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1a 부산강의 : [시편]61(45:10)-부적
20230911a 부산강의 : [시편]61(45:10)-부적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45편,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라고 시작이 되지요. 왕이 너무 좋아서 술술 나온다 이 말이에요. 내가 도저히 멈출 수 없다. 왕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는 자체가, 나는 너무 기분 좋아서 왕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체가 너무나 영광스럽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냐? 자기 자신을 잊을 정도로. 쉽게 말해서 왕이 계시고 그 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그 위치에 있다는 것이 더는 다른 소원이 없을 정도로 최상의 기쁨을 나는 갖고 있다는 그런 뜻이에요.
2절에 보면,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이 왕의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왕이 있다는 것은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 하나님 여기 있어’라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을 주었으니까 왕을 분석하고 왕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이해하는 거예요?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돼요. 왜냐하면 왕은 하나님이 하는 일을 그냥 그대로 인수인계 받은 자로서 이스라엘에게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일반백성들로 하여금 바로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과 연락을 취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언약에 의하면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과 인간은 떨어져있기 때문에 연락이 안 됩니다. 연락이 되려면 언약으로만 연락이 되는데 언약도 이 백성이 언약을 다루거나 언약을 사용해서 연락이 되질 않아요. 언약은 하나님과 왕 사이에 맺은 언약, 이 언약을 성경에선 뭐냐 하면 이걸 다윗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윗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왕을 통해서만 일하고 일반인한테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이에요. 이 이야기가 새삼스럽지 않는 이유가, 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나왔지요. 왜 많은 사람들에게 모세만 시내 산에서 불러 내세우는 이유가 뭘까요? 그냥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만나면 될 텐데 왜 모세만, 여호수아도 아니에요. 여호수아는 산 중턱에서 머물러요.
모세만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 위로 향하여 생각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진짜 하나님의 모습과 다른 정도가 아니고 대치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틀리는 정도로 아니고 정반대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좀 지식이 모자란다. 그러면 아는 부분은 놔두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나가면 점차점차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잖아요. 그런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본성은 이게 대립이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을 열심히 알아서 구원받는 건 없어요.
뭘 알아야 되는가?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대립이 된다는 것을 눈치 채야 되지요. 우리 자신이. 반대가 돼 있는 겁니다, 반대가. 그러면 시내 산에서 모세가 올라갔다고 내려오면서 받아놓은 게 뭐냐? 그냥 빈손으로 온 게 아니죠. 뭘 갖고 왔습니까? 그냥 관람하고 내려온 게 아니고 모세는 뭘 보고 들었습니까? 율법을 보고 들었지요. 그러면 방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여기다가 담자 이 말이죠.
율법의 내용은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본성은 대립된다. 다른 말로 하면 충돌된다는 내용이 무슨 내용이 되겠습니까? 율법의 내용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나오지요. 율법을 준 이유가 뭐냐?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저주받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우리는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야금야금 알아 가면, 야금야금 아니고 알음알음, 알음알음 알아 가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있으리라. ‘옳고 옳은 것만 계속 누적을 시키고 중첩을 시키면 하나님께 도달되리라’라는 생각이 순진한 우리의 생각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툭툭 던져준 그 율법과 말씀이 이거는 알음알음 점점 더 하늘나라에 가까이 가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우리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해서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 하나님에 좋은 쪽이 뭐냐? 인간을 저주해서 하나님이 뭘 그렇게 기뻐하느냐? 그 인간, 인자 같은 것 밟아서 시편 8편에 나오는 말씀, 그 아무것도 아닌 인자를 밟아서 주께서 얻고자 한 게 뭐냐? 그것이 바로 오늘 시편 45편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진노할만해서 진노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무턱대고 인간보고 진노하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진노할만해서 진노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진노해야 될 이유가 현재 우리 몸에 장착돼 있지요. 우리 마음에. 장착돼 있으니까 진노할 것 아닙니까. 그럼 우리 마음속에 내 속에 뭐가 있는데? 나는 내가 있는 데 나는 그냥 순수한 데 난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데 나는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데 왜 나보고 진노하지?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악마가 들어있어요.
여기 오늘 45편 3절을 보겠습니다.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그다음에 5절에 보면,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인간을 통치하고 다스리느냐, 라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의 움직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움직이느냐를 보여주는 거예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왕에 대한 계약이에요. 다윗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왕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화살을 갖고 있고 날카로운 칼을 갖고 있는 거예요. 칼, 화살 무슨 용도입니까? 무나 깎아먹는 칼이에요? 왜 있습니까? 이 지상에 하나님의 원수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살기 바빠서 자기체면 지키기 바빠서 하나님의 원수가 이 땅에 있다는 것은 우리는 전혀 관심사도 아니에요. 나만 편하고 나만 행복하고 나만 살기 좋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래놓고 ‘하나님, 저 어때서요’ 이래 나온다고요. 하나님은 원수를 향하여 공격하는 데 소위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나는 나만 편안하고 나만 안정되면 상관없다는 겁니다.
7절에 보면,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돼 있어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히브리서에 예수님을 보낼 때 이런 취지로 보냈다는 게 나옵니다. 히브리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히브리서 1장 9절에 보면,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라고 돼 있지요.
그러면 시편 45편에 나오는 왕은 누굽니까? 제가 히브리서까지 소개했으니까 아시겠지요. 누구에요? 예수님이죠. 히브리서에선 예수님을 두고 기름 부은 자 메시아라고 했으니까 기름 부었다는 말은 동류보다 더 뛰어나단 뜻이에요. 하나님의 통치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가 바로 장차 오신다는 겁니다. 숨어있는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으로 오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실 때 뭐 하러 오신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대적을 쳐부수기 위해서 오시지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와 한 통속이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이 칠 때 원수를 찾아낼 때 어딜 찾아내겠습니까? 노인정에 가서 이 원수야 하겠어요, 안 그러면 북한에 가서 원수야 하겠어요? 그 원수를 찾아내는 발췌하는 그 장소가 어디겠어요? 바로 우리 마음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관심 없으니까.
‘하나님의 원수, 당신이 하세요. 나는 관여 안 하렵니다’라는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나는 내 원수만 아니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는 일절 나는 생각을 끊어버리겠다는 거예요. 아침에 출근했다. 하나님의 원수 찾으려 출근합니까? 어때요, 무엇 때문에 출근합니까? 할머니가 되어 손자 본다. 손자 안에 하나님의 원수 찾기 위해서 손자 봅니까?
모든 목적이 내 행복과 내 안위와 내 생존을 위해서 그냥 질주하고 거기에 매진하는 것, 그게 바로 그런 나를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우린 하질 않고 있어요. 말씀을 안 봐서도 그렇지만 말씀 봐도 마찬가지에요. 도대체 우리의 정신머리가 나한테만 꽂혀있어요. 하루 스물네 시간. 심지어 스물네 시간이 말이 맞는 이유가 밤에도, 심지어 내 의식에 없는 꿈에도 나한테 꽂혀있어요. 내가 얼마나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가, 거기에만 몰입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여기 시인은 여기 신앙인은, 성신 받은 신앙인이죠. 성경을 썼으니까. 지금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왕, 심판주 되심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이거는 감사하고 영광스럽다고 시작하는 거예요. 말이 막 술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1절에 필객이, 전문적인 글쓰기의 붓과 같이 내 말은 그냥 미끄러지듯이 쏟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멈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시편 45편에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하나님의 영광되시는 심판주가 갖고 있는, 심판주로 지니고 있을 그 위엄, 영화로움, 압도적인 권위성 이 모델을 시편 이 사람은 어디서 찾는가 하면 솔로몬에서 찾습니다. 솔로몬 왕이 지니고 있는 영광은 압도적이에요. 동류들 보다 다른 왕들 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겁니다. 그 화려함이.
솔로몬 왕은 어디 속하느냐 하면 다윗언약에 속합니다. 솔로몬의 아버지가 누구냐? 솔로몬의 아버지는 다윗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아버지는 다윗언약이에요. 논리가 좀 비약됐습니까? 솔로몬의 아버지가 다윗언약이에요. 다윗의 육신으로서 다윗과 밧세바를 통해서 솔로몬이 나왔지만 여기서 육신을 제쳐야 돼. 육신 노선을 제쳐야 돼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10절에 나옵니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찌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찌라“ 네가 육신적으로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 아버지 잘나서 내가 잘났다. 우리 아버지 없었으면 내가 없다, 라는 그 노선 있잖아요. 육적인 노선, 할아버지가 아버지 낳고, 아버지가 아들 낳는 그 노선 알지요. 이 신체 노선. 그 노선에서 벗어나야 돼요. 그 집구석, 집안 노선에서 벗어나야 돼요. 이게 언약의 위력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 누가복음 18장에 나왔잖아요. 영생? 너 영생 원해? 그렇다면 네 형제, 네 가족 다 포기할 수 있느냐? 주님이 계속 그렇게 묻는 겁니다. 전토 그런 건 물론이고 땅, 기본이고 가장 끊을 수 없는 것 네 가족으로부터 네가 떨쳐 나올 수 있느냐? 네 육신으로부터. 더 간단하게 말해서 너는 네 육신을 포기할 수가 있느냐는 거예요. 네가 지닌 육신은 누가 준 거예요? 육신의 부모가 준 거잖아요. 육신의 부모가 준 게 있다 이 말이죠.
인간은요 부모의 육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요.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집 나가고 도박하고 술 먹고 그러한 아버지를 부정해도 자기가 갖고 있는 육신의 반이 누구 것입니까? 누구한테 물려받은 거예요? 50퍼센트를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예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피부가 안 좋아요. 저도 피부가 안 좋아요.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내 안에 아버지가 피부로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내 피부에서 내친다? 결론은 빤하지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주님께서 왕이 되셔서 나를 죽여 버리면 되지요. 나는 내가 죽을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자살한다고 죽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나라는 것이 육신의 부모가 있는 그 바탕 위에 내가 형성되니까 나는 포기 못합니다. 포기 못하면 이것은 그냥 다윗으로 살지 다윗언약 속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에 못 들어간다. 이게 원래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인간도 구원이란 것 없고요, 어떤 인간도 영생이란 없어요. 왜냐하면 창세기 33장 22절에 선악과는 따먹었어요. 선악과는 따먹었어도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데 주위를 해야 돼요. 거기에 주목해야 돼요.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누가 부추겼어요, 배후에서? 악마가 부추긴 거예요.
그래서 악마는 인간아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실행에 옳기라는 거예요. 악마의 이야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 할 수 없는 건 안 되니까 할 수 있는 건 행하라, 멈추지 말고.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뭐냐? 처음에 인간이 했던 건 뭡니까? 선악과 따먹은 거예요. 근데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주님께선 뭐냐 하면 최초의 율법이죠. 하지 마라가 율법입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그때부터 뭐가 됐습니까? 원수가 되었지요. 원수에게 돌아갈 몫은 뭐냐? ‘영생은 없다’에요. 천국 복음은 없다. 천국의 낙원은 없다. 이게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단호한 조치입니다. 그게 인간만 본 게 아니고 인간 배후의 뭐도 봅니까? 영원한 원수인 마귀도 같이 너는 생명 없어. 그걸 지옥이라 하는 거예요. 지옥에는 생명나무가 없어요. 이것 처음 들은 것 아니죠? 아시지요.
이 세상에는 생명나무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더 오래 살려고 해요? 우리 마음속에 뭐가 뒤틀려있는 거예요? 왜 생명나무 없어도 인간들은 나만 여기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우기는 그 우김이 도대체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 나는 생명나무 없어도 다시 말해서 나는 진리고 길이고 예수님 없이도 나는 나 혼자 살 수 있다고 우기는, 그것도 방법도 뭡니까? 내 행함으로 내가 살 수 있다고 우기는 그 방식은 누구한테 물려받은 겁니까?
그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잖아요. 부모 없이는 내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주님께선 그걸 아시고 부모를 내치라는 거예요. 자식 낳았다고 좋아하지 말고 자식이 내 죄를 물려받은 거예요. 행함이 이렇게 문제되는 거예요. 로마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구약을 전제로 생각해야 돼요. 이렇게 문제가 큰 겁니다.
인간은 자기 행한 건 생각하지 않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 ‘상실’을 생각해요. 상실이란 뜻은 뭐냐? 잃어버림. 처음에 인간은 이 땅에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에 살던 곳이 이 땅이 아니에요. 어디서 살았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살았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쫓겨나는 방식으로 이 땅에 살거든요. 쫓겨났다는 거예요. 배제당한 거예요. 거부당해서 사는 거잖아요.
그러면 처음 인간이 살았던 그 에덴동산의 그러한 모습이 아담의 육신에 새겨져 있어요. 그 아담에 육신에 새겨져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까지 육신에 대대로 이어져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아담은 알지요. 에덴동산 아는데 그 아담 이후의 모든 후손들은 에덴동산을 구경하지 못했지만 무엇은 이어받았어요?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여기 쫓겨났다는 상실된 육신, 나중에 흙이 되는 육신이요.
대구에 화장터가 있거든요. 그게 포화상태에요. 부산도 마찬가지에요. 그걸 다시 이전하는 데 이전하는 데 반대하고, 그래서 또 지하로 만들어서 새롭게 더 설비를 확장시킨다 하는데 확장해봐야 또 언제까지, 꽉 찰 거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아무리 대구시내에 남구에 살든 동구에 살든 어디에 살든 인간이 가는 곳은 어딥니까? 딱 정해져 있지요. 화장터에요. 흙이니 흙이에요. 친구들 다 모입니다. 귀신 되어서. 나 너하고 안 본다. 안 보는 것 없어요. 본인 안 봐도 만나요. 전부 다 귀신 되어서 만나고. 어딜 가?
인간은 단독으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자리는 단독적인 자기가 아니고 쫓겨난 자리에요. 쫓겨난 자리에서 천리만리 도망쳐봐야 갇혀있는 상태에요. 전부 다 똑같은 처지에요. 나 교회 안 나온다고요? 안 나오면 어디 갈 건데? 집에 있다. 집이나 교회나 그게 그거에요. 어차피 생명나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추격대를 보내서 계속 추적하는 것은 나 너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고집이 있어요. 그 고집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유월절 보세요. 천사가 와서 다 죽여 버리잖아요. 맏아들. 어디를 내뺍니까? 북한에 올라갑니까? 천사가 김정은 무서워하겠다. 없어요. 어떤 곳도 피할 데 없습니다. 심지어 요한계시록에 재림하실 때 산아 바위야 덮어라. 나를 숨겨다오. 못 숨깁니다. 지진이 일어나도 안 숨겨져요. 빼도 박도 못하는 확정된 운명이에요.
상실된 그 육신을 우리가 물려받았습니다. 상실되었으니까 그 잃어버린 것이 뭐냐 하면 공백으로 마음 한 구석에 빈 구멍으로 남아있어요. 우리 몸속에. 그 빈 구멍을 채우기 위해서 남들이 갖고 있는 매료성, 매료성이란 것은 매혹적인 것, 세상적인 어떤 유혹거리, 남들이 다이아몬드 있으면 다이아 갖고 싶고 좋은 집 있으면 갖고 싶지요. 남들이 갖고 있는 그 매료성에 욕구를 얻어서 이 빈 마음을 허전한 마음을 메우려고 시도하는 데, 이것 실패입니다.
어느 자식은 이번에 판사 됐단다. ‘그래? 우리 애는 뭘 했으면 좋겠나?’ 그런 소리 들으면 남이 판사가 됐다는 것이 나한테 매력거리가 되면서 갑자기 허한 마음이 더 구멍이 넓어져요. ‘이놈의 자식은 지금 뭐하는지 몰라. 또 게임할 거야’ 이런 식으로 가만있는 데 남한테 뭔 소리 들으면 갑자기 원망이 가지요. 왜냐하면 자식이 내 마음속에 세상에서 들었던 매혹에 충족하면 약간이나마 내 허한 공백이 메워지거든요. 내 속에 있는 마음에 바람 들어오는 구멍이 약간은 메워진다고요. 위로를 받는단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나이가 젊으나 늙으나 싸대는 것은 그 허한 것을 메우기 위해서 오늘도 어디 가서 메우느냐, 노인정 가서 노래교실에서 박수 치면서 메우느냐. 자기의 허함을 상실된 것을 메우는 데 시간과 세월을 그런 데에 소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나이 많아서 이걸 느끼고 어릴 때는 모르느냐? 어릴 때는 그 공백을 부모의 욕망이 다 채워줬기 때문에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부모가 내 몸만 생산한 게 아니고 부모의 욕망이 오늘날 나를 만든 거예요. 요구사항이.
그러니까 자식에게 공부시켜주면서 부모가,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공짜 없다.’ ‘이만큼 공부시켜줬으면 네가 다달이 생활비 내라.’ 말은 차마 우사스러워 못하지만 생활비 주면 세상에 자식 하나 잘 키웠다고 동네방네 자랑질 한다고요. 지가 부모사랑을 아네. 요새 이런 자식 어디 있노. 동네방네 자랑이 아니고, 하면서 자랑 다 해버려요. ‘이런 자식 봤나? 나와 봐.’ 전부 다 자랑질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식이 상실된 부모의 상실을 메우는 그러니까 부모의 상실을 메우기 위한 도구로서 부모 밑에서 얻어먹고 있었던 걔가 ‘내가 언제까지 부모의 상실만 메울 순 없다. 내 상실은 내가 알아서 메운다’라는 것을 어디서부터 아느냐 하면 친구하고 유튜브 하고 채팅하면서 알게 되는 거예요. 부모하고 해봐야 자기의 상실을 메우기 위해서 나에게 늘 정신적인 압박을 가하더라.
그런데 내 친구 보니까 벌써 부모를 떠나서 자아성을 획득하더라. 정신적 자립성, 또는 독자성, 또는 독립성 이걸 서서히 크면서 찾기 시작합니다. 부모는 닭 쫓던 개 신세 된 거예요. ‘키워주니 지 혼자 큰 줄 알고 말이야’ 궁시렁궁시렁 하면서. ‘지 잘나서 큰 줄 아는 모양이지? 내가 너 키우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알아?’
엄마 생일이라고 봉투 주면 오만 원짜리 들어있는 줄 알았는데 수표가 들어있네. ‘그래 네가 아는구나.’ 갑자기 분노를 누그러뜨리지요. 사랑은 돈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돈 말고 말로 하는 것 소용없어요. 봉투 보고, 자식 잘 키웠네. 네가 돈도 없는데 뭐 하려고 나까지 신경 쓰노. 신경 쓰지 말까요? 말이 그렇단 거지.
자립성, 독자성, 독립성, 이것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부모의 이름에 의해서 살다가 내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자립성을 성취하는 거예요. 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날마다 나에게 격려하는 거예요. 전에는 부모가 나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생각하다가 지금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내가 이런 자세로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사회에 타인에게 나설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남에게 내가 내 이름을 보인다는 것은 남에게 보여줄 거리를 얼마나 많이 챙기고 있는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자리를 따로 확보하는 거예요. 내 구역을, 내 영역을. 내 구역을 따로 확보해서 그 안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자립한다는 말은, 내가 나의 평가자요, 내가 나의 심판주요, 내가 나의 구원주로서 살아가는 것 이게 자립성이에요.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부모와 있을 때 부모는 에덴동산을 쫓겨나서 원수가 되었구나. 따먹지 말라는 걸 따먹어서 원수가 되었구나. 하지만 저 어린 자식은 뭘 알겠느냐, 이래 하지요. 그 어린 자식이 점차 크면서 어떻게 돼요?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절대적인 자아성을 구축하면서 제2의, 제3의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작은 원수가 큰 원수가 돼 가는 거예요.
이 자립성을 갖는다는 말은 자체 안에서 의와 사랑을 충당하는 거예요. 외부의 것이 필요 없고 자체 안에서 정의로움과 사랑을 내가 날 사랑하면 되니까. 이걸 충당하는 식으로 자립성을 확보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돼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데 하나님도 간섭하지 마소, 이래 나온다 말이죠.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상실을 자체적으로 맨홀 뚜껑으로 그걸 어떻게 합니까? 덮어버리죠. 덮는 거예요. 상실됨이 없도록.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겠습니다.
인간은 타인에 의해서 자기를 구체화시킨다. 구체화란 뭔 뜻인지 아시죠. 모호하게 알던 자기가 계속 친구를 만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확정될 수 있는 그 작업에 나섭니다. 확정될 때 사회에 나가서 나는 이렇다, 라고 명함깨나 꼭 명함 아니라도 뭔가 나는 이렇다고 규정지어서 보여줄 수 있도록 내부적으로 다지고 또 다지는 거예요. 자기 다짐 작업을 내부적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까진 뭔 뜻인지 여러분 아시겠지요.
여기서 아까 한 것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솔로몬 아버지는 다윗이 아니고 다윗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 솔로몬의 육신의 아버지가 누구냐? 다윗이거든요. 그러면 솔로몬의 아버지가 다윗언약 되려면 다윗언약 쪽에서 들어있는 어떤 분이 누구를 가위표해야 돼요, 누구를 제거해야 됩니까? 다윗을 제거하고 다윗을 통해서 다윗의 육신을 파이프로 통해서 다윗언약 되신 분이 원했던 왕이 다윗을 통해서 경유해서 솔로몬이 나오는 거죠.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들이 보게 되면 8절에 보겠습니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음악부터 옷차림부터해서 왕궁의 모든 시설, 그리고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금이 뭐예요? 최고로 귀한 금속이잖아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섰다. 이게 다윗 시대의 정황입니까, 솔로몬 시대의 정황이에요? 솔로몬이 누렸던 그거에요.
근데 이 솔로몬이 누리면서 이게 다 내 덕이라 했습니까, 뭐라 했습니까? 내 덕이 아니고 누구 덕이다? 아버지의 하나님 덕이죠. 진도 빨리 나갈 필요 없기 때문에 한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잠언 1장 1절,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이라 돼 있지요. 솔로몬이 자기가 쓰면서 앞에 누굴 거론하고 있습니까? 다윗이죠, 다윗. 그리고 전도서 한 번 봅시다. 전도서 1장 1절 봅시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지금 솔로몬은 자기가 입은 부귀영화와 모든 영광과 그것은 어디에다 그걸 부여받았나 하면 아버지 다윗과 다윗에게 왕이 되게 하신 다윗언약의 주인공, 하나님이죠. 하나님에게서 제공받는 부귀영화와 지혜를 현재 어디에 도달하고 있다? 지금 나, 솔로몬 나에게 도착한 거예요. 그런데 아까 다윗언약은 솔로몬의 아버지가 다윗언약이 되기 위해선 다윗은 어떻게 돼요? 다윗을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무슨 죄를 범하지요? 간음죄 범하지요. 또 무슨 죄 범하지요? 살인죄 범하지요. 율법에 의하면 간음죄 하나만으로도 돌로 쳐죽어야 되고요, 살인죄는 바위로 던져 죽어야 돼요.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죽어 마땅한 인간으로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 안에 하나님의 적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흐르고 있는 그 다윗을 죽이는 방법은 율법을 주는 거예요. 율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게 되는 겁니다. 그 율법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고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있어요. 요즘 사람들 성경을 볼 이유가 없지요. 스스로 신인데 스스로 자기가 완전한 데 성경 왜 봅니까? 인간은 요즘 사람이나 옛날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스스로 내 안에서 절대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
교회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제도 설교도 했습니다만 ‘하나님이 존재한다’ 그것 안다고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그 남자, 어떤 남자입니까? 사람들에게 얻어맞은 그 남자가 하나님이이에요. 그러면 어떤 교회가 있다 합시다. 그 교회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고 이야기를 하고,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왕으로 계신다고 하지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왕 되심을 진짜 전하는 목사라면 뭘 전해야 돼요? 사람들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된 인간들에 의해서 된 통으로 얻어터진 맞아죽었던 분을 내세우는 설교자가 그 교회에 뭐가 있는 겁니까? 진짜 하나님이 왕 되심을 모시고 있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교회에 온 교인들은 뭐냐 하면 자기가 맞아죽은,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맞아죽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기가 파괴되고 싶어서 오는 사람들이 진짜 교회에요. 내가 파괴되고 싶어서.
‘나 좀 박살내 주시옵소서. 이거 인간 안 되는 노선입니다.’ 왜? ‘부모로부터 온 육신 자체가 본성 자체가 나만 위하여 살아가는 이 본성, 이게 하나님의 원수인데 이 원수 된 인간 어떻게 손 좀 봐주세요. 어떻게 나를 부정하고 나를 박살내는 그런 말씀을 주시옵소서.’ 이게 바로 왕이 살아있는 진짜 교회지요. 내가 부서지도록. 더 이상 나를 꼴 보기 싫은 사람 만드는 것, 나에 대해서 관심 두지 않는 것, 오늘 본문처럼 나를 부수는 그분이 바로 나의 왕인 것을 즐겁게 감사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고마워하는 그 교회가 참된 교회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깨어지기를 소원하는 사람들. 왜냐? 하도 악마가 지독하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악마의 왕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파괴한다면 우린 거기서 뭘 발견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선 진정 진노의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의 화살과 하나님의 칼은 날카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칼로 나를 정수리를 내리치시옵소서.
원래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할 때 뱀이 공격하는 것은 예수님의 발꿈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뱀을 칠 때 뭘 쳐버립니까? 정수리를 아작내는 박살내버리죠. 뱀의 머리를 칠 것이다. 그 뱀의 머리를 치는 그 자리에 자기의 머리를 들이미는 사람, 그게 교회 아닙니까. 그게 교회잖아요.
이건 뺀질이도 아니고, ‘나 좀 알아줘. 목사님 저 좀 알아주세요. 저 사랑해주세요. 바른 인간 되게 해 달라.’ 바른 인간해서 천국 도착 못해요. 다윗을 제거하고 다윗언약의 자식이 돼야 돼요, 우리가. 그러면 이 파괴과정은 필수과정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누구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평소에 누구 챙기는 식으로 산다? 나는 나를 챙기는 식으로 내가 부모로부터도 자립하는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다윗이 그냥 생각이 있어서 ‘하나님 나 쳐주세요’ 이렇게 했던가요, 다윗이 어떻게 해서 솔로몬이란 것이 자기 몸에 생겼습니까? 충돌이죠, 충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언약의 백성으로 만드는 방법은 우리의 본성을 우리가 알아서 고치는 게 아니고 마주침이에요. 충돌이에요.
다윗은 누구와 충돌했습니까? 다윗은 밧세바와 충돌된 게 아니에요. 밧세바는 좋아요. 밧세바는 예쁘고 잘 빠지고 피부도 고와보이고 탐스럽기도 하고 보암직도 하지요. 그러나 밧세바를 건드린 순간 누구와 충돌을 일으켰습니까? 밧세바가 누구 아내였지요. 우리야와 충돌했잖아요. 그 충돌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거예요. 다윗을 다윗언약 쪽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그러니 오늘 시편 썼던 이 신앙인은 주께서 그런 조치를 해준 것에 대해서 무한한 감사를 드리는 거예요. 내가 그냥 있었으면 이거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꺼떡꺼떡 지옥 가는 거예요. 주께서 마주치게 하는 거예요. 그 우리야가 누구한테 맞아죽었습니까? 다윗에게 맞아죽었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한테 맞아죽었어요? 우리한테 맞아죽었지요. 우리 앞길에 내 손에 맞아죽은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그 길이 영생의 길이에요. 내 앞길에. 학교 복도에 귀신 등장하듯이 내 앞길에 나만 아는 나로 그걸 충돌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반복해서 등장할 때 그 사람이 현재 지옥 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천국 가고 있는 사람이에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