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겨울수련회 요한복음(타인의 마을)(1~9강)-재정리
2023 겨울수련회 제1강 요한복음(타인의 마을) - 접점
강의 : 이근호 목사, 정리 : 한윤범 목사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시작한 일이 되지 않고 주께서 시작한 일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대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있기 전에 먼저 계셨던 그 말씀, 우리는 피동적이 되고, 그 말씀이 우리 속까지 빨아 당겨지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생각이 일치한 많은 사람들 !!
요한복음의 핵심구절부터 먼저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0장 20절인데,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라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 인데, 그들이 누구냐는 말이죠.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생각이 일치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굉장히 양식이 있고 상식적이고 서로가 납득이 되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요 10: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그 다음으로는 요한복음 19장 15절인데, 즉 '없이 하소서' 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때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이 사람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의견을 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없애버리세요' 라고, "저 존재를 없애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 그게 다수의 양식이 있는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라는 말이죠.
(요 19:15)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 없이 하소서 !!
그러면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저 분은 아무런 쓸데가 없는데, 그러니 없애버리세요" 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그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 시대의 현장에서 없어도 전혀 상관이 없는, 아니 있으면 도리어 손해가 되는 사람, 그가 바로 예수란 말이죠. 그런데 후대에 가서 많은 사람들이 없애버리지 않고 있어야 된다고 인식을 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뭔가 잘못되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리세요" 라고 했는데, 현재 사람들이 "예수님은 필요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과연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 시대의 현장에서는 없애도 삶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왜 굳이 예수를 찾느냐는 것이죠.
그것은 곧 다른 예수, 즉 가짜 예수를 거론하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물론 소수의 사람들이 "그 사람을 없애버리세요" 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라고 받아들이기 곤란합니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대다수가, 아니 전부가 다 "예수를 없이 하소서"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 나를 만지지 말라 !!
이제 제가 마지막으로 뽑은 구절인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런 많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그들의 주장에 어떻게 대처하셨느냐 하면, "나를 만지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나는 너희들이 만질 대상이 안 된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이렇게 세 가지를 연결시키면, 많은 사람들의 평가에 의하면 "예수라는 분은 있으나 마나한, 아니 꼭 없애야할 대상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나를 믿어야 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단 말이야. 너희들은 내가 없이는 안 돼" 라고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 너희들이 어딜 감히 나를 만져" 라고, 그런데 이것을 누구에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제자들에게 하셨다는 말이죠. "스승님, 스승님!" 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좋다고 하면서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서, "나를 만지지 마라. 너희들은 만질 쨉이 안 돼" 라고, 그렇게 나오신다는 겁니다.
* 그 누구도 나를 믿어서는 안 된다 !!
그러니까 이것은 다음과 같이 보시면 되는데, 의도적으로 오셔서 의도적으로 인간을 기피하시는 분,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란 말이죠. 의도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기피대상이 됨으로서, 이렇게 인간들과의 거리를 띄우면서 무엇을 얻고자 하시느냐 하면, "절대로 아무도 나를 믿어서는 안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서는 안 돼. 나를 믿고자 하지마" 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왜 자기를 믿지 말라고 하시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어느 범주에 들어있는고 하니, 이 '많은' 이라는 것에 소속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많다' 라는 것은 대다수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거의 모든 사람들, 그 대표격이 바로 '많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예수님이 무엇에 들렸다고 했습니까? "저 사람은 귀신이 들려서 미쳤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혼자 나댄다" 라는 뜻이라는 것이죠.
* 요한복음은 '해프닝(Happening)'의 반복 !!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는 예수님을 떠밀고 천대하고,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결과를 낳는 것을 기대하면서 "내가 왔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에 요한복음 전체가 하나의 이것이 되고 마는데, 즉 '해프닝(Happening)' 이라는 말이죠. 해프닝이란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무엇이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것도 아니네" 라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겁니다.
이 '해프닝' 이란 말 자체는 어떤 우발적인 단순한 사고, 사태, 또는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말하고 보니 이벤트는 아닌데, 왜냐하면 이벤트는 인간이 벌이는 것이니 말이죠. 즉 예상치도 못하게 터져 버린 하나의 불길한 사고, 또는 사태, 사건, 그렇게 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프닝으로 끝났다는 것은, "내 그럴 줄 알았어. 별 일이 아니었어" 라고 하면서 쉬쉬하고 넘어가는 것이란 말이죠. 거대한 태평양에 돌을 하나 던진다고 해서, 거기에서 무슨 큰일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뭐가 풍덩 하네?" 라고 하면서 가보니까, 다시 잔잔하더라는 말이죠. 즉 "그럴 줄 알았어" 라고 하는, 그게 바로 해프닝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해프닝을 벌였다고 하면, 그렇다면 인간 쪽에서 매나 독수리와 같은 시선으로 그것을 과연 포착할 수 있느냐 하면, 그런 인간은 전혀 없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도저히 그렇게 포착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벌써 여러 번 말씀을 드립니다만, 인간은 '많은' 이라는 숫자, 이 '많다' 라는 것에서 단독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네가 옳다고 한다면, 그리고 많은 다수가 옳다고 한다면, 그러면 나도 옳다고 인정을 해줄게" 라고, 그렇게 해서 같이 묻어 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이게 실제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구절들을 군데군데 집어넣어서, 요한복음 자체가 그것을 반복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러면 그것이 해프닝의 반복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즉 '해프닝의 반복' 이라는 겁니다.
* 예수님은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줄로 알았다" 라고 해서 교회에 끈질기게 한 5년을 다녔다는 말이죠. 그런데 세상살이를 바쁘게 하다가보니 무엇을 알게 됩니까? "그때 교회에 다녀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순진하게 철딱서니 없이 하나님께 뭔가 얻어 챙길 게 있는가 싶어서 가본 것인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로 끝났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하나의 해프닝으로 간주해서 인간들이 물러서도록 요한복음이 유도하고 있다는 말이죠. 요한복음이란 말씀 자체가 해프닝으로 계속 반복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요한복음은 21장으로 되어있는데, 그래서 21장에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은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라는 것을 제자들이 증명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 우리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가자 !!
그 숫자가 6명이지 싶은데, 그들이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우리가 잠시 예수님을 만나서, 그렇게 3년 동안 하늘나라가 오고 메시야를 만났다는 경험은 하나의 꿈으로 간주하고, 이제 우리의 자리로 원대복귀하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요 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셨다가 다시 원대복귀하고, 또한 인간들은 "예수님을 붙잡았다" 라고 했는데 실패하고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는 말이죠. 그들이 원래는 열두 명이었는데, 나중에는 그 열두 명도 되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한 명은 노골적으로 배신하는데, 물론 처음에는 열두 명이 아닌 한 명이 배신했는데, 그렇게 한 명이 배신하자 나머지 열한 명이 같이 배신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열두 제자의 대표자가 누구입니까? 가룟 유다라는 말이죠. 하나가 배신을 하니까 나머지도 따라간다는 겁니다. '11대1'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우리도 이참에 묻어가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육의 실패가 곧 영의 재료 !!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만남이 실패로 끝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요한복음은 인간의 육에서 시도하는 모든 것을 다 실패로 돌린다는 말이죠. 육에서 시작한 모든 것이 다 실패인데, 그런데 육에서 시도한 실패, 그것이 무엇이 되는고 하니, 그 실패가 영의 소스, 즉 영의 재료가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육에서 실패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재료가 된다는 말이죠. 실패가 없으면 성령께서 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충분하게 실패가 될 때,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 시도한 모든 것이 실패하게 때, 비로소 예수님의 정체가 드디어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늘과 땅은 만나지 않는다. 끊어졌다" 라는 사실이 여기서 먼저 규정이 된다는 겁니다.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을 보면 태초에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는데, 즉 "태초에 말씀이 있다" 라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번 강의에서 어려운 것이 '있다', '많다' 라는 것인데 말이죠. 이게 굉장히 난해하지만, 그래도 쉽게 풀어보도록 제가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성경말씀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다" 라고 하는 것, 그러니 '있음'이 이전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있으니까 첫 번째 있음이고, 그리고 두 번째 있음이 있고, 그렇게 두 번째가 있으니 세 번째도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요한복음 1장까지 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가 무엇이 되느냐 하면, 지금 여기는 구약시대인데, 즉 구약시대부터 말씀이 있어왔다는 말이죠.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도 있지만, 그게 태초부터 줄곧 이어져 왔다는 겁니다.
* 피조물과 창조주는 처음부터 접점은 없었어 !!
그러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가 있는데, 즉 태초가 있는데 그 태초를 하나의 풍선으로 보자는 말이죠. 그러면 태초에 있는 내용이 발사하면, 그렇게 태초가 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태초의 연속성, 또는 태초의 연장으로 계속해서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있으니까, 지금 여기 '있음'의 의미를 알려고 하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 하면, 태초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그 태초의 있음과 지금의 있음이 일치가 되는지, 과연 그것이 동일한지, 그것을 이 요한복음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가 아까 설명한 것처럼,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는 접점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처음부터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는 접점이 있었다는 겁니까? 없었다는 겁니까? 접점이 없었다는 겁니다. 또한 그렇게 접점이 없다는 것을 이 요한복음이 증명하고 있다는 말이죠.
* 피조물의 이름을 짓는 아담 !!
아까 '많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들의 많다는 것은 어디서 나왔지요? 창세기 2장 19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라고 하는데, 그 다음에 아담이 무엇을 합니까? 이름을 짓는데, 이름의 대상이 뭐냐 하면 있음인데, 즉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개구리, 코끼리, 노루, 사슴, 코스모스 등등인데, 이들이 있다는 말이죠.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이름을 지었는데, 그렇다면 아담은 무엇과 함께 있습니까? 아담이 있는 것과 독수리가 있는 것과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아담이 있을 때는 무엇과 함께 있느냐 하면, 아담이 이름을 지은 주인인데, 즉 "이름을 지었다" 라는 것과 아담이 함께 있고, 그리고 독수리나 개구리 쪽에선 "이름을 지음을 받았다" 라는 것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갑자기 여기서 '이름'을 왜 강조하느냐 하면, 만약에 아담이 이름을 짓고 난 뒤에 범죄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담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는고 하니, 하나님이 지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고 지음을 받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 아담이 피조물의 이름을 지음으로서, 그 피조물은 아담에게 어떻게 됩니까? 복속이 되는데,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말이죠. 이름을 지음 받은 개구리는 자기에게 이름을 준 인간에게 예속되고 지배를 당하고 명령을 받는 입장이라는 것인데, 그게 이름을 지어준 자와 받은 것의 관계라는 겁니다.
* 이름은, 곧 운명 !!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창세기 1장에 보면 "다스리고 정복하라" 라고 하는데, 그것을 누구에게 맡겼습니까? 사자나 독수리에게 한 것이 아닌데, 물론 뱀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보고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름을 지음으로서 예속되고 복속이 된다면, 그러면 그 아담의 이름은 누가 지어주었습니까?
아담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지어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에게 자기가 이름을 지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복속이 된다는 겁니다. 그 이름이 주어진 운명 밖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게 태초부터 나온 말씀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부정성(否定性) !!
오늘 주일학교 시간에서도 했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과실은 따먹지 말라" 라고 했는데, 즉 '부정성' 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면, "여기에 계세요", 또는 "물건을 거기에 올려놓으시면 안 됩니다" 라고, 낯선 곳에 갔을 때 그런 주의사항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부정성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KTX를 타보면 승무원이 "신발을 벗지 마세요" 라고 하는데, 냄새가 나니까 말이죠. 그리고 "마스크를 쓰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명령 가운데는 무엇이 들어있다는 겁니까? "이럴 경우에는 허락이 되지만 이럴 경우는 안 됩니다" 라고 하는 한계를 지어준다는 말이죠. 그렇게 한계를 지어주어야 지시와 명령이 그 값을 한다는 겁니다.
* 네가 감히(dare) !!
그런데 마귀의 심정을 이해해보면, 우리가 마귀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하면 됩니까? 그것은 쉽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전부가 마귀니까 말이죠. 마귀의 심정은 뭐냐 하면, '감히(dare)' 라는 것인데, 즉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을 해?" 라고 하는, 이게 마귀의 심정이라는 말이죠. "내가 하겠다는데, 내 돈을 내가 쓰겠다는데, 네가 감히 어디 부정성을 가지고 지적질이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오늘 주일학교 시간에 한 것처럼 표현을 하면, 로봇 안에 아예 마귀엔진을 장착시켜버린다는 말이죠. 두뇌와 심장에 장착하면, 껍데기는 인간인데 그 속은 마귀라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악마가 인간에게 위협하기 이전에 있었던, 먼저 그 악마의 마음을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악마는 무엇을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어라" 라고 했다면, 악마는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아담에게 "너희들은 따먹지마" 라고 했을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시 안에 들어가면 악마의 독자적인 자기 게 없다는 말이죠.
* 인간은 무(無)로 돌아갈 수 없다 !!
벌써 어려운 표정을 하는데(ㅋㅋ), 제가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무(無)로 돌아갈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게 인간에게 가장 골칫거리라는 말이죠. 인간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면, 인간이 범죄를 해야 한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돌아가게 해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언제 말인가요? 인간이 범죄를 했을 때,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했을 경우에만 인간은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인간이 폭삭 망하거나 저주를 받았을 경우인데,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 따먹지마, 따먹어도 된다 !!
악마가 인간을 유혹할 때는, 지금 하나님을 제치고 하는 것인데, 즉 여기서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지시가 '따먹지마' 라는 것인데, 그런데 악마는 어떻게 나옵니까? 그 '따먹지마' 라는 것이 여기서는 '따먹어도 된다' 라고, 그렇게 새로 구분을 짓는다는 말이죠.
말로 하니까 어려워서 그림으로 그려보겠는데, 이렇게 원이 있는데 이 원에 어떤 선이 오는데, 이것을 수학에서는 '접선'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간에 통과하는 것을 '할선'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잘 쓰기 않기 때문에 지우고, 그냥 '접선' 이라고 하면, 그러면 여기는 접점이 두 개가 있고, 여기는 한 개가 있다는 말이죠.
* 예수님만 있고, 인간은 없다 !!
인간은 자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있다' 라고 하는데, 그리고 이 요한복음의 경우에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했으니, '있다' 라는 겁니다. 즉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까, 피조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있는 것을 요한복음에서는 뭐냐 하면, 그게 접점이 안 된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접점이 안 되는 식으로 와버렸다는 것은 끊어버리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조각조각이 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게 되면 인간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원래의 무엇으로 돌아가는고 하니, 있음이 아예 없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죠. 그게 복음이고, 또한 요한복음이라는 말이죠.
제가 지금 진짜 쉽게 쉽게 말하고 있는데(ㅋㅋ), "인간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에서 '있음' 이라는 것은, "예수님만 있지 인간은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지금 이렇게 우리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야말로 잠시인데, 그렇게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두고서 있다고 고집을 부린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가 이렇게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끼리, 즉 많은 다수가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즉 다수의 사고방식인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규명하고 있는데, 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이죠.
* 인간은 '있음' 인가? '없음' 인가?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귀신이 들렸다. 그러니 우리가 그 사람의 말을 왜 듣느냐?" 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 이라는 것에서 '많다' 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많음이냐는 겁니다. 많다고 하는 것은 일단은 있다는 것인데,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없다' 라는 하고, 반면에 인간은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누구의 말이 맞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나름대로 있으니 그 있는 것을 계속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온갖 노력을 모두 다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비굴한 짓, 더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결국 자기가 자살을 해도 안 되는데, 그러니 있음을 없애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죠.
* 야, 모두들 다시 나와라 !!
얼마나 요한복음이 지독한지 모르는데, 여기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죽었어? 네가 지금 죽었다고 해서 피했다고 생각해? 내가 죽은 너희들을 다시 살려낼 거야" 라고 하시는데, 무덤에 있는 자들을 보고 모두 나오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를 들어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가 그만 러시아의 미사일을 맞고 산산조각이 났다는 말이죠. 그렇게 흙이 흙이 되었는데, 그러자 주님께서 "어이, 흙이 된 상병은 여기 나와라" 라고 하시면, 흙이 된 상병은 주님 앞에 심판을 받기 위해서 다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죽은 자나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라고 하는데, 그의 보이스, 세례요한은 보이스라는 말이죠.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게 되면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라는 것인데, 즉 "주님이 끝까지 밟는다. 왜 기분이 나빠? 네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참 불운이었다" 라는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게 불운인데, 태어나지 않았으면 심판도 없었을 테니 말이죠.
주님께서는 "없는데, 그런데 너희들이 왜 있지?"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아니 주님이 우리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들과 같은 인간은 만들지 않았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대화가 전혀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들을 만든 것이 아니야. 너희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육으로 있는 것인데, 하지만 나는 영으로 있는 것을 만들었지, 육으로 있는 것은 만들지 않았어" 라는 것인데, 그렇게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 인간들을 짓밟아나가신다는 말이죠.
* 연결고리, 즉 '체인(chain)' !!
이게 지금 원으로 되어있는데, 온 우주를 제가 원으로 표현했다는 겁니다. 이 원 안에 갖가지의 연쇄 고리가 있는데, 그것을 '체인(chain)' 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데, 이것이 지금 원으로 되어있지만, 이 안에 이런 사태의 곡선이 있을 것이고, 또한 저런 것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이 하나 하나가 모두 다 체인인데, 이것들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의 여력, 경력, 나의 인생사",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켜본다는 말이죠. 즉 '연결' 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수학으로 공식화하면, "y=x²" 라고 할 수 있는데, "y=x³" 라고, 이렇게 되어서 여기에 3이 있고 2가 있다고 한다면, "y=(x-2)(x-3)²" 라고, 이렇게 표현이 된다는 말이죠. 어쨌든 간에 이렇게 꼬물꼬물하면서 있는데, 그리고 우리 인간은 이것이 자기 인생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자기 인생만 다독거리고 간직하고 챙기면서 "내 인생은 내가 산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빨간 것으로 그려보면, 이 원 안에 자기만의 고유인생, 그 고유영역을 동그라미로 표현한다면, 이 전체를 이렇게 와서 잘라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작은 원도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 조각조각, 그 살벌한 마주침 !!
역시 와서 자르는데, 그렇게 자를 때 어디를 통과하는지를 자세히 보게 되면, 여기 2차 방정식에서는 이렇게 통과(수직선) 할 수 있단 말이죠. 그리고 이렇게 통과(수평선)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살벌한 영화 '킬빌'의 칼날처럼 와서 조각조각을 내게 되는데, 그러면서 마주침이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마주침이 뭐냐 하면, 가게 바로 복음이라는 말이죠.
아무리 해도 우리는 그 '나'를 없앨 수 없는데,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자기에게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자기 힘으로 '나'를 없애거나 죽일 수 없으니, 주님이 오셔서 주님의 원초적인 사건으로 해서, 원래 자기가 있던 그 자리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 예수님은 죽음의 절차를 밟으심으로서 !!
원래의 그 자리를 한 글자로 표현하면 '무(無)'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없음' 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자살하고 죽어도 없어지지를 않는데, 그러니 저주라는 말이죠. 그래서 무와 만나야만 하는데, 그렇게 무와 만나서 태초의 처음의 무에서 다시 유가 되는, 그러니까 없음으로 갔다가 다시 있음과 만나는, 바로 그 만남, 그게 곧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복음이란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에 할 수 있고 인간은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그 과정을, 그 절차를 밟았다는 말이죠. 누가 말인가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밀쳐서 그만 예수님을 죽여버렸다는 말이죠.
*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
예수님을 보고 귀신이 들렸다고 해서 죽였는데, 즉 많은 사람들 보기에는 "일개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인간이 그냥 일반적인 정치범으로 죽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고 하면, "나의 죽음은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요 18: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그러니 갑자기 태초에 있는 말씀과 연결을 시켜버리는데, 즉 "말씀대로 하게 하옵소서" 라고, 그것이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유일하게 말씀으로 오셔서 말씀으로 죽으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이 창조 이전인 태초의 상태, 죄가 없던 상태로 다시 '유(有)'가 될 수 있는 길을 열리게 하실 수 있는데, 그래서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죠.
*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 인간도 무, 즉 '없다가 있다' 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그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라고 했을 때, 이게 "없던 것에서 와서 우리가 있다" 라고 하고 싶은데,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반드시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창조과학회의 사람들도 하고 유신론적 철학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즉 "없던 것에서 있게 되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거짓말이냐 하면, 그렇게 없던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 자신이 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에게 이것이 얼마나 모순인지 모르는데, "우리는 없던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라는 말을 있는 인간이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에 속아넘어가면 안 된다는 말이죠. "우주가 진화가 되어서 인간이 출현했다" 라고 진화론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과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주의 나이는 147억년인데, 그리고 지구는 56억년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147억년 전에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해서 진화되어서 오늘날 인간이 출현했다" 라고 그들이 주장할 때, 그런데 이것이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는, 즉 "인간이 출현했다고 말하는 존재가 등장하기 위해서, 진화는 인간에게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한 정답이 없다는 겁니다.
* 우주가 인간을 위해서 아팠다구요?
지금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최종성에 도달할 때까지 무엇이든지 계속 인간은 발달한다" 라고, 얼른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최종성이 발달한다는 그 인간, 그런 말을 하기 위한 인간을 출현시키기 위해서 이 우주는 있다. 그래서 우주가 있어왔다" 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과연 자연이 증명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생각이 그야말로 자기 위주라는 말이죠. 여기서 '자기 위주' 라는 것은 그 심성이 곧 악마의 심성이라는 의미인데, 그렇게 독자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이 우주가 진화되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마지막에 우주가 진화되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기 위해 태초부터 그렇게 우주가 아팠는가보다" 라는 것과도 같은데, 마치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처럼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가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는 진화되었다. 그것이 곧 우주야" 라고 하는 말을 하는 인간을 등장시키기 위해서, 이 대자연이 그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졌느냐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것을 증명해보라는 말이죠. 인간이 뭐라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을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인간이 그런 말은 하지 않는데, "우리가 곧 신이다" 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악마의 심보가 차마 그런 말은 하지 않는데,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많은' 이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거기에 모두 복속이 되어있는데,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런 인간이 과연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요? 예수든 하나님이든 자기를 위해서 믿고 있다는 겁니다.
* 왜 반대하지 못하는가?
요한복음 19장 15절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어떻게 할까요?" 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없애버리세요" 라고 했는데, 그렇게 없애버린다는 것에 다수가 동의를 했다는 말이죠. 거기에 반대한 사람은 없었는데, 만약에 여러분이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하면 반대를 했겠습니까? 반대를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요 19:15)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왜 반대를 할 수 없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의견이라는 것이 없고, 많은 사람들, 즉 다수에 속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남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것을 모방하면서 마치 자기 생각인양 끄집어내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들의 처세술이라는 겁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는데, 예수님을 세 번씩 배신했다는 겁니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라고 말이죠.
* 인간의 이름짓기 !!
인간은 이 무(無)에 대해서, 이 무를 뭐라고 하는고 하면, 그게 바로 공백인데, 즉 빈자리라는 겁니다. 창세기 2장 19절을 보면 나오는데, 인간은 무엇을 한다고 했습니까? 이름을 짓는데, 그러면 이렇게 이름을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무는 공백인데, 그 공백에 이름을 짓는 순간, 이것을 숫자로는 '1'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 }' 라고 하는 것, 이것을 '집합(set)'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공백을 집합화를 시키면 1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세트를 하나 더하면 2가 되고, 또 세트를 하나 더하면 3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이름짓기', 혹은 '숫자짓기' 라는 겁니다. 그러니 숫자가 아무리 무한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름을 짓는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인데, 그러니 그 자기 자신을 없앨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미 이름을 지어놓은 상태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름을 짓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이름을 이미 지은 상태에서 악마와 결탁해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완전히 차단이 되었다는 겁니다. 처음 창조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는데, 즉 원래의 '나'를 잃어버렸다는 말이죠.
* 마귀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
그렇게 원래 '나'를 잃어버렸으니까 좋으나 싫으나 누구와 짝짜꿍 될 수밖에 없는고 하니까, 그러니 마귀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만든 예수, 마귀가 만든 삼위일체를 교회에서는 계속해서 신학이란 이름으로 끄집어내고 있다는 말이죠.
전부가 다 마귀가 만들어낸 개념들이고 단어들이라는 겁니다. 그 어떤 신학, 즉 삼위일체, 신앙고백, 그렇게 고백해서 '나'를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라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 라는 것이 없어집니까?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해서 어디 없어집니까?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지금 주기도문이 반 지나갔다. 마지막 두 절이 남았다" 라고, 그것을 누가 의식합니까? 자기가 의식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끝나고 난 뒤에 "나 오늘 주기도문을 외웠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마귀가 "참 잘했군, 잘했어. 그것이 성도다운 모습이지" 라고 격려를 해준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그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없음과 있음을 이어준다는 겁니다. 즉 "없음에다가 이름을 지어서 그것을 있음이라고 한다" 라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그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 꼬물꼬물 !!
그러면 여기서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것을 행렬로 만든다는 겁니다. 그렇게 행렬로 만들면, 아까 말한 원 안에서 체인(chain)이 생긴다는 것이죠. 미생물 실험실의 꼬물꼬물한 그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여기 원 안에는 김 집사, 최 집사, 박 집사, 그렇게 꼬물꼬물하면서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 안에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렇게 자기의 내러티브, 자기의 인생사를 연결시키고 있다는 말이죠. "나는 이렇게 왔다. 너는 그렇게 왔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나는 이렇게 이렇게 왔다" 라고 하는 특징이 행렬을 지으면서 1에서 2에서 3에서,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의 체인화를 시킨다는 말이죠. 즉 연결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인생사를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연결시키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억' 이라고 하고, 그 기억을 '자아'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아란 없는데, 그냥 두뇌라고 하는 소프트웨어라는 겁니다. 늙어가고 죽어가는 몸은 있는데, 자아는 없다는 것이죠.
* 타인이 다가옴으로서, 생기는 주체 !!
그렇게 없는데, 그러면 '나' 라고 했던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교재의 제목이 '타인의 마을' 인데, 즉 남들이 다가왔을 때 비로소 뭐가 생기느냐 하면, 자아가 아니고 주체가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주체(subject)는 자기 혼자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주체를 만드는 방법은 '백설공주' 라는 동화책에 잘 나오는데, 후처로 온 악한 왕비가 거울을 바라보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거울아, 거울아!" 라고 하는데, 그러면 거울 안에 누가 있습니까? 자기가 있는데, 그게 자기가 만든 조형물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아는 방법은 없는데, 다만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을 '나' 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 개인적인 것을 '이미지' 라고 하는데, 어려운 말로는 '상상' 이라고 한다는 말아죠. 그러면 그 개인적인 이미지를 일단은 '나' 라고 간주하고 가본다는 것이죠.
* 타인에 의해서 다듬어지는 '나' !!
그러면 누구와 대화를 하느냐 하면, 그 이미지는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그 이미지가 타인으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즉 "내가 이렇다" 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수정해준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수정해주는 대표격이 누구냐 하면, 집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거울에 얼굴이 비친 것은 그냥 영상만 비추는 것이란 말이죠. 자기가 마음씨가 나쁜지 좋은지, 자기가 착한지 악한지, 그런 것은 누가 결정해주느냐 하면,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데, 그렇게 우리는 다듬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다듬어지고 있으니, 아버지가 있을 때는 아버지의 말을 듣다가도 그 아버지가 현장에 없으면 다시 아버지가 없는 상태의 자기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버지가 와서 "이리 와봐라. 장난감을 치우라고 했어? 안 했어? 빨리 치워" 라고 하면 얼른 치우는데, 그러면서 비로소 아이는 안심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있음으로서 본래 주체로 돌아갈 수가 있는데, 그런 기회를 주신 아버지에게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 아버지가 원하는 모습으로 무럭무럭 !!
그러면서 무럭무럭 자라는데, 그러면서 무엇도 같이 자랄까요? 그것은 마치 기린 그림에 키를 재고 나서 줄을 그어놓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렇게 줄을 그으면서 "내가 이만큼 자랐구나" 라는 것을 커서 돌아보게 되면, 자기가 3살 때와 4살 때 자랐듯이, 그런데 그것이 육체만이 아니고, 과거의 일기장을 보면서, "내 마음도 이만큼 자라났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자라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 상에 점점 더 합치되는 모습으로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는 타인의 사람이 되는데, 영원히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은 묻히고 만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아버지가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버지가 만든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끝까지 책임지세요" 라는 의미에서, 아버지 앞에 제사를 지낸다는 말이죠. 물론 자기는 집안의 막내아들이기 때문에 상속도 한 푼 받지를 못하지만, 그래도 영원히 아버지 품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제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하지만 그 아버지를 벗겨버리면 자기가 없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나옵니까? "나는 4대째 기독교 집안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이 하늘나라에서 통하겠습니까? 그야말로 택도 없는 소리인데, 그런데 그런 택도 없는 소리가 이것뿐만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2023,02,02 오후 7시 재정리함 - 녹취 구
2023,8,29 오전 11시 20분 재재정리함 - 녹취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