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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30721a 고린도후서4장 11절(몸과 유령)-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고린도후서

광주강의20230721a 고린도후서4장 11절(몸과 유령)-이 근호 목사

p.251 중간에 보면 개혁주의적 성경신학자들의 성경해석에 대한 문제점을 언급했습니다. p.251 위에서 7번째 줄에 보면【그 역사관은 최종 묵시성취에 있어 인간들의 이러한 애씀이 죄악된 것으로 가담된 채 이루어짐을 알지 못하고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애쓴 그것을 성경 자체가 죄로 규정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성경에 덤벼든다 이 말입니다.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문제점이. 여기 이 논문발표가 개혁주의 성경모임에서 했거든요. 이거 보니까 그들이 화를 낼 만하네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자기 구원됨’(나 구원받았음), ‘나도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 맞다’를 우기면서 증빙 자료를 외부에 알리는 주체의 본성적 특징을 감안하지 않고서는 십자가 사건이 언약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언약과 주체 문제를 연결하지 아니하기에 복음에서 송출되는 ‘죽은 분’의 시간 잠식 능력을,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몸을 가진 자신의 몸을 규정하는 용도로 시간을 설정했고, 그 시간 위에 ‘하나님 나라’를 실으려고 한 것이다.】

문장이 굉장히 어려운데요. 여기서 뭐를 봐야 하느냐 하면 ‘죽은 분의 시간 잠식 능력’이라 하는 거요. 죽은 분의 시간 잠식 능력. 예수님이죠. 예수님께서 인간의 시간을 잠식한다. 또는 갉아먹는다. 없애버린다. 그러한 능력이 죽은 분에게 있단 말이죠.

없앤다. 누가? 주님이 없앤다. 뭐를 없애느냐? 모든 있는 것을 없애는 분, 없이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을 볼 때 자기가 여기 있음을 계속 있음으로 이어보려고 누구의 힘을 찾고자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라는 분의 힘에 부탁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 무엇을 도와달라고 하는 것인가 하면, 구원받게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죠. Help me잖아요. 나를 살려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의 일은 살려주는 게 아니고 반대로 죽여주시죠. 그러니까 이건 개혁주의 신학하고 맞질 않는 거예요.

특히 여기 p.251 위에서 4번째 줄에,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Nicolaas Ridderbos, 1909-2007 네덜란드 신학자)를 제가 의도적으로 언급했어요. 한국의 신학생들이 다 리델보스의 책을 보고 있으니까요. 리델보스 이 사람이 성경을 해석하는 걸 보면 예수님께 부탁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준다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구원받게 해 달라’ 이것을 죄로 규정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게 왜 죄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취지와 정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은 이 땅을 이용해서 이 세상을 이용해서 죽으러 오셨는데 메시아를 고대하는 인간들은, 특히 예수님 제자들도 그렇죠, 예수님 만나서 자기가 힘들 게 사는 인생 형편 한번 낫게 해보자, 멀쩡하게 한번 살아보자는 식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하소연과 호소를 하고 있단 말이죠. 그 해석이.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항상 이게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어야 해요. [아니야! 그게 아니야!] 아니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야!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이게 깔려있어요.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아니야 그거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를 예수님이 극단적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들의 무지함이 나타나요.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고 하니까 인간들은 ‘뭐가 아닌데요?’ 이래요. 이게 인간들의 무지함이에요.

주님께서 ‘아니야’라고 하면 ‘아, 내가 아니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내가 어떤 시도를 하고 어떤 기대를 하고 어떤 희망을 갖는다 할지라도 나는 이미 아니야.’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뭐가 아닌데요?’. 주님이 아니라 하는 것을 내가 앎으로써 그걸 통해서 내가 구원받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하는 아이디어를 또 포기 못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정리할 것도 없어요. 굉장히 간단해요. [예수님은 ‘내가 있다’ 하는 이것을 없애버리려 하신다.] ‘인간 내가 있다’ 이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인간은 없다’가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없애는 이유, 인간은 없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어느새 ‘내가 있다’가 돼요. ‘내가 있다’로 행세하는데 창세기 6장에 보면 이걸 육체라 합니다. 육체 (창 6:3). 인간은 처음에 흙이었죠. 흙이었다 하는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창 3:19)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중간에 또 슬슬 바람을 넣는 악마가 인간 속에 개입을 했죠. 인간과 단짝이 되었으니까 개입하는 거예요. 악마가 개입해서, 흙이 계속 흙으로 살면 되는데 ‘누굴 낳고 죽었더라’ 이러면 되는데 갑자기 이게 육체가 되어버린 거예요. 인간이 육체로 행세하는 겁니다. 육체란 표현은 하나님 쪽에서 했지만 사실은 육체가 아니고 그들은 자기가 인간 또는 사람으로 행세하는 겁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벨은 자기를 대신해서 양을 바쳤어요. 자기를 대신해서 양을 바쳤습니다. 아벨은 자기가 흙인 것을 알죠. ‘내 자신은 이 정도밖에 안 됩니다’를 자기를 대체하는 양이 가차 없이 하나님 앞에 죽을 때, 하나님이 양을 잡아 죽일 때, ‘그 양의 모습이 바로 현재 내 모습입니다’ 이렇게 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가인은 자기 농사짓는 것을 갖다 바쳤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그걸 안 받는 이유를 창세기 4장에서는 안 나타내요. 그냥 ‘농사지은 건데 하나님 쪽에서 안 받았다. 아벨의 양은 받았다. 아벨 제사는 받고 가인은 받지 않았다.’ 이걸로 딱 되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벨을 받은 이유가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에 받았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아벨이 여기 있는데 하나님 계시잖아요. 하나님 계실 때 아벨의 믿음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계시면, 나 같은 것은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존재하신다.’를 드러내기 위해선 내가 같이 있어버리면 안돼요. 나는 없어져야 ‘하나님만이 계시다’가 확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드러나는 방법은 뭐냐? 자기 죽음으로 합세하는 방법밖에 없죠. 그게 자기의 인생이라고 보는 겁니다. 합류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합류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앞에서 ‘나는 절대로 살아있는 존재가 아닙니다’를 고백하고 표현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굉장히 쉬워요. 이것은 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렇게 되어 가요, 모든 일들이.

감자요리에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감자요리 중 제일 맛있는 게 맥도날드 가면 감자튀김이 있고 또는 감자찜 해먹고 또 감자에 멸치 국물내서 감자조림해서 먹고. 감자요리가 다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감자를 위함입니까? 감자를 위함이 아니고 먹는 사람을 위함이죠.

똑같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물로 죽이고 제자한테 얻어맞아 죽이고 제자 학부모한테 욕 얻어먹었다고 자살해서 죽고. 오송 지하도가다 죽이고 음주운전 차에 받쳐 죽고 갑자기 병들어 죽고.

튀김 해먹고 조림 해먹고 하듯이 인간이 갈 길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흙이 되어야 돼요. 나중에 흙 되는 건 소용없어요. 앞에 뭐라고 했어요? 너는 뭐다? 너는 흙이니 흙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뭐가 잘못됐어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는데 그게 뭐 하나님께 큰 하자 있습니까? 문제 있어요? 흙이니 주께선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뭐하느냐? 에어컨 필터나 청소하면 되죠. 필터 청소하나 안 하나 청소하는 그 순간도 어디로 가고 있어요? 흙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흙으로.

도대체 우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죽기 위해서 태어나서 죽는 게 그것도 하나님 책임입니까? 아니죠. 죽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 그건 내가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인간이 마귀에 속해가지고 도대체 자기 자신이 육체가 되니까 인간이나 사람인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범을 보여줬습니다. 예수님이 뭐로 오셨습니까? 육체로 오셨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은 이유는 단 한가지에요. 육체, 죄의 몸이 되셨기 때문에 저주받는 겁니다.

그런데 죄의 몸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갖고 있는 게 죄의 몸이 아니고 동일한 몸을 우리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죄의 몸 때문에 아버지께 저주받는다면 동일한 아담의 몸을 갖고 있는 우리는 뻔하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어요.

주님이 먼저 저주받는 몸이라는 것을 알려줬으면 우리도 그걸 보고, 아, 내가 저주받는 몸을 갖고 있으니까 그럼 주의 뜻에 의하면 우리 육체로 인하여 저주 받잖아요. 그러면 저주받으면 되는 거예요. 이것도 쉽죠? 지금 제가 쉬운 이야기만 한 거예요. 쉬운 이야기만.

그런데 주님께서 이 쉬운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거기에 대해서 막 반발이 일어나는 거예요, 반발이. 그래서 주님께서 ‘아니야! 그거 아니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가 아닌데요? 몰라. 뭐가 아닌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그다음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땅에서 사라졌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또 오해하느냐 하면, 맨날 오해밖에 안해요 하여튼,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도로 갔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잠시’ 다녀갔다, 이렇게 생각해요. 잠시 다녀갔다.

그게 그들의 엄청난 오해입니다. 어떤 점에서 오해냐 하면… 이게 마태복음 가게 되면 잠시 다녀간 게 아니에요. [어디든지 계시지만 어디에도 없다]가 돼요. 어디에도 다 계시는데 어디에도 없어요. 이 문장에서 동일한 것과 다른 게 있어요. 동일한 것은 ‘어디에도’, ‘어디든지’ 이건 같은 뜻이에요. 그런데 ‘계시다’는 것은 있음이고 ‘없다’는 것은 없음이죠.

동일한 공간인데 동일한 공간이 서로 다른 공간이 돼서 겹쳐져버린 겁니다. 한쪽 공간을 공간1, 다른 쪽 공간을 공간2라 본다면, 공간1은 주님이 어디든지 계시는 공간. 공간2는 어디에도 주님이 없는 공간. 예수님이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이 두 공간이 합체돼서 현재 하나의 공간이 되었어요. 하나의 공간이 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합체된) 하나의 공간을 감당할 수 있지만 인간은 두 개의 공간에 동시에 자기 존재가 기거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어요, 인간은. 이제부터 차츰 차츰 어려워집니다. 이건 어려운 축에도 안 들어가요. 이제 진짜 어려운 게 들어갑니다.

‘있다/ 없다’가 되잖아요. 인간은 하나의 공간만 점유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우리한테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인간은 공간1과 공간2 가운데 어느 쪽을 받아들입니까? ‘주님은 어디에도 계시다’는 공간(공간1)을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은 여기 없다’의 공간(공간2)을 받아들여요. 주님은 여기 없다.

주님이 떠나갔으니까 여기엔 없고 내가 사는 곳에는 ‘주님이 없음’이 돼요. 내가 사는 곳에는. 그럼 주님은 어디 있냐? ‘주님은 다른 나라, 천국에 가서 사신다’가 돼요. 지금 이 논리에 있어서 여러분들은 눈치 챘겠지만 ‘있다/없다’ 개념이 내가 ‘살아있다’ 그다음 반대말은 내가 ‘죽었다’가 되겠죠.

내가 죽으면 예수님 공간에 합류하겠지만 현재 이 공간은 내가 아직 안 죽었으니까 살아있는 공간에는 주님이 없는 게 돼요. 주님이 안 계신 게 돼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의 공간을 추구한다는 것은 조건이 있었어요.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조건 하에 나는 여기 이 공간에 머물겠다. 내가 살아있는 공간.

만약에 내가 살아있는 이 공간에 죽은 자가 나타난다면 이건 바로 ‘유령’이 되겠죠. 유령이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유령이라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어요. 예수님께서 밤에 물 위를 걸어올 때 제자들이 “유령이다!”. 다른 말로 풀이하면, 나는 실체가 있는데 저쪽은 실체가 없다.

그걸 좀더 풀이하게 되면, 실체인 나는 물 위를 못 걷는데 수증기 같이 실체가 없기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잖아. 빠른 시간 내에 인간은 그걸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음의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나와 맞지 아니하면 유령 내지는 귀신으로 보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빈 무덤에 있던 천사도 그런 이야기했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산 자를 왜 죽은 자에게서 찾느냐] 했어요. 마태복음 8장 한번 봅시다. 다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어디와 매치되느냐에 따라서 또 의미가 달라질 수 있어요. 마태복음 8장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인간이 있는 공간에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인간 본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 안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직도 살아있다고 본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도 마찬가지에요. 아직 살아있다고 본 거예요. 죽은 사람은 아버지가 죽었지, 자기는 아직 안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서 장례 치러야 되니까 장례 치르고 난 뒤에 예수님 따라가겠습니다, 한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은 제자들 보기에 자기가 살아있는 방식으로 예수님도 살아있다고 같이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불쑥 뭐냐 하면,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너희 아버지 죽은 것은 당연히 죽은 거고 그걸 장례 치르는 인간들도 내가 보기엔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로 보는 겁니다.

그럼 누가 살았어요? 다들 죽어있는 세상 같으면 누가 살았어요? 예수님은 살아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유령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유령은 유령 자기 동네에 살지, 사람들이 살아있는 이 동네에 왜 유령이 나타나느냐 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어디에도 없다 하는 것은 평소에도 늘 그런 말씀하셨어요. “아무도 나를 찾을 수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나오는 말씀이에요. [아무도 나를 찾을 수가 없다].

아무도 나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은, 나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 이유는요? 너희들이 다 같이 죽은 공간에 있기 때문에. 죽은 공간에.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예수님‘만’ 살아있어야 돼요. 나머지는 죽은 자이어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만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육에 속하기 때문에 당연히 죽은 거예요. 흙이에요. 흙으로 돌아가야 돼요. 이건 어렵지 않아요. 이건 마땅한 겁니다. 뭐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돼요. 죽었다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안돼요. 죽은 자란 말이죠.

죽은 자가 예수님을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이 사람들이 왜 죽었냐 하면 보통 죄 때문에 죽었다 하잖아요. 그런데 더 명확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요. ‘죄 때문에 죽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내가 죄를 많이 지었구나’ 이렇게 오해하기 때문에 죄 때문에 죽었다는 말 대신 더 명확히 해서 ‘죽음의 힘에 갇혀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죽음의 힘에 갇혀있단 말이죠. 인간은 죽음의 힘을 못 이겨요. 이미 선악과 따먹을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그 힘을 우리가 무시하면 안돼요. 에이, 괜한 소리 한다. 괜한 소리가 아니고 그 자체가 현실이에요. 다른 현실을 생각하면 안돼요.

우리가 그럼 열심히 운동하는 건 뭐냐? 하나의 죽어가는 모습이죠. 요새 매일우유 자주 이야기하는데 [매일의 삶은 죽음의 연속]이에요.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그냥 제자리 뛰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죽음으로 가는 죽음의 연속이 매일의 삶이에요.

하루치 살 때마다 그만큼 팍삭까지는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삵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냉장고에 음식 담으면 ‘아이고, 싱싱하다’ 하지만 한 달 두게 되면 역시 먹기에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노인네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침에 샤워하고 또 뭐 인터넷 보면 노인들 귓속까지 씻어야 냄새 안 난다고 아무리 씻고 해도…… 우리교회 장로님은 십년 전부터 향수를 몸에 갖다 부어요. 부인되시는 권사님이 얼마나 챙겨주시는지 몰라요. 본인은 본인을 모르는 거예요. 저도 이제 거기에 진입했습니다. 제 아내가 집중 관리해요.

이건 누구 잘못이 아니고 버림받은 육신에서 자동적으로 죽음의 냄새가 피어나는 겁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한다. 죽은 자들은 아무도 산 자를 찾을 수 없어요. 어떤 누구도.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이해가 되실 거예요. 차이점을 제가 조금씩 만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죄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죽음의 힘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그럼 죄는 뭐냐? 조금씩 차이점을 만들어가니까 여기서 자꾸 응용문제가 계속 나와요, 논리가. 죽음의 힘에 갇혀 있을 때 죄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살고 싶어하는 게 다 죄죠.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럼 산다는 것이 뭐냐? 산다는 것은 자기가 포기되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럼 왜 자기가 포기되지 않는가? 착각을 한 거예요. 내가 죽음에 갇혀있다는 것을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못 받아들이고 멀쩡하게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살아있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현재 나를 살아있다고 인식, 알게 하는 것을 인식이라 합니다, 나를 인식하는 이 공간을 못 벗어나는 게 바로 주님께서 규정한 죽음, 죽었다 보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으니까 그걸 죽은 자라고 보는 거예요. 주님은 공간으로 보는 거예요. 공간으로.

너희 아버지가 남보다 죄 많이 지어서 죽었다, 이게 아니고 너희 아버지가 남보다 더 나쁜 짓해서 죽었다는 게 아니고 너희 아버지가 생각하는 그 공간 자체가 죽음을 생산하는, 죽음을 발생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네 아버지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너는 누구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은 하나의 공간 그 자체에 대해서 포기하고 나오라는 이야기에요. 너 자신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살던 공간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레위기 7장 1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찌니” 화목제물에 관한 겁니다. 7장 16절부터 보게 되면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찌니” 18절,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제사를 지냈다. 그럼 제사를 지냈으면 그걸로 끝이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화목제물의 제사가 아직 안 끝났어요. 그 희생의 고기를 삼일까지만 먹고 그다음에 먹지 않아야 제사가 마감됩니다. 종결됩니다.

만나는 뭡니까? 만나는 몇 일분이에요? 딱 하루분이죠. 내일 만나를 미리 저축하면 안되죠. 저축이나 저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장한다, 저축한다는 말은 그 의미가 무슨 뜻이냐 하면 ‘오늘 내가 만나먹고 살았다’는 거예요. 이런 게 참 어려워요.

‘나는 이 광야에서 이 사막에서 만나먹고 살았다.’ 이 의식 자체가 이게 잘못된 거예요. [만나가 죽을 죄인과 결합되어 하루치의 만나가 살아있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만나가 살아있는 거예요.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께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인데 특별혜택을 주는 거예요. 만나와 결합하면 하루치는 살려줄게. 주님께서는 지금 배려를 해주시는 거예요, 배려를. 만나. 말씀 살리는 게 목적이지, 우리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말씀만 살아나면 끝이에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 5장 28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어떤 인간도 예수님이 키워놓은 그 무덤 안에서 벗어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이제 네 무덤은 없다는 거예요. 전부 다 누구 무덤인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죽으신 예수님의 무덤에 모든 인간이 다 있는 겁니다. 주님의 자기 무덤으로 인간세계를 가둬놓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말인지……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기이히 여길 말씀을 해놓고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은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이용하든 부처님을 이용하든 하나님을 이용하든 내가 살게 해주면 좋은, 착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주님의 관심은 처음이고 끝이고 산 분은, 살았다고 할 분은, 생명이라고 하는 분은 예수님만 생명이에요. 우리는 생명이 아니어야 돼요. 우리가 생명 되면 안돼요. 우리가 생명을 소지해서도 안돼요. 내가 생명 소지해서 내가 생명 되면 안돼요. 오롯이 주님만 생명이어야 해요.

생명나무는 우리어야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만 생명나무 되어야 돼요. 주님은 우리를 그냥 이용할 뿐이지. 여전히 우리는 생명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이유만 있고 살 이유는 없어요. 살 이유를 우리 스스로의 행동이나 선택과 결정에서 찾지 마세요. 그런 건 없습니다.

이제 진짜 어려운 거 들어갑니다. 어렵다 해놓고 들어보면 뭐 어렵지도 않고, 또 어렵다 해놓고 어렵지 않고……. 그게 뭐냐 하면 ‘누락’입니다. 누락.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떠났습니다. 공간2라 했죠. 공간2의 특징은 인간들이 현재 살아있다고 여기는 그 공간. 공간2.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주님께서 여기에 왔다가 사라졌다. 따라서 예수님 왔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숫자 하나 줄었을 뿐이지, 공간2는 멀쩡하다고 생각하겠죠. 멀쩡하게. 이 공간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주님께서 공간1, 주께서 계시는 공간이 같이 합체되어버리면 같이 중첩되어버리면 공간2의 인간들은 뭔가 빠졌어요. 뭔가. 뭔가 빠져버린 상태. 뭔가 빠져버린 겁니다. 뭐를 빠트렸는지 모르겠는데 뭔가 빠졌어요.

이 빠졌다는 말을 hole, 구멍이라 보는데 하나님께서 이 구멍을 드러내고 살리기 위해서 모든 인간을, 인간이라 합시다, 인간도 아니지만, 모든 육체를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자비의 그릇, 하나는 진노의 그릇. 그릇의 모양을 한번 보세요. 그릇의 모양은 안이 텅 비어있음을 의미합니다. 텅 비어있음.

그래서 죽음에 있는, 공간2에서 살고 내가 살았다고 여기는 자에게 공간1이 공간2에 침투해서 온다면 나는 나로 인하여 꽉 차있다는 이것을 누락시키고 빠트리게 만들어요. 긁어내든지 하는데. [내 안에서 내 것을 철수 또는 철거하는 작업]으로 성령이 오시게 돼요.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공간1과 공간2가 같이 합체를 하는 거예요. 합체를 해버리면 내 안에 내 것으로 있던 것을 철거해 가죠. 철수하는 겁니다. 철거하고 철수하는데 그냥 내가 했던 노력과 그런 것만 철수하느냐? 아닙니다. 더 철거해버려요.

바로 나의 ‘있음’까지 없애버립니다. 목사님, 이걸 죽음이라 하지 않습니까? 나의 죽음도 철거해버려요. 나의 죽음도. 자칫해서 나의 죽음 이거 철거 안 되면 자기부인에 대한 개념이 ‘나는 다 비우고 비웠습니다’ 해서 비워놓은 어떤 바탕, 껍데기는 뭐 있는 것처럼 되는데 주께서는 그것도 다 없애버려요. 그것도 없애버린다고요. 가져가버려요.

이러한 하나님의 철거에 대해서 그걸 느꼈던 자가 있어요. 영적 존재가 있어요. 예수님 열두 제자 가운데 영적 존재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바로 가룟 유다밖에 없었어요. 가룟 유다가 스승인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뭘 노린다는 것을 눈치 챈 거예요. ‘내가 주님께 모든 걸 바치고 드렸습니다.’ 아니, 그걸로 멈추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는.

주께서 끝까지 거덜내는 게 있어요. 내 존재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쳐들어오시는 이유는 바로 아까 제사법, 레위기 7장 나오죠, 제사법에 준한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제사법에 준해서 일관돼요, 이것은. 중간에 뭐 아이디어 꺼내고 이런 거 없어요. 애초부터 율법줄 때부터 있던 원래 계획 그대로 실천할 뿐이에요.

이 전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방금 내 존재 자체를 없앤다는 이 말을 크게 쓰겠습니다. [나의 고유의 것을 없앤다.] 나의 고유의 것, 나 너를 구분할 수 있는, 이것은 네 거고 이것은 내 것이라는 마지막 남은 내 것, 너는 너 존재고 나는 내 존재라 하는 그 존재마저 거둬 가버리면 네 것과 내 것이 없어지겠죠. 나의 고유한 것을 없애버리죠. 나의 고유한 것이 없는 상태가 두 자로 ‘유령’이에요. 유령. 자기 고유한 것이 없어요.

성경 구약에서는 이 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지금 유령 이것은 신약적 개념이고요. 신약에서 말하는 개념이고.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 대표적 유령 아닙니까. 스데반 집사가 대표적인 유령이잖아요.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자기 것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죠. 스데반 집사는 자기 고유의 것이 없어요. 자기 몸은 없고 다 주님의 몸이에요. 여기 p.251에【날마다 우리는 죽은 몸으로 변모시키는 묵시적 완성도로서의 성령의 능력】밑에서 10번째 줄에도 나오죠.

구약 잠시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기거할 자리, 땅 마련이에요. 내 자리를 마련하고 땅을 마련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산다는 특징이 이거에요. 인간이 21세기에 산다는 것은 내 거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사는 겁니다. 내 땅이 있는 거예요. 특히 구약에서 땅이 있는 것, 자리가 있는 이것을 생명, 목숨 유지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제일 소원하는 것 중 하나, 다급하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내 고유함을 지킬 수 있는 내 거처가 마련되는 것이 젊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에요. 잔소리 듣기 싫어서 용감하게 뛰쳐나왔는데, 뛰쳐나와서 간 곳이 뭐 전세 사기에 걸리고. 그러니까 사람들은 빨리 돈 벌어서 내 집 마련하는 거예요. 내 집, 내 거처가 마련되면, 내 땅이 마련되면 나는 그 땅에서 ‘산다’가 성립돼요. 나는 산다, 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 거처를 없애버려요. 이 거처는 공간2에서 나왔기 때문에. 공간2에서 여러분 각자 주소 다 있죠? 주민등록 다 되어있죠? 자기 자리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리가 주님의 무덤 속이에요. 이미 죽음이 작렬하는 거예요. 이 무덤 속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에게 맞아죽은 자리에요, 이 자리가.

사람들은 자기가 얻어맞고 교사가 제자한테 얻어맞는 것만 생각하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얻어맞은 거 생각합니까? 그거 생각해요? 교인들도 생각 안해요. 성도는 생각하는데 교인들은 생각 안해요. 예수님 눈이 밤탱이된 거 생각합니까? 그거 누가 때렸어요? 사람들이 때렸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느 동네 사람입니까? 우리 같은 마을 사람이에요. 같은 마을. 이걸 고상한 말로 동향인이라 해요. 같은 다정한 이웃이 예수님 때려죽인 거예요.

사람은 자기 욕 얻어먹는 것만 굉장히 예민하죠. 예수님 욕 얻어먹는 것은 남의 일이에요. 왜 그런가? 아직 자기의 거처가 있다 이 말이거든요. 예수님 욕 얻어먹든 말든 나는 내 몸 하나 누일 자리 있으면 됐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든 말든 나는 살았다는 거예요. 거처 있을 때는 산 거예요. 그걸 나만의 고유한 것이라 해요.

요즘 20,30대 여자 분들이 결혼하면서 소망이 있어요. 결혼하면서 소망이 혼자 사는 거예요. 애초부터 결혼할 때부터 같이 살 마음이 없어요. ‘나를 위한다는 조건하에 살아줄게’가 되었지, ‘같이 산다’는 인간에게는 성립 안됩니다. ‘나부터 살리고’가 되지, 같이 사는 건 없어요. 이혼한다는 말은 아니고 살기는 사는데 나만 위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각 방 쓰고. 방 2개 이상 돼야 돼요. 하여튼 살긴 사는데 ‘나만 위해주는 조건 하에 너하고 같이 살아줄게’ 이거에요. 그 소망이.

그러니까 결혼하고 난 뒤에 나빠서가 아니라 결혼하기 전부터 아주 일관성이 있어요. 오직 나만을 위하여. 고유의 나만을 위해서. 그걸 잃어버리면 내가 죽는 자가 돼요. 내 것을 잃어버리면 죽은 자가 돼요.

그러나 주님은 성도를 유령으로 만들어놨어요. 이 인간 공간에서, 어떠해도 너만의 것과 너의 자리를 하나님께서는 없애버립니다. 이유가 뭐냐? 몸이 더 이상, 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네.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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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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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