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0922a 다니엘4장 23절(시간 수축)-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30922a 다니엘4장 23절(시간 수축)-이 근호 목사
p.251 밑에서 6번째 줄에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온 대목이 있습니다.【‘역사적 몸인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 안에서 묵시적 사건의 의미를 품은 몸이다’는 해석에 날마다 내어주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이 글 내용들이 어려운 이유가 있어요. 용어 자체를 보면 ‘몸’이라는 용어를 나타내고 있고 그다음 ‘시간’을 둘로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역사와 묵시로 나누어서 시간을 표현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건’입니다. 이 세 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몸과 시간과 사건.
몸과 시간과 사건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사건이 인간 몸에게 오고 몸이 시간을 나타내게 되면 몸은 두 종류가 돼요. 하나는 ‘역사적 몸’이 되고 또 하나는 ‘묵시적 몸’, 이렇게 몸, 시간, 사건 이 세 가지를 합쳐서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묵시적 몸은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역사적 몸은 예수님 몸 빼고 모든 인간의 몸이 역사적 몸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나누었다는 말은 이것이 합체되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p.265 한번 봅시다. 후주(後週,endnote) 30번이요.【30) 관절은 ‘단절’과 ‘절단(=분절)’의 의미를 지닌다. ‘절단’은 역사의식을 쪼개어서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처럼 도저히 예상 못할 돌발적인 사건이 그 쪼개진 틈을 통해 역사 지평 위로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분절’이란 그 방출된 계시가 역사적 의미들을 벼랑까지 밀어붙임으로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황들을 확대시켜 나가는 시도를 의미한다.】
거기에도 어려운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어요. 한번 적어보면, ‘관절’은 ‘단절’과 ‘절단(=분절)’이라고 나와 있어요. ‘절’이 1개, 2개, 3개, 4개 나와요. 끊어진다는 뜻이죠. 여기서 ‘절단’은 역사의식을 쪼개어서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처럼 도저히 예상 못할 역사 속에 나타난 돌발적인 사건을 의미하고요.
‘단절’은, 사건이 일어났다. 한 몇 초 그 순간 지나가면 없어졌다. 이렇게 되죠, 불꽃놀이처럼. 와락 뭔가 일이 벌어졌다. 어? 사건 터졌네. 돌아보니까 조용해요. 이게 단절이고요.
절단과 분절에서 ‘분절’이라는 것은 사건이 터졌는데 그 사건이 뒤에 확장되는 거예요. 확장되면서 방출된, 터져 나온 계시가 역사적 의미들을 벼랑까지 밀어붙인다. 모든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거예요. 무의미하게 만들고 소멸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거예요.
관절은 단절과 절단이라 할 때 이것을 우리 몸에다 적용시켜봅시다. 몸에 적용시키면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잖아요. 없는 데서 태어났죠.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돌잔치하고 돌반지하고 다 사건이잖아요. 사건인데 태어난 그 몸이 우리를 어디까지 밀어붙입니까? 죽으라고 밀어붙이죠. 죽음에 막 밀어붙이는 거예요.
몸이 죽는 게 아니고 태어남이 나를 죽이는 겁니다. [태어난 사건이 나를 죽인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역사라는 것은 그냥 당하기만 하는 거죠. [역사는 당하기만 한다.] 역사를 초월한 묵시가 역사를 밀어붙이면 맨날 역사는 된통 터지고 소멸되고 소실되고 날라가고 그러한 얻어터지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전체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역사를 누가 괴롭히는가?] 인간의 몸은 역사에 포함되어 있죠. 그럼 같은 말입니다.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 역사를 누가 괴롭히는가?=누가 나를 괴롭히는가.
역사의 반대말은 언약입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시원적이에요. 시원(始原)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근원적. 역사는 나타난 현상. 숨어있는 시원적인 것, 감추어진 원래적인 것이 현실을 괴롭히죠. 그러면 인간을 누가 괴롭힙니까? 인간의 근원이 인간을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근원을 어디서 찾는가? 언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언약에서.
이런 것이 성경 다니엘 4장 16절, 23절에 잘 나오는데 성경 한번 봅시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몸과 사건과 그리고 시간, 이 세 가지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보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해주시면 이해하는 데에 쉬워요. 시간 해석에 있어서 ‘첫째, 내가 시간을 이해한다 또는 해석한다. 두 번째, 주님께서 시간을 해석한다.’ 이렇게 둘로 나누시고 여기서 ‘내가 시간을 해석한다’, 내 인생이 힘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에 그래요.
시간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인생이 왜 힘든가. 목사님 사는 게 왜 힘듭니까? 모든 기억 속에 있는 시간을 내 위주로 해석해서 힘든 거예요.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닌데 억지를 부리니까 힘든 거예요. 주님을 위한 시간인데 나를 위한 시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왜냐하면 본인이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요. 태어났으니까 내 인생은 내가 생각해야 된다. 성경에서는, 아니야! 그건 시원적인 것에 있고 근원적인 것에 있어. 너는 그냥 태어났다는 결과물이고 네 몸이 태어난 게 아니고 태어남이 네 몸을 만든 거예요. 태어남이.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고생하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이걸 모른 거예요. 석가모니가 복음을 모르니까요. 복음을 알면 도 닦을 필요가 있겠어요? 생로병사 왜 이리 힘든가. 초월하자, 나 자신을. 아니, 인간은 초월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니엘 4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그다음 나온 단어가 뭐죠? “짐승의 마음”. 그러니까 시원적으로 볼 때 인간은 짐승에 해당되는 거예요. 23절을 봐도,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더라 하시오니”
현재 느부갓네살 왕은 짐승되어 있죠. 짐승, 그다음 일곱 때, 시간. 그것을 누가 하는가? 위에서 하죠. 언약. 사건 또는 언약, 언약 사건. 근원적인 언약, 결과적인 몸, 그 중간을 이어주는 것은 시간. 인간은 왜 이렇게 힘들고 사는 게 괴롭습니까? 그 몸과 언약과 연결되어 있는 시간, 이 세 가지에서 언약이 인간 몸의 상위(上位)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70이레 하고 있잖아요. 70이레는 뭐냐 하면… 70=7+62+1이 되잖아요. 이걸 이렇게 수평적으로 하지 말고, 수직적으로 7 위에 62 위에 1. 그런데 62는 (자체로) 의미 없고 1과 7은 절단되어 있고 끊어져있다는 의미로 연결되는, 1에 7이 갈 수 없다는, 1과 7을 끊어지게 만드는 그러한 기간이 62이레인 거예요. 시간이에요, 시간. 1이레 되시는 몸, 하나님의 언약의 주인공, 그 사이에 62이레가 있다는 것을 수직적으로 설명하고 묘사하는 것이 70이레 내용입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인간은 왜 사는 게 힘드냐? 모든 시간에 일어났던 사건들, 시간은 사건의 연발이고 다발이거든요, 그 사건 다발을 누가 해석하고 누가 생각하느냐? 나에게로 쏠리도록 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반칙이에요. 뭐를 놓치고 있는가? 시원적이고 근원적인, 나 이전의 것을 완전히 모르는 채 오직 있다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모든 시간을 내 위주로 해석하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을 이렇게 하겠습니다. ‘시간 수축’. 시간 수축입니다. 시간을 아주 짜부러뜨리는 거예요. 시간이 수축하는 이걸 인간들은 기억이라 하는 거예요. 시간을 수축해서 기억했다 이 말이죠. 참 인간이 얼마나 인생을 잘못되게 살아가는지…… 우리 따지고 보면 인생 참 엉터리로 살아가고 있어요.
시장에 가서 고구마를 샀다. 우리 인생 중에 이런 일 있잖아요. 그것도 그냥 고구마 아니고 밤고구마를 만 원어치 샀다. 이 사람이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시장에 가서 내가 돈 만원주고 고구마 사왔다’ 이것밖에 없죠. 이게 본인이 하는 기억이죠. 그 기억에 의해서 ‘나는 맛있게 먹었다’하면 이것도 하나의 사건이에요. 기억은 사건 다발이니까 ‘고구마 사서 쪄서 맛있게 먹었다’ 이거 있잖아요.
여기에 누가 끼어드는지는 다 제거했어요. 고구마 키우는 사람 다 제거했죠. 고구마 살 때 옆에 있는 다른 고구마 가게 다 삭제했어요. 내게 필요한 것, 사건, 내게 필요한 시간해석만 나한테 필요했던 거예요. 타인과 엮인 변수는 모조리 삭제해버리고 ‘내가 돈 주고 내가 고구마 사서 맛있게 먹었는데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고구마가 북한산이라면? 북한산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가보안법에 걸리죠. 북한여행만 갔다 와도 예능 프로에서 잘리는데. 내가 가고 싶어 갔는데 왜 예능 프로에 안 넣어주느냐.
이게 바로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에요. 인간이 전부다 자기중심이잖아요. 자기중심이면 나라 꼴이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안되죠. 내 중심의 변수를 공익이라는 이유 때문에 강제로 자제시키고 그걸 통제하는 법적체제가 국가라는 겁니다.
아파트가 있고 거기 바로 앞에 조그마한 축구장을 만들어서 밝게 조명탄 설치하고 새벽 1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조명탄 피워서 사람들한테 돈 받고 입장시켜서 사람들이 축구하고 있다. 그 축구장 주인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축구장 세우는 데에 자기 돈 투자했죠? 그럼 뽑아내야 될 거 아닙니까. 은행 융자도 받았으니까 그거 뽑아낼 때 내가 축구장 세워서 손님 받아 돈 버는데 내가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겠죠.
여기서 무슨 변수가 날라가버립니까? 불빛 공해, 그리고 축구할 때 그냥 마스크 쓰고 축구합니까? 한 골 넣어라, 넣어라! 난리도 아니에요. 새벽 1시까지 주변 사람들 잠도 못자요. 50데시벨이 넘어요. 오토바이 타고 길에서 달린다. 내 돈 주고 오토바이 사서 달리는데 뭐가 문제냐? 아파트 주민들이 잠을 못자요. 그래서 아파트 주민들의 소원이 있어요. 남북통일이 소원이 되어야 되는데 이 사람들 소원도 너무나 개인적이고 모두 자기 위주의 해석입니다. 소원이 뭐냐 하면, 장마가 길어졌으면 좋겠다. 장마가 길어지면 축구를 안 하니까.
다시 묻습니다. 인생이 왜 힘듭니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누구 중심으로 해석한다? 내 중심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뭘 빠뜨렸다? 시원적인 것, 근원적인 것. 하늘에서는 그런 나를 어떻게 보는가, 다 누락시킨 거예요. 다 빠뜨린 거예요. 몸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몸이 나니까 모든 의미가 내 몸에서 스톱이 된 거예요. 더 이상 진전이 없어요. 내 돈 주고 내가 했다, 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 모든 것이 나로 멈추고 마는 거예요.
보통 백성들은 나로 멈추고 싶어도 국가나 왕은 그걸 가만두지 않죠. “세금 내라.” “나는 내기 싫은데.” “왜 안내나?” “내가 내기 싫다는데.” “어이, 병사들 이거 잡아서 죽여버려.”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국가라는 것은 모든 것이 나한테 스톱되는 것을 국가가 용납안하잖아요.
그럼 국가에서 단 한 사람은 어떻게 돼요? 모든 하고 싶은 것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자기한테 실질적 실제적으로 모든 해석이 완료되는 지휘자, 그 한 명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왕이죠. 그 왕이 느부갓네살 왕이잖아요. 그런데 15절 보니까 왕이 뭐가 됐어요? 짐승이 됐죠. 사람 아니었습니다. 짐승이었습니다.
여기 22절에 보면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23절,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왕보다 더 높은 순찰자가 있어요. 순찰자. 초반부터 중요한 것 나옵니다. 순찰자.
순찰자의 대상은 수배자에요. 모든 인간은 지금 쫓기고 있어요. 왜 쫓기고 있느냐 하면, 내 다리 내놔라. 선악구조 다른 말로 하면 윤리 도덕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기고 있습니다. 도피중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남들 보기에 그럴싸하고 행복하다 하고 있지만 그러나 양심상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결국 심판받게 되는 심판의 대상으로 수배 중에 있어요. 수배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가다가 사진 찍는 것 같으면 고개 막 숙이죠. 모자 푹 덮어쓰고. 쫓기고 있는 인생, 그게 인생입니다. 순찰자가 있기 때문에. 그 순찰자가 우월절에 어떻게 했습니까? 맏이를 다 죽였죠. 하나님께서는 “너 걸리기만 해봐라.” 지금 벼르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완벽에 이르지 못합니다. 완벽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선악적으로 완전하지를 못한 거예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본인도 모르게 자기의 시원자, 자기가 미처 모르는 근원자로부터 계속해서 쫓기고 후달리면서 인생을 사니까 인간들은 거기서 오는 공포심, 두려움을 메꾸기 위해서 계속해서 다른 즐거운 요소를 찾고, 이런 쫓기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른 대책을 계속 강구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정신병 환자입니다.
그러면 인간세계에서 너도 나도 다 알면서도 쉬쉬하면서 입 다물고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네가 완전하지 않으면 네게 어떤 낭패가 있더라도 넌 할 말 없어.’라는 알 수 없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인간세계에서 해소하려는 그 해소 방법이 뭐냐? 그것은 자기 몸이 있으면 거기다 아우라, 신화적 아우라를 형성하는 겁니다.
이걸 바로 어릴 때 부모가 해줘야 돼요. 부모가 해줘야 돼요. 너는 훌륭해. 너는 잘 될 거야. 너는 착한 아이야. 너는 좋은 집안에 사는 거야. 네가 힘들어? 내가 끝까지 너를 지켜줄게. 이러한 신화에요. 신화를 노골적으로 말하면 허풍, 허세입니다. 허풍, 허세.
허풍, 허세가 아주 남발하는 예능프로가 있어요. ‘강철부대’. 군에 제대한 근육질 인간들 나와서 자기가 잘났대. 지기 싫어. 운동깨나 한다는 인간들 다 나와서. 허풍과 허세가 없으면 사람은 못 견뎌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세상의 냉혹함과 날것이 직접 만나버리면 이 사람은 여기서 몸둘 바를 모르고 좌절해서 자살로 이어집니다. 예민함이죠.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의 자기 보호막, 방어막이 있어야 돼요. 방어막은 누가 봐도 이건 거짓된 거예요. 거짓된 것으로 이렇게 포장을 해줘야 겨우겨우 숨을 쉴 수 있어요. 쫓기고 있으면서. 진실에 쫓기고 진리에 쫓기면서도 그래도 숨 쉬는 이유는 이 허풍과 허상적인 신화적 존재에요. ‘부모가 말했어. 너 나중에 잘 될 거라고.’ ‘또 사업 망했어.’ ‘걱정하지 마. 돌아가신 부모님께서는 언젠가 넌 성공할 애라고 했어. 태몽에서 그랬대.’ 이런 거짓말이죠. 거짓말, 환상이라니까요. 그 환상이라도 있어줘야 돼요.
그러면 세상에서 말한 정상적은 뭐냐? 이 허풍과 허상을 잘 둘러치는 사람이에요. 둘러치려면 냉혹한 이 세상에 대해서 그때그때마다 번역에 능해야 됩니다. 자기하고 아무 상관도 없지만 ‘다 나 좋으라고 있는 거야.’ 이런 거요. 국무총리 회의, 이거 다 나 좋으라고 있는 거야. 어떤 일이라도 괜찮아요. 번역을 그때그때, 계속해서 구라를 떨든지, 말도 안 되고 논리도 안 맞는 일이지만 ‘이 모든 것은 다 나 잘되라고 내가 희망에 점점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라고 신화적 존재로 계속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그걸 어디서 많이 하는가? 교회에서 많이 하죠. 교회에서 바로 예수님, 하나님, 삼위일체 다 동원해서 자기를 둘둘 감는 겁니다. 이 모임도 예외 없이 노래하나 들으셔야 되는데… 할 수 없어요. 도대체 노래를 어떻게 틀었는지 여러분 눈으로 보셨겠지만. 번역을 어떻게 하는가? 번역의 예를 한번 볼게요.
사랑 많으심 (깊은 사랑, 깊은 긍휼)
いつくしみふかき ともなるイエスは(이츠쿠시 미후카키 도모나루 예수와)
사랑 많으신 친구인 예수님은
つみとがうれいを とりさりたもう(츠미토카 우레이오 토리사리타모우)
죄, 허물, 근심을 이미 없애주시네
こころのなげきを つつまずのべて(코코로노 나게키오 츠츠마즈노베떼)
마음의 한탄을 쌓아놓지 말고 부르짖으면
などかはおろさぬ おえるおもにを(나토카와 오로사누 오에루오모니오)
짊어진 짐을 내리어 가볍게 하시네
됐습니다. 이 가사가 무슨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일본 찬송가에요. 예수라는 게 언뜻 들리죠. 그런데 딱 들어보면 그 노래죠. 분명히 가사는 일본어인데……. 일본말 못해요. 노래제목도 모르겠어요, 일본말로 되어 있어서. 혹시 일본말…? 아, 미안합니다. 전문가를 놔두고. 녹취를 위해서 한번 오셔서 보셔야 돼요. 이걸 일본어로 읽으시고 해석 한번 해보세요. 잘됐네. 이 때를 위함이라. 제목 이츠쿠시 미후카키. 번역하면 뭡니까? ‘죄짐 맡은’ 그런 뜻이에요? ‘사랑하는 마음이 깊다’. 아! 아리가또. 감사합니다.
이 내용은 모르는데 딱 들으면 무엇이 회상되죠? 죄짐 맡은 우리 구주~ 회상되죠. 자기 위주로 옛날 들었던 기억 속에,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노래를 들으면 분명히 가사 내용은 전혀 모르는데 들어보면 은혜가 되잖아요. 은혜가 되죠? 이게 뭐냐 하면 번역이에요. 자기가 자기의 신화를 만드는 거예요. 해석을 해서. 일방적 해석이에요. 이걸 안하면 정신병자 돼요, 이 현대사회에서.
거짓이라도, 하늘이 주는 그 냉혹한 수배자 신세에서 잠시 한숨 돌릴 수 있는 삶을 구현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종교죠. 그게 종교고 그게 국가고 우리 이 삶이에요. 몸과 사건과 시간. 또는 사건 자리에 언약을 집어넣으면 몸과 언약과 시간. 이렇게 역사는 언약한테 휘둘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이 아니고서는 숨도 못 쉬는 세계. 그런데 이 신화적 내용은 뭐로 채우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으로 채우면서 그들은 이것을 진리라 얘기하고 진실이라고 사람들은 우기고 있는 겁니다. 실은 그 안에 자기 자신을 자기가 지키기 위한 신화적 조치를 하면서 그때그때 자기 정신을 건강하게 그냥 버텨나가는 방법이에요. 말씀보고 기도하고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고 하면서 그냥 버티기에 나서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용 있습니까, 없습니까? 소용없죠.
자, 그렇다면 그다음 봅시다. 성경의 언약에서 유대인들이 왜 실패했는지 한번 보세요. 성경은 시원적이니까 이것은 아까 언약이라 했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언약이 역사를 구박합니다. 역사를 위에서 짓눌러버리죠. 거기에 대응해서 역사 속에 있는 나는 허풍으로 소위 유대교로 또는 말씀으로 자기를 칭칭 감으면서 이 수배자 신세에서 약간은 자기를 지켜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럼 성경의 시원적 언약에서 이스라엘 역사 망하고 난 뒤에 마구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개념들이 있어요. 그것이 성전, 예루살렘, 그리고 애굽, 약속의 땅, 이런 개념들이에요. 이런 개념들이 언약에서 쏟아집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이런 개념들을 허겁지겁 주워 담아요.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개념들을 사용해왔던 겁니다.
그런데 선지서에 보면 이런 개념들은, 하늘의 UFO죠, 비행접시 외계인이 왔을 때 인간들을 저주하고 심판하기 위한 심판용이에요. 그들은 이런 말씀들, 율법으로 무장을 했는데 무장한 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오히려 이렇게 공격할 때 유대인들이 행한 이 모든 것들이 ‘교만’이라고 규정해버립니다.
교만이라 하는 것은 까분다, 이런 뜻이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차용하고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는 것을 가지고 교만이라 해요. 교만. 왜 교만이냐 하면 이 성전, 예루살렘, 애굽, 약속의 땅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긍휼이 포함되어 있어요, 긍휼. 그런데 긍휼에 대해서 그들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지키겠다, 내가 나를 지키겠다는 교만이 이 긍휼을 차단시켜버린 거예요.
강남강의에서 소경이 고래고래 고함지르죠. 말려도 고함지르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하죠. (눅 18:38) 여기서 메시아도 등장해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어요. 그러면 옆에 다른 사람이 “아이고, 당신도 우리와 같은 성도이군요.”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조용히 안 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긍휼을 찾는 사람을 통해 기성 종교인들이나 기성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에게서 본의 아니게 교만이 터져 나와 버렸어요. 긍휼만 찾는 사람에게 (기성 종교인들의) 교만이 나와 버렸어요.
그 교만은 어디서 나오는가? 진리라 하는데 진리가 아니고 지식이었습니다. 지식은 선악과를 아는 그게 지식이에요. 선악과를 아는 지식으로 신화적 아우라로 자기를 단단히 무장했기 때문에 성전, 예루살렘, 애굽 어떤 걸 이야기해도 그들은 교만이라는 결과물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 교만한 자에 대해서 다니엘 4장에서 아까 여러분들 봤죠.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은 뭐냐? 이 짐승아. 짐승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야기해보니 별 어렵지는 않죠? 먼저 인간세계로 나누겠습니다. 인간세계에서의 현재 상실은 유년기 시대에요. 유년기 시대에 부모로부터 따뜻한 보호를 받지 못해서 인간은 뭔가 정신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따뜻한 보호를 받지 못해서. 부모가 바쁘다보니 이렇게 하잖아요. 이것은 인간세계에서 이런 이야기해요. 상실해서 그 상실을 매우기 위해서 인간은 결국 환상으로 자기 무장에 나서죠.
그런데 자기를 무장하는 게 왜 문제라 했습니까? 이것은 모든 언약적 사건이나 일어난 일을 누구 중심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나 지킬 요량으로 모든 걸 끌어당겼던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간증집회 같은 게 전부다 이런 거잖아요.
성경에서의 상실은, 인간의 상실은 유년기에서가 아니고 대자연 안에 있음이 이게 상실이라는 거예요. 이 위가 하늘나라, 낙원이라 하면 인간은 어디로 쫓겨났습니까? 토지, 이 땅으로 쫓겨났죠. 인간이 바라보는 데는, 하늘나라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인간이 보는 그 시선은 대자연이 한계에요. 그 바깥으로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대자연 안에서 막 이용하고 연구하고 탐구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이 모든 것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이 자체가 상실이에요. 상실입니다. 결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다니엘 4장에 보면 이 세상에는 누구와 함께 사는가? 짐승들이 살고 있고 여기 식물, 동물 같이 있죠. 그러니까 이 상실된 세계에서 너는 왕이라 우기지만 왕이나 인간이나 짐승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전부다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겁니다. 이게 근원적이에요. 이게 시원적인 언약의 모습이에요, 이게.
결국 [대자연 이것은 집단적 재난]입니다. 태어나기를 벌써 버림받은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인간은 교만에서 자기가 탈피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는 데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누가 보여주는가? 느부갓네살이 왕으로서 대표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 기간이 있죠. 시간이 23절에 보면 몇 때입니까? 일곱 때.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7이라는 것은 막혀있는 거예요. 창조 때 7일 만에 창조했잖아요. 피조세계의 한계가 숫자 7로 표현된 거예요. 7이라는 것은 1로 소통이 되어야 될 텐데 이미 범죄함으로써 7이 7로써 막혀버린 거예요. 막혀있다는 말로 ‘너는 7에 예속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1로 나가는 것, 아까 7이레 위에는 1이레. 중간에 가로막고 있는 것은 62이레. 62이레는 파괴되는 기간이에요. 7이레에 만들었던, 인간이 대자연 속에서 만들었던 그 현상이 62이레를 통해서 이게 부서지고 파괴되는 거예요. 성전이 파괴되는 기간이 62이레에요. 깨어지는 거예요.
실컷 만들었는데 실컷 인생 살았는데 깨어지는 거예요. 깨어지는 이유도 몰라요. 그동안 내가 나를 보호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 이게 어떤 한도에 막혀서 깨져버린 겁니다. 누가 그렇게 했는지 모르죠. 열심히 살았는데. 1이레는 이런 인간을 심판하고 저주하죠. 수배자이기 때문에. 너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벌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럼 성도라는 자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다 망하는 인간만 있는가, 성도도 있지 않겠는가?’ 하죠. 성도는 어떻게 있는가 하면 이렇게 있어요. [유괴당한 존재]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성도는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모든 해석은 이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파헤쳐졌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세계가 재난이잖아요. 재난세계에 살면서 어떻게든 간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 거짓을 하든지, 물론 거짓밖에 나올 게 없지만, 허세와 허풍을 떠는데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영이거든요. 예수님의 죽으심의 사건을 가지고 우리를 다 파헤쳐버렸다는 거예요.
파헤쳐버리니까 날것 그대로 노출되죠. 날것이 그대로 노출되면서 파헤친 그 관계가 긍휼로서 파헤친 거예요. 교만할 건덕지가 없어요. 왜? 소경이니까. 귀머거리니까. 절뚝발이니까. 내가 나 위해서 산다는 이것이 모조리 다 거짓된 것이고.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걸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게, 완전히 이건 먼저 걸려들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강남 강의할 때 백설 공주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마다 자기 이미지를 머리에 다 관처럼 이고 간다 했죠.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 임하실 때 불꽃이 어떻게 오죠? 자기 머리위에 뭐로 옵니까? 심판의 불로 오죠. 심판의 불로.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나 너 안다는 거예요. 너는 너를 모르지만, 너는 아무리 애써도 너를 모르지만 나는 너 알고 왔다는 겁니다. 너를 알고 왔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키는 식으로 세상을 해석할 필요 없이 언약이 언약대로 해석을 제공하죠.
이 세상은 1이레, 주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의 새로운 해석이 주어지는 그러한 즐거운 일이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굳이 거짓되게 환상을 내가 뒤집어쓸 이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예요. 들통 났는데 뭐. 뻔하게 다 알잖아요.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긍휼로 찾아왔기 때문에 불쌍히 여김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찾아왔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나를 ‘나 이런 인간인데’라고 말할 필요조차도 없는 거예요.
강남 강의에서 예정론을 제가 언급했는데 다시 한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정론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는가? 주께서 찾아온다.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그럼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가? 다리 꼬고 앉아서 ‘주여 언제 오실 겁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보통 예정론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리비아 홍수 이야기를 했죠. 다리 꼬고 앉아있을 여유가 없어요. 다 재난 받아서 지금 지중해 홍수에 저주에 지금 휩쓸리고 있어요. 휩쓸리고 있는 것을 뒤에서 낚아채서 데려가는 식이지, ‘가만있는데 기다립니다.’ 이런 건 없어요. 우리는 안 기다리죠.
그러면 휩쓸리면서 뒤돌아보면 되지 않느냐? 휩쓸리면서 뒤돌아볼 수가 없어요. 왜? 교만해서! 줘도 안 받았어요. 지금도 십자가 피 이야기해도 안 듣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아까 언약에서 나온 개념들, 율법 또는 성전, 예루살렘 등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이 세상의 축소판]이에요. 오늘 강의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시간의 수축’이라 했죠. 압력을 받아 쫙 짜부라드는 거예요. 시간이 수축되면 이것은 사건이 되죠. 그런데 이 시간해석은 시간의 주인공으로 해석된 거예요. 시간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1이레에요. 1에서 아래쪽이 7이레. 이 세상의 역사를 보고 해석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시간을 수축해서 사건-그 사건은 십자가 사건-이 된다면, 아까에 의하면 이게 분절되면, 분절되었다는 말은 수축된 것을 그냥 아코디언처럼 펼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으로 봐서는 한 사건이지만 언약의 입장에서는 모든 역사를 끝까지 밀어 붙이는 거예요.
망해라 이 역사야, 하면서 분출된 마그마가 화산 근처의 모든 마을을 휩쓸고 내려가듯이 이미 십자가로서 분출된 유일한 시간 해석자가 모든 자기 위주의 시간 해석자들을 범죄자로 취급해서… 범죄자 맞거든요. 죄 지었잖아요. 지식 있다고 지식으로 자기를 지키겠다는 그 지식이 문제거든요, 선악을 아는 지식. 그걸 수배때려서 전부 다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갇혀있는 꼴이죠. 사방을 둘러봐도 거짓으로 환상을 조작해서 자기 인생 이야기하는 걸로 쫙 있으니까 이 안에 완전히 유괴된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누굴 구원합니까? 유괴된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가는 거예요. 이 세상에 갇혀있는 자기 사람을 오셔서 구출할 때 이게 구원이잖아요.
그런데 처음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 나라가 들어갔죠. 이스라엘 나라가 들어갔을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너희 민족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이 세상에 어떤 나라가 있더라도 너희들은 내가 보호해줄게. 지켜줄게.’ 했잖아요. 그런데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는데요? 추방했다고요. 그건 약속의 땅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자비로움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위주로 해석한 거예요. 자기 행복위주로 해석해버린 거예요.
그것은 바로 애굽이라는 개념을 몰랐기 때문이에요. 애굽 개념과 약속의 땅 개념이 이 안에서 단절되어있다는 걸 모르고 애굽에서 나온 우리가 그대로 약속의 땅을 차지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땅이 단절되었으면 나에 대한 해석도 단절되어야 되겠죠.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