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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17장 37절 (새로움과 심판) 2300704b-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17장 37절 (새로움과 심판) 2300704b-이근호 목사

창세기 32장 2절에 보면 야곱이 자기 중심으로 언약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입니다.

제가 어릴 때 다녔던 교회에 청년회를 조직했는데 청년회 이름을 지었어요. 마하나임이라고. 하나님의 군대. 뜻도 몰라 하여튼 성경 나오니까 좋은 건줄 알고 했는데 하나님의 군대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죽으심을 품고 활동하는 군대 또는 부대. 하나님의 죽으심을 품고 활동하는 군대.

그러니까 하나님의 군대는 그들이 조직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조직했다는 말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최고 사령관으로 조직을 해서 예수님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군대가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이 성도의 원형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성도라는 것은 어디서 새롭게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품고 사는 자, 예수님의 피와 살을 품은 자가 하나님의 성도가 됩니다. 그 외에는 성도가 아니에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은 예수님의 성과, 아버지의 언약을 온전하게 이루었다는 그 성과를 성령이 와서 그것을 우리에게 안에다가 심어주는 거에요. 예수님의 것이 생소한 우리에게 심어주는 겁니다. 그 심어주는 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죽으심이에요. 초대교회 때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초대교회 때 사람들이 떡과 잔을 나누는데 예수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라고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모임 단체들이 어떤 명분이 있는데 그 명분이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명분으로 모였다는 말은 이것은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스냅사진. 죽은 자의 특징은 더는 본인의 활동은 없다가 돼요. 본인의 활동은 없는 거에요. 주님의 사진기로 우리를 찰칵 찍을 때, 그것도 컬러사진이 아니고 흑백사진으로 찍었다고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계속 앞으로 살면서 어떤 활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뭐냐? 흑백사진 안에 다 들어있는 거에요. 우리가 어디 가서 사업을 하던지 출장을 간다 할지라도 어디 가더라도 예수님의 죽음을 품은 자로서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하고 뭘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어딜 가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품기 때문에 이 성도의 특징은 흔들림이 없다. 흔들림이 없죠.

일종의 스노우볼 같은. 기념품 있지요. 플라스틱 안에 있어가지고 거기 산호초도 있고 있지만 딱딱하지요. 거꾸로 하면 눈이 막 쏟아지고 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안에 장면으로 확정되었어요. 평생 동안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 안에 계속 있는 거에요. 그것도 흑백사진으로서.

제가 흑백사진이라고 하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휘황찬란한 그 어떠한 것이 그게 무채색 된다는 거에요. 색감이 살아날 수가 없지요. 예수님 죽으심 자체가 시커먼 흑백사진인데. 인간이 자기가 빨간색 파란색 분홍색 노란색 그거 색감이 나올 리가 없지요. 안 나오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흔들림이 없지요. 흔들림 없으니까 괴롭다 슬프다 이런 것에 대해서 거기 지장 받지 않습니다. 같이 휘둘리지 않지요. 괴롭다든지.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흔들림이 없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있기 때문에 본인의 구원이라든지 본인의 구원의 탈락 또는 지옥 가는 것을 그거는 본인이 결정합니까? 주님이 결정하는 거에요? 주님이 결정하지요. 주님이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지 제가 억지스럽지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청년들 사진 찍는데 여자 청년도 있고 키 큰 남자도 있고 사진을 찍는데 여기서 죽으신 주님도 찰칵 찍힌다 이 말이죠. 주님 죽으심도 같이 찍힌 거에요.

그러면 이들이 전부 다 공통적으로 성령을 받았다 칩시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을 주신 분이 죽으신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같이 계신 거에요. 그런데 이 여자청년은 시집가서 애가 둘 있다. 얘는 34살인데 아직 안가고 있다. 여러 가지 있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흔들림이 있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게 의미가 없지요.

누군 춘천 닭갈비 먹고 누구는 흑돼지 먹고 이런 거 거기에 대해서 아~ 나 그때 나 닭갈비 안 먹고 흑돼지 먹을걸 이런 마음의 갈등을 느낄 필요가 없지요. 갈등을. 본인의 선택이 아니고 여기 스냅사진, 동결된 스냅사진. 그 사람이 10년 뒤에 어떤 일을 하고 50년 후에 어떤 일을 해도 그건 스냅사진 확정된 거다 이 말이죠. 확정된 것. 흔들릴 필요가 없어요.

누가복음 17장 34절 보겠습니다.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라고 되어있지요. 여기 버려둠 된 자나 데려간 자나 둘 다 당했어. 버려두는 식으로 당했고 데려가는 식으로 당했어요. 따라서 33절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거는 우리에 있는 목숨에 대해서 자기 목숨이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목숨을 갖고 있다는 이런 뜻이에요.

내가 내세울 게 없는 목숨, 하고자 해도 그게 무의미한 그런 목숨을 우리는 애초부터 부여받게 된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은 몰살당하고 심판 대상이기 때문에. 심판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한다? 판단을 한다? 예리한 판단력 소용없습니다. 예리한 판단력도 마찬가지. 모조리 심판받게 되면 누가 구원받느냐 하는 것은 우리는 그냥 당해야 되지 내가 “여기 저 천국 가겠습니다!” “손 내려 손 내려 손 내려”가 되는 거에요.

이러한 누가복음에 17장에 이 이야기에 대해서 그 근거에 대해서 구약을 통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구약을 찾아보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좀 이렇게 여러분들이 힘드십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은 항상 우리가 힘들어도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자꾸 성경 보면서 출발점을 주님부터 출발 하는 게 아니고 나부터 출발해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피해야 된다고요. 이걸 피한다고요.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아 나는 데려감을 당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할 권한이 없는데도 그런 생각이 나온다니까요. 구약의 이 될 뿐이지 거기 우리가 개입하거나 끼어들 입장이 안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목사님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게 없네요. 나는 아무것도 안 할랍니다. 누구 맘대로 아무것도 안 해요? 누구 맘대로. 본인이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고 숨 안 쉬고 나 이제 숨 안 쉴 거야. 그것도 숨 쉬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한 게 없어요. 왜냐 하면은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은 내가 일해서 월급타서 밥 먹었다 하지만 배고프고 밥 먹고 일하고 있는 튼튼한 두 팔, 두 다리 이런 것조차도 주께서 허락이 되니까 이게 지금 움직이지요. 차 사고 나가지고 목발 짚고 다녀보세요. 1년 동안 누워보세요. 교회도 못나갑니다. 우리 교회 그런 분 있어요.

우리는 내가 결정해서 내가 마음껏 휘젓고 산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요 담배도 안 피고 마약도 안하고. 누구 맘대로 마약 안했어요? 나는 술도 안 먹고요. 누구 맘대로? 그건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에요. 그야말로 우리는 구원 받는 것만 당하는 게 아니고 술 끊고 담배 안 피는 것도 당하는 거에요. 모든 것이 태어난 것부터 우리는 당한 겁니다.

태어나자마자 냉장고 들어가는 거 안 당한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에요. 너 같은 인간 태어나도 소용없다는 것. 태어나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천국 백성이에요. 왜? 새로움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태어난다는 것은 옛 부대에 옛 술을 담는 식이에요. 옛 것에 태어나서 새 것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새 것은 예수님만 새 것이에요. 예수님만 새 것이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우리의 모든 신분과 우리 모든 미래가 확정돼야 됩니다.

그럼 우리 남은 인생은 과거사에요. 우리가 내일도 과거라니까요. 모레도 과거에요. 좀 독수리 눈알을 갖고 있어야 돼요. 독수리처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간을 툴툴 털어버리고 시간 없는 그 공중으로 날라가버려요. 날라가버릴 때 위에서 보면 모든 것이 과거사입니다. 우리는 또 내일되면 또 열심히 과거를 살라고 싸매고 걱정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어차피 본인의 운명 본인이 결정할 사항이 아닌데. 무엇을 노리고 그렇게 열심히 고민하고 끙끙 앓고 눈물 흘리며 살았는지 다 부질없는 거에요.

일본에서는 화장할 때 이런 화장이 요새 뜬답니다. 풍선을 만들어가지고 조상의 유골을 풍선에 띄워버려요. 가격 200만원 되겠습니다. 그럼 풍선이 올라가서 터져버리죠. 그걸로 영원히 조상하고 빠이빠이. 조상의 뼈가 하늘에서 쏟아져요. 쏟아져서 샤랄라라라라~~. 조상의 뼈가 하늘에서 쏟아져요. 할렐루야 노래처럼. 땅에 묻을 자리가 없어가지고 풍선 띄워서 보내는 거 확실하게 보내버리는 거에요. 독수리가 쪼아서 중간에 터지던지 그건 내 소관 아니고.

제가 여기서 좀 어렵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왜 신약의 누가복음에 이런 식으로 구원 이야기 왜 나왔느냐? 이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구약의 예언대로 신약이 이뤄지고 신약의 예언대로 요한계시록에서 이뤄져요. 그 세 가지의 관계를 이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말라기 보겠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4장 3절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5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렇게 해서 구약 끝납니다. 구약의 끝 지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가고 안 하고는 그건 엘리야 소관이다 라는 것이 나타나요. 엘리야가 그 사람 마음에 찾아가서 돌이키면 아버지께로 가고 엘리야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안 돌이키면 그 사람은 그걸로 끝이 나는 거에요.

말라기의 이 마지막 대목은 그 당시 이스라엘 유대교로 하여금 어서 엘리야라는 분이 왔으면 좋겠다. 엘리야를 고대하고 엘리야 와서 본인의 역할을 다 해야 될게 아닙니까. 본인의 역할을 다해서 그냥 엘리야의 공로만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자녀가 되기를 그들은 학수고대했습니다.

자, 유대인들이 이 엘리야 오기를 기다리는데요. 그들이 엘리야 일에 협조했습니까? 협조 안했습니까? 큰 협조했습니다. 엘리야를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뭘 몰랐는가? 죽는 엘리야를 몰랐던 거에요. 죽는 엘리야. 참 이게 보통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지요. 내가 여기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다 해버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 돼요? 살아있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에요? 산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살아있어요. 살아있다와 살아있는 나와 관계 맺을 때 이걸 믿음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이미 살고자 하기 전부터 이미 죽어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내가 죽어있다면. 내가 죽어있다의 이 요소로 내가 되었기 때문에 죽어있다는 어떤 요소냐 하면은 하나님의 요소로서 내가 죽어있다가 돼요. 하나님의 요소로서. 죽는 하나님의 요소로서 내가 죽어있다는 관계로 나의 죽어있음을 이렇게 연결된다면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믿음인거에요.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내게 일어난 모든 것은 먼저 누가 있다? 하나님에게 먼저 있어서 그 다음 차례가 그 다음 순서가 나한테 주어졌다 이 관계가 믿음의 관계에요. 이 관계가 믿음의 관계라고요. 그런데 여기 말라기에 보면 여기 죽음 이야기 없어요. 죽음 이야기 없고 무슨 이야기 있느냐 하면은 그 대신 심판 이야기 있어요. 만약에 돌이키지 않으면 다 죽여버린다. 심판 이야기 나온다고요. 그러면 말라기에 나오는 엘리야가 활동하게 되면 자녀의 마음을 돌이키기 전에 무슨 이야기부터 먼저 운을 뗄까요? 심판 이야기부터 운을 떼는 거에요.

자, 아까 첫째 강의에서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일체 주님께서 다 묵살하는 거에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바로 심판이에요. 나의 가치, 나의 의미에 대해서 주께서 일체 듣지도 보지도 않는 거에요.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 자체를. 그게 심판이에요.

그러면 엘리야가 와서 활동할 때 심판을 언급하면서 먼저 활동한 분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엘리야보다 먼저 왔으되 너희들이 함부로 대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 어려울 게 뭐가 있느냐. 엘리야의 중첩이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요. 엘리야의 중첩이라는 것은 여러분 아시지요. 세례 요한도 엘리야고 그 뒤에 오시는 분 예수님도 엘리야에요.

세례 요한은 실패한 엘리야고 말라기에 나오는 자녀의 마음을 돌이키는데 성공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엘리야의 중첩에 대해서는 별로 이렇게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성도. 성도가 성경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뭡니까? 성도는 예수님과 주인이 뭐 됐다? 중첩됐다고 보는 거에요. 의인과 예수님이 중첩된 것이 아니고 죄인과 예수님이 중첩이 된 거에요. 중첩의 매개는 예수님의 죽음에 있습니다. 살과 피. “내 살과 피를 먹으면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 중첩되어있는 거에요. 연결되어있어요.

그러면 성도는 뭘 해야 되느냐 하면은 자기 죽음을 품지마시고 예수님 죽음을 품고 살아야 돼요. 예수님의 죽음을 품고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품고 살 때 자기 죽음도 중첩되어서 같이 품게 되겠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행위가 날 죽이는 행위인 것을 주께 감사하는 사람. 주님께서 내 이름을 지워버림으로서 그렇게 하시는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게 성도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사람. 주의 이름으로.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누구 이름을 안 부른다? 두 번 다시 내 이름 부르나 봐 이런 뜻이에요. 로마서 10장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나의 죽음과 주의 죽음을 품은 자에게는 다시 죽은 내 이름의 어떤 의미나 희망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내 희망도 주님의 희망이고 내 미래도 주님의 미래고 내 운명도 주님의 운명이지 따로 내 걸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거죠.

지금 제가 말라기 가지고 설명했지요. 마태복음 10장 한번 보겠습니다. 제가 미리 어렵다고 운을 뗐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좀 견뎌주셔야 돼요. 마태복음 11장 보겠습니다. 11장 20절에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를 누구 보고 전달하라고 합니까? 누구 보고? 지금 12제자보고 70명의 제자 보고 제자들 보고 이걸 전하라는 거에요. 그러면 제자 입장에서는 이미 심판이 이미 시행이 된 겁니까? 심판이 나중 것입니까? 제자 입장에서는 이미 제자가 등장했다는 예수님이 제자를 뽑았다는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는 이 심판 속에서 아무도 모든 인간이 심판 받는데 제자들은 무슨 빽이 있어가지고 심판에서 견뎌지는가? 제자들은 이 심판 속에 들어가야 돼요. 심판을 견뎌야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뭐냐 하면은 이 심판이 자기를 위한 심판으로 그걸 수용을 해줘야 돼요. 이게 어려운 거에요. 이게. 아이고 세상 망했다. 꼴좋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는 지켜주시겠지. 그런 건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 너희들 세상 물에 다 잠길 거야. 하지만 내가 가꾼 노아 집 채소밭은 물에 안 잠길 거야 이런 거 없잖아요. 노아도 마찬가지로 노아 살던 고향 어떻게 됐습니까? 깔끔하게 물에 다 잠겨버렸지요. 방주 아니면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아니면 우리도 마찬가지 입장인 것을 인정하는 자들이 제자들이에요. 제자들입니다.

이 땅에 당하는 이 모든 수난과 어려움은 우리도 똑같이 당하는데 그들은 찡그리고 짜증내지만 우리는 성도가 무어냐는 것, 예수님의 살과 피가 이 정도로 영생이었는가를 확인하는 그러한 계기가 되는 거에요. 이 어려움이. 기름 값 오른다. 물가 오른다. 다 힘들지요. 미국에 어떤 성도가 마트에 갔는데 강도를 만나가지고 애 하나 두고 부부 죽었다. 주위 사람들이 애도한다고 꽃 놓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무기는 자제해야 된다 이렇게 하잖아요.

죽은 사람이 성도인지 아닌지는 그건 모르겠는데요 만약에 성도라면 그렇게 주위에서 애석한 만큼 애석해합니까? 왜 강도가 저만 찾아옵니까 라는 말을 할 리가 있어요? 없어요? 그런 말 하면 안 되지요. 왜 물난리에 불자 집안 멀쩡합니까? 신자 집은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왜 떠내려가는가? 그렇게 반발하고 반항하면 아니지요.

요한계시록 한번 보겠습니다. 7장 14절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천국 갔는데 장로가 묻는 거에요. “흰옷 입은 자들 이리로 와. 초짜들아 어디서 왔어?” 하니까 “주여 당신이 알잖아요. 당신도 겪었으니까 알잖아요” 우리가 큰 환난에서 나오는데 “흰옷은 왜 흰옷이냐?” “어린양의 피로 씻었으니까 희지요”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유월절은 끝난 게 아니에요. 매일 유월절이에요. 매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어린양의 피의 가치를 위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주식이 폭락하고 물가가 오른다 내린다 뭐 대통령이 사교육을 어떻게 정한다 온 복잡한 뉴스 중에서 이 환난 중에서 우리는 거기서 뭐만 쳐다보느냐? 어린양의 피가 얼마나 대단한 효과가 있느냐.

우리 힘으로 이 세상을 헤엄쳐서 빠져나올 수가 있어요? 못 빠져나옵니다. 우리 힘으로 이 세상에서 물들지 않고 죄 안 짓고 살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남은 사재기해도 나는 사재기 안한다. 아주 배부른 소리죠. 힘들 때는 그런 거 없어요. 예배드리고 있는데 마트에서 마지막 소금 판다. 예배는 인터넷으로 드리면 되고.

산다는 것은 나만 산다는 뜻이에요. 우리 아는 사람만 산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것은 타인에 대한 강도짓입니다. 살인이죠. 남이 죽든 말든 그건 난 모르겠고 나만 행복하고 나만 즐거우면 그만인 거에요. 이게 산다 에요. 바로 그 지경 속에서 우리는 주께서 의인과 중첩되는 게 아니고 죄인과 중첩되는 거에요. 죄인과. 죄인이기 때문에 이 땅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시 받아야 될 우리의 삶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마태복음 11장을 다시 한번 봅시다. 11장에 보게 되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벌써 시돈과 두로와 가버나움이 이미 하나님의 멸망의 대상인 것을 이미 확정지었어요. 그러고 난 뒤에 오늘 누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봅시다. 37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라고 물었어요. “그날이 될 때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 대책이 없다는 뜻이에요. 어떠한 구원자도 싸그리 다 날라가버린 아무도 너도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나도 너를 구원할 수 없는 몰아세울 때에 제자들이 묻지요. “주여 언제입니까? 또 어디입니까?” 주여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을 당하냐고 묻지요. 그럴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여기 누가 나옵니까? 여기 두 가지가 나오죠. 하나는 독수리 또 하나는 시체.

내가 모든 인간 시체 만들기로 작심을 했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 시체에 대해서 증인노릇 하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정당하심을 보여주는 증언자로 뭐냐 독수리. 독수리가 모여드는 그 곳에 시체 뜯어먹을려고 독수리 모여들겠지요. 주님께서 유일하게 활동하는 것, 독수리와 활동하는 것 이건 뭐냐 하면은 바로 심판성을 끝까지 살아남는다.

이 세상의 운명이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심판받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끝까지 하나님의 심판성은 세상 끝장낼 때까지는 계속해서 활기차게 활동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엘리야로 오신 분이 하신 일이에요. 우리 주님 하신 일이에요. 이 사실에 동의를 해줘야 돼요. 왜냐 하면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가 알아서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을 이 심판성을 통해서 모조리 시체가 되는 입장에서 어느 누구도 벌떡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갈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복잡하다고 하지만 복잡한 게 아니고 깔끔해요. 간단합니다. 다 죽여줄게 그리고 구원받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해줄게. 이렇게 되는 거에요. 아주 깔끔하게 다 죽여줄게. 다 죽여줄게. 여기 한명도 예외 없게 해줄게. 모조리 다 죽여줄게. 그리고 살리는 것은 내가 죽고 난 뒤에 내 백성 내가 알아서 살려줄게.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여기 믿을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요.

이제 남은 시간 그 이야기를 합니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믿지 못할 이야기만 예수님께서 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 듣고 어떻게 살 궁리했던 사람들은 모조리 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손을 들어버리죠. 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해서 주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것도 다 떨어지게 한다는 사실. 엘리야가 할 일을 우리가 협조한다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그 예수님을 못 믿어요. 왜냐하면 타인이기 때문에. 내 몸이 아니잖아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야 되는데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해야 되는데 지금 예수님 말씀은 너는 못하고 내가 타인지요, 예수님 내가 한다고 할 때에 그냥 하시면 되는데 믿느냐고 이야기하거든요. 뭔가 내 쪽에서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으로 또 뭔가 지시를 요청을 하는 느낌을 준단 말이죠. 그런데 네가 믿느냐 하는 요청까지 우리는 못 합니다 라는 말이 뻔한 거에요. 뻔한 거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한수 배웠는지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주도권을 그거는 “에이~ 아시면서. 주께서 아시잖아요. 내가 주님 찾아 갔습니까? 십자가 이후에? 주님이 찾아 왔잖아요” 주님이 찾아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나를 건졌다는 뜻이잖아요. 아시면서 이런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이야기조차도 우리에게 위로가 안 되는 이유가 안 찾아오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 점을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구약에 나옵니다. 전도서 7장 어제나 오늘이나 주님이 나한테 온 적이 없어. 나는 주님 본 적도 없고 만난 경험도 없고. 권사님한테는 등만 보여주고 슥 지나갔다고 하는데. 우리가 예수님께서 오셔도 우리가 못 알아보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 하면은 육 더하기 영은 이게 성령의 사람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게 틀렸어요.

육 더하기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육 더하기 죽은 육이 성령이 돼요. 죽은 육. 예수님이죠. 육은 우리고. 우리에게 자꾸 이 육을 예수님이 십자가로 찾아와야 되는데 우리는 이 육을 앞에다가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은 살아있는 육이라고 본거에요. 살아있는 육. 살아있는 육이니까 영이 찾아올 때 살아있는 내가 확인 가능하다고 보는 거에요.

눈 달려있어서 뭐할 건데. 감각이 있다는 말은 누가 날 찾아오면 우리가 그 찾아옴을 느낀다는 말은 우리가 안 죽고 살아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 육을 살아있다고 보지를 않아요. 죽었다고 본거에요. 아무리 누가 다녀가도 죽은 자는 누가 다녀간 것을 감각이 없게 된 거에요.

그러면 주께서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죽음을 모르잖아요. 우리는 살았다고 우기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생각을 죽어도 못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육으로 오셔가지고 합류가 되어버리면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죽음을 모르겠는데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스냅사진, 확정된 내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린 육에서 그걸 발견케 하는 거에요.

십자가 죽어서 부활해서 예수님 아는 게 아니고 십자가 달린 채로 메시아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백부장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되기 이전에 아주 사흘 안 지났어요. 되기 이전에 십자가 달린 거 보고 하는 말이 저 분은 우리의 메시아다. 저 분은 진정한 의인이다 라고 고백한 백부장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올 거에요. 전도서 보기 전에 한번 보고 갈게요. 저는 20년 전인가 그 대목을 공부하면서 놀래버렸어요.

마태복음 17장 54절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뭐였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지금 여기서 예수님 부활한 거 아니에요. 그냥 십자가 달려있어요. 십자가 달려있는 거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긴 사람이 백부장 있고 또 유명한 사람 있어요. 달린 강도.

여러분이 강도라고 생각하고 한번 사고실험을 해보세요. 예수님 옆에 십자가 달렸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도 강도 짓하다가 걸려가지고 같이 달렸다고 칩시다. 우리는 거기서 활짝 웃겠습니까? 아 이 대목이었구나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한쪽 강도가 “오늘밤에 너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바로 이 대목이었네. 아! 이런 시추에이션 얼마나 기다렸다고~ 하면서 기다립니까? 실제로 한번 당해봐요?! 몸서리칩니다. 주여 이 방법 아니면 없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우리는 장담 못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괜찮은 실습을 통해서 내가 뭔가 해낼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주께서 다 좌절시킵니다. 성령은 다른 게 아니에요. 성령께서 우리는 살았다고 우기는 가운데서 죽은 예수님을 그래서 갈라디아서 장 아닙니까. “십자가 눈 앞에 보이거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는 이야기, 그 십자가 못 박혔다는 그것이 내가 미처 경험하지 않는 진짜 내 모습을 미리 중첩해서 보여줬다고 받아들이도록 성령께서 오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이렇게 오시는 거에요. 주님이.

주님이 멋들어지게 오는 게 아니고 아 이미 나 죽었구나. 주님이 오시게 되면 살아있는 주님을 만났다가 아니라 내가 죽은 자구나 하는 사실. 내가 중첩해서 죽었고 만약에 산 게 있다면 내가 산 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려내는 방식으로 하루 세 끼 주시고 일하게 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과 시선을 같이 하는 거에요.

독수리 안목을 이 세상이 다들 죽은 자 맞구나 라는 것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식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남은 할 일은 뭡니까? 내 몸이 죽는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의 육신의 활동 목숨 주시고 활동을 계속 하는 거에요. 왜 내가 죽어야 되는가? 같은 말로 왜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셔야 되는가? 그거는 뭐 죄를 짓기 위해서. 죄를 내놓기 위해서고 그 죄를 주께서 어떻게 처리했느냐를 날마다 환란 가운데 어린 양의 피로 씻기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자, 그런 이야기하면 쉬운데 이 본문을 해석 한번 해봅시다. 전도사 7장 1절부터 2절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절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절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모든 인간 죽는다는 교훈 받으면 되지 뭐 어렵냐 하는데 문제는 뭐냐? 이게 구약에 있거든요. 구약에 초상집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에 오게 되면 구약 전체가 완성이 되어버려요. 이 세상 전부가 다 초상집이 되어버립니다. 여기 초상집의 주인공은 역시 죽은 자가 주인공이죠. 이 초상집에 가는 게 낫다. 앞으로 잘 대비하라 구약입니다.

신약은 이미 네 초상은 치뤘어. 너는 장례 치뤘어. 신약입니다. 바로 신약성경의 완성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마치 인간에게 어떤 육적인 가능성을 내비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지적하시고 인간의 힘으로서는 말씀을 지켜서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생활하면서 이 전도서를 보고 또는 구약 성경을 우리는 대해야되는 거죠. 대하면서 우리는 뭘 느낍니까? ‘역시 파티보다 초상집 가야지’라는 생각을 가지지요.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거에요. 이미 초상 치뤘는데 무슨 초상집을 가요. 어떤 집에 가도 초상집에 가도 내가 죽은 자고 잔치집에 가도 내가 죽은 자라는 인식이 전도서 7장 1절과 4절에 이미 성취성이 이미 우리 안에 포함된 거에요.

왜? 그래서 예수님의 성취가 되니까요. 예수님은 엘리야로서 이미 우리를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께 이미 돌렸어요. 이미 돌렸습니다. 돌리고 난 뒤에 이미 우리를 거기에 합세시킨 거에요. 그러면 우리의 관점은 뭐냐? 우리의 관점은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12제자를 전도했다 하잖아요. 예수님이 12제자를 전도했잖아요. 마태복음 10장 11장에서. 이걸 바꿔도 괜찮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전도하라고 보낸 것하고 똑같은 같은 안목이기 때문에 이게 성립하는 거에요. 예수님. 왜? 세상 지옥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주님 가서 좀 전도하시면 안 됩니까? 이 심정은 예수님께서 성령 오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심정으로 그걸 보낸 거에요. 그때 제자들은 몰랐어요.

세상이 이미 심판 속에 있어서 오직 내 백성 건지기 위해서 심판을 인정하는 자만 건진다는 이 사실을 차원에서 주께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나중에 성령을 받고난 뒤에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죽음이 내 죽음이고 십자가 죽음으로 내가 이미 주님의 스냅사진, 흑백사진 찰칵하는 사진에 이미 모든 시간이 동격으로 독수리 날개 함께 있음을 알 때 우리는 예수님 보고 지시할 수는 없지만 아 이 마음이었구나. 주께서 세상에 12제자 보낼 때 세상이 이미 맛이 갔다는 것을 뻔히 확정하시고 주께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이제는 아는 거에요.

목사님 이렇게 알면 우리한테 도움 되는 거 뭐가 있습니까? 그렇게 알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주눅 들지 않고 내 인생에 대해서 두려워하지도 벌벌 떨지도 않지요. 확정되었으니까. 제가 오후설교 때 액자 이야기 기억납니까? 액자 하나 만들라고 했지요. 액자에 내용이 뭡니까? 너 실수중이야. 어떻게? 단호하게. 가로 열고 기죽지 않고. 가로 열고 일체 부러움 없이. 너 실수 중이야. 너 인생 실수하고 있어.

이렇게 단호하게 지적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악마한테 약점 잡힐 일이 있다? 없다? 없지요. 주님과 사진 같이 찍었는데 뭐. 주님과 사진을 같이 찍어버렸잖아요.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악마로부터 약점 잡힐 일이 없다니까요. 악마한테 약점 잡힌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칸트 같은 사람. 계속 네 마음에 양심이 있다면 바르게 살아야지. 이게 약점이에요 이게. 이게 약점이라고요.

모든 것을 묵살해버리는데 뭐. 우리가 할 것도 없고 또 할 재주도 있다? 없다? 할 재주도 없어요.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기 나름이지 우리가 할 건 없어요. 이미 세상은 끝났어요. 그러니까 너는 실수중이야. 또는 제가 한 마디 더했어요. 너 실패하고 있어. 돈 잘 벌어가지고 룰루랄라 신바람 났는데 돈 잘 버는 그 현장에 가가지고 너 지금 실패하고 있는 중이야.

그럼 저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 뭐야!” 이럴 거 아닙니까. “나 성도야” 혼자 미쳤다 혼자 미쳤어. 욕 바가지 바가지 얻어먹지.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우리 일상에 사람을 만나잖아요. 만날 때 기죽지 말고 주눅 들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고. 부러워하면 지는 겁니다.

부러워하지 말고 아 나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지 말고 주일날 설교처럼 잠깐만 뒤돌아보세요. 꼬리 한번 봅시다. 여우 꼬리인지 예수님 복음 꼬리인지. 주님의 긴 꼬리 살랑살랑 흔들면서 마음껏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유일한 자유자는 이글(eagle), 독수리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자유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독수리 날개 업어서 이 세상 자체에서 우리를 구원했던 주의 말씀이 이제는 우리 자신에게 유일한 현실이 되고 실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말고 모든 일을 주께서 활발하게 벌리고 있는 이 심판에 대해서 박수치고 찬송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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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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