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30914a 요한일서 2장 13절(유일한 해석자)-이 근호 목사
서울강의20230914a 요한일서 2장 13절(유일한 해석자)-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2장 11절부터 해보겠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여기 등장하는 언어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개체와 관련되어 있어요. 개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개인 하나에 언어가 하나씩 달라붙어있다. 인간세계에서 언어라 하는 것은 그 개체를 지목하게 되어 있어요.
지우개, 개체죠. 휴지, 개체죠. 매직, 다 개체잖아요. 사람도 마찬가지고. 남자, 여자 전부다 하나의 개체 따라서 언어가 하나씩 달라붙어있죠. 아담이 이름 지을 때 그 이름의 실(實)대상이 있었잖아요. 코끼리도 있을 것이고 다람쥐도 있을 것이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니까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일서 2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어두움’. 인간세계에서의 어두움이라는 것은, 언어는 개체와 연결되어있다는 이 원리에 따라서 어두움은 밤에 해당됩니다. 밤은 어둡다. 어두운 것은 밤이다. 밝은 것은 낮이고 낮은 밝다. 그렇게 되죠.
그런데 여기 11절에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다’라고 하는데 인간세계에서의 어두움은 어두움이 눈을 멀게 하면 안 되죠. 밤에 눈이 멀어야 되죠. 어두움은 밤이라는 실체에 해당되는, 실체를 지목하는 부사죠. 어두운 밤, 이렇게 되거든요. ‘어두운 밤’일 때 어두움이 강조됩니까, 밤이라는 게 강조됩니까? 밤이 강조되는 거예요. 밤이 있는데 밤은 환하게 밝지 않고 어둡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두움이 밤을 제거해버린다면 어떻게 합니까? 어두움이 밤을 제거한다면? 여기에 사람도 있고 책상도 있고 수박도 있다. 수박도 있고 차도 있고 건물도 있다면, 이런 모든 개체를 한꺼번에 다 제거하는 방법은 뭘까요? 어두움이 와버리면 이것은 전부다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쓰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의 세계가 아니라 낯선 언어에요. 이 낯선 언어는 어디서 나왔느냐? 예수님에 의해서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만 쓸 수 있는 언어를 지금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쓸 수 있어요.
한번 적어볼게요. [낯선 언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낯선 언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주변에 제자들이 있었잖아요.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주변에 있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해석했습니까, 안했습니까? 해석했어요, 못했어요? 해석 못했죠. 여기 유대인들도 있겠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해석했습니까, 해석 못했습니까? 해석 못했죠. 인간들이 예수님의 말을 해석 못한 것은, 인간은 인간의 개체와 관련되어 있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은 결론을 임시적으로 내릴 수 있어요. [예수님의 해석자는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 ‘십자가가 뭐냐?’라고 할 때 이 십자가에 대해서 해석을 두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인간 언어에서 십자가를 해석할 수 있겠죠. 그다음에 2.인간에게서 쫓겨난, 인간과 결별한 낯선 언어에서 십자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이 말이죠. 사도 요한은 이 두 가지 다를 대비시킵니다, 이 요한일서에서. 두 가지 다를 대비시키죠.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는 그 당시 정치인들이 주동하고 유대인 백성들이 거기에 합세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시킨, 사형시킨 사건 형틀’ 이게 십자가라고 이야기하죠. 진도 나간다고 좋은 게 아니고 하나하나 설명해보겠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해서 사형시키기로 작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사형시킨 사건이 바로 십자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건 누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 언어로.
그런데 예수님의 언어로 이야기해봅시다. 예수님의 언어로 십자가는 뭐냐? 그냥 피에요. 또는 화목제물입니다. 피라는 것이 요한일서 1장에 나오죠. 1장 7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한다. 피를 이야기함으로써 피가 흘려진 곳에는 대립이 성립되었다. 대립성. 대립이 성립되어야 피가 흐르죠.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피가 생산된, 피가 양산된 그 사건이라면 십자가는 뭐냐?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한 사건이에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한 사건이 십자가에요.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점이 많이 있습니다만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다윗은 피를 흘렸어요. 자기 피 흘린 게 아니고 상대방 피를 많이 흘렸죠. 이것은 전쟁 중이라는 겁니다. 자, 전쟁이 되려면 우호적인 관계에요, 안 그러면 적대적인 관계입니까? 적이 있어야 전쟁이 일어나죠.
그럼 솔로몬과 다윗의 차이점은, 솔로몬은 그 전쟁에서 모든 적들은 이미 굴복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왕이 솔로몬이에요. 어제 수요일에 했죠. 솔로몬 때에 모든 사람이 무화과와 포도나무 아래서 안정을 취했다고 되어 있어요.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安然)히 살았더라” 왕상 4:25)
그러면 솔로몬 때에 안정을 취했다는 말은 솔로몬 이전에 아주 결사적인, 서로의 정체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게 다윗이 피를 많이 흘린 거예요. 그리고 그 승리는 다윗에게 주어져서 다윗의 자손인 솔로몬이 안정적으로 그 백성들이 평화로운 시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언약은 솔로몬 언약입니까, 다윗 언약입니까? 다윗 언약이죠. 솔로몬 언약은 없습니다. 에스겔에 보면 다시 내가 메시야를 보낸다 할 때 솔로몬을 보내겠다는 겁니까, 다윗을 보내겠다는 겁니까? 다윗을 보낸 거예요. 솔로몬을 보낸 게 아니고 다윗을 보낸 거예요. (겔 34:23-24, 37:24-28) 왜냐하면 다윗을 보내줘야 적의 개념이 거기서 뚜렷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적이 있는 곳에 오셨다.] 그런데 이 적들은 자체적으로 서로 통용하는 언어가 있었다. 그 언어를 가지고 그들이 예수님을 해석한 결과로 예수님은 죽게 된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평가하는 언어들이 있잖아요. 언어에는 평소에 그들이 사는 세상관, 인생관, 개념들이 거기에 달라붙어있는 거예요. 언어라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남자/여자’ 이 개념을 지금 한 살짜리 아이가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엄마/아빠는 알지만, 아빠는 남자에 속하고 엄마는 여자에 속한다는, 아빠엄마보다 더 넓은 개념을 애들은 몰라요. 나중에 크면 아버지는 남자에 속하고 어머니는 여자에 속하는구나, 이걸 아는 겁니다. 좀더 커봐야 아는 거예요.
인간은 뭘 모르느냐 하면… 어두움은 밤에 속하고 밝은 것은 낮에 속한다고 보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밤과 낮은 실제로 있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 해 떨어지면 밤이고 해가 떠오르면 낮이 되잖아요. 그게 인간의 생각이죠.
그런데 인간은 어두움을 몰라요. 어두움을 모르니까 빛을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어두움과 빛을 섞어버리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내가 빛으로 왔나니”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내가 빛으로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적이 있는 곳에 오신 이 취지에 의하면 너희들은 다 어두움이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어두움이라는 것을 인간세계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인간들에게 통용되는 개념에 의하면 어두움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냥 밤이 있고. 빛의 개념도 없어요. 빛이란 그냥 낮을 빛이라 하는 거예요. 낮을 빛이라 하는 개념을 21세기까지 파급해서 더 연구한 결과가 양자물리학이라는 거예요. 입자냐 파동이냐. 파동이냐 입자냐. 양자물리학의 부산물로, 상대성 원리와 양자물리학에 의해서 나온 것이 바로 오펜하우어가 발명하고 추진한 원자폭탄이에요. 수소폭탄 이런 거.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라 하는 것은 기존에 인간 개체를 부정하는 언어가 아니고 개체를 긍정해버리는 언어를 그들은 사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누가? 인간들이.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인간이든 예수님을 해석할 사람은 없고 오직 해석자는 예수님 본인이 예수님의 해석자가 되는 겁니다. 아무도 해석할 수가 없어요.
결국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너희들은 나를 이해 못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그러한 세계에 놓여있다는 거예요. 그걸 어두움이라 표현하거든요. 어두움의 세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잘 아시겠죠? 잘 아시겠냐고 묻는 의미가 다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경 줬습니다. 우리가 성경해석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해석 못하죠. ‘성경이 뭐지?’를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언어는 반드시 거기에 대응하는 실체가 있어야 언어가 유효해요. 매직이 발명되지도 않았는데 매직이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죠.
인간은 실체가 없는 것을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라 합니다. 미확인 물체. 언뜻 보기는 봤는데 뭔지는 모르겠다. UFO같은 경우에. 귀신, 유령? 인간이 끄집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귀신, 유령을 본 사람은 없죠. 인간이 본다는 것은 개체, 실체가 있어야 돼요. 한번 유령 봤다고 유령을 본 게 아니에요. 유령은 박물관에 표본으로 있어줘야 비로소 유령이 있는 겁니다.
[박물관: 실체들의 집합소], 과거 실체들의 집합소가 박물관입니다. 실체들의 집합소에요. 이들에게는 전부 언어가 붙어있어요. 그리고 지금 현재 삶이 내일이 되면 오늘 살았던 것은 박물관에 하나의 리스트로 들어갈 대상으로 후보감이 되죠. 왜? 실체들이 있으니까. 실제로 있으니까요.
여기서 인간의 언어체계가 확립되고 이것이 하나님, 예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간주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실체가 없어요. 예수님이 죽었을 때 예수는 ‘사형수’라는 단어로 실체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까불다가 정치범으로 죽었다, 그게 되는데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실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만지지 말라 했거든요.
실체 없는 그것을 사도 바울부터 해서 사도 요한이 그걸 실체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해석의 한도가 드러나 버린 거죠. 인간은 모든 것을 해석하되 예수님한테 걸리면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이 돼요. 인간세계에서 ‘이거는 컵이고 이거는 조명이고 이거는 에어컨이고’라고 인간이 했던 이것이 인간세계에서는 서로 인정을 하는데 예수님한테 걸려버리면 이게 전부다 거짓말되는 거예요.
이건 MP3 보자기인데 “이게 뭐지?” 인간한테 물어보면 “이건 MP3 보자기입니다.” 주님한테 물으면 “어두움이니라.” 이게 어둡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렇게 말씀을 해버린 거예요. 빛과 어두움에 대해서 이야기해버렸다고요, 예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경유하지 않으면 예수님 해석은 나오질 않았어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 자신이 인간세계에서 죽임당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예수님께서는 발언해 오신 겁니다. 언어를 사용한 거예요. 성경이 뭐냐? 인간은 성경이 뭔지를 몰라요. 그냥 옛날 선지자가 썼던 글, 이렇게 돼요. 그게 어두움의 해석이에요. 하여튼 인간 자체가 어두움에 속하기 때문에 어두움에서 나온 것은 전부다 어두움의 해석이라서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를 형성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한 그림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너무나 간단해요. 너무 간단해서 웃긴다 할 정도로 간단해요. 전체 동그라미가 이 세상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나타났어요. 예수님이 ‘나는 빛으로 왔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님은 빛, 이외에 바깥은 전부다 뭡니까? 졸지에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이 바깥에서 인간과 인간끼리 통용되는 모든 언어체계는 전부다 거짓이 되는 겁니다. 어두움에서 예수님을 해석해내질 못한 겁니다. 해석해내지 못한 결과가 뭐냐?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게 한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뭐냐? 인간들은, ‘사형수가 사형당한 것이다. 우리에게 대들다가 성전 헐라 하다가 정치범으로 맞아죽은 게 십자가다.’ 이것이 인간들의 십자가 해석이에요.
그러나 주님의 해석으로 십자가가 뭐냐? ‘너희들은 어두움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너희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드러내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리고 더 추가해서 너희들은 죽어 마땅하다. 너희들이 하나님인 나를 죽였기 때문에. 피를 내서 죽였기 때문에 너희가 죽어 마땅하다. 너희들이 저주받더라도 군소리하지 마라. 어두움은 어두움이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만 빛이어야 하기 때문에.
사도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빛이 기름 부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빛의 영역이 드디어 뚜렷하게 돼요. 예수님 이후에 사도들에게 뚜렷하게 되게 되면 이것과 비교해서 뭐가 뚜렷하게 등장합니까? 어두움이 더욱더 어두움으로 찐~하게 더욱더 깊이를 더하겠죠.
요한일서 2장 12절 봅시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 뭐가 나오느냐 하면 ‘너희 죄’. ‘너희는 죄 있으니까 열심히 살아라’ 이렇게 했어요, 안 그러면 너희 자체를 죄로 봤습니까? 너희=죄죠.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강의를 잘 들었으면 죄에 대해서, 인간의 언어체계에서 죄는 뭐냐 하면 인간들이 실수한다든지 해코지한다든지 잘못 행동하는 것을 죄라고 하죠. 그러나 빛의 세계에서는, 이것을 인간 언어 말고 제가 뭐라 했습니까, 반대로? 낯선 언어에서 죄라 하는 것은 인간+세상, 인간의 세상,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간단하죠? 굉장히 간단해요. 굉장히 간단합니다.
인간 언어에서의 죄라 하는 것은 실수하고 남한테 해코지하고 남한테 피해보상 안하는 게 죄가 돼요. 그렇다면 인간 언어에서는 죄만 있는 게 아니고, 나쁜 짓하지 않을 경우에 의로울 여지가 있죠. 인간 언어에서는. 그러나 낯선 언어에서는, 주님의 언어에서는 인간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인간이 죄 아닌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 전쟁, 이 싸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12절이죠.
13절 봅시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악한 자’ 나오죠. 악한 자.
악한 자. 1.인간 언어에서 악한 자는 뭐냐? 악하다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윤리, 도덕 체계와 사회의 연합, 단합을 훼손하는 행위. 인간 공동체의 발전과 유지에 방해되는 행위. 악한 행위입니다. 그런 것은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킬 필요가 있어요. 사형시키든지 무기징역하든지. 그걸 사람들은 악한 죄라 해요. 그래서 여기 인간 언어에서의 악한 자라 하는 것은 개체가 있습니다. 교도소 가는 사람은 개체가 있어요.
그런데 낯선 언어에서의 악한 자는 뭡니까? 이 어두움의 세계 그 자체에요. 어두움의 세계 그 자체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낯선 언어에서의 악한 자가 뭐냐? 인간 언어를 사용하는 자가 악한 자에요. 인간 언어를 사용하면서 인간 언어로 자기를 이해하고 세상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악한 자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다 할 때 여기 ‘너희’ 나오죠. 결국 요한일서에서 두 그룹이 생겨요. 빛에 속한 자, 너희. 어두움에 속한 자, 저희. 저희와 너희의 구분, 그 구분은 바로 낯선 언어에 의해서 구분되는 거예요. 인간의 언어로 해서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들어오면서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가져야 돼요. 그러면 낯선 언어에서 나를 지칭하는 게 있느냐? 나를 지칭하는, 실질적으로 나라는 개체를 지적하는 그런 언어가 낯선 언어에서는 있느냐? 없습니다. 없어요. 그럼 낯선 언어에서는 뭐가 있느냐? 아들이 있어요. 아들이 있고 자녀가 있어요. 아비가 있어요. 나는 없어요. 인간세계의 언어에서 나는 있습니까? 있죠. 나라고 하는 여러분들이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럼 너는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너라고 하는 거예요. 늦게 온 너. 여기 앉아있는 나.
아주 쉬운 예로 하면 인간 언어에서의 남자와 여자는 개체가 있어요. 여자는 상대적으로 약간 키가 작고 남자는 상대적으로 골격이 있고 키가 크고 근육이 발달하고. 여자는 아기 낳는 데에 적합한 신체구조, 이렇게 대응하는 개체가 있어요. 대응하는 개체가. 그런데 낯선 언어, 주님의 언어에서의 여자라 하는 것은 신부 전체를 여자라 하고 남자는 누구밖에 없는가? 예수님밖에 없어요. 완전히 다르죠.
그래서 내가 남자인데 낯선 언어,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신부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나라는 남자에서 예수님의 신부가 되려면 어떤 경로를 거쳐야 되는가? 내가 이 땅의 낯선 언어에서 남자라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게 제거대상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낯선 언어가 해석하려면 어떤 작업이 진행되느냐 하면 인간의 언어 개념들이 전부다 delete, 삭제되고 삭제되고 연이어 삭제되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 되는 거예요. 나도 삭제되고 너도 삭제되고. 우리와 그리고 어두움의 세계에서 저희로 구분되는 겁니다.
어쨌든 그 기본은 뭐냐? 인간은 끝까지 해석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해석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해석할 수 없으니까 예수 믿는 것도 거짓말이죠. 결국 예수 믿는다, 누구를 믿는다는 그 인간 언어의 끄트머리에는 반드시 누가 있느냐 하면 어떤 것을 믿음으로써 이익은 내가 챙긴다, 믿는 나한테 이익이 온다는 그 개념이 달라붙어 있어요.
요한복음 11장 50절에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그다음에 뭡니까?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그 당시 대제사장 중에 한 사람인 가야바가 이야기한 거예요. 한 사람 죽여서 우리 모두가 이익을 얻자, 이 이야기한 거거든요.
그 이야기했는데 요한복음은 51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되어있어요. 미리 말씀하시는 것이라.
인간의 언어에서 그것은 반드시 언어를 사용하는 자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식으로 그 입에서 인간의 언어는 출발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가게 손님이 온다. “어서 오세요” 했다. 말 나갔죠. 그 이익은 누구한테 돌아옵니까? 손님한테 옵니까, 나한테 와요? 나한테 오잖아요.
교회에서 “성도 여러분, 저를 위해서 축복해주세요. 제가 목사로 잘 되기 위해서 기도해주세요.”라고 했을 때, 그걸 분석하게 되면 이익은 누구한테 옵니까? 목사 본인한테 오죠. 목사 본인한테 와야 됩니까, 안됩니까? 안돼요. 왜냐하면 목사라는 개체가 자기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안돼요. 목사, 장로 이거는요. 그때 그때 달라요. 고정된 자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 목사가 갑자기 자기를 고정화시켰어요.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줘야 됩니다.” 낯선 언어에 의하면 이래요. “네가 뭔데?” 이게 낯선 언어에요. “그럼 안도와주면 어쩔 건데?” “안 도와주면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고 안 도와주면 이 동네에 성역화가 안 되고.” 이런 소리를 또 한단 말이죠.
주님은, 안 도와줘도 이미 어두움이야. 그리고 빛의 세계는 안 도와줘도 빛이야. 네가 왜 뭔데 끼어들어, 네가! 그 유명한 말 있잖아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영탁이가 한 말이죠.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네가? 자꾸 십자가 앞에 얼쩡거리지 마. 너! 낯선 언어만 이야기 해! 인간의 언어로 남들을 설득시키고 납득시켜서 구원시킬 생각하지 말고 낯선 언어만 내뱉으라고요.
왜? 예수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인간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낯선 언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본인들이 열심히 살려고 애쓰고 애 키우고 바르게 하는 그것을 예수님 말씀에 의해서 낯선 언어는 하나씩 하나씩 전부다 delete, 제거해나가는 거예요. 존 윅이다. 존 윅 모르죠? 킬러. 오늘은 저기 죽여 버리고 내일은 저기 쏘아 죽이고.
주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에요.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에요. 살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끝까지 악착같이 우리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유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뒤에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이 오신 곳은 적이 있는 곳이라 했어요. 예수님은 적이 있는 곳에 왔어요. 적이 있는 곳에 와야 인간이 상상도 못한 전쟁이 일어나거든요. 영적 전쟁. 적이 있는 곳에. 인간의 적은 자기한테 손해를 입힌 대상을 적이라 보는데 하나님의 적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적이에요. 그걸 인간들이 몰랐던 거예요. 손 들고 ‘구원받겠습니다.’ 하면, 손 내려! 어디 적이 구원을 받아? 내가 어디에 속했는가를 알아야 돼요.
지금 이런 이야기가 전부다 요한일서에 다 나오는 이야기에요. 19절 같은 경우에,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19절에 나오죠.
이 말을 한번 들어보세요. 이 말이 인간의 언어로 말이 안돼요. 말이 안 된다고요. 우체국 어디 있습니까? 미장원 옆에. 미장원 어디 있습니까? 우체국 옆에. 이거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그들이 나간 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음이라. 왜 나갔느냐?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게. 참…. 그들이 왜 나갔습니까?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갔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나갔으니까.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게?
이 그림을 다시 보세요. 이 그림이 빛이 오기 전까지는 어두움도 없었어요. 어두움도 없어요. 그냥 인간세계에요. 인간세계는 인간의 언어가 통용되는 거예요. 인간의 언어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구약 시대에 그들은, 구약이 아니라 성경이죠, 성경을 뭐로 이해했습니까? 인간의 말로 이해를 한 거예요, 구약을. 이걸 지켜서 우리에게 유익이 주어지잖아요. 유익은 이 세상 삶뿐 아니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포함되겠죠. 성경을 주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라. 우리가 얼마나 거룩할 수 있고 얼마나 선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성경을 줬다는 거예요.
이렇게 성경을 해석했던 그들 손에 누가 죽었어요?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예수님 돌아가셨죠.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역시 인간의 세계는 그냥 인간의 세계에요. 예수님 까불다가 잘 죽었다, 이래요. 인간의 세계에요. 인간의 언어 세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여기서 부활되었어요. 부활되고 나니까 여기서 갑자기 뭐가 생겼어요? 평소에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일리가 있는 게 아니고, 인간에 의해서 배척받은 그 분이 그 말씀이 유일하게 실질적 현실을 영글어내는 거예요. 진짜 현실, 진짜 세계는 예수님의 언어에 준해서 퍼지게 되어 있어요, 이게. 아, 이거 진짜… 소름 돋지 않습니까.
내가 인간이 서로가 알고 있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어두움이며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내가 뭐 한 것도 없어요. 그냥 사람이 납득되고 이해되는 말을 사용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해석하지도 못하고 해석 못했기 때문에 믿지도 못한다는 대상으로 규정받게 되는 거예요.
뭘 알아야 믿지요. 알아야. 해석이 돼야 분석이 되죠. 해석도 안 되는데 뭘 믿어요. 가짜 예수만 만들어놓고 믿을 뿐이죠. 가짜 예수만. 인간끼리 통용되는. 예수님 참 좋은 분이다. 뭐에요, 그거? 좋은 분이면 십자가 죽었어요, 그래? 좋은 분이면?
4대 성인(聖人)이 있는데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가 거기 왜 들어갔는지 몰라, 공자, 뭐 부처, 4대 성인 중에 예수. 무슨 이런 말이 다 있어요? 4대 성인을 손에 꼽을 때 사람들이 속이고 있어요. 5대 성인을 배후로 깔고 있는데 5대 성인이 누구냐 하면 본인들이에요. 이유가 뭐냐? 4대 성인을 존경한다는 그 자체가 내가 얼마나 존경스러운 대상이냐, 이런 뜻이에요.
주일 낮엔가 그런 이야기했죠. ‘나는 아버지, 어머니 존경합니다.’ 이리 와. 너 아버지, 어머니 존경하는 거야 아니면 아버지, 어머니 존경한다는 자신을 존경하는 거야? 분명히 해. 인간의 모든 언어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언어를 타인에게 말하게 되어 있어요. 발설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그 유익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13절의 ‘악한 자’. 그 악한 자가 누구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악한 자죠. 그럼 누가 예수님을 모르는가? 기존의 인간 언어의 개념을 굳게 쥐고 있는 인간들은 예수님에 대한 해석이 불가능하죠. 악한 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다 악한 자에요.
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여기 흉악한 자가 등장하잖아요. 흉악한 자.
그런데 흉악한 자가 흉악한 자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거해야 돼요? 너희 속에 거해야 돼요. 너희 속에. 그럼 예수님 돌아가실 때까지 너희는 없어요. 없는데 빛이 등장하면서 여기서 성령의 기름 부음, 뒤에 계속 나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오게 되면 이 빛의 세계에서 너희가 등장해요, 너희가.
이 너희는 나를 말하는 게 아니고 어떤 position, 위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자녀, 아비, 형제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았다'가 되는 그런 새로운 집단이 등장합니다. 이 집단의 특징은 뭐냐? 낯선 언어를 이해한다는 거예요.
낯선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 빼놓고 모든 것은 악한 자라는 사실을 이해했을 경우에, 비로소 그 사람은 낯선 언어의 암호를 해독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해석한 거예요. 해석하니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죠. 비로소.
15절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여러분들이 이제는 인간의 언어 말고 낯선 언어로 보시면 비로소 여러분들이 이게 해석이 됐죠? 지금 강의한지 몇 분 됐는데 아직도 해석 안 되면 곤란한데…. 해석됐죠? 여기서 이 세상이 뭡니까? 인간들의 언어체계에 의해서 현실이라고 규정된 모든 것, 이 세상입니다. 수요 설교에 따르면 이 세상이 뭐냐? 과거의 나를 다시 소환하는 모든 것들이 이 세상이에요.
‘나’가 없는데 내가 있어버리면 나의 유익을 챙기게 되어 있어요. 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전쟁에서 예수님과 이 세상의 전쟁에서 나는 이미 악한 자에 속하고 이 어두움에 속했거든요. 어두움에 속한 자가 굳이 어두움에 속한 중에 하나인 나를 굳이 내가 부각하겠다는 그 저의가 뭐에요? 그거 잘못된 거잖아요. 어두움에 속했으면 군소리 하지 말고 어두움에 속하면 되는데. 어두움에 속했지만 나는 좀 특별나야 돼, 이렇게 나오면 그거는 어두움이 아니죠. 그거는 회색이고 옅은 거죠. 어두운데 약간 어둡든지 이런 거죠.
그래서 우리 성도는 두 가지 해석의 대상이 되는 자가 성도에요. 낯선 언어에 대해서도 대상이 되고, 인간 언어에 대해서도 대상이 되고. 그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자가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에.
기름 부음은 성령을 말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성령으로 일했고 그리고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을 친히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오실 때의 과정과 가실 때의 과정, 그 모든 것이 성령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성령 안에.
성령은 이 빛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자, 빛의 세계인데 인간의 언어로 보면 이게 빛이 아니고 한 남자의 죽음이에요. 한 사나이의 죽음. 그냥 죽음이에요. 이게 뭐처럼 생겼죠? 피라미드에요. (피라미드 안에) 왕의 묘실이 있고 길을 내려가면 또 하나 방이 있고 위로 난 미로 따라 또 방이 있고. 피라미드 밖과 통하는 길이 난 쪽엔 북극성이 있습니다. 피라미드는 죽음을 관리하는 거예요.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면 가운데 묘실에 왕의 미라가 있거든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왕의 묘실에 가서… 북극성, 우주의 고정점. 북극성은 항상 한 지점 북쪽을 가리키게 되어 있어요. 이걸 옛날 고대인들이 알았던 거예요. 중심, 변하지 않는 고정점으로 왕의 죽음은 그쪽으로 빠져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왜 이런 아이디어가 있느냐 하면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이 인생 경로를, 우주가 동그랗다면 다른 것은 변화하지만 고정점만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죠. 안 변하죠. 그래서 진리라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으니까 그 진리를 찾아서 그 왕의 죽음과 진리를 연결시키려 한 것이 피라미드의 건축 목적입니다. 죽음을 다루는 겁니다. 죽음 처리죠.
이게 인간의 어디서 나온다고요? 인간 언어체계에서 나온 거죠. 언어에는 개념들이 있고 사상들이 있고 전통이 있고 과거의 지식들이 거기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러면 여기서 주인공이 누구에요? 이 죽음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이때는 왕이죠. 임금이 그렇다는 말은 임금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백성들도 이 코스를 따라서 영원한 우주의 중심, 영원히 변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그 지점에 우리도 갈 희망을 얻겠죠. 왕이 먼저 가면 뒤따라가면 되니까요.
이게 인간의 언어에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자세 또는 태도를 나타내주는 겁니다.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인간이죠. 그런데 이 주인공이 인간세계, 언어세계에서의 주인공이 누구를 죽였어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죽였죠. 그러면 이런 식으로 인간을 주인공으로 여기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뭐가 됩니까? 적이 되는 거죠. 왜? 죽였으니까. 피 흘려 죽였으니까. 그동안 인간의 과학, 철학 수고 많이 했다. 수고 많이 한 거예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데에 아주 열심히 노력을 다했어요.
지금은 피라미드 안하고 화성, 달로 가죠. 냉동해서. 나중에 과학이 발달해서 다시 해동시키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모든 내장은 전부 로봇 기계로 바꾸고, 머리는 AI 인공지능으로 바꾸고 나머지는 기계로 바꾸든지 아니면 기계를 통해서 새로운 줄기세포 DNA로 교체해서 두 번 살고 세 번 살고. 삼천갑자 동방삭이처럼 계속 계속 살고. 지구가 환경 오염되면 화성 가면 되고, 화성 다 되면 달 가면 되고, 안 그러면 또 목성 가면 되고.
주인공이 누굽니까? 본인의 유익이죠. 본인의 유익인 거예요. 그래서 성경 해석 할 때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해석하는 그것이 바로 이단이고 그게 다른 복음이죠. 끝까지 자기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끝까지. 이거 뭐 말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하느냐? 적이 있는 곳에 보냅니다. 아버지가 아들예수님을 적이 있는 곳, 적이 우글거리는, 뱀이 우글거리는 한복판에 보낸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로 하여금 그곳에 보내야 비로소 12절 ‘죄’가 뭔 줄 알고 13절 ‘악한 자’가 뭔 줄 알고 14절 ‘흉악한 자’가 뭔 줄 알고 15절 ‘이 세상’ 자체가 이것은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성도를 통해서 증거 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주 치밀해요. 그래서 성도는 인간의 언어도 알고. 열심히 학교에서 배웠으니까 뭐 다 알죠. 우리 손녀도 알아요. 수시로 만나면 물어요. 칠 일은? 7. 칠 이? 14. 칠 삼은? 21. 계속 물어요. 기초를 못 따라가서 빨리 따라 붙여야 되니까. 왜? 인간 언어를 알아야 될 게 아닙니까, 인간 언어를.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야 돼요.
그다음에 낯선 언어도 알아야 돼요. 그 틈바구니에 뭐가 있다? 피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 인간 해석은 결코 낯선 언어의 해석을 못한다. 그래서 비로소 이 세상은 어둡고 이 세상의 악한 자가 누구며 흉악한 자가 누구며 죄가 누구인가를 예수님의 관점에서 성도를 통해서 드러내겠다는 것이 요한일서 초반의 흐름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