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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강의20230713a 요한일서 2장 7절(새 계명)-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일서

서울강의20230713a 요한일서 2장 7절(새 계명)-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2장 7절부터 하겠습니다. “(7)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사도 요한이 계명을 언급해요. 자, 그러면 이 계명이 뭐냐? 계명을 어떻게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겠죠.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계명이란 모든 변화를 (툴툴) 떨어버리는 것] 계명이란 모든 변화를 다 툴툴, 오른쪽으로 털고 왼쪽으로 털고, 아무 데로 털어도 모든 변화를 다 떨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계명의 세계에요.

그래서 계명은 계명만 남기고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가야 됩니다. 모든 변화를 떨어버린다 했는데 이 변화에 무엇이 달라붙느냐 하면 우리의 해석이 달라붙어요. 나의 해석.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에 대해서 인간은 쉬지도 않고 계속 해석을 해대는 거예요.

‘이렇게 대처하면 어떨까? 이런 경우 있을 때 난 어떻게 반응을 보이면 제대로 반응을 보이는 건가?’ 해석들이 이 모든 변화에 달라붙어요. 해석이라는 것은 나의 선입견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갖고 있는. 선입견이라는 것은 나의 기억에 축적되어 있는 세상 이해. 내 기억 속에 축적되어 있는 세상 이해.

부산강의에서 제가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만약에 어떤 20대 아가씨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투피스 입고, 원피스는 안되고 투피스를 입고 살랑살랑 춤을 춘다. 그렇게 하면 사람이 귀여워 보인다는 것을 누구한테 배운 거죠? 어디서 배운 거죠? 어릴 때 동화책에서 봤죠. 동화책에 나오는 볼록 소매부터 해서 옷 입고… 그때 내가 백설 공주의 옷차림이나 이런 동화책 주인공의 옷을 보면서 참 예쁘다, 귀엽다 했을 때 ‘언젠가 나도 크면 저런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예쁘다는 소리를 한번 듣고 싶다.’ 하는 그런 게 있겠죠.

그런데 그 아가씨가 고려하지 못한 것은 살랑살랑 춤출 때 그 밑이 지뢰밭이었다는 거예요. 지뢰 밟았다는 겁니다. 지뢰를 밟은 거죠. 원피스 투피스 다 찢어져버리죠. 쓰리피스 되고 다 찢어져버리죠. 살랑살랑 예뻐 보이는 거 완전히 얼굴 시커멓게 갈려서 예뻐 보이는 것도 없죠.

그 아가씨가 갖고 있던 선입감, 선입견을 저 계명이 용납 안 해요. 모든 인간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 해석을 가지고 달려들고 그 해석은 어디서 나온다? 나의 선입견에서 나오고, 나의 선입견은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서 축적된 기억에서 나오죠.

[계명이란 모든 변화를 떨어버린다] 했는데 ‘계명이란’과 ‘떨어버린다’ 이 둘을 빼보잔 말이죠. 이 둘을 빼보는 거예요. 이 둘을 빼면 [모든 변화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갖다 붙인다.]가 되겠죠. 모든 변화에 대해서.

그럼 여기다 계명을 다시 투입하는 거예요. 계명은 인간의 모든 선입견을 툴툴 떨어버린다는 말은, [모든 선입견을 반납하라]는 거예요. 너에게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서 네가 해석하거나 해명할 권한과 자격은 없다. 괜히 자기가 해석해놓고 자기가 부들부들 떨고 살아가요, 인생을. 어째, 어째. 나 어쩌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자기 의미를 챙기기 위해서 있었던 그 해석을 계명은 왜 용납하지 않는가? 계명 자체가 우리 인간이 모르는 사실을 그 안에 이미 품고 있어요. 그게 2장 7절에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계명은 줄곧 있었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너희들은 계명의 세계와 떨어질 수 없는, 떨어져 살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 계명이 뭐냐 하면 7절에 ‘옛 계명’이라 하는 겁니다.

내가 새 계명 쓰는 게 아니고 옛 계명이 너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너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어디에 기초를 두고 일어나는 변화다? 옛 계명에 준해서 일어나는 변화일 뿐이라는 겁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계명, 율법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듣는 성도들에게 부담을 준다든지 불편함을 주려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반대로 네가, 나의 해석= 개인적 해석이죠,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하는 본인의 해석이 변화에 후달리게 만든다는 겁니다. 본인의 해석이. ‘나 잘했어, 못했어? 행동 똑바로 했어, 안했어? 아휴, 다음에는 행동 똑바로 해야지. 나 행동 똑바로 안 해서 이런 사단 났고 이런 결과 나왔으니까 다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돼? 아휴, 골치 아프네.’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어떤 해결을 지으려고 할 때,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보려고 하는 그 자세 자체가 아직 덜 떨어냈다는 거예요, 덜. 계명의 세계인데 너는 나 하나만 챙기는 세계로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좀 난해하게 하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일단 난해하지 않게 표현하게 되면, 인간은 세상을 바라보며 있죠. 그리고 인간을 둘러싼 세계가 있고. 인간은 여기에 대해서 해석합니다. 해석을 하는데 여기 세계에서 뭐가 일어난다 했어요? 숱한 변화가 일어나고 해석을 함으로써 인간은 여기에 대해 대처를 하려고 합니다. 대처해서 뭐하는데? 대처해서 뭐 할 건데요?

성경은 보통 사람들의 이런 구조에 대해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너무나 상식적이고 누가 봐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구조가 사도 요한한테는 그것은 네가 지금 엉뚱한 꿈에서 만들어낸 구조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이건 세상을 잘못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세상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 세상, 여기다 계명을 집어넣어요. 이 전체가 계명이 되는 겁니다. 계명이 되면 계명은 여기서 대칭성을 유발해요. 자, 초장부터 슬슬 어렵기 시작합니다. 지금 나만 어려운 것 같아요. 계명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계명은 대칭성을 유발합니다. 대칭성을 낳는다. 대칭성은 마주치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 대칭성은 뭐냐? 여러분들이 잘 아는 빛, 대칭되는 건 뭡니까? 어두움. 진리, 대칭되는 것은 죄. 나, 대칭되는 것은 형제 또는 우리. ‘나’라는 단수 하나, 개인. 우리는 집단. 이렇게 나눠요. 계명은 대칭성을 이룹니다. 계명은 대칭성을 이루는데 빛과 어두움 사이에 투쟁, 전투, 전쟁, 같은 말이에요, 싸움. 진리와 죄 사이에서는 똑같이 투쟁, 전투, 전쟁, 싸움. 나와 형제 간에 투쟁, 전투, 전쟁, 싸움.

투쟁, 전투, 전쟁, 싸움
/
빛 ↔ 어두움
진리 ↔ 죄
형제(우리) ↔ 나

신앙생활은 수비하는 게 아니고 공격하는 거예요. 만약 수비하면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고 안하고 있고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이유는 계명가지고 상대방을 공격 안하니까 그런 거예요. ‘나 하나만 편하면 되지. 돈 벌어먹고 살고 아파트 하나 사서 살면 되지 뭐.’ 이게 공격입니까? 이건 수비잖아요, 수비. 계명에는 대칭성이 있는 거예요, 대칭성.

죄↔진리라 할 때 성경에서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이라 해요. 이것이 1장 10절에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했죠. 하나님 앞에 짝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이 범죄자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럼 인간만 손해가 아니냐? 인간만 손해라 생각하지 말고 그걸 통해서 계명의 세계가 수립되는 겁니다. 계명의 세계가. 계명은 대칭성을 유발하니까요. 내가 죄인이고… 내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 했으니까 우리가 범죄한 것 맞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범죄하게 되게 되면 좋은 점이 나는 계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계명에서.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거죠. “너는 왜 혼자 안살아? 너는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살아. 아무도 너를 대신해서 살려주는 사람 없어.” 그러면 성도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마귀나 불신자보고 말하기를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살려주는 사람 없다고 하는 것을 네가 증명해보라.” 하면 불신자가 와락 화를 내죠. “그걸 굳이 증명해, 그걸? 그거 뻔한 거잖아. 아무나 물어봐. 네 인생 누가 살았냐고.” “내가 살았다.” “그거 봐. 2번 타자. 당신 누가 살았나?” “내가 살았다.” 3번 타자, 4번 타자, 홈런 타자까지 다 튀어나와요.

물어봐요, 인생 그동안 누가 살렸는지. 내가 살렸잖아요. 내가. 우리가 아니에요, 나에요. 우리가 아니고. 나 죄인 아니에요. 열심히 사는 게 왜 죄입니까? 진리죠. 내가 열심히 사는 게 진리에요. 어둡다니? 1.2, 1.2에요. 뭘 어두워? 훤하니 밝은데.

우리는 대칭을 없애버려요. 대칭을 없애고 나 하나 편하면 돼요. 나 하나 편하면. 나 하나 편하면 되기 때문에 나한테 내가 책임자가 돼요. 나한테 내가 책임자가 되게 되면 그다음부터 우리의 할 일은 뭐냐? 어떻게 살아가는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들어가면 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 하면서 또는 대학교 졸업생들 모아놓고 말합니다. “앞으로 사회가 너희를 기다린다.” “교수님 혹은 강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물으면 여러분들이 강사라면 뭐라고 이야기해요? “세상은 당신이 대처하는 것에 따라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무수한 변화가 있습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무수한 변화가 있습니다. 변화에 대해 지혜롭게 처신하셔서 빨리 당신의 안정된 자리를 마련하시면 거기서 키워나가면 거기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 겁니다.” 박수~ 끝나고 간식시간에 빵하고 우유 나눠주면서 맛있는 만나 주시면서…

계명을 떼버리고 계명 완전히 무시하고 성경 다 덮고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너무나 우리는 많이 봐왔고 많이 경험했고 많은 대화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대칭성이 없고 나 단독성이라는 겁니다. 대칭성이 아니고 단독성.

그들이 그렇게 고상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제가 오늘 이 시간에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고상하게 품위 있는 단어, 문장 쓸 거, 그렇게 쓸 필요 없어요. 간단하니까 크게 쓰겠어요. [엄마 보고 싶어! 집에 갈래.] 이겁니다, 인간의 본심은. 그들은 나이가 90돼도, 아직 80은 모르겠지만 90이 돼도 엄마 품을 못 잊습니다, 인간은.

‘엄마 보고 싶어. 나 집에 갈래.’를 확장시키면 세계에서 유명한 영국의 도서관, 뉴욕의 도서관에 있는 책 전부입니다, 이게. 그 수십만 권의 책을, 서울대학교에 있는 도서관의 책을 압축해보면 딱 이거 나와요. 엄마 보고 싶어. 나 집에 갈래.

엄마를 잊지 못해요. 왜냐하면 엄마 품에서 태어났고 자랐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것부터 시작해요, 출발점이. 계명이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서 시작했는가 그들은 놓쳐버렸어요. 잊어버렸어요. 그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계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보다 먼저 있던 것을 아주 그냥 무심코 본의 아니게 또는 본인의 뜻에 의해서 그걸 잘라 내버려요.

잘라 내버리고 엄마와 더불어 시작했던 자기 인생을 그것이 자기의 시작이라 여기고, 엄마같이 자비롭고 엄마같이 다정하고 엄마같이 날 위해주고 엄마같이 무조건 칭찬하고 엄마같이 모든 아쉽고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는 그런 엄마의 세계를 현실화하는 데에 혼신의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엄마 보고 싶어서 나이 40이 되고 50이 돼도 60이 돼도 70이 돼도 ‘엄마 보고 싶어! 집에 갈래.’ 하는 이것 때문에 여기서 인간은 나오는 게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나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눈물이에요.

계명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냉혹하죠. 계명은 냉혹해요. 어디서 찔찔 짜고 있어? 어디서. 뭔데 네가 찔찔 짜고 있어? 눈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흘린 눈물은 인간이 흘린 눈물의 차원이 아니죠. 어디 자기 연민에 빠져가지고. 하여튼 사도 요한은 못됐어. 참 못됐다. 진짜 못됐어요, 사도 요한은. 목석도 아니고 뭐야? 기계야? AI인가? 도대체 뭐 믿고 왜 우냐 이 말이죠.

방금 이야기했는데, 우는 이유가 뭐라고요? 마음 같으면 따라 하라 하고 싶은데 참습니다. 엄마 보고 싶어! 날 무조건 품어주고 날 예뻐해주고 모든 걸 용서하고 나를 영원토록 안아주는 그 사랑이 그리워. 그 사랑이 있는 곳이 뭡니까? 집. 집에 간다 했잖아요.

주일 낮 설교에서는 집에 간다 할 때 이 집을 바로 안식처라 했어요. 인간의 모든 종교, 인간의 모든 시도, 사회생활은 궁극적으로 나를 나답게 편안하게 모실 안식처를 장만하고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데에 인생을 다 보냅니다. 안식처를 마련하느라고. 이걸 여섯 자로 이야기하면, 둥지를 틀어봐. 남진 장로님이 노래한 것처럼 둥지를 틀어봐. 내 품에서 둥지를 틀어봐.

엄마 보고 싶어. 맨날 찔찔 짜고 울고. 사회에서 좀 잘된다 싶으면, 자랑해야지. 누구한테? 엄마한테. 그러니까 이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은 안 죽었어요. 세상에 있는 내가 좋아했던 그 시절의 아빠, 엄마. 심지어 나를 학대한 아빠, 엄마라 할지라도 학대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내가 진짜 원하는 엄마상은 엄마한테 학대당하는 가운데서도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엄마한테 칭찬 들어야지. 엄마가 잘했다고 사랑해주겠지.

결국 인간은 어릴 때 유아적 인식에서 한 치도 빠져나와본 적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는 인간은 전혀 관심도 없고 아는 바도 없습니다.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은 모든 것을 대칭성으로 만들었어요.

진리 아니면 무조건 죄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주변에 거짓말을 유발시켜서 진리를 돌출시키죠. 진리와 나머지를 차이 나게 만들어버립니다. 빛은 어떻게 나오는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어두움으로 만들어버려요. 아까 한 개 더 있었죠. 우리라는 것은 어떻게 생기는가? 나 위주로부터 핍박받고 박해당하는 모습으로 우리가 발생되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사도 요한의 계명에 대해서 접근하는 방법은 뭐냐? 이게 무지무지하게 난해해요, 접근하는 방법. [too late. 너무 늦었다.]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거예요. 이미 일 다 했는데. 계명이, 옛 계명이 새 계명으로 바뀌어버렸어요. 그러면 인간들은 새 계명으로 확정된 거기에 대해서 내가 기여한 바가 아예 없습니다. 기여한 바가 없으면 그냥 적용만 받아야 돼요.

예를 들어 손님 온다고 가정주부가 잡채를 만드는데 뒤늦게 “아이고, 동서 내가 할게.” “다 했는데?” “다 했어?” “형님, 다 했어요.” 다 했으면 그다음부턴 ‘네가 했구나.’하면 안 되고 그냥 맛있게 먹어주면 돼요. 기여하지를 못한다면 맛있게 잡숴주시면 돼요. 그게 적용이에요. 새 계명의 적용을 감사하고 만끽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겁니다.

왜 받아들여야 되는가? 그걸 물으신다면 제가 아까 이야기드렸어요. 계명은 어떤 변화에 대해서 사적인 우리의 해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계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내 중심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그럼 옛 계명에서 새 계명으로 어떻게 전이되었습니까? 바뀌어졌습니까? 그걸 이제 알면 되죠. 어쨌든 우리는 아니에요. 우리는 기여한 바 없습니다. 새 계명에 우리가 보태준 건 없어요. 그러면 인간이 보태준 게 없다는 말은 옛 계명에서 새 계명으로 전환되는 데에 그 계명을 만드신 하나님 내부에 사정이 있어서 옛 계명에서 새 계명으로 바뀌어진 거예요.

자, 그거 말씀드리기 전에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해봅시다. 엄마, 없습니다. 엄마 죽었습니다. 살아있어도 죽은 거예요. 엄마 보고 싶어, 이런 거 안돼요. ‘엄마 보고 싶어’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계명 보고 싶어’에요.

아, 이거 아주 너무 냉혈한… 차갑고. ‘엄마 보고 싶어’는 사람 사는 거 같아요. 따뜻한 정이 있어요. 막 36.5°C 같아요. 그런데 ‘계명 보고 싶어’ 이건 뭐 AI에요. 만져보면 철판이라. 온도는 12.4°C. 이건 인간이 아니고 로봇 같아. 전혀 인간미가 하나도 없어요. 계명 보고 싶어. 어디 뭐 계명대 아니고 계명 보고 싶어. 이게 됩니까? 이런 사람 봤어요?

또 하나. ‘집에 가고 싶어’ 이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계명 속에 들어가고 싶어’. 계명 안에 들어가서 무슨 기대할 게 있다고 그 안에 기어 들어가냐. 계명 안에 들어가서 뭐 할 건데? 요한일서에서는 계명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사귐.

그러니까 요한일서가, 아까 여러분들이 읽어봤잖아요. 무슨 말하는지 여러분들 감이 옵니까?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요한일서가 읽어봐도 감이 오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뭐 요한복음도 쳐줍시다, 이 복음서에는 인간의 따뜻한 면이 있어요. 인간의 따뜻한 면.

표피, 제일 위에가 계명이라 합시다. 이게 완성이니까 완성된 계명, 이걸 새 계명이라 하죠.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이라 합니다. 여기에 누가복음 1장, 2장, 3장, 4장,… 마태복음 1장, 2장, 3장, 4장,… 마가복음 1장, 2장, 3장, 4장,…이 (표피 아래에서) 쭉 올라오면서 예수님이 동시대에 인간들과 같이 어울리기도 하고 부대끼기도 하고 서로 이야기도 주고받고 사람 살아가는 맛이 나잖아요, 여기는. 그런데 요한일서, 이서, 삼서에서는 이 복음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 이거 다 알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다 알지?’ 라고 하는 거예요.

마치 수학 정석 해답지 보는 거예요, 해답지. 문제지는 말고 뒤에 해답 있잖아요. 1번에 √3, 2번에 1/3, 3번 -5. 무슨 재미있어요? 뭐가 재미있어요, 그게? 해답만 있는데. 요한일서는 1번에 계명, 2번에 계명, 3번에 계명. 이게 뭐가 재미있습니까?

그런데 요한일서는 뭐라고 보느냐 하면 지금 여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공관복음의 모든 이야기는 새 언약, 새 계명이 확정되기 전에 전환기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라 보는 거예요. 최종 마감이 아니고 최종 결론 부분이 아니고 뒤섞여서 어느 것이 주님 쪽인지 어느 것이 마귀 쪽인지 헷갈리게 되는 그러한 과도기적 시기를 보낸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최종적으로 새 계명, 새 언약이 이루어졌단 말이죠.

그럴 때 인간들이 ‘나 사도 요한이 말하는 새 계명 믿고 싶어.’하면 Too late. 너무 늦은 거예요. 너무 늦었다는 말은 너 실패했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더는 네 것을 네 행함을 거기다가 보탤 게 없다는 거예요. 내 행함을 보탤 게 없다는 거예요.

보탤 게 없으면 계명을 아는 사람은 뭐하면 되는가? 이게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아, 이거 너무 중요한 건데…… 빼지 말고 또 알려 드릴게요. [우리(성도)는 매일 삶을 통해서 새로운 계명을 만들면 된다.] 새로운 계명을 만들어 가면 돼요. 어떻게? 어두움을 공격하면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제자들 있잖아요. 그 제자들이 여러분, 공격적으로 보입니까, 수비적으로 보입니까? 수비적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싫어서 그래요. 예수님한테 딱 들어붙어가지고. 자, 예수님한테 딱 들어붙었다, 이걸 제가 아까 크게 썼잖아요, 예수님한테 딱 들어붙었다는 말을 뭐라고 했습니까? 엄마 보고 싶어. 집에 갈래.

예수 그리스도가, 어릴 때 무조건 자기를 위해줬던 엄마 같은 분인 거예요. 아빠 같은 분이고. 그리고 그거 잘하게 되면 어디 간다? 영원한 안식처, 천국 가는 거예요. 영원한 집에 갈 수 있는 거예요. 그걸 노렸던 겁니다, 제자들이. 노렸던 게 아니고 아예 그게 인간의 본심이죠.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내가 할 게 뭔가를 찾는 거예요. 예수님이 변화산에 나타날 때 베드로는 ‘농막 세 채 짓고 여기서 삽시다’ 나름대로의 성의를 표시한 겁니다, 성의를. 그리고 아까 안양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이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그러면 내가 용서를 몇 번하면 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넉넉하게 용서한 겁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내가 남에게 용서를 해주면 남에게 용서했다는 나의 기여도에 의해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자가 되죠. 그럼 용서받는다는 말은 어릴 때 엄마한테 ‘잘했어. 잘했어. 잘했어. 내가 너한테 맛있는 사탕 줄게. 떡 줄게.’ 라고 했던 인간의 자아가 잉태된, 자아를 품어낸 그 환경의 기억을 인간은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때 성립된 해석, 세상 보는 관점을 그대로 예수님에게도 같이 연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욱하고 감정이 올라오는 것.

그러니까 이 완성된 계명에, 표피에, 예수님의 살과 피, 이걸 요한일서에서는 화목제물이라 하는데 그 완성된 새 계명, 새 언약에 뒤늦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랍시고 들어가게 되면 이건 too late. 너무 늦었어요. 이미 다 끝났어요. 모든 게 끝났어요.

그럼 끝났으면 우리는 기여도 하지 못했고 뭔가 보태지도 못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내치면 그럼 군말 않고 지옥 가야 되느냐? 그게 아니에요. 새 계명 안에 주께서 사귐이라는 관계를 거기서 만들어냅니다. 새 계명 안에. 사귐이 있어가지고 새 계명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사귀게 되면 그 사람은 행동 하나 하나가 이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자녀가 되가지고 계명을 만들어내요. 새 계명을 만들어내요.

새 계명의 특징은 새 계명이 있고 추가적으로 또 계명이 생기는 게 아니고 확정된 새 계명에, 고급스런 표현으로 유도리, 융통성이 없어요. 이미 그 새 계명에 대해서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새 계명, 그게 사랑이라 했어요. 그러나 사랑은 너무 모호해요. 사랑.

자, 여기서 사랑이 뭔지 사랑을 언급해야 될 타이밍이 왔죠. 사랑이라 해서 또 아가서 끄집어내려고? 아니 아니, 아가서 안 끄집어내요. [사랑은 계명이 필요치 않은 것] 새 계명의 특징은 계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계명은 옛 계명에 속한다는 겁니다. 사랑은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게 아니에요. 계명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사랑은.

전 세계를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새 계명에 왜 계명이 들어가지 않는가? 그것은 옛 계명의 취지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이 점점 더 깊이, 이제 깊이까지 따라오셔야 됩니다. 옛 계명의 취지가 뭐냐 하면, [옛 계명의 취지는 계명적이다.]

옛 계명은 계명적이에요. 옛 계명이라 하면 여러분들 잘 아시는 게 뭡니까? 십계명이에요. 계명적이라는 것은 십계명 자체는 사랑이 아니고 사랑의 반대인 저주용이에요. ‘엄마 보고 싶어. 집에 갈래.’ 하면, 이리와. 너는 지옥이나 가.

새 계명이 융통성이 없다고 우리가 비난할 게 아니고 옛 계명 자체가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근무소니까. 휴전선 철책을 지키는 보초가 있죠. 보초 있는데 어떤 라이더, 오토바이 타는 사람이 와서 “내가 마지막 철책선 보러 갑니다.” 할 때 “안 됩니다. 못 갑니다.” “내가 저 멀리 울산서 왔는데 못 가나? 멀리 밑에서부터 왔는데 좀 봐주세요.” “안됩니다.” “봐달라니까!” 하고 무슨 욕을 했죠. 총쏴버립니다. 4박5일 포상휴가 받습니다.

지금 초소군인하고 오토바이 타는 사람이 사귀는 문제가 아니에요. 일가친척 문제도 아니에요. 계명은 아무하고도 안 사귑니다. 너무나 냉정해요. 십계명이 너무나 냉정하다고요. 여기서 어느 정도 냉정한지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찾은 것은 출애굽기 15장입니다.

15장 22절,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있었어요. 물이 있었는데 ‘야, 물이다!’ 하고 마셨는데, 물이 없는 게 아니고 물이 있는데 마시지 못했어요. 마시면 죽어요.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마라’라고 했어요. 쓰다 이 말이죠.

자, 이게 뭡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한텐 물이 필요합니다. 왜? 어릴 때 엄마는 목마를 때 물을 줬기 때문에. 엄마 같은 하나님,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님, 우리를 못 살려줘서 환장하신 하나님, 우리를 기어이 살리려고 애를 쓰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 인간은 바깥에 해석을 할 때 어릴 때 내가 포근하게 살아온 엄마 품, 아빠 품에 있었던 거기에 대한 염원을 자기가 담아서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그냥 해석하지 않습니다. 나한테 유리한가, 불리한가 해석하는데 유리한 것은 엄마 같은 상황. 불리한 것은 내가 버림받은 상황, 이게 불리한 거예요.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강의하는데 교인 수 얼마 안 나왔다. 이 분이 날 버렸구나. 삐침. 많이 왔다. 아이고, 날 사랑하는구나. 이러한 감정변화가 어디서 오는 거예요? 이미 경험했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물 없다고 난리치니까 물을 주는데 못 마셔요. 물 없는 것도 약 오르는데 물이 있게 해서 약 더 올려버려요. 물 줬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을 줘야지. 이게 뭐야, 도대체! 물 있으면서도 못 먹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24절에 보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뭐해요? 하나님께 원망하죠.

드디어 계명에 의하면 옛 계명에 의하면 그들은 죄인으로 노출되었습니다. 옛 계명은 드디어 성공한 거예요. 걸려들었어, 너희들! 너희들은 엄마 사랑만 알지. 네가 죄인인 것을 모르잖아. 네가 죽어 마땅한 것을 모르지.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죽여버리는 거예요. 마땅히 죽여줘야 돼요. 마땅히.

그래서 물은 없지, 물 있는데 먹지도 못하지. 그 순간 모든 이스라엘은 죽었습니다. 일단 죽었어요. 일단이든 이단이든 무조건 그들은 죽었어요. 그리고 그 죽음이 물이 없어 죽은 게 아니고 그들 내부에, 하나님이 나를 지켜줘야 될 하나님인데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한 전투, 투쟁의식. 이게 인간이 죽어 마땅한 요소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가면서 들추어내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2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물이 쓴데, 쓴 물이에요. 못 먹는 게 이미 확정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무를 그 쓴 물에 던지니까 물이 어떻게 됐습니까? 마실 수 있는 물이 되었어요.

인간들은 엄마 같은 하나님과 자식 같은 나, 두 같은 부류가 있으면 그걸로 됐다는 거예요. 그걸로 이 세상 해석에 대해서 무난하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거기다가 뭘 집어넣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집어넣어버려요. 이게 십계명 받기 전에 원천이에요. 계명의 원천은, 그들로 하여금 살 가치도 없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가운데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살 가치 없는 이유가 그들 속에 언제든지 하나님을 원망할 만한 마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마음, [인간의 마음은 부러지지 않고 멈추지도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부러지지도 않고 멈춰지지도 않습니다.

인간이 뭐 하나님 알아서 잘 믿는다고요? 자기 마음이 얼마나 폭거적인지 몰라서 그래요. 내 마음이 얼마나 성질 더러운지를 본인이 인정 못해요. 그냥 내질러버리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은 뚝 부러지면 좋겠는데 인간의 마음은 부러지지도 않아요. 감당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걸 하나님의 계명이 이스라엘에게 왔을 때, 이스라엘 속에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동행하시는 주님의 계명이 아니면 어떻게 이걸 발췌해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옛 계명에서 새 계명으로 스스로 하나님 안에서 전환되느냐 그걸 보자는 겁니다.

인간이 타인에 대해서도 폭력적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도 폭력적이라 하는 것은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 사랑받는다 해서 때려죽여버리잖아요. 하나님 사랑받는다고. 왜 내 제물은 안 받고 동생 제물은 받느냐고 동생을 때려죽인 거예요. 동생을 때려죽이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이 나타나면 하나님도 때려죽인다는 뜻이에요. 그런 마음이 인간 속에 있고 그 마음은 부러지거나 멈춰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브레이크 강하게 걸어서 내 마음 멈춰서 하나님 섬기겠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 결심 따라서 새 마음 바뀌어지는 게 아니에요. 인간의 마음은 최백호입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내 마음을 주워 담을 수가 없어요. 내 마음이 통제가 안 됩니다.

26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안양강의도 비슷한 이야기인데요.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자, 이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냐?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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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2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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