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8장 17절 (어른의 시간) 230905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8장 17절 (어른의 시간) 230905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8장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늘나라를 어린 아이로 커버해버리죠. 막아버리죠. 장벽. 어린 아이가 늘 어린 아이 되는 거 아니지요. 늘 어린 아이 되는 게 아니고 어린 아이도 언젠가 어른이 되잖아요. 그러면 어린 아이가 계속 어른 되고 있는데 어른 되고 있는 어린 아이는 천국에 들어가느냐 그런 문제. 못 들어가지요. 언제까지 어린 아이인데? 그런 건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것부터 생각하면 쉬워요. 하나님은 가차 없이 다 죽인다. 이것을 자꾸 놓쳐버리면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이 하는 말을 납득하기 곤란해요. 하나님은 다 죽이는 거에요. 다 죽이는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어린 아이 내세워서 다 죽여요. 누구든지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어린 아이같이 살아라 이게 아니고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오느냐 하면은 어디에 못 간다?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 들어갈 수가 없는 거에요.
이 점은 우리가 어린 아이같이 되면 내가 인격 성장에 도움 된다든지 어린 아이같이 되게 되면 나는 훌륭한 사람 된다든지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나 사적으로 얼마나 더 훌륭하게 될까? 아! 어린 아이같이 되면 그 정도로 훌륭하게 되겠구나 지금 그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의도를 갖고 있는데 가차 없이 다 죽이고 다 망하게 하신다. 어린 아이를 앞장세워서 어른의 질서를 정지시킨다. 정지시킨다. 천국에 까지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stop시킨다. 동결시켜버리는 거에요. 너는 거기까지가 너의 한계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너희들 천국 못 간다고 하면 되는데 마치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왜 이야기했느냐? 못 가는데 가차 없이 다 죽이는데. 세상에 어린 아이로 멈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어른 되잖아요. 다 죽이는데 왜 다 죽인다 하면 될 텐데. 그냥 너희 다 죽어 천국 못가 하면 될 텐데 마치 어린 아이를 내세워서 안 되는데 어린 아이는 들어갈 수 있다고 그렇게 넌지시 제시함으로서 뭐를 강조하느냐 하면은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세계를 왜 다 천국에 못 가게 하느냐? 그 정당성, 하나님 쪽의 정당성 너희들을 못 가게 막는 정당성을 어린 아이로 내세운 거에요.
그리고 어린 아이를 이렇게 내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 앞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만져주시기를 원하고 이렇게 오니까 그걸 보고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애들은 가라 이렇게 했지요. 애들이 노는데 아니야 가라 했지요. 그러니까 그 말을 왜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축복을 받고 직접 안수를 받고 직접 사랑받는 것에 대해서 어른들이 약간 시기가 난 겁니다. 이거는 어른들처럼 성숙해야 주님께 안수받을까 말까 사랑받을까 말까 하는데 이 철딱서니 없는 저 어린 아이한테 사랑을 주니 이게 혹시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이 받는 내가 받는 축복을 가로채지 않을까. 물론 주님의 축복에 한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른이 된 보람이 없잖아요. 열심히 한 보람이 없으니까. 애들 빼냄으로서 애들아 이 어른처럼 되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복 받을 수 있는 거야. 가서 엄마한테 더 배우고 와 뭐 이러한 자신의 평소의 생각을 밀어붙이는 것을 주님께서는 모를 리 있겠어요. 다 알지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 어려운 난제를 한번 파고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의 안목에서 보게 되면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어른과 대결합니다. 대조시키죠. 이 세상에서 어린 아이와 어른이 대결하면 누가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어린 아이보다 어른이 더 가치 있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어른 = 어린 아이+시간이죠. 이 공식이거든요.
그러면 공식대로 좌변 우변 하게 되면 어린 아이란 어른에서 시간 빼기. 어른은 시간을 빼는 겁니다. 이게 인간은 안 빠져요. 인간은 시간에 밀리기 때문에 시간에 떠밀려가기 때문에 이게 빠질 수가 없는 거에요 시간이. 그리고 심지어 어린 아이라고 고정된 존재가 아니에요. 어린 아이도 언젠가 시간이 덮쳐버리면 어린 아이는 어디로 이동 중입니까? 어른으로 예비 어른이죠. 예비 어른. 어른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뜻에 의하면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어른 쪽으로 가지 않는 자만이 하늘나라 간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다시는 어른이 되지 않고 반대로 가는 거에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하는 영화 있지요. 시간이 어린 아이 쪽으로 가는 자, 그런 자만이 천국에 간다면 도대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없지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함으로서 우리들 가운데 누가 천국 가느냐 라는 질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파괴시켜버립니다. 그래서 뭐냐?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죽여버린다는 거에요. 우리 가운데 누가 천국 가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제시한 어린 아이가 어디로 소급되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 본인으로 소급되는 방식을 세상을 통해서 증명해내는 거에요. 어린 아이의 관점은 천국 보이는데 어른 관점은 천국에 못 갈 관점으로 그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그만큼 컸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뭘 생각하겠어요? 어린 아이와 어른과의 그 차이가 뭐냐를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이 차이는 시간 요소의 개입으로 이 차이가 없어요. 어린 아이가 나중에 커서 어른 되니까 어른이나 어린 아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차이가 될려면 뭘 빼야 되느냐 시간을 빼야 돼요. 그런데 인간이 시간을 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시간이 안 빠져요.
자, 그렇다면 어린 아이가 천국 간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같은 자만 만들겠다 하는데 예수님 본인이 모델이죠. 그럼 예수님 본인을 모델로 하게 되면 예수님은 뭐냐 하면은 바로 이거에요. 성령으로 잉태한 분이에요. 성령으로 잉태한 분이거든요. 이게 마태복음 1장을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1장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라고 되어있어요.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이 말을 이해할려면 성령으로 잉태하지 않은 자들이 누구죠?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은 자들이 누굽니까? 여러분. 우리들이죠.
그러니까 주께서는 예수님 빼놓고 다 망하고 죽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에요. 인간들이 하나님한테 어떤 소리를 들어도 우리는 마땅한 거에요. 그래서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벌은 복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사랑이에요. 왜? 우리 주제파악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주제파악을. 성령으로 나지도 않은 게 어디서 천국을 갈라고. 이게 주제파악도 못하고 말이야. 봐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잖아. 성령으로 나신 분이 어린 아이만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했잖아. 수근 대지마. 우리 중에 누가 구원받는지. 수근 댈 사항이 아니에요. 성령으로 잉태돼야 돼요. 성령으로.
성령으로 잉태돼야 되고 또 하나의 조건이 뭐냐 하면은 부활입니다. 부활. 부활에서는 어른과 어린 아이가 구애받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은 부활세계는 눈밭과 같습니다. 넓은 눈밭과 같아서 강아지가 뛰어놀아도 어른이 뛰어놀아도 어린 아이가 뛰어놀아도 어떤 책임을 그에게 지우지 않습니다. 그게 부활이에요. 부활세계. 어떤 의무를 묻지를 않아요. 어떤 책임을 묻지를 않아요. 왜냐 하면은 부활은 그 전에 무슨 사건이 있기 때문에 부활입니까? 이미 죽은 자로 간주했고 성령에 의해서 부활됐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서 임신 또는 성령으로 잉태한 자의 공통점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신기하게 잉태했다는 뜻이 아니고 뭔가 하나 죽고 난 뒤 죽음을 처리하기 위한 하나님만의 아주 단호한 결정적 방법이 성령이에요. 성령. 모든 인간을 죽여놓고 그 죽음을 통해서 이제는 책임을 묻지 않는 세계를 펼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자, 그러면 아까 처음에 한 강의 연결시키면 인간은 어린 아이 될 수 없습니다. 무슨 요소 때문에 그렇습니까? 시간 요소 때문에 그렇죠. 그러면 시간 요소가 이미 깃들여져있는데 그걸 어떻게 다시 어린 아이가 될 수 있다는 겁니까? 간단해요. 죽이면 돼요. 죽으면 돼요. 죽고 그 다음에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돼요.
그러면 부활의 세계인데 이 부활의 세계는 전부 다 어린 아이 같아요. 왜? 시간 요소가 가미되지 않기 때문에 너 부활된 지 몇 년 됐어? 10년 됐습니다. 10년 됐는데 너는 왜 그것밖에 안돼? 라고 물을 게 없어요. 부활의 세계는 성령 세계고 성령의 세계는 시간이 없는 세계에요. 시간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시간 따라 발전한다든지 성장한다든지 진화한다든지 그런 요소가 덧붙일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여러분이 이해해야 될텐데 지금 제자들이 어른들이잖아요. 이 제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철저하게 어른 되면 돼요. 철저하게 시간을 짊어지면 돼요. 시간을 짊어지고 가면서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야를 혹독하게 느끼는 거에요. 그래서 이 세상 방법은 두 가지 있지요. 어른이 어린 아이 될려고 하는 방법, 이게 뭐냐? 다른 사람 되는 거에요. 오늘 제목을 이걸 할까 싶은데 방법은 하나에요. 어른이 어린 아이 되는 방법은 첫 번째는 내가 이 어른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시도를 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 아주 돌발적으로 다른 사람 시도.
두 번째는 철저하게 어른으로 죽고 망하는 것. 철저하게 철저하게 제대로 제대로.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죽인다고 했으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이유를 알고 죽어야 될게 아니겠습니까. 어른이기 때문에 죽는 거에요. 시간을 듬뿍 담았기 때문에 죽는 거고 시간에 담다보니까 작년보다 더 나아졌고 성숙했고 성화됐고 훌륭하고 도덕적이고 이게 계속해서 떨어지지 않는 거에요. 어린 아이는 커녕 점점 더 어른스러움의 자기 한도까지 밀어붙이는 겁니다.
여기 평소에 안하는 짓을 했는데 여기 교재 있지요. 노래 세 개를 했는데 노래 세 개를 왜 했는지 여러분들이 이제 아셔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철저하게 어른 되기에 곡 두 개, 철저하게 다른 사람으로 시도해보는 노래 하나. 그게 첫 번째는 실로암. 실로암은 세 번째로 하고 이승훈의 마지막 편지 가사 있으니까 볼펜 들고 제가 동그라미 치라는 부분에 동그라미 치시면 돼요. 노래교실. 가사에 동그라미 쳐보세요. 자세히 한번 봅시다. 노래교실.
믿어지니 우리 사랑 끝내야 할 운명이 눈 감아도 내 가슴속엔 항상 너뿐일 텐데
알고 있니 끝내 우린 남이 될 수 없기에 가슴속에 내 남은 사랑 묻어두고 가는 걸
해질녘 노을 보며 함께 수놓은 꿈들은 스치는 바람처럼 다 부질없는 꿈이었나
보고 싶은 마음도 아름다운 추억도 고이 접어 간직하려해 이별 뒤에 그 약속까지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할 수 없지만 영원보다 더 오랜동안 사랑하겠노라고.
어떻습니까? 강의 재미있지요? 보세요. 이게 어른들의 세계에요. 어른들의 세계. 결국 인생은 시간과 더불어서 가요. 시간과 더불어 가면서 희망을 가져요. 나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 나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사람답게 살아보고 그래서 이 세상을 이 짧은 인생이지만 후회 없이 행복하게 한번 살아보자 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편지 이승훈 씨의 가사에 보게 되면 끝내야 될, 얼마나 헤어지고 답답했으면 여기서 자살해버릴까. 끝내버릴까. 끝내야 될 남이 될 수 없는데 이미 남이 되어버렸다는 그 모순. 그 다음에 해질녁 노을, 해질녁 노을이 무슨 뜻이에요? 강의 핵심이 이겁니다.
인간 자체가 하나의 팬케익처럼 쟁반이거든요. 해질녘하면 해가 어떻게 됩니까? 지지요. 시간의 뭡니까? 언저리. 노을이 져버린다고요. 해지는 거 보면서 이 가사의 주인공은 해질 노을처럼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내다보지요. 이게 바로 어른들의 결말입니다. 어른들 세계의 결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하나도 낯설지가 않아요. 왜? 쟁반보세요. 이 언저리 절벽이잖아요. 절벽. 결국 절벽으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게 시간의 언저리, 그것을 노을로서 표현한 겁니다. 노을로서. 저 해질녘 노을 보니까 내 신세를 닮았구나. 아 슬프다 이거요.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게 꿈이죠. 해지는 거 보니까 이게 꿈인가? 그동안 뭐였어? 도대체 뭐였어? 서로 사랑한다는 게 뭐였어? 꿈인가? 보고 싶은 마음도 아름다운 추억도 고이 접어 간직하려해 이별 뒤에, 이별은 상상도 못했지요. 사랑하면서 이별까지 생각하는 사람 어디 있어요. 간 보는 거지. 이별 뒤에 약속까지 할 수 없다. 이미 끝났다. 내 인생 끝났다. 그러면 결국 어른으로서의 이 땅의 삶이라는 것은 어른으로서의 삶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난다는 겁니다. 이게 어른이에요. 그럼 어린 아이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이것을 경험해야 돼요. 철저하게. 하나 더. 그 다음에 슬픔 그 뒤에 오는 고독.
비 오는 가로등 밑에 갈 곳을 몰라서 헤매는
가엾은 여인의 모습이 내 눈에 비춰질 때
우리의 슬픔도 그것과 똑같으리라
갈 곳을 몰라서 헤매는 비 젖은 나의 영혼아
바람이 불어와서 잎새는 떨어지고
떨어진 그 잎새가 바람에 굴러도
우리네 슬픔도 그것과 똑같으리라
갈 곳도 모르는 여인아 어디로 걸어가나.
여기까지. 자, 한번 보세요. 이게 어른들의 세계의 내장되어 있고 잠복되어 있고 잠재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되 이미 자기가 생각한 모델이 있고 그 모델 때문에 버티다가 에이 안 되면 이거하지 이런 식으로 선택을 하는데 항상 모델은 뭐냐 하면은 자기 이상향은 어른들 세계 어디 가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으로 만났는데 6개월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이상향에서 변합니다. 인간은. 본인이 변해요. 그런데 다른 사람보고 변했데. 자기는 자기가 변한 건 모르고. 자, 이렇게 되고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게 있어요. 그렇다면 이렇게 어른은 철저하게 어른이에요. 어른에서 어린 아이 갈 수 없어요. 그러면 그것 말고 직접 우리가 어린 아이 되면 되지 않겠는가. 그게 실로암.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자율성이에요 자율성)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는 차가운 새벽이었소 (기존의 다른 사람 되기 그 경계선입니다.)
당신 눈 속에 여명 있음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소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나에게 영원한 이 꿈속에서 깨이지 않게 하소서.
여기까지. 자, 한번 보세요. 실로암의 특징은 뭐를 아느냐? 미리 알아요. 지금의 나와 달라진 나를 미리 캐치해요. 반칙입니다. 이런 것은 종교에요. 이것은 예수님의 뜻하고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 죽일려고 하시는 거에요. 망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망치는 방식대로 더 철저하게 어른답게 해지는 노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돼요. 그게 합당하고 그게 맞고 그게 감사해야 됩니다. 내 소원대로 내 뜻대로 되는 일 하나도 없을 때 그게 주의 뜻입니다. 그게 징벌이라면 그 징벌조차 사랑해야 되고 징벌조차 복인 줄 알아야 돼요.
자, 그렇다면 이제 가요교실은 끝났으니까 차분하게 들어가 봅시다. 해결책 한번 보겠습니다. 물리학에서 곡선 v와 곡선 t에서 인간의 모든 물체를 물리학에서는 운동으로 봐요. 운동. 가속도. 속도 말고 가속도. 가속도는 속도의 변화율을 가속도라고 해요. 여기 속도 vο에서 v로 갔을 때 기울기가 이렇게 됩니다. t할 때 이때 면적은
x=xο+vοt+½at²
시간 요소, 시간 요소가 t가 돼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사물을 볼 때 물리적으로 보면 반드시 무슨 요소가 필수적이다? 시간 요소를 집어넣는 거에요. 그러면 자아, 나는 반드시 뭐가 들어간다? 시간이 가미되어서 나에게 가속도가 붙으면 나는 날마다 보다 나은 쪽으로 변화한다는 의식을 갖습니다. 이게 무슨 의식이냐 하면은 어른 의식이에요. 이게 어른 의식. 이게 물리적으로도 딱 나오거든요. 나를 하나의 질점이라고 하는데 질점, 실체, 또는 물체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은 시간이 주어지면서 나는 과거에서 현재 이만큼 시간이 투입되었으니까 투입된 만큼 나는 이 현실 속에서 점점 더 뭔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에 했지요. Epoxy Resin. 아십니까? 공예품. 공예품 알아요? 어떤 장미같은 거 이런 거 집어넣고 갑작스럽게 찐덕찐덕한 거 그거 부어가지고 굳혀놓으면 투명하게 그게 보이잖아요. 그게 뭐냐? 공예품이에요 공예품. 알지요? 투명한 공예품.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은 시간 요소가 있으면 자아를 뭘로 보느냐? 자신이 만든 공예품으로 만드는데 일생을 다 보냅니다. 평생을. 내가 만든 공예품을 내가 보면서 그걸 즐기는 거에요. 아 나 인생 나 진짜 너무 아름답게 산 거 같애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 본인이 본인을 제작하는 거에요. 이것이 잉태치 못한 자의 출생하고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잉태한 것과 인간의 육신에서 태어난 것과 차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든 공예품을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네가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라고 할 때 그 어린 아이를 어른의 세계에서는 어린 아이가 하나의 과거사에 본인이 있었던 vο죠. 처음 태어났을 때 시간이 흐르기 전에 처음 태어났을 때 어린 아이지만 이 어린 아이의 내부에 어떤 잠재성이 있느냐 하면은 점점 더 시간을 통해서 내가 생각한 내 공예품을 내 인생이라는 공예품을 만들은 그 속성을 내가 그것을 지울 수가 없어요.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슬픔 뒤에 고백이라든지 그 다음에 마지막 편지에 나오는 다 부질없는 꿈이었나, 끝내야 될 운명, 이게 두 가수가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모두의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가. 그래서 가사 절절하고 노래도 참 좋잖아요. 좋지요? 꼭 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것을 교회에서는 뭐로 극복하느냐 하면은 실로암으로 극복하는 거에요. 실로암으로. 문제는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진흙 발라서 눈 뜨게 했다는데 눈 뜨게 하면 뭐합니까? 뭐가 작동하는데? 시간 요소가 멈추지 않고 계속 주어지는데요.
내가 다른 사람 만드는 그것도 나의 공예품이에요. 이전까지는 내가 예수님을 몰랐는데 이제는 예수님과 알게 되었다라고 시작하면 여기 뭐가 주어집니까? 시간 요소가 주어지니까 가속도가 붙는 거에요. 가속도가. 계속해서 가속도가 붙어요. 이거는 자기가 자신의 공예품으로서 나중에 천국 갈 때에 자기 자신을 가지고 갈라고 그렇게 시도할 수밖에 없지요.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신 것은 약이나 올릴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기어이 뭐로 만들겠다? 어린 아이로 만들어주겠다는 거에요. 어린 아이로 만들어주고 시간이 아무리 가미해도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 계속 어린 아이로 남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 빼놓고는 전부 다 성령으로 잉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가 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성령으로 잉태했다 이 말은 잉태된 자는 나로 인하여 되어질 일은 더는 없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해가지고 예수님 혼자 일했습니까? 아버지와 더불어 일했어요? 아버지와 더불어 일했죠. 예수님이 아버지와 더불어 일할 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뭐가 있었어요? 성령이 있었어요. 성령으로 잉태한 게 잉태로 손 터는 게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계속 성령에서 계속 관계를 맺은 거에요.
성령 관계 맺은 것이 바로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가 나와요. 사다리 할 때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지요. 연락책이죠. 연락책. 계속해서 연락책으로 활동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때는 신적인 놀라운 능력을 행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너무 약한 모습을 보여요. 너무 약한 모습을. 물 위를 걸을 때는 대단하지요. 그러나 십자가달릴 때는 어떻습니까? 너무나 약하디 약한 모습을 보이지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지요. 이게 성령께서 계속해서 조절하시는 거에요. 성령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부활하실 때까지는 철저하게 성령에 의해서 조정 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런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한 것은 다 아버지께서 하신 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버지가 내 안에서 활동하는 거에요. 아버지가.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왜 자꾸 아버지를 보라 하느냐.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이게 아버지의 영이에요. 아버지 영. 나중에 주의 영. 이때는 아버지의 영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 지시에 따라서 계속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는 말이 뭐냐?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면서 기도를 한 거죠. 기도 처음 할 때는 이것이 내 것이 양보되지 않았는데 기도를 세 번씩 드디어 이제는 완전히 내 뜻을 완전히 굽힐 수 있는 때까지 오기까지 예수님은 땀방울이 뭐가 됩니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된 거에요. 성령의 일은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소위 천국에 갈수 없는 어른들의 그 마지막 최후의 망한 모습을 저주 받은 모습을 예수님이 몸소 다 보여야 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른으로 죽으셨다면 우리는 뭐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은 우리야 말할 것도 없이 육신으로 태어난 우리는 마땅히 비 오는 가로등 밑에 갈 곳을 몰라서 헤매는 헤매야죠. 비 젖은 나의 영혼아. 푸욱 젖었어요. 우산도 안 쓴 모양이네. 바람이 불어와서 잎새는 떨어지고 떨어진 그 잎새가 바람에 굴러도 우리네 슬픔도 그것과 똑같으리라. 너도 슬프지만 나도 슬프다 그런 뜻이잖아요. 슬퍼한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할 일이에요. 인간이 슬퍼한다는 것은. 왜냐 하면은 백날 해봐야 슬픔만 올 거 내가 나를 믿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걸지 않는 거에요. 그게 어린 아이란 말이죠. 그게 어린 아이거든요. 눈밭에 뛰노는 어린 아이. 아무 계획도 없이 뛰어노는 거에요.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한 자는 바로 나로 인하여 되어질 일이 더는 없다는 거에요. 그 중에 또 한 사람을 뽑으라면 바로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죠. 마리아. 마리아 + 성령해서 나온 게 뭐냐 예수님이 사람 된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은 누굽니까? 인간은 마리아1, 예수님2죠. 마리아는 성령을 이렇게 빼버리면 예수님의 사람 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사람 되는 거. 예수님의 사람 된다는 말은 예수님의 내뱉은 말씀에 의해서 새로 잉태된 자, 새로 지음을 받은 자가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이 방금 누가복음 18장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누구도 천국에 못가지요.
그러면 어린 아이같이 되면 뭐 된다? 천국에 무조건 들어가지요. 그럼 어린 아이가 되면 무조건 들어간다는 이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처럼 우리에게 들어와버리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내뱉은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공식이 간단하지요. 그러면 그거하고 부활하고 무슨 관계있느냐? 부활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 없고 구애받지 않습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새로 태어났으니까 그들이 뭐다? 천국의 어린 아이같다. 어린 아이. 아무리 나이가 90이 되도 80이 되도 괜찮아요. 어린 아이. 시간의 변천과 아무 상관없는 신분을 보장 받습니다. 조건이 있지요. 뭐냐 하면은 늘 내가 말씀을 지키면 안 되죠. 내가 말씀을 지키지 말고 말씀이 나를 덮치는 덮쳐진 그 말씀 안에 있다는 조건하에. 주께서 주신 말씀 안의 조건 하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럼 삶은 어떤 삶이냐? 마치 동화 같은 삶인데. Epoxy Resin입니다. 투명한 공 같은 스노우볼 같은 그런 공 같은 곳에 있다면 이 안으로 뭐가 들어오느냐? 말씀이 들어오죠. 말씀이 안에 들어온다고 해도 되고 말씀이 이렇게 삐라처럼 또는 딱지처럼 붙어있다 하게 되면 이 어린 아이 같은 성도는 뭐를 보느냐 하면은 말씀을 보는 거에요. 말씀을 보면 넒은 길로 가는 것은 멸망이고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영생이다 그 말씀을 확인하는 거에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이미 이 세계 속에 말씀이 들어붙고 말씀이 들어오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의 삶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성령께서 자기가 활동하게 하지요. 일어난 모든 일 뭐와 관련시킨다? 주께서 이미 다 이루어진 모든 말씀과 연계해서 살아가는 사람. 아 현재 이 사건이 이 말씀을 이야기하는 구나. 이런 일은 이 말씀을 이야기하는구나. 그래서 이 말씀 속에는 뭐가 필요하느냐 하면은 바로 바리새인이 주장. 굉장히 강조해서 중요합니다. 바리새인의 주장을 들어야 되고 다른 부분도 들어야 되고 이게 전부 다 말씀이에요. 마귀의 말도 들어야 되요. 아 저게 마귀의 말이구나. 저게 바리새인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 자세구나. 다른 복음이구나 하고 쭉쭉 다 수용하는 거에요. 전부 다 수용하는 거에요.
그러면 뭐를 이해할 수 있느냐 하면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이야기를 알 수 있어요.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이런 주어진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되풀이해서 깨닫게 되는 거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한 것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일날 본문이 뭐냐 하면은 감독 된 자들은 또는 장로 된 자는 이러이러해야 된다는 것이 쭉 나오지요. 믿는 자녀를 두어야 되고 술 취하지 말고 나그네를 뭐 해야 되고 참고 구타하지 않고 뭐 쭉 나오지요. 그러면 이 말씀이 어린 아이 이미 부활 속에 성령 속에 우리에게 스노우볼 속에 들어붙는 거에요. 들어붙는다 이 말이죠. 붙으면 여기에 해당된 사람이 어디 있는지 찾아본다. 찾아보지요.
보니까 저기 떡 하나 있단 말이죠. 예를 들어서 목사님 있단 말이죠. 있는데 여기 뭐가 투입되느냐 하면은 아까 무슨 요소입니까? 시간 요소가 투입되지요. 시간 요소가 투입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아이 셋 낳고 난 뒤에 아니야 이거. 어떤 시간을 통해서 바로 왜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 아니고서는 어떻게 왜 구원받지 못하는가를 주위에 이런 말씀에 입각한 사람들 후보감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가 소멸하고 나타났다가 실망하는 거에요. 완전히 큰바위 얼굴하고 똑같은 거죠. 우리 마을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나타났다. 그 지도자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본인이죠. 나중에 그 단편소설 보면 막 사는데 자기를 지도자로 했단 말이죠. 마을 사람들이 나를 당신이 감독해라. 당신이 장로해라. 그런데 내가 했다고 칩시다. 했다고 치면 어떻게 되겠어요? 본인이 알지요. 내가 왜 장로감이 못되는지를. 그 장로되기 전까지는 몰랐고 감독되기까지는 몰랐지요. 내가 목사감이 안 된다는 걸. 장로감이 안 된다는 걸.
그러면 집사님이 “아 목사님, 진짜 목사님같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거에요. 평생을 내가 나한테 사기를 치고 있고 전부 다 시간 요소이기 때문에 전부 다 어른스러워요. 어린 애로 못 돌아가요. 못 돌아간다고요. 전부 다 자기 공예품이에요. 자기를 스스로 포기 못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다 죽여버리는 거죠. 그 죽음에 대해서 박수치는 거에요. 박수치는 거에요.
자, 어떤 목사가 목사해가지고 존경받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져가지고 짤렸다. 그럼 짤리면 목사가 부를 노래는 뭡니까? 비 오는 가로등 밑에 갈 곳을 몰라서 헤매는 가엾은 그때는 나죠. 가엾은 나야. 우리의 슬픔도 이럴 줄 몰랐다는 것. 그 다음에 마지막 편지에 해질녘 노을 보며 함께 수놓은 꿈들은 목사 이거 다 부질없는 꿈이었나. 이 세상에 어른들이 너만 어른이냐? 나도 어른이다 다 같이 욕하면서 다 같이 어른들, 발전된 어른들을 시도하는 그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꿈이고 다 나와 내가 나와 이별해야 돼요. 주께서 우리를 죽고 망하게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주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들락날락이라고 했지요. 들락날락. 그래가지고 나는 장로 감도 안되고 목사 감도 못됩니다. 성경구절 맞는 거 내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도 맞는 게 없네요. 바로 그 자가 뭐만 증거하겠어요? 하나님의 피만 증거하겠지요. 그걸 가지고 사도행전에서 뭐냐? 감독이죠. 감독. 실패한 자만이 증거 될 수 있는 게 예수님의 피죠. 주께서 하신 일, 어린 아이 되는 것도 주께서 하신 일, 십자가도 주께서 하신 일, 성령 보내주신 것도 주께서 하신 일, 내가 성령으로 잉태하고 싶어서 기도한 게 아니고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주께서 하신 일, 부활도 주께서 하신 일, 천국도 주께서 하신 일, 바로 그 사람이 바로 진짜 목사고 감독이죠.
그렇게 사람들 우르르 감독시켜놨습니다. 2개월 지나고 어떻게 됐습니까? 마찬가지죠. 역시 감독은 주님의 말씀이 감독이고 장로가 이래야 된다는 이 말씀에 모든 교인들이 다 매일같이 지적 받아야 되고 받아들여야 돼요. 그래서 대구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이렇게 했지요. 한번 성경을 다 봤다. 다시 보고 다시 보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한번 보고 다시 한번 보고 하면서 바로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내 속에서 이 썩어빠진 인생을 통해서 말씀이 말씀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이게 바로 주의 증인인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