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10월 25일 강의 녹취 - 오용익 목사
Re..10월 25일 강의 녹취 - 오용익 목사
이름 : 오용익(IP:)
요한복음 9장
이근호목사
2004년 10월 25일
안산 나라 장로교회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을 제가 읽어 봅니다.
요한복음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 매우 건방지게 들리지 않습니까?
어떤 아저씨가 와서 대뜸 하는 말이 너희는 아래서 났다 나는 위에서 났다 너희는 이세상에 속하였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라고 한다면 ---
그래서 어쩌라는 말입니까? 어쩌라고요.
그러니 나를 믿어라!! 그러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요,
참---, 이말이 자신만만 하지 않으면 이 말을 못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목내놓고 나를 따라 오지 아니하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들어 보세요
지금 예수님께서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들은 땅에 속했고, 그러니 ‘잘 먹고 잘 살아라’ 그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날 따라오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땅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그것은 제대로 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방식이 ‘너희들은 내가 사는 동네하고 딴 동네야‘ 라는 것이 됩니다.
‘결혼을 하든 뭘 하든(---?) 동네가 다른 동네라는 것’이 됩니다.
뒤에 어려운 것이 또 나오기 때문에---
이 말씀이 공격용임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동네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자기 집약적이므로 자기 정당성을 보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축구를 해도 안산하고 수원하고 하면 안산사람은 안산팀을 응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땅에 속했다 하면 이상하게도 땅을 집착하고 안놓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속하지 않았고 하늘에 속했다는 말씀을 하시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려워집니다.
갈라디아서 4장 22-28을 보겠습니다(언제까지 쉬운것만 할 수는 없습니다).
갈 4:22-28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요.
첫 번째 어려운 것이 “자유하는 여자”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사도바울이 말을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냥 정실부인하고 첩실부인 이런식으로 말하면 되는데
갑자기 “자유하는 여자”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갑자기 “자유”라는 말이 나와 버리는데 미리 말씀드립니다.
“자유”라는 말은
이 성경전체를 지킬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자유”입니다. 생전 이런 이야기처음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교인들에게는 이 성경책이 짐이 아닙니까? 목사님 이것도 지켜야 합니까? 이것도 지켜야 할 짐, 저것도 지켜야 할 짐이 아닙니까?
율법에서의 자유라, 그 당시 율법이란 구약까지입니다. 그런데 구약도 만만치 않습니다. 구약만 해도 수천가지가 넘습니다. 그냥 하나는 종에서 태어났고 하나는 자기 본부인이라 하면 그냥 납득이 되는데 갑자기 “자유”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만큼 이 갈라디아서가 어렵습니다.
왜 “자유”냐가 그 뒤에 나옵니다. 어머니가 위에 있거든요.
갈 4:26,27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여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어머니의 할일은 자식을 낳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두 언약”이라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도 어려운 말입니다. 제가 어려운 말이 연달아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가 나왔고(22절)
또 하나는 “두 언약”이라는 말씀이 나왔고(24절)
그 다음 어려운 것은 “어머니”라는 말입니다(26절).
사도바울은 이 세가지 말로,
땅에서 살면서도 하늘에 소속된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고 있음을 ‘이 세가지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율법이 하는 일은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아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 “너희는 땅에 속했고 나는 하늘에 속했고”, 이런 말씀이 공격용이라고 했지요?
사도바울 입장에서 율법은 우리를 공격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 지키면 될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율법은 못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왜 못지킵니까? 우리가 이미 누구의 품성을 입었나 하면 아담의 타락된 품성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타락되었다는 말은 아무리 선을 행하고 싶어도 악이 우선권을 쥐고 있어서 코 앞에 율법이 있어도 그것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율법의 특징은 못지키면 저주고 지키면 축복입니다. 중립이 없습니다. 심지어 열개를 잘 지키다가도 한개를 못지키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안산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을 향하여 ‘당신 어디 사십니까’ 물어보면 ‘땅에서 살지요’ 할겁니다. 그러나 땅에서 살면 안됩니다. 에녹은 떠났습니다. 땅에 살면서 땅에서 떠난 사람들을 모릅니다. 죽고 무덤되는 것밖에 몰라요.
교회가 이땅에서 복받고---, 그것이 교회인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것이 문제가 되는데---.
성경말씀 왜 주셨습니까?
네가 땅에서 태어 났느냐? 예!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네가 흙에 속했느냐? 예! 흙에 속한 자입니다. 그럼 죽은자네. 하고 그걸 통보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지금 사람들 텔레비전 본다고 난리입니다. 삼성하고 현대하고 하는 야구 본다고 난리입니다(지금 야구 해요? 좌중의 웃음소리).
그 사람들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냥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서 끝나는 겁니다. 목사님! 땅에서 살다가 나중에 죽어서 좋은데 가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식한 소리입니다.
율법에 속했다는 말은 율법에서 못벗어 난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특징은 백번 죽고, 백번을 되풀이 해서 태어나도 율법에서 못벗어 난다는 것이 율법의 특징입니다. 왜냐? 육에서 태어난 것은 아담의 품성을 그대로 담았기 때문에 백번을 되풀이 해서 태어나도 타락한 죄성이 계속 담겨서 연줄로, 줄기로서 파생적으로 나올뿐입니다. 수평적으로 뻗어 가는 것은 되는데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것은 안됩니다. 인간이 율법의 저주를 극복하고 올라갈수가 없습니다.
단 한 사람 있죠. 율법의 저주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부산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들! 왜 사람은 법에 민감합니까?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학생들에게 그냥 공부하라면 공부를 안합니다.
시험친다는 법을 주면서 공부하라면 공부를 합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법에 민감하고 법에 사족을 못쓰고 법에 대해 겁을 집어 먹고 있습니까? 이것은 법에 매여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법의 공격 대상이 되어 있고 거기서 면제 대상이 되면 그것을 두 글자로 “자유”라고 합니다. 그게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로다 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이 되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라고 합니다.
갈 5:3,4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로다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 말을 바꾸어 봅시다. 그리스도에게서 안끊어 진 사람은 뭐가 없다?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자로 무엇이라고요? 그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이거 기존교회에서는 이거 가르치면 기절합니다. 왜 기절합니까?
이런 것을 전하면 사람들이 교회 출석을 하겠어요? 헌금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도바울이 ‘아마 그 사람은 농땡이 일거야, 율법도 안지키고 하나님도 안섬기는 농팽이 일거야’ 라고 생각들 하겠지만, 사도바울이 ‘이 세상에 나보다 율법을 완벽하게 집요하게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 나와보라’고 합니다(빌 3:4-6).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울되었을때 예수를 이단으로 처단하려고 한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예수 믿는 이단을 처단하는 그것 조차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반듯하게 살기 위한 일환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대로 반듯하게 살기 위한 일환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을 이단으로 생각해서 그 이단을 제거하는 것이었는데, 진짜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자기가 하나님과 정 반대의 위치, 그런 동네에서 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반듯하게 살면 살수록 누가 점 점 더 핍박받습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로 인하여 더 핍박을 받겠지요. 사도바울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좀더 잘 섬겨 보겠다고 한 그 열정이 결국은 예수님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더 핍박하는 결과로 자꾸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사도행전 9:4)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언제 예수님을 핍박했습니까? 주님은 부활하셨는데요.
예수믿는 이를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되는데 문제는 사도바울이 예수님과 예수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공명, 자기명예? 아니었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잘 섬기기 위해서!
어떻게?
법지켜서!
이 성경 잘 지켜서 하나님 섬기겠다는 겁니다.
오늘날 일반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똑 같은 겁니다.
이 성경책의 수천가지 법을 자신이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될거라는 그 착각,
그거 잘 지켜서 복받겠다는 항목들을 계산에 넣으면서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랬었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예수 만난뒤에 사도바울이 무엇을 알았습니까?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에 매여 있음을 확인시키고, 죄에서 못빠져 나옴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후에 추가로 주신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일반교회에서는 이것을 이야기 안해주니까요.
그러면 일반교회에서 이야기 안해주는데 이것이 어디 있습니까?
갈 3장 17절에 있습니다.
갈 3:17,18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언약을 무엇이 취소하지 못한다? 율법이 취소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율법은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십계명이 율법의 원천입니다. 모세하고 하나님하고 독대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준 것을 받은 것입니다. 430년 후에 십계명이 주어졌는데 사람들은 십계명이 주어지니까 십계명에 주목합니다.
바로 저거다! 우리보고 지키래. 지키면 복준대. 그런식으로 지킬만한 것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에 것은 다 떼어 버리고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죽 나오잖아요. 이것은 우리가 상식 선에서 ‘야, 이거 되겠다’ ‘거짓말 하지 마라’ ‘이것도 되겠다’ ‘하지 말라면 안하면 되지’ ‘될 수 있겠다’ 그래서 이것을 지킬만한 것이라고 본겁니다.
이렇게 율법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어디에 눈을 돌렸다? 율법에 시선을 둔거죠.
그것보다 먼저 있던 언약, 언약 하면 어렵죠 약속이라 합시다. 약속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시선이 율법에 가 있게 되면, 율법을 지키면 지킨 만큼 의로와 지고 그 의로움 때문에 하늘나라 갈수 있다는 방정식이 성립됩니다.
목사님이 ‘십일조 하라’ 하면
십일조? 이거 되거든요. 십분의 일만 내면 되니까요. 그러면
십일조 하면 뭐 됩니까?
십일조 하면 하나님의 성도로서 구원받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구원받기 위해서 십일조 내면 구원이 성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말짱 엉터리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이것이 쇠덩이입니다.
완전히 우리를 납작 눌러서 오징어로 만들어 버립니다.
지키기는커녕 율법을 못지키면 뭐가 주어집니까? 저주, 당연히 저주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연히 저주 받은 상태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수 없음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누구도 저주받고 지옥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6장에 나오지요?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무슨 수로 지킵니까? 못지킵니다.
하루 스물 네시간 가운데 스물세시간 지켜도 한시간 동안이라도 딴짓 하면 안됩니다.
무슨 수로 지킵니까? 못지킵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요? 무슨수로요?
결혼을 앞두고 남편(될 사람)을 사랑해야지, 하나님 사랑합니까?
율법은 우리가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5:27,28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남자가 되어서 이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눈에 여자가 보이는데 어떻게 마음으로 간음을 안합니까? 아예 여자를 다 죽이지요! 이걸 어떻게 합니까?
특히 불가능한 것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러면 한쪽눈이 범죄하면 나머지 한쪽눈은 범죄 안합니까? 양쪽 다 뺄까요?
오른손이 범죄하면 아예 찍어 버리라. 살살 다루라 가 아니고 찍어 버리라. 그러면 도끼를 아예 차고 다녀야죠.
마태복음 5:41,42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거저 주어라. 미쳤습니까? 이자를 챙겨야죠
마태복음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줄을 아시느니라
세상에 사람이 사는 것이 마실까, 먹을까, 그것이 사람 사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그거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것 아닙니까?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을 생각합니까? 달리 있을수가 없지요.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좆으라 하시니
이것은 안됩니다.
마태복음 8:20-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좆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0:37,38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한마디 한마디,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우리가 지킬수 없습니다.
딤전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휴대폰은 왜 삽니까?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 세상에 돈 사랑 안하는 사람 어디 있나요? 어떤 말씀도 우리 힘으로 지킬수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더 심합니다.
야고보서 4:13-15
들으라 너희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 그러니까 살고 죽는 것은 내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분에게 달려 있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매일같이 그렇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갑니까? 이왕 살아가는 것 잘 살아 보자는 것입니다.
목사들의 근본 생각은 이겁니다. 살고 싶다는 겁니다. 살아 남고 싶다는 겁니다.
하나님 믿는 것은 하나의 위장풀입니다. 군대에서 하는 위장풀 같은 것. 신학, 교리, 벗겨버리면 똑같아요. 주여,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개척교회 하는 데 사람들 다 가버리고 남는 것 없을때, 더 이상은 저 못합니다. 저는 할도리 다 했는데 더 이상 힘이 나지 않습니다. 자살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상하게 목회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서 하지만 가장 밑바닥에 절실한 문제가 결국 자기 생존, 자기 생계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은 떡으로 사는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했는데 말씀 달달 외우면 하늘에서 떡이 떨어집니까? 돈이 떨어집니까? 이 모든 말씀은 단 한분만 지킵니다. 예수님만 지키는 용입니다. 이 책은 예수님만 지키고 우리가 못지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책이 나온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무슨 생각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실로 어려우니라
정말 우리가 못지키는 말씀이라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죠.
하나님! 왜 십계명, 지키라고 주신 계명을 우리가 못지킵니까?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사람은 무엇이든 보게 되면 탐내게 됩니다. 야 저 스피커 괜찮다! 이런식으로요.
탐내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탐심이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 다니기, 헌금하기, 목사님 말씀 잘듣기, 이런 것으로 어설프게 얼기설기 되도 않는 얇은 풀로 어설프게 가리운 것 뿐입니다. 사실은 탐내고 싶어서 환장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안되지, 그러면서 숨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같은 교인들한테는 통하지만 하나님한테는 안통합니다.
탐 안내서 천국 갈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 탐심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으로 태어난 인간은 율법이라는 경계선을 못벗어 난다는 말입니다.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율법은 모든 사람의 입을 틀어 막기 위해서 준 것이 율법입니다.
롬마서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것도 모르고 목사는 ‘이거 저키라 저거 지키라’ 하면서 교인들 기죽이고 목사는 할일 없어서 교회에서 노니까, 축구 보다가 성경 들여다 보지만 교인들은 성경 언제 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목사 자신은 쉬지 않고 기도합니까?
남보다 좀더 할지 모르지만 좀더 하는 것이 쉬지 않는 겁니까?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법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가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라는 뜻입니다.
“범사”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감사하라는 겁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무슨 수로 항상 기뻐합니까? 세상에!
기쁨이란 것은 자기의 기대감이 성취될때, 그 때 그 순간 짦은 순간이지만 자기 예상대로 될 때 기쁜 것 입니다. 무슨 수로 항상 기뻐합니까? 무슨 수로 항상 감사합니까? 사람이 아파트 좋은 것 샀다고 기뻐해도 그거 몇 개월 못갑니다. 옆집에 50평 사면 ‘이것도 집이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주여! 감사, 어쩌고--- 하지만, 얼마 못갑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성경에는 율법 지켜서 천당 가는 장한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을 은총 되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430년 후에 율법을 줘서, 현 거주지가 ‘저주 아래 놓여 있음’을 통보하기 위해서 율법 주고 그 율법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심으로 ‘이것이 바로 진솔한 너의 본 모습이다, 사진이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력으로 구원이 안됩니다.
히브리서 7장 19절을 보면
히브리서 7:19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찌라)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한다”고 하지요?
히브리서 9장 12절!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자기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피로", "자기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지요?
예수님은 왜 피를 흘리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것은 "영원한 속죄"(한두번 봐주는 것이 아니고)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답해야죠.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이죠?
우리는 영원한 죄인이죠.
이렇게 주고 받고가 되어야 양쪽 다 예수의 피를 믿는 사람입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뭘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이래서 죄인이지요? 물을때 교인들의 화답이
예!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지요. 이렇게 나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목사가 강단에서
이렇게 이렇게 잘못되었으니 이런 규칙으로 한번 해 보지요.
그럼, 그거 지키면 복줍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교회 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절간에 온것입니다.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교인들도 나빠요. 정말 나빠요. 교회와서 하나님 말씀 지키고 그만큼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서 살고 있다? 땅에서 살죠. 땅에서 복받은 것은 하늘에서 복으로 취급을 안해줍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우리는 어디에 속했습니까? 땅에 속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속했지요? 나는 하늘에 속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공격용입니다.
아이고 인간들아! 여전히 땅이냐? 나(예수님)는 하늘에 속했어요.
동네가 다르다는 겁니다. 땅에 속한 인간이 자력으로 예수님속한 하늘에 못옵니다.
율법이 막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이런 규정을 못지키니까, 우리는 죄인이 되기에 율법이 막습니다.
막는데, 그걸 트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트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 지키고 안식일 지켜서 트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고함질러도 좋아요. 목쉬어도 좋은데.
히브리서 9장 21절에 보면---. 조금 어렵게 합시다.
아까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이라 했지요?
언약으로 구원받는데 430년 뒤에 율법이 오니까 사람들의 눈길이 어디로 갔습니까?
아, 율법이다! 십계명이다! 십계명으로 갔지요? 이거 지키면 구원이다 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율법은 구원지킬 가능성이 아니고 구원안 될 불가능성을 우리에게 통보해주는 것이 율법이라 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0절에 보면 무슨 피라고 되어 있습니까?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고 그 다음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면 반대로 해봅시다. 피 흘림이 있은즉, 그 다음에 뭐가 되요?
어떤죄도 사한다는 것입니다.
그 죄란 율법에 의해서 성립된 죄죠. 율법이 있어야 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되기 위해서!
바로 이런 이런 죄인데 너희 힘으로 해결 안됨!
그런데 그 다음에는 율법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언약인데 그 다음에 한글자 “피”, “언약의 피”가 흘린즉 “속죄” “영원한 속죄”입니다. 그냥 속죄가 아니고 무슨 속죄? “영원한 속죄” “영원한 속죄” 교회 한번 나올때 주는 것이 아니고 죽을때 까지 영원히 해결되는 보험입니다.
다 해결되는, 온갖 건강보험 다되는 것 알죠?
삼만칠천원씩 내면 원금 되돌려 받는거 알죠? 여성 특별 우대하면서요. 감기부터 시작해서 온갖 질병 다 보장되는 것이요. 잘 따져 봐야죠. 원금 돌려 받는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데 낚시대로 그냥 걸어서 구원을 안하고 율법주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구원할 것 같으면 너 나와! 칠번! 십칠번! 삼십이번! 당첨되었어. 이런식으로 구원하면 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왜 죽었습니까?
그것은 율법을 이루지 아니하면 “의”가 나오지 않습니다. “의”가! 하나님은 사람을 그리워서 뽑는 것이 아니고 의인이 그리워서 의인을 찾는 겁니다. 완벽한 “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완벽한 의가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완벽한 죄인입니다. 어떤 경우라도요. 완벽한 의인은 외부에서 수입되어야 합니다. 국산이 없습니다. 공장에서 생산이 안됩니다. 수입되어야 하는데 그 수입되기 전에 ‘율법을 완성’한 수입이어야 합니다. 낚싯대가 아니고 우리가 못지킨 것을 대신 지킨 것이 되어야 하니까 율법을 완성한 수입이여야 하기에 우리는 아담이라면 예수님의 별명은 “두번째 아담” 또는 마지막 아담"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듬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님께서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은 우리가 못 이룬 것을 예수님께서 홀로 이룸으로 말미암아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 우리가 못이룬 의가 생기고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그렇게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완벽한 의인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로마서 3:21).
그 말이 기분은 좋다만은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기가 아닙니까?
너무 가볍다! 수상하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귀절 중에 하나인데요.
고린도 후서 5장을 보겠습니다.
고린도 후서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믿습니까? (아멘)
죄는 우리가 졌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그 죄를 어디에요? 화목제물에다가 다 집어 넣었어요. 세상에 이런 땡잡은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했다고요. 우리가 그런 입장이 됩니까? 우리는 그런 것을 요구할 입장이 못됩니다. 우리는 그냥 죄짓다가 저주받고 지옥갈 수밖에 없는, 땅에 속했기에 땅의 저주와 함께 멸망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감히 우리가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분에 넘치는 축복인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누군가 오셔셔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틀, 장치가 필요하죠.
그것이 고린도 후서 5:21절이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이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합니까?
저분이 고통당하신 것은 저분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 때문에 저분이 죽고 피 흘렸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본 사람에게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하고 머리 맞대고 타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해버린 자기 맹세입니다.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우리가 사전에 물어 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이것을 결정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통보한것입니다.
그러니까 통보를 두개 해주었죠? 하나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줌으로써 우리 자력으로 구원받는 것은 다 탈락시키고 끊어 버리고요.
네 힘으로 안된다!!!
유대인들은 이랬어요. ‘우리는 거짓말 하지 않았습니다’ ,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 전부 다 끊어 버리고요.
율법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레위기 24:20, 신 19:21, 출 21:24, 마태 5:38) 이런 법이 있거든요?(Lex Talionis)
제가 어떤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고생이 많으면 복수심이 깊어집니다. 사람이 남에게 당했다고 당한 사람이 착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을 많이 했다고 착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하면 복수심이 생깁니다.
욕망이란 한쪽을 누르면 한쪽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한쪽이 한쪽을 눌러 버리면 ‘너, 두고 보자’ 이렇게 나옵니다. 두고 보자는 사람을 눌러버리면 ‘내 자식이 너를 복수한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장고(영화) 아닙니까?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중국영화에도 나옵니다. 아버지가 안되면 손자가 복수 합니다.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인간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심이 더욱 단단해 집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일때 터져 버립니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가면이고 살짝만 벗겨버리면 거기서 악마의 얼굴이 나옵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죄를 모르면 반드시 복수할수 있는 정당성을 항상 챙겨서 다닙니다. ‘나, 너 복수할 거야’ 이것이 “자기 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남을 미워 안했습니다. 미워 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네가 죄인인 것을 아느냐’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저는 남의것 안훔쳤어요. 안훔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죄인인 것을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짜 죄인인줄 알면 복수할 맘 납니까? 다, 내가 죄인이요. 다, 내가 못난탓이요! 그렇게 나오지요.
제가 어제 아침에 설교시간에 이런이야기 했습니다.
부모된 자는 자식들에게 미안한 감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자식이 아파보세요. 왜 아픈겁니까? 연약한 체질을 부모한테 물려 받은 것이 아닙니까? 자식은 애궂은 부모 때문에 대를 이어서 고생합니다. 그렇게 미안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누구를 닮아서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까? 다, 나를 닮아서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단지 내 속에서 태어났다는 그 이유로 인해서 고생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자식한테 바라기는 뭘 바랍니까? 그러다가 늙어서는 치매 걸려 있으면 결국 누가 돌봐야 합니까? 만만한게 자식입니다. 자식한테 뭐 해 준게 있다고요!! 이런 설교는 어버이날 해야 하는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부모가 ‘이 부모는 하나님앞에 죄인이야’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갖고 있을때 그 복음을 보고 자식은 부모를 본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부모대에서 일어났지만 자식들도 구원받기 위해서 유월절이 되풀이 될 때 자식은 부모의 유월절의식을 행하는 하는 것을 보면서 그 부모를 공경하면서 그 계시를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라는 이유 때문에 자식을 노엽게 하면 안됩니다. 에베소서에 있잖아요(엡 6:4). 자식이든 부모든 선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부모도 죄인, 자식도 죄인, 십자가 피 흘림 앞에서는 똑같습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질문입니다.
주관식은 어렵기 때문에 객관식으로 하겠습니다. 골라잡으세요.
예수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은?
1) 우리의 소원이다
2) 예수님의 소원이다.
몇 번입니까? 정답은 2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인들, 아니 목사부터, 신학한 사람부터 마치 내가 좋아서 내 구원을 받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내 숙제 내가 받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이 자기 숙제 하다 보니 내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사람은 뭐든지 자기일로 수렴합니다. 자기 일로 끌어 당깁니다. 자기가 무슨 솜씨 있다고요! 아이고, 페인트 칠도 제대로 못하면서요. 무슨 솜씨 있다고 자기 구원 자기가 챙깁니까? 어설프기가 짝이 없습니다. 자기 좋을때, 기분좋고, 돈좀 벌때, 하나님도 찾는 거지요. 자기 힘들어 보세요.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보기도 싫어요 대번에 왜 내 인생을 괴롭게 만듭니까? 눌려 있던 복수심이 반발로 튀어 나옵니다. 복수심이 튀어 나올때는 무섭습니다. 악마의 얼굴입니다.
인간은 따져보면 고생 안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고생을 그만큼 했다는 말은 각자 각자 남에게 복수심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 나를 이렇게 대우하면 섭하지요? 나 고생 많이 했기에 잘해줘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전부다 자기 잘남이고, 나같은 인간은 잘해 줘야 한다는 자기의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사람을 풍지박산 낸다면 그 사람은 앞장서서 하늘나라 쳐들어 갈 사람입니다. 하늘나라 유리창 깰 사람입니다. 교회 다녀도요. 그럴 가능성이 우리에게 다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게 무엇인가요? 사람이 제일 행복할때가 언제냐 하면 자기가 전적 죄인됨을 알 때 그것보다 행복할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황공스럽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모든 것이요. 교회가서 헌금하고 봉사한다 무엇한다 무엇한다고 하면 ‘그래 너 그런식으로 잘 살아라’, ‘그래 너는 잘해라’ 하고 ‘나는 주님앞에 죄인이다’ 하고 주님께 자기 숙제를 한 대상이 되었다는 이 자체로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면 그것만 해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쓸데없이 남하고 경쟁하지 마세요. 경쟁하게 되면 마음속에 복수심이 생깁니다. ‘나보다 뒤에 온 사람이 나보다 기도 오래 했다’ 그렇지 ‘나도 기도원에 가서 기도좀 해야 겠네’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 이 자립심이라 하는 것이요. 이게 참--- 사람이 사실 자립이 안됩니다. 아담안 에서는 자립이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곁가지 다 잘라 내면 한사람 밖에 없습니다. 다 같은 파생된 인물이면서도 자기들끼리 누가 잘났나---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보시기에 기가 찰 일이 아닙니까?
이것이 무슨 신앙입니까? 자기 잘남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다 똑같이 보고 있는데 서로를 똑같이 안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신앙입니까? 자기 잘남이죠.
언약이 우리 앞에 주어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은 공격용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자기 자리의 실정을 폭로시키는 말씀입니다. 너! 흙이다. 너! 내 세상 아니고 딴 동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 아니하리라
여기 예수님이 자신이 해야 할 숙제가 나옵니다. 우리는 못합니다.
“아버지께서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것이요”
6장 37절에 따르면, 옵니까? 안옵니까? “올것이요”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한 사람은 반드시 어떤 경우라도 탈락되지 안고 반드시 다 오게 되어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뒤에 있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쫒지 아니하리라” 누구 결심입니까? 우리 결심입니까? 우리가 뇌물주었습니까? 압력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내어 쫒으면 우리는 내어 쫒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어쫒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로 탈락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내어쫒지 않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정리해봅시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등장한 것입니까?
일종의 ‘약올리기 위함’으로서 등장한 것입니다.
약올리면서 우리의 실정을 폭로시키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를 불러내는 작업이 이미 개시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시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오늘 하려고 하는 요한복음 9장입니다. 그 개시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에 의해서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이 길가던 소경이었습니다.
질문입니다.
여러분! 길가던 소경은 자기가 소경인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소경은 땅에 속했습니까? 하늘에 속했습니까? 땅에 속했지요?
그러면 그 당시에 눈 브릅뜨고 소경 아닌 사람은 땅에 속했습니까? 하늘에 속했습니까? 땅에 속했지요? 그러니까 땅에 속한 것이 똑같은데 소경은 자기가 소경인줄 아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가 정상인줄 아는 겁니다.
왜요? 눈이 감기지 않았으니까요
요한복음 9장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가 소경이라고 여긴 사람은 소경이 아니고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소경이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일괄적으로 하늘에서 땅을 다루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000씨 12월에 결혼도 하고, 또 다른분도 결혼할수도 있고, 그 다음에는 애기도 낳을수도 있고 그렇게 인생을 살면서 갖가지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목사님! 너무 좋아요,
예, 좋지요. 좋은데 문제는 땅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일이라는 거지요.
이걸 가르쳐 드릴께요. 조금 어려운데. 땅에 속한 것은 소유가 모여서 존재가 됩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소유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검토해서 그러니까 나는 이정도 사람이라는 규정을 받습니다. 장로했다가 목사하면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장로가 되어서 목사한테 눌려서 기죽다가 목사가 되어서는 목사라는 직을 자기가 소유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것도 소유할 자격이 안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기 매직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자칫하면 말장난처럼 들립니다. 매직이 없는데 여기 만들어 놓았습니다. 매직이 하는 말이 ‘나 매직 안될래. 나 볼펜될래’ 합니다. 그렇게 우길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매직은 원래 없었는데 만들어 놓으니까 하는 소리가 ‘나 매직 안될래. 볼펜될래’ 하는데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그 입술은 매직에 속합니까? 안속합니까? 매직에 속하죠.
그러니까 나를 왜 매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까? 하는 답은 자신이 이미 매직이 되었기 때문에 비로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그 따위 소리 하면 안되죠. 아예 없었으면 그런 소리가 안나올 것 아닙니까?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것을 보세요. 그냥, 예수님 하나님 떼어 버리고요. 보세요. 20평 30평 소유하면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자기가 자기됨을 자기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안됩니다.
‘나 매직 안되고 볼펜 될래’ 그런 자격이 매직에게 없듯이 ‘나 이제부터 30평 아파트에 안살고 60평 아파트 가질래’ 할수 있는 그런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30평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줘서 가진 것이니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자기것으로 간주하니까 자꾸만 자기 소유로 할수 있는 권한이 있는줄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소경 아니야, 저 사람은 소경이야. 이렇게 자기가 소경 아님을 가지고 자기 인간됨을 확정지으려 하니까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네가 네 뿌리도 모르는 나쁜놈, 네가 하늘의 뿌리도 모르는 소경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요한복음 9장을 이야기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길가시다가 소경된 사람을 만나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는 말이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기 죄때문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정답이 둘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뒤의 정답을 모른다고 가정한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날때부터 저주받아서 태어난 것을 보니 정상이 아니더라 그러면 부모죄네. 아니지. 그 애가 태어날대부터 부모에게 대들고 젖물면서 엄마 젖을 아프게 했고 오줌도 쌌을것이고--- 그럼 자기 죄가 되는 것인가? 그럼 어떻게 되는거야?
예수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도 않고 그것은 부모죄도 아니고, 자기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반드시 소경 되어야만 할자라고 대답합니다. 반드시 소경되어야만 할 자라는 것입니다.
매직이야기 해봅시다. 매직이 매직 된 것은 매직의 죄입니까? 매직의 부모의 죄입니까?
뻔하죠. 매직은 사용하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 놓았다고 하면서 왜 그 이야기를 하나님앞에서 고백을 못합니까? 주여! 저를 왜 소경 만들었습니까? 그런 소리 하면 안됩니다. 그런 소리 하면 맞아도 싸요. 안되요!!! 그런 소리 하면 안되고요. 원망투로 하면 안되고 이래야 합니다. 아하! 나로 하여금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셨구나, 이럴때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하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야기 하기를,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나. 그럼 뭐 될라고 합니까? 남자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남자 되고 싶다는 하는 마음을 품게 만든 것은 뭐가 먼저 선행되는 것입니까? 여자로 태어나는 은혜가 있었기에 거기서 나오는 욕심이죠? 아예 여자로 태어났다는 내가 없었다면 욕심도 없었을것 아닙니까? 내가 여자로 태어 났다는, 내가 이미 있다는 데서 오는 욕심이죠. 그러면 먼저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까? 만일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진짜 감사했다면 남자로 태어난것에 대해서 원망을 하겠습니까?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감사를 안하고 있지요? 그것은 나를 만든것에 대해서 도리어 공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로마서에서 우리는 본디 하나님의 원수라고 되어 있습니다(로마서 5:10).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이런이야기 하는 겁니다. 제대로 하늘의 뿌리와 관련을 짓고 살 것 같으면 따질 것도 없이, 30평이면 30평 그걸로 감사하고, 60평이면 60평 감사하고, 감사해야 할텐데 그게 아니고 ‘그거야 감사하죠’ 그런데 사람인데 욕심 안납니까? 뭐 그런 것을 가지고 탓을 합니까? 심합니다. 욕심낼 자유도 없습니까? 합니다. 제대로 된 감사 같으면 욕심이 추가될 필요가 없는 감사여야 할텐데 그것이 어설픈 감사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감사를 해 줄테니까 지금 30평에 사는데 60평짜리에서 살게 해주세요’ 하는 것은 자기 감사를 빌미로 해서 60평짜리를 따내기 위한 하나의 작당이죠. 하나의 장난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땅에 속한 사람은 어쩔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땅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손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손보는가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상하면 안됩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은 눈 떳잖아요. 어떤 사람은 감긴눈 뜨는 식으로 하고 어떤 사람은 뜬눈 감기는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 죽을때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 쉽다. 무지 쉽다. 정답은 거지입니다. 그 직업이 거지였잖아요. 왜 거지입니까? 끝까지 거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는 기분이 좋은 겁니다. 왜 직업을 바꿀 필요가 없으니까요.
거지 나사로가 죽을때 건강했습니까? 아팠습니까? 그냥 아픈 것이 아니고 끝까지 아파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아프냐 하면 개가 와서 핥아야 합니다.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자기 인생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이. 문제는 불안하니까 문제입니다. 확정되어 보세요. 기분 좋잖아요. 직업이 안정되어 보세요. 기분 좋습니다. 60까지 보장되면 기분 좋아요.
불안한 것이 문제입니다. 젊은이들이 불안하다고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확정되어 보면 거기에 걱정이 첨가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확정되었습니다. 어떤 경로를 밟아서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의 사람으로 이미 내어쫒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천하에 율법을 동원해 보세요. 몇천개 율법을 다 동원해도 그것을 다 이겨냅니다. 문제는 마음이 평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쓸데없는 율법가지고 마음 졸이고 저주받을까봐 두려워 하지 마세요. 그것은 주님이 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만약에 눈뜬 소경이 자다가 일어나서 일주일 뒤에 엎어져서 눈깨지면 어떻게 합니까? 사람이란 전에는 소경이 눈감긴 것이 자기 소유잖아요. 그때는 비참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눈뜨면 눈떳음이 자기 소유가 됩니다. 그것에 만족하면 안됩니다. 야--! 나, 눈떳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다루었다는 것을 소유해야지, 예수님이 나를 소유했다고 해야지, 나는 이제부터 바보 아니다는 식으로 나가면 곤란합니다.
장애자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지금 밖에 나가서 차사고 나면 바로 장애자되는 겁니다. 누구는 장애자 되라고 써붙여 놓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장애자 될까봐서 두려워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올때 두려움가지고 교회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삽십분 늦게 교회 갔는데 이번주에 무슨 일이 혹시 생기는게 아닌가 하는 식의 두려움을 가지고 나온다고요. 목사가 설교를 통해서 이런 두려움은 마귀가 준 두려움이며 여러분은 어떤일이 있어도 주님께 영광돌리는 존재입니다라고 해주면 좋은데 업친데 덮친다고 목사가 하는 말이 ‘돈을 안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식으로 나오지요. 날강도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길가는 소경을 붙잡았습니까?
중요한게 있습니다. 여러분! 소경이 믿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또 착각하지마세요. 믿음 좋아서 눈뜬게 아닙니다. 쓰임받은 것 뿐입니다. 믿음이란 원천이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믿음이지 자기가 만든 믿음은 개코도 믿음 아닙니다. 아침의 믿음이 저녁에 깨집니다. 기분좋을때나 믿음이죠. 자기가 만든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믿음이 무엇입니까? 소경아! 네가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 유대인이 묻습니다. 소경의 대답이 눈떳다고 합니다. 그럼 누가 그렇게 했나? 예수님이 하셨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요따위는 믿음 아닙니다. 내가 교회 다니면서 술끊었다. 누가? 내가!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중에 기분 나쁘면 한잔 걸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나를 책임졌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술 끊었다가 또 먹더라도 그것 조차 예수님의 손아귀에 있음이 믿어지는 겁니다. 술을 끊었다가 먹어도 그게 믿음입니까? 지옥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악마의 장난입니다. 술먹다가 술을 끊었다가 다시 술먹었다를 천번 해도 그런데 현혹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나를 다루어 주심이 내가 술먹는것과 관련없음이 믿어져야 합니다.
쉽게 합시다.
개척교회 목사들의 단점이 무엇입니까? 특히 복음을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단점이 이겁니다. 내가 복음대로 하는데 ‘왜 사람들이 날 안알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내가 이근호 목사가 가르친대로 십자가만 전했는데 이쯤해서 교인들이 자진해서 봉사하고 헌금하고 교회가 틀이 잡혀야 하는데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음을 손으로, 눈으로 잡히는 어떤 현상으로 잡아 보겠다고 한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십일 금식기도 할때 마귀가 와서 시험한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안다치면 메시아로 인정해줄게. 다치면 너는 사기꾼이다 라는 식입니다. 이 시험을 목사들이 받습니다.
정통 개혁주의 칼빈주의로 할테니까 사람들을 모아주세요. 그러다가 안되면 그 다음에는 내가 할도리를 다 했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나 죽을까요? 애는 어떻게 할까요?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 살고 싶지? 개혁주의 정통 복음 빌미로 해서 너 살고 싶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너의 집 보초, 똥개로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죽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안죽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괜찮은 복음으로 자기 먹고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나로 하여금 교인이 안모이게 했는가? 감사해야 합니다. 그동안 자기도 끄집어 내야 할 어두운 본색을 교인이 안모이게 함으로써 ‘나는 실제로 목사라는 것은 껍데기고 이런 더러운 저질의 인간이다’ 하는 것을 폭로케 하는 계기를 마련했어요. 예수님이 이런 일을 시켰다는 것을 믿을때 그게 믿음입니다. 목회 실패해도 그 사람은 천당갈 사람입니다. 그걸 증거하면 됩니다. 나도 이렇게 까불다가 수쓰다가 당했습니다. 이제는 어떤 현상을 믿는 식은 안합니다. 내 기도 응답되니 믿겠다는 식은 안합니다. 오직 나는 성경을 믿습니다. 속죄의 피, 영원히 십자가의 피만 바라보겠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9장의 핵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만들어 낸 믿음이 아니라 주께서 만들어 주신 믿음은 항상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고 ‘네가 구원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구원한 것’이라는 그 음성이 들리도록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인줄 알았습니다. 그 믿음을 허락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이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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