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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230914a말3장17절(타는 냄새)-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말라기

안양20230914a말3장17절(타는 냄새)-이 근호 목사

말라기3장13절부터 보겠습니다. 말라기3장13~15절, “13절,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절,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절,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그 대목을 봅시다. 인간들이 이런 말을 하는데, 우리는 자꾸 하나님 편에 서서 우리 자신을 보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내 입장, 내 생각 말고 너 입장을 솔직하게 내 앞에 털어놓으면 그 다음에 나머지 모든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속생각을 몰래 감추고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쪽에 서려는 무리수를 쓰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제 설교에도 그게 나왔습니다만, 항상 시작을 뭐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이거부터 시작해야 돼요. 미움.

미움은 어디서 오는가, 상실에서 미움이 되는 거예요. 나한테 빠져있는 거, 모자라는 거, 허겁지겁 아무리 메워도 메울 수 없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신혼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장담하기를 “내가 돈은 벌테니 니는 집에서 살림만 해라.” 라고 신혼을 시작을 했는데 남편이 직장에서 일이 너무 힘들고 고객 상대하기 힘들어서 우울증 걸렸어요. 그래서 사표를 낼 처지에 있을 때에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는 아내는 없어요.

무엇에 나서는가 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생계를 위하여 일자리 찾아 나선다. 일하는 이유가 생계. 생계가 안 되니까. 남편이 우울증 걸려 아프니까 사표를 낼 지경에 있으니까 살기위해서 생계를 위해서 일자리 나선다. 굉장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요.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그 미움이 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돼요. 미움이.

미움의 대상은 누군지를 모르겠는데. 어쨌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어쨌든 간에. 너 때문에 밉다는 규정할 수 없는데. 어쨌든 이 세상이 내 맘에 들지를 않아요. 그러면 어떤 특정 대상에게 미운 것도 없는데, 왜 나로 하여금 생계 걱정을 해야 되고, 나로 하여금 일자리 찾아 나서도록 왜 나를 이렇게 일한다는 것은. 여러분, 일한다는 것은 이거에요. 일한다는 것은 내가 기계가 되는 거고, 기계가 되려면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나의 자아성은 압류되어야 돼요.

직장 내에서는 내 자아성이 압류가 되어야 돼요. 직장에서는 나라는 걸 언급하면 안돼요. 그럼 직장생활 못해요.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돈을 얻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 하면 나의 나다움인데. 그걸 상대에게 넘겨주고 나는 돈을 얻는 거예요.

지금 시작을 미움부터 시작을 했거든요. 미움부터 시작할 때, “아, 목사님. 저는 뭐 누구 특정한 미운 사람 없습니다.” 이리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런데 생계를 위해서 일자리를 찾아 나설 때 이게 미움을 바탕으로 벌어진 일이에요. 이게 미움을 바탕으로.

일을 하면서 틱틱 거리는 거예요. 왜 갑자기 내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는 겁니다. 내 팔자가. 그러면 우리가 미울 때는 미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누구를 공격해야 되는데 뚜렷한 대상도 없어요. 미운 대상도 없어요. 그냥 사는 게 미워. 내가 그냥 이 땅에 사는 자체가 미워. 밉다고요.

여기서 여러분 중요한 것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뭐냐 하면 내가 밉고, 내가 이 세상을 힘들 게 살아갈 때에, 내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확인해 줄, 이것을 증명해 줄, 그 누구를 인간은 찾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힘들게 인생을 꾸역꾸역 힘들게 살아간다는 이 대단한 일을 그걸 누가 인정해주고 호응해줄 어떤 분을 찾아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 뭐든지 해주면 안돼요. 하나님은 어느 선에서 머물러야 되느냐 하면, 내가 화를 낼 때, 화 낼만해서 화를 낸다. 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 선까지만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어야 돼요. 내가 누굴 미워할 때 또는 세상을 미워할 때, “그래 미워할만해서 미워했다. 잘했다. 잘 미워했어.” 라고 그것을 보증해 줄 수 있는 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 미움을 모독하면 안돼요. 아이 중요하니까 써야겠다. ‘하나님은 나에게서 나오는 미움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드라마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시어머니가 재벌이에요. 재벌이고 그 앞에 가련한 며느리. 그 며느리는 그 시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행동 조심해합니다. 드라마 보면 그런 게 가끔 나와요. 시어머니가 이가 좀 아프다. 라고 재벌집 모인데서 식사시간에 하니까. 보통 재벌집은 어떻게 식사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식사하는데 메이드가 서있고 밥 들어가겠는가 몰라. 옆에 보는 사람 시중드는 사람 있고 하잖아요. 여자집사도 있고요.

“이상하게 나이가 많은지 이가 아프다.” 그럴 때 며느리가 아부를 떨지요. 잘 보여야 되니까. “제가 잘 아는 치과가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시어머니가 “그 소리 하지 마! 응 이 나이가 치과도 분간 못하는 그런 나이 치매 걸린 나이인 줄 알아?” 하고 티박을 줘버려요. 다 있는데 티박을 준다고요.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이가 아프고 이가 아픔으로 말미암아 내가 곳곳에 미운 사람에게 내가 내 미움을 공격하고, 화살을 보내고, 공격하는 이 미움은 내가 이가 아프기 때문에 미워할만해서 미워한다는 정당성이 살아있기 위한 그게 나의 세계인데, 거기에 며느리가 만약에 치과 소개해가지고 이가 안 아프면 내 미워하는 것이 이것은 나쁜 짓이 되잖아요. 지금 머리 나쁜 사람은 이 말 이해 못한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모든 걸 가지고 그 집안의 권력자인 내가, 내가 미우면 그걸 찬양을 해야 되지. “아이구, 어머님, 그러면 미워요. 안 밉게...” 내가 미우면 미워야 돼요. 그게 안 미우면 안돼요. 그러면 시어머니가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어이, 며느리! 내가 누구 미워하니까 세상 누구 이빨 아프고 하니까 니가 왜 잘됐다 이거야? 그런 마음이야? 응? 내가 미우면 예, 잘 미워했습니다. 이리 나와야 될 거 아니냐” 이 말이에요. 이게 재벌집 시어머니만 그럴까요? 못사는 모든 일반인들이 다 그럴까요? 어떻습니까? 모든 인간이 다 똑같아요.

내 성질날 때, “역시 성질 내!” 라고 성질내는 것조차 나한테 찬종할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해서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제넘게 너무 관여하면 안돼요. 내가 세상을 미워할 때 그 미움은 나의 고유한 나의 미움이에요. 그 미움이 있음으로서 참으로 나는 나다워요. 그런데 미움이 없어져버리면 나는 바보 등신이 되어버려요.

이제 말라기 3장 13절, 14절, 15절,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소리 하는지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니가 뭐든지 하나님 섬기는 것이 헛되다.” 라고 하나님이 지금 이 3장14절에서 지적하시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그래 잘못됐습니다. 회개합니다. 하나님, 다시 이러지 않겠습니다.” 이리 나올 게 아니고 인간은. “내가 하나님 보고 헛되면 헛된 거지 하나님 쪽에서 거기에 대해서 왜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까?” 라는 것이 인간이 자기가 어떻게 자기가 걷잡을 수 없는, 자기가 손댈 수 없는, 자기가 그걸 변경할 수 없는, 진짜 덩어리 나. 진짜 나가 하나님 앞에 들통 난 거예요. 발각된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같은 인간들하고 상대해요. 같은 인간들. 왜? 만만하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이 끼어들었다. A라는 인간은 뭘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끼어들면 생각해요. 뭘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완전한 분. 하나님은 어떤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그 지시와 명령에 따르기를 요구하는 분. 이렇게 하지요.

그러면 일단 자기보다 하나님이 세니까 하나님을 믿기는 믿습니다. 믿기는 믿지만 나의 나다움을 그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파괴되는 것을 누가 싫어요? 내가 싫어요. 내가 싫어해요. 나는 나의 개성이 있으면서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을 해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밀당 해온 관계로서 유지해왔었는데 하나님 쪽에서 어떻게 일하느냐,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뻔히 아시잖아요. 아시니까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화를 더 돋아버려요. 화를. 적당한 선에서 하나님께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고, 지킬 건 지키고, 적당한 선에서 이렇게 좋은 관계 유지하고자 하는 내 이 성질 더러운 것을 안 들키려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아양을 하는 식으로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 쪽에서 가만히 두지를 않고 성질을 더 건드려버려요.

성질을 건드리니까 인간들이 참다 참다 인간들이 뭐라고 해요? 13절, 14절, 15절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내가 남 미워하고 하나님 좀 미워하면 안 됩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등장함으로서 우리가 감출 수 없는 우리의 본색이 그대로 노출되는 거예요. 그대로. 하나님이 끝까지 시비걸어요. 끝까지.

인간은 남을 미워하는 게 나쁘다는 것을 인간이 알아요? 몰라요? 알지요. 그 나쁜 것을 인간은 빼기가 싫어요. 왜? 나쁜 거, 남을 미워하는 것을 빼버리면 진정 나다움이 없어요. 나다움이 없어져 버려요. 뻥뚫려가지고 이건 뭐 등신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살 재미도 없고 일상을 보낼 이유도 없고요. 미운 사람 밉다고 이야기하고. 이쁜 것은 이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러한 권한조차 이게 박탈당했을 때, 우리는 무슨 재미로 삽니까. 우리는 무슨 재미로 살아요? 아무 사는 재미가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내가 모자라는 것을 하나님이 채우지 마소서.” 이거에요. 내가 모자라는 것을. 내가 모자라는 것을 채워버리면 졸지에 나는 나다움이 날아가버리고 나는 철저하게 누구의 종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잖아요. 그럼 내가 주인이 아니잖아요. 내가. 내가 나한테 주인이 안된다고요. 하나의 기계가 되지요. 기계가 되면 개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지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 하나가 우리를 상대로 심판하려고 주신 말씀이에요. 우리를 심판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심판하는 말씀을 가지고 적당하게 좋은 관계 유지하는 하나의 매개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거 한 번 적어볼게요. 미움을 통하여 하나님을 끌어당기고, 그 미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한다. 어떻게? 내가 나의 미움에는 나의 이유가 다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정당성을 확립하는, 확실히 확립하고자 하나님을 참관인으로 내 인생의 끝까지 가는 거예요. “평소에 내가 화를 내고 평소에 성질내더라도 우리 하나님만큼은 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화낼 만했다. 성질낼 만했다. 그러니까 나는 너에게 그렇게 우호적이다. 니 무슨 죄 있나? 내가 다 용서해줄게.” 바로 인간은 은근히 그런 하나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 성질을 성질대로 다 유지하고 있고, 죄는 죄 용서대로 받는, 이렇게 되어버리면 나는 움직이는 자고, 주님은 그냥 관찰자가 되어버리지요. 뭘 도와드리겠습니다. 까페에서 그것도 고급까페지요. 진짜 커피 한 잔에 삼만원씩 오만원씩 하는 거기는 서빙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서빙하는 사람의 자세를 한 번 카메라 있으니까 한 번 보여드릴게요. 동네 식당에서의 서빙은 이리합니다. 뭐 더 드시고 싶은 거 있습니까? 반찬 더 드릴까요? 식탁 위에 양손을 얹고. 그런데 돈 많이 내는 고급까페에서는 손 한 쪽을 등 뒤로 돌려요. 공손히 손을 돌리고 뭐를 더 드릴까요? 리필해 드릴까요? 이리 돼요. 손을 돌리는 거예요. 호텔에서는 손을 뒤로 돌린다니까요. 나는 당신 일에 함부로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돈 준 값이에요. 돈을 오만원 준 값이에요. 그게 많은 돈을 준 값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하고 하나님께 충성할 때, 그 값을 우리는 돌려받기를 원해요. 내 쪽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했으니까 “하나님! 내가 성질부리고 이렇게 하더라도..,” “그래, 뭐 성질부렸어? 그럼 성질 안 나게 내가 좀 도와줄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내 일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관여하기를 우리가 원하는 거예요.

부를 때 오라는 거예요. 부를 때. 함부로 들락날락하지 말고. 부를 때 오라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부를 때 오라는 말이지요. 들쑥 들어오지 말고. 내 인생에. 내 귀한 내 세계에 침투하지 말고.

자, 여기서 우리가 이 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질문을 하나 할게요.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심판하려 하시는가, 무엇을 심판하려 하시는가, 지금 우리가 말라기3장 끝을 보면서 굳이 하나님께서 3장 13절, 14절, 15절, 너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나님 말씀대로 나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되더라.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성경에 담아서 우리에게 제시할 때 그 무엇을 도대체 심판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느냐 말이에요. 도대체 우리한테 무슨 억하심정있어가지고. 뭐가 기분 나빠서 우리를 심판하려고 하느냐 말이죠.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모자라냐, 무엇이 빠져있느냐 하면, 붉은 것으로 써야 돼요. 이게 너무 충격적이라서. 우리에게 심판이 모자라는 거예요. 심판의 심판이 충분치 않아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준 심판이 있잖아요. 저주 있지요.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받은 저주 심판이 아직 우리한테는 충분치 않아요. 우리는 뺀질이 같아. 우리는 살 궁리만 하고 있고. 내빼기만 바빠요. 전기차가 좋다고 해서 샀는데 전기차가 갑자기 급발진해서 본의 아니게 가로수를 들이박아가지고 차가 박살났다. 그러면 전기차 운전자가 “오, 신이시여.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데 이렇게 돈 날리고 급발진해가지고 사고 나게 합니까?”

거기에 대한 준비된 답변은 뭡니까? 이거에요. “니가 급발진해서 사고나서 니도 죽을 뻔 했어? 그것으로서 나의 심판이 충분히 담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그 죄. 심판이 무서워서. 그래 죄 지으면 안돼. 주여, 죄 지은 게 있거든 용서해 달라. 할 때, 그 죄. 그 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얄팍한 죄라는 것은 뭐냐, 우리는 죄를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나의 실수로 이해해요. 나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 실수해서 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실수했다는 거예요.

자, 주님이 아까 심판하는 그 심판의 목표와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방어하면서 주님 앞에 다가서면서 우리는 무슨 소리합니까. 주여, 죄인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바꾸면, “저, 실수 많지요? 그치요.” 실수가 많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말하는 실수란, ‘타인의 환상을 내가 이용하는 것.’ 그저 이용한 거예요.

자, 강의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미움이 있어요. 그리고 그 미움이 지워지는 것을 원치 않아요. 성질 날 때 성질 부리고 싶어요. 그런 만만한 사람이 내 주위에 있으면 좋겠어요. 이것도 저것도 없으면 강아지라도 키워가지고 발로 차고 싶어요. 하여튼간에 내 속에서 미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내 미움에 의해서 화풀이가 충분하게 되는 그런 대상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심판하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성질나는 내 성질을 풀 수 있는 내 심판의 대상이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 있기를 우리가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뭐라고 욕해도 괜찮고 내가 누구라도 패도 괜찮고, 뭐라도 돈이라도 뺏어도 아무소리 안하는 그러한 등신같은 인간들이 내 곁에 있어가지고 내 성질 다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옛날 우리나라에 옛날 농사짓는 시대 때에 손이 많잖아요. 그러면 여자가 시집간다는 것은 농사집에 시집가는 거예요. 그 농사꾼은 여자가 온다는 것은 바로 농사꾼 하나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그 농사꾼의 두목이 누구냐, 시어머니죠. 시어머니가 농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 며느리를 구박하고 타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힘을 합해야 밥 풀칠할 수 있잖아요. 농사라는 기술을 빨리 습득해가지고 이제 시어머니는 나이 많아서 생산량이 적고, 젊은 며느리가 와야 내가 했던 일을 떠맡길 수가 있어요. 밥 먹여주는 게 공짜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며느리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아들을 낳아가지고 제사지내고 대를 이어야 될 그 책임도 짊어지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젊은 사람들은 이걸 모르지요. 젊은 사람 입장에서는 시어머니 시키는 대로 해야 내가 사랑 받는다는 그런 생각이지만, 시어머니한테는 이미 자기 세계가 구축되어있어요. 농사 지어야 된다는 자기 세계. 자기 세계에 새로운 며느리가 얼마나 쓸모짝이 있는가만 계산하는 거예요. 얼마나 쓸모짝이 있는가. 군기 잡아야 되지요. 군기 잡아야 돼요. 혹독하게 잡아야 돼요. 마치 자기의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훈련시켰듯이. 이왕 어려운 거 계속 할 수밖에 없어요.

양육과 훈육과 교육이라는 것은 인간이 터잡고 있는 기반.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에요. 터(기반)을 확고히 하는 거예요. 기반이 뭐냐 하면 가족이에요. 국가입니다. 그리고 사회에요. 심지어 교회까지. 인간은 뿌리를 박아야 살 수 있어요. 뿌리를 박아야. 붕뜨는 것은 인간에게는. 아까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일자리에 나가야 되지요. 그 기반. 내가 살 수 있는 가족, 나. 그리고 국가. 이 모든 곳에 철근을 넣어야 돼요. 철근이 없으면 안돼요. 뿌리 깊게 철근을 넣어야 돼요. 이것에 대해서는 양보없습니다. 봐주는 거 없어요. 그럼 이걸 뿌리 박으면서 타인들에게 뭐한다? 지시와 명령을 하지요. 지시와 명령을 할 때 곱게 하겠습니까? 미운 마음으로 하겠습니까? 어떤 마음이에요? 미움이지요. 왜냐하면 본인이 그 선배한테 당한 게 있기 때문에.

사람은 공짜 없습니다. 당하면 그 당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해야 약간 속이 풀려요. 내가 시어머니한테 당했으면 나중에 내 아들 장가갈 때 보자. 이게 응어리 뭉쳐있어요. 인간의 내부에. 인간의 기억속에. 미움이 대물림한다니까요. 미움이. 그래서 행동을 말을 좋게하든, 웃으면서 미소를 띠어도, 그 미소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상처가 들어있고, 상처는 미움에 담겨서 나오게 되어있어요. 곱게 이야기하고, 어설프도 또 곱게. 한 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 참고, 네 번째 확 폭팔하고. 내가 니한테 준 거 다 내놔라. 잊어버리지 않았던 거예요.

내 미움의 화풀이에 상대가 그걸 차단하게 되면, 한 번 참고, 두 번 참지만, 내 미움은 제거될 수 없고 상대는 막혀있으니까 나중에 그 네 배의 에너지를 가지고 폭발해버립니다. 네 배의 에너지. 전에 했잖아요. 직업이 교사인 사람. 하루 일과에서 학생 만날 때. 그 전날에 부부싸움 했는지 안했는지 차이가 나요. 만약에 부부싸움하고 그 다음날 학교에서 교사일을 한다. 그 반애들 다 죽었어. 다 죽었어.

그러니까 인간 대 인간도 화풀이가 되는데 인간이 거기다가 하나님 앞에 나섰다. 하나님도 뭐의 대상입니까? 화풀이 대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유도했지요. 여기 말라기3장 13절, 14절, 15절, 요거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늘날 우리 이야기입니다. 딱 걸렸어! 너희들! 딱 걸렸어.

우리는 13, 14, 15절 이 말씀, 이 말씀을 안들키기 위해서 꼬깃 꼬깃 안들키기 위해서 얼마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에 위장과 모든 변신과 변신을 다 동원해가지고 안들키려고 애를 쓰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다 들추어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을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심판합니까? 우리의 삶의 터전을 공격합니다. 이 말은 우리보고 제발 꺼져줄래. 좀 없어줄래. 그 없어진다는 말이 어디 있느냐 하면, 16절 나옵니다. 16절 이야기하기 위해서 13, 14, 15를 필히 알아야 돼요. 하고 16절,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여호와 앞에 무슨 책을 기념한다? 기념책에 기록했지요.

17절은 조금 있다가 하고, 18절 봅시다. 18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자, 분별하는 이 소관 누구한테 달렸습니까? 우리가 여기에 끼어들 수 있습니까? 이 분류작업에 우리가 끼어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왜? 우리는 죽어마땅하기 때문에.

여호와 이름을 기념하는 기념책에 우리가 관여 못합니다. 욕심내면 안돼요. 우리는 어디까지냐 하면, 13, 14, 15절까지가 우리에요. 우리는 우리의 미움을 내 손으로 내 미움을 낙지 끄집어내듯이 손가락 넣어서 못 끄냅니다. 멍게 끄내듯이 못 끄냅니다. 끄낼 수가 없어요. 우리는 상실한 존재구요. 상실에 합당한 결과는 뭐냐, 타인에 대한 미움이에요. 그 미움이 없으면 나가 없는 거예요.

진짜 나다운 것은 누구 걸리기만 해봐라. 이것만큼 나다운 모습이 없어요. 이게 최고입니다. 이게. 최고에요!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전부 다 내 미움이 원천이 되어서 거기다가 하나님, 예수님까지 끌어당기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잠깐 하나님 뵙고, 돌아서서 사람하고 상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제가 성질나는 것은 나쁘다는 것은 너무 잘 압니다. 하지만 성질 나는 걸 어떻겠습니까. 미안합니다. 다시 내가 세상과 상대해야 됩니다.” 그리고 방향을 돌리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면상이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여기까지 찾아와요. “뭐 우쨌다고? 뭐 어떻게 했다고? 어이! 니 나만 상대해. 사람상대하지 말고 나만 상대해.” 니가 자꾸 사람상대하니까 저 사람이 나한테 힘들게 하고, 저 사람이 나한테 똥묻은 기저귀로 쳤고, 저 사람이 연필 어떻고 저떻고. 나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고. 자꾸 세상 전체에 대해서 미움을 핑계거리를 찾으면서 평생 살아가거든요. 인간은.

다 남은 잘못됐고, 지는 조금 잘못되었고.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성질내도 할 말있고, 니는 나한테 성질 내면 안되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그거. 그 만만한 게 세상이고 인간이거든요. 타인이 좀 쉽게 나오면 이용하려고 달려들고.

2층에서 무심코 샤워하면 아래층에 노후된 빌라입니다. 뭐 우리집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위층에서 샤워를 하게 되면 아래층에 물새요. 그런데 샤워하는 사람이 그걸 알까요? 모를까요? 전혀 모릅니다. 내가 우리 집에서 샤워하는데 니가 왜?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남들을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니고 안할려고 해요. 왜냐하면 나 신경쓰기도 바쁜데 남까지 이해못합니다. 그러니까 남까지 이해하면 숨막혀서 못 살아요. 정신병 걸려요. 문제 있으면 물어줄게요.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아래층에 있는 사람이 공사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어요. 요청하니까 공사하는 사람이 와가지고 뭘 뜯어내느냐 하면 자기의 시선의 그 한계, 자기 샤워실 바닥까지만 보던 걸 바닥을 오함마로 긁어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보이겠습니까. 아래층이 보이겠지요. 주님의 심판은 바로 그렇게 진행되는 거예요. 그게 주의 일이에요. 우리는 나는 요것밖에 모르고 싶어요. 라는 그걸 바닥을 털어내게 되면 아래쪽의 우리의 모든 분노와 우리의 미움을 다 받아낸 십자가가 보이는 그 바닥이 보인다면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던 그게 진짜 어쩔 수 없어요. 우리는. 내가 누구를 하나님 밉고 사람 미운 걸 바꿀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데.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게 진리가 아니거든요. 어쩔 수 없는 그 피해 당사자가 정작 그 피해 당사자를 온몸으로 받아내신 분이 있다는 것과 만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내가 상상한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환상 중에 만난 하나님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과 더불어 있는 하나님이 그게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뭐 다 아시는 이야기지요. 그 정도는 다 아시는 이야기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 하나님의 이름이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상처지요. 상처.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사람은 왜 남을 미워하지요? 뭐가 있기 때문에? 상처 또는 결함, 상실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상처가 있다면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성질내겠지요. 그 성질 대상이 누구라고요? 바로 그 성질 대상이 우리 자신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발견한 사람이 착하다는 말이 아니고, 그 발견하는 사람 속에 말라기가 도착된 사람이에요. 말라기로 하나님과 말라기로 말씀을 매개로 해서 나와 말라기가 서로 연결이 성사된 사람이에요. 말씀의 사람. 그게 바로 성도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성 좋아진 사람이 성도가 아니에요. 이 말씀이 바로 나와 주님을 엮이게 만드는 그 말씀인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첫째시간 끝나기 전에 5분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숙제를 줄려고 가져왔어요. 그 하나님의 상처. 십자가 상처를 통해서 볼 때에 우리는 뭐였느냐 하면 그동안 마귀와 더불어서 야밤도주를 했다고 보시면 돼요. 혼자 도주한 게 아니라 악마의 성질, 악마와 더불어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 도망치면서 좀 미워하면 어떤데? 살다 보면 미워할 수도 있지. 라고 말을 뒤에서 막 내뱉으면서 혼자 도주하는 게 아니라, 마귀와 함께 하나님 계신 곳과 멀어졌다고 보시면 돼요. 우리가 지금 그런 형편이에요.

멀어졌는데 그걸 누가 따라갑니까? 말라기3장이 계 섰거라! 따라가가지고 테이져건으로 쏴버리는 거예요. 경찰이 범인을. 테이져건은 연결되어있어요. 총알이 아니고 꽂히게 되어있다고요. 말라기3장이 테이져건으로 꽂혀 버리면 우리는 주님 앞에 완전히 생포된 거죠.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아시겠지요.

그럼 이제 숙제 나갑니다. 강남강의 때 재미를 봤더니만 또. 강남강의는 제가 그냥 음악을 틀었지만, 여러분한테는 숙제로 프린트를 드리겠습니다. 숙제가 아니고 질문을 한 번 던져보겠습니다. 다 보셨지요. 보셨으면 가사를 생각해놓고 음악을 틀을 테니까 답변을 해보세요.

첫 번째 김종환 작사입니다. 리아킴 노래.
1절, 좋은 집에서 말다툼보다
작은 집에 행복 느끼며
좋은 옷 입고 불편한 것보다
소박함에 살고 싶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때론 그대가 아플때도
약속한데로 그대곁에 남아서
끝까지 같이 살고 싶습니다

위급한 순간에 내편이 있다는 건
내겐 마음의 위안이고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벼랑끝에서 보면 알아요

하나도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하다
사랑도 믿음도 떠나가죠
세상살면서 힘이야 들겠지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자, 됐어요. 질문. 이 가사의 사상, 정신, 뭐가 문제입니까? 이게 지금 뭐가 문제입니까? 아, 복음을 그만큼 듣고 해도 막상 이런 가사 딱 들어보면 눈물이 팍 쏟아지면서 아, 그래 이렇게 살아야 돼! 라고 한다면 도대체 그 사람은 그동안 도대체 그 사람 속에 복음이 있는지, 말씀이 있는지, 의심될 수밖에 없어요. 의심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답변하는 거 10분 쉴 동안에 숙제로 하겠습니다.

그 다음 노래. 하나 더. 여러분 쉬는 시간에 보면서. 뭐가 문제입니까? 그거 했지요. 가사를 생각하세요. 전주 말고.

두 번째, 서영은 노래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더는 슬퍼하지 않아
다신 외로움에 슬픔에 난 흔들리지 않겠어
더는 약해지지 않을게 많이 아파도 웃을거야
그런 내가 더 슬퍼보여도 날 위로하지마
가끔 나 욕심이 많아서 울어야 했는지 몰라
행복은 늘 멀리 있을 때 커 보이는 걸
힘이 들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와도 모진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나게 아픈날엔 크게 한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어떻습니까? 이 사상의 문제점은? 이게 여러분들이 지금 제가 압축해서 이렇게 했지만, 매 일상속에서 매 마주치는 것이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 김종환의 사상과 그리고 서영은의 , 이 사상을 끌어당기지 않았는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괴롭고, 아프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바로 이런 가사에 나오는 이런 생각으로 땜질하지는 않았는지 한 번 돌아보세요. 뭐가 문제인지 하는 것은 10분 쉬는 동안에 다음에 두 번째 할 때에 제가 나름대로의 생각한 그 해답을 제시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여러분들이 이런 노래를 듣고 이런 가사를 봤을 때, ‘뭐 이게 문제 있어?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과 더불어서, 그게 아니라면 그럼 여러분의 대안은 뭐냐 이 말이지요.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식으로는 안 살았다. 그럼 어떤 식으로 살았는데요? 그럼 이 사상, 이 생각이 세상적인 생각이 뭐가 문제인지를 파악하지 않고서 나, 복음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다 그거 헛소리 아니냐 이 말이지요.

실제 일상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너무 주께서 십자가 중심으로 만든 세상을 우리가 너무 우리가 편하게, 안일하게, 대충, 그냥 건성으로 넘기지 맙시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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