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강-예레미야 12장 1~4절(불신자의 삶)231008이근호 목사
72강-예레미야 12장 1~4절(불신자의 삶)23100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2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068페이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 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 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확정된 상태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차질없이 일이 진행되도록 하십니다. 그 가운데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쟁변 한다고 하는데, 남아있는 미흡한 진리에 대해서 파악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선지자가 서로 대화 상대가 되는 상태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는 가운데서, 여전히 모르고 있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 원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황, 그것에 대해서 예레미야가 그 당시 예레미야가 살고 있는 시대를 보다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선지자로서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보면서, 우리는 선지자가 질문한다고 보지 마시고 예수님이 선지자 안에서 질문을 하고 계신다고 보고, 우리는 예수님과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것을 곁에 서서 엿듣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셔야 합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내미는 질문은 너무 사적이고 개인적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사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고안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진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질문다운 질문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질문한 대로 세상은 진행된다는 겁니다. 세상은 내가 기도한 대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한다고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진행자는 나 아닙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쪽으로 세상은 진행되고 있지요. 이것을 가지고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우리는 ‘탈락’이라는 말을 쓰면 적절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중심체에서 탈락 되었습니다. 탈락 되고, 우리가 탈락 되고 난 뒤에, 전에 내가 질문했던 그 자리에 예수님이 그 자리를 점유하고, 차지하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행2:21)라고 하는 겁니다. 제일 먼저 구원은 주의 이름으로 주님이 구원받고, 그다음에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이 성사되는 주님이 하는 그 질문과 그 질문의 자리에 우리 질문을 포기하고 접어버리고, 주께서 질문하신 그 질문에 뛰어들어야죠.
선지자 예레미야가 구원받은 것이 맞는 이유가 선지자 예레미야는 장차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질문할 질문을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서 예레미야가 미리 질문하고 있습니다. 질문을 통해서 예레미야는 구원에 가담되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지요.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질문을 하나님에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질문은 소용없고 주님의 질문에 참여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전제로 해야 되느냐 하면 내 안에 죽음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해요. 멀쩡히 살아있을 때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당연시해야 해요. ‘이건 환상이야. 이건 꿈이야. 이건 거짓이야’라고 하지 마시고, 인간은 늘 죽을 대상에 놓여있다는 것이 너무나 명확해야 해요.
울산에 어떤 성도님 사시는 곳 근처에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이름이 양문교회예요. 저는 교회 할 때 ‘A교회, B교회’라는 이런 거 싫어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주께서 일으키시는 일인데 뭘 그걸 모자이크 처리하고, A 이고, B 이고, 인간의 인권이 어떻고, 개나 소나 다 똑같은데, 개나 소에게 무슨 인권이 있습니까. 인권 챙겨 준 들, 그 사람이 안 죽습니까?
그 양문교회 목사가 몇 년 전에 죽었는데, 죽은 이유가 정수기에 못을 박다가 감전되어서 죽었답니다. 정수기 뒤에 전선을 통해 전기가 흐르는 것을 모르고 쇠못을 손으로 잡고 박았겠죠. 그러나 전기 통해서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새벽기도 하면서 ‘주여, 이렇게 죽게 하옵소서’라고 주님에게 먼저 질문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인간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더 살아남을까의 질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저를 죽이옵소서’라고 이런 새벽기도를 하고 정수기에 못 박았다면 아마 그 죽은 목사가 못 박으면서 그랬을 거예요. ‘주여, 이것도 죽는 행위 맞죠? 죽는 행위에 들어가는 거 맞죠. 응답이 있게 하옵소서. 속히...’라고 하다가 ‘지지직~’ 감전되어서 죽었다면 정말 용한 목사죠.
기도에 응답 된 용한 목사. 그러나 정수기에 손을 댔다는 것은 정수기 맑은 물 먹고 더 살겠다는 뜻으로 손을 댄 거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나, 당신은 왜 안 죽는가. 정수기에 못 박을 때 전선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전선이 왜 없는가. 주께서 준비를 안 했으니까. 이건 자랑이 아니고 운이 나쁘다고 하죠. ‘아, 지난 2개월 전에 갔어야 했는데’라는 식으로.
왜 이게 헛된 말이 아니냐면, 우리가 중요한 질문을 놓치는 이유가 결국 아무리 몸부림치고,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뺀질이처럼 빠져봐도, 나중에 결국 우리가 죽게 되면, 늙어 죽든지 어떻든지. 우리나라에 백 살 이상인 사람이 2682명 이라는데, 그들이 백 살에 합격하면 뭐 합니까. 그저 골골거리는데. 그러니까 아무리 인간이 요리조리 요령을 피워도 막상 죽게 되면 이겁니다. ‘이게 뭐~~야. 이게’라고 나와요. 인간은 죽게 될 때.
도대체 인간이 평생 살아온 것이 허망의 끝판왕입니다. 반듯하고 바르게 훌륭하게 살려고 했던 모든 것이 와르르르 다 무너지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림에 유화로 평생 그림을 그렸는데, 나중에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여길 때 뜨거운 불을 대면 캔버스 위에 물감이 눈물처럼 줄줄 흘러내리잖아요. 흘러내리면 거기에 아무것도 남지 않죠. 이게 바로 죽음이라는 겁니다.
세 살 때, 일곱 살 때, 아홉 살 때, 그리고 열두 살 때는 뭘 했고, 스무 살 때는 뭐를 했고, 스물 몇 살 때는 아시안대회 나가서 야구 금메달 따고, 어떻고, 저떻고, 전부 다 그게 흘러내리기 위한 내용들 이에요. 내가 열 여덟살 때 미스코리아대회 나가서 ‘선’ 되어서 부모에게 효도했고, 이렇게 ‘효도’라는 글자가 그려져 있어도 흘러내릴 때는 ‘효...도.도.도.도.....’라는 식으로 모든 것이 허물어질 때, 우리가 할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뭐야....’
이걸 누구 보고 이야기합니까? 이건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어요. ‘이게 뭐냐~내 인생 이게 뭐냐~...’ 그걸 가지고 두 자로 ‘탈락’이라고 합니다. 진작에 탈락 된 거예요. 진작에. 내 이름이 흘러내리는 겁니다. 내 이름이. 내가 했던 모든 사인(서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질문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메시아의 영을 가진 선지자가 우리 대신 질문한 내용이 오늘 본문 12장에 1~4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 질문의 내용은 이겁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이 안락하게 잘 먹고 잘 삽니까?’라는 내용이에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오늘날 우리가 앞에 사는 불교 보살 집에 아주 불도가 심하고 자랑스러워서 마당에 불상까지 세워놓은 그 집에, 아무 탈이 없고, 가정은 화목하고, 건강하고, 아이들은 공부 잘하고, 날마다 날마다 재물은 더욱더 늘어나고, 손만 댔다 하면 마이다스의 손(Midas Touch)이에요. 뭐든지 황금으로 변하는 그 집.
반면에 나는 마이너스의 손(Minus Touch)이에요. 손만 닿으면 다 마이너스 되는 손이에요. 이렇게 차이가 날 때 우리는 질문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신자이고 저희들은 불자인데 어떻게 불자가 저렇게 잘됩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은 탈락입니다. 그것은 시기심에서 나온 거예요. 그건 주님의 질문이 아니에요. 선지자가 질문한 것은 “행악자가 왜 잘 삽니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행악자를, 그 멸망시킬 대상을 왜 자꾸 그렇게 키우십니까?”라는 말이에요.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창세기에 그걸 숙성(熟成)이라고 표현했어요. 제가 보기엔 너무 적절한 표현이에요. 창세기 15장 16절에는 이걸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라고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숙성하는 거죠. 죄가 무르익을 때가 되어야 심판을 위해서 따는 거예요. 죄도 열매거든요. 열매를 따야 밟아서, 그 포도가 밟아 터져야, 거기서 저주받을 피가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왜 저 집은 잘삽니까?’라는 것은 우리의 시기심이에요. 좀 어렵게 말씀드릴게요. 이런 겁니다. 어떤 여자가 억만장자인 남자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은 사랑을 둘로 나눠야 해요. 억만장자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 남자를 사랑하는가. 이렇게 둘로 나눠야 합니다. 억만장자 된 남자를 사랑할 때, 돈을 사랑하는 것과 남자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뭐가 되어있느냐 하면 단락(段落)되어 있어요. 뭔 뜻이냐 하면 끊어져 있어요.
인간은 돈을 사랑하게 되면 절대로 돈 가진 남자를 사랑할 수 없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그 남자가 돈 떨어지면 그걸로 끝입니다. 돈을 사랑했는데 돈 떨어졌으니까 사랑의 대상이 상실된 거죠. 우리교회 교인들은 얼마나 감사한지. 아예 없다고 여기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겠죠. 그래서 정말 그 남자를 사랑한다면, 자꾸 집안에 돈이 생기면 아내는 걱정이 되는 거죠.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 그 남자가 벌어주는 돈을 사랑하면 어쩔꼬’라고. 물론 그런 걱정은 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가 그겁니다. 돈 많아서 아버지를 떠났잖아요. 그런데 돈 떨어지니까 아무도 그 사람에게 밥도 먹여주는 사람 없었고 돼지랑 같이 살았어요. 이게 돈의 위력이고, 이게 현실이고, 이 현실을 아무도 부정 못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 보살집이 돈 잘 번다고 시기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 내부에 돈을 사랑한다는 고백일 수밖에 없어요.
‘지가 뭔데 잘 살고, 나는 뭔데 못 살고’라는 식으로 된다고요. 그러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 왜 우리가 탈락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사실 그것이 주의 뜻인데, 주의 뜻은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이 딱 한 가지예요. ‘제발 불신자의 삶이 어떠함을 보여라’라는 이겁니다. 불신자는 이런 이런 삶을 보인다는 것을 불신자를 통해서 보여주지 말고 네가 보여주라는 겁니다.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음을, 진배없고, 똑같음을 보여줌으로써 왜 내 이름은 탈락이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지를 보이면서 철저한 불신자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건 뭐, 힘들지 않습니다. 이게 뭐 힘들어요. 태어날 때부터 불신자인데 힘들 게 뭐가 있어요. 오히려 억지로 불신자이면서도 신자인 척하는 게, 이건 뭐 본인도 속이고, 남도 속이고, 주님도 속이고, 다 속이는 거죠.
우리가 아직도 안 죽고 살아있는 이유는 남아있는 불신자의 삶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죽어 마땅한 우리를 안 죽어야 마땅한 존재로 잘못 이해하고 오해하면서 하루하루 버티려는 식으로 버티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여러분이 한번 문제를 알아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해답이야 제 입에서 3초도 안 걸려서 나오겠지만.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 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는 말씀이거든요. 자,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재림을 알기 때문에 재림이 일어나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가 재림을 몰라도 재림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까? 하나, 둘, 셋.
우리가 재림을 알아서 재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끝까지 재림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죽기 전에는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내가 살았다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내 중심으로 굳히고 있는 이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 내가 살아있고 주께서 오시겠지’라는 그 지식마저 나 살아있음에 더 보태라고 잡아당기고 끌어모으는 식으로, 그래서 구축된 나를 구성하는 식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신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불신자의 모습이거든요. 그런 불신자의 모습을 우리는 흔쾌히 인정해줘야 해요. 이게 바로 신자입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주님 앞에 왜 탈락될 수밖에 없는가를 보이는 것이고, 그 사람은 그만큼 예수님과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오늘 본문에 선지자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욕할 거예요. ‘선지자가 되어서 어떻게 부자가 잘사는 것을 그렇게 시기해서, 하나님에게 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느냐고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그거, 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너무 하찮고 수준 낮은 기도를 왜 하느냐’라고 하지만 선지자의 기도와 오늘날 안 믿는 사람의 시기나서 하는 기도의 차이점은 선지자의 기도는 반드시 기도 내용대로 실현된다는 거예요.
그 기도대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여기 본문 2절에 보면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그리고 3절 끝에 보면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
여기에 보면 그냥 예비해주시면 고맙겠다고 기도하지만 이것을 예수님이 기도해버리면 그들은 반드시 끌어내어 지옥가기 위해서 미리 선지자에게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신 거예요. 그런 부분은 시편에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시편 37편 1~2절에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편 37편 7절에 보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불평하지 말라는 겁니다. 10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악인을 위하여 불평하는 자가 메시아고, 그 메시아의 분노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면 아버지가 메시아의 기도대로 얼마후에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그런 구조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시편 53편 1절에도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3절에 보면 더러운 자가 되고 “하나도 없다”라고 되어있어요. 이 본문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뭐라고 인용하느냐 하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되어있어요.
모조리 탈락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조리 탈락이에요. 그 탈락하는 이유를 아는 자가 신자요,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 신자는 어떤 점에서 내가 탈락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깨닫기 위해서 90세까지 또는 100세까지, 이건 정말 욕인지도 모르지만, 사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욕을 해서 죄송합니다. 권사님은 한 102세까지. 자식들 입에서 욕 나오도록, 분노 나오도록.
우리가 이 땅에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된 상태에서 우리는 탈락이에요. 주님의 십자가 부활을 보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나팔 소리, 데살로니가전서에도 나오는 나팔소리 앞에서 전부 다 잠자고 있어야 해요. 잠자는 자를 깨우는 나팔소리예요. 혼자서 눈 뜨고있으려고 눈에 성냥깨비 집어넣고 억지로 부릅뜨고 ‘나는 주님 볼거야’라고 하지 마세요.
그냥 주무세요. 주무시면 나팔이 깨워줘요. 나팔이. 재림은 우리가 알아서 재림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때와 기한은 모르고, 또 몰라야 해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뭘 알아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뭐냐 하면 ‘재림할 준비 되었느냐’라는 말을 바꾸세요. ‘늘 언제 죽어도 마땅함을 알고 죽을 준비되었느냐?’ ‘Are you ready?’
꼭 놀러가면 집라인(Zipline) 타든지, 번지점프 할 때 “준비 됐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부르면서 뛰어내리세요”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늘 뛰어내릴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후회없이. 왜? 이 불신자 노릇도 지긋지긋하니까. 남 잘되는 것보고 시기하고. 이건 내가 관리도 안 되고 통제도 안 돼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이 용납이 안 돼요.
왜냐 하면 불신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건 내가 성화가 안 돼서 그렇다’라는 식으로 자꾸 자기 탓하지 마세요. 이건 아담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본성을 집어넣었는데 그런 본성있다고 애궂은 우리를 탓하면 안 돼요. 우리는 내놓을 게 불신자 모습밖에 내놓을 게 없는 겁니다.
그 다음 시편 73편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그 이유가 뭐냐 하면 3절에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그다음 악인들을 보면 4~5절에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이러니 인간이 교만하지 않을 수가 없죠.
6절에 보면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강포라 하는 것은 너무 잘 살기 때문에 상대를 얕잡아 보는 것을 말하겠죠. 7절에 보면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야~~이거 결정적입니다. 나는 이번 달에 2천만 원 얻기를 원했는데 그 달 말에 수입이 2천 7백. 자기가 예상한 수입보다 더 많은 소득이 나니까 자기가 우쭐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거 정말 불행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에게 정말 측은한 마음을 보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주위에 그런 사람 있습니까? 뭘 해도 잘 되는 사람 있습니까? 늘 안부 보내세요. 오늘 안 죽었는가 살펴보세요. 인간이 가졌는데 교만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물론 처음 만들었을 때는 안 그랬겠지만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건강하고 돈 잘 벌고 매사에 우환이 없으면 인간은 교만이 하늘에 이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끝으로, 이런 게 우리 모습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는가. 신약에 보면 그 해답이 나와있습니다. 골로새서에 비밀이라고 나와있어요. 골로새서 1장 26~27절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로새서 2장 3절에도 보면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2절에도 보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를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고 연관짓기 바랍니다. 내가 나를 탓하지 마시고, 내 세속을 너무 미워하지 마시고, 항상 세속을 끊고 세속을 미워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지금 나에게 일어났던, 내 더러운 속내가 뒤집어지는 이런 모든 것들이 내가 비밀이 아니라 따로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비밀을 알게하기 위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예레미야, 오늘날 선지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니고, 남 중심도 아니고, 잘사는 사람 중심도 아니고, 인간 중심도 아니고, 오직 비밀인 예수님 중심이기에, 주께서 일으킨 일이기에, 너무 탓하지 말고 주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