죠. 허무와 싸움을 해야 될 나라가 드디어 생깁니다. 그게 이스라엘 국가입니다. 그 모호한 하나님이 그와 동행을 할 때 그 때 그 왕은 사물, 육체가 없어요. 모호하니까.

그럼 뭐가 있느냐? 이 모호함은 뭐로 나타난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함은 자리, 자리로. 인간 보기에는 모호하니까 그냥 자리만 있을 뿐인데 빈자리죠. 성소에 빈자리 있어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있어요. 같은 말이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지성소라 합니다.

지성소 들어가 봤습니다. 하나님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하나님은 안 보이고 조각된 수놓은 천사들이 보이지 않는 빈 공터를 지키고 있는 형상이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주변을 지키는 천사의 형상만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공턴데 함부로 들어가면 죽어요. 희한하지요. 왜 죽는다? 사물성 때문에 허무한 것들은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거기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사물성, 허무라는 것을 능가한 자들만 거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가 일하는 곳은 농토가 아니에요. 농장도 아니고 과수원도 아닙니다. 레위 지파가 일하는 곳은 어디지요? 바로 빈터, 공허한 빈터 성전입니다. 모호한 공간. 이 모호한 공간이란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세 사람만 있다면 각자 사물성,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따로 따로 살아요. A, B, C가 있다면 A, B, C가 따로에요. A 따로 B 따로 C 따로 나눠집니다. 이걸 분절, 나누어진다.

그런데 성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성전은 나누어지지 않아요. 나눌 수가 없어요. 보이지 않는 한 분이 거기에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그러면 거기에 그 장소에서 일하고 종사하려면 레위 지파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 지파는 어떻게 됩니까? 각자 자기 자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일반 지파의 농사꾼들은 여기까진 네 농토 이건 내 농토, 네 목장, 내 목장 분절, 나눌 수가 있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레위 지파나 제사장은 내 공간이 없어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려야 되겠어요. 중요하기 때문에.

허무란 최후의 진실을 본인이 끄집어낼 수 없는 상태, 이게 허무입니다. 간단하게 뭐냐 하면 해답이 없어요, 해답을 몰라요. 욥기 38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찾아오는 대목입니다.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이 욥과 정면으로 일대일로 만나요. 제가 방금 강의한 대로 하면 욥은 육신을 갖고 있지요. 사물성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호합니다. 사물성이 있는 존재는 허무하기 때문에 뭘 모른다? 허무하다는 것은 최후의 진실을 본인 능력으로 끄집어낼 수 없는 입장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욥기 38장 18절에서 욥에게 이렇게 합니다.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찌니라” 네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거든 네 입으로 말해보라. ‘알아?’ 이렇게 묻는 거예요. 욥이 뭐라고 하겠어요? 욥은 모르지요. 그러니까 모르면서 왜 나한테 개기느냐, 반항하느냐 이 말입니다. 내 인생이 망가진 것에 대해서 왜 니가 뭣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왜 대드느냐 말이죠. 니 인생에 대해서 왜 그렇게 불만이냐 이 말입니다. 니 알아? 몰라. 모르는데 왜 거기 대드느냐 말이죠.

추석 대목에 비가 왜 오느냐? 지금 답변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반발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뭔데 내 인생을 깽판 놓느냐’ 이 이야기거든요. ‘하나님이면 다가? 하나님 뭔데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느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네가 너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알아?” “모릅니다.” “모르는 게 왜 말이 많아. 허무한 게 왜 말이 많아.”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생은 전부 다 코미디라고. 웃기는 이야기에요. 전부 다 코미디에요. 코미디란 말은 뭐냐 하면 전부 다 허구란 뜻이에요. 팩트가 아니고 사실이 아니고 픽션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픽션, 자기가 지 마음대로 조작해놓고 그걸 팩트, 사실이라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게 우리네 헛되고 헛된 인생의 모습입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고집부리죠.

그게 인간의 뭐냐? 인간의 사물성에서 나온 거예요. 모든 것이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진리를 갖고 있는 하나님은 모호한 데 사물성이 없는데 인간은 사물성이 있으니까 이 육신을 어떻게 지켜보려하는 거예요. 이걸 지키면 안 돼요. 이거는 허무로 넘겨야지 지키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이 육신을 허무로 넘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건 이겁니다. ‘레위 지파가 어디서 일하는지 보라’ 이 말입니다.

그게 레위 지파는 어디서 일하지요? 성전에서 일하지요. 성전이 바로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드는 장소에요. 다시 말해서 최후의 진리가 거기에 머무는 곳이에요. 성전은 모든 시간을 빨아 당기는 곳. 모든 시간을 최후로 만들어요, 성전 안에서. 성전 안에서 근무하는 레위 지파는 세상의 어떤 유혹거리가 거기 들어가면 없어요. 왜? 그 장소에서 바깥을 보면 다 허무하니까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스라엘이 누구와 싸웠습니까? 애굽 나라와 싸웠지요. 애굽 나라는 무엇이 있다 했습니까? 모두 다 사물성이라 했지요. 모두가 육신을 갖고 있잖아요. 애굽 나라 왕은 어떤 왕입니까? 사물적인 육신이 자기 보호하라고 뽑아놓은 왕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야곱의 열두 지파 가지고 인구가 늘어나게 하면 국가를 만드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사물적인 하나님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한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그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허무한 애굽 나라에서 분리되기 위해서 주께서 어떤 일을 벌였느냐 하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건 뭐냐 하면 인간이 살아봐도 모르는 자기 최후, 백 년 살고 죽어도 모르는 자기 최후, 그 최후의 진실을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죽는 사건을 통해서 미리 그걸 맛보게 한 겁니다. ‘각 가정에 맏아들 내놔. 내가 죽일 거야.’ 맏아들, 육신 가진 사물성 있잖아요. ‘각 가정에 사물성 끄집어내. 내 다 죽일 거야.’ 이게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지요. 유월절 그날 밤에.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육신이란 사물성 대신 뭘 내놓습니까? 양을 내놓지요. 그런데 여기서 뭐가 모호하냐 하면 분명히 양을 죽였는데 누가 죽였어요? 양을 유월절 약속 때문에 죽어나가야 했던 사람이 아니고 양이었잖아요. 양이 죽었는데 하나님은 그걸 네 맏이는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하는 거예요. 여기서 인간과 양 사이에 모호함이 끼어있는 거예요.

그 모호함이 확대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시내 산 올라와서 어떻게 양이 인간, 어떻게 인간이 양, 그 선에 가 있는 모호함이 모세의 제사법이라는 율법을 통해서 다른 법을 통해서 그걸 서서히 신약 때 십자가까지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나선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모세와 더불어 한 율법의 존재 이유입니다.

모호함이라 했으니까 이걸 달리 하겠습니다. 사물성에서 뭐로 바뀌었다 했습니까? 모호함으로 바뀌지요. 이걸 달리 말씀드리면 ‘형식에 내용이 담긴다’가 돼요. 우리의 육신은 그냥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뭐가 되느냐? 형식에 해당됩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이 육신이란 자기의 사물성에다 세상 것을 내용으로 해서 거기에 구겨 넣은 거예요. 변비 걸리죠. 스트레스 받고.

애굽의 사람들이 원했던 그 세상 것, 모호한 왕 여호와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의 형식의 내용을 꽉꽉 채우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 허무한 형식에 허무한 내용이 결합된 겁니다. 거기에 등장한 것이 뭐냐 하면 세상의 왕이에요. 이게 나중에 다니엘서 후반기에 들어가면 짐승입니다. 옛 뱀이고 마귀에요. 마귀가 배후에서 인간들로 하여금 지도자라는 것을 위대한 영도자, 인민의 지도자, 민족의 태양의 아들 이런 것을 계속해서 형식에다 내용을 채운 거예요.

옛날 고대국가는 토지를 근본으로 해서 생존했던 나라들이에요. 그래서 그 당시에 그 백성들의 지도자는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물을 다스려야 돼요. 관개시설을 하려면 거대한 토목공사의 지도자가 필요하잖아요. 솔로몬 시대도 마찬가지고요. 건물을 짓는다든지. 그러니까 물을 다스리고 토지를 개간하고, 왜냐하면 농경시대니까 땅과 관련되어서 살았어요. 그런데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도 역시 그런 나라였어요.

그런데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갈라지고 난 뒤에는 농경으로 밥 먹고 살지는 않았어요. 농경으로 밥 먹고 살려면 여호와 하나님께 기댔던 그들이 이제는 장사하고 살려는 쪽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이게 솔로몬 이후에. 솔로몬이 외국여자와 많이 결혼했잖아요. 솔로몬 시대에 무엇이 유입되었습니까? 장사해서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들의 공주들이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왕은 그 공주들을 위해서 그들이 믿던 바알 신들, 각종 종교들을 심어준 거예요.

종교라 하는 것은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신을 수입한 게 종교입니다. 종교로 시작해서 결국은 허무로 끝나지요, 인생은.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면서 형식적으로 종교인이다, 교인이다 하지요. 그러면 그 내용은 뭐로 채웁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해요. 나는 목사로서 복음 전하고 하나님 말씀 전하는 걸로 채운다고 하지요. 여러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을 보게 되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라는 형식에 의미를 주기 위해서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내용대로 다 실천해보는 거예요. 목사로서 복음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하고 많이 했지요. 그런데 이게 뭐로 끝났어요? 불법을 행한 자로 규정됐지요. 뭐가 잘못됐습니까? 내 형식이, 다시 말해서 내 사물성이, 다시 말해서 내 허무함이, 내가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을 내가 끌어당겨서 내 안에 이것으로 채운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였다고요? 두 자로 해서 그게 뭐였다? 합법이 아니고 뭡니까? 그게 ‘불법’이라는 거예요. 네가 왜 네 인생에 대해서 네 것으로 채우느냐 이 말입니다.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우리의 육신은 뭐로 끝나야 돼요? 허무로 끝나야 됐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우리의 모든 시간은 누가 빼앗아간다 했어요? 성전에 계신 분이 빼앗아가지요. 빼앗아가면서 믿음이라는 걸 빼앗아가야 하는 거예요.

믿는 자가 구원받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에 대해서 안 믿는 자가 구원받는 거예요. 인간은 이미 종교인입니다. 인간은 뭘 믿어요? 자기 자신을 믿잖아요. 인간은 뭘 사랑합니까, 인간은 누굴 사랑하지요? 자기를 사랑하지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 혹시 아는 분 말씀해주세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민망하지 않게 내가 후딱 정답을 대야 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목사랍시고 온갖 것 집어넣고 선지자 노릇하고 복음 전하고 구원될 줄 알아요? 누굴 속이려고요? 그래서 목사들이 복음을 전한다, 설교한다 할 때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 자기를 저주하지 않는 자기 믿음을 버리지 않게 되면 어떤 사람들이 그 목사한테 찾아오느냐 하면 자기를 관리하고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뭐를 더 챙기고 뭘 얻으면 됩니까, 라는 사람들만 모일 거예요. 그게 바로 이단과 이단의 만남, 허무와 허무의 만남. 이게 뭐냐? 주일 낮의 허무개그에요. 전부 다 코미디에요.

“목사님, 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목사가 말하기를 “나처럼 기도하고 이렇게 하면 됩니다.” 둘 다 지금 뭐하는 작당들이에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요 인간이 이미 자기가 자기를 믿잖아요. 자기 행함을 믿고, 자기 의와 자기 의지와 자기 선택과 자기 결정을 믿고 있습니다. 그걸 놔라 이 말이죠. 자기가 믿는,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는 예수님을 놔라 이 말입니다. 왜냐? 나와 예수님 사이에 내 믿음이 거기에 개입돼 있으니까요.

주께서 성전에서 하는 일은 내 믿음을 강탈하는 거예요. 박멸하는 거예요. 어디서? 십자가에서. 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강탈하고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돼있거든요. 천국은 그냥 믿으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그 빼앗김이 있어야 돼요. 나를 위한 천국은 주님에 의해서 빼앗겨야 되고, 그 빼앗김을 당할 때 비로소 우리는 천국을 얻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역대상 23장에서 전에 모세 때 레위인과 제사장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누구 밑에 있는가? 어떤 왕? 다윗 왕이라는 그 예하에 있어요. 그러면 그 성전의 자리는 결국 누구 자리냐 하면 제사장의 자리, 레위인의 자리로 끝나는 게 아니고 누구 자리냐 하면 왕의 자리입니다. 그 성전이 왕의 자리에요. 왕의 자리인데 그 왕의 자리에 누가 있느냐? 모호한 왕이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것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윗이 이방나라 막 쳐부수고 포고 잡고 승리했지요. 그러면 다윗이 승리한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해선 어떻게 됩니까? 자기 백성한테는 봐주기 한 거예요, 자기 백성한테도 이긴 겁니까? 자기 백성한테도 이긴 거예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도 마찬가지지만 눈에 보이는 소년 다윗이지만 골리앗이 사물성으론 굉장히 웅대해요. 일본말로 스고이すごい, 대단하다. 뭔가 엄청나다 할 때 스고이란 말하잖아요.

골리앗이 대단해요, 사물적으론. 그래서 다윗은 그것에 기죽었습니까? 스고이한 그 육체를 보고. ‘야아 허무치고 대단한 허무구나’, 이래 느낀 거예요, 허무치고. 다윗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그 골리앗의 뭘 봤느냐 하면 골리앗은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할례가 뭡니까?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을 때도 할례고 또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뭐냐? 할례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이죠.

그다음에 제가 질문할 차례지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사물성과 만나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사물성 플러스 하나님의 율법이 만나면 여기서 뭐가 나와요? 허무가 나오지요, 허무가. 허무하잖아요. 허무함이 율법과 만나면 이게 허무, 어떤 허무? 최후의 형편에 속한 허무가 나오는 겁니다. 이걸 율법이 뭘 하느냐? 이걸 생산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걸 가지고 죽었다. ‘너 죽었어.’ ‘율법 앞에서 너 죽었어.’

그럼 율법 앞에서 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율법 앞에서 살아 있는 사물성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갔을 때 모세는 기존의 사물성과 다른 사물성을 보여줬습니다. 40일 동안 물도 안 마시고 40일 동안 양식도 먹지 않고 얼굴 좋아, 훤하니 해처럼 피어서 내려왔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이 땅이 생각하는 그러한 허무한 사물성이 아닙니다.

그건 왜 그래요? 최후를, 제가 했지요. 허무란 뭡니까? 최후를 못 끄집어내지요. 이 말은 율법 안에 뭐가 들어있다? 인간의 최후의 사정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아까 최후의 사정은 제가 고린도전서 16장 22절 이야기했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가 모든 율법의 완성, 십자가 안에서 나온 법이라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활동은 무엇을 하느냐? 그 최후의 상황 속으로 모든 백성들을 끌어당기는 일들을 누가 하는가? 레위인들이 하는 거예요. 제사장들이 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 죽었어. 우리는 다 허무한 존재야.’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는 믿음, 소망, 사랑 다 허무한 거예요.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아무 소용없어요. 자꾸 믿음으로 티켓인 줄 알고 뭘 하려고 해요. 믿음 갖고 천국도 들어가고, 믿음 갖고 기도해서 응답도 받으려하고 믿음이 없으면 안 되니까 믿음이 마스터키 같은 그런 줄 알고 꼭 간직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마스터키 같은 믿음을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은, ‘그걸 갖고 와. 빼앗아버릴 테니까.’ ‘허무한 게 허무해야지 왜 안 허무해지려하느냐’ 이 말입니다. 왜 인간은 허무한 줄 알면서도 허무 안 하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가 뭐지요? 인생 살면서 허무하다, 가을 되면 허무하다, 온 소린 다하면서도 요양병원 허무하다하면서도 자식 오게 되면 또 불만이 많아요. 하나도 허무 안 했어. 본인이 허무하다하지만 허무 안 했어요.

왜 인간은 허무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계속 그렇게 버티는 도대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뭐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자리 때문에. 형식이 버티고 있는 내 자리를 그 자리마저 빼앗길 때 인간은 진짜 살 이유 없는 허무해지니까요. 내 자리. 그래서 진짜 허무한 이야기를 예를 이렇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병 걸려서 죽었어요. 식구들이 가족 죽었다고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완전히 안 죽었어요. 지 장례식에 듣고 거기서 깨어났어요. 깨어나 보니까 본인 장례식하고 있는 거예요. 의식이 돌아오니까 기겁을 했지요. 이 장례식 꼴 보기 싫다고 허겁지겁 혼돈의 거리로 뛰어나가 트럭에 받혀 죽었어요. 그래서 식구들은 그 장례식을 계속 치를 수 있었답니다. 약간 미뤄진 것뿐이에요. 인간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었단 사실을 알고, 이게 싫은 거예요. 싫어서 까불다가 늙어죽었을 때에 처음부터 죽은 장례식을 다시 치르는 겁니다.

성전은 뭐냐 하면 유월절 취지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 성전이고, 그 취지가 이어오는 거예요. 죽은 자를 죽은 자로 장례 치르는 자리가 그게 유월절 사건이었고, 그 유월절 사건의 연장이 바로 성전입니다. 인간의 사물성이 죽지 않고서는 모호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위해서 뭘 죽여야 되느냐? 내가 나를 믿는 나의 믿음을 내가 놔버려야 돼요. 자기 믿음을 없애는 곳에 가야 돼요. 없애는 그 경우를 그 사건을 당해야 돼요. 나 같은 것은 믿음조차도 가질 필요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성전 안에 거하는 세상의 어떤 유혹도 거기 물들지 아니하는 고정된 자리, 하나님의 자리,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10분 쉽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2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9,867 자유게시판 73강-예레미야 12장 7~13절(약속 떠난 땅)231015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10-15
19,866 자유게시판 8강-디도서 2장 6-8절(육신에서 말씀으로)231015-이 근호 목사 디도서 최고관리자 23-10-15
19,865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아버지의 마음 / 231015 - 최고관리자 23-10-15
19,864 묻고답하기 종에게 하는 교훈 - 최고관리자 23-10-15
19,863 자유게시판 13강-스가랴 4장 11-14절(착각과 환타지) 231011 - 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23-10-14
19,862 자유게시판 20231009b 부산강의 : [시편]62(46:10)-자기 환멸 시편 최고관리자 23-10-11
19,861 자유게시판 20231009a 부산강의 : [시편]62(46:10)-자기 환멸 시편 최고관리자 23-10-11
19,860 자유게시판 447강-YouTube강의(분류 작업 요한복음 16:8)20231010-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10-11
19,859 자유게시판 446강-YouTube강의(안과 너머 예레미야애가 1:17)20231010-이 근호 목사 예레미야애가 최고관리자 23-10-11
19,858 강의 유튜브강의 (446강/447강) 안과 너머, 분류작업 231010 예레미야애가 최고관리자 23-10-10
19,857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8장 34절 (흐름과 멈춤) 230919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3-10-10
19,856 자유게시판 20231006b 울산강의-역대기상(24강) 23장 2절 : 실제성과 모호함 - 최고관리자 23-10-09
열람 ➜ 자유게시판 20231006a 울산강의-역대기상(24강) 23장 2절 : 실제성과 모호함 역대상 최고관리자 23-10-09
19,854 자유게시판 72강-예레미야 12장 1~4절(불신자의 삶)231008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10-08
19,853 자유게시판 7강-디도서 2장 1-5절(늙음+남자)231008-이 근호 목사 디도서 최고관리자 23-10-08
19,852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잃은 것 찾기 / 231008 - 최고관리자 23-10-08
19,851 묻고답하기 젊은 남자에 대한 교훈 - 최고관리자 23-10-08
19,850 자유게시판 10월 부산 성경공부 안내 시편 최고관리자 23-10-07
19,849 자유게시판 12강-스가랴 4장 7-10절(겹쳐진 존재) 231004 - 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23-10-07
19,848 자유게시판 71강-예레미야 11장 18~23절(고향 사람)231001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10-01
19,847 자유게시판 6강-디도서 1장 15-16절(전체성과 부분)231001-이 근호 목사 디도서 최고관리자 23-10-01
19,846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혼인잔치 / 231001 - 최고관리자 23-10-01
19,845 묻고답하기 늙은 남자에 대한 교훈 디도서 최고관리자 23-10-01
19,844 자유게시판 11강-스가랴 4장 6절(심판의 영) 230927 - 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23-09-30
19,843 자유게시판 안양20230914b말3장17절(타는 냄새)-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23-09-28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