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0721b 고린도후서4장 11절(몸과 유령)-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30721b 고린도후서4장 11절(몸과 유령)-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아무도, 단 한명 가룟 유다 빼놓고는, except 가룟 유다, 아무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죠.
이건 예수님께서도 이야기한 거예요. 너희들은 나를 찾을 수 없다. 왜 그러느냐 하면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공간. 사람들은 아버지를, 인간 사는 공간 말고 하늘에 사는 공간에 따로 있다고 본 거예요. 그 하나님이 사는 공간이 굳이 인간 공간에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본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이 사람 사는 데 올 이유가 없다니까요.
옛날 이스라엘 같으면 왔죠. 모세 시내산. 그때 사람들은 혼쭐났잖아요. 다 같이 벌벌 떨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중재자로 나서가지고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교류하는 방식을 모세 언약이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알고 있었죠. 유대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모세 언약은 어디까지나 구약 때고 신약에는 종말의 마지막에는 직접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신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던 거예요. 세례하면서. 그런데 세례 가운데, 죄인들 빨리 세례 해야 깨끗한 하나님 심판 앞에 그동안 지은 죄를 씻어가지고 심판대 앞에 설 수가 있는데 그 준비하는 과정 속에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이 끼어들 때, 세례 요한은 황당했죠. 왜 이러십니까? 여기는 죄인들만 오는 곳입니다, 주님. 죄 없는 분은 여기 오면 안돼요.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몰랐던 겁니다.
모른다는 말, 알지 못했다는 것을 저는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찾을 수 없다. ‘찾을 수 없다’로 바꿔야 돼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의 특징은 [본인이 본인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기존에 교육받고 기존에 내가 있었던 체제 이 공간에서 사람들이 살았다 하는 공간에서 줄곧 수십 년 살았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이기 때문에, 뭘 하려고 해도 내가 시발점이 돼서 내가 개시점이 돼서 일하면 뭔가 된다 이 말이죠. 콩나물국을 끓이든 뭐든 내가 시작하면 어떤 결과물을 낼 수 있다 이 말이죠.
왜? 내가 살아있으니까. 죽은 자 같으면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살아있으니까 뭔가 조물딱 대고 뭘 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은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 말이죠. 그럼 죽은 자는? 관 속에 있는 사람이 죽은 자죠. 다른 사람은? 살아있죠. 과거 관 속에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은 죽고 아직 무덤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살았다고 보는 공간이 이 인간들의 공간이에요.
그런데 성도의 특징은 몸이 바뀌어요. 흙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뀌어요. 이 앞에 있는 그리스도는 인간 공간에서 추방된 자에요. 인간 공간에서 추방된 자의 몸으로 바뀌어요. 인간세계에서 추방된 그분의 몸으로 바뀌어요. 인간세계에서 계실 때 유령 취급받던 그분의 몸으로 바뀌어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이 땅에서? 거울 앞에 비치는 몸 있죠. 몸인데 그게 바로 기존에 내가 알던 나죠. 그런데 내가 알던 나는 새로운 공간, 주님 계신 공간의 나는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그 공간의 나를 내가 죽어가는 내 몸으로 찾아낼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걸 [나는 이미 나에게 귀신이다. 이미 나는 나에게 죽은 자이다.] 귀신, 죽은 자가 사도 바울에서는 예수 안이라는 공간에서의 자기 정체성, 자아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인간들이 사는 공간에서의 언어,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까, 안 됩니까? 표현이 안돼요. 안되니까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나는 삼층천에 올라간 나를, 그 사람을, 자기가 자기보고 그 사람이래요, 나는 그것, it을 표현할 길이 없네. 진짜 나를, 이 I가 it를 표현할 수 없어요. I 같은 내가 it 같은 나를, 내가 표현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설명해야 될 이유가, 분명히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있었잖아요. 함께 있어서 제자들이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주님과 우리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자부한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몸과 자기 몸이 영원히 줄곧 같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가룟 유다 빼놓고는.
가룟 유다는 알았죠. 예수님의 몸과 자기 몸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걸. 가룟 유다는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걸 알았던 겁니다. 주님이 자기 몸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어요. 내가 죽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유발된 사태라고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겁니다.
자기는 옛날에 고유한 자기를 버리기 싫은 거예요. 자기는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서 귀신취급받기 싫은 겁니다. 누구는 귀신취급받기 좋아합니까? 아무도 안 좋아하는데. 그걸 가룟 유다는 미리 예민하게 알았던 겁니다. 주님께서 장차 성령 보내서 멀쩡한 우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미리 알았던 거예요. 사탄이 들어가서 미리 안 거예요.
여러분, 사탄, 악마죠, 악마는 좀 덜 무서운데 사탄이라 하니까 갑자기 무서워지죠. 사탄의 특징은 이거에요. 사탄의 특징은 항상 바른 말만 한다는 겁니다. 항상 그래요. 바른 말만 해요. 납득되는 바른 말만 해요. 바른 말만 하거든 그 목사는 사탄의 종이라 보면 돼요. 악마의 종.
왜냐하면 바른 말만 한다는 것은 듣는 사람이 바른 말한다고 납득되는 말만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납득되는 요인들은 자기 고유의 것을 굳이 버릴 이유가 없어요. ‘야, 저 사람 설교만 잘 듣고 지식만 쌓으면 구원받겠다.’ 하는 자기가 자기한테 희망을 가질 수 있어요. 이게 사탄이에요. 악마에요.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설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 말 알아듣는 것처럼 했는데 갈수록 그 간격이 틈이 점점 더 벌어졌어요. 도대체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무슨 말하는지를. 주께서는, ‘너 가짜라는 뜻이야. 죽을 몸 지니고 흙이 될 몸이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게 마땅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거에요. 인간이 세상을 표현할 때, 어려운 말로 이걸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라 하는데 이건 너무 어려운 말이고, 세상을 표현할 때에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일대일 대응하는 식으로 표현해요. 1:1 대응.
코끼리 있잖아요. 그러면 코가 긴 코끼리. 코끼리를 찾아보면 무엇과 만나는가? 코끼리 동물그림과 ‘코끼리’란 글자가 일대일로 딱 만나는 거예요. 여기 뭐 사자 그림하고 코끼리가 만날 순 없잖아요. 사람들은 드디어 언어에 대해서 깊이 있게 연구를 많이 했어요. 인간의 언어에 대해서. 이걸 기호학 또는 언어학이라 해서 같이 쓰는데요.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첨부파일에 강의 시간 중 나오는 그림 캡쳐가 있습니다
위에 비오는 날 우산 쓴 신사 그림은 기호에 속하는데 기호 중에서 이것을 상징이라 해요. 상징, symbol. 상징은 어느 민족, 누구나 봐도 비가 온다는 것을 보여주죠. 우산 쓰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걸 우리말로 ‘비’라고 한다면 외국 사람은 ‘비’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작대기로 보이지, 이게 비라고 하는 건 몰라요.
‘비’ 이게 기호고 우산 쓰고 있는 사람 그림은 상징이에요, 상징. 그래서 사람들은 기호 또는 같은 말로 언어, 기호라는 것은 그 사회의 약속된 체계로 보는 거예요. 그 사회에 약속된 체계라 하면 어디서 누구한테 배우느냐? 인간은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고……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잖아요. 장난감을 갖고 놀 때에 아이들이 창의성을 발휘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장난감을 사용하는 사용자가 돼요. 창의성이 아니고 사용자로서 사용하는데 애들이 장난감으로 여러 가지 소꿉놀이하는 그것은 장차 어른세계를 미리 여기서 흉내내는 거예요. 교육의 기초는 뭐라고 했습니까? 모방이에요. 모방하고 흉내내는 거예요. 인간은 창의가 있다, 없다? 없어요. 그 사회 안에서 그냥 계속해서 대를 이어 반복하는 거예요.
그 사회를 무슨 사회라고 했습니까, 첫째 시간에? 공간2. 인간들이 기거하는데 인간들이 기거하는 공간2의 특징은? 나는 죽어있는 게 아니고 나는 살아있다. 이유가 뭐라고 했어요? 그 안에 자기의 거처가 있기 때문에. 거처가 있어야 애를 놓죠.
예수님은 나올 거처가 없었어요. 마리아하고 요셉이 애를 낳을 거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디서 나왔습니까? 인간의 거처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어디서 나왔습니까? 말구유에서 나왔죠. 소인지 말인지 양인지 그건 잘 구분 안됩니다만 어쨌든 짐승의 구유에서 태어나잖아요. 이 땅을, 이 공간 자체를 태어날 때부터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도 부정해버렸어요. 성전에 올라가서.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하니까 “누구세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데 누구세요?” 이런 식으로. “너를 사흘 동안 찾았다.”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습니까?” 이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은 내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못합니까? 왜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못합니까? “아버지여” “왜?” “당신이 아버지 아닌 것을 왜 모르십니까?” 이거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인간의 언어로 예수님을 파악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언어로 파악할 수가 없어요.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언어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통제 불가에요. 인간사회에서는 통제 불가합니다. 미친 자죠. 분노유발자 이런 거. 통제 불가인데 성경에서는 이 통제 불가를 자유인이라 합니다. 이게 자유에요. 율법과 이제 혼인관계 청산하고 성령과 함께 혼인한 사람. 로마서 7장에. 이걸 자유인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통제 가능하고 통제되었던 존재를 주님이 뭐로 바꾸느냐 하면 통제 불가한 존재로 바꿔버려요. 요한복음 5장에서 그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가 평소에 안식일 안 지키려고 환장한 사람입니까? 아니죠. 아니에요. 자기는 자기 병만 나으면 돼요.
그 사람 소원은 남북통일도 아니고 그 사람 소원은 38년 된 고질병이 낫는 게 소원이에요. 그것 때문에 베데스다 못가를 반복적으로 38년 동안인가 그건 확실히 모르지만 하여튼 근처를 어슬렁거리면서 자기가 1번 타자로 뛰어들길 기다렸던 겁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공간, 새로운 공간 이런 건 관심도 없고 내 병 하나 낫는 거예요.
왜 병 낫기를 원했습니까? 본인이 죽어가고 있잖아요. 아파 죽어가고 있잖아요. 죽어가고 있다는 말은, 내가 안 아프기만 하면 나는 정상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가. 그 사람이 평소에 착한 일해서 병 나은 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께서 인간의 대표자를 뽑은 거예요.
인간의 대표자를 뽑았는데, 그 사람의 소원은 내 병에서부터 자유에요. 탈출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가 예측하지도 못하고 예상하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않는 탈출을 해버리게 했어요. 어디서 탈출했습니까? 안식일에서 탈출했죠.
안식일은 율법의 총화에요. 율법의 모든 집대성은 안식일에 있어요. 안식일을 잘 지키면 나머지는 다 지킨 걸로 쳐주는 사회가 유대사회였습니다. 그 안식일 자체를 의도적으로 위배하게 만들었어요. 누가? 주님이.
주님은 참 못됐어. 내가 원하는 내 병만… 전에는 팔이 안 올라갔는데 이제는 더 위로 올라가잖아요, 오십견 나아가지고. 내 소원은 팔이 이만큼 올라가는 거예요. 내가 유령되는 게 소원이 아니에요. 유령되면 미쳤다는 소리 듣는데 그걸 어떻게 소원하겠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사람 병을 고쳐주는 게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병을 고쳐준 적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병든 몸을 자기가 인수했죠. 병을 고쳐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그 병을 담당했죠.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네가 죽어가느냐? 나도 죽어간다.
인간 쪽에서 먼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주님께서 먼저 그 사람을 자신의 노선에다 그걸 껴안아버렸죠. 그걸 ‘선택’이라 합니다. 선택해서 껴안아서, 예수님이 저주받으면서 이 땅 이 세상에서 유령되게 한 것처럼 자기 몸속에 이미 들어와버린 그 사람을 함께 껴안고 유령시켜버렸습니다.
함께 껴안는 것을 성경에서는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물만 찍어 바르고 물에만 들어갔을 뿐이지요. 예수님은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이 물세례 속에 뛰어들어서…… 수요일에 그런 얘기했죠. 같이 물세례 속에 뛰어든 그분의 마지막 세례, 십자가 불세례, 심판세례에서 연속성을 가지지, 나머지 물세례에서는 성령세례가 연속되지 않아요. 예수님이 물세례 가서 모든 시작의 세례와 마지막 끝세례까지 예수님만이 연속적으로 완수할 수 있어요. 완주를 할 수 있다고요, 마지막에.
하여튼 간에 여러분들이 첫째 시간에 한 거 잊지 마세요. 하나님의 소원은 뭐라고요?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왜? 이미 약속을 했잖아요. 이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일체 어떤 변동이 없습니다. 요지부동 확고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확고한 거예요. 그 죽는 이유는 이 공간, 우리가 행동 똑바로 안해서가 아니라 이 공간(공간2)에서 태어났다는 자체가 이미 죽음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거죠.
그러면 이 공간의 접점에서 새로운 법이, 새로운 풍선 공간이 주님에 의해서 몰려오는 거예요, 같이. 주께서 이 공간 속을 몰고 오는 거예요. 이 공간(공간1)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 전 이미 ‘언약적 구조화’ 된 거예요. 언약적 구조에요. 갑자기 구조 또 나왔죠. 여기는 구조에요, 구조. 구조가 우리를 구조하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 공간2 여기는 내 위주에요. 나 위주에요. 나밖에 몰라요. 구조가 포크레인처럼 꽉 집는다는 생각을 못하고 인생은 내가 나한테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는 거예요. 내 인생 책임자가 나밖에 없는 거예요. 이런 생각만이 이 세상에서는 바른 소리이고 이 바른 소리를 매일 같이 쉬지 않고 누가 제공합니까? 사탄이 제공하는 거예요. 악마가 제공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이 사탄을 모르잖아요. [누가 나의 욕망이 되게 하는 말을 주는지 인간은 모른다.] 누가 나로 하여금 내가 하는 행동이 항상 옳다고 그렇게 부추기는 자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욕망을 해도 그 욕망은 나한테 정당하다고 합당하다는 것. 선생님을 쥐어 패도 그렇게 팬 애는 자기가 정당해요. 누가 나를 이렇게 했는지, 그 욕망의 원천을 인간은 찾고자 합니다. 이게 인간의 욕망의 본질입니다.
[타자의 욕망이 나의 주체다.] 혼자 자기 쳐다보는 인간은 없습니다. 자연인? 나만 산다, 산속에? 예천에 물난리 날 때 죽었습니다. 타자의 욕망이에요. 인간은 자기 혼자한테는 욕망이라는 게 없어요. 욕망이 생기려면 꼭 누군가 내 앞에 등장해야 돼요, 누군가.
타자의 욕망이 나를 만들어요. 나라는 주체를 만들어요. 그래서 이 나라는 주체는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용물이 없습니다. 이 주체는 실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라는 주체를 만드는 것은 구조기 때문에. 사탄의 세계가 구조적으로 인간을 다루어서 사탄의 말이 인간에게 미끼가 되어가지고, 사탄은 가룟 유다한테 ‘너는 너다우라’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계속 줘요. 너는 너다워야 돼. 너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야.
자, 우리나라 해병대 출신들이 하는 말 있죠. 해병대 특징은 뭐를 잡는다? 귀신 잡는 해병이다. 귀신은 잡아 족쳐야 되고 그 귀신을 잡는 해병대는 물에 빠져도 절대로 죽지 않아야 되죠. 그런데 이 해병대도 구명조끼한테는 못 이기죠.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는 목적은 뭐냐? 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예요. 그럼 행복이란 뭐냐?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병들고 간암 말기 4기라도 나를 잃지 아니하면 그 나름대로 소박하나마 내가 산 이유, 보람, 그리고 행복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이게 누구의 작품이라고요? 이게 사탄의 작품이에요. 이 사탄의 모임, 이것이 오늘날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교회죠. 사탄의 모임. 그 누구도 유령되기를 싫어합니다. 그 누구도. 아까 유령이 뭐라 했습니까? 내 본연의 것이 없어지는 것. 내 것이라는 게 아예 없어지는 것. 그래서 이 교회, 사탄의 교회 특징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거죠. 처음 운 뗄 때부터 처음 교회 올 때부터,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해요.
그러면 그 반대말, 진짜 그리스도의 몸의 세계,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성령의 선으로서의 교회는 뭐냐? [텅 빈 것으로 꽉 차있는 세계]. 이거 뭐 선문선답 비슷한데요. 텅 비어있는 것으로 꽉 차있다. 아까 처음에 했잖아요. 주님은 어디 계신다고 했습니까? 모든 곳에 계시죠. 그런데 아무데도 없죠.
공간이 두 개로 나누어졌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애들아, 공간 2개다.’라는 식으로 말했잖아요. 오늘날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 사람들보고 ‘공간은 2개입니다.’ 그게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옵니다. 나는 땅에서는 죽었고 내 생명은 하늘에 있다. 벌써 공간이 2개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사도 바울에게 물었을 수도 있어요. “누구냐, 너?” “나? 나는 죽었고. 너 나 볼 때 죽은 자로 봐야 돼.” “너 살아있잖아.” “내가 산 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야.” “미쳤구나.” 대화 소통이 안돼요. 언어적 소통이 안되죠.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이미 상징과 기호 이야기한 것처럼 이 세상의 공간에서 정해진 거예요. 공간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공간에서 만들어져서 만들어진 그 말, 언어가 말이잖아요, [말에 의해서 또는 언어에 의해서 인간들은 말의 내용을 제시할 책임을 갖는다]. 누구한테?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한 분들에게 제공할 책임을 가져요. 그래야 사탄의 구조가 유효하니까요. 계속 유지가 되니까요. 그래야 이 공간2 인간들의 공간이 계속 지속될 수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말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아까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논다고 했죠.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뭐까지 발전하느냐 하면 장난감 가지고 노는 것보다 말을 하는 게 더 효과 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이 말을 할 때부터.
인간은 장난감 갖고 놀 때는 장난감하고 이야기하죠. 하지만 말을 하면서 그다음부터는 직접 엄마나 아빠한테 말을 하죠. 말할 때 요구를 하게 돼요. 예를 들어서 젖 떼고 우유 먹을 때 우유가 먹고 싶으면 ‘우유 타줘’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릴 때도 말했죠. 앙탈을 부리고 우는 게 말이에요. 어쨌든 간에 장난감보고 그러진 않잖아요. 장난감 갖고 놀던 애가 말을 하면서 요구를 하게 돼요.
요구를 하게 되는데 이 요구를 하면 엄마가 우유를 주죠. 우유를 줍니다. 우유를 줄 때 애가 측정을 해봐요. 내가 요구하는 것과 엄마가 요구를 들어주는 것과 딱 측정해보니까 이게 일치되지 않아요. 맞질 않아요. 여기서 결핍을 느끼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로 등장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말로서 우유 달라고, 처음에는 우유 달라고 하다가 크면 뭐 달라고 해요? 돈 달라 하죠. 그래서 아이가 괴물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한 아이가 아니고 괴물이 돼가요. 돈 달라는 이걸로 계속 끝까지 가죠.
그런데 ‘우유를 주세요’라고 했을 때 우유를 줬거든요. 안 준 게 아니고 분명히 줬어요. 줬는데 내가 우유 달라했을 때 느꼈던 그 욕망의 양과 직접 우유를 마실 때 욕망의 양이 같질 않아요. 미흡해요. 부족을 느끼고 결핍을 느낀다고요. 그러면 애가 결핍을 느끼니까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TV틀어서 동화 들려달란 말이야’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 욕망의 미흡함을 뭐로 옮깁니까? 우유도 먹고 그다음에 TV트는 것으로 마저 채울 수 있으리라고 자기가 해보는 거예요.
말을 표시하는 형식을 기표라 하는데 될 수 있는 대로 이런 전문적인 용어를 안쓰려 해서 형식이라 합시다. 말의 형식을 s라고 하고, s1이라 하면 이게 모자라죠. 그럼 s2를 또 원하는 거예요. 그럴 때 s1→s2 중간에 인간은 내 주체가 깨어지면서($) ‘나는 엄마의 욕망에 종속된 존재이구나’라는 것을 자기가 느끼기 시작합니다. 엄마가 있다는 자체가, 내가 내 욕망을 요청 요구하면서도 그게 충족되지 않도록 엄마가 내 앞에 존재해 있는 거예요. 타자가. 타인이.
남이 있다는 것은 그 남이 있음으로써 내 욕망은 자극받지만 그 자극 받은대로 상대가 다 채워지지 않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엄마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엄마하고 나 사이에 형성된 구조 자체가 뭔가 빠져있어요. 뭔가 결핍되어 있어요. 뭔가 모자라요. 뭐가 모자라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 원인을 알고 싶어요?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 곧 나죠, 내가 산다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 비-현실이에요. 현실은 욕망만 살아있어요. 욕망이 나보다 더 우세한 거예요. 그럼 나는 뭐냐? 나는 욕망의 노예죠.
이번에 요한복음 책이 나왔는데요. 수련회 때 펼쳐 보일 거예요. 그 책 표지에 지영씨가 거울을 해놨어요. 그 안에 내용 보면 1강에 백설공주 이야기가 나와요. 거울아 거울아, 그걸 감안해서 거울을 그려놨어요. 그런데 거기서 누가 말을 하느냐 하면 ‘거울아 거울아’ 말을 던지니까 그 거울이 이야기하죠.
내가 있고 타인이 있다,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오해였다는 겁니다. 나도 없고 타인도 없고 있는 것은 욕망밖에 없는데 욕망이 욕망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만들어냈고 타인을 만들어내서 둘이 만나도록 주선을 한 거예요. 나도 욕망의 노예이고 엄마, 아빠도 둘다 노예에요. 욕망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 욕망을 나는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이건 내 욕망이고 엄마가 주니까 엄마가 나보다 크니까 나는 지금 우유가 없잖아요. 돈을 갖겠다는 것은 나는 타인으로부터 독립해서 나만의 자기가 살아있음을 자기 스스로 거처 만들어서, 거처 만드는 걸 뭐라고 했습니까? ‘살아있다’ 이렇게 되죠, 살아있다 하고 싶은데 그럼 돈만 있으면 뭐해요? ‘부자네. 아니 세상에, 벤츠 타고 다니네.’ 하고 뭔가 이야기해줄 타인이 있어야 내가 벤츠 탈 마음이 있죠.
조선시대 때는 고관들이 뭐 탔습니까? 가마타고 돌아다녔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가마 못 탔는데. 그런데 조선시대 있는 사람이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와서 가마타고 에헴, 하면 그 앞에 벤츠 탄 사람이 창문 열어서 ‘이거 뭐야? 우리 민속촌 왔어?’ 할 거 아니냔 말이죠. 그러면 가마 탄 그 여자분 둘이, 아씨 두리안 드라마 연속극에 나오는 사람 둘이 이렇게 대사를 쳐요. 고급 신형차를 보고 ‘신종 가마인가?’
아직까지 욕망이 무르익질 않았어요. 현대의 욕망에 아직 물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뭘 고집해요? 내가 옛날 가마 탔을 때 호강했다는 그 호강이 전부인 줄 안 거예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신종 가마인가?
인간은 자기보다 못난 것은 타인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쫓아다닌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타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게 없는 걸 가졌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제자니까 따라다녔잖아요.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어떤 연속성, 내가 얻고자 하는 그 노선에 예수님이 앞서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처럼. 앞서간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사탄이 들어가 영적 존재가 되니까 이게 길이 다르다는 사실을 미리 간파한 거예요, 미리.
그래서 가룟 유다가 자살했잖아요.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살했다고 보지 않아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네가 잘 살았는데 안타깝게 죽는다, 가 아니라 태어난 것부터 안타까운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가 안타깝다면 가룟 유다 두 살 때 돌 사진도 안타까운 거예요. 세 살 때도 안타까운 거예요. 네 살 때도 안타까운 거예요.
가룟 유다는 아무리 인생을 살아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제자리 뛰기 한 거예요. 오늘날 세상하고 똑같아요. 오래 산다고 인간되는 거 아닙니다. 똑같아요. 그럼 인생을 왜 사느냐? 인간은 바뀌지 않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왜 나이 들어도 인간 안 되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 지연시켜보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사람 안 되는 걸.
왜냐하면 욕망의 노예니까요. 욕망만 살아있고 우리는 살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욕망의 귀신이에요. 이래도 유령이고 저래도 유령이에요. 다시 말해서 악마가 거짓말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너를 잘 안다고 치고 너를 지키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악마가 한 거짓말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는데 자꾸 지키라는 거예요. 자꾸 지키고 잃어버리지 말고 버티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우리가 곧이 들어야 돼요. 나보고 살아남으라고 버티라고 하는 게 아니고 네가 품고 있는 욕망을 네가 없애지 말란 뜻이에요. 사탄이. 악마가.
창조 없습니다. 인간에겐 창조 없어요. 누구로부터 쓰여지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후손으로 쓰여지느냐, 여자의 후손으로 쓰여지느냐 그뿐이에요. 인간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주체적 존재 아닙니다. 주체적 존재라 하는 것은 이미 깨졌죠. 찢어졌어요, 인간의 주체적 존재라 하는 것은.
나라는 걸 인간은 모르고 찾을 수도 없어요. 그런데 악마는 거짓말해서 거울 속에 비친 네가 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꾸 남들에게 하소연하고 도와 달라, 살려주세요, 물에 빠졌습니다 해봐도 이건 본인이 본인이라는 동굴 안에서 외치는 자기 안의 메아리에요. 자기 소리가 자기에게 되돌아올 뿐이지, 타인에게 먹히지를 않습니다.
오늘 제목은 이겁니다. . 몸과 귀신의 관계. 주께서는 인간의 몸을 다 부정합니다. 인간의 몸을 몸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용어로 하면 이걸 육이라 했어요. 그전에는 뭐였습니까? 창세기에서 그냥 흙이죠. 이게 악마가 있으니까 육이 되어버렸죠. 몸은 아닙니다.
몸은 누구만 몸이냐? 예수 그리스도만 몸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날 때 사람들이 ‘어? 우리하고 똑같이 생긴 몸이네.’ 아니죠. 아니죠. 똑같이 생긴 몸이 아닙니다. 예수님 몸은 다른 공간,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몸이었어요. 비록 몸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 안의 관계는 언약관계에요.
따라서 언약관계가 끊어지면, 하나님과의 축복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것은 저주의 관계밖에 안돼요. 그래서 우리가 죽어서 흙이 되고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지극히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이제 남은 시간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그러면 새로운 공간2,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있는 공간, 그 공간에서 통하는 언어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완료되고 완성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제 강의도 마무리 지으면서 또 어려운 거 하나 해야죠.
말을 둘로 나눕니다. 벤베니스트(에밀 벤베니스트, Émile Benveniste, 1902-1976 프랑스 언어학자)라는 언어학자가 말을 둘로 나눴어요. ①말 내용의 주체와 ②말 행위자의 주체로 나눴습니다. 어렵죠. 말 내용의 주체와 말 행위의 주체로 나눴습니다.
예를 들어서 위의 ①번 ‘나는 밥이 먹고 싶다’ 여기 ‘나’는 주인공 아닙니까, 주체. 여기서 말(발화(發話): parole, 소리를 내어 말한 형식적 언어행위)의 내용은 ‘나는 밥이 먹고 싶다’ 이것이 말의 전체 내용이고 거기서 말한 주체가 나에요. ‘나는 밥이 먹고 싶다’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내가 이야기할 때 이게 말하는 행위의 주체가 돼요.
그래서 ②번이 뭐냐 하면 말한 행위의 주체거든요. 이거는 영원히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그냥 발악하듯이 말을 해보는 거예요. ‘배고프단 말입니다.’ ‘누가요?’ ‘내가. 내가요!’ ‘네가 누군데?’ ‘그건 모르고 배고프단 말이야!’
계속 말을 해요. 누구한테 합니까? 강아지한테 합니까, 해보고 이야기합니까, 별보고 합니까, 누구보고 해요? 나의 욕망을 채워줄 타인보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타인이 없으면 내가 살 수가 없어요. 인간은 진리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을 원해요. 밥 없이는 사흘 굶어도 전화 안하고는 전화통화 안 붙들고는 사흘을 못 넘겨요.
옛날 개그 콘서트에 있잖아요. 경상도 남자. 남자가 퇴근해서 ‘밥 묵자.’ 밥 먹자는 건 ‘밥 먹자’가 아닙니다. 나 밥 먹을 테니까 너하고 대화할 의사 없다, 그런 뜻이거든요. 밥 묵자. ‘아는? 자나?’ 애는 자냐고 묻는 것도 애가 어떤지 궁금한 게 아니고 애 자는 문제에 대해서 먼저 말 걸지 마, 이런 뜻이에요.
그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는 자기가 자기 고유의 것을 잃어버리기 싫죠. 그러나 실제로 보면 가족은 대화를 잃어버리면 그건 친구보다 더 못하죠. 대화를 안하면 서로가 서로를 이미 시체로 보는 거죠. 죽은 자로 보는 거죠. 둘다 믿음 좋아가지고 인간언어로 소통이 안 될 그런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성도도 복음으로 이야기해버리면 있던 친구 다 떠나죠. 떠나가네~ 다 떠나버리죠.
그래서 인간은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말 통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전화를 누구한테 해요? 남편보고 해요? 아내보고 해요? 안합니다. 누구보고? 딸내미보고. ‘야야, 애들 잘 크나? 뭐 김장 좀 해서 담아줄까? 애는 저희 반에서 몇 등 하는데?’ 이런 거. ‘김서방 요새 잘해주지?’
왜 궁금한데요? 왜 궁금합니까? 자식이 내 욕망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욕망의 실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자식 없으면 내가 없어요. 죽은 해병대 군인이 시험관 10번해서 낳은 자식이랍니다. 십 년 동안 시험관 10번 했는데 걔가 죽었어요. 시험관 얼마나 아프기도 하고 돈도 들고. 아기를 왜 갖고 싶어 했어요? 타인이 없으면 내가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악마의 욕망의 노예이기 때문에.
악마는 그런 식으로 인간을 갖고 놀았어요, 지금껏. 귀신 되기 싫으면 내 말 들어라. 주님은 어떻습니까? 나만 믿고 귀신 되자. 내가 너 안에 살게. 너는 껍데기만 껍질만 제공하라.
이게 바로 오늘 p.251에 고린도후서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맙게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타인으로 간주해요. 타자로 받아들인 거예요.
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언약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웃이 필요한 거예요. 사랑하는 이웃. 그래서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된 겁니다. 생명 얻은 겁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내 사랑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 주께서 우리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자기 몸이기 때문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뭘 하셨는지 또한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대비적으로 깨닫게 해주셔서 성경 말씀 하나하나가 내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 손에서 다 이루어진 채로 성령으로 적용돼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