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30901a 울산강의-역대기상(23강) 22장 1절 : 의미의 그릇자유게시판역대상

20230901a 울산강의-역대기상(23강) 22장 1절 : 의미의 그릇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역대상 17장. 17장 아닙니까? 22장. 17장 한 이유가 있어요. 다윗이 성전 짓겠다, 하는 그 마음이 17장에 나와 있고 22장도 마찬가지지요. 17장에 잠시 1절 봅시다. “다윗이 그 궁실에 거할 때에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그렇게 돼 있지요.

여호와의 언약궤. 두 개의 차이점을 생각해야 될 건데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 서로 반대된다는 것은 다 아시죠. 생각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인간이 이것까지는 해낸다는 거예요.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근데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영역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이런 비교는,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것조차도 인간의 영역에 속해요. 왜냐하면 이래 생각해봅시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이렇게 합시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것, 이렇게 갖다 붙여 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다는 이것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덧붙일 수 있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그런 마음이 든다고요.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이것까지는 아는데 이 나머지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둘을 플러스 시킬 수가 있어요. 플러스 시키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온전함, 또는 완전성, 완전함, 그다음 절대적인 것, 이렇게 사람들은 그런 아이디어가 생각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철학이고 종교, 과학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런 비교는 성경적이 아니에요.

성경적으론 뭐냐 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그다음에 알 수 없는 것의 차이로 성경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지요. 그러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어떤 미지의, 미지보다도 어떤 여분의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플러스 더하기가 되면 온전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냐? 생각할 수 없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이 와버리면 이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공격하는 식으로 성경 내용은 그렇게 짜여있습니다. 겸손을 떨면서 하나님 제가 이것까지는 하겠는데 이거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셔야 됩니다, 라는 생각을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하게 돼요. 상당히 누가 봐도 겸손해요. 신앙적이고.

그런데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다. 모자란 생각이 아니고 너무 작다가 아니라 아예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의 도래입니다. 차이점이 뭐냐? 차이점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인간들이 구분할 줄 안다는 거예요. 이게 구분이 돼요, 인간에게.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인간이 구분하는 게 아니고 인간들이 알 수 없는 것을 배척하게 돼 있습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착해봐야 하나님보다 착하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까지 우리가 더 안아버리고 품어버리면 우리는 온전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어떤 분이 오셨는데 생각할 수 없는 분이 아니고 인간이 생각해보니까 저 존재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용서가 안 돼요. 그러니 뭘 하게 돼요, 인간들은? 배척을 하게 된다고요. 내가 할 수 있다는 이 일 때문에 이러한 자신감 때문에 이런 확고함 때문에 예수님이 배척을 받은 거예요.

열심히 교회에서 기도할 때 문제점이 이거에요. 기도하는 나는 너무나 내가 보기에도 착하고 너무나 대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기도하는 것을 아마 어여삐 여겨서, ‘기도 열심히 하는구나. 무엇을 도와줄꼬?’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추가해서 복으로 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기도를 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사람이 기도하면서 내가 기도하는 자체가 하나님 앞에 욕 얻어먹을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짓이라는 걸 누가 알겠어요? 아무도 모르지요.

역대상 17장에 1절에 보면,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언약궤 나오지요. 오늘 이 시간에 언약궤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방금 한 이 공식 그대로 사용합니다. 언약궤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언약궤가 주어졌으니까, 언약궤를 만들라 했으니까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언약궤를 생각한다는 그것이 알 수 없는 것에 의해서 언약궤가 생각하는 인간을 공격하는 용도의 언약궤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언약궤라고 여겼던 것, 인간은 언약궤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언약궤의 깊은 취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언약궤의 내용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학생들이 학원이 갈 때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학원비가 비싸잖아요. 학원 끊으면서 무엇을 기대하느냐 하면 일타강사께서 나로 하여금 더 깊은 수학 같으면 수학의 깊은 것을 더 확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학원에 3개월 다니고 수학 성적이 20점 이상 올라간 것을 엄마한테 자랑질해야지, 그런 기대로 학원에 열심히 다닙니다. 그게 인간들의 본성이죠.

아까 저녁 먹으면서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어요. 짬뽕 그릇이 깊다는 말, 그게 오늘 강의에 너무나 적절하다. 짬뽕을 주는데 양이 많았던 모양이죠. 파도파도 계속 짬뽕이 있었어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생각은 깊기 때문에 우리가 서서히 파고 들어가면 깊이를 다 측정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주께서 그 깊이를 마저 채워줘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성경을 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성경은 짬뽕을 짬뽕 그릇에 담았잖아요. 짬뽕 그릇을 깨십니다. 깨버리죠. 짬뽕 그릇이 깨지면 안에 있는 짬뽕이 그냥 테이블에 왕창 쏟아지겠지요. 엉망 되겠지요. 하나님께선 언약을 주시면서 언약을 빼시는 거예요. 언약을 빼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종에 언약 보이스피싱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줘놓고 ‘야 약속이다. 이거 붙들고 이거 믿으면 구원받는다.’ 했는데 그 붙든 약속을 주께서 조금씩 빼버려요. 화투에서 밑장 빼기하듯이 살살 빼버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고스란히 나락에 빠집니다. 나락에 빠지면 무엇을 우리가 건질 수 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서 구원될 그러한 존재가 애초부터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져요.

괜히 헛바람 든 거예요. 내가 본인이 괜찮은 존재인 줄 알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할 만한 그러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괜한 착각을 한 거예요. 짬뽕 그릇이 깨져서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우리 인생을, 짬뽕 그릇이 깨져보세요. 그다음 우린 어떻게 하겠어요? 주섬주섬 국수하고 손가락으로 건지려하겠지요.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 자체에 의미가 없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인간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의미 챙기는데 평생을 거기다가 투자를 해버려요. 그러니까 벌써 본성 자체가 내 의미 찾는데 진력을 다하기 때문에 성경을 주든지 설교를 하던지 간에 우리는 막 나라는 짬뽕 그릇에다 그 성경말씀을 채우기에 바빠요. 거기다가 언약도 담고 십자가도 담고 노아언약, 율법도 담고 하여튼 좋다는 건 다 담아요.

다 담는데 언약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면 그러한 의미 그릇을 깨는 식으로 언약이 실현됩니다. 이게 굉장히 알 수 없는 건데 그야말로 알 수 없는 건데요. 알 수 없다는 것을 좀 더 설명하면 알 수 없다는 말은 뭐냐? 생각할 수 없는 것과 알 수 없는 게 달라요. 알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인간이 의미를 받아들일 마음자세가 돼 있어요. 인간은 본인이 그릇이에요. 인간은 어떤 괜찮은 것, 자기에게 좋다는 걸 받아들일 그릇으로써 모집할 마음자세가 딱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누가 중심이다? 누가 의미의 중심이에요? 자기 본인이 의미의 중심이 되는 거예요. 무의미하지 않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이거는 묻거나 따지지 말고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나는 의미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옆에서 성경이 뭐라 하던 하나님이 뭐라 하던 듣지도 않아요. 듣지도 않고 중요한 것은 일단 나는 의미를 어떤 식으로 올바르게 갖출 수 있는가, 구성할 수 있느냐, 거기에 전력을 다합니다.

epoxy resin이란 것 여러분 아셔요? 안에 여러 가지 단풍잎도 넣고 꽃잎도 넣어서 장식품을 만들잖아요. 거기다가 resin이라 하는 것은 수지, 나중에 굳으면 딱딱하고 투명하게 되는 것. 만들 때 단풍하고 붓고 굳으면 그 투명한 공간 안에 자기가 담았던 아름다운 꽃송이나 꽃 같은 게 또는 바다세계를 꾸며놓으면 장식한 바다세계가 그대로 투명하게 다 보입니다. 심지어 그 안에 램프까지 집어넣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 사각형이나 원통도 만들고 하게 되면 그 자체가 하나의 성과물이 되지요. 인간은 본인이 의미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뭔가 하나 성과를 얻어야 돼요. 그 최종 성과가 뭐냐? “그것 봐. 나 천국 간다고 했지. 내가 천국 보낸다 했지. 나 천국 가는 거야. 왜? 내 안에 이러이러한 것들을 긁어모았으니까 나는 천국 가는 거야.” 나는 애초부터 그런 의도를 가지고 교회 나오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이건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다윗에게 언약궤가 전달되었습니다. 다윗시대에 언약궤는 어디서 만들어졌느냐 하면 모세시대 때 만들어진 거거든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지시 받고 그래서 만든 게 언약궤인데 이 언약궤가 시대 지나서 블레셋 땅에 가 있다가 드디어 다윗이 이스라엘 남쪽 북쪽 통합하고 난 뒤에 언약궤가 드디어 다윗성 안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어요.

다윗을 뭘 생각하느냐 하면 에폭시레진 이걸 장식하는 거예요. 언약궤를 왜 다윗이 그걸 가지고 성전을 만들 그런 아이디어를 왜 가졌느냐 말이죠.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말이죠. 마치 하나님을 가두는 것처럼. 하나님 꼼짝하지 마세요. 우리와 함께 계세요, 라고 그렇게 하는 의도가 뭐냐? 그게 바로 이스라엘을 당당하게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국가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여기서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상식적인 것을 이야기할 테니까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대에 있어서 국가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가 가시적 국가가 되려면 여기 뭐가 등장해야 되느냐 하면 가시적인 인물이 등장해야 돼요. 그 가시적 인물을 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냥 개념적인 국가가 실제로 국가가 국가 되려면 가시적인 대표자가 있어야 돼요. 그게 왕입니다.

그러면 전쟁에서 국가를 치려면 무엇부터 쳐야 돼요? 왕부터 쳐야 되지요. 청나라가 우리나라 치려고 어디 옵니까? 남한산성에 오지요. 남한산성에 누가 삽니까? 인조 살지요. 탤런트 삽니까, 연예인 살아요? 왕이 거기 살고 있지요. 그러니 왕을 잡아버리면 백성은, 백성 자체가, 참 이런 게 인간들의 논리가 얼마나 어설픈지요.

인간은 본인 몸이 있잖아요. 왜 본인 몸이 있는데 그걸 국가에 헌납하지요? 옛날 사람들, 전에 그런 질문했잖아요. 이순신 장군이 누구 때문에 죽었느냐고.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은 이순신 장군이 충성한 것은 나라에 충성한 게 아니에요. 그 당시 나라라는 게 없어요. 그 당시는 뭐가 있느냐 하면 왕이 있어요. 왕에게 충성하는 게 나라에 충성하는 거예요.

구조가 이런 구조입니다. 왕이 있고 왕 밑에 백성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백성A, 백성B 있다면 서로서로 힘 모으면 되잖아요. 절대로 옛날 사람 그리 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힘 모으면 이걸 가지고 반역죄라 해요, 반역죄. 요즘 사람들은 이해가 안 돼요. 뭘 거쳐야 돼요? 반드시 경로를 어딜 밟아야 되느냐 하면 왕한테 재가 받고 이웃과 힘을 합쳐야 돼요.

왜냐하면 나가 너한테 바로 힘을 모으는 게 아닙니다. 힘은 누구한테 반납해야 하느냐 하면 왕에게 집결돼야 돼요. 지금 이런 나라 있잖아요. 여기서 얼만 안 떨어졌어요. 김정은 나라, 종교단체거든요. 통일교로 보면 됩니다. 신천지나. 통일교나 신천지인데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죠. 이미 옛날에 죽었지만. 그 통일교 교인들이 누구만 쳐다봐요? 문선명이만 쳐다보지 않습니까?

이슬람 종교 마호메트 있지요. 그 사람들이 국가와 종교를 초월해서 마호메트만 쳐다보는 거예요. 그게 선지자니까.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꾸란이란 계시를 준 선지자기 때문에 그것만 쳐다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은 미쳤지 똑같은 인간인데 그게 왜 필요해, 라고 하지만 그건 현대인들이 본인이 속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은 힘의 집결 속성이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있습니다. 나이 칠십만 넘어도 다 알아요. 옛날 가정에서의 엄마의 위치가 얼마나 가장에 비해서 턱도 없이 나약하다는 것을 옛날 산 사람들 다 압니다. ‘엄마 이것 해줘’ 하면 ‘너거 아버지한테 물어보고’ 이렇게 하지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힘은 하나로부터 나오고 힘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태국에 현재 왕이 있잖아요. 그 왕 앞에 나갈 때는 지금도 그래요. 왕 앞에는 바로 앉지도 못하고 옆으로 쓰러져서 나가야 돼요. 엎어져서 말할 때만 고개 들고. 왕만 인간 같고 그 앞에 엎어져 있는 것들은 짐승 같아요. 동해안에 오징어 쭉 늘어져있는 것처럼 늘어져있어야 돼요. 지면에서 높이 생기면 안 돼요. 왕 앞에는. 왕실에서의 높이는 왕만 독점해야 돼요. 똑바로 보고 이야기하는 것 없어요. 이렇게 엎어져서 높낮이 없이 이렇게 돼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고대의 왕을 이야기하면 ‘미쳤다 저거. 왜 저래.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인간 아닙니다. 왕이란 것은 똑같은 인간 아니고 나의 존재하는 힘이 어떤 힘의 원천이 있는데 그 원천이 하늘이죠. 하늘에서 힘이 오려면 반드시 왕을 통해서 나에게 힘을 줬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힘은 내가 임으로 사용하면 안 되고 왕의 재가를 받아야 돼요.

그래서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잡혔다 하면 온 백성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죠. 우리 임금이 잡혔단다. 자기 아버지, 엄마 죽을 땐 안 울어도 왕 잡혔다 하니 다 울고 한다고요. 왕이 나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나라에 보이는 국가가 뭐냐? 왕이에요. 왕의 존재에요. 그걸 생각 못하면 역대상 17장, 오늘 22장 설명 안 됩니다.

이걸 제가 아까 뭐라 했어요? 이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소속돼 있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왕을 주신 그 왕의 나라,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왕의 나라, 내가 속해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잘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그게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역대상 17장 1절에 보니까 여기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언약궤가 들어오지요. 그러니까 다윗은 뭘 생각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지켜주시고 더 확실하게 지켜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한테 약속한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표, 언약궤까지 여기서 플러스 더해서 허락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뭐냐? 내가 지은 왕궁도 있지만 또 무슨 왕궁을 짓겠다고? 하나님의 언약궤, 하나님이 이름을 모실 하나님의 성전을 본인이 지어주겠다고 구상을 한 거예요. 이게 어떻게 된다고요? 이게 더하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요즘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교인들 힘써서 예배 해놓고 성전 준공식 할 때 헌당, 하나님께 드린다는 취지로 하면서 ‘하나님 이 성전을 예배당을 하나님께 드리오니 이 성전 안의 의자들을 꽉꽉 채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실은 돈 있는 사람으로 채우게 하옵소서, 이 본색이 되지만 차마 그 말은 못하고 그냥 ‘많은 사람들이 부흥 되어서 이 도시 전체가 성시화 되게 거룩한 도시, 울산이 성시화 되게 하옵소서.’ 울산이 성시화 되는 게 아니고 미세먼지로, 공장으로 덮여…….

그게 뭐냐 하면 이 예배당에다 플러스 더하기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도리를 다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좀 도와주시면 이게 온전한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한 의식이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본성으로 남아있습니다. 본성으로 남아있는 그걸 네 자로 하면 이렇습니다. 교회하기. 교회해서 뭐하는데? 교회하기에서 교회는 가시적이죠. 알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전에서 알 수 없는 것 그쪽으로 다윗을 통해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다윗의 한계를 보여줘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짬뽕 그릇 깨듯이 이걸 깨는 거예요. 언약궤가 뭘 깨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를 공격하는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 누굴 공격한다? 다윗을 공격하는 거예요.

짬뽕을 담는 것은 짬뽕 그릇인데 짬뽕 그릇에 날 파리가 들어온다, 모기가 들어온다? 젓가락으로 빼내든지 안 봤을 때 그냥 후룩 목으로 집어넣든지 이러면 되는데 짬뽕을 담는 그릇 자체를 외부에 있는 그릇 자체를 깬다면 뭘 담을 수 없습니까? 이스라엘 자체를 담을 수 없고 인간이 생각한 교회 자체를 담을 수 없잖아요.

그러면 그릇이 깨진다는 것은 다윗 생각에서 하나님의 언약,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담았다 했는데 언약이 언약 자체적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현재 담겼다고 생각하는 인간 생각 자체를 여기서 망치로 깨뜨리면서 나와 버리는 거예요. 다 쏟아져버리죠. 구원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리죠.

예레미야 21장 13절 보겠습니다.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 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으로 오신다는. 이스라엘의 적이 누구라고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적이에요. 짬뽕 그릇 깨버리는. 나의 적은 누구라고요? 내가 믿는다고 여기는 그분이 나의 적이 돼요.

언약은 그렇게 해서 완성됩니다. 이유가 뭐냐? 우리는 출생부터해서 내 의미 주어 담는데 본능적으로 내 의미를 주어 담아서 한평생 살고 나게 되면 에폭시레진처럼 하나의 나라는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해요, 인간들은. 그걸 자기 소설 쓴다고 해도 되는데 내가 이렇게 살았다는 하나의 투명한 작품, 그것을 인간은 원합니다.

그 지루하고 재미없는 군대생활 옛날 고참들은 뭘 했느냐 하면 배 조립해요. 그 3년이라는 그땐 1녀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3년이에요. 3년 지루해하면서 뭘 하나 남기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 다 헤치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난 인생 뭐 사는지 모르겠다는 식이잖아요. 그걸 주께선 원한다니까요.

‘왜 네가 굳이 의미 있어야 돼’ 이걸 주께서 물으신다고요. ‘너는 언약의 주인공이 아니야. 언약의 주인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약이니까 네가 그걸 긁어모아? 주제넘게.’ 교회 다녀서 복음 알아서 성경공부 참석해서 괜찮은 것 해서 나라는 그릇에 담게 되면 이게 내가 깨어질까요, 안 그러면 더 단단해진다고 여길까요? 단단해진다고 여기죠.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던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에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은 나를 닮은 그릇이 못 된다. 내가 너희 인간이 지은 집에는 거기 거주할 수가 없다. 언약궤가 조그마해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겼으니까 그걸 큰 집 지어서 제일 깊숙한 곳에다 언약궤를 안치하게 되면 하나님을 자동적으로 만난다고 생각한 거예요.

언약궤는 요만하지요. 집은 커다랗게 지어놓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개집 짓듯이 개집보다 더 크겠다. 작은 물건 하나가 하나님 만남의 장소라면 큰 집 지어놓으면 주께서 작은 만남의 장소에 오기 위해서 정문으로 들어와서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와 만나게 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답게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한 겁니다.

우리가 하는 상식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하늘에 하나님 있고, 땅엔 누가 있지요? 인간이 있지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데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대자연이 있어요. 큰 자연 natural. 하나님은 대자연을 만드시고 그 안에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인간에게 찾아오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인간은 나가서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실천하게 되면 말씀에 준비돼 있는 저주와 복이 있는데 복이 우리한테 주어진다.

이게 인간들이 아는 상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인간이 알 수 없는 게 아니고, 알 수 없는 건 빼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이런 생각을 문제 있다고 왜 안 하느냐 하면 여기에 자기 자신과 하나님 사이가 하나님께 문제가 없다면 하나님이 만든 나도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준 것은 인간보고 들으라고,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는 신명기에 나오는 듣고 순종하라고 주신 말씀이니까 순종하면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뭘 알 수 없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죠. 약속입니다. 약속이 올 때 이 인간들을 교체, 새로운 인간으로 교체하기 위해서 말씀이 왔다는 생각을 인간들이 못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했지 받아들이는 그릇인 나를 다른 그릇으로 교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셨고 말씀을 주셨다는 생각을 꿈에도 못하는 거예요.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의 의미를 몰라서 그래요. 인간들이 죽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살아 있다, 살아 있다’의 끝부분에 끝에 가서 ‘인간은 죽는다’를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숨 안 쉰다, 죽었다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언약을 통해서 내용을 담고 인간을 찾아올 때는 인간은 처음부터 살아 있는 적이 없었어요. 살아서 죽는 게 아니고 죽음이 살아 있는 모양새를 한 게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겁니다. 죽음 자체가 살아 있는 모습.

그래서 인간은 결국은 죽게 되는 이유가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죽는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죽기로 돼 있는 요소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 죽음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지 마세요. 우리가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착해도 아무리 선하고 어질게 살아도 죽어요. 악하게 살아도 죽어요.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이래도 죽게 돼 있고 저래도 죽게 돼 있고 죽음은 내 행동과 상관없음. 죽음을 무엇과 상관있는가? 죽음은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있어요.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죽는 이유를 아시는 분은 언약을 따라서 언약과 동반해서 같이 내려오는 우리 주님의 죽음만이 진정한 죽음이에요. 그 죽음의 내용은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육신이 누구 육신이냐 하면 인간의 육신이었어요. 죄 있는 인간의 육신이죠.

인간의 육신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어떤 말을 해야 될 육신이냐 하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이렇게 버리시나이까. 다시 말해서 버림받아야 될 육신임을 하나님께선 아버지 앞에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분은 이 세상에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어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이 하나님 가짜고요. 하나님 가짜인 이유가 인간 자체가 본인이 가짜인 걸 모르는 체 가짜로 가짜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이 인간, 사람을 뭐로 교체하느냐 하면 언약적 의미를 부여해서 교체해버려요. 인간이 아니고 뭐냐 하면 인자에요. 예수님은 인자로 와요. 인자가 인간인가, 인간이 인간인가? 어느 쪽이 인간입니까? 인자가 진짜 인간이에요. 왜? 아버지와 아는 사이거든요. 우리는 하나님과 모르는 사이에요. 하나님도 모르면서 기도할 때 붙잡고 ‘하나님’ 하고 찾았던 겁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여기에 역대상 28장 3절에 보면, 다윗이 결국은 본인이 알아요. 아는데 역대상 28장 3절을 보면, “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상관있지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주십니다.

역대상 22장에 보면 다윗이 번제단, 맨 언약궤입니다. 번제단, 성전을 지으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석수들 시켜서 돌을 다듬게 했지요. 지금 다윗이 만드는 게 뭐예요? 자기 딴에 성전을 만든다는 거예요. 성전을 만들 때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드느냐 하면 비 안 맞도록 그것도 화려한 건축물 안에 언약궤를 담으면 이게 뭐가 된다? 성전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성전 짓는데 많은 재료를 준비하고 짓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 왔기 때문에 선지자에 의해서 분명히 언급했어요. 너는 못 짓는다. 왜? 피를 흘렸기 때문에. 자, 이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봅시다. 피를 흘리면 왜 성전 못 짓지요? 그거는 이렇게 됩니다. 인간 왕 제거, 하나님 왕 성전 건축. 순서가 이렇게 돼요. 인간 왕,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모든 민족은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눈에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의 힘을 다 모아서 농사짓는 농부, 농산물, 생산물, 고기 잡는 그런 것, 어떤 상품, 무역하는 사람들 다 힘을 모으고 세금 모아서 뭘 하나 옹립하는 거예요? 왕을 옹립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왕 있다. 무슨 뜻이에요? 내 나라 있다, 이런 뜻이에요. 본인들의 힘을 자발적으로 왕을 옹립하는데 모든 것을 다 거기다가 투자하는 거예요. 자신의 힘을.

자신의 힘을 내 것이니까 내가 가지면 되지 않겠느냐. 그거는 왕이 노하지요. 야, 이리 와봐. 네 땅 누구 거야? 내 건데요. 이 땅 누가 지켰는데, 전쟁에서 승리해서 누가 지켜줬어? 임금님이 했지요. 그러니까 내 거잖아요. 너 딸 있지. 궁녀로 보내. 내 딸인데요. 내 딸 행복을 위해서…. 행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거는 솔로에 가서 찾아라. 이건 네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야. 내가 선택하면 이건 무조건 궁녀로 가야 돼요.

여러분 그런 시대가 참 답답하지요. 일본이 노일전쟁, 청일전쟁, 우리나라 점령할 누구 지시 따라 했습니까? 일본 천황 만세잖아요. 일본 천황이 결정했잖아요. 태양신이. 태양신이 어디 있어요? 거기 있잖아, 키 조그마한 사람 있잖아요. 사람은 내가 가진 힘 말고 나라의 온 전체의 힘을 한 곳에 집결돼 있는 일종의 무게중심이죠. 물리학에서 무게중심.

무게중심 되는 그 중심성이 있어야 내가 편하고 대대손손 내가 자식하고 이 땅에서 잘 누리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끼리 하면 숫자가 얼마 안 돼요. 우리끼리 아니고 다 모아야 돼요. 다 모으면 뭐가 돼요? 왕이 되는 거예요. 권력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나라 없는 서러움 아시겠어요?

그 우크라이나 청년들 전쟁 일어나니까 총 들고 나갑니까? 그 나라가 자기 나라거든요. 다른 말로 그 나라가 곧 나기 때문에. 내가 나의 나다움을 내가 홀로 있으면 몰라요. 내가 소속이 있든 어떤 나라가 있으면 진짜 나의 나다움의 어떤 희망이라든지 성과라든지 어떤 결정체, 사는 보람을 느껴요, 인간은. 손흥민과 나하고 아는 사이에요? 류현진과 여러분 아는 사이입니까? 그런데 손흥민 한 골 넣으면 뉴스에 왜 나오는데요? 내 조기축구 한 골 넣은 것 뉴스에 왜 안 나오는데? 손흥민은 축구의 왕이거든요. 나는 왕이 아니잖아요.

어떤 비록 나는 못나도 우리 형님이 의사고, 우리 누나가 판사라면 판사도 의사도 아닌 게 지가 왜 힘주고 돌아다녀요? 중매쟁이가 와서 하는 말이 돈 얼마나 모았습니까? 집은 있습니까? 이래 물을 때에 꼭 없는 것들이 그래요. 우리 형님이 강남에 성형외과 의사고요, 우리 아버지 대학교수, 이런다고요. 그것 말고 너, 너 지금 뭐하고 있노? 백수인데요.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곧 나의 환경이에요. 우린 그 환경 속에 포함시켜서 나를 살아요. 왜? 내가 생각하는 것들의 장을 field를 이루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주 안에, 그 범주 안이 곧 나의 세계기 때문에 그래요. 그 나의 세계가 왜 있어야 되는가? 그래야 내가 존재의 의미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 없고 식구 없고 교회 없으면 내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요. 따라서 우리는 내 존재의 의미를 고정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뭔가 무게중심이 되는 그 무게중심에 곁들여야 돼요. 포함이 돼야 된다고요. 그래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고 정신적으로도 평온을 찾을 수가 있어요.

집 없이 떠돌아다녀 보세요. 잠도 못 자요. 깜짝깜짝 놀래요. 여기가 어디지? 오늘은 영주모텔, 그다음엔 경주모텔, 오일장 다니면서 떠돌이 장사꾼 해보세요. 맨날 담배 냄새나는 여관방에서 잘 때 그 인생 자체가 얼마나 서글픕니까. 그러다가 가끔 여자와 소개팅해서 뭐하십니까? 떠돌아다닙니다. 그럼 뭐 땡이죠. 집은? 집은 없습니다. 이 트럭이 내 집입니다. 이래서 되겠어요. 안정감이 없는데 누가 합세하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옛날에 공직자들이 최고였던 거예요. 왜? 공직자는 왕이 갖고 있는 힘의 일부를 안배받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교회에서도 목사하고 최측근 교회에서 힘깨나 쓰는 말이나 하는 거예요. 특히 사모, 사모 최측근 아닙니까. 이야기하고 싶은 것 사모님 통해서 이야기하라고. 어디 집사가 장로 통해서 이야기해야지. 어디 집사가 함부로 목사한테 말을 걸어. 우리 장로를 통해서 해야지. 당회를 통해서 하라. 이게 바로 인간의 의미의 그릇, 그 속에서 자기 의미를 챙기려는 인간의 더러운 본성입니다. 10분 쉽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9,817 자유게시판 20230911b 부산강의 : [시편]61(45:10)-부적 시편 최고관리자 23-09-13
19,816 자유게시판 20230911a 부산강의 : [시편]61(45:10)-부적 시편 최고관리자 23-09-13
19,815 자유게시판 68강-예레미야 11장 1~5절(복된 자리)230910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09-10
19,814 자유게시판 3강-디도서 1장 10-11절(자아 끊어냄)230910-이 근호 목사 디도서 최고관리자 23-09-10
19,813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용서 경쟁 / 230910 - 최고관리자 23-09-10
19,812 묻고답하기 그레데 사람 디도서 최고관리자 23-09-10
19,811 자유게시판 8강-스가라 3장 1-5절(현실과 구원론) 230906 - 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23-09-10
19,810 자유게시판 9월 부산 성경공부 안내 시편 최고관리자 23-09-09
19,809 자유게시판 2023 겨울수련회 요한복음(타인의 마을)(1~9강)-재정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3-09-08
19,808 자유게시판 443강-YouTube강의(여행 사도행전 16:6)20230905-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23-09-06
19,807 자유게시판 442강-YouTube강의(잠 창세기 2:21)20230905-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23-09-06
19,806 강의 유튜브(442강/443강) 230905 - 최고관리자 23-09-05
19,805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8장 5절 (아픈자가 성도) 2300718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3-09-05
19,804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8장 5절 (아픈자가 성도) 230071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3-09-05
19,803 자유게시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5분뚝딱철학, 김필영) - 최고관리자 23-09-05
19,802 자유게시판 20230901b 울산강의-역대기상(23강) 22장 1절 : 의미의 그릇 - 최고관리자 23-09-04
열람 ➜ 자유게시판 20230901a 울산강의-역대기상(23강) 22장 1절 : 의미의 그릇 역대상 최고관리자 23-09-04
19,800 자유게시판 67강-예레미야 10장 23~25절(진정한 왕)230903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09-03
19,799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주님이 원하시는 것 / 230903 - 최고관리자 23-09-03
19,798 묻고답하기 할례당의 횡포 - 최고관리자 23-09-03
19,797 자유게시판 7강-스가랴 2장 6-13절(다루시는 분) 230830 - 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23-09-03
19,796 묻고답하기 [사라진 나라]-송민선 성도님의 글 - 최고관리자 23-08-31
19,795 자유게시판 날마다 사라짐 - 최고관리자 23-08-31
19,794 자유게시판 23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갈라디아서)(1~9강)-재정리 갈라디아서 최고관리자 23-08-28
19,793 자유게시판 66강-예레미야 10장 17~22절(상처)230827 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3-08-27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