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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18장 5절 (아픈자가 성도) 2300718b-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18장 5절 (아픈자가 성도) 2300718b-이근호 목사

말씀을 대하면 대할수록 우리가 갈수록 불신자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걸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가 신자에요. 왜냐하면 내 행한 대로 용서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때문에. 내가 뭘 회개했더니만 구원받는다 이런 세계는 종교세계죠. 이건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유효한 세계에요.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유효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라는 사실이 누락, 빠져버려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싫어했거든요. 심지어 제자들마저. 십자가라 하는 세계는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인간세계 아닌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게 천국입니다. 부자가 죽어서도 건너갈 수 없었어요. 물론 살아서도 건너가지 못하지요. 죽어서도 건너가지 못한다는 말은 죽어서도 못 건너가는 그 구조가 그 인간이 살아있을 때도 못 건너가는 구조가 이미 짜여져있다는 사실을 죽어서 알게 되지요.

내가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살았을 때 알아야 되는데 그래야 죄 용서가 돼요. 십자가의 효력이 발생돼요. 그런데 죽어서 알아버리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거에요. 모든 인간은 신자가 아니어야 십자가가 빛나요. 주님 홀로 의로워야 돼요. 우리가 예수 믿는 게 의로우면 안돼요. 그래서 믿는 사람도 없어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관계로서 구원 받아요. 주께서 우리에게 넘겨주신 관계.

그게 법이 아니고 그게 바로 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법을 거쳐야 돼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세 가지가 있지요. 다 같은 이야기지만 하나는 언약체결을 했어요. 언약체결. 일방적이죠. 하나님은 일방적입니다. 동의 묻고 언약체결 한 게 아니에요.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너희는 빼도 박도 못한다. 모세언약에서. 그 다음 율법 줬지요. 율법의 핵심이 집결된 것이 뭐냐 하면은 성막이에요. 성막과 그 안에 있는 기능들. 일종의 엔진이에요. 엔진.

엔진이 가동돼야 이스라엘이 앞으로 앞으로 불과 구름기둥으로 갈 수가 있어요. 불과 구름기둥은 성막에서 피어오르게 되어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 다시 말해서 너희와 함께하는 하나님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유일하게 일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약속대로 택한 백성 건지기 위해서 일하셔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7절에 나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 원한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택한 자로 하여금 불의한 자만 만나게 했으니까. 이 세상은 불의한 자만 있으니까. 예수님을 배척했던 그 무리들, 동일한 무리들을 택한 자도 똑같이 만나서 예수님이 당했던 수모와 모멸감을 똑같이 맞보게 할 때 바로 과부의 원한이 주님의 원한이고 주님의 원한이 과부의 원한이고 또 택한 자의 원한으로 동질성을 갖추게 만들어버리죠. 너 나하고 같은 처지야. 원한을 당했으니까. 이 과부가 하소연할 데는 누구밖에 없어요? 하나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누가복음 18장 1절에 9절까지 비유에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유일하게 움직이는 자가 누구다? 과부 밖에 없고 재판관은 귀찮아서 가만히 있는 거죠. 과부만 들락날락하고 과부만 살아있는 거죠. 의미 있게 살아있는 것은 과부밖에 없어요. 원한을 갖고 있는. 그런데 이 원한은 뭐냐? 법으로 적용되지 않는 그 이상의 것에서 발생된 원한. 법으로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고 해서 그렇게 해소될 그런 원한이 아니에요. 법으로 해소될 수 없는 원한.

그러니 이거는 장차 예수님이 오신다는 그 징후에 의해서 징후가 발생되어버린 그러한 비난 같은 거죠. 주님이 이 세상에 안 오셨으면 생겨나지도 않을 그 분통함과 원통함, 절통함을 본의 아니게 지니게 된 사람. 그런 사람이 마지막 때의 신앙인입니다. 여기서 성경에 나오는 공식 하나가 나와요. 그 공식이 뭐냐 하면은 성도 있는 곳에서만 멸망이 생긴다. 성도가 출현하는 곳에만 멸망, 심판이 발생된다. 성도 없는 곳에는 심판도 없어요. 성도 생기면 성도에게 비난했던 자들이 심판받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연동이라고 해요. ‘연동’. 같이 연결되어서 움직인다라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은 갈라디아서 5장 10절 말씀, 제가 감사히 여기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성도를 건드리면 이 소자를 건드리면 곧 나를 건드리는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에 안 보이는 형식으로서 성도와 더불어서 있고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성도고 주님은 안 보이는 방식으로 계시는 거에요.

마치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육신으로 왔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하나님 아버지는 안 보이는 거에요. 그런데 안 보이는 그 아버지가 예수님한테만 보이고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을 전혀 감 잡지 못하고. 그러니까 똑같은 존재 형식을 성도에게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존재 형식으로 연결시켜버렸어요. 주와 함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감 못 잡고 있어요.

성도도 혼자 있고 싶어요. 혼자 있고 싶은데 주님이 귀찮게 주님이 가만두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성도가 성도되는 일이 성도 본인의 과업이 아니고 본인의 숙제가 아니라 주님이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나의 일이 아니에요. 남의 일이에요. 남의 일인데 남의 일 위해서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거에요. 여러분 주민등록에 있는 날짜에 의해서 태어난 거에요.

어떤 아이는 난지 이틀 만에 냉장고 들어갈 운명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비 오는 날 버스 탔다가 지하도 잠겨 죽고. 그거 자기 인생 아니에요. 주님의 인생이에요. 아무리 결혼한 지 두 달 됐다. 여행 간다. 그건 핑계에요. 그런 건 안 통합니다. 치과의사든 한의사든 외과 의사든 그런 거 천국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주와 함께 있을 경우에만 살아있다는 거고 나머지는 그냥 살아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쓰시기 나름이에요.

그래서 수련회에 할 거지만 사람들 수련회 참석 안하니까 미리 해야지요. 주체는 실체가 없다. 주체를 구성할 실체는 아무것도 없어요. 주체는 말씀의 효과다. 외부에서 주체를 만들지 주체 내부가 주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늘 말씀이 주체를 만들어요. 왜냐하면 주체는 상처이기 때문에. 벌어진 자리는 아무것도 없어요. 공백이에요. 만약에 내가 나라고 하는 것은 주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걸 자아라고 해요. 보다 구체적인 것은 수련회 때 하겠습니다.

어쨌든 성도라는 주체는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난 분열 효과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났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성도를 남기고 떠났지요. 성령 받은 사람 남기고 떠난 거에요.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있다라는 말은 우리와 함께 주님이 계시다는 말이 아니고 주와 함께 우리가 있게 됐다 이 말이에요. 그거나 그거나. 그거나 그거 아닙니다. 이게 달라요.

주님이 계시다는 증거 때문에 우리가 발생된 거지 우리 구원할라고 예수님이 계신 거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떠났다는 증거가 우리가 나타난 근거가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떠남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의 긴 그림자가 이 땅에 드리웠죠. 이 땅의 삶이란 죽음의 연속이죠. 죽음의 연속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은 죽음 자체,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살아있는 방식으로 이 땅은 살아있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음의 자기의 과업이 끝나버리면 이 세상은 폭파되어버립니다. 불로서 다 타버려요. 십자가가 살아있는 십자가의 담는 그릇으로서 십자가의 그릇으로서 아직 유지되고 있는 거에요. 십자가가 증거 될 때까지. 그래서 택한 백성 생길 때까지. 예수님이 떠났다는 그 증거물로서 생산되는 성도가 남은 성도, 택한 백성이 계속 있을 때까지 이 세상 유지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온난화 때문에 망하는 게 아니에요. 아직까지 출현할 성도가 남아있다면 세상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게 뭐 온난화 때문에 그렇고 나노현상. 무슨 소리하고 있어요. 전부 다 이거는 이 세상은 인간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걸 성경이 증명해주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 모든 말씀이 우리의 죽음을 확인해주고 유발시키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이게 즐거워야 돼요. 이게 즐거워야 돼요. 나는 죽고 성도로 살아가야 돼요. 나로 살면 안돼요. 성도로 살아가야 돼요. 나는 내가 소중한 사람이고 성도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살면 안돼요. 주님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환경인데 그 환경은 누구와 만난다? 매일같이 불의한 자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모질고 힘든 인생을 살게 합니다.

말 안 통하는 사람과 함께 의도적으로 살게 하는 이유가 주께서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어때? 사는 게 어때?” “떠나고 싶습니다....”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야! 그럼 아직까지 시집 안 간 딸은 어떻게 하고?” “뭐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야!” 우리 보기에는 내 딸이지만 딸은요 엄마가 딸을 생각하는 것처럼 딸이 엄마를 생각 못해요. 왜? 자기는 자기가 우선이기 때문에. 엄마가 괜히 속 닳아가지고 아이고~~~ 하지 자식들은 없어요. 빼먹을 생각만 하지. 얼마나 더 빼먹을 생각. 그 생각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 9절부터 봅시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는 주인공이 뭐라고 했습니까. 불의한 자가 주인공이죠. 불의한 자. 9절부터 14절까지는 이 불의가 이 세상에서는 뭐라고 극단화, 이 불의함이 어떤 식으로 자기를 위장하는가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게 뭐냐? 바리새인이 갖고 있는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 하는 그런 방식으로 불의가 그런 식으로 조작되어있고 조성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리새인은 왜 자기를 의롭다 하느냐? 이것이 집단의 성격이에요. 집단의 성격. 집단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다는 그 말했어요. 인간은 타인으로 인하여 내가 구성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주 짧게 이야기했어요. 설교 시간에. 녹취 보면 나올 거에요. 내 것이 없어요. 남의 것으로 꽉꽉 채웁니다.

그래서 남의 눈치와 시선이 평생 따라다닙니다. 심지어 연세 많아도 눈치 보고 살아요. 자식 눈치 보고 살지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존경받는 어머니,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그것을 유지할려면 나보고 참 존경스럽습니다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는 타인이 내가 관리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정말 나를 잘한다 훌륭하다고 아무도 나를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사람은 타인을 잃어버려요. 타인을 잃어버리면 나를 잃어버려요. 그때는 자살 아니면 우울증 걸리죠.

그래서 나를 나의 가치로 받아줄 사람이 없으면 뭐하느냐? 개 키웁니다. 개. 고양이. 꼬리 막 흔들어주지요. 요 귀여운 것, 요거 귀여운 것. 비로소 삶의 활기가 돕니다. 막 유산 남기고요. 개한테. 미쳤어 미쳤어. 다른 집보다 더 값나가는 사료 막 사주고요. 한약 보약 주고요.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참 이게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선 보는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 남자 5명 여자 5명 나와가지고 영숙, 영호 뭐 이렇게 이름 가명해가지고 사랑의 짝대기 하듯이 하는데 이 나는 솔로에 나오는 5명의 남자 여자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선택되지 않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한다는 거에요. 10명 다. 선택되지 않기 위해서. 왜냐? 왜 그러느냐 하면은 여기 출현하기 전에 전부 다 한 천 번씩은 선택을 했어. 내가 선택한 천 번 중에 그 동그라미 속에 더 나은 다른 사람이 없는가 찾아나왔던 거에요. 다들 선택되지 않기 위해서 딱 견디는 거에요. 하다가 누구 하나 맘에 드는 사람이 등장하잖아요. 누구 하나 선택하면 와르르 다 몰려듭니다. 남한테 지기 싫거든요. 해가지고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자기 빼놓고 모든 게 오락입니다. 인간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 자기 빼놓고 자기한테만 진지해요. 자기 빼놓고 전부 다 오락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어떻고 오락시간하고 있습니다. 자, 집단은 이걸 강제로 이러한 사적인 이러한 오만함을 집단이 다 박살내고 억눌러버려요. 집단. 뭐로 억누르는가? 법으로 억눌러버립니다.

법으로 억누른다는 말은 뭐냐? 너희들 가운데 가장 의로운 사람이 대장질해라 하고 서열이 계급이 맺어집니다. 너희 중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대장질해버려요. 집단의 생리가 그래요. 집단의 생리가. 그걸 구체적으로 하면 집단은 보편적 주체가 되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집단을 하나로 하게 되면 그 하나가 하나의 인간으로 대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사람은 여러 명이 있다. 골치 아파요. 단체로 이야기해요. 단체로 뭐야. 단체로 한사람 다루듯이 그렇게 해야 간단하게 정리정돈이 잘돼요.

예를 들어야 쉬운데 예를 들어서 옛날 60년도 시골에서 농사 짓다가 여자는 공부할 필요 없어. 초등학교만 나오면 돼. 시집이나 잘 가면 돼 해가지고 집에서 농사 지으니까 젊은 아이들이 농사 짓기 싫어하거든요. 힘드니까 농사도 뭐 밭도 넓지도 않고 해가지고 서울로 옵니다. 서울로 가게 되면 그냥 무작정 서울 가지요. 서울 가면 영자도 있고 거기서 나온 게 영자의 전성시대. 무작정 상경을 합니다. 어딜 가느냐? 두 군데 가요. 가발공장과 오라이 하는 버스 안내양.

문제는 가발공장과 버스 안내한다는 것은 집단 속에 들어가는 거에요. 집단 속에 들어가면서 거기서 뭐냐 하면은 내가 원치 않는 법이 그걸 억눌러버려요. 집단이니까. 개인을 용납하지 않거든요. 억눌러버리죠. 억눌러버렸을 때 개인으로 할 수 있는 게 뭐냐? 여기서 빨리 그 집단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겠지요. 억누르니까요. 탈출할 때 그냥 빈손으로 탈출하면 또 어디가야 돼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돈 벌고 나와야 돼요.

돈 벌고 나오는 방법은 뭐냐? 바로 버스 탈 때 동전을 자기 주머니에 챙기는 거에요. 나중에 그걸 알고 버스 회사들이 삥땅하는 아가씨들 조사한다고 인권적으로 문제가 된 거에요. 그런 식으로 인간은 집단속에 돈 벌고 돈 빼먹고 또 다른 집단에 가서 돈 빼먹고 계속해서 자기가 점점 더 돈 많아서 집단의 윗자리에 높은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것을 자기는 성공한다고 보는 거에요. 그걸 누가 그렇게 조작했습니까? 집단이 그렇게 만든 거에요. 집단이. 촌에 있으면 그럴 필요 없어요. 촌에 있으면 부모 말 듣고 착하게 살면 돼요. 착한 순이, 착한 영철이 되면 돼요.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 착함을 인정 안 해요. 권력을 인정해요. 권력을 인정하지 착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18장 9절에 보면 또 비유가 나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이 세상을 주께서 또 비유로 이야기합니다. 비유입니다.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고 비유란 말이죠. 자, 비유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비유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말씀으로 이쪽을 이 전체를 죽이도록 공격하는 거에요. 말씀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공격해서 이 비유의 취지, 나는 너를 공격한다 어디까지? 너희는 이 말씀에 의해서 죽어 마땅해. 심판받아 마땅해 라는 그 취지를 알아듣는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이 이 현재 인간집단은 하나의 집단입니다. 인간집단에 속하지 않고 인간집단의 바깥의 천국이라는 집단에 하나님께서 빼돌려요. 빼돌립니다.

왜 빼돌리냐 하면은 당장 이 비유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대신 예수님 이 땅에 왔다가 이 경로, 아버지께서 빼돌리는 경로를 통해서 아들의 나라, 천국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어 마땅함의 말씀으로 와서 빼돌리는 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의 경로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자신의 경로고 이후에는 성령 받은 자들이 예수님이 앞섰던 예수님의 경로 그대로 밟아서 그대로 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야기할 때 바리새인은 나쁘고 세리는 착하다 이렇게 하면 안 되겠지요.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느냐 하면은 모두 다 나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 다. 모두 다 나쁜 사람인데 그러면 모두 나쁜 사람 가운데서 예수님의 경로를 잘 보여줄 사람은 뭐냐 하면은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말씀과 공격할 취지와 부합이 돼요. 그런데 누가 가장 부합이 안 되느냐 하면은 분명히 모두 나쁜데 그 사회 속에서 법적으로 서열화시켜가지고 나는 착하다고 하는 사람이 등장할 거 아니겠습니까.

왜? 모든 사람이 그걸 부러워하니까. 그 사람이 대표자쯤 되거든요. 집단은 단수로 표현되니까. 하나의 집단 자체가 여러 명이 있더라도 하나의 집단이에요. 마치 다윗이 인구 조사하는 것처럼. 하나의 집단이 된다고요. 하나의 집단이. 이런 이야기가 바로 구약에도 있었어요. 구약. 시내 산에서 율법 주지요. 그 다음에 제사 있지요. 시내 산 12지파 가운데서 누가 대표 지파였습니까? 모세당시에. 모세가 어느 지파에요? 모세가 레위지파죠. 레위지파가 다른 11지파보다 우위에 있었던 겁니다. 레위지파가. 계속 가다가 다윗 등장하고 다윗지파가 유다지파로 바뀌지만.

이처럼 어떤 집단이 되면 대표적인 대표 하는 게 있어요. 대표 하는 게. 그걸 지도자라고 하지요. 어떤 집단이든 간에 그 집단의 성격을 한 몸에 다 합류해서 딱 그 사람만 봐도 우리 집단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한방에 알려주는 그 집단, 표현이 있어요. 그걸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생리에 대해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 자가 누구라 했습니까? 여기에? 11절에 누가 나오지요. 누가 나오지요. 이름이 뭡니까? 바리새인. 바리새인.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가? 하나님은 무시하지 않는데 바리새인 무시해가지고 복음을 모른다고 제가 안양 강의에서 했지요? 하나님은 존경한다고 하면서 바리새인은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누구한테 죽었어요? 바리새인에게 죽었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만해서 죽였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안다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예수님을 죽일 만해서 죽였다는 그 바리새인이 없으면 십자가 사건은 일어날 수가 없지요. 그럼 십자가 안에 어떤 취지가 같이 놓여있다? 바리새인 취지가 같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파악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우리는 모르니까 그걸 미제로 남겨두고 바리새인이 그토록 미워했던 어떤 분,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죠. 바리새인이 그토록 미워했던 분.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바리새인은 뭘 대표하고 있다? 바로 인간세계, 그 당시에 율법과 여호와를 믿는, 하나님을 안 믿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를 믿는 그 집단의 대표자들이 누구냐? 바리새인들이에요. 실제로 그 바리새인의 역사를 보게 되면 에스라, 느헤미야 이후에 그때 성전 있었어요. 이후에 성전 불타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식으로 그 자기 정체성을 유지했는가? 회당입니다. 회당. 예루살렘에 회당이 4500개 있었다는 설이 있어요. 4580개 인가? 엄청나게 많았지요.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교회보다 회당이 굉장히 많아요. 유대인 지역이니까. 회당 중심에서는 오직 말씀 중심이에요. 개혁주의신학같애. 양 잡고 소 잡고 안합니다. 말씀 중심하고 특별히 절기 때 특별한 날 때는 실제로 양고기 먹고. 랍비 복장 이상한 복장 있잖아요. 무거운 옷 걸치고 특별한 복장을 한 제사장 선도해가지고 유대교식 하지만 주로 그들은 토라, 구약성경, 모세율법 그걸 필사하고 그걸 외우고 그걸 하는 사람이 현재 이스라엘 국민 가운데 약 10~15% 돼요. 그들은 군대도 안가요. 안가고 배 째라는 식이에요.

오실 메시아만 기다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말씀 그대로 감람산에 메시아 오게 되면 너희들 다 죽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때를 위해서 기다리는 거에요. 그때를 위해서 그들은 이제 빵 모자 비슷한 거 쓰고 그 다음에 서쪽 남아있는 성전의 터에 완전히 로봇처럼 상체 몸 흔들어가면서 쪽지에 써서 바위틈에 넣어 놓고 흔들고 남자는 한 70% 자리, 30%는 여자는 칸막이 해놓고 있고 해가지고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해가지고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에요. 펭귄 비슷한 옷 입고 시커먼 옷 입고 자기들끼리 돌아다니고. 애는 되게 많이 낳아요. 회당 중심으로 하는 겁니다.

이 회당 중심이니까 그들의 모든 삶의 이상은 뭐냐 하면은 말씀 중심으로 가는 거에요. 여기 바로 이 회당 중심과 누구하고 싸웁니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처절하게 싸웁니다. 처절하게 싸우는 방식이 뭐냐? 너희는 무엇이 절박한지 모른다. 너희는 무엇이 절박한지 모른다. 더 풀이하자면 너희들은 말씀이 너희를 팬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거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성경말씀을 펼 때 성경 말씀을 보지요. 보면 안돼요 들려야 돼요. 성경 말씀이. 시각이 청각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그래야 주체 속에 들어와요.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를 줘팹니다.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모든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잠자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을 이게 자극을 시켜줘요. 모든 말씀이. 그걸 자극시킬 때 나오는 게 뭐냐 하면은 자기의가 나와요. 자기 의. 자기 의인데 이걸 알아듣기 쉽게 하면 자기 변호, 자기 변명, 더 심한 것은 자기 연민, 자기 옹호. 이건 필히 뭐냐? 누구 탓이다? 남 탓으로 돌려가지고 남 탓해버리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여기서 다 깨지는 거에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다 깨져버립니다. 이웃 때문에 내가 조져졌는데 무슨 사랑이 됩니까. 안되지요.

인간은 어떤 조건이냐 하면은 이 죄 많은 인간 속에서 조건은 내가 산다는 것은 남을 미워하는 조건 하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리고 이 말은 같은 말인데요. 남이 산다는 것은 내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럼 피해 보는 사람이 그냥 가만있겠어요? 뭘 하겠어요? 뭘 하겠지요. 뭘 합니까? 로마서 12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여기 원수란 말이 나오지요. 사도 바울이 원수란 말을 언급한다는 것은 인간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복수할 것만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에요.

내가 미쳤지 저런 남자랑 결혼하다니.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이 사라진 적이 없어요. 아이고 부모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고생 20년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나이 40 넘도록 고생하네. 도대체 이렇게 자식 고생 시켜놓고 엄마 아빠 필리핀 놀러간다고? 베트남 놀러간다고? 아이고 자식은 힘들어 죽겠는데 아이고 내 아이는 누가 봐주나. 참 팔자도 좋다 정말. 남들처럼 공부나 좀 시켜주지. 이게 뭐야. 이게. 무책임하게 버려놓고 지는 놀러가고. 나중에 부모 아프면 누가 돌봐야 되는데? 내가 돌봐야 되는데. 전부 다 딜이에요. 딜. 거래하고 있는 거에요. 거래하고 있는 거에요.

나만 낳지 남동생은 많이 낳아가지고 둘이 싸우고 내가 낳지 말라고 했잖아. 어떤 동영상은 이런 게 있어요. 어떤 흑인아이인데 둘이 형제가 있으니까 엄마가 하는 말이 나 임신했다 하니까 아우! 미치겠어. 5살 먹은 애가 둘이 있는데 왜 또 애를 낳아?!! 엄마 미쳤어 정말! 모든 사람은 이기주의에요. 내가 산다는 것은 남에게 피해주는 것이고 남이 멀쩡하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피해를 입은 흔적처럼 느껴지는 거에요. 인간은. 나는 아픈데 네가 왜 웃냐 이 말이죠. 니가 왜 웃어! 나 아프면 너도 아파야지. 이게 가족이지. 제가 얼마 전에 오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한테 이야기했어요 너희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세상에 얼마나 장례식장에서 웃던지 내가 좀 민망했다 하니까 왜? 그때 웃으면 복이 와요 했거든. MBC 코미디 하는데 너무 웃겨가지고 구봉서, 배삼룡이 너무 웃겨가지고 장례식에서 웃음바다 터져버렸어요.

너희가 자기한테 절박한 거에요. 자기의 뭐를 지킨다?? 자기 의를 지키는 거에요. 나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13절 봅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있음에 누가 방해되었다?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았고 훼손되었고 하나님을 공격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었습니다 주여, 이제 주님 앞에 그게 들통 났고 들켰으니까 제가 자백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거기에 반해서 11절에 바리새인 말 잘 들어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비유니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그 다음에 뭡니까? “같지 아니함을”, 그 다음에 뭡니까? “감사하나이다” 개성 있지요.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서열화시킨 거에요. 나는 위쪽에 있는데 쟤는 저 구석에 밑에 쳐박혀있으니까 내가 감사거리가 뭐냐? 내가 저 세리보다 우열하다는 그런 감사거리를 제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보시고 18장 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뭐가 올 때입니까? “인자가 올 때에”. 인자가 올 때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말하고 주님이 생각하는 종말이 달라요. 사람들은 그 동안 역사라는 것에 자연적인 현상에 익숙해져가지고 해와 달이 그대로 있고 인간의 역사가 활동하면 아직 종말은 마지막은 아니라고 여겨요. 자기들이 멀쩡하고 역사가 잘 돌아가고 어제나 오늘이나 해가 그대로 있고 해 뜨고 해 지고 달 지고 달 뜨고 이걸 종말 현상으로 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약속, 말씀에 의하면 메시아가 죽으면 그게 종말이에요. 메시아가 죽으면. 하나님이 죽으면 종말이에요. 하나님이 죽을 때 그냥 죽지 않고 어떻게 죽습니까? 저주 받고 심판받아 죽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죽으면 하나님이 합류한 그 영토 있잖아요. 예수님이 어디 합류했습니까? 인간세계에 합류했지요. 인간세계에 예수님 폭탄 쥐고 터져버린 거에요. 그러면 메시아, 하나님이 없는 곳은 종말이 아니지만 메시아 없는 곳은 종말이 돼요. 메시아 없는 곳. 메시아 없는 곳은 종말이에요. 메시아가 떠나버리면 이미 종말이에요.

무엇이 절박하냐? 메시아가 어디 갔어? 이게 절박한 거에요. 메시아가. 그분은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에. 심판주로 되시기 전에 우선 자기 백성을 건질 구원의 근거를 말씀을 주시고 심판주로 들이닥치는 겁니다. 너희들이 생각했던 너희들이 살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왜 죽어 마땅함을 알게 한 방식으로 성경 해석을 다 그렇게 한 거에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처음에 강의했잖아요. 말씀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우리가 뭐 된다고요? 어느 말씀 지킬게 없지요. 그게 바로 세리가 했던 고백하고 동일한 고백이니 축하드립니다. 죄인 주제에 물 한 컵 마시고 우리나라에 장마에 비가 많이 왔다고 하잖아요. 서울에 비 얼마나 왔어요? 합해서 한 400mm 왔습니까? 400mm왔다 치고 1600mm 안 온 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성에 지하도 물 찼잖아요. 전국에 지하도 물 안 찬 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버스 한 대가 둥둥 떴지요. 3대 4대가 안 뜬 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다 죽어도 할 말 없어요. 그럼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게 하나님이 살려주는 거에요. 왜? 못났기 때문에. 내 힘으로 못 살기 때문에 살려주는 거에요. 내 힘으로 살 어떤 의로운 근거가 없기 때문에. 죄인 주제에 오늘 당장 죽어도 되는데 계속 살려줌으로서 죄 보다 은혜가 더 강하다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게 해주니까 이것이 바로 주께서 성경말씀에 완성된 다 이루었다의 적용 대상이 되는 거에요 이게.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종말의 현상은 성도가 생산된다 에 있어요 성도가. 종말의 현상은. 성도가 생산되는 게 왜 신기한 일이냐 하면은 종말은 모든 인간이 다 죽어야 마땅해요. 다 지옥가야 되는데 천국 가는 사람이 생산됐다는 것은 누가 다녀갔어요. 예수님도 다녀가고 성령이 다녀갔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자기 못난 맛에 살아간다는 이것은 성령이 다녀갔기 때문에 자기 못난 맛에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너 왜 헌금 천원밖에 안했어? 천원이라도 할 수 있는 능력주심을 난 감사해요. 이게 성도 아닙니까. 이것도 알아가지고 돈도 줄이고 가계부 보태고 감사는 감사대로 챙긴다 꼼수 부리지 마시고요. 바리새인은 의롭기 때문에 여기 토색, 불의, 간음, 세리 같지 아니하고 바리새인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종말,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의인이 하나도 없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거에요. 의인은 없고 다 죄인밖에 없다는 종말의 안목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모르고요 토색이 뭔지도 모르고요 불의가 뭔지 간음이 뭔지도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의 본능대로 자기는 그냥 자기가 의로워지고 옆에 있는 세리 보고 복수하고 싶은 거에요. 저 지저분한 것 물 다 버려놨대 이런 식으로 하지요.

여기 13절에 보면 여기 세리의 행동이 뭐냐? 하늘을 우러러 보지를 못하고 뭐합니까? 그냥 가슴을 치지요. 아까 18장 1절에서 8절에 보면 과부는 누구를 찾아 갑니까?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지요. 세리는 찾아갈 재판관도 없어요. 그냥 가슴을 치는 거에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종말론적으로 미리 당겨서 자기가 심판 받아 마땅함을 미리 당겨서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

그러면 사람이 이렇게 정말 아파서 죽게 되게 되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되지만 새삼 내가 살아 왔던 것이 이게 무의미한 정도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의미마저 내가 갉아 먹고 훼방하고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쁜 짓해서 죄인이다가 아니라 나 나름대로의 의미를 바리새인처럼 의미를 챙길려는 이 자체가 주님의 심판과 용서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가슴을 치는 거죠. 가슴 너무 쳐서 멍들고 하지 마세요. 이 몸도 우리 몸이 아니고 주의 몸입니다.

끝으로 14절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게 사랑 때문에 그런데 어떤 새댁이 신랑을 너무 사랑했어요. 해가지고 첫날밤 혼인 치루고 난 뒤에 신랑이 아침에 죽었어요. 하룻밤 지나고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새댁이 환장한 거죠. 환장해서 그 신랑이 너무 좋고 마음에 들어서 잊어버릴 수 없어가지고 신랑의 관을 찾아가요. 신랑 관에 자기가 같이 눕습니다. 누워요. 왜냐? 신랑이 죽었으니까. 나 신랑 따라가겠다고 누워요.

자, 신랑이 왜 죽는지 이유를 몰라요. 이유는 모르는데 죽었습니다. 이유는 모르는데 죽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신랑이 한 때 있었잖아요. 의미 있게 있었어요. 내 신랑이니까 의미 있는데 죽어버렸으니까 신랑도 죽었지만 뭐냐 하면은 내가 그 남자의 아내라는 사실도 살아있는 내가 통째로 의미가 날라 가버린 거에요. 예수님 죽어버리면 정말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 죽은 세상에서 내 의미도 같이 날라 가버려요.

그러면 여자가 뭐하느냐 하면은 신랑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자기도 신랑 따라 죽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관에 누워서 죽었어요. 월식이 있는 날에 그 여자하고 그 아들을 사랑하는 시어머니하고 둘이 살아났어요. 어느 부잣집 별장에 살아났어요. 그게 그 드라마 이름이 뭡니까? 아씨 두리안. 그 작가가 옛날에 유명했어요. 이 내용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은 인간은 타자가 없이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 세리한테는 비로소 나한테 내가 누군지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의미를 제공한 유일한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유일한 의미를 준거에요. 우리가 경험하지 않는 것, 죽고 부활까지 의미되신 주님께서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는 게 신앙이 아니에요. 예수님 가신 곳에 갈래. 이 사랑, 끈끈한 이게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사랑이 새 계명이에요. 사랑에는 계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걸로 충분해요. 부산에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질문이 이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는 거에요. 왜 순서를 지어 놓고 소망, 믿음은 재끼고 사랑을 왜 돋보이게 합니까? 하는 뜻이겠죠?

그래서 답변했지요. 인간이 불가능한 원천이 사랑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내가 존재하든 구원을 받든 어떤 것도 불가능하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네가 설칠 필요도 없고 네가 고민할 필요도 없게 만드는 것은 뭐다? 사랑이다. 이 세리는 바로 사랑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의 생산물이 이 세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과 우리 자신과 주님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정립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세상 따라가지 말고 내 판단 믿지 말고 남들이 뭐라 하는 소리 듣지 말고 주께서 살아있는 음성으로 주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려주는 알림 받는 그런 주님의 생산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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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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